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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나그네의 낡은 지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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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관함 스크랩 28. 14세기 유럽의 위기-흑사병
AceRed 추천 0 조회 28 09.12.28 22:18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28. 14세기 유럽의 위기               이길상

 

가. 재난(災難)과 광기(狂氣)

 

(1) 흑사병(黑死病/Black Death)의 내습(來襲)

 

페스트의 침입 경로페스트(pest/plague)를 흑사병(黑死病)이라고부르는 것은 이 역병(疫病)이 14세기 중엽, 유럽을 강타했을 때,

 

당시 사람들은 세균에 대한 지식이나, 전염 경로을 전혀 몰랐고, 다만 발병 며칠만에 사망(死亡)하는 아주 무서운 병으로, 검은 물집이 생기면서 피부 전체가 사색(死色)으로 변화면서 죽어갔기 때문에 붙여진 이다.

 

이 문제의 사신(死神)이 언제 어디서 발생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고, 다만 그리스트교 세계에서는 이병을 처음 보았기 때문에, 이교도가 사는 이집트나 아시아에서 발생하여 유럽으로 들어왔다고 생각했던 것이 당시 사람들의 판단이었다.

 

그리고 신이 내린 재앙(災殃)으로 받아 들였기 때문에 신의 노여움을 푸는 것이 일차적인 치료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위의 지도는 페스트의 전파 경로를 추적하여 만들어진것입니다. 이 반갑지 못한 손님이 유럽 구석진 곳까지 빠짐없이 방문한 것 같습니다.)

 

페스트를 싣고 왔을 지중해의 상선지금에 와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이 역병이 1346~7년 경, 흑해의 크림(Crimea)반도 남부 연안에서시작하여,

 

흑해, 콘스탄티노플, 보스포르스와 다니다엘즈 해협을 거쳐 에게해를 지나면서 그 주변과 이오니아 지방을 강타,

 

다시 지중해로 들어와 시칠리아의 멧시나에 상륙하였던 것이 확실한데, 이렇게 보면 이 길이 당시의 주요 통상(通商) 항로(航路)였고, 뱃길을 따라 유럽에 전파되었던 것이 분명해 진다.

 

무역품을 싣고 콧 노래를 부르며 돌아온 무역선에는 이익을 극대화 할 수 있는 진기한 상품들 틈에, 무임승차(無賃乘車)한 반갑지 않은 공짜 손님이 끼였다는 사실을 그 당시는 아무도 몰랐다.

 

이 공짜 손님은 다시 상인들을 따라, 멧시나에서 이탈리아반도 서쪽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 가면서, 피사, 제노바 등을 습격하여 일격을 가하고, 여기에서 두 패로 나뉘어 하나는 알프스를 넘어 유럽내륙을 침입했고, 다른 하나는계속해서 해안(海岸)을 따라 남프랑스의 마르세유에 도달, 허상(虛像)과 오욕(汚辱)으로 가득찬 인간들의 무방비 지역을 종횡무진(縱橫無盡) 누비면서 그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1347)

 

(왼쪽 위의 그림은 마스터가 세 개인 지중해를 누비던 무역선. 이 시기에 이런 선박이 해적들과 싸우면서 지중해와 대서양을 누비다가, 여기에 대포를 달고, 세계 도처로 나가기 시작하였다. 이런 것을 유럽 인들은 항해술의 발달, 지리상의 발견이라고 하지만, 당하는 쪽에서 보면 약탈이다)

 

여기에서 재미를 본 이 역병은, 드디어 그 본성을 들어내어, 이듬해(1348)부터,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독일, 영국은 물론이고, 멀리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까지 진출하여 맹위(猛威)을 떨치면서,

 

도시건 농촌이건 강자건 약자건 가리지않고, 사람들이 사는 곳이면 찾아들어 마음껏 죽음의 잔치를 베풀었다.

 

이렇게된 원인 중에는 당시의 사람들이 오랜 기근(饑饉)으로 영양상태가 좋지 않았고, 상하수도(上下水道)를 비롯한 공중위생(公衆衛生)이 형편없었던 것도 이 역병의 창궐(猖獗)을 도우는데 일조(一助)를 했기 때문이다.

 

페스트는 야생 설치류(齧齒類:다람쥐·쥐·비버등)의 돌림병으로, 인간과 가까운 시궁 쥐·곰 쥐 등이 밭 다람쥐·스텝 마못 등으로부터 벼룩에 의해서 감염되고, 이들이 다시 사람에게 옮기는 것으로 밝혀졌다.

 

환자가 재채기나 기침을 할 때, 나오는 가래, 또는 환자의 분비·배설물에 붙어 있다가, 여러 경로를 따라 사람의 기도(氣道)를 타고 감염(感染)되기도 하고, 보균동물의 피를 빨아 먹은 벼룩에게 물려서 감염되는 두 가지 경우가 있는데 벼룩에 물려서 감염되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한다.

 

벼룩에 물려서 몸 속으로 들어온 세균이 피부로부터 림프(lymph)절에 이르러 발병하는 것을 선(腺)페스트라 하고, 기도를 통하여 폐(肺)에 침입, 발병하는 것은 폐 페스트라고 하는데, 초기에는 선 페스트가 우세했지만, 후기에는 폐 페스트가 우세했다.

 

선 페스트는 머리, 겨드랑이, 사타구니 등의 임파선에 병균이 침입해서 고열과 오한(惡寒)을 동반3 ~4일 지나면 횡설수설하다가 죽게 되고, 폐 페스트는 발병 후 고열로 의식을 잃고, 24시간 내에 죽는다고 하는데, 문제의 이 세균(細菌)이 1894년 파스틔르(Pasteur, Louis)에 의해서 발견되었다고하니까 중세 인들이 그 발병 원인과 치료법을 알았을 리는 없었고, 따라서 별의별 웃지 못할 이야기들이 나돌았다.

 

(2) 흑사병(페스트)과 유럽사회

 

이전까지 듣도 보도 못했던 이 괴질(怪疾)이 유럽을 휩쓸자 유럽 인들은 공포의 전율(戰慄)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어디를 가나 보이는 것은 죽는 사람들이었고, 그 사람들 중에는 기사도, 사제(司祭)도, 수도사도 있었으며, 특히 장례(葬禮)의식을 담당해야 할 사제들의 희생(犧牲)은 신에 의지하고자 했던 사람들을 더욱 실망시켰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름 데로의 대책을 찾게 되었는데, 환자가 발생하면 그 집에 못질을 하고, 사람들의 출입을 차단시키기도 하고, 그래도 계속 번져 나가면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

 

악마가 공기를 더럽혀서 이 역병이 돌아다닌다는 말이 누구의 입에서 나오자, 사람들은 좋은 냄새를 풍겨서 이 악마를 쫓는 방법을 찾아, 알로에(Aloe)를 구하여 태우기도 하고, 그와 비슷한 미르라(myrrha/沒藥)를 구하여 마시기도 하였으나, 전혀 효험이 없자 입을 흰 천으로 막고 마을을 떠나기 시작하였다.

 

두 가지 식물 모두가 아프리카 원산으로 알로에는 아랍어의 로에(쓴 맛)라고 불려서 노회(爐灰)라고 음역(音譯)되어 부르기도 하는데, 최근의 연구에서도 곰팡이와 세균에 대한 살균(殺菌) 효과가 있고, 궤양(潰瘍)과 항암(抗癌)에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미르(myrrh)는 방부제(防腐劑)의 효과가 있어서 미라제작에 사용하기도 하였고, 입 냄새를 없애는 향료와 얼굴에 찍어 바르는 연지의 원료이기도 하였으나, 이 무지하고 억센 페스트 앞에서는 이런 영약도 무용지물이 되었다.

 

(위쪽 오른편 그림은 신을 두려워 하지 않는 인간들에게,신이 노여움을 참지 못해 인간들에게 역병의 재앙을 화살로 표현하여 징벌을 내리는모습. 아래쪽 왼편 그림은 대부분의 가정에서 화초로 심고 있는 알로에. 원산지가 열대지방이라서 겨울에 그냥 두면 얼어서 썩어 버리고, 제리처럼 끈적한속액이 만병 통치약이 된다고 지금도 선전이 대댠하다. 그 효능이 과연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이시기의 페스트에게는 전혀 먹혀 들지를 않았던 것이다)

 

알로에. 약초인가? 관상수인가?마을에 환자가 발생하면, 마을 전체 혹은 도시 전체가 도주의 행렬을 이루고,

 

이런 행렬 중에는 죽은 자의 영혼을구제해 주고 산자의 마음을 달래 주어야 할 교구의 사교, 수도원장, 마을의 사제들까지 새로운 땅을 찾아(살 길을 찾아) 도주의 발길을 재촉하였고,

 

아비뇽에 있던 교황청의 추기경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 였다.

 

이런 서글픈 현상이 인간의 각박한 정서에 불을 지피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각종의 유언비어(流言蜚語)가 나타나게 되는데,...혜성(彗星)이 나타나 불길한 조짐이 있었다.... 별 자리가 이상했다...마법사가 주문(呪文)을 외지 않았다...등등은 그래도 사람들의 흔들리는 마음의 표현이라 생각하고 넘길 수 있으나, 소위 악성 루머, "유대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어서 페스트가 발생했다"는 말이 나돌게 되었다.

 

유대인들의 할례의식따라서 애꿎은 유대인들이 십자군 원정 때의 집단학살에 이어서, 다시 대학살의 표적이 되었는데, 유럽 곳곳에서 이들이 생매장 당하거나, 불 속에 던져 타 죽게 하였다.

 

이들이 이렇게 따돌림을 당하고 집단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은 영토 없는 백성으로서 끈질긴 삶을 이어가기 위해 할 수 있는 한가지 길,

 

즉 악착 같이 돈을 모아 재산을 늘리는 것이 최상의 방편이기에 이교도이면서 돈 많은 이들을 평소에 미워하고 있다가 이를 계기로 모진 학살을 감행하게 되었다.

 

이런 유럽 인들의 집단 광기(狂氣)는, 전라(全裸) 혹은 반나체의 남녀가 무리를 지어, 저마다 손에는 십자가와 가죽끈에 매듭을 만들어 매듭에 날카로운 못을 거꾸로 박은 채찍을 들고,

 

성가를 부르며, 채찍으로 자신의 몸을 마구 때려 피투성이가 된 이상한 몰골의 군상들이 거리를 누비고 돌아 다녔다.

 

이들은 이 역병이 신의 노여움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신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서 이른바 편타(鞭打) 고행(苦行)의 길을 택했는데, 교황은 이단으로, 국왕은 풍기 문란을 이유로, 이들의 이런 행위를 금지시키기도 하였다.

 

(위쪽 오른편 그림은 유대인 남성이면 누구나 통과해야 되는통과의례, 즉 할례(割禮)의 모습. 성기의 끝이나 표피의 일부를 제거하는 그들만의 종교 의식이기는 하나, 보기에 따라서는 매우 잔인하고 끔찍하게 느낄 수도 있다. 나찌 독일이 유대인을 처형할 때, 유대인을 구별하는 방법으로 동원되기도 했다고하는데, 그런데도 지금까지 이 의식은 계속되고 있다고 하며, 이슬람교도들은 여성의 음핵을 자르는 할례를 통과의례로 치룬다고 하는데,.....아래쪽 왼편 그림은 신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서 자신의 육체를 가죽끈으로 때리고, 성가를 부르면서 거리는 누비는 편타 고행자들의 행렬)

 

편타 고행자들의 행렬이성(理性)보다는 신앙을 중시했던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전재산을 교회나 수도원에 바치고 간절한 기도를 올리는가 하면,

 

미리 가재도구를 불질러 재앙의 접근을 차단하려고도 했으며, 성유물을 부적으로 삼아 이것에 의지하기도 하고, 어떤 도시에서는 개와 고양이가 병균을 옮긴다 하여 이들을 소탕하자, 고양이 없는 세상을 만난 쥐들이 더욱 극성을 부리게 되고, 이에 비례해서 페스트도 더욱 날뛰고, 권위를 자랑하던 파리대학 의학부에서 조차 별자리(星座)의 이상에서 발생했다는 기이한 진단을 내렸다.

 

(3) 흑사병이 남긴 것들

 

이런 가운데 페스트가 극성을 보인 것은 1348년의일이고, 그 후로는 점차 기세가 걲이고 사라진 듯 했으나, 14세기 후반에도 간헐(間歇)적으로 나타나 사람들을 불안에 떨게 하였다.

 

비록 기간은 5년이 채 안 되지만 그 피해가 인간의 집단 죽음을 가져왔기 때문에 그 파장은 매우 컷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이 짧은 기간에 유럽의 전체 인구가 격감했는데, 브르고뉴 지방의 어느 교회가 작성한 사망자 명부에 의하면, 인구 1200 ~ 1500 명의 마을에서 평소에는 한 달에 5명 정도가 죽었으나, 페스트가 만연했던 1348년 8월, 9월, 10월 3개월 동안에는 도합 680 명이 죽었다고 하니 이 마을을 기준으로 하면 인구의 절반이 죽었고, 유럽 전체로 볼 때1/3 혹은 1/5의 인구가 줄었다고 보고 있다. 이래서 페스트 만연 이전의 인구로 돌아가는데 200년의 긴 시간이 걸렸다.

 

이런 인구 격감은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장원 경제를 여지없이 붕괴시켰는데, 농민들이 떠난 장원의 영주들은 성에 웅크리고 앉아서, 도둑들의 은신처를 제공하거나 장물을 보관해 주고 대가를 받기도 하고, 냇물에 징검다리를 놓아 농노를 시켜 통행세를 거두어 연명하는 등, 궁색한 살림을 맛보아야 했다.

 

이런 일련의 사실들은 결과적으로 장원에 의지했던 봉건제도를 뿌리 채 흔들었고, 이런 지방세력의 약화는 중앙집권으로 가는 지름길이 되었던 것이다.

 

가톨릭교회의 사정도 세속영주와 다를 것이 없었다. 특히 사제직 지원 자 수의 감소로 인해 무식하고 인정없는 사람들을 사제로 뽑는경우가 많아졌고, 이런 결과는 교회를 더욱 타락시켰으며, 이런 재앙(災殃)을 당했을때, 당시의 교회에서는 교회로부터 이반되어가는 민심을 잡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이것이 교회를 멀리한 사람들에게 신이 노해서 내린 응징이라고 선전했다.

 

그러나 이런 말을믿고 교회에 재산을 헌납하고 열심히 기도한 사람도 가차없이 이 사신(死神)에 의해서죽음으로 끌려가자 사람들은 교회를 의심하게 되었고, 여기에 더해서 사교나 사제도 이 역신(疫神)에 의해서 죽어가자 교회를 믿음에서 멀리하게 되었다.

 

이런 결과는 엉뚱하게도 신의 속박에서 인간을 해방시켜, 사람들은 교회(신)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인간성회복이라는 본연의 모습을 찾기 시작하였는데, 이로써 르네상스라는 시대적인 한 장르가 열리는 힘에 가속을 보태주기도 하였고, 종교개혁의 실마리를 제공하기도 하였으며, 이런 일련의 과정을 지나 근대로 접어드는 원인(遠因)이 되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의미가 있다다.

 

한 시대를뒤 흔들만한 재앙의 값어치는 돈으로 계산할 수야 없겠지만 무서운 힘으로 사람들을 짓눌렸던 것만은 사실이고, 이런 재앙에서 살아남은 자는 또 다른 삶을 찾아 몸부림치는 소용도리에서 인류는 발전했고, 그것이 현재도 이어지고 있는 시점에 우리들이 자리잡고, 역사발전(?)을 위해 바둥 거리고 있는 것이다.

 

흑사병은 예술 분야에도 뚜렷한 흔적을 남겨, 죽음이 예술 작품에 널리 사용되는 주제가 되기도 했다. 흉물스럽게만 보여지는 해골과 인골, 시체가 "죽음의 무도"라는 예술로 승화되어, 인기를 얻기도 하였으며, 앞날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던 생존자들 가운데 다수는 도덕이라는 굴레를 벗어버리기도 했다.

 

그리하여 도덕은 충격적일 정도로 땅에 떨어졌고, 그를 지켜준 것은 자신일 뿐 교회도 영주도 국왕도 도덕도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어 개인주의가 팽배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개인주의의 발달은 저마다의 삶을 찾아 더욱 열심히 농사도 짓고, 장사도 하고, 공부도 하여 인간활동을 활발하게 하였으며, 이것이 사회와 경제의 유동성을 더욱 자라게 하여 자본주의 태동을 알리는 전조가 되었다고 설명하는 학자도 있다.

 

또한 흑사병으로 인해 자극을 받아 정부들은 위생 관리 체계를 마련하게 되는데, 역병의 기세가 걲이자 베네치아에서는 도시 거리를 청소하는 조처를 취하였고, 그와 비슷하게 "선한 왕"으로 불렸던 프랑스 발르와 왕조의 장(John) 2세도 유행병의 위협에 맞서는 한 가지 방편으로 거리 청소를 명하였다.

 

장 2세가 그런 조처를 취한 것은, 고대 그리스의 한 의사가 거리를 물로 깨끗하게 청소하여 아테네 사람들을 역병으로부터 구해 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인데, 이로써 역병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대단한 효과를 얻은것은 사실이며, 지저분한 거리가 깨끗해 진다는 것은 기분상으로도 매우 유익한 것이였기에 거리 청소는 이후 도시행정의 중요한 임무가 되었으며, 이런 결과로 청소가 생활화되어 위생적인 생활을 돕는데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항생제가 개발된 현대의학에서, 이런 페스트가 대단한 것이 못될 수도 있으나, 1910년 겨울, 만주에서 5만 명 가량이 이역병에 걸려 사망하였고, 세계 보건 기구에는 새로운 페스트 발병 사례가 매년 수천건 씩 보고 되고 있으며, 그 수치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새로운 종류의 페스트들도 발견되고 있는데, 그 페스트들은 인간들의 항생제에 맞서 저항력을 키우기 때문에, 최소한 기본 위생 수칙들을 잘 따르지 않는다면 이 역병은 여전히 인류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남아 미래의 질병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하는 학자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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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09.12.28 22:18

    첫댓글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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