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oDFi2JM1BKE
주제 특별강론
역대상 4:9-10
야베스의 기도
새해가 되면 많은 교회에서 송구영신예배라는 이름으로 말씀 뽑기와 축복 기도로 미신적 종교 행위가 성행한다. 이때쯤이면 ‘야베스의 기도’가 설교의 단골 주제가 된다. 브루스 윌킨스(Dr. Bruce Wilkinson)의 ‘야베스의 기도’(The Prayer of Jabez)가 2000년에 발간되어 전 세계적으로 천만 부 이상 팔렸다고 한다. 이 책을 읽고 많은 사람들이 야베스의 기도를 하였고 그 결과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다고 한다. 브루스 윌킨스의 책을 읽어보지 않았지만 (솔직히 시간을 내서 읽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 책을 통해 기복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한국 교회의 반응을 보면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교인들이 말씀에 무지하니 기도를 기복적으로 이해한다.
야베스의 기도에 대하여 생각하기 이전에 먼저 기도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할 것이다. ‘기도’란 헬라어로 ‘프로슈코마이’인데 ‘프로’(~을 향하여)와 ‘유코마이’(소원, 원함)의 합성어로 단어의 뜻만 말하자면 ‘무엇이나 누군가를 향해 원하는 것이 있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이 말씀하는 인간은 죽은 존재이다. 그렇다면 기도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 향해 원하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원함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마 6:9)라고 하신 것은 단순한 우리가 이렇게 주기도문으로 기도하면 된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마 6:9)가 되었을 때 가능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원하심이 나의 원함이 될 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도란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원하심을 내 안에 담는 것이다. 이것은 언약의 관계이다. 그 관계 안에서 지향점은 언제나 언약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요 14:23-24)
여기서 우리는 야베스라는 인물에 대하여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야베스의 기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면 야베스란 인물이 기도할 수 있는 자인가를 확인해야 한다. 특별한 자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언약 백성 삼으신 은혜 안에서 이루어진 기도인가를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다.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9절)라고 하였다. “야베스”란 ‘슬픔’이라는 뜻인데 형제보다 귀한 자가 되었다는 것은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성경은 언제나 언약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다면 “귀중한 자”자란 하나님의 언약을 위한 중요한 인물이라는 뜻이다. 어머니의 수고로움을 통해 죄 가운데서 고통 중에있는 슬픔이지만 그를 통해 하나님의 언약을 드러내시겠다는 의미이다. 즉 언약 안에서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는 것이다.
야베스의 기도는 기도 자체를 보여주고 그 의미를 말씀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족보 중에 야베스에 대한 부분에서 그의 기도를 잠깐 언급한다. 그러기에 야베스의 기도를 보여주고 설명하기 위하여 족보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야베스의 기도는 유다의 자손들과 그 가족들의 족보가 가지고 있는 성경적 의미는 하나님의 언약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언약을 맺는 방식을 통해서 복을 주신다. 언약을 통해 복을 주신다는 말은 죄의 권세 아래 놓이게 된 피조 세계를 하나님께서 다시 회복하시고 안식의 상태가 되는 방법을 여인의 후손(창 3:15)을 통해 해결하시겠다고 약속을 주셨다는 뜻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실 때까지 언약이라는 방식으로 구원을 말씀하시고 보여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악한 세상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로 불러 모아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실 것인데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가나안 땅에 세우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통해서 계시하신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은 먼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가나안 땅을 주시며 그 땅에서 큰 민족을 이룰 것과 하나님께서 그들의 주로서 다스리실 것을 내용으로 하는 언약이다.
그리고 이 언약은 때가 되어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서 이행된다. 그러나 모세는 요단강을 두고서 앞에 있는 가나안을 바라보면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여호수아를 세워 자신이 맡았던 임무를 계속해서 수행하도록 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여호수아는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고 차례로 가나안 땅을 정복해 나갔다. 가나안 땅의 중앙 부분으로 진입하여 남쪽과 북쪽을 정복하는 중이었기에 아직은 서남쪽으로 블레셋 족속의 점령해야 할 땅들이 있었고 서북쪽으로도 시돈과 같은 도성들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전체의 땅을 분배하였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신실히 이루실 것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가나안 땅을 완전히 정복한 것으로 보고 아홉 지파와 반 지파에게 가나안의 전 지역을 나누었다. 원칙적으로 가나안 땅 전체가 정복되었고 이제 각 지파별로 분배된 땅에서 그 땅의 족속들을 몰아내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각 지파에게 이렇게 이미 결정되어 있었던 원칙대로 제비를 뽑아 분배하였는데 여호수아는 갈렙에게만은 그가 원하는 땅을 주었다. 여호수아의 이러한 결정은 갈렙에게 특혜를 베푼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갈렙에게는 제비를 뽑아 땅을 분배하기에 앞서서 먼저 그가 요구하는 땅을 줄 것이 약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그가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의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민 14:24)
오직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온전히 여호와께 순종하였은즉 그는 그것을 볼 것이요 그가 밟은 땅을 내가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신 1:36)
여기서 알 수 있는 대로 갈렙이 요구하여 유다 지파가 차지한 땅은 헤브론이며, 아직 이 땅은 완전히 정복된 상태가 아니었고 크고 강한 아낙 자손이 버티고 맞서 있는 상태였다. 야베스가 기도드린 당시에도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주신 땅을 각 지파별로 차지해 나가는 시기의 상황에 있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입성하여 그 땅을 정복하고 그래서 각 지파가 자기들에게 분배된 땅을 저마다 차지하는 기간은 단시일에 된 것이 아니었다. 가나안의 원주민들과의 전쟁을 통해서 그들을 몰아내어야 했기 때문에 오랜 기간을 거쳐서 되었다.
이렇게 아직은 가나안 땅을 각 지파가 자기들에게 정해진 분배대로 차지해 가는 과정에 있는 시대적 상황이었기에 야베스는 기도하였다.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어 자기에게 주어진 영토를 넓혀 달라고 구하였으며, 또한 주님의 손이 항상 자신과 함께 하여서 모든 불행과 고통이 되는 환난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해 달라고 구하였다. 유다 지파에 속한 갈렙이 보인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에서 알 수 있듯이 유다 지파의 자손들은, 그리고 야베스는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따르는 믿음에 있으면서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약속한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다 지파의 한 사람인 야베스는 아직까지도 정복되지 않고 남아 있는 땅과 크고 강한 아낙 자손이 버티고 있는 헤브론 땅을, 그러나 유다에게 이미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서 분배된 헤브론 땅을 온전히 차지하게 해줄 것을 구하는 기도를 하였다. 이는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주신 것들을 그대로 누리게 해 달라는 간구였다. 이것이 야베스 기도의 실체이다.
그러니까 야베스가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10절)라고 한 것은 그가 속한 지파에게 분배될 영토를 두고서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루어지는 은혜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 은혜로 인해 이방 족속들의 유혹이나 그들의 죄악에 빠지지 않기를 구하는 것이다.
이때 내 지경을 넓혀 달라고 구한 것은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분배를 받을 기업(땅)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한 개인으로 존재하며 그 자신이 원하는 것으로서의 땅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속한 지파에게 분배된 기업의 영역을 구하는 것이었으며 이 분배는 가나안 땅을 완전히 정복하는 가운데서 차지할 것으로 아직은 완전히 마쳐진 상태가 아닌 부분적으로만 이루어진 것이었기에 아직도 정복해야 할 땅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자기 지파에게 분배된 땅이 온전히 주어질 수 있기를 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야베스가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라고 말한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믿고 이를 순종하여 가는 과정 속에 나타난 것으로서 유다 지파에게 분배된 기업의 땅이나 아직 온전히 차지하지 못하고 있는 땅에 대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갈렙이 그랬던 것처럼 그 자신도 언약을 의지하는 믿음에 있는 것으로서 그 믿음이 기도로 표현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언약으로 주신 것은 안식을 미리 보여주는 차원이었다. 이런 점에서 ‘가나안 땅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라고 물을 것이 아니라 ‘가나안 땅이 누구냐?’라고 물어야 한다. 즉 가나안 땅을 통해 보여주고 말씀하고자 하는 실체는 앞으로 오실 메시아이시다. 다시 말해서 안식을 성취하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야베스의 기도는 앞으로 오실 메시아를 통해 성취될 하나님의 안식을 바라보는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야베스의 기도가 그에게 즉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실제 하나님의 언약은 여부스 족속을 몰아내고 예루살렘에 성전에 서게 되는 다윗 때에 와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이는 다윗의 통치 아래에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는 상태가 되어 언약의 언약다움이 드러났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언약은 솔로몬 때에 더 구체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24 솔로몬이 그 강 건너편을 딥사에서부터 가사까지 모두, 그 강 건너편의 왕을 모두 다스리므로 그가 사방에 둘린 민족과 평화를 누렸으니 25 솔로몬이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더라(왕상 4:24-25)
이 말씀은 언약의 성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히 이루어질 안식의 상태를 미리 보여주는 것이었다(마 12:8 / 막 2:28 / 눅 6:5). 결국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하셔서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제대로 계시하셨다. 그러므로 언약의 땅을 차지하는 기도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하나님 왕국을 의미하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야베스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허락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야베스의 기도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자기 언약이기에 그 언약대로 반드시 이루어내신 것이다.
그러므로 야베스의 기도를 말씀대로 제대로 이해한 성도라면 부동산에 대한 부의 축적을 위하거나 환란이나 근심이 없는 삶을 살기 원하는 욕심으로 기도할 수 없다. 오히려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안식이 되신다는 고백으로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오직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다. 아니 그 기도만 나올 수밖에 없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이다(20230101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