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음전의 농촌이야기

주문받은 고추가루 포장을 그이와 했다. 우체국의 마감 시간이 빠르니 아침부터 서두르지 않으면 안된다. 농사짓는 사람이 야박해서는 안된다며 그이는 자꾸만 저울의 눈금 이상으로 달아서 내려놓는다. 주소와 전화번호와 이름이 일치한지를 나는 확인하고 또 한다. 중요한 일도 쉽게 혼동하고 머릿속에서 잊혀지는 증상 최근에 부쩍 더하다. 이렇게 분주하고 정신을 집중해야 하는 순간에 느닷없이 포도가 먹고 싶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 어떻게 시장까지 사러갈 수 있는가? 꾹 참고 작업을 마무리했다. 그이가 포장된 고춧가루를 차에 싣고 부치러 간 사이 벌렁 거실에 드러누워 아들 생각을 했다.못본지 3주도 더 됐다. 학교 도서관에 있을 시간이라 전화하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잠재웠다.   낑낑 창고에서 건고추를 끌다시피 거실로 가져와서 꼭지를 따기 시작했다. 티비를 켜니 단순한 노동이 지겹지 않아 좋다. 혼자라는 걸 잊게도 해준다. 올림픽 영웅들이 요즘은 화면을 자주채운다. 환영의 물결속에서 어린 선수들이 들뜬 자신을 잘 추스려 운동에 차질없이 복귀할지. 고추가 쉰 근이나 된다는데 다 다듬어도 시간은 많이 흐르지 않았다. 컴퓨터를 켜고 즐겨찾는 몇 곳을 배회했다. 주문쪽지에 답글을 쓴 후 시장기를 느껴 고구마를 씻어 앉혔다. 다 삶아질 동안만 따자며 텃밭의 첫 째 이랑 청양고추에 매달렸다. 병이 침입하기전에 훓어서 짱아찌를 만들 요량이다. 그 때 옆집 할머니네 강아지가 나를 보고 반갑다며 발버둥치다가 줄을 뗐다. 개를 좋아하지 않지만 줄까지 떼어 안겨드니 잠시 쓰다듬으며 대화를 했다. '날 보니 그렇게도 좋아?' '너무나 좋아요'라고 강아지는 눈으로 대답한다. 뜨끈한 강아지의 체온이 느껴졌지만 얇고 통통한 배가 내 손톱의 뾰족함에 상처를 입어 급기야는 터질것만 같아 불안하다.  그렇다면 꾸불꾸불한 창자가 삐죽이 밖으로? 징그럽고 무서운 생각이 미치자 땅에 얼른 내려놓았다. 난 진정 동물을 사랑하고 따스하게 교감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고구마가 탈까 신경이 부엌의 가스불로 다 가있다. 장화를 벗고 집안으로 들어와 일단 불을 끄고 뜸을 들이기로 했다. 그동안 나는 전화를 켜고 문자에 일일이 답을 썼다. 고추가루에 관한 문의나 주초에 보낸 고추를 잘 받았다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최대한 문장을 간결하게 쓰면서 나의 생각을 잘 전달하는 답글을 쓸 수 없을까를  자주 생각한다.혹 그러다가 잘못 이해하면 상대방은 반말이나 하는줄 알것 같은 오해를 빚을까 걱정도 된다.내게 맞지않지만 그러나 손전화는 꼭 필요한 물건이다. 따뜻하면서 팍신한 고구마를 열무김치와 오이 냉국과 먹었다. 봄부터 거실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수필집 한 권이 왜 이 시각에 하필 눈에 화악 들어오는지.그 자리에 또 드러누웠다 엎드렸다를 반복하며  몇 페이지를 읽었다.호미는 땅이나 파는 한 낱 도구에 불과하다는 생각밖에는 못하겠는데 소설가 박완서는 앙증맞고 귀엽다며 선물로도 주고 받는단다.화단이나 가꾸는 도회지 사람들은 농촌 사람들과 작은 농기구 하나를 놓고도 천양지 차의 생각과 상상을 한다. 눈이 침침해서 책을 덮고 다시 고추를 따러갔다. 거름기를 계속 공급해주지 않아서 고추알이 너무 잘다. 그러나 한줌씩 모이고 모여서 금새 한 포대나 되었다. 그이는 우체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어제 맡긴 고추장용 고춧가루를 내가 이르지도 않았는데 찾아왔다.엄마가 시킨 일을 거뜬히 잘 해내고 칭찬받으려는 소년의 표정이다. 내가 말로 표현하지 않았으니 포도는 사올리 만무했다. 젊은 시절에는 꼼꼼하게 메모해줘도 잊어버렸다며 심부름을 무시하기 일쑤였는데 나이 탓인지 그이도 살림꾼이 다 되었다. 고추장도 오늘 안에 끝내리라. 서둘러서 조청을 녹이고 청국장 가루를 냉장고에서 꺼냈다. 찹쌀 불리는 시간을 단축하려고 수돗꼭지 앞에 일부러 서서 뜨거운 물이 나올 때를 기다렸다. 넓은 거실에 고추포대를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고추장 담는 데만 정성을 쏟았다.  예전에는 고추장이며 장류를 담구려면 며칠전부터 준비하고 긴장했다. 지금은 너무 쉬운 일이다. 하기는 내 나이가  몇 인가? 모든 음식이 다 그렇거니와 특히 고추장은 배합의 조화다. 주재료 고추가루에다 부재료 엿기름,혹은 찹쌀,보리쌀,밀,콩에 따라서 다른 맛이 느껴진다.사람들은 내가 만든 고추장이 맛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지만 어느 순간 정말 그럴까 라는 의문 없지도 않다. 커다란 함지박을 꺼내와서 준비된 곡류들을 배합하고 드디어 고추장을 완성했다.손가락에 찍어 맛을 보고 또 보고. 적당한 숙성기를 지나면 감칠맛이 날것 같아 흡족하다. 과정이 복잡하고 보관이 오래가는 음식일 수록 처음의 맛이 중요했다. 맵기,달기,짜기가 첫 맛에 알맞다 싶으면 끝까지 그 맛을 유지했다. 아직 독에 퍼붓기는 그러나 이르다. 오며가며 간을 보고 최종적으로 이맛이다 싶으면 장독대에 사흘후 쯤 퍼 옮길것이다.   아~!거실에 펼쳐놓은 생청양고추를 어쩐다? 사람의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의 양은 무한정이다. 생고추를 다듬는 일도 티비와 함께라면 따분하지 않다. '인간극장'이라는 프로를 나는 특별히 애청하는데 마침 재방송이다. '엄마 난 괜찮아' 암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도 병에 걸려 임종을 기다리는 고3짜리 여학생의 이야기다.자신은 괜찮으니까 엄마는 편히 가라는 딸의 따뜻한 마음이 담겼지만 너무 슬프고 애처로워서 나는 꺼이꺼이 울었다. 외삼촌이 있다지만 이 세상에 홀로 떨어진 소녀.기나긴 인생여정 어찌 살아갈지? 동생도 형도 없는 무녀독남의 아들이 언젠가는 소녀와 흡사한 색깔의 슬픔 맞지 않을까? 고추를 손질하다가 난데없이 울음보가 터졌다. 간장과 식초와 설탕,소주까지 넉넉하게 미리 사다 놓은 일은 정말 잘 했다. 이후에는 시내에 가는 걸음에 대형마트를 이용해야 싸다는 말을 남편에게 했다. 울어서 퉁퉁 부은 내 눈을 보고 그이가 잠깐 놀랐지만 연유를 알고 이내 웃는다. 굳이 간장을 달이지 않아도 요새 담그는 고추 짱아찌는 좀 짭짤하면 실패하지 않는다. 눈물을 닦으며,간을 보며 고추절임까지 나는 마칠것이다. 예전에는 따서 무작정 삭혀야 고추김치를 맛보는줄 알았다. 흐르는 세월과 함께 양념도 변하고 그래서 음식 맛도 확연히 달라진 것을 우리는 먹는다. 경험은 여자들 사이의 이론이 되고 그것을 서로 공유하므로 반찬 맛도 가가호호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컵으로 일일이 레시피를 잴 것도 없이 어림잡아서 간물을 만들어 고추에 부었다. 수석이라며 냇가에서 그이가 주워 온 넓적한 돌멩이를 고추에 누르고 단것도 같으면서,새콤한 것도 같은 배합물이다.   마지막으로 또 한 번 컴퓨터를 켜니 드르륵 탈없이 잘 돌아가고 있다는 기계음이 너무 반갑다.다양한 타인들의 욕망을 엿보고 정보의 바다에 푹 빠져서 누구의 방해도 받지않으며 한동안 헤엄치겠지.먹고 싶은 포도를 사오지 못해서 안타까울 뿐, 일 욕심을 나는 종일 종종 걸음치다가 혹은 차분히 앉아서,누웠다가 기어이 다 채우고 말았다. 아~!오늘 하루도 성실하게 살아냈다는 뿌듯함. 최선을 다한 삶의 한 자락 무사히 접었다. 내일도 오늘과 같은 싱싱하고 생산적인 하루 펼쳐지리라.   2008년9월1일에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