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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청교도 아카데미 원문보기 글쓴이: 강대식
옥성호,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부흥과개혁사, 2007
오늘날 대부분의 미국과 한국 복음주의 교회의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심리학과 경영학의 원리들을 성경의 진리보다 더 믿는 사이비 기독교 신앙이 치명적인 전염병처럼 퍼져 있다는 점입니다. 만일 어거스틴, 루터와 칼빈, 존 오웬이나 로이드 존스 같은 하나님 교회의 진리의 용장들이 우리 시대에 살았더라면 분명히 심리학과 경영학에 물든 사이비 기독교와 맞붙어 진리의 검을 휘들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평소 누군가 우리 시대 교회를 위협하고 있는 이 심리학이라는 골리앗, 경영학이라는 골리앗으로부터 우리 교회를 구출해 줄 하나님의 사람이 나타나 줄 것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늘 형제님의 글을 읽어 본 결과 저의 소원이 일부 성취된 것 같이 큰 기쁨을 감출 수 없습니다. -백금산 11-12
옥성호 형제님의 글은 제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더 깊이 있는 분석과 더 넓은 증거와 더 큰 호소력으로 제시하고 있어 저로서는 형제님의 글이 아주 만족스럽습니다. 13
차츰 읽어 가면서 놀라움으로, 다 읽고 난 다음에는 “십년 묵은 체증이 뚫리는 듯‘한 시원함을 느꼈습니다.
이 책은 심리학이라는 치명적인 전염병에 걸린 수많은 한국 교회 목회자와 성도들을 고칠 수 있는 해독제가 될 것이라 기대됩니다. 아니면 심리학이라는 달콤한 꿀을 빨아먹으면서 세상 모르고 즐기고 있는 교회의 벌집을 쑤셔 놓는 격이 되어 앞으로 수많은 벌 떼의 공격을 받을지도 모르겠군요. -백금산
제게 더 큰 영향을 끼친 분은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십니다.(저는 아내와 얘기할 때 그냥 앞에 아무런 호칭 없이 ‘목사님’이라고 부르면 그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을 지칭하는 것이지요. 그만큼 사랑하지요.) 로이드 목사님의 교리집(3권)을 읽다가 저는 비로소 기독교가 진리인 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을 통해 제가 순종으로 믿음에 이르도록 하신 것이지요. 그렇기에 제게는 기독교의 가르침인 교리보다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이 없습니다. 성경 이야기를 알고 그 이야기에 익숙한 것과 말씀을 아는 것은 전혀 별개의 사실이라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15
기독교를 알게 된 후 자연히 교회가 회사가 되어 가고 목사가 사장이 되어 가는 현실 속에서 교회를 바라보는 저의 시각이 하루 아침에 바뀌게 된 것입니다. 17
The User-Friendly Church?
인간이든 단체든 부끄러운 것은 가리고 싶어합니다.
복음이 부끄러운 많은 교회들은 복음을 선포하는 예언자가 되기를 포기하고 대신 사람들의 스트레스를 치료하는 정신과 의사, 모티베이션(동기부여) 연설가, 세일즈맨, 코미디언 또는 무당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11, 벧전 1:23을 보십시오. 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자, 무엇보다 십자가가 주는 걸림돌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갈 1:9) 18
Church marketing이 하나의 새로운 영역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복음을 선포하는 대신 복음을 각색해서 마케팅 하려고 하고 있다. 이 마케팅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복음 속의 본질적인 거부감을 주는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진리가 무엇인가?’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이 오로지 ‘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어떻게 해야 저들을 만족시킬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다. 교회는 외치고 있다. 고객만족! 죄인만족! 우리의 고객인 죄인이 만족할 때까지 우리는 변하겠습니다. 고객 되시는 죄인이 감동할 때까지 우리는 변하겠습니다.
제가 마케팅으로 대표되는 릭 워렌과 빌 하이벨스에 대해 공부하는 중에 발견한 것은 바로 이들의 스승이 로버트 슐러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슐러를 슐러로 만든 사람들을 하나씩 알게 되었고 그 학문적 실체는 비록 심리학이지만 오늘날 그 심리학이 중심이 되어 드러나고 있는 가장 무서운 적은 “뉴 에이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궁극적으로 파고 싶은 것은 융을 중심으로 한 뉴 에이지의 모습입니다. 칸트로부터 시작하여 실존주의를 거쳐 오늘날 포스트모던으로 자리잡은 그 위험이 지금 교회 속에 얼마나 깊숙이 무섭게 파고들어 와 있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 심리학, 마케팅, 엔터테인먼트, 이 세 가지를 중심축으로 오늘날 교회에 파고들고 있는 사탄의 거짓말을 폭로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를 모두 관통하는 것은 바로 뉴 에이지적 사상입니다.
은혜라는 단어로 포장된 그들(필립 얀시, 달라스 윌라드, 리처드 포스터, 유진 피터슨)의 글속에 담긴 ‘관용’의 메시지가 얼마나 무서운지 전에는 잘 몰랐습니다. 남들은 다 좋다는 <목적이 이끄는 삶>,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어디선가 ‘사람으로 시작해 사람으로 끝나는 가르침’에 대해 경고를 한 적이 있었는데 참으로 저는 지금 릭 워렌의 활동과 그의 가르침, 그가 만나는 사람들을 보면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제가 글이라는 것을 써야겠다라는 직접적 동기를 준 것은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이라는 책입니다. 저는 그 책속에 있는 여러 목사님의 추천을 보고 정말 충격을 받았습니다. ‘독약’을 ‘보약’이라고 말하며 마시게 하는 자칭 의사들에 대한 분노가 그 책을 보고 얼마나 컸는지 정말 화가 치밀더군요. 도저히 가만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20-21
로이드 존스는 제가 가장 존경하는 교회사의 여섯 분의 영적 거인들의 계보인 어거스틴(4-5세기)- 칼빈(16세기)- 존 오웬(17세기)- 조나단 에드워즈(18세기)- 스펄전(19세기)- 로이드 존스(20세기) 중에서 맨 마지막에 위치한 분입니다. - 백금산 23
옥성호 형제의 편지를 받고 나니 이젠 옥성호 형제가 쓴 책이 아니라 옥성호 형제가 참으로 소중한 보물처럼 여겨졌습니다. 사실 제가 목회와 출판 사역을 하면서 보고 싶었던 후배 목회자의 모습, 또는 건강한 성도의 모습이 옥성호 형제의 생각과 삶 속에 잘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백금산 29
이제 이 책이 현재 우리 교회 안에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는 심리학 바이러스를 퇴치하는 치료약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앞으로 교회가 무분별하게 비성경적인 심리학적 원리와 기법들을 사용하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하는 예방백신이 되기를 바랍니다. -백금산
재미있는 이야기와 감동적인 교훈으로 채운 설교는 구본형 소장과 같은 사람들의 강연과는 경쟁이 안 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목사님이 자기계발 전문 강연자들의 독서량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요즈음 많은 교회가 세상이 이미 주고 있는 것을 또 주려고 애쓰고 있는 것을 보면 참 안타깝다. 성경 말씀 하나하나를 세밀하게 바로 가르치는 사람보다 책을 많이 읽어 말을 잘 하는 사람의 설교가 더 인기가 있는 현실이다. 이것은 현재 기독교가 처한 위기사항을 보여 주는 가슴아픈 한 단면이다. 세상을 부정하기보다는 세상과 경쟁하려고 하니 자연스럽게 성경만으로는 부족한 기독교가 되었다. 그래서 부족한 기독교는 다른 곳에서 말씀을 도와 줄 구원군을 요청하고 그들의 도움을 받아 말씀을 포장하고 있다. 38
현재 부족한 기독교가 지원을 요청하고 있는 구원군 삼총사, 또는 교회 성장 전문가들이 교회 성장의 3대 필수 요소로 꼽고 있는 분야는 다음과 같은 3가지이다.
1 심리학: 당신이 비록 성경을 잘 알더라도 만약 심리학을 모른다면 당신은 교회에서 상담을 통해 상처 받은 영혼을 치료할 자격이 부족한 사람이다. 심리학을 모르고 어떻게 감히 인간의 심층구조를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또한 설교에 심리학적 이론들을 가미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 오래된 고대의 성경 말씀을 오늘날 이 복잡한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에게도 실제적인 말씀으로 포장할 수 있겠는가? 심리학을 통해 하나님의 진리가 더 풍성해지도록 하라.
2 마케팅: 시장을 모르고 물건을 팔 수 없듯이 오늘날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교회가 무슨 영향력을 그들에게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인가? 당신은 왜 사람들이 교회를 안 나오는지 아는가? 그 이유를 찾아 내서 하나씩 하나씩 당신의 교회에서 그 원인을 제거하라. 그리고 교회 밖 사람들이 교회로부터 원하는 필요를 파악하고 그 필요를 교회가 채워 주라. 어떤 물건이든 아주 싸든가 아니면 아주 고급 품질이면 반드시 잘 팔린다. 왜 교회라고 그렇지 않겠는가?
3 엔터테인먼트: 가장 큰 죄는 지루함이다. 이 인터넷과 비디오의 영상 시대에 누가 지루한 예배 속에서 한 시간 이상씩 앉아 있으려고 하겠는가? 예배도 재미있고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라. 훈계를 하는 고리타분한 예배를 벗어 버리라. 최대한 웃기라. 필요하면 최상의 테크놀리지를 활용하여 최고 수준의 즐거움을 제공하는 공연으로서의 예배로 업그레이드 하라. 그리고 무엇보다 관객이 실제로 참여해서 종교만이 제공하는 신비적 영적 체험들을 부담감 없이 느끼도록 프로그램을 짜라.
교회 속에서 심리학(정신분석과 심리상담)은 참으로 다양한 영역에서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영역은 설교와 내적 치유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상담 영역이다. 설교가 성경의 본문을 떠나 여러 감동적 이야기로 채워지도록 만든 주범은 알게 모르게 교회 속에 이미 깊이 파고들어와 있는 심리학이다. 우리는 설교의 본문이 없어도 아무런 문제 없이 진행될 수 있는 설교를 얼마나 자주 목격하며 살고 있는가? 어린 시절 상처 받은 영혼이 그 상처받은 영혼을 치료받아 자신감을 찾아 힘차게 살아가라는 감동적 이야기들로 채워진 설교 속에 성경 말씀이 설 자리는 처음부터 기대하기 어렵다. 또한 기독교 상담이라는 이름으로 전파되는 ‘자존감 회복’의 복음은 더 이상 교회와 세상 사이의 간격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가장 잘 보여 주 고 있는 한 사례이다. 입으로는 성경이 완전하고도 충분하다고 고백하지만 사실은 성경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다.
01 심리학은 과학인가, 종교인가
1) 과학적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과학적’이라는 것은 어떤 가설에 대한 반복적 실험이 가능해야 하고 그 실험 결과가 항상 동일하게 나올 때에 사용하는 말”이다. p. 50
“어떤 이론이 과학적이기 위해서는 그 이론과 관련한 어떤 주제에 대하여 ‘관찰 가능한 객관적 데이터’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데이터에 대한 분류와 관찰에 근거해서 미래에 그 관찰 주제가 어떻게 반응할지에 대한 ‘예측 가능하며 조정이 가능한 결과’를 보장할 수 있어야 한다. 즉, 분석 결과에 따라 동일한 결과가 미래에도 반복적으로 발생해야만 한다.” p. 53
2) 심리학이 과학이 될 수 없는 이유
“심리학은 동일한 결과의 반복적 발생에 대한 보장은 고사하고 관찰 대상의 미래 행동에 대해 ‘전혀’알지 못한다. 불확실한 미래를 그저 ‘추측하고 추리’할 뿐이다. 자신의 이론대로 진행되기를 믿고 바랄 뿐이다.…심리학이 말하는 ‘객관적 데이터’는 대부분 관찰 대상자의 ‘주관적 이야기 또는 고백’이다. 누구나 인정하는 관찰 가능한 객관적 데이터가 전혀 아니다. 자신의 상황을 얘기하는 그 관찰 대상자가 과연 진실을 얘기하는지 아니면 자신의 착각을 진실로 알고 얘기를 하는지 아니면 아예 대놓고 거짓말을 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심리학이 개발한 수많은 이론의 바탕이 되는 ‘데이터’는 본질적으로 치명적인 결함을 갖고 있는 것이다.……심리학이 과학이 될 수 없는 것은 데이터 수집과 관련해서 데이터 자체가 가진 근본적인 문제 외에 또 하나의 문제는 관찰자 역시 데이터에 대해 자기 마음대로 각각 다른 해석을 하고 데이터를 자기 마음대로 제각각 분류할 수 있다는 점이다.” pp. 53-4
심리학은 수도 없이 다양한, 때로는 서로 상충되는 이론들이 존재하고 있는 일종의 ‘믿음의 영역’이다. 이처럼 심리학은 진화론과 별로 다르지 않다. 심리학도 진화론 못지 않게 ‘믿음’을 필요로 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만약 심리학이 과학이기는 커녕 칼 포퍼가 주장하듯 미신에 가까운 비과학적 분야라고 한다면 기독교는 심리학이 교회 속으로 파고 들어오는 것을 결코 용납해서는 안 된다.
3) 인간의 정신은 과학의 대상이 아니다.
실험할 수 있으며 그에 대한 결과가 나오는 과학적 방법의 대상은 물리적 영역에 해당된다. 만일 “우리가 심리학을 과학이라고 규정하고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인간의 정신 영역을 측정 가능한 물리적 영역으로 간주하는” 것이 된다. “심리학 이론을 바탕으로 하는 정신 치료는 결코 과학이 될 수 없다.…정신 치료의 영역이 물리적 영역을 넘어선 인간의 정신 영역, 즉 인간의 생각과 마음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기계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정신을 인간의 뇌에 국한된 물리적 영역으로 볼 수는 없다.” p. 60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이다. 인간은 하나님이 당신의 호흡을 불어넣어 창조하지 않은 다른 물질적 영역의 법칙으로는 도저히 해석하고 규정할 수 없는 특별한 영적인 존재이다. 즉, 물질적 영역을 지배하는 과학적 법칙으로 하나님을 결코 설명할 수 없듯이 그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하고 있는 인간의 생각과 마음 역시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과학은 영적인 세계를 내포하고 있는 인간의 마인드에 해당하는 영역인 인간의 생각과 마음을 다룰 수 없다. 인간의 마인드는 물리적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p. 62
4) 심리학은 과학이 아니라 종교에 가깝다.
“물리적 영역이 아닌 영적인 세계를 설명하려는 시도는 그 본질상 종교의 영역에 속한다. 증명할 수 없는 사실에 대해 믿음을 통해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심리학은 증명될 수 없는 인간의 마인드에 대한 개인의 의견들을 믿음으로써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인간의 도덕적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심리학이 아무리 겉으로 과학적으로 들리는 용어들을 사용한다고 해도 심리학 역시 진화론과 같이 본질상 종교일 수밖에 없다.” pp. 62-3
진화론에 ‘우연’이라는 신이 있다면 심리학에는 ‘무의식’이라는 신이 존재한다. 사실상 인간의 생로병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이 ‘무의식’이라는 개념에 의지해 모든 심리학 이론이 움직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리학 역시 그 누구에게 내어 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전능한 ‘무의식’으로 말미암아 종교로서 갖출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02 기독교 심리학은 존재하는가
교회가 심리학을 기독교 안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심리학을 과학으로 오인했기 때문이며, 교회가 받아들여 사용하고 있는 심리학을 일반 심리학과 차별하기 위해 ‘기독교 심리학’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기독교 심리학은 존재하지 않으며, 일반 심리학과 동일하다.
1) 심리학을 과학으로 오인하고 있다.
“우리는 심리학이 물질적 세계를 다루는 과학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거부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내가 만약 수술할 병에 걸렸을 때, 내가 아는 크리스천 의사보다 옆 동네의 무신론자 의사가 수술을 더 잘 한다면 크리스천이건 아니건 관계 없이 더 실력 있는 의사에게 가는 것은 당연하다. 주인이 크리스천이건 아니건 관계 없이 더 맛있는 식당을 찾아가서 식사를 하는 것이 당연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심리학이 이런 물질적 세계를 다루는 과학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심리학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영적인 부분을 다루는 종교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물질적 영역에서 발견되는 과학의 좋은 점들을 배우고 활용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영적인 부분에서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사탄의 세력에 대해서는 항상 경계하고 대적해야 한다.” PP. 74-5
2) 기독교 심리학은 프로이트와 융의 이론에 기초를 둔 일반 심리학과 별로 다르지 않다.
“오늘날 심리학은 그 단어 앞에 ‘기독교’라는 단어를 첨가함으로 많은 사람에게 기독교 심리학은 일반 심리학과 전혀 다른 ‘성경 말씀에 근거한 심리학’이라고 착각하도록 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p. 77
그러나 우리는 ‘기독교 심리학’이라는 용어와 관련해서 중요한 질문을 하나 던져 보아야 한다. “‘과연 프로이트파 또는 융파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기독교파 또는 성경파 또는 다른 어떤 이름의 독립적인 심리학 이론이 교회에 존재하고 있는가?’하는 물음이다. 즉 신학교에서 기독교 심리를 가르친다고 할 때 프로이트나 융의 이론과 관계 없이, 성경에 근거한 독립적인 심리학을 가르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p. 78
조사를 해본 결과 최소한 미국의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기독교 심리학은 그 이론이 프로이트와 융의 이론에 바탕을 둔 가르침이며, 본질에 있어 일반 대학에서 가르치는 심리학과 전혀 다르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 크리스천 심리학회에 제출된 한 논문은 말한다. “물론 우리는 심리학자의 직업을 가지고 있는 크리스천이다. 그러나 동시에 비기독교 심리학과 특별히 두드러지게 다르다고 인정받는 기독교 심리학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심리학을 적용하는 데에 있어서 다른 비기독교 심리학자들과 아주 근본적으로 다른 방법을 사용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p. 80
“표면상으로 기독교 심리학을 전공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사실은 자신의 이론적 배경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프로이트, 융 또는 아들러를 중심으로 공부했다고밖에 대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좀더 심하게 표현한다면 기존 심리학의 이론적 토대 위에 몇 개의 성경 구절을 양념으로 올려놓은 것이 사실상 기독교 심리학의 진짜 모습이라는 것이다.……기독교 상담가들은 상담을 시작하고 끝낼 때 성경 구절 몇 개 읽고 기도를 하는 것이 비기독교 상담가와 다른 차이점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결국 상담의 중심이 되는 심리학 이론을 사용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다.” p. 81
3) 기독교 심리학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성경을 심리학 이론에 맞춰 왜곡하는 것이다.
그들이 쓰고 있는 심리학 이론이라는 안경의 색체가 너무 분명해서 그 안경을 끼고 성경을 보는 순간 성경이 달리 보이게 될 것이다.
기독교 심리학은 인간의 가장 긴급한 문제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내면의 치료라고 생각한다. 기독교 심리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거듭나는 것을 본격적으로 자신을 구원하는 데 필요한 입문 과정 또는 본 시합 전에 필요한 간단한 워밍업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 심리학의 무의식 이론은 구원의 이원화를 초래한다
심리학자 또는 상담자들은 이 무의식 세계에 대하여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이 무의식에 대한 맹신에서 성경적 가르침으로 전환하지 못하는 한 아무리 상담에 성경 구절이 들어가더라도 그것은 기독교적 상담이 될 수 없다. 자동차에 가장 중요한 것은 엔진이지 바퀴가 아니다. 그 상담의 핵심은 무의식의 치료이지 결코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듭남으로 하나님과평화하게 되는,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의 치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자동차의 엔진은 후진국 산 엔진을 쓰고 자동차 바퀴만 선진국 산을 쓰면서 이 차는 선진국 산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렇게 ‘무의식’으로 대표되는 프로이트나 융의 이론을 엔진으로 삼고 상담을 하는 이상 그 상담은 필연적으로 구원의 이원화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즉 구원은 인간 치료의 입문 과정 정도에 불과하며 무의식의 세계를 치료하는 것이 진짜 전인 치료라는 식의 이원론에 빠지게 된다. 이 이원론의 함정은 상담 과정에서 성경 말씀을 잘못 인용하는 필연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108
- 주서택목사의 피상적 구원관
그의 책 <내 마음 속에 울고 있는 내가 있어요>를 보면 무의식에 대한 기독교 상담자의 신뢰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 마음에 상처를 입힌 유리 조각들 중에서 자신이 의식하고 이해하는 것들은 대부분 해결할 수 있으나, 어떤 것은 잠재의식 속으로 들어가 버려 감지되지 못해 치료되지 않고 발병이 시작한 감염 부위처럼 계속적인 영향을 우리 삶에 미치기도 한다.” 그는 구원은 받았지만 아직 제대로 치료가 되지 않은 사람의 특징 중의 하나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의 결여를 꼽고 있다. 저자의 이러한 피상적 구원 이해는 ‘우리가 비록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은 받았지만 그래도 우리에게는 또 한 번의 무엇인가가가 필요한 존재다.’라는 메시지를 전해 주게 되어 결국 구원의 이원론에 빠지게 된다고 생각한다.
- 시몬스 목사의 피상적 구원관
그의 책 전반에 걸쳐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얘기하는 듯하지만 사실상 그가 가진 ‘구원관’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 시먼스는 구원이 내적 상처가 치료되기 전까지 우리의 내세에 대해서는 보장해주지만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는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무능력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 구원받는 것은 “거듭나는 것” “새것이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새로 태어나고 완전히 새 것이 된다는 것은 분명 대단히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변화를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그런데 시먼스를 비롯한 많은 기독교 상담자에게는 성경이 말하는 이런 본질적인 변화를 가져다 주는 구원이 그다지 대단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그는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극적인 경험이 아주 귀중한고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립서비스다) 정서적으로 입은 상처가 곧장 낫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인격에 손상을 받은 정서적인 문제들은 빨리 낫지 않는다. 스스로가 자신을 학대하지 않고 오직 성령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우리의 상처들과 혼동된 상태들을 고치실 수 있도록 맡겨야 한다.” 여기서의 ‘성령님이 주시는 특별한 방법’이라는 것도 최면술을 포함한 일반적인 심리 치료를 말한다. 그렇다면 그는 좀 더 솔직했어야 한다. ‘구원과 성령 충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우리의 문제들은 프로이트와 같은 사람들이 알려준 ’특별한 방법‘으로 우리의 상처들과 혼동된 상태들을 고쳐야 한다’고 말이다.
- 기독교 심리학은 교회 안에 변장하고 들어와 있는 모더니즘이다.
C. S. 루이스는 하나님의 말씀을 현대적으로 커뮤니케이션하는 것과 모더니즘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 기독교에 위기가 닥쳐올 수 있음을 경고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현대적으로 전한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이 가지는 불변의 진리의 메시지는 그대로 간직한 채 전달방식을 현재의 언어로 현재 상황에 맞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더니즘’이라는 것은 세상에서 유행하고 인기 있는 최신 사상들에게 그럴듯한 기독교 용어를 입혀 마치 그 사상들이 기독교의 진리인 양 포장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골 2:6-8)
‘기독교 심리학’은 교회에 파고든 모더니즘 중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그러나 사실상 ‘기독교 심리학’은 오늘날 교회 속에서 가장 인기를 누리고 있는 모더니즘의 선두 주자이다. 그동안 교회는 성경의 진리를 다윈의 진화론에 맞추어 재해석하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거부해 왔다. 그런데 교회는 어쩌면 다윈의 진화론보다 더 교묘하고 무서운 프로이트나 융 그리고 로저스 등이 제시하는 인간 본질에 대한 심리학 이론에는 아무런 경계심도 없이 그 이론들에 맞추어 성경을 재해석하고 있다. 이는 참으로 두렵고도 안타까운 일이다. 111
03 왜 심리학은 반기독교적인가
심리학의 모든 중심은 인간을 향하고 있다. 인간으로 시작해 인간으로 끝난다. 성경의 모든 중심은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 기독교는 원천적으로 인간의 자존심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종교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기독교는 스스로 무엇인가를 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의 본성과 전혀 맞지 않는다. 이런 하나님 중심의 기독교가 자기 사랑과 자기 수용을 위해 하나님까지도 수단화시킬 준비가 되어 있는 심리학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겠는가?
1) 심리학은 본질적으로 인간 중심적이라는 점에서 반기독교적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심각하고 시급한 문제는 무엇인가? 내게 쏟아질 하나님의 진노를 해결하는 것인가? 아니면 나의 내면의 상처를 치료하는 것인가? 많은 기독교 심리학자들에게 있어서 진정한 문제는 내면의 ‘상처 치료’이다. 심리 치료에 있어서 인간 문제 해결은 결국 자기 사랑으로 귀결된다. 시먼스의 경우 그에게 있어서 구원 또는 ‘내적 자아로까지 깊이 침투하는 구원’은 ‘자기 사랑의 회복’일 뿐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아니다.……심리 치료의 관점에서는 내가 나를 볼 때 마음에 들지 않던 상태가 어느 시점에서 너무 사랑스럽게 바뀌면 모든 문제는 끝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내가 나 자신을 더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하는 것이 심리 치료의 핵심 과제이다. ‘어떻게 해야 내가 나를 더 예뻐할 것인가?’ 이것이 과제이다.……심리학의 모든 중심은 인간을 향하고 있다. 인간으로 시작해 인간으로 끝난다.
성경의 모든 중심은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 pp. 116-7
심리학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행복이다. 그리고 기독교 심리학은 인간의 이 행복 달성을 위해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지를 보여 주는 가장 큰 증거이자 내가 나를 사랑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주장한다. 달리 표현하면 기독교 심리학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근거로 내가 나 자신을 예배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과 다름없다.” pp. 118-9
그러나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7~8).”
“성경은 우리가 받은 구원이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즉, 우리가 받은 구원의 원인이 우리에게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사랑할 만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우리를 사랑하셨을까? 우리는 모른다. 이것이 기독교의 신비이고 또한 우리가 구원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부르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단지 확실한 한 가지는 우리가 결코 사랑받을 만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로부터 시작되지 않은 사랑을 받은 우리는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릴 뿐이다.” p. 119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크리스천을 세상은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이해할 수가 없다. 심리학은 이런 크리스천의 사고를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심리학이 기독교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나 자신의 가치를 깨닫기 위해 발버둥치는 심리학과 하나님의 은혜를 알면 알수록 더 작아지는 나 자신을 목격하는 기독교가 얼마나 다른가? 이 두 가지의 가치가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가?” p.120
2) 심리학은 본질적으로 인간 본성의 선함 혹은 중립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반기독교적이다.
“심리학은 기본적으로 인간 본성의 선함을 주장한다. 아니 선함까지 아니더라도 인간 본성이 최소한 중립의 상태 정도는 된다고 보고 있다.”……“심리학의 시각으로 볼 때 선하거나 최소한 중립적이어야 할 인간이 잘못 행동하는 이유는 자신과 관계 없이 가해진 외부의 자극들 때문”이라고 본다. p. 120
이에 반해 성경은 인간의 잘못된 행동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이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것 즉 인간이 죄를 짓는 이유는 단 하나,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뿐 아니라 내면 전체가 죄로 물든 존재라는 것이다.……죄인 된 인간에게 성경이 제시하는 유일한 치료의 방법은 심리 치료가 아니라 죄에 대한 ‘회개’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길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모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순간 인간은 성령 하나님의 지배를 받게 된다.” pp. 121-2
3) 왜 심리학이 반기독교적인지를 알려면 심리치료의 창시자인 프로이트와 융을 알아야 한다
프로이트
프로이트의 가장 큰 업적은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정립하고 이 ‘무의식’이라는 개념이 사실상 인간 심리를 설명하는 데에 중심이 되도록 한 점이다.
“프로이트는 꿈, 농담, 실수 행위 등에 관한 연구를 통하여 ‘무의식’의 존재를 일반에게 각인시키고, 인간의 성적 본능의 발전 과정을 추적하면서 유아 성욕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주장하여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계속해서 정신 분석학을 이론적으로 규정하고 정신분석의 방법을 종교, 사회, 문명, 예술들의 영역에 응용하는 데 힘썼다.” 123-124
- 프로이트의 성장 배경
그는 대단한 객관적 진리를 발견했다기보다 자신의 성장 환경을 반영하는 매우 주관적인 이론을 제시했을 뿐이다. 따라서 프로이트의 천재성과 위대성은 그의 이론 자체가 가지고 있는 객관성과 보편타당성이 아니라 개인적 선입관이 많이 포함된 매우 주관적 이론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론을 많은 사람이 거의 진리로 인정하게 만든 그의 설득력에 있다고 볼 수 있다. 125
1856년에 태어난 프로이트는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내지 못했다. 그는 아버지의 세 번째 부인에게서 난 자식이었으며 프로이트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전처가 낳은 장남 필립보다도 나이가 어렸다. 필립은 프로이트의 어머니에게 이성으로서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프로이트는 후에 자신이 어렸을 때 아버지와 이복형 필립이 죽기를 바랐다고 고백했다. 이런 독특한 성장 환경은 프로이트로 하여금 후에 자연스럽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개념을 착안하게 한 토양이 되었을 것이다.
그의 학문에 대한 첫 관심은 철학이었다. 그의 철학 탐구는 다윈의 진화론을 통해 절정에 다다랐다. 철학을 생물학적 관점과 연결시켜야 한다는 자각을 하면서 의학을 전공했다. 루드비히 포이엘바하를 만남으로 기독교에 대해 유물론적 관점의 대부분을 확립하게 되었다.
포이엘바하는 “기독교는 사실상 인류의 이성으로부터 뿐 아니라 인류의 삶에서부터 사라졌다. 기독교는 단지 고착된 생각들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프로이트는 주장한다. “하나님은 (무한한)인간을 의미하며 다른 말로 하면 인간 안에 존재하는 가장 (무한한) 본성이 밖으로 표출되어 드러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성경은 인간이 영원에 대한 자각과 갈망을 가지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반면, 포이엘바하는 인간 속에 영원함의 본성, 다른 말로 하면 인간 속에 신이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종교란 개인에게 있어서 억압된 충동들에 의해 문득문득 드러나는 이상한 꿈 또는 황당한 말실수가 인류 전체에 의해 확산된 형태에 불과하다. 또 동시에 기독교의 하나님은 그에게 있어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연장선상에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프로이트 이론에 대한 평가
1) 프로이트는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 큰 영향을 받아 과학 발전이 이루어 낼 미래를 믿으며 영적 세계를 부정했다.
프로이트와 칼 마르크스는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이 두 사람은 공통적으로 종교란 하나의 환상 또는 환영이라고 보았다. 또한 죽지 않는 영혼의 존재를 철저히 부정했다. 또 찰스 다윈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성장과정 중에서 진화의 흔적을 찾아냈다.
2) 무의식의 발견은 인간 행복을 향한 중요한 시발점이 아니라 인간을 꼭두각시로 만드는 인간 실종의 시작이다. “인간의 본성 속에 들어 있는 열망은 근친상간에의 열망, 잔혹 행위와 살인에의 열망이다.”
프로이트는 인생의 해답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상습적으로 코카인을 사용하던 사람이기도 했다.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도 답을 모르는 사람이 다른 인간 더 나아가 인류의 문제에 대한 답을 주겠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카를 융
오늘의 기독교가 융에게 직, 간접으로 받은 영향
1) 융이 기독교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영적 세계를 인정하고 기독교의 상대적 가치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2) 프로이트는 기독교를 부정한 반면 융은 기독교를 신화화했다.
융의 집단 무의식 이론
융은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무의식 속에 억압된 채로 인간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망각된 기억들과 욕망들을 중심으로 그의 이론을 전개한다. 그는 개인 무의식과 집단 무의식을 구분했다. 집단 무의식은 개인 무의식보다 더 깊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것은 개인마다 상이한 개인 무의식과는 달리 인류 보편적인 성격을 띤다. 인간이 인간으로 진화하기 이전 인간이 동물일 때부터 이어 내려온 잠재된 기억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을 파악하는 효과적인 방법은 인류의 각종 신화들, 종교들, 의식들, 상징들 그리고 꿈과 환상들을 연구하는 것이다. 결국 융에게 기독교는 다른 신화들과 마찬가지로 집단 무의식의 잠재된 기억들을 파악하는 데 필요한 하나의 단서일 뿐 그 이상도 아니었다.
창조적 진화론과 기독교 심리학을 믿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과학에 주눅이 들어 성경을 부끄러워한다.
이들이 양립될 수 없는 두 개의 가르침을 섞는 것은 성경만으로는 부끄럽기 때문이다. 그들은 과학이라는 이름을 가진 학문들 앞에 서면 웬지 작아지고 주눅이 드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과학이라는 이름 앞에서는 ‘성경이 진리다.’라고 내어 놓기가 영 부끄러운 것이다. 그들은 아직도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를 다 파악하려면 과학이 멀어도 한참 멀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심리학의 정신 분석 차원에서 볼 때 객관적인 인간의 ‘정상 상태’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이론 체계 자체가 결코 과학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는 한없이 정상적으로 보이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는 병원에 입원해야 할 중증 환자로 비칠 수도 있다.
기독교의 ‘죄’와 ‘구원’이 사라진 자리에 각종 그럴듯한 이름의 ‘병명’들만 늘어가고 있다. 이제 모든 인간은 책임질 것이 전혀 없는 ‘피해자 또는 환자’일 뿐이다. 피해자에게 무슨 구세주가 필요하고 구원이 필요한가?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구원이 아닌 치료일 뿐이다.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적은 노골적으로 기독교를 부정하는 이단이 아니라 가면을 쓰고 교회 안에 들어온 심리학이다.
우리는 이런 거짓된 가르침을 성경의 진리와 바꾸려는 정교한 사탄의 계략에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한다.
04 심리학이 쓴 세 개의 가면
심리학이 오늘날 교회 안에 자기 사랑, 긍정적 사고방식, 성공의 법칙이라는 가면을 쓰고 활동하고 있다.
1. 심리학의 첫 번째 가면: 자기 사랑(Self-Esteem, Self-Love, Self-image)
자신에 대한 보상이야말로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윤리적 원칙의 기준이 된다. 객관적인 윤리적 원칙에 근거하지 않는다. 나의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옳고 좋은 것이며 나의 자존감을 낮추는 것은 나쁘고 피해야 하는 대상이 된다. 이 지극 정성의 자기 사랑에 따르면 누군가를 비판하는 비판적 사고만큼 자존감에 해를 주는 것도 없다. 그러니 남을 비판하는 것, 부정적인 것은 나쁜 것이 된다. 왜 비판하는지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않는다. 자기 실현(self-actualization), 자기 충족(self-fulfilment) 등의 각종 용어로 대표되는 자신에 대한 이 애틋한 자기 사랑이 기독교 속으로 들어온 지는 매우 오래 되었다.
1) 자기 사랑의 전파자들
- 카를 융(Carl Jung)
융에게 인간은 (드러나지 않은) 신의 모습을 담고 있는 존재이다. “융에게 인간이 하나의 신인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며 그 표현이 사랑을 넘어 자신에 대한 숭배로까지 연결되는 것은 대단히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p. 155
“환자들은 정신 치료사들이 사제의 역할까지 하기를 강요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정신 치료사가 자신들을 우울증에서 해방시켜 줄 것을 기대하고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 정신 치료사들은 신학의 영역에 속한 문제들에 대해서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의 제자 자코비의 말이다. “융파의 정신요법을 요약하면 치료와 구원을 의미한다. 정신요법이 사람을 치료하는 능력이 있을 뿐 아니라 한 개인으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는 길과 방법을 알고 있기도 하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이란 자신의 존재 전체에 대한 지식과 충족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항상 모든 영적 구도의 목적이기도 했다. 의학적 측면을 제외하고 나면 융의 정신요법은 교육과 영적 인도를 위한 시스템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
융에게 있어서 정신 분석이란 의학이 아니라 종교이며 그에게 있어서 치료는 단순한 질병의 치료가 아니라 영혼의 구원이었다. 또한 그에게 있어서 그 구원의 모습은 인간이 자신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겸비함으로 발생하는 ‘인간 완성’의 결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서 영적 추구란 인간 완성을 위해 필요한 여정이었다. 이를 위해 융은 인간 개개인마다 집단 무의식과 개인 무의식으로 구성된 자신의 무의식구조를 파악하는 것을 시작으로 그 무의식의 구조가 개인의 삶 속에서 의식을 통해 표출되는 표현들 간의 상호 상관관계를 파악함으로 인간 구원의 과정이 완성될 수 있다고 믿었다. 결론적으로 역사 속에서 이 피조물의 범위 너머에 실존하시는 하나님은 개개인의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개념상의 신으로, 또 하나님을 아는 데에 사용되어야 할 인간의 이성과 열심은 나 자신을 알기 위한 것으로 100% 대체 되었다.
- 에릭 프롬(Erich Fromm)
1900년 독일에서 태어나 베를린에서 정신분석학을 공부한 후 1933년 미국으로 건너온 에릭 프롬은 한국 교회 내에서 ‘사랑’과 관련하여 성경의 메시지를 현대인의 언어에 맞게 재해석한, 마치 사랑의 전도사라도 되는 듯 잘못 알려진 대표적인 사람이다. 그는 인간을 형성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요소를 ‘사회’라고 파악했다. 사회가 인간의 무의식에 주는 영향에 대해 자신의 연구를 집중하였다.
에릭 프롬은 인간 본성에 대한 낙관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프롬에게 있어서 사랑은 인간 스스로의 내부에서 샘솟는 것이지 어디선가에서 주어지는 그 어떤 것이 아니었다. “사랑은 인간 속에 내재된 것이며 인간 자체로부터 발산되는 것이다. 사랑은 어떤 고귀한 존재로부터 인간에게 부여된 것도 아니며 또 우리에게 의무로 주어진 것도 아니다. 사랑은 인간이 (자신 밖의) 세상과 자신을 연결시키는 인간 고유의 힘이며 또 이 사랑을 통해 인간은 진정한 인간이 된다.”
프롬의 생각은 기독교가 말하는 인간에 대한 생각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프롬이 기독교에 대해 갖고 있던 반감은 너무 자연스런 결과이다. 프롬은 자신이 기독교의 교리를 받아들이는 순간 그것은 자신이 믿는 이론 전체가 붕괴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인간 스스로 무엇이 옳은지 알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또 자연적으로 주어진 인간의 잠재력과 지성을 사용해 옳은 것을 행할 수 있다는 (나와 같은) 인간 중심의 가치관을 갖고 있는 사람의 주장은 인간의 내재된 본성이 악하다는 (기독교의) 주장이 옳은 것으로 판명되는 경우에 순식간에 허물어질 수 있다.” p. 160
그는 <그리스도 교리>라는 책에서 기독교의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필연적으로 정치적 지배자와 기독교인들을 동지로 만든다고 주장했다. 즉, 기독교의 교리가 인간 스스로 천국을 만드는 인간의 능력 자체를 부정하는 이상 기독교인은 지도자를 의지하게 되고 그 지도자는 기독교도의 힘을 이용해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게 된다고 했다. <너는 신이 될지어다: 구약 성경과 그 전통에 대한 완전 새로운 해석>이라는 책에서 주장했다. “이제 기존의 하나님이라는 개념은 인간이 하나님이라는 개념으로 반전되고 수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한 신이 진짜 존재한다면 그 신은 내 속에 존재하는 바로 그 신이며 또 동시에 내 곁에 있는 사람의 속에도 존재하는 그 신이다.”
인간 본성에 대한 낙관적 사고를 가지고 있던 에릭 프롬은 종교개혁가 “존 칼빈이『기독교 강요』에서 인간의 전적 타락을 주장한 부분과 관련하여 칼빈이야말로 인류의 전염병과 같은 존재라고 말하였다.” p. 161
이런 에릭 프롬의 글들이 수많은 기독교 서적에 아직도 인용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가 나름대로 개념화한 사랑의 정의, 사랑의 종류 등은 ‘거룩한’ 인간이 드러내는 한 측면을 표현한 것일 뿐 성경이 말하는 사랑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은 너무 확실하다. 신으로 격상된 인간을 우리가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이 신인 줄 모르고 고개를 숙이고 사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네가 신이야, 사랑하고 사랑받아야 할 신이라고!’라는 복음을 전하라고 에릭 프롬은 지금도 무덤에서 외치고 있을 것이다.
- 칼 로저스(Carl Rogers)
정신 분석 시장에 있어서 칼 로저스의 공헌은 ‘심리치료란 일반적으로 환자라고 알려진 사람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필요한 것으로 확대 발전시킨 것이다.’ 1902년에 태어나 한때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교를 다녔던 로저스는 그가 다니던 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에서 종교와 관련한 자유주의 철학 사상을 접한 후 기독교를 완전히 버렸다. 그리고 그는 기존의 틀에 박힌 믿음들에 근거하지 않고 처음부터 시작함으로 진짜 인간을 도울 수 있는 사상을 찾아 그 사상을 통해 인간을 돕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소위 말하는 간접적 또는 고객 중심(non-direct or client-centered)의 상당법을 개발하여 자신을 찾는 사람들에게 적용했다. 그는 또한 심리 치료를 단순한 ‘치료’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을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바꾸며 자아를 발전시키는 하나의 과정으로 인식했다. 그렇기에 심리 치료는 더 참되고 더 완성된 자기 자신을 이루려는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과정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p. 162
2) 자기 사랑이 가진 오류
“첫 번째로 자기 사랑을 하나의 치료약, 다른 말로 하면 결과를 내기 위한 원인으로 인식하고 있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이 자기 사랑은 단순히 교회와 학교의 문제가 아니라 전반적인 사회에서도 각종 사회 문제까지 다 해결해줄 것이라는 환상을 주는 하나의 만병통치와 같이 인식되고 있다. 그리고 마치 자존감의 결여가 범죄를 일으키는 가장 큰 원인 가운데 하나라는 식으로까지 오해를 주고 있다. 그러나 현실을 살펴보면 진짜 악독한 범죄자일수록 엄청나게 높은 자존감, 자신에 대하여 엄청나게 높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우리는 흔히 목격한다. 자존감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왜곡된 자신에 대한 사랑이 어쩌면 범죄의 더 큰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잘못 유도된 자존감은 오히려 인간이 가진 죄성을 합리화시키며 상상할 수 없는 괴물을 만들어 내는 사탄의 도구로 이용될 수 있는 여지까지도 있는 것이다.
자기에 대한 진정한 사랑은 그냥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것이지 강제로 심은 후 빨리 뿌리를 내리고 빨리 자라도록 하기 위해 마구 그 위에 비료를 뿌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침마다 거울을 보며 “나는 내가 좋아.”를 반복하거나 내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를 상기시키는 책의 구절들을 반복해서 읽게 하는 등의 ‘조작’을 통해 강제로 생기고 자라게 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사랑은 어느 날 돌아보니 전보다 더 책임감 있고 남에 대해 배려하는, 더 성숙해진 나 자신을 보고 그냥 씩 웃을 수 있는 정도면 된다.” pp. 165-6
“두 번째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자기 사랑이 너무 모자라서 문제라는 시각이다. 그렇기 에 이 부족한 자기 사랑을 키워 주기 위한 전방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자기 사랑이 부족한 인간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은 자기 사랑이 너무 지나쳐서 문제이지 결코 모자라서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p. 166
3) 자기 사랑에 대한 성경의 경고
“성경은 자기 사랑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길이라고 말하기는커녕 자기 사랑이야말로 말세에 드러나는 가장 조심해야 할 위험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딤후 3:1~2).” 위의 구절에서 자기 사랑 이후에 나열되는 돈에 대한 사랑이나 자랑이나 교만이나 모두 어떻게 보면 자기 사랑에 대한 결과적인 모습으로도 볼 수 있다.” pp. 167-8
4) 성경은 자기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랑하라고 말한다.
“우리가 자랑하며 살아야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어야 한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자랑하며 살라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렘 9:23~24)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누리며 살라고 말하지 하나님을 아는 나 자신에 감동하며 살라고 하지 않는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내 스스로 창조해 낸 것이 무엇이 있는가? 다 하나님께 받은 것이 아닌가? 성경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마치 내가 스스로 창조한 듯이 자랑하는 인간의 교만에 대해 경고 하고 있다. 왜 네가 주인이 아니면서 주인 행세를 하느냐는 것이다. 나의 재능과 관련해서 찬양을 받으실 분은 그 재능을 주신 하나님이시지 그 재능을 거저 받은 내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랑할 만한 재능을 다른 사람에게도 주실 수 있지만 굳이 내게 주신 것은 내가 자랑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빚진 마음으로 살라고 주신 것이다. 내가 자랑할 것은 전혀 없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시 100:3).” 성경은 ‘너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알지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알라고 한다. 하나님을 바로 알 때 비로소 우리는 나 자신도 바로 알게 된다. 우리가 자신을 바로 알게 될 때 우리는 자신에 대한 긍지에 차서 사랑하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 우리는 모두 우리 각자의 ‘존재’를 하나님께 빚지고 살고 있다. 내 스스로 숨쉬고 내 스스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자는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 우리는 ‘존재 자체를 빚진 자’이다. 여기서 무슨 자랑이 있을 수 있겠는가? 나 스스로 감탄하는 나의 재능도 그 재능이 발휘되기 위한 존재를 하나님이 유지시키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지 않는가? 이 상황에 내가 나를 보면서 감탄할 것이 무엇이 그리 있겠는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창조주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진실이고 우리의 현주소이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후 3:5).” 우리의 만족은 내가 나를 보면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통해 나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스스로를 만들어 낸 창조자가 아니고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pp. 177-8
5) 성경은 자기 사랑이 죄라고 말한다
6) 자기 사랑이 성경적이라는 가르침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7) 나 중심의 종교가 위험하다.
“기독교는 철저히 하나님 중심의 종교이다. 그 속에서 ‘내’가 강조되면 될수록 하나님은 잊혀지게 되고 기독교는 어느 새 하나님 중심의 종교에서 ‘나’ 중심의 종교로 바뀔 수 있다. 그래서 위험하다는 것이다.” p. 181
내 귀를 즐겁게 하는 ‘자기 사랑’의 메시지를 멀리 할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이 절실한 때이다. 존 파이퍼 목사는 말했다. “당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는다고 느끼는 이유가 하나님께서 당신이 대단한 존재라고 느끼도록 해주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당신이 하나님을 영원히 높여드리는 기쁨을 누리는 존재로 하나님이 당신을 자유하게 하셨다는 사실 때문입니까?”
마틴 로이드 존스목사는 말했다. “내가 진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알아볼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는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나의 본성을 미워하고 있는지 아닌지의 여부입니다.”
2. 심리학의 두 번째 가면: 긍정적 사고방식(Positive Thinking)
심리학은 인간의 죄 대신 인간의 병, 인간의 구원 대신 인간의 치료를 주장한다. 이러한 심리학은 철저히 인간 중심이고 인간을 위한 메시지이다. 이에 비해 기독교의 메시지 중에서 하나님 중심의 메시지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 바로 회개이다. 이 회개의 메시지와 심리학의 인간 중심의 메시지는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도저히 화해의 여지가 없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각각의 개인은 그 속에 어떤 잠재력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는 거대한 잠자는 거인을 지니고 사는 존재이다. 이런 존재에게 ‘회개’라니, 이 얼마나 가당잖은 가르침인가? 심리학이 제거하려고 하는 기독교의 핵심 진리인 인간의 죄와 구원의 문제를 노골적이지 않으면서도 가장 효과적으로 희석시키기 위해 양의 탈을 쓰고 교회 속에 파고든 심리학의 또 하나의 가면이 ‘긍정적 사고’이다.
1) 긍정적 사고방식의 전파자들
현재 한국 교회는 미국 교회의 것이라면 무조건 따라하는 성향이 있는 것 같다. 그것이 독인지 양잿물인지도 모른 채 무조건 갖다 마시는 비참한 현실에 처해 있다. 비성경적인 긍정적 사고방식을 전파하고 있는 목사들의 생각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고 추종하고 있는 것은 오늘 우리 한국 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이다.
- 노만 빈센트 필(Norman Vincent Peale)
“노만 빈센트 필은 ‘적극적 사고’라는 말로 사실상 심리학의 긍정적, 적극적 사고를 교회 내로 유입시킨 원조이다.”……그는 한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마랄인 헬러버그의 명상법은 생명의 에너지를 느끼게 해주는 힘이 있다. 이 명상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해 준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신학적으로 정의되는 어떤 존재인가? 그분은 신학으로 정의되기에는 너무 크시다. 하나님은 생명 에너지이시다. 하나님은 생명이시다. 하나님은 에너지이시다. 당신이 하나님을 당신의 숨을 통해 들이마심으로써 당신은 하나님의 에너지를 마음에 그릴 수 있게 되고 당신은 새로운 에너지로 재충전될 것이다.” Noman Vincent Peale, “No more stress or tension,” in Plus:The Magazine of Positive Thinking, May 1986, pp. 22~23
하나님은 이제 하얀 안개 속의 에너지로 전락한 채 우리가 호흡을 통해 들이마시는 존재가 되었다. 자주 그리고 많이 마시라. 당연히 노만 빈센트 필과 같은 사람에게 성경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호흡법을 통한 요가 말고 그 무엇이겠는가? 그 요가를 그가 명상 기도라고 부르든 관상 기도라고 부르든 관계 없다. 왜 생명 에너지, 하나님의 에너지를 매일 마시면서 살던 사람이 늙고 병들어 죽었을까? p. 185
그는 1984년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동정녀 탄생에 대해서도 ‘신학적 생각’이라고 말하며 구원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했다. 또 유명한 필 도나휴 쇼에서 “나는 하나님과 나만의 개인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또 당신은 하나님과 당신만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일본의 신도 신전을 집에 모시고 있다. 그리고 그 신도 신전에서 매일 나는 영원한 평화를 주는 마음의 안식을 누리고 있다.”고 말했다.
-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
“지금 미국 교회와 한국 교회를 오염시킨 긍정적 사고의 일등공신은 미국 수정교회의 로버트 슐러이다. 로버트 슐러가 시작한 교회의 ‘수적인 성공’이 그를 일약 기독교 내에서 긍정적 사고의 대부로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로버트 슐러는 사실 노만 빈센트 필의 수제자이다.”p. 186
“슐러는 1926년생이다. 슐러의 나이와 관련해서 그가 출연했던 한 기독교 대담 방송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로버트 슐러는 자신의 출생과 관련해서도 참으로 긍정적인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는 일환으로 왜 하나님이 자신을 수많은 년도 가운데 1926년에 태어나게 하셨는지를 설명했다. 그 이유는 놀랍게도 하나님은 슐러의 인생이 마태복음 19장 26절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19장 26절이 바로 1926년이라는 논리이다.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즉, 이 말씀을 바탕으로 볼 때 자신은 하나님이 ‘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하도록 하기 위해 태어나게 하셨다는 것이다.” p.187
“로버트 슐러는 자기 인생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말씀, 소위 말하는 ‘평생 말씀’으로 삼고 있는 성경 구절이 예레미야 29장 11절이라고 한다.” p. 188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슐러에게 있어 성경은 반복적으로 암송할 만한 가치가 있는 ‘나는 할 수 있다’라는 종류의 동기부여를 주는 구절이 다수 포함된 하나의 자료집 이상의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저는 슐러에게 사실상 성경은 별 중요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다른 종교들과 분열하고 구별하게 하는 성경의 가르침을 그는 분열적 교리라고 부르며 거부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불가능해 보이는 하나의 대담한 꿈을 꾸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긍정적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기존의 분파적인 종교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이 환상에서 벗어나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이 주요 종교들의 지도자들은 각각의 종교가 주는 교리적 특징을 벗어 던질 수 있어야 한다. 초월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함께 힘을 모아 평화와 번영 그리고 희망을 이 세상에 전하도록 해야 한다.”<나의 여행: 아이오와 시골에서 꿈의 성전까지>
이 글을 보고 감동을 받는 분이 계시는가? 그렇다면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분은 어쩌면 크리스천이 아닐지도 모른다. 다른 모든 신분은 얻을 수 있겠지만 크리스천만은 되지못했을 수 있다. 그리고 저는 이 글을 진심으로 쓴 로버트 슐러는 결코 크리스천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기독교의 진리를 유일한 진리로 인정하지 않는 그가 크리스천인가요? 개별 종교적 당파성을 벗어나 모두 손을 잡고 하나 되자고요? 하나가 되어 다 같이 죽자는 소리인가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4:12) 미국의 여가수 마돈나의 말이다. “영성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것이고 종교는 포용이 아니라 나누고 단절시키는 것입니다. 구별이라는 단어가 바로 종교를 가장 잘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영성은 추구하지만 종교는 거부합니다.”
슐러의 주장이 마돈나의 주장과 무엇이 다른가? 또한 뉴 에이지의 주장과 무엇이 다른가? 뉴 에이지의 주장을 한 마디로 하면 ‘나도 신, 너도 신, 우리는 모두가 다 고귀한 신들, 그러니 우리 모두 각자가 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내 자신 속에 있는 신성을 계발하고 또한 신답게 서로 사랑하고 서로 하나가 되자!’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들에게 있어서는 로버트 슐러야말로 자신들의 메시지를 기존의 주류 교회 속에 전파하는, 실로 훌륭한 ’선교사‘인 것이다. 미국을 넘어 한국과 전 세계로 전파하는 ’글로벌 뉴 에이지 선교사‘인 것이다.
뉴 에이지의 대표적 지도자인 닐도날드 월시는 그의 책 <새로운 계시>에서 슐러야말로 “특별한 목사”로서 그의 영적 사상들은 자신이 주장하는 “새로운 영성”과 일치한다고 말하면서 슐러가 이미 교회 속에 자존감을 바탕으로 ”새로운 신학“을 통해 교회를 개혁하고 있는 지도자라고 평가하고 있다. “나는 슐러가 얘기한 국제적이고 포괄적이며 탈교리적이고 탈문화적이며 탈인종적인 기준의 신학이 다음 문장으로 들어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가 다 하나다. 우리는 우리의 길이 더 나은 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의 길은 단지 또 하나의 다른 길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영성이 주는 복음이다. 이 영성이야말로 인간을 원래의 자신으로 회복시키는 영성이다.”
슐러는 미국 내에서 저명한 정신과 의사이자 뉴 에이지의 또다른 지도자인 제럴드 잼폴스키와는 함께 세미나를 열 정도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잼폴스키는 자신의 한 책에서 자신이 인도의 영적 스승인 스와미 바바 무크타난다를 만난 경험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조용히 앉아 있은지 5분 정도가 지난 후에 나의 몸은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형태로 떨리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각종 색깔들이 내 주위에 나타나기 시작했고 마치 내가 나의 몸 밖을 나와 나 자신을 내려보고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나는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방언으로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는 나도 과거에 들은 적이 있지만 내가 믿지 않았던 현상이었다. --나는 평상시에도 항상 높은 수준의 에너지를 유지하면서 사는 편이었지만 이 경험이 있을 후 나는 세 달 동안 나의 에너지는 정말로 최고조에 달해 있었고 나는 거의 잠을 잘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또한 나는 내가 지금까지 알았던 것과 전혀 다른 차원의 깊은 사랑의 감정에 온통 차 있었다. 그 날의 그 경험은 지금까지 내가 ‘실재, 현실’이라고 부르던 모든 사실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시각을 갖고 보도록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 날 나는 물리적 영역에 제한받지 않는 새로운 차원의 현실의 일부를 맛보았기 때문이었다. 그 경험은 내가 기존에 갖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개념과 영성에 대한 개념 자체를 완전히 새로운 차원에서 재평가하도록 하는 데에 중요한 시발점이 되었다. 그 경험은 내가 (뉴 에이지 정규 입문 코스인) ‘기적에의 코스’를 만나도록 하는 데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알게 모르게 미국과 한국 기독교에 끼친 로버트 슐러의 나쁜 영향이 끔찍할 정도로 거대하다. 더욱 심각한 것은 슐러가 설교와 저술을 통해 일반 대중에게 끼친 영향보다 미국 목사들에게 끼친 영향이 워낙 크고 깊다는 사실이다. 수십 년전부터 시작한 슐러의 ‘교회 성장 세미나’를 중심으로 수많은 젊은 목사들이 그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슐러의 사상을 중심으로 정착된 많은 목사들이 미국 기독교의 중심이 되어 활동하고 있는 시기가 바로 지금이다. 약 몇십년 전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몇천 명 이상이 모이는 교회를 발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요즘 미국에서 몇만 명 이상 모이는 교회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소위 말하는 메가 처치들이 미국 곳곳에서 속속 생겨나고 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슐러의 가르침이 열매를 맺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부흥의 역사라고요? 사람이 모이기만 하면 그것이 부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그렇게 비칠 것이다. 우리가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미국 유명 목사들의 상당수가 어떤 의미에서 슐러의 직속 제자들이다. 그 사람의 스승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은 그 사람의 사상이 어떤지를 알 수 있는 가장 검증된 길이다. 강원용목사의 스승은 미국의 폴 틸리히이다.
또한 우리가 이 슐러의 영향력에 대해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슐러가 한국 교회에 대해서도 크나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미국의 유명 목사의 직접적 영향력 아래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한 많은 수의 한국 목사들 때문이다. 슐러의 손자들이라고 생각해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 조엘 오스틴(Joel Osteen)
노만 빈센트 필이나 로버트 슐러는 흘러갔거나 흘러가는 세대이다. 현재 이들의 후계자는 여러 명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군계일학으로 떠오르고 있는 사람이 바로 조엘 오스틴이다. 조엘 오스틴의『긍정의 힘』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긍정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나님이 바로 긍정적인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부정적인 면이 조금도 없다.” (조엘 오스틴,『긍정의 힘』, 두란노, 2005, p. 127)
“오스틴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고 하지 않는 대신 자신이 아는 부분에 대한 확신은 매우 강하다는 점이다. 부정적인 데라고는 전혀 없는 하나님, 그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실로 단순하기 그지없다. 하나님은 단순하신데 우리 인간이 괜히 신학이니 조직신학이니 성경신학이니 하는 말들로 하나님의 그 단순한 진리를 학문화시키며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그는 상식적으로 볼 때 왜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토록 복잡한 과정들, 선지자들의 예언, 예수님의 성육신, 십자가의 죽음, 부활, 초대 교회의 순교등을 거치셨는지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는 그냥 ‘하나님은 긍정적이시며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해 존재하실 뿐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오스틴이 자신의 설교에서 죄니 십자가니 하는 주제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자신이 이해가 안 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그냥 눈을 감아 버리고 옳다고 생각하는 부분만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pp. 199-200
오스틴은 사라가 이삭을 가지게 된 사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 “나는 사라가 실제로 아이를 임신하기 전에 아이를 마음에 품자 약속이 이루어졌다고 확신한다. 하나님이 약속의 말씀을 주신 지 거의 20년이 지나서야 아브라함과 사라에게서 이삭이 태어났다. 나는 이삭이 더 빨리 태어나지 못한 주 원인, 즉 약속의 실현이 그토록 오래 지연된 이유가 사라의 믿음에 있다고 생각한다. 사라는 믿음의 눈으로 보지 않았다……중략……하지만 우리는 사라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지연시키는 경우가 너무 많다. 우리의 작은 생각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데 시간이 걸린다. 마음 상태가 복을 받기에 적합하지 않다. 온통 의심으로 가득 차 있다. 두려운 사실은 우리가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자칫 하나님이 예비하신 놀라운 복을 평생 받지 못할 수도 있다.” (조엘 오스틴,『긍정의 힘』, 두란노, 2005, pp. 97~98 )
“조엘 오스틴에 따르면 사라가 가졌던 애초의 불신앙은 하나님이 아무리 이삭을 주시고 싶어도 주실 수가 없도록 만든, 하나님을 뛰어넘는 능력이었다. 그래서 긴 세월 동안 하나님은 인내를 가지고 사라가 ‘제발’ 믿음을 가져서 당신이 하신 이삭을 주시겠다는 약속이 ‘제발’ 실현될 수 있기를 손꼽아 기다리셔야만 했다. 마침내 참는 자에게 복이 온다고 애태우며 기다리시는 하나님께 기회가 왔다. 마침내, 마침내, 사라가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발휘될 수 있는 충분조건이 비로소 채워진 것이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이 아무리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고 싶어도 주실 수 없는 존재이니 우리 스스로를 위해 또 동시에 하나님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조엘 오스틴의 주장이다. 우리는 사라처럼 하나님을 이렇게 고생시켜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 불쌍한 하나님을 당신과 내가 도와 드려야지 누가 돕겠냐는 것이다.” p. 205
그렇다면 하나님이 하시는 약속의 실현 여부는 하나님께 달린 것이 아니라 인간의 믿음에 달려있다는 것인가? “하나님은 마치 사라가 당연히 믿음을 가질 것이라고 간주하고 그런 약속을 하고 계신다. 나이 많은 사라가 행여 믿음을 가져서 이삭을 낳게 되었다고 치자. 그런데 행여 이 사라가 이삭을 순산하는 데에 있어서 자신의 몸 상태에 대해 믿음을 못 가진다면 또 어떻게 되는가? 이삭이 태어나다가 산모와 태아가 다 죽으면 어떡할까? 사라가 순산에 대한 믿음을 가질 것이라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이삭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거의 도박에 가까워 보인다.” p. 206
“조엘 오스틴 믿음 이론에 따르면 사라의 신앙 상태에 따라 이삭은 사라가 80세에 나왔을 수 있었고 아니면 150세가 되어서야 나왔을 수도 있다. 계속 사라가 믿음을 안 가지는 것에 대비해 아마 하나님은 최후의 수단으로 사라가 죽지 않고 계속 살도록 하셨을 가능성이 높다.……우리가 성경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믿음이 중요하지만 사라의 믿음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사라의 믿음과 관계 없이 이삭이 나왔다는 사실이다.……하나님은 이삭이 그 때 태어나도록 계획하셨고 그래서 그 때에 태어난 그것이 사라의 의지와 믿음에 달려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pp. 207-8
그의 설교의 일부분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말의 힘을 너무 잘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사가랴의 부정적인 말이 하나님의 계획을 멈추게 할 수 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말함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결국, 죽음과 삶은 당신의 혀에 달려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하는 말은 바로 예언이 되고 바로 성취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말로 우리는 무엇이 닥칠지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는 말이 나의 미래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미래를 예언하고 미래를 만들 수 있습니다. 당신의 말로 미래를 만들어야 합니다. 좋은 것들을 부르십시오. 승리를 부르십시오. 건강을 부르십시오. 행복이 넘치는 삶을 부르십시오. 그것이 바로 당신의 미래, 당신의 현실이 될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오스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여도 한국 출판계를 비롯한 우리 한국 기독교가 오스틴에게 쏟는 사랑과 존경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스틴의 가르침을 마치 성경의 핵심 진리인양 떠받드는 수많은 한국 목회자와 성도가 있는 한 나 같은 사람 한 명 정도가 조엘 오스틴을 ‘사랑의 대상’이 아닌 ‘위험의 대상’으로 본다고 해서 이 친구에게 무슨 큰 해가 되겠는가? 그는 나를 이해할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긍정적이기 때문이다. - 227
나폴레온 힐
그의 책 <생각하라 그리고 부자로 자라나라>는 시간을 뛰어넘어 아직까지도 자기계발 분야의 최고 베스트셀러 가운데 하나이다. 힐은 그의 책 서문에서 자신이 이 책을 쓸 수 있도록 한 존재가 자신의 “위대한 스승들”이라고 부른 영들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 영들이 수천 마일의 바다를 건너와 자신에게 지혜의 보고를 열어 자신으로 하여금 그 말들을 받아 적도록 했다는 것이다. “고대 인도의 존경스런 형제라고 알려진 이들이야말로 인류가 가진 종교들, 철학, 도덕, 물리적, 영적 그리고 육신적 지식의 자원을 이루고 있는 존재들이다. 이들은 인내를 가지고 인류를 영적 어린 아이의 상태에서 영적 성숙의 단계로 그리고 궁극적 깨달음의 단계로 올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힐은 적극적 사고 방식을 바탕으로 한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노만 빈세트 필이나 로버트 슐러와 같은 사람들이 이 사람으로부터 실로 막대한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힐이 스스로 고백하듯이 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그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준 존재가 카를 융에게는 필레몬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영적 존재, 더 정확히 얘기하면 귀신들에 불과하다면 그와 같은 사람에게 영향받은 크리스천은 도대체 어떤 존재라는 것일까요? 성경의 하나님을 믿지 않는 나폴레온 힐이 “적극적 사고를 가지고 당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성경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슐러나 오스틴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못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는 말이 전혀 다른 말 같아도 사실은 본질적으로 같은 말이라면 아마 고개를 갸우뚱거릴 사람이 많이 있을 것이다.
- 오늘날 교회에서 긍정적 사고방식을 가지지 않으면 문제아로 찍힌다
오늘날 교회에서 긍정적인 사람이 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자살행위이다. 당신이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다면 주변의 모든 것에 대해 무조건 칭찬하고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말하라. 비판은 ‘미성숙’의 산물이요, ‘은혜 없음 또는 아직 은혜를 모르는 사람’의 산물로 취급될 것이다. 비판적 사고를 지닌 사람은 부정적 사람, 조금 나아가서 그 사람은 마치 전염병을 옮기는 바이러스와 같은 취급을 당할 것이다. 교회 내에서 손꼽히는 ‘문제아’로 낙인찍힐 것이다.
잘못된 것도 당연시 여기고 고쳐야 할 것들에 대해서도 그냥 모두 웃으면서 넘어가는, 너무 긍정적인 바이러스를 옮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이 바이러스 역시 매우 치명적이다. 아무튼 긍정적인 사고는 이제 ‘십자가를 통한 은혜의 복음’ 만큼이나 ‘확고한’ 개념으로 교회 내에 자리잡아 가고 있는 듯 보인다.
-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는 긍정적 사고방식을 외치는 설교가 넘쳐나고 있다.
- 긍정적 사고방식으로 보면 예수님은 참으로 부정적인 분이다.
성경이 말하지 않고 관심이 없는 분야, 아니 성경이 도리어 경계하고 조심하라는 분야를 성경의 핵심인 양 가르치면 결국 설교는 긍정적 동기부여로 끝나고 만다. 교회가 말씀의 본래 의미를 바로 가르치는 것을 포기할 때 성경의 말씀 역시 수많은 세상의 가르침과 더 나은 효과를 놓고 경쟁하는 도구 가운데 하나로 전락하게 된다.
예수님은 제자가 되려는 부자 청년에게 꼬투리를 잡아 그 친구를 실망시키고 집으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너무 부정적이고 비판적이지 않는가? 매일 긍정적 언어로 도배해도 모자랄 판에 예수님은 아예 자신의 처지를 공중의 새와 여우의 굴과 비교할 정도로 부정적인 언어를 일관되게 사용하셔서 제자 되고자 하는 일부 사람들을 거절하셨다. 제자들에게도 기회만 되면 당신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것이라고 부정적 미래를 계속 반복하셨다. 예수님은 멀쩡하게 잘 서 있는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서도 저주를 퍼부으셨다. 무엇보다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마태복음 24장의 말씀이다 25장까지 진행되는 긴 설교에서 우리 인류의 미래에 대해 너무 부정적인 시각으로 일관하셨다. 분명 예수님은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겠다’라는 긍정적 선언을 통해 자신에 대한 믿음을 확고하게 다져가는 베드로에게 격려를 하고 북돋아 주지는 못할 망정 ‘너는 분명 나를 배반할 것이다’라는 부정적 시각으로 그의 신념에 찬 물을 끼얹으셨다.
사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실상 긍정적 사고와는 가장 거리가 먼 가르침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열심히 종교생활을 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끊임없이 가해진 예수님의 저주와 악담은 도대체 무엇인가? 베드로를 책망할 때 아예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셨고, 눈과 팔이 잘못하면 아예 눈을 빼 버리고 팔을 잘라 버리라고 말씀하셨다. 이게 긍정적인가요? 사복음서를 통틀어 볼 때 예수님의 어떠한 가르침과 행동도 지금 마치 진리인 양 둔갑하여 돌아다니는 이 긍정적 사고와 긍정적 언어 사용과 융합될 수 있는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 긍정적 사고방식으로 보면 바울도 부정적인 사람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에서 얼마든지 용납하고 이해할 수 있는 베드로의 실수를 사람들 앞에서 지적하고 망신을 준다.
- 긍정적 사고방식으로 보면 하나님은 가장 부정적인 분이고, 사탄은 가장 긍정적인 존재다
성경은 인간을 죄인이라고 진단한다.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된 인간과 그 죄를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인간의 무능함과 그 죄를 100% 책임지고 처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다. 죄인 된 인간 속에 무슨 긍정적 요소가 있는가? 기독교의 가르침은 철저히 인간의 자존심과 인간의 가능성을 부정한다. 기독교의 진리는 그 진리의 본질 자체가 긍정적 사고와는 결코 융합할 수 없는 종교이다. 기독교의 메시지, 기독교의 진리와 긍정적 사고는 창세기에서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도저히 발을 맞출래야 맞출 수가 없는 양극단의 대비되는 메시지이다.
성경 속에서 매우 긍정적인 한 존재를 만나게 된다. ‘긍정의 화신’ 사탄이다. 사탄은 하와에게 “너는 죽지 않아. 걱정하지 마, 죽기는 거녕 너는 하나님이 될거야”라는 긍정적인 메시지를 던진다. 문제와 비극은 이 긍정적인 선언이 ‘거짓’이라는 사실이다. 결국 하와와 아담은 사탄의 긍정적인 메시지와 하나님의 진리를 맞바꾸었다.
-긍정적인 사고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두 가지 자기모순
1) 인간은 결코 자신에게 중요한 문제와 관련해서는 긍정적일 수 없다는 사실이다.
마약을 하는 아이를 보는 부모, 중요한 계약에 있어서 상대방의 선의.
2) 누군가에게 긍정적이 되라고 말하는 사람 자체가 이미 부정적이라는 사실이다.
왜 긍정적이 되라고 상대에게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가? 이는 마치 절대적 진리가 존재하지 않고 모든 진리는 상대적 진리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가진 자기모순과 같다. ‘절대 진리는 없다’라는 그의 주장 자체가 하나의 ‘절대 진리’이기 때문이다. 신기하게도 그런 상대적 진리를 주장하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신념에 더 철저한 법이다.
-긍정적 사고방식은 성경을 왜곡한다.
오늘날 교회 내에서 휘몰아치는 이 긍정적 사고의 광풍이 주는 비극은 우리 크리스천이 우리의 조상 아담부부와 마찬가지로 긍정적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경의 진리를 버리거나 왜곡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심리학 이론을 성경과 접목하려는 순간 나타나는 성경 왜곡의 필연적 결과가 긍정적 사고와 관련해서도 당연히 적용되기 때문이다. 성경의 진리를 바로 보고 전하려는 이상 우리는 긍정적일 수가 없다. 우리는 인간에 대해 긍정적일 수가 없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 긍정적일 수가 없다. 우리는 인간의 미래에 대해서도 긍정적일 수 없다.
-디모데후서 3:16은 심리학이 말하는 긍정적 사고방식이 반성경적임을 선명하게 보여 준다
긍정적 사고는 분명 비성경적이며, 반성경적인 사고방식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교훈은 교리로 번역해야 한다. 요즘 교회의 특징은 교리를 무시하고 교리를 중요시 여기지 않는 것이다. 아예 전통적인 냄새가 나지 않는 ‘교회같지 않는 교회’를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다. 성경의 첫째 목적은 기독교의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다. 즉 기독교에만 존재하는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다. 교리를 가르쳐야 할 교회가 오늘날 기독교의 바른 교리를 가르치고 있는지 우리는 심각하게 자문해 보아야 한다. 둘째, 성경의 목적은 우리를 책망하는 것이다. 나 자신의 잘못된 부분에 대해 책망하는 것이다. 설교가 코미디가 되고 예배가 감동적 노래를 반복해 부르는 노래 모임으로 전락할 때 말씀의 진리 앞에서 내가 책망받는 모습을 교회에서 찾기는 점점 힘들어진다. “왜 꿈이 없으세요?” “왜 여러분이 가진 그 큰 가능성에 못 미치는 생활을 사십니까?”하는 책망을 가장한 ‘아부’성의 책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셋째, 성경의 목적은 그 책망을 통해 진리 앞에서 바르게 하도록 하는 것이다.
넷째, 성경의 목적은 우리를 의롭게 자라도록 훈련하는 것이다.
- 성경은 긍정적 사고방식과는 반대로 ‘진리를 위한 싸움’을 싸울 것을 말하고 있다.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유3)
- 교회사의 참된 설교자들은 오늘날의 긍정적 사고방식을 외치는 설교자와는 다르다
로이드 존스는 말한다. “당신이 당신 자신의 본성이 죄악 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면, 바울이 성경에서 말하듯이 당신이 ‘죄로 죽은 상태’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면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세주로 알고 있는 사람이 결코 아닙니다.” 존스 목사님은 오늘날 설교가 근본적으로 잘못 되었다고 믿고 있었다. 그 가장 큰 증거는 무엇보다 강단에서 외쳐지는 말씀이 듣는 이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무릎꿇도록 하는, 성령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역사가 전혀 일어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한번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놓고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한 적이 없는 사람들을 앞에 앉혀 놓고 그들을 달래 주고, 위로하며 그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그런 설교는 결코 하나님의 성령께서 일하시는 설교가 아니라고 확신했다.
스펄전은 말했다. “이 세상이 계속 존재하는 한 우리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필요하다. 단지 위로자로서의 성령 하나님 아니,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시는 존재로서의 성령 하나님 말이다. 이 죄악된 세상을 보게 하시고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심판을 보게 하시는 그런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필요하다. 진정으로 거듭나는 사람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필수적인 특징이 있다: 죄에 대한 깊은 깨달음과 아픔이 있다. 그리고 그 죄를 놓고 예수님을 바라보는 구원에의 갈망이 있다. 그는 내면에 근본적인 변화를 체험한다. 이와같은 모습들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 그 사람이 진정으로 거듭났다고 보기 어렵다.”
- 긍정적 사고방식은 성경이 말하는 자족하는 태도와는 다르다
성경이 말하는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은 심리학적인 이유로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라는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께 대한 은혜와 구원에 대한 기쁨과 감사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성경이 말하는 자족과 감사의 원천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며, 나를 위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 나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의 사랑, 이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을 우리의 마음에 부어 주시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인해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서 오는 기쁨과 감사의 삶은 심리적으로 인간의 선함을 믿고, 자신을 사랑하며 긍정하는 데서 오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이 결코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감사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능력으로 감사하는 것이지 심리학적으로 자기에게 최면을 걸어 긍정적으로 감사하는 삶을 살자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감사이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이 긍정적 사고방식은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은혜, 성령의 능력을 부정하는 기독교의 무서운 적이다. P 254
3. 심리학의 세 번째 가면: 성공의 법칙
“자연주의 종교에 따르면 당연히 인간도 자연의 일부, 즉 신의 일부이다. 이 세상의 인간은 자신 속에 있는 신성을 발견하고 그 신성을 활용하면서 신처럼 능력 있게 살아가는 인간과, 자기 속에 있는 신성의 능력을 모른 채 비참하게 살아가는 인간으로 나뉠 수 있다. 즉, 자신이 백조인데도 오리인 줄 알고 미운 오리가 되어 사는 사람들과 백조가 되어 유유히 하늘을 날아다니는 사람으로 나뉠 수 있다는 것이다.” p. 257
“자연법칙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 또는 생각이 현실을 창조한다.’라는 법칙이다. 즉, ‘마음먹은 대로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된다는 마음(mind)을 먹으면 되는 것이고 안 된다는 마음을 먹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 속에 어떤 현실을 품는 것이 실제 일어나는 현실보다 우선한다는 것이다.” p.258
- 마음먹은 대로 현실을 만들어 내는 두 가지 방법은 말과 상상이다.
1) 성공의 법칙 1: 말한 대로 된다.
성경은 인간의 말을 중요시 한다. 그러나 인간의 말에 창조의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의 창조 사건의 예를 들면서 마치 우리 인간에게도 이와 같은 능력이 있다는 식으로 잘못 가르치고 있다.” “성경이 인간의 말을 중요시 하는 이유는 인간의 말이 인간의 마음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말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담는 그릇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따라서 말을 조심하라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바로 지키라는 의미이다. 성경이 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말이 현실을 만들어 내는 힘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p. 263
- 현실을 창조하는 말의 법칙 1: 주문
“현실을 지배하는 힘을 가진 말의 첫 번째 종류는 힌두교에서 흔히 만트라(mantra)라고 부르는 무의미한 말의 반복, 우리말로 하면 주문이다.” p. 264 만트라를 통한 수행의 모습은 여덟 살 때에 이미 힌두교의 요기(요가의 달인을 일컫는 말)로 인정받고 주변 사람들에게 안수를 하면서 스승으로 추앙받던 사람이 자신이 여덟 살 때 했던 전형적인 수행의 모습을 적은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나는 대부분의 정통 힌두교도와 마찬가지로 주문 그 자체 속에 어떤 신성이 들어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주문은 그 자체로 그 주문이 요구하는 현실을 만들어 낸다고 믿었다. 가야트리 만트라는 정확하게 반복함으로 또 매일 태양을 향해 바른 자세로 드리는 예배를 통해 주문은 현실이 된다고 믿었다.” p. 265
- 기독교 안에 스며든 주문
저자는 오늘 우리에게 심각한 것은 인격체이신 성경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교회 내에서도 이런 주문의 위력을 신봉하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이다. 저자는 몇 달 전 참석했던 한 새벽기도회에서 강단에 혼자 앉은 담임 목사가 30분이 넘도록 “인 치시옵소서.”라는 말만을 반복하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꼭 “특별한 억양과 발음을 포함한 이 구절을 수백 번, 수천 번 반복하는 것을 통해 주문 같은 기도의 모습”을 보게 된다.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이 바른 기도인지 정확히 알려 주고 있다. 예수님이 기도와 관련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 하나는 바로 중언부언하지 않는 것, 즉 기도를 의미 없는 반복, 주문처럼 하지 말라는 점이었다.” p. 269
- 현실을 만들어 내는 말의 법칙 2: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말
“현실을 만들어 내는 실질적인 힘을 가진 말의 두 번째 종류는 ‘긍정적인 말’이다. 단순한 긍정에서 한 걸을 더 나아가 ‘이미 현실화된 것으로 간주하는’ 적극적인 말의 사용이 이 법칙의 핵심이다.” p. 271 “‘이미 현실화된 것으로 간주하는’ 말의 사용은 교회 내에서 ‘믿음’이라는 단어로 둔갑되어 사용된다.……그 믿음이라는 말 속에 사실은 하나님께 복종하는 피조물의 믿음이 아닌 성공의 법칙을 알고 활용하는 지배자의 믿음”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p. 271 조엘 오스틴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기억하라. 우리의 하는 말은 바로 예언이 되고 바로 성취가 될 것이다. 우리의 말로 우리는 무엇이 닥칠지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내가 하는 말이 나의 미래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래를 예언하고 미래를 만들 수 있다. 당신의 말로 미래를 만들어야 한다. 좋은 것들을 부르라. 승리를 부르라. 건강을 부르라. 행복이 넘치는 삶을 부르라. 그것이 바로 당신의 미래, 당신의 현실이 될 것이다.” p. 272 Lskewood Community, 2005. 6. 28
조엘 오스틴은 우리의 말이 우리의 행복한 미래를 만들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질지 아닐지의 여부는 ‘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뜻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요 15:7) ‘하나님은 인간의 혀에 놀아나는 그런 신이 아니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을 따라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말 또는 말하는 특권을 허락하셨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은 무엇보다 우리를 하나님과 교제하는 인격체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말은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있는 것이지 하나님을 조정하고 하나님을 망령되이 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조정하고, 하나님께 명령하듯이 하는 말을 기도와 믿음이라는 단어로 아무리 포장해서 사용한다고 해서 ‘말한 대로 된다고 하는 말의 법’이 결코 성경적으로 정당화 될 수도 없고, 기독교적인 것으로 인정될 수도 없다.” p.285
2) 성공의 법칙 2: 상상하는 대로 된다.
미국의 대표적인 동기부여 연설가이자 저술가인 브라이언 트레이시(Brian Tracy)는 “우리 속에 작게는 우리 주변의 환경, 크게는 우주를 조정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p. 286 상상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널리 사용되고 있는데, “‘상상으로 그림을 그리라! 그러면 그린 대로 된다.’, ‘꿈을 꾸라! 그러면 꿈대로 된다.’, ‘분명한 목표를 설정하라. 그러면 목표한 대로 이루어진다.’라는 식의 내용이 오늘 우리 교회 안에서 버젓이 성경적인 것처럼 설교되고 있다.” p. 296
저자는 한 실례로서 얼마 전 여호수아 18장 1~10절을 바탕으로 국민일보에 “축복 그림을 그려라.”는 제목으로 실린 설교 일부분을 소개한다.
“……중략……그녀가(오프라 윈프리) 오늘 최고의 성공자가 된 것은 성경을 통해 꿈을 갖게 됐고 긍정적인 사람으로 성공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축복의 그림을 그리면 됩니다. 행복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행복의 그림을 그리고, 성공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성공의 그림을 그리고, 축복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축복의 그림을 그리면 됩니다……중략……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서 승리하고 성공하며 자신 있게 살고 있는 사람들은, 멋지게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마음 속에 믿음과 신념을 가지고 살고 사업 계획을 그리고 꿈꾸며 이루었습니다.……중략……. 성도 여러분, 행복을 결단하십시오. 축복의 그림을 마음 속에 그리십시오. 하나님은 약속대로 주실 것을 믿습니다. 하루하루 주님이 함께 하는 신앙의 삶을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pp. 296-7 국민일보 2007년 3월 6일자 31면.
'축복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축복의 그림을 그리면 됩니다‘라는 공식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이것은 심리학의 상상기법의 공식일 뿐이다. 위대한 크리스천인 것처럼 소개되는 오프라 윈프리는 크리스천이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쇼와 잡지를 통해 뉴 에이지 사상의 주요 사상가들을 미국인의 일상 삶 속에 ’영성‘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스럽게 파고들도록 만들고 있는 인물이다. 미국인들이 기독교와 뉴 에이지가 무엇이 다른지 전혀 구별하지 못하도록 혼동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우리 기독교인으로서는 가장 경계해야 할 인물이다. 우리는 윈프리가 한 말보다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에 더 귀를 귀울여야 한다. 왜 성경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프로이트나 나폴레온 힐과 같은 사람들의 가르침을 진리인양 떠드는 오프라 윈프리의 말을 성경보다 더 중요시하는가? 참으로 가슴 아프고 통탄할 일이다.
- 성경이 말하는 바른 비전은 하나님에 대한 열망이다.
저자는 “오늘날 교회에서 가장 자주 사용되는 상상기법과 관련해서 가장 오용되거나 남용되고 있는 단어는 ‘비전’ 또는 ‘꿈’”이라는 단어를 꼽는다. “상상기법에서 ‘상상력으로 그림을 그리라.’라는 내용이 요즘은 교회에서 ‘꿈을 가지라.’, ‘비전을 품으라.’라는 말로 많이 유통되고 있다. 오늘날 교회가 얼마나 비전과 꿈을 좋아하는지 꿈과 비전이 들어가는 교회 이름이 많이 생기고 있을 정도이다. 물론 꿈과 비전이라는 말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꿈과 비전을 품는다는 것 자체도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교회의 ‘꿈과 비전’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너무 많은 기독교인들의 비전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자신의 욕구와 욕망이다. 개인의 꿈은 불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세속적 성공’과 별로 다르지 않고, 교회 성장의 비전은 기업 확장의 비전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그리고 자신이 비전을 품기만 하면 하나님이 당연히 자신의 비전대로 이루어 주시는 분인 것처럼 하나님을 자신의 비전 달성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물론 참된 교회, 참된 크리스천도 비전과 꿈을 가진다. 그러나 참된 성도의 비전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말씀해 주시는 비전이다.” pp. 298-9
그렇다면 성도들이 가져야 할 참된 비전, 참된 꿈은 무엇일까? 저자는 에드워즈를 통해 우리가 품어야 할 꿈과 비전은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거룩에 대한 비전이라고 말한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무엇보다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만남 즉, 실존적인 하나님 체험입니다. 에드워즈는 하나님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아는 것을 자기 신학의 핵심 내용으로 삼고 있습니다. 에드워즈가 체험한 하나님은 영광의 하나님이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은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아름다움의 절정이었습니다.” p. 299 백금산 편저, 『조나단 에드워즈처럼 살 수는 없을까』, 부흥과개혁사, 2003, p. 154.
“자신의 욕망을 꿈과 비전이라는 이름으로 말하면서 말과 상상이라는 기법을 통해 이 비전을 이루려고 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죄인의 가장 큰 특징이다. ‘말한 대로 된다.’ 혹은 ‘상상한 대로 된다.’는 성공의 법칙을 주장하면서 자기의 욕망을 달성하려고 하는 사람은 사실 자기 자신을 우상숭배하고 있는 것이다.” p. 300
- 성공의 법칙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주의 종교에 깊게 물든 기독교
“말과 상상력이라는 성공의 법칙을 가르치는 사람들에게는 앞에서 살펴본 힌두교 구루의 말처럼 이 세상에 ‘기적’은 존재하지 않는다. 병이 나은 사람에게 겉으로는 “기적입니다. 하나님이 고쳐 주셨습니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병이 치료되는 성공의 법칙을 알고 적용한 사람에게 ‘병 고침’이란 하나님이 고쳐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연히 반응한 것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즉, 믿음을 발휘하는 인간에게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존재에 불과한 하나님을 부르는 이들에게 무슨 기적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인간의 깊은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가능성의 공식들을 꺼내 쓰기만 하면 네가 신이 된다.’는 노골적인 자연주의 종교의 가르침이나 ‘믿음을 발휘해서 원하는 것을 얻으라.’는 식의 잘못된 기독교 가르침은 포장만 다를 뿐 내용은 같다.” p. 301
- 자연주의 종교는 인간이 만든 종교이다
종교는 인류 전체에 퍼진 ‘신경증’‘인 동시에 인간이 스스로의 필요 때문에 만든 창작물이라고 말한 프로이트의 말은 일리가 있다. 자연주의 종교야말로 인간이 ’창조한‘ 종교이기 때문이다.
- 심리학은 대표적인 자연주의 종교의 하나다
내가 나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이 원초적인 욕망에 이론적 토대를 놓은 것은 융을 비롯한 심리학자들이다. 심리학은 자연주의 종교와 떼어 생각할 수가 없다. 이것은 “이제 인간과 자연 사이의(단절되었던) 균형이 정상적으로 복원되어야 하고 이 과정에서 심리학이 영적 깨달음에 필요한 공헌을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 융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엄밀히 말해 심리학은 예전부터 존재하던 동양의 신비주의 사상들을 과학적으로 들리도록 그럴듯한 이름을 붙여 준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 뉴 에이지는 다가오는 시대의 가장 무서운 자연주의 종교가 될 것이다
그 이름을 ‘새로운 생각’이라고 부르든 ‘사이언탈러지(Scientology)’라고 부르든 관계 없이 이 뉴 에이지 사상들은 인간 속에 있는 신성을 깨우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그렇기에 하나같이 이들은 겉으로 ‘사랑’을 내세운다. “나도 신, 너도 신, 그러니 우리 신끼리 서로 사랑해야지 어떻게 싸울 수가 있나?”라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과학이 주는 미래에 희망을 걸었던 것이 고작 200여년 전이다. 그러나 과학이 아니었다면 그렇게까지 비참하지 않았을 20세기의 전쟁들을 겪으면서 인간은 이제 과학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또다시 비과학의 세계로 눈을 돌리고 있다. 그러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이 비과학의 세계도 아주 그럴듯한 ‘과학적’용어들과 ‘종교적’용어들로 포장되어 인간을 안심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 꿈을 실현시킬 힘은 인간의 말과 상상에 있다고 가르친다. 과거 인간은 몸으로 돌을 날라서 바벭
탑을 쌓았지만 이제는 말과 상상만으로 하나님께 도달하는 바벨탑을 쌓을 수 있게 되었다. 이 바벨탑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선포해야 할 우리 교회가 도리어 이 바벨탑을 세상과 함께 쌓고 있지는 않는가?
05 성경은 참으로 충분한가
기독교는 성경만으로 ‘충분한 기독교’이다.
- 심리학은 성경이 말씀하는 인격적인 창조주 하나님 대신 알 수 없는 미지의 에너지로서의 신 또는 내 속에 존재하는 무의식이라는 이름의 또다른 나의 모습으로 바꿔치기 했다. 또한 심리학은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죄성 대신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인간을 주장하고 있다. 이렇듯 노골적으로 성경의 진리에 대해 공격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성경 말씀을 토대로 믿음을 지키고 싸워야 할 교회가 도리어 심리학을 마치 성경 외에 하나님이 주신 또 하나의 계시인 양 모시고 있는 현실은 매우 안타깝기 그지 없다. 교회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성경의 가르침을 깊이 있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렇게 말씀의 진리에 무지한 이유는 성경의 충분성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1) 성경에 대한 일반적으로 오해 3가지.
- 오해 1. 나한테 확 필이 꽂혀야 한다.
그 때야 비로소 말씀은 단순히 문자에서 살아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첫째는 나한테 확 필이 꽂힐 때 말씀은 단순히 문자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느낌이 팍 살아서 내게 꽂히든 꽂히지 않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여전히 변함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 가지는 가장 잘못된 자세 중의 하나가 바로 ‘느낌’ 중심으로 성경을 읽으려는 것이다. 우리가 너무 감정적으로 성경을 대하려고 하기 때문에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 전체의 내용을 바르게 알려 하기보다 ‘올해의 말씀’이니 ‘이 달의 말씀’이니 하는 이름을 붙여 성경 한두 구절을 마치 주문처럼 취급하려 한다. 성경 말씀이 살아서 우리를 온전케 하는 능력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의 귀를 즐겁게 만들어 주는 세상의 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고, 세상의 이론에 따라갈 수밖에 없게 된다. ” p. 311
- 오해 2. 말씀을 많이 알면 알수록 머리만 커지고 가슴은 차가워져서
기도를 열심히 안 하게 된다.
이것은 가장 무지한 오해이다. 성경을 깊이 아는 사람의 가슴은 차가울 수 없다. “말씀과 기도와 관련된 또다른 위험한 생각은 ‘말씀은 몰라도 기도는 잘 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참으로 성경이 금하는 것 가운데 하나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른 채 기도하는 것에 대해 경고 하고 있다.”
“사람이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참 28:9).
“우리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제대로 모르면 어떻게 하나님께 제대로 기도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한 채 기도하면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 반대 되는 자기 욕심으로 기도할 수 있다.……우리 성도들의 기도는 근본적으로 나의 뜻을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기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모르고 기도를 열심히 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말씀은 모른 체 기도를 열심히 하는 자신의 ‘의지력’을 마치 무슨 신앙의 훈장이라도 되듯이 자랑하는 잘못은 더더욱 범하면 안 된다.” pp. 312-3
- 오해 3. 성경의 가르침 중 상당수는 오늘의 현실과 맞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성경은 고대에 우리와는 다른 문화권에서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오늘 우리 현실과는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현재의 유행하는 사조대로 살면서 성경의 내용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 p. 313 그러나 로마서 1장은 인간의 동성애를 지적하고 있으며 창세기 9장 6절에는 살인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우리가 성경의 진리를 하나하나 포기할수록 죄와 책임은 사라지고 병과 치료가 등장한다. 그리고 병과 치료가 가득한 사회가 주는 고통의 대가를 우리의 자녀들이 고스란히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우리가 성경의 진리를 현대의 주장들과 바꾸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진리의 맞바꿈은 미국을 기점으로 한국의 사회와 교회 속으로 더 빨리 파고들고 있다.
죄가 무엇인가? 수많은 정의가 있을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피조물인 내가 창조주 대신 나신의 주인이 되어 창조주가 정한 질서에 거스르는 삶을 사는 것이다.
- 성경으로 돌아가자
지금까지 인류 역사를 통해 진행된 사탄의 모든 공격은 사실상 성경에 대한 공격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우리 시대에 가해 오는 사탄의 이 공격이 얼마나 교묘하고 무서운지는 우리가 조금만 눈을 뜨면 잘 알 수 있다. 우리가 매주일 듣는 교회의 설교에서는 성경 말씀이 장식품으로 사용될 뿐 2006년 최고의 화제 ‘하인즈 워드’를 비롯한 각종 이야기들로 설교의 내용이 가득차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벌써 사탄의 공격에 교회가 얼마나 무너져 내렸는지 보여 주는 단적인 예이다. 사탄의 공격에 넘어진 시대에는 교회가 깊은 영적 암흑에 빠져 들어간다. 그러나 교회가 다시 각성되고 부흥될 때는 하나님의 말씀이 회복된다. 대표적으로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날 때 가장 중요한 표어는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오늘 우리가 다시 외쳐야 할 것은 종교개혁의 선배들처럼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어야 한다.
- 성경으로 돌아가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성경의 충분성을 믿지 못하는 불신이다.
‘성경이 참으로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되는 데 충분한가?’라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한 방법은 오로지 한 가지 밖에 없다. 그것은 내가 먼저 성경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을 알기 위해서는 일단 성경을 읽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 성경의 충분성을 알기 위해 우리는 성경을 깊고 넓게 그리고 간절히 읽어야 한다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 내가 주의 법도를 영원히 잊지 아니하오니 주께서 이것들 때문에 나를 살게 하심이니이다.”(시 119:92-93)
다윗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자신의 내면을 드러나게 하면서 고통만을 주는 회초리가 아니라 동시에 자신을 살리고 자라게 하는 생명 그 자체였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처럼 여기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참고할 여러 자료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하고 있는가?
-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에 대해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갖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2:2)
-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시대는 복받은 시대다
지금 우리 곁에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피땀 흘린 수고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다양한 좋은 성경 주석들과 사전들이 있다. 관주성경과 스터디 바이블도 있다.
- 성경의 충분성을 알기 위해 우리는 성경에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을 단순히 읽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믿고 순종을 해야 한다. 우리가 말씀에 더 순종할수록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짜 진리true truth’이며 그 말씀이 정말로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데 충분하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우리의 순종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과 믿음과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순종하는 자에게 성경은 참으로 우리 영혼을 위해 충분한 책이다. pp. 324-5
“성경은 하나님이 누구시고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말해 줄 뿐 아니라 우리 인간이 지금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를 우리에게 명확히 알려 주고 있다. 성경은 이 세상이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또 인간이 왜 지금과 같은 상태가 되었으며 또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길과 앞으로 인류에게 어떤 일이 생길지에 대해 명확히 보여 주고 있는 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심리 문제에 대해 성경과 정반대 되는 진리를 가르치는 심리학의 이론에 따라 살아갈 것이 아니라 성경의 충분성을 믿고, 성경이 말하는 인간에 대한 진리를 받아들이며, 성경이 말하는 인간에 대한 진리대로 살아가야 한다.” p. 327
글을 닫으며
저는 오늘의 기독교를 한 마디로 ‘부족한 기독교’라고 말하고 싶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심리학이나 마케팅이나 엔터테인먼트의 도움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심리학과 경영학과 엔터테인먼트의 기법들을 적극적으로 사용해야만 한다고 믿고 또 그렇게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방법으로 교인 수를 많이 모은 교회들이 자신들의 노하우를 상품으로 만들어 아직 교인이 많지 않은 절대다수의 한국교회 목회자들을 고객으로 삼고 판매하고 있는 현실을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다투어 개척교회나 소형 교회 목회자들은 이런 매력적인 상품을 찾아 오늘도 이 교회, 저 교회를 벤치마킹하려고 하는 안타까운 현실을 보기 때문이다. 이제 오늘의 기독교는 심리학과 경영학과 연예 오락의 도움 없이는 스스로의 힘으로 지탱할 수 없는 수준까지 전락한 듯하다. 그래서 저는 이러한 오늘의 현실적인 기독교 모습을 ‘부족한 기독교’라고 불렀던 것이다.
저도 한때 이런 ‘부족한 기독교’ 안에서 생활하면서 그것이 기독교의 전부인 줄 알고 그 안에서 즐기며, 그 안에서 안주하며 살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성경의 진리를 점점 깊이 깨달아 가면서 오늘 우리의 ‘부족한 기독교’는 사실 ‘왜곡된 기독교’이며 ‘잘못된 기독교’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갑자기 잠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그래서 더욱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독교는 본래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기독교다운 기독교, 교회다운 교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충분한 기독교’가 ‘부족한 기독교’가 된 근본적인 원인이 바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교회의 영적 삶에 대한 충분한 진리라는 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저는 앞으로 오늘의 우리 교회가 성경과 반대되는 여러 가지 사상을 가진 세상의 이론을 추종하지 않고, 또 적극적으로 이런 세상의 이론을 성경의 진리로 굴복시켜서 교회 안에서 추방하게 되기를 소원한다. 그래서 저는 현재 우리 시대 교회가 가장 강력하게 영향을 받고 있고, 또 전폭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세상의 대표적인 3가지 이론 내지 사상인 심리학, 마케팅, 엔터테인먼트로부터 교회가 자유와 해방을 얻고 성경만을 의지하는 ‘충분한 기독교’가 되는 데 작은 불씨라도 되고자 ‘부족한 기독교’에 대한 원인과 해결책을 제시하는 3부작의 책을 쓰고자 한다.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옥성호, 부흥과개혁사, 2007
추천의 글- 백금산 목사
전 장신대 학장을 역임하신 맹용길 교수님은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책을 읽고 “필자는 본서를 읽고 한국 교회에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저자에게 감사한다. 기성세대가 잠잠하니까 하나님께서 저자를 들어 하나님의 위치를 다시 찾으시는 소리로 들었다.”라고 서평을 해 주셨다. 그리고 “삼부작의 남은 책들을 읽을 수 있게 해 주면 감사하겠다.‘라는 기대감을 피력하셨다. 이는 제가 성호 형제의 책을 처음 읽었을 때와 같은 마음이었다. 아마도 이 책을 읽었던 수많은 독자도 같은 심정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아마도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 가장 큰 도전과 충격을 받을 부분은 최근 수 년 동안 한국 교회 성장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었던 마케팅 교회의 모델인 빌 하이벨스의 ‘윌로우크릭 교회’와 릭 워렌의 ‘새들백 교회’에 대한 분석과 평가일 것이다.
이 책이 마케팅 교회에 물든 교회의 놀이터에 던져진 폭탄이 되어, 우리의 교회는 지금 성경의 진리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가, 아니면 마케팅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가를 진지하게 묻는 일들이 생겨났으면 좋겠다. ‘오늘 우리의 모습이 과연 성경적인가?’ 이 질문을 던지는 순간부터 교회 개혁은 시작되며, 이 질문을 멈추는 순간부터 교회 부패는 시작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대의 유행과 풍조, 대형 교회의 모습, 유명한 신학자와 목회자의 견해가 우리의 기준이 아니라 오직 성경이 우리 믿음과 행동의 기준이 되어야 함을 옥성호 형제의 책은 다시 한 번 우리를 일깨워준다.
글을 열며- 옥성호
기독교의 진리를 온 맘으로 믿으면서도 아무런 갈등 없이 마케팅을 통해 교회를 운영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저는 이 책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너무 당연히 여기는 많은 모습이 과거에는 전혀 당연하지 않았음을 보여 주고 싶다. 오늘의 익숙함 뒤에 숨은 위험들을 들추어 내려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왜 마케팅 기법들로 교회를 운영하는 것이 잘못인지 설명하고자 한다. 성경의 말씀에 근거해서 왜 마케팅이 교회 속에 들어와서는 안 되는지 증명하려고 한다.
데이비드 웰스는 그의 책 “윤리실종‘에서 오늘날의 환경을 이렇게 말한다.
‘사회에서 신기술이 기존의 기술을 점차 빠른 속도로 대체하면서 제품 수명의 주기가 급속히 짧아졌을 뿐 아니라, 삶 속에서 영원함의 자취도 대부분 사라졌다.’
왜 오늘날 마케팅이 교회 속에서 이처럼 득세하고 있는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마케팅이 약속하는 즉각적 효과의 유혹 때문이다. 말씀의 능력과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의지하기 보다 즉각적인 결과와 반응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성령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 속에서 당신의 때에 맞게 역사하심을 믿고 기다리기보다 어떻게 하든 설교를 듣고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일어나기 원한다. 제가 존경하는 한 분은 무려 다섯 번에 걸쳐 결신을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크리스천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결신하는 빈도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 사람에게 기독교는 점점 더 가볍고 피상정인 종교가 될 뿐이다. 마케팅으로 물든 교회가 만들어 낸 한 현상이다. 마케팅은 기다리지 못하는 인간의 즉각성을 가장 잘 충족시킨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보다 마케팅의 약속은 훨씬 더 매력적이다.
과거 루터의 시대가 말씀의 권위 대신 전통의 권위에 의지하던 시대였다면, 오늘은 말씀의 권위 대신 마케팅이 약속하는 즉각적인 결과, 심리학이 주는 자기 만족, 엔터테인먼트가 제공하는 달콤함에 의지하는 시대이다. 어느 시대 어느 곳을 막론하고 교회에 위기가 닥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늘날 부흥을 이야기하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기 위한 개혁을 외쳐야 한다.
01 마케팅 교회란 무엇인가
1. 마케팅이란 무엇인가
드러커, “마케팅의 최고목표는 고객의 필요에 대한 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기업이 만드는 상품 또는 서비스가 고객의 욕구에 딱 맞아떨어져 별도의 판매가 필요 없도록 하는 것이다.”
마케팅은 가치가 동일한 A와 B의 교환을 통해 고객의 필요를 채우는 모든 활동이다.
2. 교회 마케팅이란 무엇인가
데이비드 웰스는 그의 책 “거룩하신 하나님”에서
‘1970년대에는 신앙고백과 신학을 강조한 복음주의의 특징이 퇴색하면서 여과되지 않은 실용주의 앞에 교회가 무방비로 노출되었던 탓에 기교가 그 중심을 차지해 버렸다. 기교를 얻기 위해 신학을 희생한 셈이다. 문화에 잘 순응하는 새로운 복음주의가 대두되면서, 경영자, 감독관, 관리자, 마케팅 전문가가 핵심인물로 각광받았고 전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신학자들을 대신하게 되었다. 이 새로운 유형의 지도자들은 교회 성장이나 교회 성장을 위한 모든 기독교 사역이 본질적으로 기업을 성장시키는 일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교회 성장은 교회를 훌륭하게 마케팅 하는 방법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점차 팽배해지고 있는데, 조지 바나는 이런 입장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조지 바나는 교회가 마케팅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날 정체 되고 있다고 말한다. 급변하는 환경에 교회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바나, ‘교회마케팅이란 교회가 목표로 하는 사람들의 영적, 사회적, 정서적, 물질적 필요를 충족시킴으로써 교회의 사역 목표를 달성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목표 고객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 교회가 수행하는 모든 사업 및 사역 활동을 가리킨다.’
바나, ‘복음이라는 상품을 통해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 마케팅이다.’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는 마케팅이 없이는 교회의 생존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조지 바나는 다음과 같은 어록을 쏟아 놓았다.
‘목사는 우선 유능한 사업가로서 교회를 활력있게 유지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에 많이 참석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여러분이 불신자에게 전도한다고 할 때 그것은 사실상 교회 마케팅을 하는 것이다.’
‘마케팅 지향적인 교회는 교회의 목적과 상품(복음)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교회도 사업이다.’ ‘예수님은 마케팅 전문가다.’
데이비드 웰스는 조지 바나가 그 동안 ‘개인’의 영역에서 취급되던 ‘치료’라는 개념을 마케팅이라는 이름을 빌어 교회 차원으로 확대 도입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비록 구원은 받았지만 구원이 자아 깊숙이 침투하지 못해 전인격적이고도 완전한 구원을 체험하지 못하는 개인의 개념을 작거나 성장이 멈춘 교회에 적용하고 있는 셈이다. 조지 바나에게 있어서 전인격적 구원을 받지 못한 개인에 해당되는 교회는 ‘작거나 성장이 멈춘 교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찮다’고 생각하며 마케팅을 거부하는 교회는 기능 장애가 있는 교회이다. 따라서 개인 차원에서 심리 치료의 각종 기법을 통해 구원을 자아 깊숙이 침투시켜야 하듯 마케팅이라는 치료를 통해 교회 깊숙이 스며 있는 ‘무성장 교회병’을 치료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교회 마케팅 주창자들의 성경 왜곡
* 예수님도 친히 계획을 세우는 데 실패한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꾸짖으심으로써 계획의 중요성을 가르치셨다(눅 14:28-30).
* 어리석은 다섯 신부의 비유는 성공적인 마케팅을 위해서는 필요를 예견하고 이를 충족시키기 위해 미리 준비해야 하는 것을 가르쳐 준다(마 25장);
* 씨 뿌리는 비유는 신앙을 마케팅하는 것이 성공할 수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마 13장).
성경의 가르침을 마케팅에 필요한 전략과 전술의 차원으로 읽기 시작할 때 발생하는 왜곡은 그 한계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이다.
마케팅과 비전 그리고 리더십
마케팅의 안경을 쓰고 교회를 바라보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교회 조직의 효율적 운영에 그 관심이 집중되기 마련이다. 교회 속에 있는 문제의 원인을 지도자의 리더십 부재 또는 비전의 부재로 인식한다. 성경이 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에 대해조차도 ‘죄’라는 말을 여간해서 쓰지 않는다. 모든 문제의 원인은 얼마든지 개선 가능한 비전의 결여 또는 리더십의 결여로 이해한다.
이런 시각은 당연히 예수님을 볼 때도 그가 인간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오신 구세주, 인간이 되신 하나님으로 이해하기보다는 비전과 리더십이 결여된 사람들의 반대에 서 있는 비전을 주는 지도자 또는 리더십의 대가라는 식으로 접근하기 마련이다.
조지 바나 뿐만 아니라 수많은 교회들이 사람(고객)들의 필요를 채워 줌으로써 교회경영에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마케팅 교회란 한마디로 ‘마케팅을 필요로 하는 상품을 갖고 있는 교회’이다.
3. 교회가 마케팅 해야 할 상품은 무엇인가
- 그들이 말하는 상품이란 복음을 의미하며 그들은 잠재 고객, 달리 얘기하면 아직까지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의 필요를 파악하는 데에 교회의 가장 큰 에너지를 쏟는다.
분당의 모 교회- 흡연실을 만들고, 스포츠문화 센터를 YMCA와 공동으로 운영하고, 교회내 가장 좋은 공간에 지역 주민들이 자유롭게 교회를 찾을 수 있도록 했다.
2005년 12월 USA TODAY라는 미국의 대표적인 신문에 이런 기사가 났다.
‘올해의 경우 크리스마스가 일요일과 겹치자 오늘날 크게 성장하고 있는 미국 전역의 대형 교회들은 크리스마스 하루를 쉬기로 결정했다. 윌로우 클릭 교회는 그 대신 가정에서 예배를 보는 데 필요한 DVD를 제작해서 제공하기로 하였다.’
최고로 성공한 마케팅교회
텍사스에 위치한 조엘 오스틴의 레이크우드 커뮤니티 교회다. 그는 ‘긍정의 힘’의 저자이다.
2003년 하반기에 이미 출석하는 사람이 2만5천을 넘어섬으로 출석인 수로는 시카고의 윌로우크릭 또는 켈리포니아의 새들백 교회와 같은 쟁쟁한 교회들을 제치고 미국 전체에서 1위를 차지했다.
4. 왜 교회는 마케팅을 필요로 하는가
마케팅이 가장 필요 없는 복음을 가지고 마케팅을 가장 열심히 하는 비극이 지금 교회 속에서 벌어지고 있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우리가 손보지 않으면 복음이 현대인에게 더할 나위없이 흥미로운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믿는다는 사실뿐이다” - 데이비드 웰스 -
5. 마케팅 교회에 대한 평가
마케팅 교회는 기존의 교회들로 하여금 교회의 시선을 교회 안에서 밖으로 돌려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공헌을 하였다.
하지만 세상을 향하는 마케팅 교회의 방향은 올바르지만 마케팅 교회가 들고 나아가는 내용은 잘못되었다. 그들은 본질을 놓고 나아갔다. 따라서 그 외침이 세상의 외침과 별반 다르지 않다.
마케팅 교회의 세 가지 확신
1)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거부하는 것은 고리타분하게 전통에만 집착하는 교회의 모습이지 예수님의 복음이 아니다
2) 드라마를 포함한 다양한 방법을 통해 복음을 제시하지만 복음의 핵심 메시지는 전혀 변하지 않는다
3) 당장의 욕구를 채워 주라. 그러면 사람들은 진리를 향해 점점 더 나아갈 것이다
- 이 세 가지 확신은 마케팅 교회가 본질적으로 인간에 대해 지극히 피상적이며 낙관적인 사고에 바탕을 한 인본주의에 물들어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02 마케팅 교회의 시대적 배경 : 포스트모더니즘과 프래그머티즘
1. 포스트모더니즘
- 프리모더니즘(pre-modernism) : 초월적 존재 즉, 성경의 하나님의 존재를 믿던 시대. 유일한 절대 진리 신뢰.
- 모더니즘(modernism) : 계몽주의. 초월적 존재에 대한 포기. 성경의 권위에 대한 인간의 도전. 인간의 이성, 과학에 절대적 권위 부여. 인간의 자아 연구 활발.
-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 초월적 진리보다는 인간의 이성과 과학을 믿는 시대. 상대적 진리. 관용. 공동진리
존재하지도 않는 절대적 진리 대신, 개인마다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 내는 진리를 믿는다.
누구나 인정하는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진리 대신 개인이 스스로 창조해 내는 상대적 진리이다. 확실히 느껴지는 것만을 진리로 간주한다. 가장 중요한 가치는 바로 나의 ‘존재감’이다. 살아있는 내가 느끼는 존재감을 최대한 채워 주는 것이 바로 진리이고 선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한 질문은 무엇이 내게 더 좋은 느낌을 주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대체된다. 내게 더 좋은 느낌을 주는 것이 옳은 것이고 진리이다. 나의 진리가 당신의 진리가 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인간에 대한 연구를 자아에 대한 연구로 대체시켰다
데이비드 웰스는 다른 누군가에 대한 관심은 갖지 않은 채 내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만 관심 갖는 인간을 ‘심리학적인 인간’이라고 표현한다. 이 심리적인 인간의 가장 큰 목표는 스스로가 느끼는 ‘만족감’이며 오늘날 인간이 경험하는 자아에로의 함몰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자아를 중시하는 인간은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려주는 그 어떤 가르침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지 않고 내가 생각하는 나에 대한 독립적인 정의를 나 스스로 내린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각자가 내린 정의에 충실한 삶을 살도록 충동질하는 사회이다. “나는 나야!”라고 외치는 광고 문구가 전혀 낯설지 않게 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책임을 사라지게 한다.
하나님 앞에서 해결해야 할 죄가 사라진 인간이 자신을 채우고 만족시키는 데만 열중하는 존재로 바뀔 때 우리 속에 있었던 책임이라는 중요한 개념이 사라진다. 하나님 앞에서도 질 책임이 없는 인간이 나와 동일한 다른 인간에게 어떤 책임을 느껴야 한다는 발상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이는 성경이 가르치는 법칙, 즉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사랑하지 않는 한 결코 우리 이웃을 바로 사랑할 수 없다는 것과 동일선상에 있는 법칙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을 극복하는 길
교회가 포스트모더니즘 세상의 사랑을 갈구하는 순간 교회는 무서운 위기를 맞게 된다. 교회는 프리모더니즘의 가치관을 가진 곳이다. 초월적인 존재와 유일하고 절대적인 진리를 믿는 공동체이다. 초월적이고 유일한 진리를 굳게 붙잡는 것만이 오늘날 교회가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이다.
기독교 진리의 특징
유일한 것만이 진리가 될 수 있다.
(모든 것이 옳고 모든 것이 그르다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방식은 잘못된 것이다.)
진리는 변하지 않을 때만이 진리이다.
(인간의 변덕을 진리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시대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이다.)
말씀을 바로 가르치고 바로 서는 길만이 이 시대를 헤쳐갈 수 있다.
오늘날과 같이 나도 옳고 너도 옳은 시대에 넘어지지 않는 길은 말씀을 바로 배우고 바로 가르치는 길밖에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한다는 명목으로 우리에게 분명히 계시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성과 실존적인 진실을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포스트모더니즘에게 완전히 대문을 열어주는 것가 다름이 없다. 기독교를 이성적 탐구의 영역 밖으로 밀어내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머리로만 아는 기독교도 문제이지만 머리를 포기한 기독교는 훨씬 더 위험하다.
유일하고 변하지 않으며 우리를 자유케 하는 진리는 성경의 진리밖에 없다.
2. 프래그머티즘
존 맥아더, “프래그머티즘이란 실질적인 결과에 의해 의미 또는 가치가 결정된다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실용적인가 아닌가를 진리 여부의 표준으로 삼는 실용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프래그머티즘은 그 뿌리를 다윈주의와 세속적 인본주의에 두고 있다. 이 사상은 내재적으로 상대적 가치관을 가지고 절대 선과 거짓 그리고 선과 약 또한 진리와 거짓에 대한 개념을 거부한다. 진리란 유용한 것이며 의미가 있으며 또한 도움이 되는 것이다. 효과가 없으며 관련이 없는 것은 거짓으로 간주돼 거부된다.”
프래그머티즘이 교회에 미친 영향
알란 올프는 오늘날 진화하고 변화하는 프래그머티즘의 특징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현장은 다름 아닌 예배라고 말한다.
“우리는 어떤 면에서 모두가 다 복음주의자라는 생각이 퍼져 있다. 미국의 종교들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바른 길을 가르쳐 줌으로 생존하고 번영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의 많은 부분을 자기 스스로 알아서 할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 지금까지 성장해 왔다. 대형 교회들의 인기와 또다른 형태들의 성장 지향주의 개신교 교회들이 미국 사회에 주는 위협은 기독교의 독선이 주는 편협함이 아니라 진부함이다. 텔레비전, 출판, 정치 켐페인, 교육, 자기 계발 등 이 모든 것이 미국인들이 듣고 싶은 말만을 하고 있다. 이 가운데 이제 기독교마저 미국인들이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또 하나의 새로운 기관으로 추가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듣고 싶은 말만 해주는 교회. 이것이야말로 프래그머티즘의 특성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인 교회의 모습이다.
프래그머티즘은 하나님의 주권을 부정한다
교회 속에 프레그머티즘적인 사고가 만연한다는 것은 결국 구원의 문제가 인간의 손에 달려 있음을 인정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하나님의 주권이 인간의 선택으로 대체되었다.
사실 프레그머티즘적으로 보았을 때 예수님도 좀 존경을 받을 만한 가문에서 그럴듯한 지위를 가지고 태어나셨어야 한다. 그랬다면 예수님 당신 뿐 아니라 후대의 사람들도 예수님을 선택하는 데에 훨씬 더 용이했을 테니까요.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100% 주권을 믿을 때 십자가는 비로소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고 그 능력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은혜를 체험하게 된다. 따라서 기독교의 진리가 달려 있는 하나님의 주권을 우리가 믿는 한 우리는 교회 속에 파고 들어오는 프래그머티즘과 전면전을 선포해야 한다.
프래그머티즘적인 사고가 만들어 낸 구원 초청
하나님의 주권을 부정하는 프래그머티즘이 유발하는 가장 큰 위험은 수많은 가짜 크리스천의 양산이다. 가짜 크리스천, 다른 말로 하면 그냥 교회만 다니는 사람들은 프래그머티즘을 통해 얼마든지 늘어날 수 있다. 로이드 존스는 그의 책 “설교와 설교자‘에서 구원초청의 승패가 테크닉에 달려 있음을 믿는 프래그머티즘적인 사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우리는 설교하면서 진리를 제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진리는 무엇보다 먼저 정신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 순서를 무시하고 다른 요소에 직접 접근하는 순간 곤경을 자초하게 될 것이며, 쉽사리 그 곤경에 빠져 버릴 것입니다. --결국 사람들이 진리에 반응하여 깨달아 ’앞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전도자의 개성이나 일반적이며 막연한 두려움 또는 어떤 심리적 영향 때문에 앞으로 나오는 상황이 연출되기 때문입니다.
프래그머티즘적인 사고가 만들어 낸 간증 중심의 전도
수없이 넘쳐나는 간증 속에서 ‘왜 기독교만이 진리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과 성찰을 담은 내용을 찾기는 참으로 힘든다. 우리는 간증들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 성경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성령 하나님이 죽은 영혼을 살리신 진짜 간증들이 담겨 있는 책은 성경뿐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사람들의 귀를 솔깃하게 하고도 남을 자기의 체험을 얘기하는 대신 구약이 예언한 메시아가 왜 예수일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서만 증거했다. 바울에게 있어서 기독교가 진리인 이유는 바로 성경이 진리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성경 말씀을 떠난 간증들이 판을 치는 현실은 얼마나 우리의 교회들이 프래그머티즘에 물들어 있는지를 잘 보여 준다. 로이드 존스는 간증의 위험성에 대해 말한다.
첫째, 간증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모습을 정형화 또는 획일화시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둘째, 간증이 반복될수록 자신도 모르게 내용을 과장하게 되는 위험이 있다.
셋째, 간증 속에는 마치 인간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크리스천이 되는 것을 ‘주를 위해’ 대단한 희생을 한듯이 포장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넷째, 간증이 주는 위험의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개인적 체험이 기독교의 진리 여부를 판단하는 잣대가 된다는 것이다.
들릴라를 잃지 않기 위해 자신의 머리털을 잃었던 삼손의 모습이 오늘날 세상의 사랑을 받기 위해 복음의 능력을 스스로 버리는 교회의 모습이 아닌가? 미국 교회와 한국 교회의 슬픈 모습을 우리는 미국의 월 마트나 한국의 대형 마트를 통해서 볼 수 있다.
교회는 프래그머티즘이 주는 악영향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 무엇보다 바른 구원관의 확립이 필요하다. 복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이상한 체험을 한 것이 구원을 보장하지 않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구원이 필요한 죄인 됨에 대한 깊은 각성 없이는 결코 복음이 내게는 ‘복된 소식’이 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방법은 성경과 성령의 능력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다. 그렇기에 그 방법도 하나님의 방법으로만 하신다. 하나님의 방법은 성경 말씀 뿐이다. 존 맥아더의 말이다.
“예수님에 따르면 구원받는 것은 아주 어렵다. 마태복음 7장 14절에 그는 좁은 길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 좁을 길을 찾는 사람은 적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만 하면, ‘다행입니다. 이제 당신은 우리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이리 어서 오세요’라고 말하는 것은 값싼 복음이고 쉬운 믿음주의이며 라이트 기독교이고 얕고 감정적인 부흥사 스타일의 접근방식이다. 그렇지 않다. 좁을 길을 찾아내는 소수의 사람은 그 길을 찾기 위해 힘을 들여 노력하고 그 길은 오로지 혼자 외롭게 걸어가는 길이다. 참으로 그 좁은 길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교회와 설교자를 찾는 것은 너무 어렵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고통하는 사람의 것이다. 오늘날 사탄의 가장 큰 설득력 있는 거짓말은 크리스천이 되는 것은 쉽다는 바로 그 거짓말이다. 그 길은 좁은 길이고 당신은 그 길을 혼자 걸으며 당신의 죄를 놓고 아파하고 용서를 갈망하며 걸어가야 하는 길이다. 인간의 공로로 천국 간다는 얘기가 아니다. 당신이 자신의 죄 앞에서 절망하는 순간 당신은 결코 당신의 혼자 힘으로 그 좁은 길을 갈 수 있는 것이 전혀 아님을 가장 먼저 깨닫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이 그 천국문을 들어가도록 하기 위해 당신에게 은혜를 부어주셔야만 한다. 당신의 부서짐 속에서는 이제 그분의 능력만이 당신의 자원이 된다. 우리의 몫이란 단지 우리의 죄와 무력함을 인정하고 은혜를 갈구하며 하늘에서 오는 능력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우리 주위에는 바른 복음이 아닌 잘못된 복음을 가르치는 교회가 많다. 그런 교회로부터 우리는 힘을 다해 도망쳐야 한다. 우리의 영생이 달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바른 복음을 전하는 교회를 찾아 그 안으로 피해야 한다.
존 맥아더는 말한다.
“그 누구라도 크리스천이 되는 것이 쉽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결코 믿어서는 안 된다.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은 당신의 유일한 아들을 죽게 하는 희생을 치르셨다. 그리고 구원은 당신에게도 동일한 희생을 요구할 것이다. 구원은 지식적으로 추론해서 나오는 결과가 아니다. 구원은 성경 말씀에 드러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과 섬김의 삶을 통해 나온다.”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당시의 사람들에게 아주 효과가 있었을 그리스도 철학의 설득력 있고 지혜로운 말을 의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복음의 능력은 오로지 성령 하나님으로부터만 나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고전 2:1-5). 프래그머티즘의 정체를 바로 아는 것은 복음 속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회복하는 것과 직결된 일이다.
03 마케팅 교회의 교회적 배경 : 부흥주의, 자유주의, 신복음주의
1. 찰스 피니와 부흥주의 출현
프래그머티즘이 오늘날 교회 속에 깊게 뿌리내리도록 한 사람 중의 일등 공신을 꼽는다면 그 자리는 단연 19세기 미국의 부흥사 찰스 피니이다. 1792년에 태어난 피니는 변호사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어느 날 성령이 전기 충격과도 같은 강력함으로 자신의 몸을 씻어 내리는 체험을 하게 된다. 그 체험 바로 다음 날 변호를 의뢰하러 온 사람에게 말했다. “나는 이제 예수님만을 변호하면서 살도록 정해진 사람이요. 나는 당신을 변호할 수 없소.”
존 맥아더, “찰스 피니는 하나님의 선택 교리를 하나님의 독재적이고 변덕스런 주권적 행위로 치부하고 무시함으로 처음부터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 그는 회심이 오로지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의한 것이라는 교리를 거부했다. 그는 대신 믿음이란 철저히 인간의 결정에 달린 것이고 따라서 구원은 죄인 스스로가 하나님을 향해 나아감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가르쳤다.”
찰스 피니는 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히 인간의 선택으로 대체함으로 미국의 교회 속에 프래그머티즘이 본격적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든든한 신학적 토대를 만든 인물이다. 그 토대 위에 그의 뒤를 이어서 노먼 빈센트 필, 로버트 슐러, 헤리 포스딕과 같은 그의 제자들이 20세기 프래그머티즘으로 대표되는 미국 기독교의 꽃을 활짝 피웠다.
존 맥아더, “ 피니는 인간의 전적 타락과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은 결코 복음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피니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사람들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가하거나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죄인들에게 줄 수 있다는 기독교의 교리 자체를 부인했다. 피니는 로마서 3,4,5장에서 분명히 가르치는 이 칭의의 교리를 ”신학적 소설“이라고 결론 내렸다. 간단히 말해 피니는 결국 복음주의 신학의 핵심을 부인한 것이다.”
피니는 어떤 소원이 있을 때 ‘최대한 구체적으로 열거하면서 기도’하기만 하면 모든 것을 다 얻을 수 있다는 새로운 기도의 법칙까지 만들어 냈다. 오늘날 널리 퍼진 왜곡된 기도의 진원지인 셈이다.- 이안 머레이, “부흥과 부흥주의”
오늘날 우리에게 너무 자연스러운 ‘구원 초청’도 피니가 시작한 새로운 방법이었다. 피니가 이룬 대중적인 성공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잘못된 신학에 대해 더욱더 확신을 주게 된다. 숫자가 이룬 그의 성공은 여간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에게 의문을 제기하지 못하도록 했다. 의문을 제기한다면 이렇게 되겠지요, “그래, 너 똑똑하다. 그런데 똑똑한 너는 사람들을몇 명이나 모았는데?”
제리 파웰(미국 극우 보수주의를 대표하는 목사), “피니는 나의 영웅 중의 한 명이다. 나뿐 아니라 빌리 그레이엄을 포함한 많은 복음주의자의 영웅이기도 하다.” 키스 그린과 같은 복음송가 가수가 가장 자주 인용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빈야드 운동, 교회 성장 운동, 정치적/사회적 켐페인, 텔레비전 부흥사들, 그리고 프라미스 키퍼스 운동에 이르기까지 그의 영향은 끝이 없다. 휘튼 대학의 학장을 역임했던 한 인물은 “피니여, 영원하시라!”라고 말했다.
마틴 로이드 존스, “피니야말로 오늘날 복음주의와 관련한 혼란에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다. 이제 사람들은 교회가 약해져 가는 상황을 보면서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부흥을 위해 기도하는 대신 위원회를 조직하며 복음 캠페인을 기획하고 프로그램을 준비, 광고, 발족시킬 준비를 하고 있다.”
피니는 다양한 이벤트 성의 행사들을 통해 인간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공략하는 데 집중했다. 바로 인간의 감정이다. 피니는 무엇보다도 인간을 움직이는 데 가장 효과적인 영역인 인간의 감정을 자극하는 데에 설교를 포함하여 자신의 모든 아이디어를 집중했다.
2. 슐라이어마허와 자유주의의 출현
현대신학은 슐라이어마허가 현대 세계관에 기초하여 기독교의 전통적인 진리를 현대의 정황에 맞게 재해석함으로써 현대 신학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함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기독교에 대한 현대 세계의 도전에 신학적으로 응답한 최초의 신학자였다. 이로 인해 그는 현대 신학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그는 칸트 이후 이론적으로 가사상태에 빠진 신학을 학문의 세계에서 인정 받을 수 있는 수준으로 정립하여 제시한 최초의 신학자였다. 그러나 그의 신앙고백을 보자. 자기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의 한 부분이다.
“나는 자신을 인자,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른 그 사람이 진짜 영원한 하나님이라고 도저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그 사람의 죽음이 다른 사람들을 위한 대속의 죽음이라고 믿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입으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으니까요. 그리고 그런 대속의 죽음이라는 것이 애초에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결코 완전을 요구하실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하나님은 애초에 인간을 전혀 완전하지 않게 창조하셨으니까요. 물론 인간이 완전을 추구하는 것은 가능하겠지만요. 그러니 하나님이 인간이 완전함을 달성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인간을 영원한 벌에 처하실 리도 없지요.”
슐라이어마허가 그의 신학의 초대로 삼은 것은 성경이 아니었다. 그는 대신 개개인이 느끼는 종교적 경험을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자신의 신앙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기독교인으로서의 나의 느낌은 내 속에서 꿈틀거리는 신적 영혼에 대한 자각이다. 이 느낌은 나의 이성과는 별개의 것이다. 지성적으로 불 때 나는 철학자다. 그러나 감정으로 볼 때 나는 매우 헌신된 사람, 아니 바로 크리스천이다.”
그는 기독교는 교리가 아니라 삶이라고 정의했다. 성경이란 애초에 성경의 저자들이 자신의 느낌을 적은 주관적인 기록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개인의 체험 모음집에 불과한 성경 위에 나 자신의 체험을 얼마든지 추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놀라운 업적은 성경의 진리를 아무리 많이 무시하거나 아예 전면 부정하더라도 크리스천이 될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각각의 인간 속에 체험을 통해 발견되는 내재된 진리가 있는데 굳이 외부의 성경이 필요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이 없는 기독교를 만들어 냈다.
슐라이어마허가 이룬 신학적 업적이란 신학의 대상을 성경 말씀에서 인간 내부로 전환한 것이다. 신학을 계시에 대한 연구에서 인간에 대한 연구로 바꿔친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지만 그 중심에 인간을 둔 신학 아닌 신학, 즉 ‘자유주의 신학’이 슐라이어마허가 현대 세계의 도전에 응답한 신학적 방법이었다.
그가 기독교 신앙에 끼친 피해는 끔찍하다. 성경의 진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이도 크리스천이 될 수 있는 환경에서 믿음이라는 단어는 사치스런 장실품일 뿐이다. 신앙을 삶으로 정의하는 순간 나름대로 고귀하고 최선을 다해 삶을 산 사람들은 다 천국이 보장되는 길이 열렸다. 무신론자라고 하더라도 그가 사랑으로 충만한 삶을 살았다면 그 삶 자체가 믿음이 되어 그는 구원 받는다. 입으로는 비록 하나님을 부정했지만 그는 삶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의 이런 자유주의 신학의 물결은 유럽을 중심으로 전세계의 영어권 속으로 급속하게 퍼져 나갔다. 그가 열어놓은 이 자유주의 신학의 길은 성경을 기독교로부터 완전히 실종시켰다. 이 자유주의 신학은 피니로 대표되는 프래그머티즘과 결합하여 말씀을 점점 더 신앙의 중심에서 변두리로 밀어냈다.
그 영향으로 내가 무엇을 믿는지도 잘 모르지만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것만으로 크리스천의 충분조건이 채워졌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교회 속에 활발한 소규모 모임은 피차간에 감동적으로 살았던 생활 이야기들로는 차고 넘치지만 결코 논쟁의 여지가 있는 성경의 진리를 놓고 머리를 맞대는 일은 결코 없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벤저민 프랭클린이 한 유명한 말,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를 성경 구절인 줄 알고 있다. 교리에 무지한 복음주의 교회 속에서 뭔가를 ‘확실히’ 느끼게 해주는 데 매우 효과적인 성령운동파와 오순절 계통의 가르침이 번성하는 것은 당연할 수 밖에 없다.
3. 빌리 그레이엄과 신복음주의의 출현
“빌리 그레이엄은 자신의 집회를 현대적 오염으로부터 지키기 원했다. 그러나 그가 거둔 성공들은 그의 이 결심을 약하게 만들었다.”
빌리 그레이엄은 가톨릭을 수용하는 것에서 한 걸음이 아니라 수백 걸음 나아가 기독교가 아닌 이방 종교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가 서둘러 취소하는 등의 소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 기독교의 몇몇 교리에 대해 의견을 달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기독교의 핵심 진리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2006년 4월 미국의 시사 주간지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도 빌리는 변함없는 자신의 다원주의적 구원관을 피력했다. 빌리의 주장이 슐라이마허의 주장과 무엇이 다른가?
풀러신학교의 시작도 빌리 그레이엄의 사역도 또 이들이 힘을 합쳐 만든 ‘크리스차너티 투데이’의 발간도 분명 하나님의 복음을 위한 열정이 그 발판이 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을 구원하려는 열정이 넘치더라도 우리에게는 분명 지켜야 할 선이 있다. 결코 놓아서는 안 될 성경의 진리에 대한 원칙을, 세상을 구한다는 명분으로 조금씩 양보하기 시작하면 그 양보는 조만간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 빠지게 된다.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슐라이어마허의 새로운 기독교, 자유주의 사상으로부터 가장 먼저 영향을 받은 나라는 영국이다. 슐라이어마허가 사망한 1834년에 영국에서 태어난 스펄전 목사는 그의 생애 마지막 4년간을 자유주의 바람으로 말미암아 영국 교회 전체를 휩쓴 ‘연합 운동’과의 싸움으로 힘겹게 보내야 했다. 일반적으로 the Down-Grade Controversy로 알려진 이 논쟁은 말씀의 진리를 사수해야 한다는 스펄전 목사의 외로운 목소리와 당시 대다수 교회가 지향한 ‘교리를 넘어선 일치’의 목소리 간에 벌어진 일대 격전이었다. 교리를 수호하려는 스펄전 목사의 외로운 싸움은 ‘하나’를 외치는 거대한 목소리에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모든 복음주의자로부터 예외 없이 수십 년에 걸쳐 존경을 받았던 스펄전 목사는 어느 날 갑자기 복음주의 진영 내부의 비판에 둘러싸이게 되었다. 당시 복음주의 진영 전체는 하나 됨, 조화, 합동 그리고 형제애로 향해 가고 있었다.
이처럼 전반적으로 통합으로 치달은 영국은 20세기에 들어서자 로이드 존스 목사 등을 대표로 하는 복음주의, 성경의 복음을 가감 없이 전하는 복음주의 세력은 개신교 내에서 아주 작은 세력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이 작은 세력조차 1954년의 빌리 그레이엄의 영국 집회를 기점으로 중대한 변화를 겪게 된다 영국의 복음주의 세력들마저도 빌리 그레이엄의 집회를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 것이지요. 자유주의를 포함한 세력들과 힘을 합칠 때 더 큰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이었다. 빌리 그레이엄 집회를 보고 모든 교단이 힘을 합칠 때 하나님의 ‘부흥’이 도래할 수 있다는 꿈을 갖게 된 것이다. 18세기의 휫필드와 웨슬리 시대가 빌리 그레이엄을 통해 다시 올 수 있다는 꿈에 부풀었던 것이다.
영국은 1966년을 기점으로 존 스토트 목사를 중심으로 한 영국 복음주의 성공회는 공개적으로 ‘교회의 일치’ 또는 ‘에큐메니칼 운동’을 표방한다. 1950년대 로이드 존스 목사와 함께 교리를 넘어선 일치에 대해 가장 큰 반대 목소리를 내던 제임스 패커 목사마저도 이 일치 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한다. 오늘날 교회 역사가들은 20세기 중반에 세계를 휩쓴 이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해 공개적인 반대 목소리를 낸 대표적인 복음주의자는 단 두 명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로이드 존스 목사와 프랜시스 쉐퍼 박사이다. 그러나 이들의 반대는 단지 분열주의자라는 오명만을 그들에게 가져다 줄 뿐이었다. 영국의 복음주의자 중 한 명은 “왜 로이드 존스 목사가 영국에서 복음주의 진영을 분열시키는 사탄의 도구로 쓰이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1953년 영국 집회를 시작할 때도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가장 먼저 지지를 요청한 사람이 로이드 존스 목사였다. 실패한 빌리는 1960년대 들어 존스에게 다시 공개적인 지지를 요청한다. 이와 관련해서 로이드 존스 목사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전도를 위한 켐페인 조직을 찬성하지 않습니다. 믿은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는 콜링 시스템은 더더욱 반대하고요. 한 가지 분명히 말하면 나는 빌리 그레이엄이 진실하고 정직하며 순수한 사람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1963년에 베를린이 아니라 로마에서 개최되기로 한 첫 번째 복음주의 연합회의 의장을 맡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제안에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자유주의자들과 가톨릭에서 받고 있는 지원을 거절하고 그들을 강대상에 세우지 않고 또 사람들을 앞으로 부르는 콜링 시스템을 하지 않는다면 최선을 다해 나는 당신을 도울 것입니다. 의장직도 당연히 맡겠습니다.’라고요. 우리는 그 문제로 약 세 시간 동안 대화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전도를 위해 조직화에 힘쓰는 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무릎꿇고 자신들을 회복시켜 달라고 간구하지 않습니다. 켐페인적 접근은 내가 보기에 성령의 능력 대신 테크닉에 더 의존합니다. 나는 진정한 교제는 인간성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봅니다. 나는 근본적인 진리를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과 어떻게 진정한 교제가 가능한지 잘 모르겠군요.“
자유주의 신학에서 비롯한 에큐메니칼 운동이 가져다 준 큰 비극은 크리스천의 정의가 성경의 가르침과 관계 없이 너무 넓어졌다는 사실이다. 빌리 그레이엄과 로버트 슐러의 인터뷰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도 얼마든지 가능하게 되었다. 무자격 의사를 양산하는 것보다 더 큰 비극이 에큐메니칼 운동이다. 복음과 관련 없는 크리스천의 양산이다.
가톨릭과의 연합은 카톨릭 교리를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루터의 시대보다 더 잘못된 가톨릭과 어떻게 교리를 떠나 하나 될 수 있는가? 얼마 전 사망한 요한 바오로 2세는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누구라도 깨끗한 삶을 산 사람은 다 구원받는다. 비록 그가 예수 그리스도와 로마 카톨릭을 믿지 않더라도 관계 없다.”
필립 얀시는 사실상 기독교의 교리를 버리고 또 종교라는 굴레를 벗고 전 인류가 하나 되자는 주장을 하고 있다. 스컷 펙의 심리학 책이 미국의 저명한 신학교들에서 교재로 채택되는 현실도 안타깝기 그지 없지만 필립 얀시가 그의 책에서 제시하는 은혜가 마치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인 양 포장되어 한국 교회에서 많은 목사들의 추천사를 등에 업고 꾸준히 팔리고 있는 것은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필립 얀시와 같은 사람은 오늘날 복음주의라는 이름이 일치와 화합과 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하나님의 말씀에서 얼마나 멀리 떠나 있는지를 보여 주는 한 예이다.
하나 되는 것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으로 연합하느냐이다. 큰 교회들일수록 분명한 신학 대신 각종 방법만이 넘쳐 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주목해야 할 중요한 신호이다. 이 모든 현상은 교회 속에서 지켜야 할 교리들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말년에 많은 사람에게 ‘고집불통 늙은이’라는 소리를 들은 로이드 존스 목사는 누구보다도 교리의 회복이 진정한 복음주의의 회복임을 잘 알고 있었다. 교회가 교리를 통해 하나 되는 것만이 진정한 하나 되는 길임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이안 머리, “로이드 존스에 대한 기억은 철저한 강해 설교, 기독교 교리의 필요에 대한 주장, 일치 운동의 위험에 대한 경고, 그리고 성령의 능력의 회복에 대한 갈망 등으로 요약되고 있다.”
로이드 존스 목사야말로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진정한 의미의 복음주의자였다. 교리에 무지하거나 교리를 무시하는 사각 지대에 빠진 교회는 마케팅의 유혹에 벗어나기 어렵다. 일치와 단합에 의해 세상에 더 큰 영향력을 끼치고자 하는 신복음주의의 열망에 마케팅이야말로 날개를 달아 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마케팅은 교회가 어떻게 변해야 세상이 좀 더 교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하는지에 대해 알려 주기 때문이다.
04 마케팅 교회와 복음의 상품화
1. 복음의 상품화로 인한 복음의 변질
효과적인 상품의 판매를 위해 상품의 강점은 최대한 부각시키지만 약점은 철저히 감추어야 한다. 사는 사람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상품을 최대한 단순명료하게 만들어 팔아야 한다.
그들은 고난과 핍박이라는 부정적 용어들 외에 성경 여러 곳에 영생, 평안, 범사에 잘 됨 등의 긍정적인 문구를 강조한다. 이처럼 고객의 기호에 맞추는 복음은 애초에 성경의 구원과는 관계가 없다.
복음은 상품으로는 하자가 너무 많다. 따라서 고객에게 거부감을 주는 약점들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제거하는가가 복음 판매의 성공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다행히 복음에는 조금만 손을 보면 고객의 마음을 휘어잡을 수 있는 장점도 아주 많다.
알란 울프, “오늘날 심리학적 용어들이 자연스럽게 미국의 주류 종교들의 설교와 출판물들 그리고 소그룹 속에 파고 들었다. ‘낮은 자존감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게 하고 우정을 쌓지 못하게 하며 다른 사람의 장점을 찾지 못하게 한다’고 어느 감리교 잡지는 청소년들을 향한 기사에서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그 기사는 ‘낮은 자존감은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방해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언제 어디든지 심리학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죄가 사라지기 마련이다.”
가장 큰 장애물인 죄를 효과적으로 제거하면 죄와 함께 복음 상품의 약점으로 부각되었던 다른 교리들도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지옥이 사라지고, 천국은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으로 재포장된다. 죄를 짊어지러 오신 예수님도 필요없게 된다. 십자가는 더더욱 말이 안 된다. 그러나 예수가 사라지면 안 되니까 죄와 관련시키지 않은 채 계속 보존한다. 예수님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채워 주시는 분으로 우리가 힘들 때 항상 친구처럼 위로해 주는 분으로 계속 남아 계셔야만 한다. 십자가는 우리를 너무 사랑하신 사랑의 표현으로 간직하면 된다. 다행히 예수님은 성경에서 무서운 말씀만 하시지 않았다.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말씀도 하셨다. 게다가 예수님은 병을 많이 고쳐 주셨다. 이 부분을 강조해야 한다.
곽선희목사는 세미나에서 말했다. “조엘 오스틴 목사의 교회 근처 신학교 교수와 그 교회 성공에 대한 이유를 말하는 기회를 가졌다. 먼저 조엘 오스틴의 설교는 교회 밖에서도 사용된다. 공항에는 그의 책을 쌓아놓고 팔고 있었다. 많은 목사들은 교회 안에서만 사용되는 언어로 오래 믿는 사람들만 이해하는 설교를 한다. 교회 전문용어를 사용하지 말라. 나는 신학박사가 목회를 잘해 교회를 부흥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설교가 탈 신앙하여 중생이 되어야 한다. 설교는 세속화되어 교인들의 일반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설교를 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강해설교는 교회를 죽이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성경 강해를 통해 교인들은 지식만 늘고 비판의 능력만 생기게 하여 더욱 의심을 가지게 한다.”
“한 랍비는 그가 해석해 주는 만큼 믿으라고 말했다. 목사가 설명해주는 만큼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제자훈련 등으로 성경공부를 많이 하면 교회가 망한다. 목사를 내보내는 사람도 성경 공부 많이 한 사람들이다. 자살하려다 설교에 은혜를 받고 살아난 성도가 성경을 읽고 사랑과 용서로 가득한 줄 알았는데 오히려 죽이라는 이야기가 더 많다고 놀란 적이 있다. 성경을 너무 많이 가르칠 필요가 없다. 이스라엘에서는 성경 공부를 하지 않는다. 그 대신 랍비가 정해 준 것을 묵상한다. 렉시오디비나를 한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때까지 성경을 집중해서 읽는다. 이것이 성경을 제대로 보는 법이다. 개신교는 뜻도 모르고 성경을 너무 많이 배웠다. 성경을 많이 배울수록 비판만 늘어나 권위가 떨어진다.”
“교회는 큰 성경책을 한 권 그냥 강대상에 올려 놓고 하나님 말씀의 상징으로 여기기만 하면 된다.”
“목사들이 지적 설교를 하니까 교인들은 피곤하다. 교인들은 감동을 원한다. 하지만 목사들은 감동은 없고 지겹게 말만 많이 한다.”
마케팅교회에서 왜 죄가 사라지는가? 복잡한 교리는 사람의 머리를 아프게 할 뿐 아니라 사람을 지겹게 하는 죄를 짓기 때문이다. 상품은 최대한 단순, 간편, 간단해야 한다는 철칙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 교리이다. 그냥 간단하고 이해하기 쉽게 ‘내게 축복만을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으로 통일해서 일관성 있게 전달하면 충분하다.
마케팅교회에서의 죄인이라는 말은 듣는 사람이 불쾌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들으면 들을수록 기분이 좋아진다. 죄짓는 사람들을 향한 무서운 질책을 들어보라.
“도대체 당신들 왜 그렇게 삽니까? 당신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는 건가요? 당신이 자신을 더 사랑하고 당신 속에 있는 그 무한한 잠재력을 발휘하면서 살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죽었어요. 그냥 죽은 게 아니라 십자가에서 그 모진 고통을 당하며 당신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 그거 한 번 보고 싶어서 그분이 죽었어요. 그런데 당신 도대체 이게 뭡니까? 그렇게 밖에 못삽니까?”
마케팅 교회는 기독교의 용어 중에서도 고객들에게 거부감을 줄 수도 있는 직접적인 표현들을 최대한 자제하려고 애쓴다. 가치 중립적이며 부드러운 용어들을 중심으로 사용한다. ‘죄인’은 ‘교회 안 나오는 사람’으로 바뀐다. 진리라는 무거운 단어보다는 영성이라는 단어를 선호한다. 거룩한 삶도 행복한 삶으로 바꾸는 것이 더 좋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하신 첫 말씀은 회개에 대한 것이었다. 죄가 없는데 회개가 왜 필요한가? 죄인을 죄인이라 부르지 않는 교회가 무슨 회개가 가능하겠는가?
로이드 존스목사, “그 부인은 섬세하고 관대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모범적인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목사님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를 특별히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습니다. 이처럼 교인으로서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한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일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가장 치명적인 잘못 중의 하나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이들이 지적으로는 성경을 받아들였어도 말씀의 능력에 사로잡히는 경험은 단 한 번도 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들은 말씀의 능력을 맛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회개한 적 또한 한 번도 없습니다. 물론 죄를 슬퍼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말로는 신자라고 하지만 사실은 신자가 아닌 사람들이 많이 생기는 것입니다.”
‘구원’이라는 단어가 의미 있도록 하는 복음의 교리들이 사라진 마케팅 교회에서 들리는 구원은 달리 해석되어야 한다. 아마도 낮은 자존감으로부터의 구원일지도 모른다. 정서적 불안감으로부터의 구원일 때도 있을 것이다. 다 맞다. 나름대로의 구원일 수 있다. 그러나 내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가 되어 설 수 있도록 하는 죄로부터의 구원은 결코 아니다.
마케팅 교회가 눈을 뜨고 보아야 할 사실은, ‘고객 만족’이라는 개념은 그 자체가 반복음적이라는 사실이다. 이 개념은 기독교의 복음과 관련해서는 결코 ‘가치 중립’적인 개념이 아니다. 복음은 죄인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복음의 주인공은 오로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복음이 ‘고객 만족’에서 ‘하나님 만족’으로 바뀌어야 한다.
2. 복음의 상품화로 인한 예배 실종
오늘날 청소년들은 교회의 각종 찬양 집회가 제공하는 은혜의 혜택이 아닌 감정주의의 위험에 더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하나님에 대한 ‘예배’에서 사람의 ‘감정 고조’가 목적이 되는 오늘날에 대해 데이비드 웰스는 말한다. “우리는 자신이 순종해야 할 하나님보다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하나님을 의지해 왔다. 우리는 자신에 대한 모든 권리를 그 앞에서 포기해야 할 하나님보다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켜 줄 하나님을 의지해 왔다. 그분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이요, 우리의 만족을 위한 하나님이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도록 배워서가 아니라 마케팅을 통해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도록 배웠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용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예배할 대상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분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아는 것’이라 말한다. 요일 5장에서 ‘안다’는 동사가 반복적으로 나온다. 이 말은 로이드 존스목사가 지적한 대로 단순히 ‘지적 동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우리를 사로잡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께서 우리의 영으로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종교란 감정적 흥분 또는 감정적 고요함 사이의 왕복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객관적인 진리와 그 진리를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의 하나님의 사역은 감정의 포장 아래 왜곡될 수 밖에 없다. 오늘날 성령 하나님의 신학처럼 한국 교회 속에 왜곡되고 편협되게 알려진 것이 또 있을까요?
진정한 희열을 추구하자.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감정은 우리가 기독교의 진리를 깨달음으로 체험하는 그런 희열이다. 말씀이 나를 사로잡을 때 느끼는 희열이다. 진리만이 줄 수 있는 희열이다.
내용이 없는 무조건적인 감정적 고조를 경계하자. 내용 없는 ‘희열’을 ‘은혜’라는 단어로 부르는 것을 본다. 일어서서 노래는 한 시간이라도 부르는 사람들이 성경만 펴면 졸거나 도대체 성경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가?
바른 찬양에 대한 의식을 일깨우자. 웰스는 그의 책 <윤리실종>에서 오늘날 불리는 찬양의 약 60%가 말씀의 교리와는 아무런 관계 없이 주관적 느낌에 의거한 가사들로 채워져 있다고 경고했다.
소비자가 원하는 감정 고조는 마케팅의 큰 무기이다. 오늘날 하나님을 알아감으로 자라나는 기독교의 진리와 가치가 하나님을 느껴 가는 것으로 바뀌고 있다. ‘음악 목사’라는 티이틀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하기 위한 목사의 영광스러운 직책이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3. 복음의 상품화로 인한 설교 실종
마틴 로이드 존스, “설교는 이제 상당 부분 하나의 직업화가 되었다. 진짜 기독교 설교문 대신 우리는 중고차(이류)수준의 심리학 강해를 듣고 있다. 그런데도 설교자들은 자신들이 청중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주고 있다고 주장한다.”
설교는 설득이 아니라 선포이다. 지나친 예화들로 차고 넘치는 설득의 설교로 변질되지 않았는지에 대해 주의해야 한다. 예화가 메시지를 압도하는 설교들이 얼마나 많은가? 과연 기독교가 주장하는 진리가 배꼽을 잡고 웃다가 받아들이는 그런 진리인가?
오늘날 기독교는 개인의 꿈을 충족시켜 주는 종교로 너무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성경 말씀은 본문의 의미를 상실한 채 너무 자주 개인의 동기 부여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복음이 상품으로 전락한 교회에서 발생한 가장 큰 비극이다. 마르틴 루터가 외친 것은 부흥이 아니라 개혁이었다. 신앙이 상품화될 때 필요한 것은 부흥이 아닌 개혁이다. 오늘날 사탄은 면죄부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교묘한 모습으로 교회 속에서 복음을 상품화 시키고 있다.
05 마케팅 교회의 모델1 : 빌 하이벨스와 윌로우크릭 교회
1. 빌 하이벨스와 윌로우크릭 교회의 신선한 등장
빌 하이벨스 목사의 중요한 세 명의 스승
1) 경영 스승, 피터 드러커 : 빌 하이벨스 목사가 사역자들에게 신학을 강요하지는 않지만 피터 드러커의 책은 반드시 읽도록 한다는 사실은 그가 교회 경영을 얼마나 중시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한 사례이다.
2) 신학 스승, 빌리즈키안 교수 : 빌리즈키안 교수에게 받은 아르미니안적 신학과 ‘친구되신 하나님’의 강조는 빌 하이벨스 목사의 설교 전반에 걸쳐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그의 설교를 조금만 들어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3) 목회 스승, 로버트 슐러 : 슐러가 강조한 심리학을 통한 인간 필요의 충족은 빌 하이벨스 목사의 설교 내용과 윌로우 크릭 속에 뿌리박은 문화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2. 윌로우크릭 교회의 첫 번째 특징 : 심리학에 물든 교회
내가(프리차드) 연구하던 해 주말 메시지에서 하이벨스와 다른 설교자들은 청중들에게 치료를 생각해 보라고 최소한 21번에 걸쳐 권유했다. 하이벨스는 다음과 같이 권했다.
“ 우리는 상담센터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여러분들 중의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걸었던 수치와 그림자를 버려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상담 치료와 그것의 심리학적인 골격은 목회에 대한 윌로우크릭의 이해에 있어서 필수적인 도구로 받아들여진다. - 윌로우크릭 구도자 예배, G.A.프리차드, 서로사랑 -
심리학이 기독교의 가르침을 집어 삼킬 때 나타나는 결과는 죄의 자리에 상처가 들어오고 회개를 촉구하는 대신 치료를 권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는 참과 거짓을 가르는 종교이다. 따라서 성경의 진리를 양보하는 유혹은 참과 거짓에 대한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유혹과 다름이 없다. 심리학은 바로 이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다.
3. 윌로우크릭 교회의 두 번째 특징 : 구도자 예배
“윌로우크릭의 성공 원인은 대부분의 교인들을 고객으로 인식하고 그들의 필요를 채우는 전통적인 비즈니스 개념을 바로 실천한 데 있다”
구도자 예배의 문제점들
1) 구도자 예배는 관련성을 추구함으로써 복음을 변질시킨다.
“일단 마케팅이 지배하게 되면, 관심은 그들의 메시지를 들을 청중을 찾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청중이 들어 줄 메시지를 찾는데 있다. 결국 메시지가 아닌 청중이 주도하게 될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더 이상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되는 것이다.”
2) 구도자 예배는 하나님의 권위를 끌어내린다.
복음 앞에 서 있는 해리는 거룩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무릎 꿇지 않는다. 대신 그는 사랑에 목마른 하나님에게 자신의 응답의 손길을 내미는 것으로 복음을 받아들인다.
3) 구도자 예배는 불신자에 대한 잘못된 미래를 전제로 한다.
윌로우크릭은 해리에게 헌신을 요구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매일 자신을 부인하며 사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4. 윌로우크릭 교회가 미친 영향
윌로우크릭은 교회가 어떻게 하면 숫자를 효과적으로 늘릴 수 있는지에 대해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교회가 되었다.
윌로우크릭의 성장 요인 중 가장 큰 것은 해리가 부담 없이 올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부담 없이 온 해리는 언제나 부담없이 떠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문제의 핵심은 명료합니다. 마케팅 전략을 수용하면서 동시에 성경에 충실할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 존 맥아더
06 마케팅 교회의 모델2 : 릭 워렌과 새들백 교회
1. 릭 워렌과 목적 열풍
릭 워렌 목사의 저서 속에 나타난 그의 목회 철학은 사람의 필요를 채워줌으로 그들을 이끌고 유지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사람의 필요를 먼저 채우는 것이 예수님의 방법이다라고 강하게 주장한다.
2. 새들백 교회의 핵심: 사람들의 필요를 먼저 채워 주라
종교라는 단어 대신 삶으로 인식되는 기독교에 있어서 삶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은 가장 중요한 주제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들은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효과적인 각종 방법에게 그 자리를 내준다.
예수님은 결코 사람들의 즉각적 필요를 채우는데 민감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느끼는 필요를 채워 주심으로써 그들의 환영을 받기는커녕 예수님이 말씀을 하면 하실수록 사람들은 예수님을 떠나가고 급기야 예수님을 죽이려고까지 했다는 충격적인 말씀이 나온다.(요 6:65~66 ; 7:1) 예수님의 모든 기적의 진정한 목적은 사람의 필요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릭 워렌의 ‘목적이 이끄는 삶’에 대한 평가
인간의 필요를 가장 확실하게 채웠다는 점이 ‘목적이 이끄는 삶’이 마케팅적으로 의미를 갖는 첫 번째 이유이다.
새들백의 ‘목적이 이끄는 40일 캠페인’은 구도자 예배가 가진 구조적 결함을 패키지된 상품과 단기간의 이벤트라는 두 가지의 무기를 가지고 극복한 케이스이다.
‘목적이 이끄는 삶’속에는 십자가는 두 부분에 등장한다.
릭 워렌 목사는 ‘목적이 이끄는 삶’에서 구원의 문제를 철저하게 인간 중심의 차원으로 끌어내린다.
교회는 자신의 필요를 채워 심리적으로 만족한 삶을 약속해서는 안 된다. 교회가 약속해서 하는 것은 비록 고통스러운 삶이 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구원받은 크리스천이어야만 한다.
07 마케팅 교회와 교회 컨설팅
교회의 수적 성장 여부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의지해야 한다. 하나님이 필요하시면 구원받는 사람의 수를 더하게 하시는 것이다.
교회는 더 크게 성장하고 비대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성숙해지고 작아져서 세상 속으로 확산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과 더불어 진짜 만나야 할 컨설턴트들은 바로 교회사의 위대한 영적 스승들이다. 백금산목사가 쓴 <큰 인물 독서법>은 영적 거인들에 대한 전기읽기를 통해 큰 인물에게 왜 배워야 하는지, 어떻게 배워야 하는지를 말해 주는 책이다. 목회자들이나 성도들이나 영적 거인들을 만나 그들에게서 배우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경쟁이 아니라 소명이다. 경쟁이 판을 치는 곳은 전문가와 기술자들을 필요로 한다. 오늘날 교회 속에 소명 대신 경쟁이 자리잡을 때 목회자가 소명자가 아니라 한낱 기술자, 전문가로 전락하고 있지 않은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예수님은 경쟁시키기 위해 교회들을 세우지 않으셨다. 교회가 서로 다른 것은 교회마다 예수님이 주신 소명과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08 마케팅 교회와 숫자 우상
1. 마케팅 교회의 최고 가치는 숫자다.
마케팅 교회는 큰 것이 옳고 진리라는 세상의 가치로 하늘의 가치를 매기고 있다.
숫자가 꿈이 되고 숫자가 비전으로 둔갑하여 오늘날 한국 교회를 오염시키고 있다.
교회가 크고 많은 것이 옳다는 가치를 수용하는 순간 교회는 회사가 되고 목사는 사장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
최근 교회 속에 파고든 가장 무서운 적은 숫자로 성공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의문을 제기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2. 성경은 교회의 숫자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는가
예수님은 숫자로 사역의 성공 여부를 판단하지 않으셨다. 숫자라는 면에서 볼 때 예수님은 전혀 성공적이지 못하셨다. 한 때 그를 따르던 많은 제자도 예수님을 떠나가고 결국에는 단지 열두 명만을 데리고 계셨다. “그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요 6:66). 예수님은 사람들을 최대한 증가할 수 있는 절호의 순간에 도리어 있던 사람들마저도 떠나도록 하셨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기독교의 진리가 보여 주는 하나의 아이러니이자 핵심이 아닐까?
계시록의 일곱 교회에 대한 칭찬과 비판의 기준은 교인 수의 증감이 아니다. 칭찬을 들은 교회도 교인 수가 늘어서 칭찬을 받은 흔적은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다. 칭찬을 받은 이유는 오로지 ‘기독교의 바른 교리’를 생명을 걸고 지켜 냈기 때문이다. 책망의 이유는 자기 착각과 세상과의 타협 그리고 거짓 가르침의 수용이다.
3. 숫자가 우상이 된 한국 교회의 현실
크고 많은 것이 결코 하나님의 축복이나 부흥이 아닌 것을 우리는 오늘날 교회의 열매를 보고 똑똑히 인식해야만 한다. 왜 하나님은 루터를 통해 새로운 역사를 일으키셨는가? 다들 하나 되어 세계를 하나로 묶는 대 사역 속에서 왜 루터를 통해 교회를 ‘분열’ 시키셨는가? 그것은 당시의 교회가 성경 말씀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믿음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숫자의 많고 적음이 부흥과 위기를 가늠하지 않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다. 부흥이냐 위기이냐를 결정짓는 시금석은 교회가 지금 말씀 속에 있는가 아니면 말씀 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의 여부이다.
숫자가 진리이면 이집트가 진리이고 바벨론이 진리이며 로마가 진리이지 않겠는가? 작고 작은 이스라엘이 어떻게 진리 근처에나 가겠는가? 큰 것이 바르고 진리라는 이 세상의 넓은 길을 향해 교회가 좁은 길을 보여 주어야만 한다. 교회는 이 세상에 아직도 많고 큰 것으로 판단할 수 없는 절대 진리가 있다고 여전히 선포해야만 한다. 교회가 그 넓은 길에 동참해서는 안 된다.
09 마케팅 교회 극복을 위한 복음의 능력 회복
1. 복음의 능력 회복
친절한 하나님이 넘치는 교회는 마케팅이 넘칠 것이다. 그러나 거룩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교회는 인간의 기획에 의지한 마케팅 대신 하나님의 주권에 무릎 꿇는 예배자들로 넘치게 될 것이다.
(1) 십자가에 대한 바른 이해의 회복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믿는 것 외에는 결코 다른 길로는 믿을 수 없는 인간에게 가장 말이 안 되는 구원의 방법이 바로 십자가이다.
(2) 복음에 대한 담대함의 회복
성령님의 능력이 드러날 때는 교회에서 눈 감고 노래 부르며 감정에 젖어 있는 때가 아니다. 성령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곳은 십자가의 거친 복음이 가감 없이 선포되는 자리이다.
(3) 구원의 내세성의 회복
복음은 오늘날 나의 현실에 유용한 하나의 상품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장차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따라서 이 복음 속에 있는 미래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회복하는 것이 현세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기보다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잠재울 수 있다.
(4) 죄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바른 이해
하나님의 진노가 상실된 복음은 결국 능력이 사라진 복음으로 교회 안에 넘쳐나게 된다. 능력이 상실된 복음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셔야만 했던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교만을 더 키워주는 데 사용한다. 죄를 용납할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이 당신의 독생자를 죽이면서까지도 지키셔야 하는 거룩인 것을 보여 주신 곳이 바로 십자가이다.
거친 십자가, 인간을 모욕하는 십자가를 부드러운 십자가, 인간을 기쁘게 하는 십자가로 바꾸려는 마케팅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주권에 대한 도전 행위이다. 공의의 하나님을 오로지 사랑의 하나님으로만 바꾸는 것은 복음을 반쪽 자리로 만드는 행위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완성되는 복음의 주인공을 인간으로 바꾸는 시도이다. 인간이 복음의 주인공이 되도록 하려는 노력이다. 정죄함이 실종된 복음은 인간을 더 나은 삶의 길로 인도하는 삶의 윤활유 내지 활력소 이상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율법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의 현실을 직시해야만 한다.
스펄전, “그들이 처한 위험을 바로 감지하고 죄인들이 죄 속에서 안심하지 않도록 바로 가르치라. 그들의 마음을 두드리고 또 두드리라. 살고 죽는 문제가 달려 있다는 점을 명심하고 계속 두드리라. 당신의 호소, 당신의 열심, 당신의 애탐을 하나님이 보시고 그들을 새로 태어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신다.”
로이드 존스, “죄에 대한 교리 없이는 바른 복음이 있을 수 없다. 죄가 무엇인지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이 복음이 전해질 수 없다. 단순히 ‘예수께로 오세요.’라고 말하면서 그분을 친구로 소개하며 놀라운 새 삶을 얘기하는 것은 결코 신약이 가르쳐 주는 복음이 아니다. 죄에 대한 정죄함이 없이 신약의 복음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5) 회심에 대한 바른 이해와 회복
회심은 하나님이 이루시는 역사이다.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다. 죽은 자가 스스로를 살릴 수 없다. 그렇기에 회심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이다. 회심은 단지 감정의 변화가 아니다. 회심을 과도하게 감정과 연결시키는 순간 감정주의의 함정에 쉽게 빠질 수 있다. 회심한 자는 분명 그리스도로 인해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은 사람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여전히 같은 사람이기도 하다. 나를 쓰러뜨리는 나의 약함이 순식간에 사라지지 않는다. 아니 전보다 더 치열하고 더 교묘하게 공격한다. 그러나 내가 진정으로 회심한 사람이라면 나는 그 가운데세서 나를 의지하는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한다. 나를 무너뜨리려는 시험과 유혹이 나에게서 사라지는 것이 회심이 아니다. 내가 그들을 대항하는 방법이 달라지는 것이 내가 회심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나는 여전히 절망하고 또 쓰러진다. 그러나 다시 일어난다. 내 힘이 아닌 성령의 힘으로 말이다.
회심은 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한다. 죄에게 때로는 패배하지만 죄를 미워한다. 죄를 증오한다. 회심자는 죄에 대한 증오와 함께 진정한 회개의 삶을 사는 사람이다. 회심은 내 자신이 더 사랑스러워지고 자랑스러워지는 것이 아니다. 회심자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바로 세우기 위해 자신과 일정한 수준의 긴장을 유지한다. 그 긴장을 영적 훈련이라고 해도 좋다.
회심은 행동의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변화이다. 회심자는 겉으로 나타나는 행동 뒤에 숨은 의도를 관찰하고 그 의도를 바로 세우기 위해 노력한다. 회심자는 말씀의 진리를 사모한다. 회심자는 결코 포기하지 않고 십자가를 붙잡는다.
가장 두려운 것은 회심하지 않았는데 회심한 줄 알고 사는 것이다. 철저한 자신에 대한 성찰 대신 ‘입으로 쉽게 하는 고백’과 ‘익숙한 교회 생활’을 구원의 가장 큰 증거인양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진정한 회심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선한 삶이 아니라 의로운 삶임을 알 때 찾아온다. 그리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로움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다. 친구에게서 점심 얻어 먹는 것보다 더 쉬운 오늘날의 ‘거듭남의 회심’이 성경의 가르침대로 바로 선포될 때 숫자를 자랑하는 교회가 아니라 복음의 능력을 자랑하는 교회가 될 것이다.
2. 거룩하신 하나님의 회복
인간의 입에 맞지 않는 하나님의 거룩하심 대신 인간의 필요를 완전히 채워주는 하나님으로 바꾸는 것이 기독교 마케팅의 정체이다. 하나님의 거룩을 실종시키지 않는 한 마케팅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실종은 예배의 실종으로 이어진다.
하나님의 도덕적인 본성이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그분의 초월성이 물러나게 되면서, 현대에는 하나님의 내재성과 관련성이 두드러지게 강해졌다. 설교 내용도 이런 현상을 반영한다. 이렇게 변모된 기독교 신앙은 자신만의 내면세계에 빠져서 ‘환각제’를 원하는 전형적인 현대인에게 아주 매력적이다.- 웰스
미국 복음주의 교회들은 대부분 주님의 거룩성에 대한 통찰력을 잃어버렸다. 우리의 실용적인 시대와 문화 속에서, 우리는 크리스천의 생활의 수단으로만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유혹받는다. 만앾 우리가 주님의 거룩성에 타협한다면 반드시 이에 대한 심판이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에 치중하는 마케팅 교회의 설교는 축복과 위로가 그 중심을 차지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실종은 복음의 실종을 의미한다. 거룩이 없는 곳에 죄가 있을 수 없고 죄가 없는 곳에 구원도 없다. 마케팅 교회 속에서 우리는 구원이라는 말을 듣기가 쉽지 않다. 듣는다고 해도 성경이 말하는 죄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다. 하나님이라는 거대한 에너지로부터 도움을 받는 각종 형태를 총합해서 표현하는 용어일 뿐이다. 자존감 회복의 구원이고 자아 성취의 구원이다. 자신의 사상과 이상을 실천하는 데 필요한 도구로 예수라는 청년과 기독교 이념을 가져다 쓸 뿐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실종은 무서운 시대가 다가옴을 의미한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르는 ‘하나님의 거룩’이 사라지는 순간 인간에게 필요한 다른 모든 ‘경계’도 하나씩 사라진다. 남자와 여자의 경계가 희미해져 간다.
조지 휫필드는 그의 일기에서 “내가 하나님 앞에서 긴장하였을 때보다 내 영혼에게 더 도움이 되는 때는 없었다.”라고 말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갖는 긴장은 우리 영혼에 보약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러나 마케팅 교회의 가르침 속에서 하나님 앞에 마땅히 가져야 할 긴장은 사라진다. 친절한 하나님 앞에서의 ‘친밀감’으로 대체된다.
바른 분노가 회복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밑도 끝도 없는 긍정적 성숙과 관용이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어야 할 곳에 경계를 긋기 위한 거룩한 분노이다.
기독교는 인간의 심리적 필요를 채우기 위한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는 곳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하나님을 보고 맛보아 알아야 한다. 이 길만이 우리가 살 길이다. 허접잖은 정신 상담을 통해 삶을 회복할 수 없다. 인간이 인간의 영혼을 책임질 수 없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는 우리 형상의 본질인 하나님을 볼 때 비로소 회복될 수 있다. 그 길은 교회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이 바로 선포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항상 어느 시대에나 십자가의 복음을 바로 지키려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시대마다 비록 소수이기는 했지만 진리에 굳게 서서 하나님의 교회가 바른 성경의 진리대로 회복되기를 바라면서 행동했던 믿음의 선배들이 교회사의 페이지마다 끊임없이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힘과 격려가 된다. 워필드는 “지키기 위해 싸우지 않는 진리는 믿는다고 고백할 가치도 없는 진리”라고 했다. 진리를 믿고, 진리대로 살며, 진리를 보호하기 위해 싸우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이다. 진리는 수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진리는 다수 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편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