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 12:25-33 "여로보암이 에브라임 산지에 세겜을 건축하고 거기서 살며 또 거기서 나가서 부느엘을 건축하고 그 마음에 스스로 이르기를 나라가 이제 다윗의 집으로 돌아가리로다 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려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하고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하고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이 단까지 가서 그 하나에게 숭배함이더라 저가 또 산당들을 짓고 레위 자손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 팔월 곧 그 달 십오일로 절기를 정하여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 하고 단에 올라가되 벧엘에서 그와 같이 행하여 그 만든 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렸으며 그 지은 산당의 제사장은 벧엘에서 세웠더라 저가 자기 마음대로 정한 달 곧 팔월 십오일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절기로 정하고 벧엘에 쌓은 단에 올라가서 분향하였더라."
갈라디아서 6:1-8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고린도후서 11:14-15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복음을 바르게 이해함으로 구원의 확신에 이름
성도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통상 '구원받았다'라고 말할 때, 사실상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의 본질'에 대해서 바르게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의외로 구원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바르게 가지지 못한 채 자신이 성도인 사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실정인 것을 감안하면 분명히 그래야 합니다. 사실 구원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현대 교회가 안고 있는 많은 병폐들 가운데 치명적으로 위험한 부분은, 성도들이 처해 있는 안일한 구원 의식에 대해 교회 스스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런 현상을 자초하는 주범이 되기까지 한다는 데 있습니다. 사실 구원을 받는 일과 구원하신 목적을 아는 일은 피차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복음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없거나, 혹은 잘못 알고 있는 상태에서 자신의 구원을 확증하려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로 외적인 의식을 붙잡거나, 혹은 감정에 자극을 가하는 심리적인 기법으로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확증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 까닭에 삶의 영역에서 동적인 능력을 전개해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증은 마음의 상태를 심리적으로 자극하여 스스로 암시요법에 빠져드는 상태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구원은 역사 속에서 일하신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사람에게 제공된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받아들이고 소유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이때 이 구원 역사는 진리로 증거되고 받아들여집니다. 따라서 성도가 구원을 받게 되면,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진리 체계를 이해하는 과정 속에 있게 됩니다. 곧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의 내용과 성격, 그 신학적 의미 등등의 일정한 논리 체계를 가지게 됩니다.
이런 복음의 논리 체계로 말미암아 성도는 구원의 확신에 이르게 됩니다. 구원의 확신이란, 감정의 요소를 포함합니다. 그러나 지식에 입각한 감정입니다. 지식을 배제하고서는 참 구원의 확신에 이를 수 없습니다. 따라서 복음을 어중간하게 알고 있거나, 또는 유사하게 아는 복음적 지식으로는, 다분히 '다른 복음'을 좇을 위험성이 있습니다. 성도가 진정으로 복음을 소중하게 여긴다면 이 사실을 크게 주목합니다.
자기가 믿고 있는 진리의 복된 가치성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 복음이 가져다주는 새 사람의 능력을 맛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어느 날 '다른 복음'이 미혹해 올 때 쉽게 넘어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온 삶의 실질이 없는 까닭에 그 미혹케 하는 것이 더 매력적으로 보여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복음적 지식을 대충 대충 아는 가운데 열심을 내는 것은, 자신을 주목하는 사람을 그런 식으로 그릇된 길로 유도하는 잘못까지도 범하게 됩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이처럼 어중간한 진리가 주는 위험성은 치명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중간한 진리는 거짓보다 더 위험한 것이다"라는 말이 가장 잘 통하는 세계가 있다면 바로 기독교 세계일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구속의 진리를 앎에 있어서 대충 대충 안다거나 또한 막연하게 아는 정도이면서도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듯이 잘못 생각하는 중에 엄청난 모순 속에 빠져드는 사람들이 제법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유대인들은, 아무 것도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엄청난 죄를 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복음 지식은 어중간한 것이었고, 대충대충 아는 어설픈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사람의 생각이 조상들의 전통과 유전이라는 미명 아래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위에 서는 기현상까지 가세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상태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정작 구약 성경이 증거해오던 메시아가 오셔서 그 증거를 숱하게 보이셨지만 도무지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오시면 어떤 일을 하실 것인가에 대해서 나름대로 알고 있었습니다. 만일 저들이 구약 성경을 아예 몰랐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비극적인 행동을 자초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 예수께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저들과 논쟁하는데 소비하셨는가를 생각해 보면 놀라울 정도입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그들이 알고 있었으며 추종하고 있었던 것들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어이 없게도 예수님의 행동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판단하면서 사사건건 반대와 대적으로 일삼다가 끝내는 사형까지 몰아갔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모순은 동일하게 자행될 수 있습니다. 현대 기독교가 결정적으로 위협을 받는 것은 불신앙인들로 부터가 아니라, 나름대로 정당하고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가운데 끝까지 고집을 부리는 자칭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입니다. 특히 이런 사람들이 세력을 잡고 큰 제도권을 형성하고 있어 문제는 더더욱 심각합니다. 그들은 복음을 알고 있다고 자부하면서 정작 참된 복음의 길을 걷는 사람들을 모진 박해 속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 거짓된 것을 마치 진리인양 오도시킴으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순에 빠져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제일 큰 박해를 받았던 상대는 하나님을 전혀 몰랐던 이방인들이 아니었습니다. 매우 모순되게도 하나님을 안다고 자처하였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저들은 부분적으로 알며 대충 알고 있었던 그 짧고 부족한 진리로 바울을 거짓 일군으로 몰아갔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바울은 하나님의 율법을 파괴하는 전대미문의 협작꾼이었을 뿐입니다.
바울은 이들 유대인이 복음 진리의 길에 큰 거침돌이 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들이 전하는 진리란 언제나 부분적으로만 옳을 뿐이었습니다. 따라서 유대교는 전체적인 차원에서 평가될 때에는 '다른 복음'에 불과했습니다. 유대교가 열심을 내면 낼수록 하나님의 영광은 크게 훼손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가리워졌습니다. 그런 까닭에 유대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마땅한 종교였습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는 일은 곧 구원의 정당성을 말합니다.
1. 구원을 바르게 이해하는 일의 중요성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자신들이 받은 구원의 의미를 정확하고 충분하게 이해하는 일입니다. 이것을 바르게 알지 못하는 사람은 시험 앞에 놓여질 때 일순간에 복음(福音)을 저버리고 배도합니다. 갈라디아 교회의 어리석은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떠난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부르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잘못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현상적인 측면에서 성도가 어느 순간에 이르러 하나님을 쉽게 떠나 버린다거나, 혹은 그분께 드리는 순종의 삶을 온전히 수행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바르게 이해한 사람으로서 그처럼 복음에서 떠날 수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를 자처하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은혜의 온전한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상태가 나타납니다.
첫째, 대충대충 알고 적당히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마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진리의 부족을 느끼지 않고 자기 만족에 빠져 있어서 더 이상 진리를 깊이 배우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동에 있어서는 나름대로 열심을 냅니다. 그런 까닭에 평소 성도와의 교제에는 복음을 말하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항상 교회적인 일을 만들어 그 속에 묻혀 사는 것을 큰 기쁨으로 삼습니다. 이 모두가 복음과는 상관없이 자기 의로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쉽게 시험들기도 하며, 교회에 상처를 입히기도 합니다.
둘째, 복음 지식의 부재 현상이 많이 발견되는 대상은 주로 감정적인 사람들에게서 나타납니다. 이지적(理智的)이지 못하여 매사에 쉽게 흥분하고 즉흥적으로 결정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순전히 감정적(感情的)인 사람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복음이 담고 있는 진리의 내용들은 그 충만한 빛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셋째, 더욱이 복음을 심리학적(心理學的)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팽배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기도원이나 부흥회 같은 곳의 집회에서 일순간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쉽게 하고, 이런 고양된 감정을 복음의 진수인양 생각합니다. 이런 현상은 복음이 현대 사회 속에서 맞는 큰 위기입니다. 복음을 분위기와 감정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우리는 복음에 대해서 바른 인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성도가 복음을 받아들일 때 그가 이해하는 가운데 의지하여야 하는 개략적인 지식이 있습니다. 그 지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6-11절을 보십시오. 첫째, 예수 그리스도는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사역을 수행하시기 위해 이 비천한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 진리의 첫 출발점인데, 성도는 구원을 받을 때에 바로 이 지식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는 사흘만에 당당히 부활하심으로 사망의 권세를 제압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부활은 그 사역의 성격상 그분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장차 그분에게 속한 모든 믿음의 권속들을 위한 부활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40일 동안 지상에 계시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친히 목도하게 하셨습니다(고전 15:1-11). 셋째, 예수 그리스도는 이후 승천하셔서 아버지께로 들어가 그분의 우편 보좌에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택한 백성들을 인치실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지상에 계실 때 이 다른 보혜사를 보내시기 위하여 하늘로 승천하실 것이라고 줄곧 가르치셨습니다.
성도는 복음을 안다고 할 때 이상의 사실을 보다 진지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의 구속사적인 성격을 이해하는 것과 관련합니다. 성자 그리스도께서 구속하신 사실을 이해하는 것 못지 않게, 성부 하나님께서 이 모든 구속 사건을 준비하시고 또한 최종적으로 완성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권적(主權)으로 주도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일이 없이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한편, 구원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는 일에서 복음의 구속사적인 성격을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성격을 바르게 알아야 하는 일과 관계합니다. 복음의 구속사적인 성격을 바르게 이해하는 성도는 자신이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먼저 자신을 사랑하셨다고 고백합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그들을 사랑으로 찾아오셔서 근본적인 죄책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을 화목제로 삼으셨지만, 우리에게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은 이상 개괄적으로 살펴본 하나님의 고차원적인 은혜에 입각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도록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위대한 역사를 행하셔서 찾아오셨는가 입니다. 성도에게서 자기에게 이루어진 구원을 제대로 인식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첫째, 구원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실 구속사를 작정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것으로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 역사 속에서 당신의 구속사를 신실히 성취해 오셨습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3-6).
둘째, 구원이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성도들에게 알려하시는 충분한 계시의 기간이 진행되어져 나왔습니다. 구약의 역사 전체가 이런 의미를 가집니다. 구약의 율법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게 될 참 믿음의 길을 예시하고 가르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갈 3:23-24).
셋째, 드디어 때가 이르러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성취되었습니다. 구약 계시를 통하여 줄기차게 예언해 온 메시아의 도래와 사역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비로소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 속량되었고, 또한 아들의 명분을 얻었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4:4-7).
네째,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로 승천하신 가운데 당신께서 성취하신 구속의 효과를 구체적으로 자기 백성에게 적용시키십니다. 이는 자기 백성을 부활하신 당신의 생명으로 연합시키시는 일인데, 이 일을 위하여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그들 안에 거하게 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6-17).
다섯째, 그런 까닭에 성령은 믿음의 자녀들의 생명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사역에 효과적으로 연결시키는 '구원의 보증의 영'이 되십니다. 다음의 성경 말씀을 보십시오.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 1:22),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ㅡ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후 5:5),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3-14).
2. 배교의 원인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가 이렇게 놀라운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다른 복음을 좇았던 것입니다. 복음을 받았다고 하지만, 왜곡된 진리를 따르고 그 안에 속해 있음으로 인하여,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떠났던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갈 1:6). 그런데 그리스도를 떠난 데 있어서 서서히 그랬던 것이 아니라 아주 신속하게 떠났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지적은 "이같이 속히 떠나"라는 표현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어찌 갈라디아교회에만 있었겠습니까? 처음에 예수님을 잘 믿는 것 같았는데 이내 신앙을 저버려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는 법입니다. 실제로 바울을 열심히 따랐던 데마가 이내 세상으로 돌아가버린 사건이 있었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딤후 4:10).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어떤 사람들에게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성급히 결단하고 믿는 사람들이 이런 모순에 잘 빠져듭니다. 믿는 진리가 의미하는 복음의 진수를 진지하게 살펴보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성급한 결심으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서 이런 일은 쉽게 나타납니다. 성급한 결단은 성급한 포기를 자초하기 쉽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들일 때에, 복음의 진리가 내포하고 있는 진정한 가치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유혹에 직면했을 때 너무나도 쉽게 복음을 저버리는 불행에 빠져버립니다. 평온할 때에 나타나는 믿음은 시험으로 연단될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때에 유지하고 있는 믿음은 그것을 시험할 창수가 일어날 경우 단번에 그 진위성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때 신앙의 가책없이 복음을 저버리는 배도 행위를 하는 사람은 당시까지 자신이 알고 있었던 진리가 전체적인 것이 아니요 부분적인 것이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진리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자기 중심적으로 성경을 이해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중심 마음은 하나님이 아니라 탐욕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배교의 원인으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번째로, 세상에 대한 애착은 배교의 원인으로 나타납니다. 대개의 경우 복음을 떠나거나 배도하는 이유는 세상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데마의 경우가 이를 잘 보여줍니다. 데마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는 법입니다. 복음과 세상은 상호 대치됩니다. 한편에 대한 사랑은 다른 한편을 미워하는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곳에 복음은 거할 자리를 찾지 못합니다. 세상을 사랑한 데마는 당연히 복음을 떠났습니다. 이 말은 복음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세상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복음의 진리가 내포하고 있는 보배로운 가치와 만족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을 사랑하게 됩니다.
첫째, 세상과 벗된 자는 하나님과 원수임을 알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기를 자초하는 것입니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약 4:4). 복음을 아는 사람은 세상을 배설물과도 같이 여깁니다. 다만 복음의 충만한 맛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만이 더불어 세상까지도 붙잡아 보겠다는 식의 이중적인 혐오스러운 마음을 가지기 마련입니다.
둘째,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는 사람은, 실제로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분석은, 단순히 버릴 것을 버리지 못한다는 차원에서만 생각할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종국적으로 세상의 권세를 잡은 자인 사단을 추종하는 자리에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포기하지 않을 경우, 그것은 사실상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요일 2:15-16).
셋째,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동시에 세상을 사랑하는 일의 위험성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언급하셨을 정도로 염려스러운 일인 것입니다. 성도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랑하는 것에 집착합니다. 그 사람은 세상의 대명사인 돈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그 사람은 그것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은 믿음에서 떠납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9-10).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은 남에게 나누어 줄 수 없습니다. 그들은 항상 받기만 좋아하며, 쌓아 두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더 복되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소개합니다. 사도행전 20장 35절을 보십시오. "범사에 너희에게 모범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구약 성경의 지혜 역시 나누어 주는 삶의 능력을 참 신앙으로 명시합니다. 세상에 안주하여 배부르게 되면 십중팔구 하나님을 외면하고 배반하기 십상입니다. 잠언 11장 24-25절입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또 잠언 30장 9절을 봅니다.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라."
넷째, 하나님을 사랑하는 동기를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한 이차적인 수단이어서는 안됩니다. 즉 물질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과 그분의 구원 그 자체를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합 3:17-18을 보십시요.
두번째로, 고난이 배교의 원인으로 나타납니다. 배교의 원인으로 고난 문제를 생각 할 수 있습니다. 고난에 대한 각오없이 순전히 환상적 축복론에 의해 이끌려 형성된 신앙은 사실상 구원얻는 신앙이 되지 못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에 대해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는 고난이 올 경우 쉽게 배도하기 마련입니다. 고난에 대한 각오가 없이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복음적 진리를 순종해 나가는데 있어서 더 이상 견디기 어렵다고 판단하면,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이 세상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첫째, 성도가 신앙 생활을 보다 충실히, 그리고 바르게 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상대적으로 핍박이 가중되어 찾아들기 마련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십자가를 증거하였다는 사실 때문에 모진 핍박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갈 5:11),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 6:17).
둘째, 복음으로 말미암아 핍박을 받는 사람은, 그것이 바로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증거해 주는 훌륭한 표징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크게 기뻐하여야 합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 4:16).
셋째, 복음으로 말미암아 핍박을 받는 것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인 사실을 드러내주는 귀한 증거입니다. 따라서 오히려 위로를 얻습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넷째, 그 사람은 더욱 그리스도를 의뢰할 수 있게 됩니다. 참고 견디며 소망 중에 위로를 얻는 사람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가 더욱 돈독해져 그리스도를 의뢰하고자 하는 마음이 한층 강해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야고보는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고 권면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2-4).
세번째로, 유혹이 배교의 원인으로 나타납니다. 복음에서 떠나는 한 원인은, 복음의 의미를 변개시키는 다른 유혹들에 미혹되는 데서 찾아집니다. 여기서 '다른 유혹들'은 명백하게 판단된 이단적인 가르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단들의 경우는 자기들이 가르치는 교리를 공개하고 있다는 차원에서 솔직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정통주의의 옷을 입고 나타나는 사이비 복음입니다. 이 사이비 복음은 사람을 홀리는 매력을 가졌는데, 통상 무슨 주의(主義)라고 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바로 이 유사성(類似性)의 사이비 복음에 미혹되어 정통 진리를 떠나게 되는 위험이 있습니다. 이런 것에는 어떤 종류들이 있는가를 봅니다.
첫째, 복음의 축복을 상급주의(賞給主義)로 가르치는 곳에 사이비성이 존재하게 됩니다. 특히 이 상급주의 신앙은 단단히 경계하여야 할 괴악한 가르침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미혹되었던 영역에는 이 상급주의 신앙관도 큰 몫을 차지하였습니다.
둘째, 복음의 성격을 치유주의(治癒主義)로 몰아가는 것 역시 사이비 복음으로서 사람을 홀려 정통 교리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치유주의자들이 전하는 복음의 대요는, 예수께서 베푸신 각종 기적들을 성도들의 삶 속에다 재현시키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들은 병을 고침받는 이 일을 떠나서는 도무지 복음을 말하지 못합니다.
셋째, 복음의 수단을 신앙주의(信仰主義)로 나아가게 하는 것도 정통의 옷을 입은 사이비입니다. 이들은 믿는다는 말의 의미를 사람이 입술로 소리를 발음해 내는 차원에서 정의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도가 하나님의 구속사를 받아들이고, 그것의 요구에 순종한다는 차원에서 믿음의 의미를 정의하고 있습니다.
네번째로, 다른 복음을 좇는 것이 배교의 원인으로 나타납니다. 앞에서 살펴본 몇 가지 형태의 배교 원인은, 여지 없이 미숙한 그리스도인을 타락시킵니다. 초기 갈라디아 교회가 바로 이런 형태의 유혹에 빠져들었습니다. 이때 저들은 단순히 복음을 떠나기만 했던 것이 아닙니다. 아예 '다른 복음을 좇았던 것'입니다. 더 나아 보이는 것을 좇기 위하여 바울에게서 받았던 정통 복음의 진리를 일순간에 저버렸습니다. 저희는 처음에 바르게 시작하였으나 결국 다른 길로 갔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든지 이렇게 될 위험이 항상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는 여전히 유혹의 검은 눈동자의 시야에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지속적인 성경연구로 신앙적 성숙을 끊임없이 상승시켜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현재 누리고 있으며, 이미 받은 구원의 은혜의 풍부함과 위대함을 인식하지 못하고 무익한 호기심에 마음을 빼앗기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합니다. 첫사람 아담은 모든 것이 풍족한 가운데 있었지만 단 하나의 금지를 불만스럽게 여겼던 마음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믿음의 진리에 굳게 선 그리스도인은 철저하게 이성적인 상태를 유지하여야 합니다. 공연히 감정적이 되어서 그릇된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을 맹목적으로 맹종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이런 마음은 현재의 분에 넘치는 은혜에 대해서 눈을 멀게 합니다. 그래서 이미 가진 것의 보배로움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는 더 나아보이는 허상의 것을 추구하게 합니다.
3. 다른 복음의 정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의 문제점은 이상과 같은 사실에 있었습니다. 저들은 이미 받은 구원의 영광(榮光)을 바르게 알지 못하는 중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에 미혹되었습니다. 복음을 대충 대충 알고 또한 부분적으로 아는 태도는 결국 거짓 선생들의 시험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타락의 길로 이끌었던 '다른 복음'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첫째, 다른 복음은 가감된 복음으로 나타났습니다. 여기서 '다른 복음'의 정체는, 일차적으로 바울이 전한 것과는 다른 내용입니다. 이것은 단지 내용만 다른 것이 아니라, 바울이 전한 복음의 의미를 변질시켰습니다. 다른 복음은 때로는 한쪽으로 치우치기도 하고, 또 때로는 특정한 부분을 가(加)하거나 감(減)하는 모습을 띠었습니다. 또한 그럴듯한 인간의 생각을 첨가시키는 등등의 교묘한 모습으로 침투하였습니다. 복음의 변질과 부패는 언제나 이런 과정을 겪는 것을 통해서 되어지기 마련입니다. 당시 갈라디아 교회에는 율법의 행위를 주장하는 유대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졌던 자들의 거짓된 가르침이 파고 들고 있었습니다. 저들의 거짓된 가르침이란, 노골적으로 바울이 전했던 복음을 대항하고 반대하는 가르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단은 그런 식의 유치한 방법으로 사람을 미혹할 정도로 어리석지가 않습니다. 거짓 선생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를 믿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율법도 행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율법은 구원을 받는 근거가 되지 않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의 여러 곳에서 율법의 의미를 바르게 해석하는 일에 생명을 걸다시피 온 힘을 쏟고 있는 이유가 그 때문입니다. 율법을 행해야 한다는 말의 의미는, 사람이 그럴 듯한 행위를 동반하여야 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결국 인간에게 행위로 자기의 의를 쌓게 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강권하시는 사랑에 붙잡힌 자라고 하는 큰 원리를 망각하고 무엇인가 소득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몰아가는 가르침을 심어줍니다. 참 복음으로부터의 '다른 복음'의 구별은, 복음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도록 하는 성격이 가미되고 있느냐의 여부로 가능합니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한 가지 목적으로 존재합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절대적인 헌신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관점을 말합니다. 그러나 다른 복음은 어떻습니까? 섬기는 자가 그 대가를 바라게 합니다. 물질적인 유익을 얻는 일과 연결시키는 복음은 이미 다른 복음입니다.
둘째, 다른 복음은 그 복음의 유사성이 여로보암의 종교와도 같습니다. 다른 복음의 위험성은, 복음의 유사성으로 말미암아 말씀과 영의 분별력을 온전히 갖추지 못한 성도로서는 그 거짓됨을 쉽사리 분별할 수 없는 교묘함을 지니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복음의 유사성은 그것이 아무리 본질에 가깝게 접근해 있다 할지라도 참 복음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복음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식으로 '다른 복음'을 섬기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할 가능성은 항상 있습니다. 열왕기상 12장 25-33절을 보면 여로보암의 종교가 나옵니다. 이 종교에서 복음의 유사성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먼저 25-27절을 보면, 여로보암이 취한 종교 정책은 목적부터가 대단히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순전히 자기의 왕권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일련의 종교 정책을 취하였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성전을 지어 백성의 마음을 르호보암에게 빼앗기지 않고 자기에게 묶어 두고자 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섬겼던 것이 아니고,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면적으로는 그들은 분명히 여호와를 섬기는 자들입니다.
또, 28-30절을 보면, 십계명에 명백히 금지되어 있는 여호와의 형상을 만들었습니다. 여로보암은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하여 영이신 하나님을 보이게 만듦으로 여호와의 형상화를 시도하였습니다. 이런 행위는 매우 악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부에서 보기에 이들은 여전히 여호와를 열심히 섬기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31절을 보면, 여로보암은 또한 레위 자손이 아닌 보통 백성들로 하여금 아무나 자원하도록 하여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게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율법은 이러한 행위를 엄격하게 금하고 있습니다. 레위 지파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여호와를 섬기는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도록 규정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그런 중요한 규정을 무시하고 아무나 제사장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상적으로 보면, 그들의 종교는 참된 여호와의 종교와 마찬가지로 제사장 제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끝으로 32-33절을 보면, 여로보암은 율법에 명백하게 명시되어 있는 절기의 날짜들을 의도적으로 바꾸었습니다. 이 역시 백성들이 남 유다로 내려가 절기를 지키는 것을 막으려는 정치적인 목적 때문에 취해진 조치였습니다. 그래서 북 이스라엘 안에도 남 유다에서 지키는 것과 같은 유사한 절기들이 치러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규정하신 날짜들과는 상관 없이 자의적으로 집행되었습니다. 이 역시 외부에서 보게 되면, 여호와의 절기를 꼬박 꼬박 지키는 열심 있는 신앙 행위로 비춰졌습니다.
여로보암의 이런 종교적 행위들은 단지 외형적(外形的)으로 보기에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같이 비쳐지고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놀랍게도 여호와를 경배하는 것이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전적으로 여호와를 거스르는 무서운 불신앙적인 행위인 것이 드러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외적인 유사성의 교묘함으로 말미암아 여간해서 그 위험성이 깨달아지지 않았습니다. 여로보암이 세운 이 전통은, 이후 북이스라엘 왕들에 의하여 대대로 계승되어졌습니다. 그런 까닭에 열왕기 기자는 이스라엘의 각 왕들의 행적을 마감할 때마다, "그가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고 하는 구절을 공식과도 같이 덧붙이고 있습니다.
4. 복음을 대적하는 사단의 궤계
현대의 교회가 처해 있는 동일한 위기(危機)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날 대적자 사단은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교묘히 위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위하는 듯하나 사실에 있어서는 복음을 교묘하게 변질시킵니다. 진실로 문제의 심각성은 저가 복음을 훼방(毁謗)함에 있어서 아예 드러내고 노골적으로 방해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복음을 위하는 듯하면서 실상은 교묘하게 파괴해 나간다는 데 있습니다. 사단의 간교함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첫째로는, 사단은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여 나타납니다. 사단은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고서 자신을 따르는 일군들에게도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여 나타나게 합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가장 염려하였습니다. 사단의 일군들은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고서 자기 자신을 살찌우는데 주력합니다.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4-15).
첫째, 어느 시대를 무론하고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여 활동하는 거짓 선지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스라엘이 멸망으로 빠져 들어간 원인이 그들 거짓 선지자들의 득세에 있었다는 사실은 너무도 자명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여 이스라엘을 유린하고 착취하였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을 쳐서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자기만 먹이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의 무리를 먹이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냐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의 무리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어 주지 아니하며 쫓긴 자를 돌아오게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강포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며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 내 양의 무리가 모든 산과 높은 APT부리에 마다 유리되었고 내 양의 무리가 온 지면에 흩어졌으되 찾고 찾는 자가 없었도다"(겔 34:1-6).
둘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와 같은 에스겔서의 배경 하에서 양의 옷을 입고 나아오는 흉악한 이리의 출현에 대해서 주의를 일깨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무리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요 10:7-13).
셋째, 사도 바울 역시 거짓 일꾼들의 출현을 내다보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떠난 후에 에베소 교회 안에 거짓 선지자가 일어날 것을 예감하고 장로들에게 경고하였습니다. 그런데 더더욱 놀라운 것은 이들 거짓 선지자들이 밖에서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스스로 자생하게 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행 20:29-30).
넷째, 바울이 내다본대로 얼마 후 에베소 교회 안에는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이 일어났습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계 2:2).
둘째로는, 사단은 다른 복음을 덫으로 사용하여 성도들을 사로 잡습니다. 더욱이 부패한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기 욕심에 이끌려 살기 때문에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단은 '다른 복음'을 덫으로 사용하여 그들을 사로 잡습니다. '다른 복음'의 특성은 인간의 욕망을 최대한 이용하여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사단의 간교한 계교가 그것을 놓칠리가 없습니다. 인간은 천성적으로 종교를 이용한 자기이익 추구의 욕구에 크게 지배받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마음 중심에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채워져 있지 않은 사실을 통하여 여실히 증명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도, 도리어 예수님을 배척했던 유대인들의 경우가 그러하였습니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 5:43-44). 그런 의미에서 바울도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말하기를, 자신이 전해준 것이 아닌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한다'고 책망하였습니다.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후 11:4).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의 고귀한 가치를 하락시키고, '사람의 의'를 내세우도록 몰아가는 교묘한 가르침으로서의 '다른 복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율법주의의 위험한 특성이란 한마디로 이것을 의미합니다. "할례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갈 6:13).
세번째로, 사단은 이단과 사이비의 홍수로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게 합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위기(危機)에 처해진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저들은 복음의 본질과 유사성을 바르게 분별하지 못하는 혼란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의 유사성의 유혹들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 교회의 형편입니다. 참으로 오늘날의 교회는 복음의 유사성으로 나타나는 이단(異端)과 사이비(似而非)의 홍수 속에 처해 있습니다.
여기에는 거대한 조직력과 그 외적인 세력의 장대함을 자랑하는 로마 카톨릭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각개 격파술을 특징으로 믿음의 자녀들을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여호와의 증인이 있습니다. 또한 맹목적인 민족적 우월감을 내세우면서 부와 권세로 종교 왕국을 넓혀가고 있는 통일교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럴듯한 인본주의적 정의를 특징으로 하는 자유주의 기독교로서의 이단이 있습니다.
5. 현대판 다른 복음
전통적 보수주의를 자처하는 정통 개혁주의 교회(改革主義敎會)들 속에서도 이러한 위기는 존재합니다. 그것은 특히 '구원의 종교'를 기복신앙화(祈福信仰化)시키는 일 속에서 대체적으로 그 두드러진 모습을 나타냅니다. 이것이 바로 현대판 율법주의(律法主義)의 교묘한 위험입니다. 이런 다른 복음과 대처하여 싸워 나가는 방법은 구속사의 관점에서 성경을 바르게 정립하며, 부단히 자기를 성찰 할 때에만 가능합니다.
첫번째로, 복음의 목표에 대한 바른 이해가 절실합니다. 기독교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는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만을 추구하는데 있기 때문에 그 삶을 살 때에 인생의 의미도 있습니다. 사는 것이나 죽는 것이나 그 자체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 가치를 발휘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살아 있으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가는 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하고, 죽을 형편에 처해 있으면 그리스도에게 그 생명을 온전히 의탁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인생은 삶과 죽음을 무론하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과 관련되어 있을 때 참된 의미를 가집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7-8). 심지어 먹고 마시고 활동하는 모든 인간적 움직임의 동기와 시작과 그리고 그 결론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야 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만물의 나옴과 움직임과 그리고 그 최종적인 돌아감의 영광을 하나님께 두었습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롬 11:36).
두번째로, 그러면 하나님이 영광받으시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구원사역'을 통하여서만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께서는 구원사역의 주제를 벗어나서는 영광을 받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유일한 복음의 존재 이유요 또한 목적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핵심을 교묘하게 오도시키고 있는 현대판 '다른 복음'으로서의 '유사한 복음들'의 위험으로부터 참 것을 신속히 회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지상 과제인데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에베소서 2장 8-10절의 의미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에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둘째, 디모데후서 3장 15-17절의 의미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셋째, 이사야 43장 21절의 의미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넷째, 창세기 18장 19절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세번째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하신 목적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영광은 그분께서 친히 베푸신 '구원 사역'을 그 본질적인 내용으로 할 때 비로소 효과적으로 나타나집니다. 창조주(創造主), 또한 구속자(救贖者)되신 하나님이심이 이에서 가장 잘 드러납니다. 그러면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과연 무엇입니까?
첫째, 자신의 죄인됨을 철저하게 깨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인가에 대해서 피상적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철저하게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전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그분만을 철저하게 의지하여야 합니다. 자신에게서 나올 수 있는 일체의 의를 분토와 같이 여기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가장 존귀히 여겨야 합니다(빌 3:7-8). 바리새인보다는 세리가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눅 18:9-14).
네번째로, 그리스도인은 죄로부터 자신을 거룩히 구별시켜 나가는 일에 최고의 목표를 두어야 합니다. 바로 이 사실 속에서 자신의 구원받은 증거는 그 풍성한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이때 다음 두 가지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첫째, 소극적인 의미에서 율법을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적극적인 의미에서 의를 좇아 행하여야 합니다.
이제 결론을 맺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성찰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은 그 질적인 특성을 성경적으로 바르게 받아들일 수 있을 때에만 자신의 생명 이상의 것으로 여기는 고귀한 보배가 될 것입니다. 복음의 진리를 대충 대충 안다거나 혹은 어중간하게 알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자신이 복음을 어중간하게 알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의 여부는,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경배의 목적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를 점검해 봄으로써 바르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목적을 자기의 의를 내세우는데 둔다거나, 혹은 어떤 물질적인 만족을 얻기 위한 일 등등에 두는 사람은 이미 '다른 복음을 좇고 있는 상태'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아직 복음의 본질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는 증거이므로 바울이 전했던 '정통적 복음'을 철저하게 배우는 과정을 가져야 합니다. 복음의 진리가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본질로 하는 것이 아닌 한 모두가 다른 복음, 곧 거짓 복음일 뿐입니다. '다른 복음'은 바울이 전했던 복음의 내용을 그대로 계승하지 않고, 그럴듯한 유사성을 띠고 있는 데서 찾아집니다. 우리 모두 깨어 있지 않으면 다른 복음을 좇기 쉬운 연약한 육체를 가졌고, 또한 미혹받기 쉬운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복음'을 좇을 수 있는 위험성을 조심하여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