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재발한 과욕병(過慾病)
한결 유연해진 교통편이다.
서울에서 아침 첫 고속버스를 이용해도 한나절 이상 정맥을 누빌
수 있으니 말이다.
탈출때는 hitch-hike로 해결하지만 접근시는 적잖은 부담의 택시
이용이 불가피한 구간들을 벗어났기에 더욱 가벼운 기분이었다.
무등산이 지호지간처럼 가깝게 느껴진다는 것은 고도를 급격하게
높여야 한다는 뜻도 되기 때문에 그만큼 긴장을 주기도 했다.
묘치에서 북서쪽 직선상의 무등산을 겨냥하고 500m대 봉으로
급히 올랐고 594m봉을 지나서는 다시 600m대를 향했다.
계속되는 오름 끝에 로프까지 설치된 급경사를 올라 오산인 줄
알았으나 속았다.
5월 중순 날씨 치고는 무척 더운데 2시간 이상 힘주어 올랐기
때문인지 온 몸이 땀에 흠뻑 젖었다.
오산 정상의 암봉
드디어 687m 오산(鰲山)에 올랐다.
멀리서는 이름대로 자라처럼 보인다는 암봉이다.
서북에서는 이어가야 할 안양산 ~ 무등산 제봉(諸峰)이 걸음을
재촉하라고 독려하는 듯 했다.
동쪽의 동복호도 눈을 뺏어가려 했다.
잠시 쉬는 동안 광주의 서석완에게 전화했다.
대간 종주 때 내 생일상을 차려 주었고 훗날 9정맥이 완료되는
지리산 영신봉까지 마중나온 고마운 분이다.
그는 오늘 밤 자기 집에서 유할 뿐 아니라 이 지역의 호남정맥을
통과하는 동안 계속 그리 하라고 권했다.
간혹 통화하고 연하장을 주고 받았을 뿐 노고단 이후(백두대간
3번 글 참조) 아직 재회는 이뤄지지 않았는데.
서밧재 ~ 묘치 15번 국도에서 분기하여 동면과 이서면을 이으며
담양군으로 넘어가는 897번 지방도로 상의 어림리 버스정류장
앞에서는 아직 해가 중천인데도 오늘을 마감하고 싶었다.
새벽에 서울을 떠나 장거리를 달려왔음에도 들머리(묘치)부터
너무 무리했기 때문이리라.
어차피 둔병재에서 마칠 건데 일찍 가서 뭐하려고 서두른 걸까.
과욕병이 이미 소멸된 줄 알았는데 되살아났나 보다.
산에서만 도지는, 묘약이 없는 고약한 병이다.
지금(2006년 12월)은 잡힌 듯 한데 언제 또 살아나 홰를
칠지 나도 모른다.
다소 긴 휴식을 가진 후 죽림을 통과하다가 기겁을 했다.
대나무밭에는 뱀이 많다는데...
뱀을 가장 싫어하는 내 혼잣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주 큰 뱀을
만났기 때문이다.
뱀은 실낙원의 원흉이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 이미지에 대한
혐오감이 워낙 강해서 나의 기피 생물 1호다.
뱀의 자극이 전화위복이 됐나.
걸음이 가볍고 다시 빨라졌다.
어느 새 안양산 자연휴양림 팔각정 앞에 도착했다.
잠시 후 휴양림 출렁다리를 건너 둔병재에 내려섰다.
안양산 자연휴양림의 팔각정
로마는 목욕탕 때문에 망했다는데
휴양림에서 올라온 한 추럭에 편승해 화순으로 나왔다.
왕복 교통의 불편이 생략되는 휴양림을 옆에 두고 멀리 찜질방을
찾아 나선 것은 백두대간 종주때 미천골휴양림에서 1박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백두대간 32번 글 참조)
버스기사의 조언으로 광주시 동구 학동의 한 찜질방을 확인한 후
갈증부터 풀기 위해 근처의 호프집(백두세상)에 들어갔다.
곧 낙동정맥 마지막 날 밤이 재연되었다.(백두대간 55번 글 참조)
저만치 떨어진 자리에서 보냈다는 맥주가 왔다.
주인은 함께 식사하자고 권했다.
지역을 망라한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마음이다.
숙면에 도움되도록 소박하고 조용한 찜질방이 맘에 들었다.
본래 찜질방은 오직 찜질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그래서 불가마와 수면실 및 간이 샤워실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찜질이 필요한 사람만 가는 곳이었다.
내가 찜질방을 선호하는 이유도 종일 산을 탐으로서 경직된 몸을
푸는데 가장 효과적이어서다.
비용 절감은 부차적 효과일 뿐이다.
그러나 목욕과 찜질을 합성한 요즘의 찜질방은 일종의 변형이다.
이 변형이 날로 늘어남으로서 불가피한 경쟁의 승부수를 시설에
두는 듯 호화일변도다.
식당을 비롯해 온갖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다.
PC방은 기본이고 오락실, 회의실, 체육관, 영화관이 있는 곳도 있다.
심지어는 생맥주 카페를 운영하는 곳까지 등장했다.
규모로 제압하려는 듯 초대형화 경쟁도 치열하다.
주말이면 모든 찜질방이 만원사례다.
평당 수천만원짜리 집의 고급 침실을 버리고 북적대는 찜질방을
찾는 것이 인간의 집씨성 때문일까.
참으로 이해되지 않는 아이러니다.
아니면, 남녀 노유청장, 찜질이 필요한 인구가 이리 많단 말인가.
찜질방이 내건 효능을 얻기 위해서란다면 우리나라 큰 일 났다.
심야 데이트, 사교장으로 활용하는 이들도 있단다.
급기야 지나친 애정표현, 풍기문란, 양속저해 행동 금지라는 보기
민망한 경고문까지 등장했다.
로마가 목욕탕 때문에 망했다는 말을 낳게 한 카라칼라목욕탕과
쿠어하우스의 퇴폐를 답습해 가는 초대형 찜질방들이 온 나라에
등장하고 있으니 이 또한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막걸리 유감
어제의 역순으로 둔병재에 다시 섰다.
이른 아침부터 힘깨나 썼다.
410m 에서 시작한다지만 853m 안양산까지는 450 여m를 줄기
차게 올라채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간밤의 학동찜질방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안양산 정상 너머에서 젊은 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순읍에서 올라왔다는 세 젊은 이는 그들도 목이 탔는지 아침
나절부터 막걸리를 마시며 담소하고 있었다.
그들은 내게도 권했다.
의례상 해본 말일 수도 있는데 나는 사양을 접고 주는 대로 다
받아 마셔버렸다.
이상하리 만큼 갈증이 유난히 심했기 때문에 염치 불고한 것이다.
그리고 산에서 마시는 시원한 막걸리 맛이 아주 특별했다.
나를 만나리라 예견하고 많이 가지고 올라왔을 리 없는데 자기네
몫을 선선히 내게 넘긴 젊은 그들이 고맙기 그지 없었다.
이후 가능한 한 막걸리 한 병을 꼭 지참하고 산행한다.
이 습관의 동기 부여자는 그들이다.
상 / 안양산 정상의 늙은 山나그네
하 / 화순의 조동영(중) 일행
무등산이 지호지간이다.
(그들중 한 사람 조동영은 할인매장을 경영한다고 했다.
저번에 화순지역의 호남정맥을 다시 타는 중 그의 매장을 찾아가
그를 만났다.(백두대간 68회 참조)
그는 의외의 방문을 반가워하면서도 너무 바뻐 내게 시간을 별로
줄 수 없으므로 그 날의 안양산 친구를 불렀으나 여의치 않은 듯
몹시 미안해 했다.
심각한 불경기라는데도 매장을 찾는 이가 다른 가게에 비해 월등히
많은 것은 그의 성실하고 부드러운 매너의 힘인 듯 했다)
막걸리는 갈증 해소에 특효가 있을 뿐 아니라 시장끼도 없애 준다.
예전 농촌의 고된 농사일에는 새참으로 막걸리가 나왔다.
그래서 막걸리 힘으로 일한다고 했다.
막걸리 인심은 농촌의 인정만큼이나 후했다.
과객에게 까지도 한 사발씩 퍼주었다.
그런데 이즈음에는 곡주라 몸에도 좋다는 이 막걸리가 농촌에서
거의 사라졌다.
찾는 이가 없으니 그럴 수 밖에.
새참으로 막걸리 대신 커피가 배달된단다.
참으로 잘못된 변화다.
광주의 진산, 무등산
암릉, 암봉의 묘미를 만끽하다가 무등산을 지척에 두고 936m
암봉에서 잠시 숨고르기를 했다.
광주의 자부심이라는 1.187m 도립공원 무등산이 위용을 숨김
없이 과시하며 손짓하는 듯 했다.
아직도 자라며 춤추고 있는 파란 억새 밭을 통과함으로서 이른바
백마능선의 끝이자 무등산의 허리인 장불재에 도착했다.
낙동정맥 영남알프스 이후 처음 느겨보는 평원이다.
무등산
신록의 휴일 정오, 무등산은 이 지역의 진산답게 장마당을 방불케
하는데도 계속 올라왔다.
가벼운 차림의 그들에게 크고 무거운 배낭을 짊어진 늙은 이가
어색하거나 신기하게 보였나.
말을 거는 이들이 많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무등산이 최고'란다.
그들의 무등산 사랑이 이처럼 지극한데도 정상의 출입금지가
아직껏 해제되지 않는 것이 납득되지 않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