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2년 6월9일 브라질의 수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지구촌 환경 정상회담 「리우회의」 현장에서 쓰레기의 환경오염을 고발한 한 장의 걸개그림 사진이 AFP통신을 타고 전세계로 전송됐다. 국내 언론기관도 수신한 『쓰레기들』이라는 제목의 이 그림사진에는 한글이 선명하게 박혀 있는 국산 라면봉지와 음료수 캔 등의 쓰레기가 보였다. 우리나라에서 제작된 그림으로 짐작됐으나 AFP통신은 사진설명에 화가의 이름을 명시하지 않았다. 따라서 대부분의 신문들이 「작가 미상」으로 보도했고, 심지어 어떤 신문에서는 『브라질의 한 화가가 그린 그림에 한글도 눈에 띈다』는 어처구니없는 오보를 내기도 했다. 뒤늦게 이 작품의 작가가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걸개그림으로 잘 알려진 「민중화가」 崔秉洙(최병수·37)씨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최씨는 브라질에서 「리우환경정상회담」과 함께 개최된 세계민간환경단체(NGO)의 「글로벌 포럼」에 참가해 4개월 동안 그린 폭 7m, 길이 10m의 대형 걸개그림 『쓰레기들』을 전시했다. 글로벌 포럼이 열린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플라멘코 공원에는 세계 각국의 수많은 화가들이 참가해 저마다 자신들의 작품을 선보였지만 최씨의 『쓰레기들』이 단연 돋보였던 것.
최씨의 작품은 현지 TV와 신문을 비롯, 「타임스」지 등 세계 각국의 각종 보도매체에 등장하며 인기를 끌었다. 더욱이 구경 나온 어린이들이 그림 앞에 모여 「쓰레기 속에서 노는 아이들」이란 주제의 사진이 자연스럽게 연출돼 그림의 주가는 더욱 높아졌다.
경찰서에서 데뷔한 「관제화가」
중학교를 중퇴한 최씨는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 「걸개그림 화가」가 됐는데 이는 그의 19번째 직업이다. 신문 배달원, 중국집 배달원, 선반공, 전기공, 보일러공, 꽃재배 농부, 목수, 레스토랑 웨이터…. 이들 직업 어디에서도 「그림」과 관련성은 볼 수 없다.
목수 일을 하던 86년 한여름, 최씨는 초등학교 친구의 소개로 만나 「그림 소모임」을 함께하던 柳然福(류연복)씨 등 홍익대 서양화과 출신 화가 4명과 함께 류씨의 서울 정릉2동 집 담벼락에서 벽화 작업을 했다. 서울 신촌기차역 옆건물 벽화 작업에 이은 그의 두번째 작업이었다. 길이 17m, 높이 3m짜리 이 대형벽화의 제목은 「상생도(相生圖)」. 그림에 관심은 있었지만 사실 그의 주임무는 사다리를 만들고 받침대를 짜는 목수일이었다.
대형 태극무늬를 배경으로 흰옷을 입은 남녀 농부가 어깨춤을 추는 광경, 나무 그늘에서 쉬는 농부 부부의 한가로운 모습, 개울가에서 물고기를 잡는 아이들 풍경 등 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무렵 그에게 의문이 생겼다. 그들이 그린 밑그림에는 진달래만 있었던 것이었다. 『왜 진달래만 그렸냐』고 물었다. 한 사람이 『봄에 피니까 그렇다』고 대답했다.
『봄에 피는 꽃이 진달래뿐이냐』고 그가 반문하며 『개나리와 철쭉도 섞어서 그리자』고 제안하자 모두들 『그러자』면서 그에게도 한 번 그려보라고 권했다.
작업한 지 일주일쯤 지났을 때 경찰과 구청직원 등 70여 명이 몰려왔다. 그들은 『그림이 주민들에게 혐오감을 주니 지우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류씨 등이 작업을 강행하자 그들은 막무가내로 그림을 지웠다. 다행히 그림을 지운 흰색 수성페인트가 마르기 전에 벽화를 되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날 경찰이 또 찾아왔다. 이번에는 유성페인트로 철저히 지워버렸다. 그리고 최씨를 포함해 현장에 있던 화가 4명이 성북경찰서로 연행됐다. 「미술운동판」에서 말하는 소위 「정릉 벽화사건」이 일어난 것이었다.
최씨는 조사과정에서 「수상한 자」로 여겨졌다. 미대 출신도 아니고, 중학교 중퇴 학력의 목수가 운동권 화가들과 어울려 그림을 그렸다는 점 때문에 「진짜 빨갱이」로 의심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이력을 모두 털어놓자 난감해진 쪽은 오히려 형사였다. 형사는 조서의 직업란에 「화가」라고 써넣었지만 이들에게 적용할 만한 법이 없었다.
이 「운동권 화가들」은 광고물 등 관리법 위반혐의(미풍양속 및 도시미관 저해)로 즉심에 회부됐고 연행 3일 만에 풀려나왔다. 친구들은 그에게 경찰이 인정한 화가라며 「관제화가」라고 놀려댔다.
벽화사건을 계기로 최씨는 그림에 눈뜨게 되고 목수일을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화가가 될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됐다. 그는 당시 많은 책을 읽으며 사회현실의 모순 에 눈뜨게 됐다.
『그래 이 모순된 구조를 깨는 무기로 그림을 택하자』
그는 현장 미술 데뷔작으로 남북을 가르는 철조망 위로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를 그린 『철새』를 내놓았다. 이어 『산 자여』 『분단인』 등 민중과 통일을 주제로 한 그림을 줄곧 그렸다.
그런 그가 본격적인 걸개그림 화가로 나선 것은 87년 6월 시민항쟁 때였다. 연세대생 이한열군이 최루탄에 맞아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그는 신문에서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이군과 부축하는 친구의 사진을 보았다. 울컥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슬픔을 삭이며 밤새도록 목판을 조각했다. 그리고 손수건 절반 크기의 천 1백80장에다 판화를 찍었다.
다음날 연세대에 모인 총학생회 집행부와 민가협 어머니들이 왼쪽 가슴에 최씨의 「작품」을 달고 있었다. 한 여학생이 『이걸 큰 그림으로 그려 많은 사람들이 함께 보게 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고, 다수의 학생들이 최씨와 함께 소매를 걷어붙였다. 작업 이틀 만에 학생회관 건물 한쪽 벽을 뒤덮는 걸개그림이 내걸렸다. 이때부터 걸개그림의 현장에는 어김없이 그가 있었다. 그는 시장에서 천을 사다가 학교 운동장이나 건물 옥상에 펼쳐 놓고 그림을 그렸다. 대중집회 현장에는 구조물을 설치하고 그림을 매달았다.
요즘엔 환경운동중
80년대 암울했던 시대 상황이 한 막노동꾼을 화가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최씨가 87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현장미술 활동이 올해로 꼭 10년째다. 현재 그의 직함은 환경운동연합의 문화홍보위원.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토당동의 한 세탁소 2층에 있는 그의 작업실에 들어서자 음악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70년대 록 그룹 「딥퍼플」의 키보드 주자였던 존 로드의 「사라밴드」라는 앨범에 수록된 연주곡들이었다. 30평 남짓한 작업실의 사방 벽에 걸린 그의 그림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담의 창조』 『최후의 만찬』과 미완성작 『성장한 야만』 등이었다. 그는 작업실 한구석에 만들어 놓은 침실에서 나왔다. 진주 진양호 부근 골프장 건설현장에 갔다가 새벽에 올라와 쉬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진주 진양호 위에다 2000년에 준공할 예정으로 46홀짜리 큰 골프장을 만든답니다. 그리고 골프장 잔디밭에 17억원 상당의 농약을 뿌린다는 거예요. 도대체 상수원 근처에 다 골프장을 만든다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이번에 만든 걸개그림은 「진양호의 2001년」이라는 제목으로 커다란 수도꼭지에서 해골 상표딱지를 붙인 농약병과 골프공이 쏟아지는 그림이에요. 집회 장소에 몰려든 아이들에게 그림 속의 물을 가리키며 물어봤죠. 「너희들 이 물 마실래?」 하고요. 모두들 「미쳤어요? 안 마셔요」 하더군요』
─환경운동을 하면서도 그림 그릴 시간이 있습니까?
『늘 바쁘긴 합니다. 환경운동은 대만 핵폐기물 북한반입사건 등 시사적인 사건에 순발력있게 대응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소 그림을 미리 만들어 놓아야 합니다. 매일매일 신문을 보면서 소재를 얻고 구상을 합니다. 기획단계가 오래 걸리는 셈이지요』
─요즘은 어떤 작업을 하십니까.
『6월 항쟁 10주년을 맞아 「6월의 함성」이라는 걸개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거의 완성단계에 있지요. 문명의 발달에 따른 인간성 파괴를 비판하는 「성장한 야만」도 작업 중이고요. 인간의 욕망은 한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밑빠진 항아리」는 이제 구상을 끝냈습니다』
─그림에 대한 관심은 언제부터 가졌나요.
『초등학교 때부터 그림을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산수 공책에 만화를 그리다가 선생님께 들켜 「알밤」을 맞곤 했죠. 특히 조각을 좋아해 제 주머니 속에는 항상 칼이 있었습니다. 그걸로 분필에다 장승을 새기곤 했죠. 자장면 배달을 할 때였어요. 아마도 77년쯤이었을 겁니다. 배달을 나갔다가 우연히 목수들이 쓰는 끌을 하나 주웠죠. 그래서 그 끌로 나무만 보면 조각을 했어요』
주위를 둘러보니 작업실에는 책장 선반 탁자 의자 등 목재 비품이 많았다. 모두 직접 재료를 구해 톱으로 켜고 다듬어 용도에 맞게 만들었다고 한다.
『걸개그림을 완성하려면 받침대도 만들어야 하고 로프도 매달아야 하고 많은 공정이 필요합니다. 선반공 전기공 목수 등의 일을 했던 것이 많은 도움이 됩니다』
침실벽 한켠엔 92년 화가 林玉相(임옥상)씨가 만든 어떤 사람의 두 손 모형(종이부조)이 걸려 있었다. 작품 제목은 『노동자 최병수의 손』이었다. 임씨는 작품 위쪽 벽에 걸린, 작품설명문이 담긴 액자에 이렇게 적었다.
『너는 머리보다 먼저 깨어 늘 머리를 지켜왔다. 머리가 생각만 하고 도무지 움직이려 하지 않을 때도 너는 몸을 던져 궂은 일을 도맡아 왔다. 손, 너를 기리고 찬양하는 날은 분명히 온다. 너도나도 머리를 찾아 아우성이지만 네가 계속 움직이는 한 세계는 결코 저물지 않는다』
「사회면 작가」
재야단체의 중요한 집회 때 단상 뒷면을 장식했던 걸개그림들은 대개 그의 손을 거쳤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 가운데 하나가 「사회면 작가」. 어쩌면 「걸개그림」이라는 단어가 대중들에게 그리 낯설지 않은 데는 그의 공이 적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걸개그림」의 어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이동식 벽화로 대형화폭에 그려 벽이나 틀에 걸어 설치하는 것. 불교의 괘불화(掛佛畵)에서 유래돼 괘화라고도 부른다」고 나와 있다. 브리태니카백과사전의 한국어판에는 최씨의 이름도 등장한다.
『한국에서는 80년대 초반부터 미술소집단 「두렁」 등에 의해 행사장이나 집회에서 간간이 쓰이면서 이동이 간편한 효율성과 선전·선동성을 인정받고 87년 6월 항쟁을 전후해 학생·노동운동 등의 사회운동이 합법·공개화되자 더욱 널리 쓰이게 된 것으로 판화와 더불어 80년대 한국사회 변혁운동의 대표적인 매체로 인정받고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최병수가 그린 「한열이를 살려내라」 등이 있다』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걸개그림의 효시로 인정받아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걸개그림은 88년에야 비로소 평론가들에 의해 미술의 한 장르로 인정됐다. 외국의 어느 평론가는 독일의 케테 콜비츠의 벽화와 중국 노신의 벽화운동, 멕시코 벽화운동, 미국의 흑인벽화운동, 그리고 한국의 걸개그림을 현대 민중미술 운동사의 주요한 흐름으로 꼽기도 한다.
걸개그림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만들어져 집회현장에서 펼쳐진다. 전시장으로 관객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가만히 있어도 그림이 다가가는 적극적인 거리미술이다.
대학가 그림패들이 주도하던 80년대 초반의 걸개그림은 파노라마 형식으로 그려졌다. 이에 반해 최씨의 작품은 단순하지만 사실적이다. 강렬한 메시지가 있다. 89년 노동절 1백주년 집회에서 선보인 「노동해방도」는 가로 21m, 세로 17m의 대작이었다. 「메이데이」가 무슨 뜻인지 몰라 사전에서 찾아보았다는 최씨지만 그림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쉽다.
『박노해의 시 「노동의 새벽」은 바로 제 얘기였습니다. 작업장에서 손가락이 잘려나간 노동자가 바로 저였으니까요. 제 그림의 주제인 분단, 핵, 환경문제의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저 같은 노동자입니다. 노동자들에게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이해시켜야 합니다』
그는 어린이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서는 걸개그림이나 판화보다 조형물을 전시한다. 『사람들에게 작품의 의미를 쉽게 전달할 수만 있다면 만화건, 판화건 또는 걸개그림이건, 조형물이건 구애받지 않으려 한다』고 말했다.
최씨가 가장 아끼는 작품은 88년에 제작한 『장산곶매』. 백두대간이 굵게 뻗어 있고 매 한 마리가 날고 있는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출범식에 처음 내걸렸지요. 이후 세종문화회관 공연배경, 전교조의 신문 광고, 대학신문의 특집화보, 노래테이프 표지 등에도 사용되었습니다. 제 작품 가운데 가장 많이 팔린 작품이기도 합니다』
요즘 최씨가 작업중인 『성장한 야만』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스케치한 그림만 얼핏 보면 흔한 「돌도끼」에 불과했으나 「돌」 대신에 「핵」이 달려 있는 「핵도끼」 였다.
『사람들은 문명을 따라가기에 바빠 문명의 잘잘못을 평가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잘못된 문명은 누군가 옆에서 지적하고 제지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만든 작품입니다. 돌도끼에서 시작한 인간의 문명이 핵에 이르러 스스로 파멸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그린 것이죠』
산업전수학교 중퇴
최씨는 지난해 환경운동연합에 들어간 뒤부터 주로 환경문제에 관한 걸개그림을 그리고 있다. 『탈』 『곰발바닥』 등 집회나 시위 성격에 맞는 그림을 구상하고 그린다. 그 중 『백조의 호수』는 수질오염 문제를 패러디한 작품이다. 백조같이 아름다운 무희들이 호수 위에서 춤을 추고 있지만 백조는 썩어 있는 호수에서 신음하는 모습이다. 또 「화분시리즈」 가운데 『수류탄 열매』는 철조망 줄기에 수류탄 열매가 맺혀 있는 작품이다. 지난해 지구의 날 선 보인 『깡통맨, 야쿠르트 걸』, 반달곰 살리기운동 집회에 등장한 『곰인형과 덫』 등도 그가 참여한 작품들이다.
최병수씨는 60년 서울 상도동에서 8남매 가운데 여섯째로 태어났다. 당시 그의 어머니는 방앗간을 운영했으며 아버지는 건축 하청인이었다. 67년 그는 강남초등학교에 입학 했다. 그런데 2학년 때 집에서 좀더 가까운 곳에 상도초등학교가 생기면서 전학을 가게 됐다. 그런데 그는 상도초등학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강남초등학교는 목재로 지어진 유서 깊은 학교였어요. 뭔가 그윽한 분위기가 있었죠. 그런데 전학간 학교는 마치 사과박스 4개를 세워놓은 것처럼 콘크리트 건물 4동만 들어서 있는 거예요. 왠지 모르게 겉에서 풍기는 인상이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그런데 친하게 지내던 친구 한 명은 자신보다 상도초등학교에 더 가까이 살면서도 전학을 가지 않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친구의 아버지는 군인 출신이라는 영향력으로 강남초등학교에 계속 다닐 수 있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최씨는 이때부터 학교 가기가 싫어져 이틀에 하루는 결석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하면서 가세마저 기울어 그의 가족은 상도동 집을 팔고 신림동으로 이사했다.
『초등학교 졸업식 날 담임선생님이 부르더군요. 출석일수가 모자라 졸업을 할 수가 없으니 전수학교에 진학하라는 것이었어요』
담임선생님이 보여준 어느 전수학교의 학교 소개 팸플릿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넓은 운동장에서 체육복 차림의 학생들이 체조하는 모습은 더욱 그의 마음을 설레게 했 던 것.
최씨가 진학한 곳은 서울역 맞은편 남산 가는 길에 있던 「한광산업전수학교」였다. 그러나 팸플릿과는 달리 건물은 낡았고, 운동장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교문을 지키고 있던 규율부 선배에게 『운동장은 어디 있느냐』고 물었는데 선배는 간단히 『너도 속아서 왔구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팸플릿에 나와 있던 체조하는 사진은 홍보용으로 남산 야외음악당에서 찍은 것이었다. 『속았다』는 느낌에 그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담임선생을 찾아갔다. 학교를 옮기고 싶다는 그의 요청에 담임은 『열심히 공부하면 옮겨주겠다』고 그를 다독였다.
최씨는 이때부터 마음잡고 열심히 공부했지만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되자 1학기 때 있었던 선생들 상당수가 보이지 않았다.
19가지 직업 전전
『전체 교사의 약 3분의 1이 바뀌었더군요. 순간 「무슨 이런 학교가 다 있나」하는 생각과 함께 또 다른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2학기 들어서는 담임 선생님에게 등록금을 내지 않는다고 맞았어요. 또 학교 가기가 싫더군요. 그러나 가족들은 막무가내로 저를 학교에 보내려 하고, 이래저래 학교와 집 둘 다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길로 가출을 했어요』
가출 이후 그가 처음 시작한 일은 신문팔이였다. 그러나 돈벌이가 시원치 않아 그만두고 보름 동안 동가식 서가숙했다. 사흘을 굶어 배가 너무 고팠던 그는 두부를 훔쳐 먹었고 중국집에 들어가면 먹는 것은 걱정 안해도 되겠다는 생각에 월급 3천원을 받기로 하고 상도동의 한 중국음식점 배달원으로 취직했다. 요리를 배워 주방장이 되고 싶었던 그는 주방에서 몰래 국수를 뽑다가 주방장에게 들켜 프라이팬으로 맞기도 했다.
『중국집 생활 3개월 만에 어떻게 알았는지 누님이 찾아왔더군요. 기술을 배워보라는 누님의 말에 중국집을 그만두고 선반보조공으로 공장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공장생활 한 달 만에 사고가 났다. 밀링커터에 왼손 뼈를 다친 것이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그는 누이집에서 요양을 한 뒤 다시 중국집 배달원으로 들어갔다. 기술을 배우라는 가족의 성화에 1년여 만에 중국집을 그만두고, 매형의 소개로 전기공장에 다니게 됐다. 그런데 또 사고가 났다.
『공장에 들어간 지 한 달 정도 지났는데 파이프를 어깨에 메고 2층 계단을 올라가다가 계단 옆에 놓여 있는 구조물을 짚었는데 힘없이 넘어가더군요. 구조물 세우는 사람들이 고정시켜 놓지 않고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사고가 났어요. 구조물 아래에는 사장과 감독, 감독 아들 등 3명이 있었는데 이들 가운데 등을 지고 있던 감독 아들이 그만 머리를 다치고 말았습니다. 사장은 수술비용 45만원을 요구했어요』 그는 1차적인 책임은 구조물 작업 인부에게 있으며, 작업중 일어난 사고이기 때문에 사업주인 사장이 해결할 문제라고 생각했다. 더욱이 그가 보기엔 그다지 큰 상처가 아니었다.
『그때 제가 받은 월급은 고작 1천원이었어요. 중국집에서 1만5천원을 받았는데 공장에선 기술을 배우는 견습사원이어서 그만큼 받았던 거죠. 그런데 45만원을 달라고 하니 황당하더군요. 지나고 나서 생각하니 사장은 수술비보다는 저임금으로 저를 붙잡아 두려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돈이 없다는 것을 뻔히 알았기 때문에 「몸으로 때우라」는 것이었지요』
최씨는 그길로 공장을 나와 며칠간 누이집에 머물렀다. 처음 공장을 소개해 준 매형이 사장을 만나고 돌아와서는 다시 출근하기 바란다는 사장의 말을 그에게 전해줬다. 매형의 설득으로 그는 다시 공장에 다니게 됐지만 틈만 나면 수술비를 요구하는 사장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다. 다시 공장을 나왔다.
그러다 봉천동의 한 버스회사 종점에서 잔심부름과 기사들의 숙소를 청소하는 배차실 보조원 노릇을 했다. 반포아파트 건설 당시 현장 부근에서 인부들을 상대로 어머니가 운영하던 함바집 심부름도 했다. 그런데 건설회사에서 돈을 못 받아 함바집은 망하고 말았다.
이번에는 공사판에서 일을 했다. 시멘트와 모래를 나르는 막노동을 했다. 막노동 4개월 만에 돈벌이가 좀더 낫고 기술도 배울 수 있는 일당직 보일러공이 됐다. 한국은행 등 몇몇 큰 건물의 보일러 공사장에서 일했고 일거리만 있으면 지방도 마다하지 않았다. 보일러뿐 아니라 용접일도 배웠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타계 소식을 들었다. 그의 나이 스물한 살 때였다.
『건강하던 분이었는데 심장마비로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어머니가 고생하시는 것이 안타까웠을 뿐 아버지에 대한 정은 별로 없었어요. 그런데 슬프기도 했지만 가슴이 짓눌린듯 답답했어요. 세상이 원망스러웠지요. 왜 나에게는 이다지도 안 좋은 일만 생기나 하는 생각으로 머리가 터져버릴 것처럼 아팠지요』
그 뒤 잠시 친구와 경기도 고양군 지축에서 비닐하우스를 이용, 꽃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분재를 직접해 보니 나무의 뿌리를 잘라내 기형으로 만드는 일이었어요. 그때마다 「아까운 것을 왜 자르나」하는 생각뿐이었지요. 농사는 제 적성에 맞지 않더군요』
결국 1년 반 만에 이 일도 그만뒀고 다시 보일러 일을 했다. 하지만 이 일도 곧 그만두게 됐다. 사업자가 일당문제로 인부들을 속이는 일이 빈번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시 노가다판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번에는 벽돌을 나르는 특수잡부였다.
그 일을 하다 그는 벽돌에 왼쪽 엄지발가락을 크게 다쳤다. 부천 공사현장에서 회사 지정병원인 중랑교까지 왕복 4시간 통원치료를 다니면서 삶에 회의를 느끼게 됐다고 한다.
얼마 후 최씨는 답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산재 보상금 15만원을 가지고 무작정 부산으로 떠났다. 해운대 모래밭에 앉아 바다를 향해 돌을 던지거나 오륙도에서 배를 타며 한숨짓기도 했다는 것.
일주일 만에 돈이 떨어지자 그는 부산의 한 레스토랑에 웨이터로 취직했다. 그런데 사장과 마찰을 빚고 며칠 만에 그만두게 됐다. 마땅히 갈 곳이 없어진 그는 서울의 친구들이 보고 싶어져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역마살 낀 놈이라 좀 드러누워야…」
서울로 올라온 그는 합정동의 한 가정집 차고를 얻어 홍익대 미대에 다니던 초등학교 동창 김환영씨와 자취를 시작했다. 당시 김씨는 홍익대 근처에서 조그만 화실을 운영하고 있었고 최씨는 보일러공으로 일을 시작했다. 김씨는 「한겨레신문」 제호 밑그림 백두산을 그린 사람이다.
그러던 어느날 그가 화가의 삶을 시작하게 되는 단초가 마련됐다. 수원 부근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4개월 동안 병원 신세를 지게 됐는데 김환영씨가 문병차 병원에 들러 『역마살이 낀 놈이라 좀 드러누워 있어야 뭘 해도 할 수 있다』면서 스케치북을 대량 사온 것. 그는 병상에서 친구가 준 스케치북에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마음먹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그 뒤 그는 경기도 고양시 지축에 비닐하우스를 짓고 살았다. 생계 수단은 여전히 보일러공이었다. 김환영씨를 통해 알게 된 홍익대 미대 친구들이 그의 집에 자주 드나들었다. 그러다 「정릉 벽화사건」이 터졌다.
그는 당시 검찰 조사 과정에서 「초등학교 출신의 노동자」라는 이유만으로 유독 자신만을 무시하는 형사와 검사의 행동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분노 속에서 사회의 모순을 발견하게 됐다.
『나는 왜 이렇게 고생만 할까, 우리집은 왜 가난할까, 사장들은 왜 내 월급을 떼먹으려고 했을까, 그러면 사장은 누구에게 돈을 뜯길까, 구청이나 파출소? 그러면 그들은 누 구에게 돈을 상납할까 하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경제의 먹이사슬 구조를 발견했어요. 이 모순된 구조가 깨지기 전에는 행복한 삶이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 모순을 깨뜨리는 일에 참가하는 의미로 그림을 선택한 것이지요』
검찰 조사를 받은 뒤 그는 2년여 동안 살던 지축의 비닐하우스에서 나와 서울 목동의 후배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후배 집에 얹혀 지내며 그는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거기서 『철새』 『산 자여』 『분단인』 등 그의 초기 작품들이 탄생했다. 어느덧 그의 작품은 걸개그림과 판화를 합쳐 1백점을 넘어섰다.
사회가 변하면서 그의 생활도 바뀌었다. 거리에서만 볼 수 있던 그의 작품이 세종문화회관이나 국립현대미술관 같은 「우아한」 공간에 전시됐다. 92년 4월 서울 인사동 그림마당 민에서 그동안 그렸던 걸개그림과 판화 등을 모아 첫 개인전을 가졌다. 그림의 주제도 핵, 쓰레기 등의 환경문제로 바뀌었다.
그는 아직도 자신을 노동자라고 생각한다. 그의 작업이 여전히 「노동」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공장에서 일할 때보다 몇 배나 힘겨운 작업이지만 걸개그림이 올라갈 때는 그동안의 피로가 씻은 듯이 사라진다고 했다.
최씨가 걸개그림 작업을 시작한 지 올해로 꼭 10년을 맞았다.
『처음에는 3년 정도 노력하면 어느 정도 기반을 닦고 생활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지요. 안정적으로 돈을 벌면서 결혼도 하고 가정을 꾸미려는 소박한 꿈을 꾸었어요. 그런데 1년쯤 지나자 「이 바닥은 굶어죽기 딱 알맞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도 10년만 눈 딱 감고 열심히 하면 뭔가 보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렇게 그림에 몰입해왔는데…. 아직 잘 모르겠어요』
설움을 붓으로 갚다
그의 집에 두번째 찾아갔을 때 그는 입체 종이호랑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종이호랑이를 통해 종이가 환경을 파괴한다는 것을 패러디하고 있습니다. 부수경쟁으로 발간되자마자 폐기처분되는 신문지 등으로 호랑이를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호랑이가 숲을 삼키는 장면을 연출하고 바닥에는 사막을 상징하는 모래를 깔아 황폐해진 환경을 보여줄 생각입니다. 제작비만 좀더 있다면 호랑이를 더욱 크게 만들어 어린이들 이 호랑이 밑으로 지나다니게 하고 싶은데요』
─공동작업을 하면 좀 편할 텐데요.
『한 작품을 완성하려면 그림은 물론 사진촬영, 섭외, 목수 일까지 1인 5역을 해야 하니 벅찬 건 사실이죠. 이런 과정 때문에 애초부터 공동작업을 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공동작업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에요』
노총각인 최씨는 『한열이를 살려내라』를 그리고 난 뒤부터 이젠 아마추어적 사고를 버리자고 생각했다. 돈은 「운동의 도구」라는 것이 그의 논리다.
『언제까지나 낭만적인 운동만 할 순 없는 겁니다. 80년대 초 그 많던 걸개그림패들이 지금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어요. 생계를 유지할 수가 없으니 제 풀에 꺾인 것이죠. 「돈」이 있어야 작업의 생명력과 연속성이 보장됩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철학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난하다. 그의 수입으로는 이를 모두 충족시키엔 역부족이다. 집회장소마다 걸개그림 뒤에서 그가 노심초사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돈 때문이다. 대개는 빠듯한 예산으로 설치구조물에 버팀목을 제대로 대지 못해 그림이 바람을 안고 언제 넘어질지 모른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이 다칠까 봐 항상 바람이 통하도록 그림을 「찢기」 위한 칼을 들고 대기한다.
요즘 보증금 8백만원에 월세 40만원짜리 작업실에서 작업하는 최씨는 미술운동판에도 후원자가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강을 훼손하는 데 수조원의 돈이 낭비됐습니다. 그러면 한강을 살리는 데는 그 이상의 돈이 필요합니다. 한 미술작품이 「한강살리기 운동」의 국민적 공감대 형성에 크게 기여한다면 그 화가에게 보상하는 건 당연하다고 봅니다』
노동자출신의 화가 최병수씨는 지식인에게 당한 「설움」을 「붓」으로 갚았다. 그리고 이제는 여전히 노동자의 강인한 생명력을 작품에 담아내면서 지식인들로부터 「대접 」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