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계리의 이순신 백의종군로 석비 앞으로 다시 갔다.
고가로 2번국도가 지나가고 58번도로가 국도에 합류하는 지점이다.
백의종군로 표석에는 합천 94km, 노량27km로 합계100m가 늘어난 거리가 표기되어 있다.
'십오리원'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아서 근처에 자리한 곤명면 사무소에 들렀다.
점심시간 전인데도 썰렁한 사무실.
어떤 행사에 모두 출동했단다.
'십오리원'을 들어본 적이 없다는 표정인 단 한 사람 여직원이 서류철 정리에 열중하고 있는
장년남에게 떠넘겼다.
부면장이라고 불린 남은 자기 일을 대충 마친 후에 비로소 나를 상대해 주었다.
부면장 치고는 향토사에 등한한가.
들어본 적은 있으나 지역을 모른다며 봉계리 이장에게 전화한 부면장.
그리고 항공 사진을 뽑아서 안내하는 성의를 베풀었다.
봉계리의 백의종군로 석비 위 고가도로 북쪽 마을이 원전(院田)이며 옛 십오리원이란다.
이조때, 완사역(浣沙驛)에 딸린 봉계원(鳳溪院/여관)이 있었으므로 원골 또는 봉계리라고
했는데 완사에서 15리의 거리에 있는 원이라 해서 십오리원이라 했단다.
십오리원(봉계리 원전마을) 이후의 백의종군로는 아주 한가로웠다.
2번국도 양편을 잠시 따르다가 9시방향으로 틀고 경전선 철도를 건넌 후 북상하면 2km지점,
곤명면 마곡리(麻曲) 노변에 노량 29km, 합천 92km 백의종군로 석비가 있다.
귀로의 뜻 그대로 노량은 멀어지고 합천은 가까워 오고.
낙남정맥 종주때, 송림리 오랑동에서 경전선 철도를 건너 마곡길을 찾느라 애먹었던 기억도
새롭고.
마곡리 마을 이름에는 한 설(說)이 있단다.
정유재란때 명군 제독 마귀(麻貴)가 우리 의병들과 연합해 왜군을 격퇴함으로서 이 곳 진양
강씨들이 난중에도 무사히 피신할 수 있었다 해서 마귀의 성을 따서 마곡이라 했다는.
마곡리 이전의 송림리(松林) 역시 이여송(李如松)의 이름 끝자를 땄고.
바로 이어서, 600m 지난 삼거리에서도 백의종군 표석이 방향을 알리고 있다.
자칫, 직진해버릴 수 있는 위치라 바른 안내를 위해서는 불가피했겠지만 2km와 600m 새에
거푸 세우는 것을 하나 줄이는 지혜는 없는가.
다다익선이지만 비싼 석비를 남비(濫費)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한데, 이 안내 임무를 왜 고가의 석비에만 의존하려 하는가.
이따금 보이는 명함판 포스터와 저가의 안내판도 있으련만.
아침에,1005도로에서 좌측으로 난 세종대왕과 단종의 태실 길을 확인했는데 마곡길에서도
여전히 좌측 길이다.
아뿔싸, 남하하던 아침과 북상중인 한낮을 간과했구나.
은사리(隱士)를 지났다.
등과(登科)를 싫어하는 선비들이 숨어 살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마을.
거듭 말하지만 나는 이번 여정에서 모처럼 한가롭고 평온한 포장도를 걷고 있으나 이순신이
백의종군할 때는 힘든 길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에게도 시정찰 보고서를 보낸 후라 길의 상태와 관계 없이 마음 편한 길이었을까.
예전에는 오지중 오지였다는 길.
이순신이 침묵으로 일관했으나 왜적마저도 멀리 하려 했다는 길을 백의종군했다.
교통이 가장 불편했던 지역이었으나 이 군도(郡道)의 개통으로 엄청 편해졌단다.
도시는 물론 농어촌, 산간 벽지까지 길은 변혁의 지름길이다.
2000년전 로마제국의 특징이 길이었다.
점령지마다 사통팔달하는 대로를 냈는데, 착취와 신속한 군대 이동이라는 목적 외에도 모든
점령지를 빠르게 변혁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일본도 한반도에 같은 정책을 폈는데, 로마와 일본의 다른 점은 로마가 식민지에도 긍정적
변혁을 촉구한데 반해 일본은 부정적 변화를 도모한 것.
은사리 태실길 삼거리를 직진, 북상하여 삼정리 마을회관 앞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합천(율곡) 87.5km, 노량 33.5km 지점이다.
아침에 화개 갈림길인 중촌마을에서 합천이 88.9km였으니까 1.4km더 가까운 지점이다.
손경례의 집이 있는 원계가 합천으로부터 75.1km니까 정유일기 대로 이희만의 집을 거쳐서
손경례의 집으로 간다면 남은 거리가 12.4km다.
그러므로 이희만의 집을 생략한다면 남은 거리가 1자리 수로 줄어들 것이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