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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스펄젼 (Charles H. Spurgeon )
1834. 6. 19 ~ 1892. 1. 31
교회사 최고의 설교자, 설교의 황태자
기독교 역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찰스 해돈 스펄전(1834-1892)은
영국 에섹스 켈비던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독립 교회 목사인 조부의 목사관에서 자라난 그는 내적 불안과 갈등의 청소년기를 거쳐
15세에 극적인 회심을 체험했고, 2년 후에는 17세의 나이로 정식 목사가 되었다.
17세에 "소년 설교자"로 처음 워터비치에서 설교를 시작한 이후,
가히 설교의 황제로 일컬어지는 그의 설교는 런던의 메트로폴리탄 타버나클로 이어져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영적으로 잠든 영국을 깨우는데 사용된다.
그는 탁월한 설교자로 인정받았고 그가 가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예배당이 비좁게 되었다.
그가 지은 6천석의 메트로폴리탄 채플좌석도 부족할 정도였다.
그는 빈틈없이 사역을 감당했고 늘 근면하게 성경을 연구했다.
또한 하나님의 은총과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도 열정적이었으며,
악을 거부하고 진리를 옹호하는 일에는 두려움을 몰랐다.
젊은 시절의 분명한 회심 경험, 청교도들로부터 물려받은 성경 해석 방법,
천부적인 유머감각과 맑은 목소리, 적절한 몸놀림은
그로 하여금 듣는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호소력을 지닌 최고의 설교가가 되게 하였다.
탁월한 저술가이기도 했던 그는 그의 생전 월간지 "검과 삽"의 발간과,
그간 남긴 수천편의 설교문과 수많은 주석을 통해 그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에까지도 복음의 한 나팔수로서의 사역을 계속하고 있다.
그는 생전에 "패스터스 칼리지"라는 목회자 양성 학교와 고아원을 성공적으로 운영했던 일로도
이름이 높다.
그는 우리와 동일한 사람이었지만, 영혼에 대한 불타는 사랑으로
자신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위해서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렸던
실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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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하돈 스펄젼’(Charles Haddon Spurgeonㆍ1834∼1892┃biography①-②)은 19세기 영국의 위대한 복음 전도자ㆍ설교자였다.
17세 때 한 오두막에서 설교하기 시작하여, 그가 일생을 마칠 때까지 불타는 사랑으로 혼들에게 복음을 전한 불멸의 복음 전도자였다. 그 당시 10,000명 이상이 모였던 ‘메트로폴리탄 타버나클’(Metropolitan Tabernacle)과 목회자 훈련학교인 ‘패스터즈 칼리지’(Pastor’s Collegeː처음에는 Spurgeon’s College라는 이름으로 세워졌지만,1923년 현재의 건물로 이동할 때, ‘패스터즈 칼리지ㆍPastor’s College’로 이름이 바뀌었다.)는 그의 명성과 능력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그는 또《검과 삽ㆍThe Sword and the Trowel》이라는 월간지와 3,500여편의 설교문들과 시편 주석 등도 발간하였다. 스펄젼이 회심할 때는 감리교도였고 그가 고백한 신앙으로는 침례교인이었던 그는 혈통적으로는 정통 칼빈주의자였다. 그래서 종종 그를 일컬어 “최후의 청교도”라고 부른다.
스펄젼은 목회를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위대한 목회자요 설교자로서 한 시대를 풍미하여 하나님의 큰 영광을 드러낸 탁월한 설교자였다. 그의 사역기간이 오늘 이 시대에도 연장되듯이 많은 설교자들이 그에게서 설교를 배우고 그를 통해 강단의 존엄성과 중요성을 깨닫게 되기도 한다. 그는 17세의 어린 나이에 워터비치(Waterbeach)의 침례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58세의 일기로 생애를 마치기까지 혼들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으로 목회를 하였다. 스펄젼의 목회는 무한한 보고가 담겨져 있는 목회의 진수이다. 기독교 역사에 있어 기억될 만한 훌륭한 목회자들은 많다. 그 중에서도 설교가로서 명성을 남긴 19세기의 목회자를 뽑으라면 아마 영국인 ‘찰스 H. 스펄젼’일 것이다. 그는 불타는 진실성과 굽힐 줄 모르는 신학적 신념, “열정을 가진 복음 전도자”요, “하나님의 말씀의 수호자”였다. 1837년 영국은 빅토리아 여왕이 통치하면서 국가의 안정과 인구의 증가, 철도의 발달, 해외 식민지의 건설 등 국가 발전의 기초를 놓았다. 또 뉴턴식 ‘과학주의’, 로크식 ‘합리주의’ 등 새로운 사상의 경향들이 등장하였고 다윈의 ‘진화론’과 성경의 ‘고등비평’은 하나님의 절대성을 부인하였다. ‘찰스 H. 스펄젼’은 이 새로운 시대의 물결에 도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수호하는 “성경 수호자”(Bible keepers)였다.
스펄젼은 1834년 6월 19일, 영국 남부의 쳄스포트(Chelmsford)-콜체스터(Colchester) 사이 도로변에 위치한, 에섹스(Essex) 주(州) 켈베돈(Kelvedon)이라는 시골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겨우 19세였고, 그는 17 남매 중 첫째 아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존 스펄젼’(John Spurgeon)은 평일엔 석탄가게 서기로 일하고 주일날은 콜체스터 근방 톨스버리(Tollesbury)에 위치한 독립교회(Independent congregation)의 목사로서 설교하는 분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자주 무릎을 꿇고 스펄젼을 품에 꼭 안아서 기도했다고 한다.
스펄젼이 아직 아장아장 걷던 때(생후 14개월 쯤)에 그는 부모와 떨어져 그의 할아버지인 ‘제임스 스펄젼’(James Spurgeon) 댁에서 약 5년 동안 살았다(1835∼1841). 그의 할아버지 역시 목사였고, 스탬본(Stambourne)의 독립교회에서 54년간 주님을 섬겼다(1804∼1858). 스탬본에 살 동안 스펄젼은 스스로 글을 익혀 다락방에서 찾아낸 ‘존 번연’의「천로역정」과 ‘존 폭스’의「순교사」를 읽을 수 있었다.[※ 훗날 부모 곁으로 돌아온 후에도 방학 때면 할아버지 댁에서 ‘존 오웬’(John Owen)이나 ‘리챠드 십스’(Richard Sibbes), ‘존 플라벨’(John Flavel)과 같은 청교도 거장들의 책에 심취하여 읽게 되었다. 하나님의 큰 그릇으로 쓰임 받기 위해 그의 영성은 영적 거목들의 경건한 작품들의 영향 아래 빚어지고 있었던 것이다.]그의 할아버지는 그에게 두 가지를 하도록 격려했는데, 하나는 ‘아이작 왓츠’(Isaac Watts)의 찬송시들을 암송하는 것이었고(하나를 암송할 때마다 할머니가 1페니를 주었다), 또 하나는 쥐를 열심히 잡는 것이었다(12 마리를 잡을 때마다 할아버지가 1실링을 주었다).
1841년(7세), 스펄젼은 콜체스터(colchester)에 있는 ‘루이스 학교’(Mr. Lewis’s school)에서 공부했는데 그곳에서 국어 과목에 1등상을 받았다. 그가 열 살 되는 어느 날(1844), 런던 선교회에 소속한 ‘리챠드 닐(Richard Knill) 목사가 그 지역의 선교정책을 세우기 위해서 스펄젼의 집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닐 목사는 선교의 열정과 비젼을 가진 사람이요, 기도의 사람이었다. 어느 날 새벽 여섯시에 닐은 스펄젼을 깨워서 정원에 놓여진 나무 의자로 데리고 가서 스펄젼을 위해 장차 주의 말씀을 전하는 일꾼이 되게 해 달라는 기도를 드렸다. 그런 새벽의 기도가 하루로 끝난 것이 아니라 3일 동안 계속되었다. 3일 후에 닐은 가족 기도회 때 온 가족들 앞에서 스펄젼을 무릎 위에 앉혀놓고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는 장차 복음을 전할 것입니다. 그것도 수많은 군중에게 말입니다. 이 아이가 바로 장차 내가 사역하고 있는 로우랜드(Rowland) 교회의 많은 군중 앞에서 설교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닐은 “하나님의 신비하심으로 기적을 이루시네”라는 찬송을 스펄젼에게 가르쳐 주었다. 어린 스펄젼의 기억 속에는 장차 자신이 목사가 되어 대집회를 인도하게 될 것이라는 닐 목사의 말이 사라지지 않았다. 아마 그 영향으로 인하여 스펄젼의 마음 속에 목사의 자화상이 사라지지 않았던 듯 하다. 물론 목사였던 할아버지와 나중에 목회의 길을 걸었던 아버지의 영향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어렸을 때 그런 경건한 사람을 만나서 목사의 자화상을 그리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특별한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고 본다.[※ 그로부터 10년 후 닐의 예언은 적중되어 정말 스펄젼이 로우랜드 교회의 대집회를 인도하게 되었다.]
14세(1848)가 되었을 때 그는 메이드스톤(maidstone)에 있는 ‘올세인즈 농업학교’(All Saint’s Agricultural College)에 진학하여 몇 달을 보냈다. 그 후 1949년, 뉴마켓(Newmarket) 마을의 침례교 학교에 입학하여 공부도 하면서 시간강사로서도 일하였다.[※ 그는 정규대학에 다니지 않았으나 다녔다면 가장 우수한 학생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수년간에 걸쳐서 그는 훌륭한 신학서적을 12,000권이나 수집하여 소장하였는데, 이는 가장 훌륭한 학자들이나 모을 수 있는 분량인 것이었다.]
이 시기에 그의 생애를 전적으로 뒤바꾸어 놓는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난다. 어린 스펄젼은 기독교적인 배경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 스펄젼은 정직하고 곧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눈에 비쳐지는 죄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다. 그는 이 순간 자신이 너무 힘든 죄의 짐을 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끝없는 율법의 요구로 그의 죄의식은 깊어만 갔고 울부짖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방법을 찾을 때까지 도시에 있는 모든 교회를 방문할 것을 다짐했다. 6개월 간 그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교회를 방문하고 난 뒤 스펄젼은 거의 좌절하고 말았다. 설교자인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있었지만 그들은 복음을 전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번민의 밤이 지나고 아침에 깨어나면 청교도 서적을 집어 들곤 하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예수님께서 나(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깊은 죄의식으로 차라리 개구리나 두꺼비가 되기를 원하였다.
춥고 눈 오는 1850년 1월 6일 아침이었다. 스펄젼은 내리는 눈처럼 차갑게 얼어붙은 마음을 안고 터벅 터벅 걷고 있었다. 목적지까지 가려면 아직 더 가야하는데 갑작스레 눈보라가 몰아쳐 피할 곳을 찾다가 전에 있었는지조차 몰랐던 한 작은 교회를 만났다. 알티머리 스트리트 초대 감리교회(Primitive Methodist Chapel)였다. 그곳의 찬송소리는 머리가 아플 정도로 컸다(스펄젼은 감리교도들은 머리가 아플 정도로 크게 찬송한다는 그들의 명성을 듣고 있었다). 키가 크고 마른 한 구두 수선공이 앞으로 나가서는 눈보라 때문에 목사님께서 늦으시는 것같아 자신이 대신 설교하겠다며 말씀을 전했다. 성경 본문은『땅 끝들에 있는 모든 자들아, 나를 쳐다보고 구원을 받으라.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이사야 45:22)였다.
“여러분, 보는 것은 고통이 따르지 않습니다. 손과 발을 움직일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사람들은 대개 자기 자신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려 합니다. 그러나 의지하는 것은 나중의 일입니다. 지금 이 순간, 지금 현재 주 예수님께서는 ‘나를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나를 바라보라. 내가 수많은 핏방울을 흘리고 있노라. 나를 바라보라. 나는 십자가에 매달려 있노라. 나를 바라보라. 나는 죽었고 묻혔노라. 나를 바라보라. 나는 다시 일어났노라. 나를 바라보라. 나를 하늘로 들리움을 받았노라. 나를 바라보라. 나는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아있노라. 오! 불쌍한 죄인이여, 나를 바라보라! 나를 바라보라!’”
이렇게 외치고 나서 그 설교자는, 스펄젼을 향해 말했다. “젊은이여, 당신은 매우 비참해 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바라보십시오! 바라보십시오! 바라보십시오! 당신이 할 일은 바라보며 사는 것뿐입니다!” 스펄젼은 바로 그 순간 구원받는 방법을 단번에 보았으며, 자신의 혼이 구원받았음을 확신하였다. 그는 자리에서 뛰쳐나가고 싶었다.
“나는 용서를 받았습니다! 나는 용서를 받았습니다! 한량없는 은총이여! 죄인이 주님의 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어둠은 물러갔고 나는 태양을 본 것입니다. 나의 혼은 쇠사슬이 끊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느꼈습니다. 나는 앉은 자리에서 봄이 온 것처럼 포근함을 느꼈고, 나는 자유로워진 혼이요, 천국의 상속자이며 용서받은 자요,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자며 더러운 진흙과 끔찍한 지옥으로부터 건져 올림을 받았고 나의 발은 단단한 바위 위에 서 있으며 나의 앞길도 탄탄히 다져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때 그 설교자가 정확히 누구였는지 지금까지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자신의 의무를 다한 그 사람은 분명 하늘나라 어딘가에서 밝게 빛나는 별처럼 반짝이고 있을 것이다.
“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어떤 일을 하고자 소망해야 하는가요?” 이렇게 스펄젼은 어머니께 편지를 썼다. 한 주도 안되어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어떤 일’을 찾았다. 그는 사람들에게 전도지를 나누어 주었다. 그가 겪었던 시련은 지속적으로 그에게 영향을 주었다. 죄의 사악함에 대한 인식은 그의 마음속 깊이 아로새겨져서 그로 하여금 경건한 모든 것을 사랑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한 모습처럼 복음을 가장 진실되고 직접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줄 수 있었다.
스펄젼이 구원받은(1850. 1. 6.) 후, 그 해 8월에 그는 학교를 캠브리지(Cambridge)로 옮겼다. 스펄젼은 경건한 집에서 하숙하게 되어 참으로 감사하게 생각했다. 그는 1851년 5월 3일 캔트로우 목사에게 침례를 받았다. 스펄젼은 캠브리지에 있는 침례교회에서 목회자가 아닌 성도들이 설교하는 설교자 모임에 가입했다. 모임의 회원들은 이 지방의 교회들을 일정에 따라 방문하여 순회 설교를 하게 되어 있었다. 스펄젼이 그 모임에 가입했을 때에는 ‘제임스 빈터’(James Vinter)라는 사람이 회장 직을 맡고 있었다. 빈터는 스펄젼에게 주일학교 설교를 부탁했다. 이것을 계기로 주일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했고 작은 기도모임도 인도했다. 빈터는 그의 특출한 설교의 능력을 간파하고 그에게 일반 성도들의 설교를 부탁하려고 했다. 그러나 직접 부탁하면 거절할 것 같아 지혜를 생각해 내어 다른 방법으로 부탁했는데, 그것은 스펄젼보다 몇 살 위인 설교 예정자와 함께 스펄젼을 설교지로 동행시킨 것이었다. 가는 도중에 그 사람은 스펄젼에게 모든 계획을 이야기하고 그에게 설교할 것을 요청했다. 스펄젼은 몇 차례 거절했으나 간절하게 부탁해 오는 그의 요구를 물리칠 용기가 나지 않아 승낙하고 말았다. 설교의 경험이 없는 그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펄젼은 가을의 농촌 길을 걸으면서 기도하였다.
“주님! 제 마음속에 있는 주 예수님의 따뜻한 마음을 이 농촌 사람들에게 전하게 해 주십시오. 성령님께서 제 설교를 통하여 그저 왔다가 그저 돌아가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게 해 주십시오.”
그의 첫 번째 설교지는 캠브리지 근처 테버샴(Teversham)이라는 동네의 오두막이었는데, 스펄젼 일행이 도착했을 때 20명의 순진한 농장 지도자들과 그들의 아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찬송과 기도 그리고 성경 본문,『베드로전서 1:7』을 받들어 읽은 후에「그러므로 그분의 소중함을 믿는 그대들에게」라는 제목으로 진지하고 실제적이며 정직하게 별로 막힌 데 없이 무난히 전개하여 결론을 마치었다. 예배가 끝난 후 한 노인이 나이에 비해 원만하게 설교를 잘한 젊은 청년에게 나이를 물었다. 이 질문에 스펄젼은 유명한 대답을 했다. “저의 나이보다는 제가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더 신경을 쓰십시오.” 그는 어렸을 적부터 설교자로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1851).
이렇게 설교를 시작한 그는 설교자 모임으로부터 정기적으로 13개 마을을 돌보며 봉사하기를 부탁받았다. 그는 캠브리지에서 성도들의 설교자로 13개 마을을 돌며 순회 설교를 하였고, 자신이 맡은 예배를 인도하기 위해서 종종 16km 이상을 걸어가기도 하였다. 하나님께서 스펄젼에게 주신 은사는 분명하게 드러났고 “소년 설교자”에 대한 명성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방과 후 저녁 때마다 스펄젼은 캠브리지 근처의 교회와 오두막 그리고 야외까지 가능한 한 모든 곳에서 설교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성도들을 말씀으로 양육했고 설교했다. 그의 설교는 너무 뛰어나서 누가 들어도 명백히 하늘로부터 온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영적 감화력에 감동된 워터비치(Waterbeach) 마을의 침례교회에서는 스펄젼을 설교자로 초빙하였고, 그는 17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 요청을 받아들여 학교를 사임하고 소년 설교자로 워터비치로 향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그는 본격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에 몰두하게 된다.
1851년 10월, 스펄젼은 17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워터비치 마을의 침례교회에서 정식 목사가 되었다. 스펄젼이 이곳에서 약 2년간 목회 사역을 하는 동안, 처음 40명 정도밖에 안 되던 회중이 400여 명으로까지 부흥되었다. 그는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끊임없는 연구와 기도, 또한 철저한 자기 성찰을 통해 회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설교를 할 수 있었다.
(1852년, 워터비치에서 전한 설교문)
조지 골드라는 사람이 당시 캠브리지 회합에 참가했다가 우연히 스펄젼의 설교를 듣게 되었다. 그는 깊은 감명을 받고 런던(London) 사우스워크(Southwark)의 ‘뉴파크 스트리트 침례교회’(The New Park Street Chapel)에 그를 추천하였다. 그는 이 소식을 들었을 때 다른 동명이인을 초청한 것으로 생각하고 가지 않으려 하였다. 찰스 H. 스펄젼은 1853년 12월 뉴파크 스트리트 침례교회의 설교를 위해 런던에 도착하였다. 그는 그 교회의 크기에 압도 당하였고 다른 목회자들에 비해 자신이 너무 초라해 보였다. 그러나 그가 설교단에 섰을 때 그는 말씀을 전해야 하는 책임감을 느꼈다. 그의 설교는 청중의 마음들을 사로잡기 위한 의도가 전혀 없었다. 워터비치의 시골 청중들에게 했던 설교와 똑같았다. 그는 단지 말씀을 말씀으로 영접하고 그대로 전하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대단했다. 예배는 너무나 엄숙했고 그전의 어떠한 설교가들과는 달랐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씀을 들은 기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아침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은 오후 예배에 다른 사람들을 초청하여 같이 참석하였다. 그들은 예배가 마쳤음에도 돌아가지 않고 기쁨에 넘쳐 있었다. 저녁 예배 때의 회중은 더 많았다. 집사들은 그가 대학을 나오지 않았지만 스펄젼에게 목사가 되어 달라는 청탁을 하였다.
【 뉴파크 스트리트에서의 설교 모습】
이리하여1854년 2월, 19세의 젊은 시골 목사가 런던 강단에 서게 되었다. 그의 연소함과 학력을 문제 삼고, 회의와 불신에 가득한 마음으로 그를 비난하는 자들도 적지 않았지만, 언제나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변론자가 되어 주셨다. 스펄젼이 이 교회에서 말씀을 전하기 시작한 이래, 침체기에 있던 뉴파크 스트리트 교회는 부흥에 부흥을 거듭했다. 첫 집회 때의 80여명에서1년만에 20,000명이 모이는 대집회로 성장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몰려들어 증축 공사를 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 되었으며, 증축 공사를 하여 2,000명의 좌석을 만들었지만 청중은 더 늘어만 갔다. 이제는 더 넓은 음악회장을 구하여 설교를 하게 되었다. 설교가 있는 날은 그곳의 교통이 마비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위하는 일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잘 알고 있었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일에 전심을 쏟았다.
【 ▲1858년, ‘The Surrey Gardens Music Hall’에서의 집회 모습. 12,000석이 넘는 런던에서 제일 큰 ‘서레이 음악당’에서 스펄젼 목사가 설교를 시작하려 할 때 ‘불이야!’하는 함성이 사방에서 터져나오고 청중들은 몰려나가다가 7명이 사망한 참사가 일어났다. 그러나 불길은 아무 곳에서도 보이지 않았고 계획적으로 방해하는 무리들에 의해서 첫 번째 집회는 실패였다. 스펄젼 목사는 일생에 가장 큰 충격과 좌절을 당했다. 】
결국, 1854년에 새로운 건물을 짓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1861년 완공된 ‘메트로폴리탄 타버나클’(Metropolitan Tabernacle)이었다. 이 예배당은 5,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중앙 강당과 두 개의 갤러리가 있는 엄청나게 큰 건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청중에 비하면 큰 것이 아니었다. 그가 여행할 때 조차도 그의 설교를 들으려고 10,000명의 청중들이 모여들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침례인 요한에게 모여들었던 것처럼 모여들었다. 선지자 엘리야에게 있었던 것처럼 그에게도 하나님의 불이 있었던 것이다. 그의 교회에서는 왕족도 종처럼 앉아서 설교를 들어야 했다. 택시 운전사들은 그에게 요금을 받지 않았다. “설교의 왕자ㆍthe prince of preachers”를 차에 태운 것만으로도 영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빵을 만들고 있는 여인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생명의 빵을 만들려고 시도해 본 적은 없습니까?” 목수들에게는 “모래 위에 성을 쌓으려고 한 적은 없습니까?”라고 묻곤 하였다. 한 미국인 방문자에게 스펄젼의 설교를 듣고 난 후 그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의 설교를 듣고 나면 저는 스펄젼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게 됩니다.” 라고 대답했다. 스펄젼은 적합한 묘사와 시기 적절한 말을 도구로 삼아 설교할 때 마치 한 편의 그림을 그려서 주듯 듣는 자들에게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어린 양” 을 그대로 제시했다. 1864년 스펄젼은 그가 구원받았던 그 교회를 다시 방문해서『이사야 45:22』을 본문으로 다시 설교했다. 자신이 앉았던 그 자리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제가 바로 저 자리에 앉아있었습니다. 그 자리가 모든 것을 시작할 수 있게 했던 곳이었습니다.”
【2004년, 메트로폴리탄 타버나클의 외부 모습】
그는 결코 제목 설교를 한 적이 없었으며 항상 성경 본문을 중심으로 하여 강해 설교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설교 3,500여 편을 중복해서 설교한 적이 없었다. 그에게는 설교해야 할 내용이 항상 샘 솟듯 하였다. 스펄젼은 많은 성도들과 메트로폴리탄 타버나클에서의 목회활동에 전념하면서도, 다른 지역의 교회들로부터의 초청설교에도 자주 설교자로 부름 받았다. 그는 런던 외곽은 물론 대륙을 건너가서 설교하기도 하였다. 이탈리아와 스코틀랜드와 독일에서 설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바쁜 일상과 설교 사역 때문인지 그는 서른다섯 살, 한창 일할 그때 병들어 침상 신세를 지기도 하였다. 피로와 과로가 누적되어 탈진한 것이었다. 그러나 스펄젼은 고통을 오히려 축복으로 여기고 하나님께 감사하였으며, 힘든 가운데서도 사역을 멈추지 않았다.
“가끔씩 나는 내가 병으로 앓아누워 있던 방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돌이켜 본다. 그 고통의 침상이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과 비교해서 결코 절반도 은혜 속에서 성장하지 못하였으리라고 확신한다.”
건강이 악화되어 급기야는 설교를 못하게 되는 일이 잦았지만 이러한 병고가 그의 사역들을 중단시키지는 못했다. 1875년과 1885년 사이의 10년은 스펄젼의 목회 중에서 최고의 절정기였다. 그의 설교는 이전보다 더 깊은 성숙함으로 인해 매우 은혜로웠으며, 복음의 능력이 더욱 넘쳐흘렀다. 이제 회중들은 스펄젼의 감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식에 더욱 강하게 사로잡혔다. 이 기간동안 그의 사역의 열매는 더욱 풍성해졌다. 그 시기 메트로폴리탄 타버나클은 꾸준히 교세를 확장하여 성도의 수가 5,000명 이상을 헤아리게 되었고, 세계적으로 가장 규모가 큰 침례교회를 이루고 있었다.그는 설교뿐만 아니라 기도에도 탁월한 은사가 있었다. 5,000명 회원들의 이름을 다 알 만큼 스펄젼에게 있어 그들은 소중하고 의미있는 사람들이었다. 스펄젼은 메트로폴리탄 예배당에서 그가 죽을 때까지(1892) 주님께서 주신 위대한 능력과 설교로 목회를 했다. 그러나 스펄젼은 이런 부흥을 결코 자신의 영광으로 삼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하나님만을 의지하면서, 설교 때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열심히 기도했으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이라는 확신 아래 강단에 올라섰다. 이 10년의 사역기간동안 스펄젼은 많은 사건들을 접하게 되는데, 그중 하나가 미국의 위대한 복음 전도자 “D.L.무디”(Dwight Lyman Moodyㆍ1837∼1899)의 런던 방문이었다. 사실 복음사역 초창기 때부터 스펄젼의 성공에 크게 영향을 받아왔던 사람이 무디 였다. 그가 스펄젼의 설교를 듣기 위해 영국을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들은 서로를 격려하며 도와주는 협력자가 되었다. 스펄젼과 무디는 믿음에 관한 여러 관점에서 완전한 일치를 보지 못했지만, 커다란 원리 아래에서 서로 결합할 수 있었고, 서로를 칭송할 수 있었으며, 서로를 격려하고 도와줄 수 있었다.
결국 스펄젼은 이러한 과중한 목회 사역에 시달리다 보니 그의 고질병 류마티스 병세에 몸져눕게 되었다. 그는 프랑스 멘턴(Mentonㆍ망통ː프랑스 동남부에 위치한 피한지(避寒地)로 유명한 도시. 이탈리아명(名)은 Mentone)으로 휴가를 떠나지 않으면 안될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래서 다섯 번의 미국 방문 요청과 한번의 캐나다 방문 제의 그리고 호주 방문 제의를 모두 거절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는 병고에 시달렸다.
1860년대는 영국 교회가 크게 성장한 번영의 시대였다. 그러나 번영의 뒤편에는 성경적 기독 신앙에 대항하는 새로운 독버섯 같은 신앙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1859년에 발표된 찰스 다윈의「종의 기원」이었다. 생명체가 하나님의 창조가 아닌 무작위의 기회로부터 시작되었다는 학설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영광에 대한 ‘반역’(이사야 14:13)이었다. 거기에 더해 성경의 ‘고등 비평’은 기독교의 기초를 뒤흔든 사건이었다. 이러한 사상과 세력들은 1870년대에 이르러서는 여러 강단 위에까지 파고들었다. 이 ‘신사상,’ ‘신신학’이라 불리워지는 대항세력은 마침내 1880년에 이르러서는 영국 교회를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했다. 그는 침례교 대표들과의 만남에서 총회가 그 입장을 분명히 밝혀야 함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총회는 성명서를 채택해야 한다는 스펄젼의 제안을 거부했다. 결국 불신앙이 빠르게 번지고 있는 현실에서 총회로부터 더 이상의 기대를 할 수 없다고 판단한 스펄젼은 독자적인 방어태세를 취하기로 결심을 굳히게 된다. 그는 사설을 통해 자신의 분명한 입장을 밝혔고, 이 사설은 영국 침례교회에 심각한 소요를 일으켰다. 찬반의 소리가 전개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스펄젼은 하나님의 말씀을 수호하고자 하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마침내 용단을 내렸다. 스펄젼은 1887년 10월, 그가 자란 목회의 산실인 침례교에서 ‘성별’(Separation)하게 된다. 그의 나이 53세였다. 힘겨운 싸움의 결과는 그후 시간이 흘러가면서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적으로 의지했던 스펄젼이 옳았음을 증명해 주었다. 순수한 믿음을 지키고자 하는 그의 단호하고도 굽힘 없는 신앙의 절개가 그를 지켰던 것이다. 스펄젼은 여기에서 많은 시련을 겪는다.
그는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있었지만 그의 사역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었다. 그는 쇠잔해진 육체에도 불구하고, 설교강단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육체적 고통과 싸우며 마지막 사역을 위해 1891년 6월 7일 메트로폴리탄 예배당에서 그의 5,311명의 회원들과 친구들에게 마지막 설교를 하였다.
“당신이 만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면, 당신은 그분 안에서 당신의 영혼이 편히 쉴 만큼 그분은 온유하며 겸손하신 분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분처럼 관대한 지도자는 없습니다. 그분과 같은 통치자를 저는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영적 전쟁 중 가장 어려운 상황에 항상 함께 계십니다. 찬 바람이 불 때면 그분은 항상 언덕 위의 바람맞이로 서 계십니다. 십자가의 가장 무서운 부분은 항상 그분의 어깨 위에 놓여 있습니다. 그분이 만일 우리에게 짐을 지운다면 그분 역시 그 짐을 함께 지고 계십니다. 사랑 안에 품위 있고 관대하며 친절하고 부드럽고 풍부한 무엇을 보았다면 당신은 언제나 그것을 그분 안에서만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40년 이상 저는 그분을 섬겼습니다. 그분으로부터 온 “사랑” 이 외에는 전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분의 군대에는 생명과 평화와 기쁨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 당신이 입대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로 입대하는 것을 도우시기 바랍니다!”
스펄젼은 생명을 다하는 병석에서도 그의 마태복음 주석 작업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1892년1월31일 프랑스 멘턴에서 주일 저녁 11시 5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위대한 설교자 찰스 H. 스펄젼의 지상에서의 신실한 사역이 마감한 것이다. 이때 그의 나이 58세였다. 장례식은 2월 7일부터 11일까지 100,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참석한 가운데 메트로폴리탄 예배당에서 치뤄졌다. 스펄젼이 설교할 때 쓰던 성경은 그의 관 위에 구원으로 이끌었던 바로 그 말씀이 펼쳐진 채 놓여 있었다.『땅 끝들에 있는 모든 자들아, 나를 쳐다보고 구원을 받으라.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이사야 45:22)
【 ◀ 말년의 찰스 H. 스펄젼. 】
하나님의 충성된 종으로 한 평생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수호하는데 힘쓰며, 기도 속에서 살았던 스펄젼, 그의 몸은 그렇게 40여년간 지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전파해온 메트로폴리탄 타버나클에서 8㎞ 떨어진 노우드(Norwood) 공동표지에 잠들었다. 그의 삶은 실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풍성한 삶이었다.
스펄젼은 결코 사람에 의해서 부름받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그를 설교하도록 부르셨다. 그는 설교자들을 위하여 목회자 학교를 세웠고 고아들을 위하여 고아원을 세웠다. 그리고 온 세상의 수많은 죄인들을 위해서 많은 글을 썼다. 그는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부족함이 없는 질그릇이었다. 그의 유일한 설교 제목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못 박히심을 전하는 것 」이었다. 그는 그것을 위해 자신의 모든 재능을 쏟아 부었다. 그 모든 재능을 잃어버린 혼들을 구세주께로 인도하는 곳에만 썼으며, 자신을 위한 모든 영화와 욕심을 아무런 사심 없이 버렸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만을 나타나는데 사용하였다.
그는 당시 ‘국가의 소리’였다. 그래서 도덕, 종교, 혹은 가난한 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국가의 문제는 그의 판단과 조언을 받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도 혼들에 대한 그의 열정에 비길 수는 없었다. 그의 모든 설교에서 독자들은 그것을 느낄 수 있다. 스펄젼은 수천 편의 시(詩), 소책자, 노래와 설교와 주석서를 발표했다. 복음이 전해지는 한, 죄인들에게 보내는 그의 메시지는 생생하게 살아 울려퍼질 것이다.
● 찰스 H.스펄젼의 사역에 대하여...
‘찰스 H. 스펄젼’은 뛰어난 능력과 은사를 소유했던 한 사람의 설교가 이상의 인물이었다. 그는 당시 ‘스펄젼 칼리지’(Spurgeon’s Collegeː1857년에 스펄젼이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만을 전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양성ㆍ훈련하기 위해 세운 침례 신학교이다. 재정은 자신의 설교문과 책을 출판한 돈으로 충당하였다. 처음에는 이 이름으로 세워졌지만,1923년 현재의 건물로 이동할 때, ‘패스터즈 칼리지ㆍPastor’s College’로 이름이 바뀌었다.)와 ‘스펄젼의 집’(Spurgeon’s Home)으로 알려진 침례 신학교와 고아원을 설립한 후, 수년간 재정적인 지원을 하였다. 그는 또한 기념될 만한 많은 기관을 설립했는데 그 중에는 금주(禁酒) 및 의류 구호위원회, 성경과 전도책자 보급을 위한 종교서적 보급 연합회 등이 포함된다.
‘스펄젼 칼리지’에서 스펄젼은 학생 전원을 개별적으로 상담하면서 그들의 영적 성장을 도왔다. 그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인기를 얻기 위해서 설교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오직 마귀만을 탄핵해야 하며,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높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약 900명의 목회자들을 배출하여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데 기여했다.
그의 저술을 통한 사역은 전 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스펄젼은 135권 이상의 책을 저술하고 28권을 편집했는데 이것은 메트로폴리탄 타버나클 사역기간 중 평균 2, 3개월에 1권씩을 펴냈다는 계산이 된다. 1855년부터 그는 매주 월요일에 설교를 편집하여 화요일에 책자로 인쇄되어 나오도록 했는데, 이 작업은 계속되었고 1892년까지 이어졌다. 그의 사후에는 초창기 설교들이 계속해서 출간되었다.
【20대 후반의 찰스 H. 스펄젼.▶】
1865년에는《검과 삽ㆍThe Sword and the Trowel》이라는 월간지를 창간하고, 이를 통해 메트로폴리탄 타버나클과 관련된 교회와 공동체들의 노력을 보고하는 등, 올바른 성경적 진리를 확고하게 지지하고자 했다. 그의 여러 저서들을 관리하고 곳곳으로 보내는 일은 스펄젼의 아내 수잔나의 몫이었는데, 그녀는 훌륭히 이 일을 감당하였다. 1856년 스펄젼과 결혼한 ‘수잔나 톰슨’(Susannah Thompson)은 일생 스펄젼의 좋은 동역자였을 뿐만 아니라 헌신적인 아내요, 어머니였다. 그들은 ‘찰스’(Charles)와 ‘토마스’(Thomas)라는 쌍둥이 아들을 두었는데 이 두 아들도 목회자와 복음 전도자로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헌신하였다.
스펄젼이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저술은《시편》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20년 이상에 걸쳐「다윗의 보고들ㆍThe Treasury of David」을 집필했다. 그것은 1869년에서 1885년 사이에 7권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스펄젼의 별세 전까지 이 책은 12만부 이상이나 팔렸다. 그 후에 이 책은 더 널리 읽혀지도록 월간지 형태의 보급판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이 기념비적인 저작에서 스펄젼은 시편 각 편의 각 절에 대하여 자신의 주석뿐만 아니라 전 세기, 전 교파에 걸친 수백 명의 저술가들의 주석까지 발췌하여 실었다. 스펄젼 전기 작가 중의 한 분인 ‘풀러톤’(W. Y. Fullerton)은「다윗의 보고들ㆍThe Treasury of David」을 록키산맥 관광에 비교하면서 “어떤 문학을 뒤져봐도 이와 같은 업적은 없다. 대단하다” 라고 말했다.
‘옥스퍼드 벨리올 칼리지’(Balliol College, Oxford)의 교장이며 킹제임스 헬라어 담임교수이며 성공회 신부이었던 ‘벤자민 조웻’(Benjamin Jowettㆍ1817∼1893)은 이 저술에 대해 ‘놀라운 저작’이라고 평하면서 스펄젼을 “칼빈과 루터와 바울의 빛나는 반열에 세워도 조금도 무색하지 않을 것” 이라고 극찬했다.
스코틀랜드의 설교가이며 학자인 ‘제임스 스토커’(James Stalkerㆍ1817∼1893)도 동일한 감동을 표현했다.
“나는 그의 저술 어느 곳에서나 정력적이고 주의깊은 그의 정신과, 또 시편의 영과 동일한 마음을 느끼게 되는 것 외에도 현대의 학자들이 일련의 연구과정을 통해 얻을 수 있었던 결과들에 그가 이미 도달해 있었음을 관찰하고 경악을 금치 못해 왔음을 말하고 싶다. 사실인즉 시편에는 아주 중요한 숨겨진 요소 ─ 그에 의해서만 학자들이 중요한 것을 나타내 줄 수 있는 감추어진 요소 ─ 가 있는데, 그것에 관하여는 스펄젼의 저작을 읽는 지성적인 독자들에게 충분한 암시가 주어지고 있지는 않다.”
몇 번인가 스펄젼은 자신의 생각들을 표현한 적이 있다.
“시편을 깊이 묵상해 본 사람들만이 그 안에 함유된 부요한 관념들을 이해할 수 있다. 종종 내가 그것들을 묵상하고 있을 때, 거룩한 두려움이 나에게 엄습하곤 하는데, 그 엄청난 주제들을 표현하려고 시도하기조차 엄두를 내지 못할 때가 있다.”
그가 저술을 계속해 나가면서 난관도 점점 많아진 듯 보인다. 시편의 뒷부분으로 갈수록 다른 저술가로부터 인용할 수 있는 자료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은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것은 곧 자신의 주석을 위한 노력이 배가되어야 함을 의미했다. 스펄젼은 그가 존경하던 존 번연이 “내가 끌어내니까 그것이 끌려 나왔다” 라고 한 말을 인용함으로써 그가 시편 주해를 위해 노력한 방법의 일단을 표현한다. “우리는 그러한 방법으로 저술하기를 좋아한다”고 스펄젼은 말했다.
그러나 스펄젼도 불가리아에서 발생한 대량 학살사건(1876)이 전 세계에 충격파를 던지는 순간까지는 그가《시편 119편》의 해석에 대해 당혹해 하고 있었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 소식은 “우리로 하여금 꺼지지 않는 불을 생각하며 그 기사를 태워 버리게 만들 정도로 의분에 떨게 하였다.”
가장 긴《시편 119편》은「다윗의 보고들ㆍThe Treasury of David」에서 400쪽이나 차지하고 있다.《시편 119편》에 대한 스펄젼 자신의 주해는「성경을 찬양하는 황금의 알파벳ㆍThe Golden Alphabet of the Praises of Holy Scripture」이라는 제목으로 별도로 출간되었다.
「다윗의 보고들ㆍThe Treasury of David」저술에 20년 이상을 보낸 후, 그는 마지막 장을 마치면서 만감이 교차함을 느꼈다. 마지막 권의 서문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다윗의 보고들ㆍThe Treasury of David」을 마침에 있어 나의 영혼에는 한가닥 슬픔이 깃드는데 이는 “모든 계시의 궁전”〔“성경ㆍThe Holy Scripture”을 말함.〕이 내 앞에 열려져 있을지라도 시편보다 더 부요한 보고는 이 세상에 다시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윗과 함께 묵상하고, 울고, 소망하고, 믿고, 기뻐 뛰놀던 날들의 축복이여! 내가 하늘문 이편에서 살 동안 이보다 더 즐거운 시간들을 다시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아마 그럴 수 없으리라. 그 시간들은 지성소의 위대한 시인의 하프 소리가 내 귀를 매혹시킨 선택받은 시간이었다. 여하튼 하늘에 속한 것들을 묵상하면서 얻은 이러한 훈련은 더 높은 것을 추구하려는 열망이 없이는 가질 수 없는 평안을 항상 갖게 해줄 것이다.”
스펄젼은 다음과 같이 결론짓고 있다.
“...이러한 바쁜 날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인생의 전쟁터에 나서기 위한 완전한 무기고요 인생의 필요를 충족시키고도 남을 보고인《시편》과 친숙하게 되어 영적 유익을 얻을 수 있다면 충분한 보상이 될 것이다. 시편 속에서 우리는 기쁨과 도움, 위로와 교훈을 얻는다. 또한 시편은 영적으로 어린 사람들에게는 감화의 눈물을, 장성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승리의 노래를 공급해 줄 것이다. 시편에 익숙한 이들은 누구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알고 있고 그 곳을 순례하기를 기뻐한다. 나는 그러한 분들에게 도움이 되는 친구가 되기를 열망해 왔다.”
스펄젼의 저술 중 일부의 책만이 지난 세기 동안 계속 인쇄되어 왔는 바,「다윗의 보고들ㆍThe Treasury of David」중 많은 부분이 그 중에 속하는 것은 너무나도 기쁘고 당연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