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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면 답사 자료
2017년 11월 10일
Ⅰ. 입암리
1. 입암리입석군 立岩里立石群
경상북도 의성군 옥산면 입암리에 있는 청동기 시대 선돌 떼로 옥산면사무소 앞에서 오른쪽 의성군, 안동시 길안면 방면으로 지방도 79호선을 따라 1.7㎞ 정도 가면 입암 1리 마을버스 정류장이 나온다. 그 옆으로 난 길을 따라 300m 이동하여 끝에서 다시 오른쪽을 100m 정도 가면 민가가 나오고 민가를 지나면 바로 옆에 위치한 논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마을 가운데 있는 3기의 선돌 중 2기는 장방형, 1기는 방형이며, 재질은 화강암이다. 선돌에 인공의 흔적은 보이지 않으며 원래부터 3기가 서로 인접한 채 있었다고 한다. 1호와 3호는 27㎝의 간격을 두고 있고 2호와 3호는 28㎝, 1호와 2호는 85㎝의 거리를 두고 서 있으며 하부는 일부 매몰되었을 것으로 보이고 주변에 특별한 시설물은 없다. 세부 형태는 높이 158㎝, 너비 82㎝, 두께 27~37㎝인 상부가 둥근 기둥 모양의 선돌, 높이 103㎝, 너비 68㎝, 두께 32㎝의 상부가 뾰족한 삼각형의 선돌, 높이 115㎝, 너비 125㎝, 두께 87㎝의 방형의 선돌이다.
마을 주민들은 입암리 선돌 떼를 ‘선바위’라고 하는데, 마을명도 여기서 붙여진 것이라 한다. 현재 선돌은 논의 중앙에 있어 바로 옆까지 벼를 심었던 흔적이 확인되며, 선돌 떼 위에 수확 후 남은 짚이 얹혀 있는 것으로 보아 과거와 비교하여 크게 훼손된 흔적은 없으나 그 가능성은 많다. 유적임을 알려주는 보호 시설이나 안내 표지판은 없으며 관리도 잘 되지 않고 있다.
입암리 선돌 떼가 위치한 곳은 마을 앞에 들판이 펼쳐져 있고, 위천 지류인 미천이 흐르고 협곡들이 형성된 곳이라 선사 시대 사람들이 선호하는 입지라고 할 수 있다.
2. 입암리 고분 떼立岩里古墳群
옥산면 입암리 선바위 마을에 있는 신라 시대 고분 유적으로 옥산면 입암리 선바위 마을 북서쪽 350m 지점인 위천(渭川) 동쪽 자락에 위치한다. 선바위 마을 동쪽산에서 서쪽으로 뻗은 구릉의 말단부에 고분군이 있다. 입암리 고분 떼 서쪽에는 위천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흘러가고 있으며, 현재는 이 일대가 개간되면서 강 양안으로는 ‘전평들’과 ‘비덕들’이 펼쳐져 있다.입암리 고분 떼 남동쪽 400m 지점에 있는 선바위 마을 안에는 입암리 선돌 떼이 있고, 북서쪽 1.5㎞ 지점에는 점곡면 윤암리 고분 떼가 있으며, 남동쪽 1.7㎞ 지점에는 옥산면 구성리 고분 떼가 있다.[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옥산면 입암리 고분 떼가 정식 발굴된 적은 없다. 1987년 대구 대학교 박물관에서 의성군 일대 정밀 지표 조사를 실시하였으며, 2005년 역시 대구 대학교 중앙 박물관에서 문화 유적 분포 지도 제작을 위한 정밀 조사가 실시된 적이 있다. 조사 결과, 고분군은 구릉 말단부에 3기의 중형분이 있음이 확인되었다.[입암리 고분 떼는 하천을 끼고 있는 구릉 말단부상에 조영되어 있다. 고분은 남-북 장축의 장타원형 봉분으로 현재 3기가 확인된다. 봉분의 크기는 지름 7~10m, 높이 1~2m이다. 대부분 훼손되었으며 주변에 있는 예비군 참호에서 돌덧널 무덤 혹은 돌방무덤의 벽석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지름 30~50㎝ 정도의 할석과 천석이 확인되며, 고분 주변에 삼국시대 회청색 경질계 토기편이 산재한다.[출토 유물] : 정식 발굴을 통하지 않고 지표 조사 상에서 수습된 토기는 5~6세기 전후의 회청색 경질계 토기편들이다.입암리 고분 떼는 위천 강변 구릉 말단부에 조영되어 있는데 지금은 개간되면서 전평들 일부로 사용된다. 고분은 남북 장축의 장타원형 봉분으로 3기가 확인되었다. 대부분 훼손되었으며, 현재의 상황도 1987년, 2005년 지표 조사 당시와 같이 보호 철책이나 안내 표지판 등은 설치되어 있지 않다.입암리 고분 떼 주변에서 수습되는 토기편들로 볼 때 5세기를 중심으로 조영된 고분군으로 판단된다. 신라 외곽 지역의 토기와 고분 양식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압암리 고분 떼 서쪽에는 위천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고 있으며, 위천 주위에는 충적평야인 ‘전평들’과 ‘비덕들’이 펼쳐져 있다. 입암리 고분 떼 주변으로 입암리 입석, 윤암리 고분 떼, 구성리 고분 떼 등의 고대 유적들이 있다. 입암리 고분 떼의 규모는 비록 크지 않지만 풍부한 수원을 바탕으로 고대부터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입지 환경을 가지고 있어 향후 정밀 조사가 이루어지면 고대사의 중요한 무대로 밝혀질 것으로 판단된다.
2. 학산재 - 가선대부 동지동녕을 역임한 오우재 권전의 재실. 후손이 1734년에 창건
Ⅱ. 구성리
1. 九成里古墳群
구성리 고분 떼는 금봉로 27[구성리 408-1]에 있다. 고분 떼는 옥산면사무소 북쪽에 있는 북동-남서향 구릉 일대로서 현재 옥산 중학교 위치이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구성리 고분 떼 일대에는 현재 옥산 중학교의 교사와 운동장이 조성되어 있다. 봉분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지만 돌무지 덧널[石槨]과 같은 지하 유구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 본격적으로 발굴 조사된 적은 없으나 1970년 학교 건립 당시 유구가 훼손되었다고 하며, 1973년 운동장 정리 작업을 할 때와 그 후 정구장 평탄 작업을 할 때 다수의 신라 시대 토기들이 수습된 바 있다. 유물이 출토된 고분의 내부 구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1977년 편찬된 『문화 유적 총람』의 기록에 의하면 과거에는 지름이 약 2.5m인 고분이 12기가 있었다는 주민들의 증언이 있었다고 하나, 1987년 대구 대학교 중앙 박물관의 지표 조사 당시에도 봉분을 확인할 수 없었다. 다만 옥산 중학교 후문 50m 지점의 소로에서 길이 250㎝, 너비 120㎝의 돌무지 덧널의 상면이 표토상에서 확인된 바 있다.
출토 유물: 구성리 고분 떼의 출토 유물은 1973년 옥산 중학교의 운동장 정리 작업 시에 발견되었다. 이들 유물은 1974년 7월 8일자로 국가로 귀속되어 2012년 현재는 경북 대학교 박물관에 수장되어 있다. 병 1점, 손잡이 달린 컵 모양 토기 2점, 광구 소호 2점, 2단 굽다리 접시 4점, 1단 굽다리 접시 5점, 뚜껑 6점 등 토기 대부분이 이른바 의성 양식이며, 1단 굽다리 접시 1점만이 경주 양식이다.
이후 정구장 부지에서 재차 출토된 유물들은 현재 옥산 중학교 향토 자료실에 보관중이다. 기종은 굽다리 접시 1점, 뚜껑 3점, 바리 모양 그릇 받침 1점, 굽 달린 긴목항아리 4점, 손잡이 달린 컵 모양 토기 1점 등이다. 출토된 토기류는 대체로 5세기 중엽에서 6세기 중엽의 시기에 해당되는 것들이다.
[의의와 평가]: 출토된 토기의 형식이 의성 양식이라는 점에서 의성 지역의 소규모 단위 집단이 조영한 고분 떼로 추정된다. 의성 지역 최대 고분 떼인 의성 금성산 고분군과 안동 지역 최대 고분 떼인 임하동 고분 떼를 잇는 최단 거리 지점에 위치한 소규모 단위 지역 고분 떼로서, 의성-안동 양 지역간 고대 교통로 연구에 참고가 되는 중요한 자료이다.
2. 난파정
권득인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진 재실인 난파정이다. 난파정은 1971년 세워졌다.
3. 상모재 - 송고 박윤암의 아들 박함의 묘재
4. 수봉재 - 통정대부 형조좌랑 김회의 묘재
Ⅲ. 실업리
1. 어락정
- 김세상(보백당 손자) 입향 추모하기 위해 18세 손 김현규가 중건한 어락정은 안동 김씨 후손들이 건축한 정자로 주변에 방형의 토담이 둘러져 있다.
2. 경모당
실업 2리 못골마을에 있는 경모당은 1990년경 조영개의 후덕함을 기려 후손 조용구 등이 세워졌으며, 함안 조씨의 회합장소로 사용된다.
Ⅳ. 전흥리
1. 병신창의 황산전적지 - 의병 등 27명 전사
의성의 의병
의병 항쟁의 발생과 전개
의병 항쟁은 집권층이 부패하고 무능한 상태에서 외세가 침략하여 국가와 민족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분연히 일어난 구국 운동의 대표적 형태였고, 우리 민족의 강인한 저항 정신을 표출시켰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더 나아가 의병 항쟁은 일제의 한국 병합을 전후한 시기에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무장 투쟁을 주도하였고, 일제 강점기에는 항일 무장 독립 투쟁의 기반을 마련하여 민족 독립운동사의 큰 줄기를 이루었다.
의병 항쟁의 전개는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을미의병[1895~1896]은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을사의병[1905~1907]은 강제적 을사조약 체결이, 정미의병[1907~1910]은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한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이 주요 배경이 되었다. 특히, 정미의병의 경우 해산 군인이 의병 진영에 합류함으로써 의병 항쟁은 전쟁으로 확대 발전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1905년부터 1910년까지 교육 진흥과 산업 발달을 통해 실력을 양성하여 자강을 이루어냄으로써 국권을 수호하여 근대 민족 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계몽 운동이 펼쳐졌다. 계몽 운동은 일제 강점기에 준비론적인 실력 양성 운동으로 연결되었다. 이처럼 일제의 침략에 맞선 우리 민족의 노력은 의병 항쟁과 계몽 운동이라는 두 흐름으로 전개되는 특징을 보였다.
의성 지역의 의병 항쟁은 의성군 점곡면에서 가장 먼저 전개되었다. 의병 부대를 보면, 의병장에 김상종(金象鍾), 초모장에 김수욱(金壽旭), 중군에 권대직(權大稷), 선봉장에 김수빙(金壽聘), 관향장에 김수협(金壽莢) 등이었다. 이들은 점곡면의 유생들로 1895년에 민비[후에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살해된 소식을 들은 후 궐기하였다. 하지만 일본군에 밀려 황산(黃山)에 진지를 구축하였고, 여기에서 의병진은 1896년 3월 29일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일본군의 화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김수빙, 김수협 등 수많은 전사자를 내고 패하고 말았다.
의성군 사곡면 오상리(梧上里) 출신의 이필곤(李苾坤)은 1896년 2월 일본의 침략에 분개해 향내 청장년에게 통문을 돌려 창의를 주창하였다. 그 뒤 의병 진영을 갖추고 춘산면의 사미(思美)와 옥산의 황산(黃山)에서 적과 전투를 승리를 이끄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일본의 강압을 못 이긴 조선 왕실은 파병의 조칙을 내리게 되자 비통함을 품은 채로 정부의 명령에 따라 의병을 해산하고 말았다. 그 뒤 이필곤 의병장은 1907년 7월 3일 일본 수비대에 체포되었고, 마침내 일본군 안동 수비대에 의해 총살을 당하였다.
의성군 춘산면 효선리(孝仙里) 출신 박연백(朴淵伯) 의병장은 1906년 팔공산에서 기병하였다. 의병 부대의 규모는 약 300명 정도로, 의성·금성·의흥·신녕·영천·영일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하였다. 산남 의진의 입암(立岩) 전투에 참가했다가 많은 의병이 희생되었다. 그 뒤 1909년 12월 무렵 종적을 감추고 사라졌다.
김상종 金象鍾
호(號)는 운산. 만취당(晩翠堂) 김사원(金士元)의 12세손으로 아버지는 생원 김수익(金壽翼)이고, 어머니는 한산인 이덕(李悳)의 딸이다. 부인은 도사 이만기(李晩起)의 딸인 진성 이씨(眞城李氏)이다. 김회종은 동생이다.
김상종[1847~1909]은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 출신으로, 안동 의병 주역인 정재학파 문인인 김흥락과 김도화의 문인이었다. 김상종은 당시 점곡면 서변리 사촌에 세거하고 있던 선(先) 안동 김씨 가문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는 의성에서 을미의병 봉기를 주도한 대표적인 의병장이다. 김상종의 동생 김회종이 당시의 사정을 기록하여 남긴 『병신창의실록(丙申倡義實錄)』에는 의성 의진의 진용으로 의병장 김상종, 중군장 권대직, 선봉장 김수담, 우익장 이희정, 소모장 김수욱, 관향장 김수협으로 편성하였다. 김수담·김수욱·김수협은 그의 족숙(族叔)들이었다. 김상종 의진은 거의한지 8일 만에 구봉산(九峯山)에서 첫 전투를 치렀으나 역부족으로 밀려 황산에 진을 쳤다. 그러나 미처 근거지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5월 10일 관군의 습격을 받아 김수담·김수협 등 27명이 전사하는 참패를 당하였다.
이후 김상종 의진은 청송으로 들어갔고, 이 때 청송 의진, 이천 의진과 연합 의진을 구축하였다. 이 무렵에 의성 출신이면서 이천에서 거의하였던 김하락(金河洛)은 조승학(趙承學)·구연영(具然英)·김태원(金泰元)·신용희(申龍熙) 등과 함께 이천에서 의병을 조직하여 활약하였는데, 관군에게 몰려서 제천·단양·안동 등지로 의진을 옮겨 투쟁을 하다가 의성에 이르러 김상종 의진에 합류한 것이다.
그즈음 의성 주변에서는 안동부 의병진의 김도화(金道和), 영양(英陽)의 김도현(金道鉉), 진보의 허훈(許薰), 선성(宣城)의 이인화(李仁和), 그리고 김상종 의진이 서로 호응하여 유기적인 전략을 전개할 것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의성 의진·이천 의진·청송 의진의 연합 부대는 1896년 5월 14일 청송 감은리(甘隱里)에서 관군과 전투를 벌여 10여 명을 사살하는 등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의성 의진·이천 의진은 청송 의진과 헤어지고 의성의 금성산 수정사에 진을 쳤다가 관군과 비봉산에서 전투를 치렀다. 5월 25~26일 비봉산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김상종은 의진의 해산을 명하였다. 김상종과 일행은 관군의 추적을 피하여 경상도 일대를 전전하다가 9월 6일 의성으로 돌아 왔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그 내용이 알려지게 되자 영남 지방에서 사림(士林)들이 중심이 되어 의병 운동을 재개할 것을 논의하였다. 이때에 중심인물은 전기 의병장들이 주축이 되었다. 특히 김상종과 김도현이 앞장서서 주선하고 선성(宣城)에 모여서 각 고을에 통문을 보내어 ‘서울에 올라가 대궐 문 앞에 나가 울부짖으며 상소하여 결사투쟁하기로’ 결의하고 길을 떠났다. 이 때 경상도의 의기 있는 유림들은 서울에서 상소 항쟁함과 아울러 각 도에 격고문(檄告文)을 돌리고, 서양 각국에 포고하는 글을 발송하며, 역적들의 처단과 매국 조약의 무효화를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3. 청룡약사여래불사
사찰(최근에 조성, 황산 입구)
Ⅴ. 금학리
1. 김윤산정려비
옥산면 금학리 도로변 능선에 위치한 김윤산 효자각의 모습이다. 호랑이를 물리치고 아버지를 구한 김윤산을 위하여 세웠다. 금학리
2. 탑들, 병신창의 의병 피난지(호미골?)
금학리 삼층 석탑 터 金鶴里三層石塔址
옥산면 금학리 114답 옥산면 금학리에 있는 고려 시대 석탑 터로 금학리 삼층 석탑 터는 달곡천 상류 학소(鶴沼) 건너편 논 가운데에 있는데, 현재 탑은 없고, 터만 남아 있을 뿐이다. 탑들 마을 주민의 말에 의하면 이 일대가 절터였다고 하지만 딱히 신빙성은 없다. 하천가에 위치한 것을 비롯해 주변 환경이 절터로 보기 힘들고, 기와 파편도 전혀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탑의 본래 위치가 탑들 마을 뒤쪽에 있는 절골일 가능성은 있다.
언제부터 이곳에 탑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마을 주민의 증언에 의하면 일제 강점기에 절도범들에 의해 해체되어 옮겨지던 탑을 회수하여 다시 제자리에 둔 적이 있다고 한다. 광복 후에는 탑이 있던 곳 부근을 논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금의 도로변 방향으로 두어 차례 자리를 옮겼다고 하며, 1984년에는 탑을 정비하여 하대 갑석 상단 일부만 노출시키고 그 이하를 시멘트로 보강하였다. 기단부의 하부가 얼마나 매몰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갑석 위에는 상륜부가 없는 1.3m 높이의 탑신이 비교적 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990년대 어느 날 탑을 도난당하여 지금은 그 자리에 돌무더기만 남아 있다.
2. 금학리 산성지(성골)
옥산면 금학리 새고무실 마을의 동쪽으로 난 골짜기에 있는 산성터의 전경이다. 농로 개설과정에서 성벽 부분이 많이 파괴되어 형태를 알 수 있는 곳은 길이 7m, 높이0.8m, 폭2m 정도이고 나머지는 허물어진 돌무더기 형태이다.
3. 괴석, 괴목, 벌통 등
SBS ‘세상에 이런 일’에 방영
* 옥산면: 서원, 서당, 지정문화재 등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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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자료집 잘 봤습니다. 그리고 심국장님, 참여 인원은 혹시 알수 있을까요?
현재 9명 입니다~^^
잘 봤습니다.옥산면 답사가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