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몸이 무거웠지만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벌떡 일어나 고양이 세수를 하고 우유에 빵 조각 두개와 다른 짐들을 챙겨서 아직 잠자는 식구들을 뒤로하고 혼자서 스키장으로 향했다.
우유를 마실 시간도 없어 조금 마시다가 컵에 담아 나오는데 짐과 함께 헐레벌떡 나오느라 우유는 반이 엎질러지고 이것저것이 엉망이었지만 어제 와이프가 사 놓은 스키 새 바지의 사각사각 소리와 함께 차를 몰았다.
그러잖아도 출발이 좀 늦어서 9시 개장까지 시간 맞추기가 어려운 상황인데 용인근처에서 차가 밀리는 통에 더 늦었다. 스키장에 도착하니 벌써 만원이라 사람들이 북적이고 주차장도 이미 가까운 곳은 꽉 차서 터벅터벅 걸으며 보드를 낑낑거리며 들고 언덕을 올라갔다.
스키장을 가면 언제나 예수가 골고다 언덕을 십자가 메고 걸을 때 같은 이 고행이 늘 짜증이 난다.
비싸게 돈주고 타는 놀이치고는 그 들이는 품이 너무 원시적이라 짜증이 난다.
짐도 여느 가방 같은 짐이 아니고 길쭉하고 삐죽삐죽 튀어나오고 해서 들고 오르기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공항처럼 짐 들고 오가기가 편하면 좋으련만 모든 스키장이 이렇게 늘 번잡하게 들락여야 하는 것이 영 마음에 안 들지만 그래도 그때마다 빨리 올라가서 단 일분이라도 더 탈려는 욕심에 낑낑거리며 발걸음을 재촉하는 모습이 우리네 삶의 어리석음의 한 단편인 것 같아서 씁스름하다.
매표소에 도착하니 이미 개장시간은 30여분이 지났고 사람 줄이 매표소나 리프트 대기소나 긴 통에 많이 망설여졌다.
둘 쨋 놈 데려 오려다 꾀부리고 안 온다기에 다분히 오기가 발동이 돼서 혼자 온 길이다 보니 이렇게 무리해서 많은 사람들 틈에서 시간도 한 시간은 짤릴 판이고 인터넷 할인 표도 못 구해서 온 마당에 굳이 타고 가나 싶어서 엉거주춤하며 줄에 섰다.
그래도 줄이 줄어가고 여기까지 와서 돌아간다는 것이 그 또한 무지하게 미련한 일일 것 같아서 그냥 내쳐 표를 사서 옷자락에 대롱대롱 매달고 그런 대로 적당한 사람수의 줄을 서서 리프트에 올랐다.
정신 없이 온 통에 눈이 어떻고 슬로프가 어떻고 하는 감흥은 자리할 틈이 없이 그렁저렁 리프트에 몸을 매달고 중급자 슬로프 정상에 올라 쭈그리고 앉아 발을 보드에 붙였다.
그리고 커다란 주황색 잠바에 엉덩이 뺀 모습이 멀리서 보면 꼭 눈 위에 붙어 있는 신종 풍뎅이 같게도 보이겠지만 나야 워낙이 얼굴이 두꺼운 편이니 남이야 풍뎅이로 보던 고무풍선으로 보던 얼마 전 테니스 모임선 받은 색안경까지 척 끼고는 갖은 폼을 잡고 내려오는데......
으잉!
그런데 지그재그로 내려는 가지는데 턴이 전혀 안되고 어찌 했었나 기억이 통 나질 않는다.
영화에서 보는 그런 멋있는 지그재그가 아니고 내가 지금 내려가고 있는 '지그재그'는 글자그대로 좌우로 움직거리며 내려가는 그런 졸렬한 지그재그인 것이다.
참으로 황당했지만 다른 방법이 없는 고로 재작년에 어찌 돌았나 고민하면서 내려왔다.
거의 슬로프가 끝나는 지라 슬로프 각이 완만하여 보드를 직선으로 만들어서 느린 속도로 내려오니 약간 턴이 되면서 잃어버린 기억이 조금 되살아나는 듯 했다.
다시 오르니 그럭저럭 턴도 되고 브레이크도 잡혀지고 어정쩡하긴 하지만 그런 대로 내려와 졌다.
그러기를 서너 번 하니 몸도 예전의 기억이 되살아나는지 보드가 미끌어지기는 하는데 포사이드에서 왼쪽 턴은 부드러운데 힐사이드에서 오른 쪽 턴은 매끄럽지가 못하고 조금 속력을 붙이면 불안하거나 고꾸라지곤 한다.
테니스도 영 안 되는 쪽은 벌써 십 년이 넘었어도 교정이 안 되듯이 이것도 스키에서처럼 몸에 부자연스럽게 달라붙어서 영 안 되는 동작이 있는 모양이다.
스키 탈 때도 오른 쪽 턴이 잘 안되더니 이것도 매 한가지 인가 보다.
그러는 중에 인간들이 자꾸 자꾸 불어나 줄을 서서 기다리기가 더 길어졌다.
옆에 중 상급자 코스를 힐긋 보니 마음에 유혹이 슬슬 들기 시작했다.
그 전에 여기 초보 코스에서 처음 스키를 '뭉기작' 댈 때 짧은 코스에서 왔다 갔다 하기가 답답하던 중 같은 리프트 라인인데도 우리 초급자들처럼 미리 안 내리고 계속 타고 올라가는 이들이 있는데 어찌나 폼 나던지 망설임 끝에 나도 덩달아 올라갔다 꼭대기에 올라서서 느꼈던 그 황당함이란! 천길 만길 낭떨어지위에 서도 그보다는 공포감이 적게 날 것이다.
"이러다 신문에 나는 게 아녀!"
그 꼭대기에 서서 내려다보니 도대체가 눈말고는 끝이 안보였다.
내려 갈 일이 너무도 막막하였다. 지금 생각같아서는 옆으로 한발 한발 디디며 내려오던가 아예 스키를 벗어서 내려오던가 할텐데 그 절대 절명의 순간에 생각한 것이 어릴 적 개구리를 땅에 패댕이치면 나오는 자세로 완전히 엎어져서 미끄러지며 내려오는 작전을 폈었다. 발에 매달려 있는 스키가 오히려 브레이크 역할을 하면서 세상에 둘도 없는 '스키활강'자세로 내려왔다.
참으로 남들이 보면서 어떤 생각들을 했을지 지금도 생각하면 그 미련함이 하늘 끝이다.
그 뒤로도 나같은 미련한 놈들이 꽤 있었는지 지금은 그 코스는 아예 닫아 버려서 그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런 기억도 있어서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워낙이 좋게 말하면 모험정신 나쁘게 말하면 객기가 등등한 인간인지라 옆길로 새서 중상급자 코스로 갔다.
줄이 얇아서 금방 탈 수가 있었다.
꼭대기에 이르니 역시 만만치가 않았다.
하지만 그도 마찬가지로 일단은 지그재그 전법으로 내려오다 적당히 완만한 곳에서 턴을 하니 그럭저럭 탈 만 했다.
몇 번을 오르락내리락 하는데 역시 오른쪽 턴이 매끄럽지 않고 꼭 넘어졌다 하면 그 동작에서 넘어지곤 하는 통에 무릎 강화시킨다는 핑계로 나선 길이 무릎만 깨지고 혹사시키는 꼴이 되었고 이리저리 뒹구르는 바람에 여기저기 저리기도 했지만 기왕에 나선 길 나보다 더 못 타는 눈 위에 고꾸라진 이쁜 여자 스키도 구르며 집어 주면서 미련하리만큼 열심히 탔다.
리프트를 타고 오를 때는 나는 그 시간이 아까워서 갖은 '위험'에도 불구하고 얌전히 있지를 않고 딴전을 파는 버릇이 있다.
오늘도 핸드폰 문자 메시지를 곤실히 보내거나 쓸데없는 전화를 한다든지 얌전히 앉아있는 옆에 애 학년 맞추기 손가락 곧추세우기를 한다든지 아니면 밑에 땅을 쳐다보며 누가 뭐 떨어트렸나 또는 그 떨어트린 물건의 상태나 품질정도나 그 주인데 대한 상상 등을 하며 오른다.
바로 전에는 몇 번 고꾸라진 덕에 나도 모르게 주머니에 눈이 '한 움큼' 들어가 있기에 지갑을 빼서 무릎사이에 아슬아슬하게 끼고 눈을 털어 내다가 구겨진 채로 축축하게 있던 오천 원짜리 지폐까지 쓸어 낼 뻔한 적이 있는데 바로 그 자리에 오르는데 천 원짜리 지폐가 밑에 있지 않은가?
그것이 꼭 내가 떨어트린 것 같아서 여간 아쉬운 것이 아니었으나 그 밑은 길도 가파르고 이 많은 사람들 밑에서 창피하게 내 돈이라고 주울 것도 아니어서 입맛만 다시고는 다시 다음 번 리프트를 타고 오르는데 아니 이번에는 리프트 출발하는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만원 권 지폐가 보이는 것이 아닌가?
내가 색안경을 써서 유별나게 이리 지폐가 잘 보이는 거란 말인가?
거참 희한한 일이었다.
스키장에 그래도 여러 해를 다니면서 한번도 없던 일이 이렇게 한 날에 두 번이나 '돈'을 발견하다니.
그 옛날에 식구들이랑 시골길을 달리다 만원 권 지폐 한 장이 길에 보이 길래 발로 지폐를 밟고서 사방을 휘둘러 본 후에 살짝 들어 올리듯이 차로 그것을 살짝 덮고는 와이프한테 "야! 돈이다 빨리 주워와!"해서 만원을 건진 적이 있었다.
그 때의 그 짜릿함이 지금도 생생하다.
언젠가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차들이 도로 옆에 몇 대가 정차해 있고 사람들이 무엇을 줍는데 그게 만 원짜리 지폐였다.
곁으로 쳐진 돈이야 쉽게 줍지만 차도에서 날리는 돈을 줍는 일은 만만치가 않아서 쌩쌩 달리는 차들을 힐 끗 거리며 돈을 줍는 모습들이 새들이 눈치보며 모이를 쪼는 그런 모습들이었는데 나는 출근길인지라 그 무리에 같이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던 기억이 난다.
하긴 생명을 걸어서 까지 지폐 몇 장을 건질 일이었을까?
하지만 오늘의 상황은 좀 달랐다.
천 원짜리는 그 밑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주웠는지 다시는 안보였지만 그 만 원짜리는 희한하게도 계속 눈에 띄였다.
스키장 패트롤이나 리프트 아르바이트생한테 이야기를 했지만 미덥지 않다는 표정이다.
계속 오르내려도 그 만 원짜리 근처를 지나가던 인부들도 그냥 지나친 모양이고 그 돈의 안내판 역할을 하던 바로 옆의 빨간 모자는 누군가 찾아갔는데도 그 만 원짜리는 여전히 잔디에 '오롯이' 박혀 있었다.
사람들이 그렇게 돈을 종이조각 보듯이 한단 말인가?
나만 이렇게 계속 오르내리면서 계속 돈을 째려본단 말인가?
그렇다 보니 심지어는 그 돈이 그냥 "누군가 장난으로 칼라프린트해서 떨어트려 놓은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반대로 그게 몇 장이 포개진 채로 접혀져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결국 오전 시간 끝 무렵에 직접 확인을 하기로 맘을 먹었다.
거기는 마침 슬로프에서도 가까운 곳이고 낮은 곳이기에 나의 스키신발이 아닌 보드신발로는 일이 아니었다.
'낼름' 주워보니 분명 '실폐'였다.
이제 시간도 다 돼서 더 탈 수도 없는 터이고 수입도 올린 마당이니 스키장에서 더 이상 망설일 일이 아닌 지라 불이 나게 차있는 쪽으로 내려와 운전대를 잡으니 왜 이렇게 땀이 많이 나는지 모르겠다.
"그거 내 돈인데 내 놓으시오!"
"어이! 거기!"
날도 봄 날씨 같았고 미련하게 쪄 입은 옷 탓도 있었지만 뭐 이런 소리가 뒤통수에서 나는 것도 같고 해서 더 더웠던 모양이다.
아침도 우유에 빵 몇 조각이 전부였고 점심 시간이 지났는데도 이상하게 배가 고프지를 안 했다. 그래도 나는 순댓국 식당을 찾아서 잘 넘어가지 않는 것을 그런 대로 넘기고는 예의 그 '쩐'을 내고 잔돈을 거슬러 받고는 다음의 테니스 모임장소로 달렸다.
길은 토요일치고는 소통이 잘 돼서 시간 여를 달려 무사히 약속 장소에 도착하여 테니스게임을 하는데 이상하게도 게임은 잘 안되었다. 세 게임 다 끝 힘이 딸려서 마지막 타이브레이크에서 졌다.
아마 무릎을 혹사 시켜서 그랬는지 공 맞는 느낌이 영 내 느낌이 아니고 남이 때리는 것 같았다.
그러고는 또 다시 차를 달려 식구들 저녁모임에 늦었지만 헐레벌떡 도착하니 오늘은 정말이지 정신없이 겨우 소득 만원 올리기 위해 왔다갔다한 그런 '허브지게' '헛싱킨' 그런 날이 아니었다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