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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달샘 메시지
제목: 그리스도인인 나는 누구인가?
명절이면 우리는 가족과 친지를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떠난다. 서로 만나지 못했던 분들을 만나면서 우리는 우리의 뿌리를 확인하며 그 속에서 우리가 속한 가문을 확인한다.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자리가 된다. 나는 무슨 성씨이며 부모님은 누구고 형제자매 친척은 어떤 분들인지를 확인하면서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확인한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어린 나이에 해외입양을 떠난 사람들이 성인이 되어서 모국을 찾고 생부모님을 만나기 위해 태평양을 건너오기도 하고 비행기를 타고 지구를 돌아오기도 한다. 나의 뿌리는 어디인가? 나의 부모님은 어떤 분들인지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분들로부터 나는 어떤 존재인지 왜 나를 보내야 했는지 등을 알고 싶어 한다.
사람은 왜 이렇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싶어할까? 그것은 사람에게는 수용 받고 인정 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동양에서 유명한 말 중에,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여자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 말은 본래 士知己者死 女悅己者容 사지기자사 여열기자용, 즉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여자는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을 위해 화장을 한다는 말이라고 한다. 이것은 인간이 가진 간절한 열망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말이다. 인간이 가진 가장 큰 욕구 중 하나는 인정 받고 사랑 받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인정받고 사랑 받으면서 우리는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비로소 확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인정 받기 위해 사랑 받기 위해 그렇게 애를 쓴다. 인간은 부모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으면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확인해 간다. 그리고 그 사랑과 배려 속에서 안정감을 찾아간다. 성장하면서 인간은 가족 이외의 사람들에게서도 인정을 받기를 원한다. 그래서 친구들의 우정을 찾고, 스승으로부터 인정 받기 위해 노력한다. 이것은 어린 시절부터 배워 온 것이라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점차 주위에 있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과 칭찬을 받기 위해 노력한다.
문제는 무엇으로 우리가 인정을 받으려 하는가 하는 데 있다. 사람들이 인정해 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가장 먼저 외모에 있고, 몸을 잘 움직이는 능력, 예를 들어 더 빠르게, 더 높이, 그리고 더 강하게, citius altius forties: faster, higher, stronger! 이는 현대 올림픽경기의 모토다. 전 세계인들이 모여 누가 더 빠르고 더 높이 뛰며 더 강한지를 겨루고 그 승자를 인정해주고 칭찬해 주는 공개적인 마당이다. 여기에 갈채와 환호가 있다. 이것은 이미 세계인들의 마음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 무엇을 잘 해서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는 것은 미덕이다는 것. 즉, 인정 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며 좋은 것이라는 인식이 우리들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그것을 추구한다. 그리고 장려한다. 때로는 그렇게 하라고 촉구하기도 한다.
학교에서 사람들을 인정해 줄 때는 성적으로, 그리고 회사에서는 능력으로, 사회에서는 가진 재산을 근거로 삼는다. 그래서 인간은 성적을 더 잘 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면접관에게 인정 받기 위해 남과는 다른 무엇인가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한다. 스팩을 쌓기 위해 힘쓴다. 여기서 스팩이라는 말은 영어, Specification이라는 말로서 세목, 내역을 가리킨다. 특히 이 말은 구직자 사이에서 학력, 학점, 자격증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지만, 본래는 라틴어 스페키에스 species에서 온 말로서 외모look, appearance, 겉으로 드러나 보여주는 것display이라는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스펙을 쌓는다는 것도 역시 무엇인가 보여주기 위한 내용이나 항목을 채우려는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이 어떤 일을 처리하는 데 유용한 것은 사실이다. 그에 따라 인간의 가치가 그 분야에서 결정된다. 즉, 유능한 사람, 능력 있는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고 그에 따라 대우가 달라진다.
그러나 인간의 진정한 가치가 이렇게 스펙이나 능력에 따라 정해지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그 자체로 존귀하다. 자녀는 부모에게 있어서 그 스펙이나 능력에 상관 없이 존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다. 부모도 스펙이나 능력에 상관없이 고맙고 감사한 존재다. 그리고 우리 이웃도 알고 보면 모두 존귀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렇게 사람을 대하지는 않는 것이 현실이다. 자신과 가장 가까운 가족 외에는 그 존재만으로 존귀하다는 생각을 갖기가 쉽지 않다. 우리는 상당히 짧은 연대의식이 있다. 이것은 건강하지 못한 사회가 되게 하는 요인이다. 집 밖에만 나가면 낯선 이방인이 되거나 적 또는 나를 해롭게 하는 사람들로 둘러 쌓인 세상은 아스팔트로 포장된 정글과 다름이 없다. 서로 무관심하거나 서로에게 적대시하는 사회는 삭막하기 이를 데 없을 것이다.
인간을 스펙이나 능력이나 외모로만 평가하여 그 가치를 인정하는 우리의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교육제도를 비롯한 모든 경제제도 등을 올바르게 바로잡기는 본질적으로 힘들 것이다. 그래서 다양한 재능을 계발시키고 그것을 인정해주려고 하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지나친 외모 지향적 사고는 외모에 지나치게 집착하게 하고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고 평가하는 일이 강화되어 과도한 다이어트에 집착하게 한다. 그리고 이런 차별은 경쟁에서 뒤쳐진 사람에 대한 비하로 나타나 사람을 비인격적으로 대하고, 그 결과 학대로 이어지고 학대 받은 사람은 자살로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사는 한국 사회의 병폐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복지 시설을 늘리거나 복지비용의 추가적인 지출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하다. 자신과 타인에 대한 이해가 심하게 왜곡되어 우리는 모두 어디론가 달려가는 멈추지 않는 달음질 속에 포레스트 검프Forest Gump를 뒤따르는 맹목적인 경주자들이 아닌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요즘 아내는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다’는 책을 빌려왔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고 생각해볼 문제다.
성경은 이런 인간의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을 하는가? 인간이 본래부터 이런 존재였을까? 그렇지 않다. 성경에서 말하기를, 인간은 처음에 모든 것이 완벽하고 부족함이 없는 동산에서 살았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인간은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서 무엇인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고는 하나님을 떠나 자기만의 도덕, 윤리를 획득하고자 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끊어지고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오는 만족감과 충만함은 더 이상 누릴 수 없었다. 대신에 그 충만함을 다시 느끼기 위해 인간은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려는 노력을 하기에 바빴다. 그리고 늘 자신을 돌아보면서 자기가 정해놓은 표준에 미치지 못한 점이 무엇인지 늘 스스로를 평가하게 되었다. 이렇게 살아가는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다가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잘못되었다고 누가 말하더냐? 무슨 기준으로 스스로를 평가하고 있느냐? 왜 너는 부끄러워하느냐?” 즉, 이 말은 하나님 안에 있으면 문제될 것도 없고, 인정 받기 위한 표준에 이르려고 애쓸 필요도 없고, 수치를 느낄 필요도 없다는 말이다.
이날 이후로 인간은 무언가를 얻기 위해 애쓰는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 주위의 다른 사람이 인정해 줄 근거를 맞추기 위해 달음질 한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거나 무슨 생각을 하는가 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더러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하거나 생각하면 나는 괜찮은 존재가 되는 거였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아야 비로소 나는 존귀한 존재, 가치 있는 존재가 된다고 여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실행이라는 러닝머신 위를 달린다. 무언가 해내야 존귀한 존재가 된다고 여기고 점수를 따기 위해 애쓴다. 그리고 그 러닝머신을 달리다가 넘어지고 지치고 상처를 입고 다른 사람을 보고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렇게 전체 인류가 쉼과 안식, 평안을 상실하고 살아간다. 비극이다.
예수께서 오심은 이런 상황을 완전히 바꾸시기 위함이다. 예수께서는 완전한 삶을 사셨으며 기준에 미치지 않은 부분이 없이 사셨다. 그리고 하나님을 떠난 우리의 죄가 지은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을 대신 받으셨다. 대신에 주님이 사신 완전한 의로움은 우리의 몫으로 값없이 선물로 주셨다. 그래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다시 이어지게 하셨다. 에덴동산에서 잃어버린 영적인 생명이 회복되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으심이 나를 위한 것이며, 다시 살아나심도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가 회복된다. 비로소 진정한 변화가 시작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그 능력이나 스펙 또는 외모로 부르지 않으신다. 갈릴리의 가난한 어부 시몬을 향하여 “너는 베드로, 곧 반석이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것이다”고 하셨다. 베드로는 성도들을 향하여,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고 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특별한 민족이며, 하나님의 일을 맡은 제사장 같은 자들이요, 이 세상에서 구별된 거룩한 나라며,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이 되었다는 말이다. 이는 한 마디로 우리가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특별한 존재, 존귀한 존재가 되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 데오빌로Theophilos라는 인물처럼 우리 모두는 테오필로스가 되었다. 여기서 필로스는 사랑이라는 말이다. 지혜는 소피아라고 한다. 그래서 지혜를 사랑하는 것을 필로소피아라고 하고, 우리말로는 철학이라고 부른다. 형제를 아델포스라고 한다. 그래서 필라델피아는 형제 사랑이라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가 된 우리는 서로를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이해하고 바라본다.
그래서 바울 사도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신다:
Because of this decision we don’t evaluate people by what they have or what they look. We looked at the Messiah that way once and got it wrong, as you know. We certainly don’t look at Him that way anymore. Now we look inside, and what we see is that anyone united with the Messiah gets a fresh start, is created new. The old life is gone; new life burgeons! Look at it! All this comes from the God who settled the relationship between us and him, and then called us to settle our relationships each other.(2 Cor 5:16~19, Message Bible)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는 아무도 육신의 잣대로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육신의 잣대로 그리스도를 알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과를 따지지 않으시고, 화해의 말씀을 우리에게 맡겨 주심으로써,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와 화해하게 하신 것입니다.[새번역]
이렇게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해서 여러 가지 제사나 선행 또는 윤리나 철학 등을 통해 하나님을 만족하게 하려고 한다. 또는 하나님께 도달하려고 노력한다. 그 길은 엄청난 고행의 길이다. 만약 누군가 죄 없는 거룩한 삶을 일주일만이라도 살아보려고 한다 하자. 그는 평상시보다도 더 많은 죄의 유혹을 받고 더 쉽게 더 철저하게 넘어지고 범죄하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이는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기 전이나 믿은 후나 동일하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노력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정도로 거룩한 삶, 경건한 삶을 살고자 하면 틀림없이 바울과 같은 고백을 할 수밖에 없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면 모든 인간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께 인정 받으려는 노력을 할 필요가 없다. 노력은 무엇을 갖지 못했을 때 그것을 얻기 위해 힘쓰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요, 자녀요, 거룩한 백성이 된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거룩하고 의로운 자가 된다. 그의 의로움과 그의 거룩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에 죽으심으로 받은 선물이다. 그는 그 모습 그대로 이미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 마음을 열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사람을 향하여 예수님과 같이 여기신다.
어떤 목사님에게 한 딸이 있는데, 어느 날 이렇게 질문을 하더란다. “아빠, 세례가 뭐에요?” 아빠는 딸에게 세례를 가르칠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딸에게 뚜껑이 있는 병을 가져오라고 한다. 그리고 싱크대에 물을 가득 받으라고 한다. 이제 병뚜껑을 열고 그 병을 물에 담그면 어떻게 될지 보라고 한다. 병에 물이 가득히 차자 아빠는 병 뚜껑을 닫는다. 이제 병은 싱크대 아래로 가라앉는다. 병 안에도 물이요, 병 밖에도 물이다. 세례는 이렇게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잠기는 것이요, 그리스도도 내 안에 충만하게 들어오시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는 내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떠나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런 뜻이다. 나의 존재가 바뀐 것을 말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오셨을 때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 설교를 듣고도 예수님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인정 받으려는 노력을 그치지 않았다. 그 결과 그들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이 되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예수님 앞에 내려놓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가볍고 쉬운 짐을 지는 것이다.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서 살아보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기에 충분할 정도로 경건하게 살아보라. 나의 기도를 주께서 들어주실 정도로 간절히 기도해 보아라. 이 일이 얼마나 힘든지. 그러나 그것은 복음이 아니다. 천국에 들어갈 의로움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값없는 선물이다.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은 나의 정성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자녀된 나이기 때문에 주께서 들어주신다. 이렇게 사는 것을 믿음으로 산다, 또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산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살라고 주께서는 초청하신다: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 11:28~30, 새번역 성경)
“Are you tired? Worn out? Burned out on religion? Come to me. Get away with me and you’ll recover your life. I’ll show you how to take a real rest. Walk with me and work with me—watch how I do it. Learn the unforced rhythms of grace. I won’t lay anything heavy or ill-fitting on you. Keep company with me and you’ll learn to live freely and lightly.”(Message Bible)
메시지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지쳤느냐? 너희가 완전히 녹초가 되었느냐? 종교에 질렸느냐? 나에게 오라. 나와 함께라면 너희의 인생은 회복되리라. 진정한 안식을 얻는 법을 보여주겠다. 나와 함께 걷고 나와 함께 일하자. 내가 하는 법을 보라. 강제로 밀어붙이지 않는 은혜를 배워라. 나는 어떤 무겁고 맞지 않는 짐을 지우지 않을 것이다. 나와 함께 동행하면 너희는 가볍고 자유롭게 사는 법을 배울 것이다.
신앙생활은 은혜를 주시는 예수님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나를 죽이면서 극한 절제를 훈련하는 삶은 산속에서 도를 닦는 불자나 하는 일이다. 절제는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산 사람에게 맺히는 열매다. 성령의 열매가 곧 사랑과 희락과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다. 이것은 우리가 맺으려고 노력할 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 거하면 절로 과실을 맺게 된다. 아니 이미 예수 안에 있는 우리에게는 이런 과일을 맺을 씨앗을 주셨다. 우리 안에는 성령께서 이미 들어와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과 동행하는 법을 배우기만 하면 된다. 그것이 신앙생활이요 진정한 자유를 얻는 길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스펙을 쌓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누가 얼마나 더 기도하느냐? 전도를 누가 많이 하느냐? 누가 성경을 더 많이 알고 있느냐 시합하는 곳이 아니며 자랑하는 곳도 아니다. 또한 얼마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느냐를 가지고 노력하는 곳도 아니다. 이미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다.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내어주실 정도로 사랑하신다. 그것도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렇게 사랑하신다. 그러면 이제 주님 앞으로 나와서 회개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를 얼마나 더 사랑하시겠는가? 우리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것은 천국에 가기 위함도 아니요, 천국에 가서 더 큰 상을 받기 위함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에 감사함 때문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주님께서는 우리 자체로 이미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신이 그렇게 애쓰면서 수고한 까닭을 이렇게 설명한다:
If I acted crazy, I did it for God; if I acted overly serious, I did it for you. Christ’s love has moved me to such extremes. His love has the first and last word in everything we do.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 5:13~14)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렇게 그를 뜨거운 열정의 사람이 되도록 움직인다고 고백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지 말고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기를 힘쓰자. 우리는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할까 고민하지 말고 주님의 사랑으로 더욱 충만해지도록 주님 앞에 머무르자. 무엇인가를 가지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하지 말고 주님께 내가 얼마나 사랑 받은 존재인가를 배워가자. 그래서 우리가 주님 안에서 얼마나 서로 존귀한 자인지를 알고 그렇게 피차 사랑하고 존대하자.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비결이요, 이 삭막한 세상에 시원한 생수가 될 것이다. 그 생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안에도 이미 그 생수의 옹달샘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원하고 맑은 물이 나를 통해 흐르게 하자. 주께서 내 안에 계시며 내 안에 사시며 나를 통해 주님을 드러내시도록 나를 내어드리자. 그리고 어떻게 인생이 풍성해지는지 주님과 함께 그것을 보고 즐거워하자.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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