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년 전 중국 의서가 원래 고려의 것이라고? 동양의학을 완성
한 고려의 침술경전 <고려 침경 영추>
어느 분야든 필독서가 있습니다. 한의학을 공부하는 사람들, 특히 침을 전공으로 하고 있는 한의사들에게 필독서를 손꼽으라고 하면 <황제내경>이라는 책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한의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도 어렵지 않게 시술할 수 있어 한 때 '수지침'이나 '수족침', '이침'이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와 관련한 책에서도 빠지지 않고 소개되거나 인용되는 것이 <황제내경>입니다.
<황제내경(黃帝內經)>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의학서로 알려진 고서로 <소문(素問)>과 <영추(靈樞)>로 구성돼 있습니다. <소문>은 천인합일설(天人合一說),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 등 자연학에 입각한 병리학설과 같은 이론적인 부분들이 주 내용입니다. 반면에 <영추>는 물리적 치료법이라고 할 수 있는 침구(鍼灸)에 대한 사항들을 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 침 ⓒ 임윤수
가장 오래된 중국 의서의 절반이 사실은 고려 침경
<황제내경>은 고대 중국 침술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원조 서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놀라운 것은, 천 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중국 고유의 침술 서적으로 널리 알려진 <황제내경> 중 반분을 이루고 있는 <영추>가 사실은 고려에서 진상된 <침경(針經)>이라는 점입니다.
원우 8년 봄 정월 경자일에 고려에서 바친 <황제 침경>을 천하에 반포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원우는 송나라 철종의 연호이고, 원우 8년은 서기로 환산하면 1094년이다. 이 사실이 한의학계에 알려진 것은 불과 몇 년 전이다. 그것도 우리의 눈으로 찾아낸 것이 아니고 중국의 학자가 찾아서 발표하는 바람에 알게 된 것이다. 무려 천 년 동안, 고려에서 진상된 <침경>이 버젓이 <황제내경>으로 둔갑하여 중국의 유산으로 내려온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 된 일일까? <황제내경>으로 둔갑한 <영추>의 서문을 보면 전후 사정을 헤아려 볼 수 있다.
(본문 12쪽 중에서)
지금껏 중국 의학서로만 알고 있었던 <황제내경> 중 침구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영추>가 사실은 1094년 봄에 고려에서 진상한 침경을 재편집해 널리 보급한 내용이라는 설명입니다.
바로 잡기 위해 뒤죽박죽으로 정리한 책
▲ <고려 침경 영추>( 정진명 지음 / 학민사 펴냄 /2014.07 / 3만8000원 ) ⓒ 학민사
<고려 침경 영추>는 <소문>과 <영추>로 구성돼있는 <황제내경> 중에서 <영추>부분을 고려인의 관점에서 재구성하고, 요즘의 감각으로 쉽게 번역해 놓은 침구관련 내용입니다.
어느 책이든 처음 펼칠 때 제일 먼저 '차례'를 보게 됩니다. 이 책은 '차례'만 6쪽을 차지합니다. 그런데 그 '차례'가 원본(?)이라고 할 수 있는 <황제내경>과는 달리 뒤죽박죽으로 돼 있습니다.
황제내경에서는 77번째에 해당하는 '구궁팔풍(九宮八風)'이 이 책에서는 제일 앞에 나옵니다. 반대로 <황제내경>에서는 제일 앞에 있는 '구침십이원(九針十二原)'이 이 책에서는 중간쯤에야 나올 정도로 뒤죽박죽으로 정리돼 있습니다.
'차례'가 이렇게 뒤죽박죽으로 돼 있는 건 이 책이 <황제내경>에 있는 <영추>를 단순히 번역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황제내경> 안의 <영추>는 의술에 대한 잡동사니를 모아놓은 듯 보일정도로 무질서하기 짝이 없다고 합니다. 저자는 고려에서 진상한 <침경>을 중국의 것인 양 하기 위해 짜깁기를 하듯 <소문>에 맞추어 넣다보니 그렇게 됐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고려 침경 영추>는 <소문>에 맞추기 위해 뒤죽박죽으로 섞여버린 <영추>를 고려에서 진상했던 <침경> 본래의 모습으로 재구성했습니다. 재구성하다 보니 뒤죽박죽이 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게 원래의 모습, <고려 침경>이라면 유지되었을 차례를 다시 찾아간 모양새입니다.
임금이 말했다. 부인에게 수염이 없는 것은 피와 기운이 없기 때문입니까?
스승이 말했다. 충맥과 임맥은 모두 아기집에서 일어나서 등뼈 안쪽을 따라 올라가는데, 경맥의 바다가 됩니다. 떠올라서 밖으로 가는 것은, 배를 따라 올라가서 목구멍에서 만나고, (거기서) 갈라져 입과 입으로 이어집니다(絡). 피와 기운이 드세면 살갗을 채우고 살을 뜨겁게 하고, 오로지 피만 드세면 살갗을 스미고 적셔 털을 나게 합니다. 이제 부인의 천성은 기운에서는 남고 피에서는 모자란데, (달거리로) 자주(數) 피를 빼앗깁니다. 충맥과 임맥이 입과 입술을 꽃피우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수염이 나지 않습니다.
(본문 160쪽 중에서)
전체 81편으로 돼 있는 내용은 4부, 제1부 우주, 제2부 사람, 제3부 침술, 제4부 잡병으로 분류해 묻고 답하는 식으로 정리돼 있습니다. 제1부 '우주'에서는 소우주에 나타나는 큰 우주의 법칙을, 제2부 '사람'에서는 사람의 몸속에 나타나는 우주의 질서를, 제3부 '침술'에서는 그런 질서가 깨질 때 그것을 다스리는 방법인 침술을 설명하고 있고, 제4부 '잡병'에서는 여러 가지 탈에 대한 처방들을 모아서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계절, 바람, 빛, 물, 기온, 음양오행 등 우리가 살아가면서 접하게 되는 우주만물이 인체의 건강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인에게는 수염이 없는 이유, 환관은 오직 수염만 빠지는 이유, 고자는 수염이 자라지 않는 이유 등을 한의학적인 관점에서는 어떻게 진단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 침 ⓒ 임윤수
어디서 탈이 났는지 '척' 보면 압니다
살갗이 푸르스름하고 살결이 촘촘한 사람은 간이 작습니다. 살결이 성근 사람은 간이 큽니다. 가습이 넓고 옆구리 뼈(骹)가 (볼록) 솟은(反) 사람은 간이 높습니다, 간이 좁고(合) 옆구리 뼈가 (꺼져) 토끼처럼 (작은) 사람은 간이 낮습니다. 가슴과 옆구리가 좋은 사람은 간이 튼튼합니다. 옆구리 뼈가 약한 사람은 간이 약합니다. 가슴과 배가 좋아서 서로 (균형이) 잡힌(得) 사람은 간이 올바릅니다. 옆구리 뼈가 치우쳐 들린 사람은 간이 한쪽으로 치우친 것입니다. (본문 250쪽 중에서)
눈이 빨간 빛깔을 띤 사람은 탈이 염통에 있고, 흰 빛은 허파에 있고, 푸른 빛은 간에 있고, 노란 빛은 비장에 있고, 검은 빛은 콩팥에 있습니다. 노란 빛에 (다른 빛깔이 섞여 어느 빛깔이라고) 이름 붙일 수 없는 사람은 (탈이) 가슴 속에 있습니다. (본문 399쪽 중에서)
술을 많이 마시면 구토를 하고 얼굴이 붉어지거나 창백해지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람의 인체(장기)는 상호 작용하며 반응합니다. 책에서는 술을 마시면 용감(?)해지는 이유, 반복해서 탈이 나는 이유, 피부 색깔이나 신체 부위별 특징, 한숨을 쉬거나 하품을 하는 것과 같은 신체 반응 등을 보고 건강 상태를 확인하는 방법 등도 자세하게 설명돼 있습니다.
물론 어떤 때 어떤 침을 사용하는지 등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의학을 이해하는 데 기초가 되는 기와 혈, 맥 등에 대한 지식이 있는 상태라면 더 없이 좋겠지만 한의학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는 사람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도록 대부분이 일상적인 용어로 번역돼 있습니다.
독도와 비유하는 건 적절하지 않아
저자는 <침경>의 유래를 설명하면서, "<영추> 소동에서 마치 오늘날의 독도 사태를 천 년 전에 보는 듯하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적절한 비유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저자가 밝히고 있는 내용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그 동안에는 <영추>가 중국 의술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고려의 침경이다"입니다.
하지만 독도는 예전에도 우리 국토였고 지금도 우리 국민이 살고 있는 우리 국토입니다. 굳이 비유를 해야 한다면, 일본에 있는 어느 국보급 문화재나 문화적 자산이 알고 보니 우리나라 것으로 밝혀진 사례를 예로 들면 될 것입니다. 원래 썼던 비유는 '독도를 진짜 자신들의 영토로 착각하고 있는 일본인' 입장에서나 쓸 수 있는 비유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고려 침경 영추>를 통해 천여 년 전 사람들은 병을 어떻게 생각하고 진단했으며, 어떻게 치료했는지를 읽을 수 있음은 물론 풍문으로만 들어 신비롭게만 생각되었던 한의학과 침술에 대한 지식을 보편적 상식으로 새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 기대됩니다.
덧붙이는 글 | <고려 침경 영추>( 정진명 지음 / 학민사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