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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여러 가지 “틀”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국어 사전이 이 “틀”을 “골이나 판처럼 물건을 만드는 데 본이 되는 물건, 어떤 물건의 테두리나 얼개가 되는 물건, 일정한 격식이나 형식, 사람 몸이 외적으로 갖추고 있는 생김새나 균형, 간단한 구조로 된 기계나 장치, (수량을 나타내는 말 뒤에 쓰여) 가마나 상여 따위와 기계를 세는 단위...”등으로 복잡하게 설명하고 있는 이유는, 정말로 많은 종류의 “틀”들이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 틀이 없으면 내용도 없습니다. 세상은 철저히 이 틀에 맞추어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목사 시인인 용혜원 씨는 이 틀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만의 틀을 가지고 있다
넘치면 흥분하고
족하면 허무해지고
비틀어지면 좌절하고
무너지면 포기하고
이 틀을 사람들은
마음이라 부른다
이 틀이 때묻기 시작하면
타락이 시작되고
이 틀이 진솔해지기 시작하면
정겨워 진다
사람들은 틀에 박히는 것을 싫어하지만
틀을 떠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틀은 우리들의 마음이다
모든 것을 사랑 할 때
틀과 틀이 맞는다
마음이 곧 “틀”이라는 것입니다. 이 틀의 만족 여부에 따라 울고 웃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할 때 모든 틀이 서로 맞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이 틀을 갖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틀”하면 대개 긍정적인 느낌보다는 부정적인 느낌을 갖습니다. 틀을 잘못된 고정관념으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잘못된 고정관념은 무서운 결과를 초래합니다. 우물안 개구리처럼, 세상을 자기만의 생각 속에 가두어 버립니다. 편협하고 이기적입니다. 유리병 안에 갇힌 벼룩처럼, 자신의 능력을 제한해 버립니다. 가데스 바네아의 사건은 그 대표적인 예일 것입니다.
이스라엘 만 백성들 가운데서 특별히 선발된 열두 명의 정탐꾼들은 똑같은 상황을 목격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열 명의 정탐꾼들은 자신들이 가나안 일곱 족속의 밥이라고 말한 반면 여호수아와 갈렙은 오히려 그들이 이스라엘의 밥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똑같은 것을 보고 돌아온 열 명의 정탐꾼들이 참으로 비극적인 보고를 한 이유는, 온 세상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틀이 아니라 편협하고 이기적이며 지극히 부정적이기까지 한 그들의 “틀” 때문이었습니다. 여전히 노예근성을 버리지 못한 그들은 자신들을 “뛰어봤자 벼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날고 기어도 가나안 족속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은 어느 정도 맞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출 애굽한 자신들과 지난 40동안이나 함께 하셨다는 사실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동안 그들에게 불가능한 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잘못된 틀, 잘못된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그들은 바로 그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할 수 없다고, 그들의 밥이 될 수밖에 없다고 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상은 틀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 틀에 따라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떤 틀을 가지고 있습니까? 부정적인 틀입니까? 긍정적인 틀입니까? 이기적이고 편협한 틀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과 나라와 민족과 이웃을 생각하는 크고 넓은 틀입니까? 믿음의 틀입니까? 불 신앙적인 틀입니까? 순종하는 틀입니까? 불순종하는 틀입니까? 용서하고 용납하는 틀입니까? 미워하고 거부하는 틀입니까? 어떤 틀을 가졌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은 달라질 것입니다. 크고 넓은 틀, 믿고 순종하는 틀, 용서하고 용납하고 사랑하는 틀을 갖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 시는 ① 먼저 “다윗이 교훈하기 위하여 지은 믹담”입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믹담”에는 “귀한 비밀에 대한 시, 금으로 새길 만큼 탁월한 시,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기둥에 새겨 부를 노래”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극히 아름다운 일들은 침묵 속에 묻어두어서는 안됩니다. 지붕 위에서 큰 소리로 외쳐야 합니다. 특히 여호와 하나님의 능하신 행적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후손들이 듣고 배우고 암송하도록 기록하고, 가르쳐야합니다. 또 성령께서 감동을 통해 교훈 하시는 것들은 기쁜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배워야 합니다. 마음 속 깊이 담아 두어야합니다. ② 또 “영장으로 수산 에둣에 맞춘 노래”입니다.
여기서 “수산 에둣”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쇼솨님 에두트”(shoshanneem' aydooth')는 “언약의 백합화”라는 뜻입니다. 백합화는 순수와 사랑스러움을 상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백합화에는 언제나 “가시나무 가운데”라는 수식어가 따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시나무 가운데서 핀 백합화가 가장 아름답고 진한 향기를 발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에게 승리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승리케 하실 것이라는 아버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모진 핍박과 고난을 견디며 인류 구원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순수하고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분입니다.
환난과 시험 속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뒤에서 언급이 되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치열한 전쟁 중에도 당신을 믿고 의지하는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승리를 안겨주셨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승리를 통해 얻은 전리품을 나누며 왕이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③ 또 본 시는 “다윗이 아람 나하라임과 아람 소바와 싸우는 중에 요압이 돌아와 에돔을 염곡에서 쳐서 일만 이천 인을 죽인 때에”(다윗이 아람 나하라임과 아람 소바의 연합군과 싸울 당시, 요압이 돌아오다가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군 만 이천 명을 죽였을 때에 : 공동 번역)에 기록되었습니다.
암몬 왕 나하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시인은 그가 살아 생전 자신에게 베풀어준 은혜를 생각하여, 사자들을 보내 문상하게 하였습니다. 그때 암몬 족속의 방백들은 나하스에 이어 왕이 된 하눈에게 시인의 사자들이 문상 온 목적은 나하스 왕을 공경해서가 아니라, 암몬 땅을 엿보고 탐지하여 함락시키기 위해서라고 왜곡해서 보고했습니다. 그러자 하눈은 강제로 사자들의 수염을 깎고, 예복을 잘라버렸습니다. 그렇게 시인은 물론 이스라엘까지도 모욕하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불안한 마음을 갖게된 그는 돈을 주고 아람 나하라임과 아람 마아가와 아람 소바 지역에서 병거와 용병을 보강함으로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은 요압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해 암몬 연합군과의 전쟁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약 2년여에 걸친 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거의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남쪽의 에돔이 쳐들어왔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칫하면 양쪽에서 협공을 당할 수 있는 위기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곧 당신을 의지하는 시인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요압과 아비새를 통해 당시 소금 골짜기에 주둔해 있던 에돔군 만이 천명을 죽일 수 있게 하심으로, 적의 사기를 완전히 꺾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전쟁의 승패까지 결정할 수 있는 전과를 올리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본 시를 통해 전쟁을 승리로 이끄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환난과 시험의 때에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전세를 완전히 바꾸어버리십니다. 적의 힘과 사기를 완전히 꺾어버리십니다. 당신을 믿고 의지하는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승리를 안겨주십니다. 마음껏 누리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환난과 시험의 때일지라도 하나님을 붙잡은 손을 놓지 마십시오. 믿고 의지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승리를 만끽하십시오. 뿐만 아니라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모든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인은 에돔과의 전쟁 초반에 패배할 지경에 이르자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1-3절입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셨고 분노하셨사오나 지금은 우리를 회복시키소서 주께서 땅을 진동시키사 갈라지게 하셨사오니 그 틈을 기우소서 땅이 요동함이니이다 주께서 주의 백성에게 어려움을 보이시고 비척거리게 하는 포도주로 우리에게 마시우셨나이다”
사울이 왕이 되기 전부터 비참한 상태에 처해 있었던 이스라엘은, 사울이 왕이 된 후에도 내분과 다툼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의 통치가 길보아 전투에서의 패배로 끝나고 시인이 왕위에 올랐을 때, 나라는 남북으로 두 동강 나 있었습니다. 외부의 적들은 그런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공격해왔습니다. 나라의 운명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위태로웠습니다. 그 과정에서 아람 연합군과의 전쟁이 겨우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상황에서 설상가상으로 에돔이 쳐들어왔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군사들은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흩으셨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파라쯔”(pawrats')는 “깨뜨리다, 분쇄하다, 부수다”등의 뜻으로, 어떤 구조물의 경우에는 기능을 완전히 상실시킬 만큼 파괴된 것을, 대열(隊列)의 경우에는 적의 공격을 받아 갈팡질팡 혼잡케 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또 “진동시키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아쉬”(rawash)는 “땅과 하늘 등이 흔들리다, 두렵게 하다”등의 뜻으로, 전투에서 패배한 시인의 군사들이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음을 의미합니다. 한편 “갈라지게 하였사오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파짬”(pawtsam')은 “쪼개거나 깨뜨려 열다, 깨지다” 등의 뜻으로, 에돔의 공격을 받은 시인의 군사들이 지리멸렬(支離滅裂)하여 대오(隊伍)에서 이탈한 채 사방으로 흩어졌음을 의미합니다.
군사들이 마치 술에 취한 듯 정신차리지 못하고 우왕좌왕(右往左往)했습니다. 어느 것 하나 신뢰할 수 없었습니다. 어느 곳도 안전하지 못한 불안정한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지 않으시면 그야말로 나라가 아주 파멸할 수도 있는 절망적인 상황이 연출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들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원인이 무엇인지 찾던 시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 진노하셨기 때문이라고 확신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범죄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더럽고, 냄새가 나며, 불쾌한 존재였습니다. 분노로 흩어버리실 수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구체적으로 어떤 죄가 하나님을 분노케 하셔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패전(敗戰)케 했는지는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성도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손길로부터 멀어지는 일은, 그 기간이 비록 짧을지라도 엄청난 재난이라는 사실만큼은 밝히고 있습니다. 어쨌든 패전의 원인이 이스라엘의 죄에 있다고 확신한 시인은 그나마 하나님께서 아주 멸망시키지 않으신 것이 은혜라고 생각했습니다. 에돔 군대에게 쫓기는 신세에서 벗어나, 상황을 반전(反轉)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는 것 밖에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회복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재난을 거두어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를 회복시키소서”를 공동번역은 “이제 노여우신 마음을 돌이키소서”로, KJV은 “다시 우리에게 돌아오소서”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향해 다시 한번 미소를 띠소서. 우리로 당신께 돌아서게 하시고, 당신은 우리에게로 돌아오소서. 이전에는 당신께서 당신의 백성을 향해 얼굴을 향하지 아니하셨나이까? 이제 다시 우리에게 얼굴을 향하시고 은혜와 축복을 내려 주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자신의 군사들이 더 용맹스러워지거나, 요압과 다른 지휘관들이 더 지혜로워지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돌아서시는 것이 먼저여야 하고 정말로 간절한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은 거대한 부대가 함께 하는 것보다 더 든든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에돔 사람들이 염곡을 향해 공격을 하거나, 모든 악한 영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공격하는 것보다도,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것이 더 무섭고 두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의 얼굴을 드시기만 하신다면, 아무리 강한 죽음이나 지옥 같은 대적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에 하나 하나님께서 떠나가신다면,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에도 두려워 떨어야 하는 존재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것은 사람이 당할 수 있는 가장 큰 재난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런 재난을 당하고서도 깨닫지 못하거나 무관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실을 안타까워하고 탄식하며 회개하는 영혼은 하나님께서 아주 버리지 않으시고, 심판도 일시적이고 부분적으로 끝내시겠지만, 그렇지 않은 영혼은 아주 버림받은 영혼이며 하나님의 심판도 영원하고 구체적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인에게는 담대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수 있는 그 무엇보다 확실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4-5절입니다.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기를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 하셨나이다(셀라) 주의 사랑하시는 자를 건지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응답하사 오른손으로 구원하소서”
우리가 끊임없이 공격해 오는 사단과의 영적인 전쟁에서 능히 이기기 위해서는 늘 영적인 경각심을 가져야합니다. 정신차리고 깨어 근신해야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의 힘과 능력만으로는 사단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아말렉과의 전면전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역사 하신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향해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출17:14)고 명령하셨습니다. 당신이 친히 이스라엘 앞에서 아말렉을 물리쳐 주셨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해주실 것이라는 역사적인 교훈을 여호수아를 비롯한 후손들에게 알리라는 것입니다.
이에 모세는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출17:15), 곧 “여호와는 나의 깃발, 여호와는 나의 승리의 깃발”(The Lord is my Banner)이라고 불렀습니다. 또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출17:16)고 외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와 닛시, 곧 여호와 하나님의 깃발 아래로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영원한 승리를 주실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수많은 전쟁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이기고, 떠나가시면 진다는 교훈을 뼈저리게 느꼈던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인생의 생사(生死)와 전쟁의 승패(勝敗) 등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고 외쳤습니다.
그러니 영적인 싸움에서 영원히 승리하기 원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여호와 하나님의 깃발 아래 서야만 한다고 외쳤던 것입니다. 이후 이스라엘의 흥망성쇠(興亡盛衰)는 이 깃발을 들었느냐 들지 않았느냐의 여부에 따라 결정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영원한 승리의 깃발이 되어 주십니다. 당신이 사랑하고, 당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놀라운 기적을 베풀어주십니다. 힘있게 역사 하십니다. 전혀 승산 없던 전쟁에 친히 개입하셔서 승리로 이끄십니다. 그렇게 약속을 지키심으로 승리의 깃발을 높이 들게 하십니다. 약속에 신실하신 당신을 온 세상에 선포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시인은 누구보다 약속에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사랑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는 시인을 향하여 “내가 나의 거룩함으로 한번 맹세하였은즉 다윗에게 거짓을 아니할 것이라”(시89:35)고 선포하셨습니다. 죄나 불의, 부정 등으로부터 완벽하게 분리되신 거룩하신 하나님은 온전하십니다. 흠이 없으십니다. 의로우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그 거룩한 성품을 담보로 이미 시인에게 당신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백성들을 환난과 시험에서 건지시겠다고 맹세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한 시인은 이제부터 자신은 기뻐할 것이라고 외칩니다. 6-8절입니다.
“하나님이 그 거룩하심으로 말씀하시되 내가 뛰놀리라 내가 세겜을 나누며 숙곳 골짜기를 척량하리라 길르앗이 내 것이요 므낫세도 내 것이며 에브라임은 내 머리의 보호자요 유다는 나의 홀이며 모압은 내 목욕통이라 에돔에는 내 신을 던지리라 블레셋아 나를 인하여 외치라 하셨도다”
여기서 “뛰놀리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라즈”(awlaz')는 “기뻐서 펄쩍 펄쩍 뛰다, 무척 기뻐하다, 승리의 환호성을 지르다”등의 뜻으로 미 완료형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실 승리로 인해 계속해서 기뻐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장차 시인에게 요단을 중심으로 동서 모든 땅을 주실 것입니다. 많은 용사를 가진 에브라임과 같은 족속으로 하여금 시인을 보호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가 속한 유다 지파로부터 모든 통치권이 나오게 하실 것입니다. 모압과 에돔을 정복해서 종을 삼게 하실 것입니다. 시인의 공격을 받아 죽을 위기에 처한 블레셋으로 하여금 탄식하게 만드실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이 모든 일들을 행하실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사랑하시기 때문에 잠시 죄를 징계하셨을 뿐, 한번도 사랑하는 이스라엘과 시인을 아주 떠나거나 버리신 적이 없었음을 증명해 보이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상황에서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도움을 구할 수 있었던 시인은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에 재난이 닥치는 이유는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환난과 시험이 주어졌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할 이유는 없습니다.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께서 공의를 행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은 결코 사랑하는 당신의 백성들을 아주 떠나거나 버리실 수 없는 분입니다. 반드시 돌아오셔서 모든 것을 회복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재난이 주어졌을 때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회개하십시오. 무엇보다 사랑하는 당신의 백성들을 환난과 시험가운데서 건지시고, 지키시고, 보호하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을 경외하십시오.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친히 개입해 주시기를 구하십시오. 뿐만 아니라 환난과 시험 가운데서도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들을 묵상한 시인은 이제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9-12절입니다.
“누가 나를 이끌어 견고한 성에 들이며 누가 나를 에돔에 인도할꼬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까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저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자심이로다”
여기서 “견고한 성”은 당시 난공불락의 요새로 불렸던 에돔의 수도 페트라를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코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패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만만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초반 위기에 처했던 시인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믿었던 수도 페트라는 이스라엘의 군대장관 요압에 의해 처참하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전쟁의 승패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도록 역사 하셨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절망적인 상황에 주저앉아 있지 않았습니다.
대적을 밟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용감하게 행동할 것이라고, 군사적인 대 반격을 실시할 것이라고 다짐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무기력하게 가만히 앉아 있는 자들을 위해서 일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위해 대신 싸워주시리라는 믿음을 갖고, 최선을 다하는 자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능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인가 잘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입니다. 원수를 밟은 발은 우리의 발이 아니라 하나님의 발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원수들을 쳐서 그들로 무릎을 꿇고 복종케 하신 것이었습니다. 과거 우리는 그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았습니다. 현재도 받고 있습니다. 미래에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환난과 시험을 만날지라도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도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마십시오. 위대한 하나님의 군사로 원수들과 맞서 용감히 싸우십시오. 그것을 통해 마치 중과부적(衆寡不敵)처럼 다가오는 원수까지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한 길 가는 순례자”(A Long Obedience in the Same Direction)의 저자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 목사가 한 가정을 방문했을 때, 마침 창가에 앉아 팽팽히 당겨진 수틀 위에 수를 놓고 있던 성도는 “목사님!, 목사님을 기다리는 동안 제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깨달았어요. 저한테는 이렇게 저를 잡아줄 틀이 없었어요. 저의 감정과 생각과 일, 모든 것이 느슨하고 규모가 없었어요. 제 생활엔 아무런 제한도 없었어요. 저의 현주소를 모르겠어요. 제 삶에도 이런 수틀이 필요해요.”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혼란스럽고 모든 일이 뒤죽박죽일 때, 마음속의 온갖 소음과 동요를 잠재울 필요를 절감합니다.
모든 다툼으로부터 벗어나 머리 속을 좀 정리하고, 차분해지고 싶은 소원을 갖게 됩니다. 국가적인 재난을 만난 시인은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마음의 평안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절망 속에서 오히려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만이 마음의 평안을 유지할 수 있게 하시며, 규모 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유일한 틀이시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 번째 벼룩과 같은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위에 유리가 덮여진 것을 몰랐던 첫 번째 벼룩은 아주 높이 뛸 양으로 발을 힘차게 굴렀습니다. 순간 그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새로운 세상이 아니라 별이었습니다.
몇 번을 반복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두 번째 벼룩은 이번에는 자기가 해보겠다면 더 힘껏 발을 굴렀습니다. 그에게도 새로운 세상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몇 번 해보다가 포기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쭉 지켜보던 세 번째 벼룩은 아예 시도조차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도로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 뻔한 상황에서 괜히 고생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는 이미 유리가 치워진 상태였습니다. 세 번째 벼룩은 해보지도 않고, 자신의 생각이라는 틀 속에 자신의 능력을 가두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떤 틀을 가지고 있습니까? 어떤 환난과 시험을 만난다 할지라도 마음속으로부터 들려오는 온갖 소음과 다툼을 잠재우고 마음의 평안을 유지할 수 있는 틀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규모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틀이 있습니까? 환난과 시험의 때에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영원히 떠나지 않고 지키시고 보호하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잡동사니 같은 모든 잡념을 떨쳐버리고 마음의 평안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틀이십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규모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하시는 틀이십니다. 그러므로 좁디좁은 자신의 틀을 내려놓으십시오. 편협하고 이기적인 틀을 내려놓으십시오. 부정적이고 이기적인 틀을 내려놓으십시오. 대신 온 세상을 다 품을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틀을 마음 가득 모셔들이십시오. 그 틀로 형제와 자매와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그것을 통해 견디기 어려운 환난과 시험 속에서도 마음의 평안을 유지하십시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 당연히 넘쳐야할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