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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등산사 초록] 제주편 7 1969년 1월 국내 첫 적설기 등산대회 열어 1960년대 산악단체 창립과 활동 | ||||
제주도내 산악단체는 앞서 소개한 1961년 제주적십자산악안전대 창립과 1964년 제주산악회 창립을 시작으로 1968년에 오현고등학교 산악부와 한라산우회가 창립됐고, 1969년 제주도산악연맹 창립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구체적인 자료는 없으나 1960년대에 탄생한 산악클럽으로 제주대학 학생회 산하 산악회가 있었다. 학생회장이 산악회장을 임명하는 시기였다. 1968년 3월 오현고교 산악부 창립 1968년 3월 제주산악회 회원이면서 오현고등학교 교사인 김승택이 제주 산악 발전을 위해서는 고교산악부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이 학교에 산악부를 창립했다. 이 산악부 창립과정은 산악부를 새로 창립하고자 하는 고등학교들의 귀감이 될 것 같아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1968년 11월24일부터 5일간 서울법대 산악부 초청으로 설악산을 등반했다. 코스는 용대리~영시동~오세암~봉정암~정상~양폭~신흥사였고, 참가자는 김승택 지도교사, 김태열(교사·섭외), 재학생 3명(현태영·박승옥·현충남)과, 서울법대는 김치선(지도교수), 원호연(기술지도), 임경윤(리더), 정주택, 김종민, 강창환, 오제세, 한부환 외 1명이었다. 이 등반은 제주도 산악단체가 육지의 산을 공식적으로 등반한 최초의 것이다. 1969년 10월14일부터 3일간 역시 서울법대 산악부 초청으로 설악산을 등반했다. 코스는 와선대~비선대~금강굴~마등령~오세암~가야동계곡~봉정암~소청봉~희운각~양폭~비선대였고, 참가자는 김태열 지도교사와 재학생 3명(허철·오성국·안상옥), 서울법대 산악부 원호연(기술지도), 임경운(리더), 이경재(리더), 최현탁, 조경환, 신상규, 이춘삼, 이동렬, 김종민, 지승원, 박경희, 이지욱이었다. 오현고 산악부는 창립 전에 5회의 산악강좌와 3회의 예비훈련을 통해서 충분한 기본지식을 쌓은 다음 발족함으로써 훌륭한 예비 산악인으로 성장하는 토대를 마련했고, 오지(당시로서는)의 고교 산악부가 창립과 동시에 명문 서울대와 합동등반을 추진함으로써 학생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기도 했다. 3년만인 71년 10월에 40회 등산기록을 세울 만큼 열성이었던 오현고 산악부는 어느 것 하나 나무랄 데 없는 고교 명문산악부로 발돋움했고, 튼튼한 뿌리는 오늘날까지도 존립하는 모태가 되었다. 1974년 1월 산악부 출신 졸업생들로 오현등고회를 만들어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으며, 에베레스트등반대에 회원을 참가시키는 등 제주 산악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1968년 5월 한라산우회 창립 한라산우회는 1968년 5월11일 창립했다. 초대회장 부종휴, 부회장 고영일, 문기선, 오용호, 대표상임위원 장승홍, 회원에 강헌익, 조성무, 박병호, 박덕기, 김용길, 현승헌, 김혜옥, 고점배, 김석 등 14명이었고, 창립총회 참석자는 12명이었다. 한라산우회는 ‘제주도 문제는 제주도 사람의 손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이념 아래 모인 한라산 학술조사클럽으로, 한라산 새 등산로 개척, 중산간촌 및 동굴의 학술조사, 민속·역사·주민생활 등 종합적 학술연구 등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특히, 1968년 5월26일부터 3일간 회원 7명으로 구성된 한라산 제1차 학술조사에서는 흙붉은오름에서 흰진달래 3그루를 발견해 학계에 큰 관심을 끌었다. 제주도산 미기록 식물인 흰진달래(높이 40cm)는 크기가 보통 진달래보다 조금 작은 것으로, 부종휴 회장이 10년 전 영실 부근에서 발견한 1그루와는 조금 다른 것이라고 발표했다. 근래에 한라산에서 흰진달래를 처음 발견했다는 기사는 잘못된 것이다. 제2차 학술조사 때는 서부 중산간 한경면 청수리에서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있었던 기와 굽는 자리를 발견했다. 1971년 3월12일부터 4일동안 2차에 걸쳐 애월읍 어음리 속칭 빌레못굴 답사를 끝내고, 3월26일부터 3일간 3차 답사에는 동굴 측량과 촬영을 했는데, 주굴과 가지굴 20여 개를 측량해 길이가 8.2km이며 미측량 구간이 남아있다고 발표했다. 답사 중 4·3사건 때 희생된 시체 5구를 발견해 한때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부종휴 회장은 김녕국민학교 교사로 재직할 때인 1946년 5월 봄소풍을 갔다가 만장굴을 발견했다. 선생과 학생들이 호기심으로 굴 내부를 탐험했는데, 굴 입구에 시체가 있어 공포를 느껴 일단 귀교했다. 그 후 김녕국교 교원들이 탐험대를 조직, 대장 부종휴, 부대장 김병언 등을 비롯한 교원들이 2차, 3차로 탐험을 계속해서 1947년 4월5일 동굴의 전모를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 동굴은 전장 7km, 폭 9m, 높이 20m이며, 동굴을 왕복하는 데 7시간(등화용 석유 7되)이 소비됐다고 적고 있다. 한라산우회는 한동안 왕성하게 활동했지만 70년대 중반에 해산됐다. 1969년 6월 제주도연맹 본연맹에 가입 육지 산악인들과 교류가 활발해짐에 따라 제주산악회는 1968년 1월20일 임원회의에서 논의한 결과 대한산악연맹에 가입할 것을 전제조건으로 회장에게 일임하고, 제반사항(회계년도, 정기총회 일자 등)을 논의하기 위해 1월25일 임시총회를 소집했다. 임시총회에서 제주산악회 회칙 개정과 제주도산악연맹 정관을 제정해 대한산악연맹 가입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제주도산악연맹 가맹단체는 제주산악회 하나뿐이므로 자격미달이었으나 지역특성을 고려해 1969년 6월2일(입회비 납부일) 대한산악연맹이 가맹을 허가해 창립을 보게 됐다. 초대 회장에는 안흥찬이 선출되어 1979년까지 5대에 거쳐 회장을 역임했다. 1969~70년에는 안흥찬이 제주산악회 회장, 제주도산악연맹 회장, 산악안전대 대장을 겸직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제주도연맹을 창립하기까지는 제주도 산악인 김승택과 당시 대한산악연맹 총무이사인 강호기가 많은 역할을 담당했다. 1970년대 이후 제주도연맹에 가맹한 단체는 서귀포 백록산악회, 오현등고회, 표선산악회, 한국설암산악회, 성널산악회, 굼부리산악회, 탐라산악회, 창공산악회, 파라다이스등산스키부, 산방산악회, MBC산우회, 제주대산악회, 제주대직장산악회, 제우산악회, 오름산악회, YMCA산우회, 영천산악회, 거산회, 천지산악회, 제주산업정보대산악회 등이 가입했고, 일부는 탈퇴하거나 제명당한 산악회도 있다. 적설기 전국 대학생 등반대회 제주대학이 주최하고, 제주대학 총학생회가 주관했던 적설기 전국 대학생 한라산 등반대회는 6회를 끝으로 막이 내렸지만, 적설기 등산대회로는 전국에서 처음 열린 대회였고, 세계적인 국제대회로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대회인 만큼 마지막회까지 소개하고자 한다. 제1회 대회는 1969년 1월11일부터 7일간 한라산에서 열렸다. 관덕정에서 개회식을 갖고, 영주정을 거쳐 27림반 박씨표고밭에서 1박했다. 다음날은 눈보라가 심해 개미등 직전 적송지대에서 막영하고, 대회 3일째에는 용진각~정상을 거쳐 남쪽으로 하산하다가 검은솥덕 전에서 막영했는데,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다음날 윗세오름 부근의 심한 눈보라를 뚫고 입승정~큰넷또를 거쳐 무사히 하산해 제주대학 서귀포농학부에 도착했다. 참가팀과 인원은 서울법대, 경희대, 홍익대, 명지대, 우석대, 동아대, 전북농대, 제주대 등 8개 대학팀 46명, 오리엔트캠프클럽 4명, 본부 임원 14명 등 64명이었고, 종합우승(국회의장기)은 서울법대산악부가 차지했다. 후원기관은 문교부, 중앙일보사, 대한산악연맹, 제주도, 제주산악회, 제주지역사령부, 제주시, 제주방송국, 남양방송국, 제주신문사, 제남신문사였다. 심판은 위원장 박철암, 부위원장 김종철, 심판 안흥찬, 김현우, 김승택, 김형희였고, 등반대 본부장 김병일, 부본부장 김철원, 위원 문기선 교수와 제대산악회 OB회장인 박재만 등이었다. 제2회 대회는 1970년 1월5일부터 5일간 열렸다. 대회 코스는 관음사~표고밭~동릉~정상~용진각~탐라계곡~표고밭~관음사 코스였고, 참가팀으로는 고려대, 중앙대, 우석대, 명지대, 춘천농대, 제주대 등 6개팀이었다. 최우수상(국회의장기)은 고려대학교가 차지했다. 심판은 위원장 박철암, 부위원장 안흥찬, 위원은 강호기, 김현우, 부종휴 등이었다. 이 대회 코스의 일부 구간을 ‘학사코스’라 이름 붙였는데, 오늘날까지 전해져 온다. 요즘은 입산이 금지되어 등산할 수 없는 이 코스는 관음사 코스로 입산해 탐라계곡 동쪽 능선을 따라 왕관릉까지 올라가서 정상으로 이어지는 흔히 동릉 코스라 불리는 코스다. 제주산악회가 1969년에 이 코스로 월례등반을 갔다온 기록도 있다. 그러나 등산대회 한 번 열렸다고 코스 이름을 바꾸는 데는 동의하기 어렵다. 한라산에서 대통령기 전국등산대회가 두 번 열렸다고 대통령 코스가 두 개 있어야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제3회 대회는 1971년 1월11일부터 5일간 열렸다. 대회 코스는 어승생~어리목산장~사제비동산~만세동산~윗세오름~정상~토적악~속밭~물장올~견월교~산천단 코스였고, 참가는 서강대, 홍익대, 한양대, 유네스코학생회, 서귀포산악부, 제주대 등 대학생 28명과 본부임원, 취재기자 등을 합쳐 70여명이었다. 종합우승(국회의장기)은 홍익대가 차지했다. 심판은 위원장 박철암, 위원 안흥찬, 부종휴, 김철원, 김현우, 김승택 등이었다. 이 대회에는 일본 근기대(近畿大)가 참여해 참가상을 받았고, 국제적인 대회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됐다. 제4회 대회는 1972년 1월18일부터 4일간 한라산에서 열렸다. 대회코스는 어리목산장~장구목~정상~탐라계곡~관음사 코스였고, 참가팀은 명지대, 홍익대, 진주농대, 제주대 등 대학 4개팀과 서귀포산악회 등이었다. 종합우승(국회의장기)은 명지대가 차지했다. 외국 대학도 섭외했지만 사정상 참가하지 못했다. 1973년에는 10월유신에 따른 대학 휴교조치로 열리지 못했고, 1년 후인 1974년 1월23일부터 5일간 제5회 대회가 열렸다. 제6회 대회부터는 한라백설제로 개명해 1975년 2월9일부터 3일간 열렸다. 대회코스는 어리목산장~윗세오름~정상~영실~제주대학 서귀포농학부 코스였고, 참가팀은 20개 대학 135명으로 대성황을 이뤘다. 그러나 참가팀과 주최측 사이에 편승요금 관계로 말썽이 생겨 제주대학팀만 폐회식에 참가하게 됐다. 제7회 한라백설제는 1976년 1월20일부터 5일간 열릴 예정이었으나 집행부의 사정으로 유산됨으로써 제6회 대회가 마지막이 돼버렸다. 고상돈기념사업회 1960년대에 일어났던 일은 아니지만 ‘고상돈기념사업회’를 소개하고자 한다. 관심을 가진 산악인들이 궁금해하는 사안이기도 하고, 산악인 한 사람의 뜻을 기리는 기념사업회를 만든 것은 처음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제주와 다시 인연을 맺은 것은 대한산악연맹에서 주최하는 ’77 에베레스트 제1차 지리산 훈련등반 때였다. 1974년 지리산 훈련에 제주산악회 양하선, 강경수 회원이 훈련에 참가했다. 양하선의 기억에 의하면 ‘고상돈은 제주도 산악인들을 고향 어른이나 직속 선배를 대하듯 깍듯이 모시는 예의바른 청년이었다. 산악인 이전에 한 제주 출신으로서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과 그의 맑은 심성을 높이 사서 에베레스트를 출발하기 전에 제주산악회 명예회원으로 위촉했다’고 한다. 나이는 양하선이 열 살 위다. 2년 후인 1979년 온 국민의 추앙을 받던 그는 북미대륙 최고봉 매킨리를 등정하고 하산 도중 사고로 생을 달리하고 말았다. 그의 유해는 경기도 광주 한남공원묘지에 안장했다. 그러나 장례식에 참석했던 서울제주도민회와 제주도 산악인들이 ‘사람이 죽으면 고향에 묻히는 것이 바람직한데, 고인과 아무런 연고가 없는 경기도에 묻히는 것은 재고할 소지가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이장을 추진하게 되어 1980년 10월17일 한라산 제2횡단도로변 1100고지로 이장하게 됐다. 이장을 마치고 나서 제주도 산악인들이 고인의 뜻을 기리는 고상돈기념사업회를 만들기로 논의되어 1985년 5월27일 설립하게 된다. 주요사업은 그가 산화한 5월29일 오후 3시30분 1100고지 묘역에서 추모제 행사, 묘역 관리사업, 산에 관련된 사업이었다. 설립기금은 1985년 전 대산련 회장 김용성이 쾌척한 2천만 원(한국장기신용은행채권, 3년)과 기금마련을 위해 안흥찬이 서울 백상기념관에서 그림(묵화)전시회를 열어 판매한 금액과 제주 출신 사진작가 4인(문순화·이경서·고길홍·서재철)이 제주도문예회관에서 사진전을 열어 판매한 금액이 합쳐졌다. 그리고 추모제 때마다 도내 산악회가 부조금 형식으로 낸 자금과 산악인들이 조금씩 기부한 금액 등 여러 방법으로 십시일반 모여 마련됐다. 제주연맹 이사회는 화환이 낭비적 요소가 있으므로 현금으로 부조하자고 결의할만큼 제주도 산악인들이 끔찍이 아꼈던 단체다. 고상돈기념사업회 사업이 제주도에 국한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돼 이를 전국적인 산악재단으로 만들기 위해 (가칭)한국산악문화재단을 만들기로 하고, 1994년 8월 서울로 서류와 자금을 보냈다. 발기인은 김용성, 권효섭, 김장호, 김종선, 김인식, 김운영, 이우형, 이태영, 이인정, 김정희, 이동우, 양하선, 김용구, 강호기, 박용기 등이었고, 발기인 대표에 김용성이 선출됐다. 이로서 고상돈기념사업회는 10년만에 사실상 해체됐다. 산악문화재단을 만들기 위해 서울로 보낸 자금은 3,960여만 원이었다. 금액 중 3,400만 원은 1995년 4월3일 3년 만기되는 한국투자신탁 수익증권저축으로 인계시점은 만기 8개월 전이었고 나머지는 현금이었다. 그러나 (가칭)한국산악문화재단은 재단법인으로 만들기 위해 문화체육부에 서류를 제출했으나 문화체육부장관의 인가를 받지 못해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한국산악문화재단 창립 시도가 무산되는 과정에서 10년이 지나 지금 제주도 산악인들은 고상돈기념사업회를 재건하기 위해 소정의 절차를 밟고 있다. 때문에 조만간 다시 활발한 활동을 펼칠 것으로 예상된다. 1980년부터 현재까지는 제주산악회가 주관해 매년 5월29일 추모제를 개최하고, 봄 가을에 묘역정리와 벌초를 하고 있다. 묘역을 정리할 때는 다른 산악단체가 자진해 도와주기도 한다. 기타 1960년대 산악활동 제주대학 학생회 주최로 1963년부터 매년 추계등산을 실시했다. 코스는 관음사~정상~영실~서귀포 하원을 주로 이용했고, 1966년과 1968년에는 어리목~정상~물장올 코스로 등반했다. 1969년 9월28일부터 1박2일간 YMCA 제1회 오돌또기 등산대회가 있었고, 1972년 6월 제주농고 J·R·C 제3회 한라산 등반기념 페넌트가 있는 것으로 보아 60년대부터 등산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호부터 대전·청주편이 연재됩니다> 구술 안흥찬 60대산회 회원·전 제주도산악연맹 회장 / 집필 진창기 한라산지킴이 부회장·전 제주산악회 회장 |
첫댓글 좋은 자료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