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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중생시기 (베드로가 거듭난 시기)
1973-76년 무렵에 한국 교계를 뜨겁게 했던 논쟁들 중의 하나는 베드로의 중생시기에 관한 것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 문제의 논란은 소위 구원파라고 비난 받던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교회인들은 자신들의 구원문제를 확인해보아야 하며 구원이란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면 구원얻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관계를 갖기 시작할 때 얻어진다는 교리를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쟁점이 되었습니다. 기성 교회에서는 교회를 다니기로 작정하면 구원얻은 것이라는 주장하거나 그런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위 구원파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은 거듭나야 한다는 가르침을 강조하였고 당신은 거듭나셨습니까? 하는 질문이 종종 기독교인들에게 제기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일반 교회들은 교회 다니기 시작하면 모두 구원얻는다는 논리를 내세웠습니다. 일반교회는 그 예로 베드로가 갈릴리 호수가에 있다가 예수님 따라가기로 하고 나선 시점이 구원 얻은 시점이라고 주장하였고 따라서 그와 같이 기독교인들이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였으면 구원얻은 것이라는 논리를 내세웠습니다.
구원파에서는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이 땅위에 사셨던 시대를 살았던 사람으로서 오늘날의 현대 교인들과 상당한 차이가 있고, 성자 예수님의 시대와 성령님의 시대를 걸쳐서 살았던 특수한 시기의 사람이었으며, 오늘날 성령시대의 사람들의 기준으로 본 베드로의 거듭남의 시기는 예수님의 부활 이후 혹은 오순절 성령강림 당시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은 수많은 교회인들이 믿음을 저버리고 세상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경우 등을 예로 들어서 성령이 인간들에게 들랑 날랑 하는 것이 아니라면, 분명 거듭나는 시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양측 주장들은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 이전의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였을 뿐만 아니라, 평소에 무수히 예수님의 말씀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이후에 베드로는 갈라디아서 2장 11절에 나오는 외식의 문제 외에 별다른 육신적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충직한 일꾼으로 살았음을 보여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베드로의 중생시기 논쟁은 당시에 크리스쳔 신문, 기독공보 등에서 많이 거론되었으며 구원파라는 단체는 여러면에서 정죄되었습니다. 그러한 비난의 한 축을 담당했던 사람이 바로 정아무개라는 사람으로 오늘날 하나되는 기쁨이라는 책을 홍보하며 성경을 성경(性經) 으로 만들려는 시도를 하였음은 매우 주목할 사실이며 우리는 세상의 다수를 좇아 사람들을 판단할 것이 아니라(출 23:2), 하나님의 말씀과 양심을 좇아 판단해야함을 이 사건의 오랜 추이는 깨우쳐 준다 하겠습니다.
저는 그 모임군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밖에서 객관적으로 그 논쟁을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기로 결심하면 거듭났다고 가르치는 주장과, 별도로 거듭남의 경험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에 따라서는 구원얻은 그리스도인들의 범위가 현저히 차이가 나고, 참 그리스도인들의 수를 보는 견해가 크게 차이가 나기 때문에 구원의 분별에 큰 차이가 발생하며, 그것은 대화 상대방에게 구원얻어야 한다고 말해야 할지, 당신이 행하는 믿음 생활을 계속하면 천국간다고 말해야 할지 판단키 어려워, 전도에서 큰 차이가 발생하기 때문이었습니다.
(1) 베드로의 경우
마태 4장
18. 예수께서 갈릴리 호숫가를 따라 걸으시며 두 형제 곧, 페트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그물을 호수에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19. 저들에게 이르시되 “ 나를 따르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사람들을 잡는 어부로 삼으리라.”20. 저희가 즉시 그물을 버려두고 그분을 좇으니라.
루카 5장 10절
10 시몬과 동업자이던 야코보와 요한 곧 세베데의 아들들도 마찬가지였더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 두려워말라. 이제부터는 네가 사람들을 사로잡으리라.” 하시니11 저희가 배들을 뭍에 정박시키고, 모든 것들을 버려두고 그분을 좇으니라.
베드로가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고기잡이 하다가 예수님을 만나서 그분을 좇아간 때는 그가 생업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라 나선 때였습니다. 오늘날 모든 기독교인들이 교회다니기로 하고 모든 생업을 버리고 예배당 생활에 전념합니까? 따라서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구원문제를 예배당에 다니기 시작한 때로 정하는 것과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나서 좇아나간 때를 동일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하겠습니다.
베드로는 그의 삶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라 나선 것으로 보이며, 성자 시대인 그때로 보면 그는 그 시점에서 구원을 얻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마태 16장
16 시몬 페트로가 대답하여 가라사대 “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에게 이르시되 “ 네가 복이 있도다, 시몬 바요나야, 왜냐하면 네게 계시하여준 이는 육체와 피가 아니요 하늘들에 계신 내 아버지이심이라.
분명히 이 고백 이전에 베드로는 구원을 얻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 전서 1장
3 송축하리로다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분의 많은 긍휼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에 이르게 하시며,
당시 구원파 진영에서는 이 구절을 들어서 베드로가 말하는 거듭남의 시기는 예수님의 부활 이후였다는 점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구절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가 많은 긍휼을 따라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은 산 소망에 이르게 하시며.. 로 번역될 수도 있고, 이 구절은 일반적인 구원의 진리, 구속의 진리를 설명한 것이지 베드로의 개인적 중생 체험 시점을 말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분명한 것은 베드로의 경우를 예로 들어서 예배당 다니기 시작하면 구원얻은 것이라는 논리는 입증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좇을 때 모든 생업을 포기하고 쫓았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예수를 주로 영접한 사람들의 생명현상입니다.
(2) 마태의 경우
마태 9장
9. 예수께서 거기서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있는, 마태라 이름하는 한 사람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 나를 따르라” 그러자 그가 일어나 그분을 따르니라.
여기서 마태가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은 오늘날 목사들이 흔히 해석하는 것처럼, 예배당 다니기로 결심한 것과는 천지 차이가 있습니다. 당시에 예수님은 한마디로 이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을 전하는 사람이었으며 오늘날 구원파가 비난 받았던 것보다 훨씬 더 이단자였습니다. 그 이단자를 좇기 위해, 안정되고 보장받는 수입이 제공되는 세관원직을 버리고 떠난 사람이 바로 마태였습니다. 마태 또한 보장된 공무원직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아 나선 것이었습니다. 이것 또한 거듭난 그리스도인만이, 행할 수 있는 믿음의 행위가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마태를 보아도, 사람이 예배당에 다니기 시작한 것만으로 구원얻었다고 판단하는 주장을, 그의 주 영점 경험이 뒷받침한다고 볼수 없습니다.
(3) 요한의 경우
마태 4장
21또 그리로부터 나아가, 다른 두 형제들 곧 세베데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들의 아버지 세베데와 배에서 저희의 그물을 수선하는지라. 그분이 저희를 부르시니 22. 저희가 즉시 배와 그들의 부친을 남겨놓고 그분을 좇으니라.
요한은 자기의 생업과 어버이를 버려두고 주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오늘날 요한처럼 예배당 다니기로 결심하면서 생업을 포기하고 부모도 버려두고 복음을 위해 나서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요? 따라서 요한의 경우 또한 예배당 다니기로 결심하면 구원얻은 것이다, 하는 예로는 부적절하다 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오늘날 심지어 소위 거듭났다 하는 사람들 중에도 요한이나 베드로 마태처럼 생업보다도 주님을 좇기를 더 중요시 하는 사람이 오늘날 교회들안에 몇이나 있을지는 매우 의문시 됩니다.
(4) 삭개오의 경우
어떤 분들은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고 영접함으로 곧바로 구원얻었음을 예로 들어 예배당 다니기 시작하면 구원얻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삭개오의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루카 19장
1 그분이 예리코를 들어가셔서 지나가시는데 2 보라, 삭캐오라 불리우는 한 남자가 세무소장으로 있었는데 그는 부자였더라 3 그가 예수가 누구이신지를 알고자 하였으나 무리를 인하여 하지 못하니 왜냐면 그는 키가 작았기 때문이라. 4 그가 앞서 달려가 앞에서 그분을 볼수 있도록 뽕나무위에 올라가니 그분을 보기위함이요, 거기에 그분께서 막 통과하실 것이었기 때문이라. 5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셔서 그를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기를 “삭캐오야, 서둘러서 내려오너라, 오늘 네집에서 내가 머물러야겠다.”하시니 6 그가 서둘러 내려와 기뻐하며 그분을 영접하니라. 7 모두가 보고서 수군거려 이르기를 “죄인인 남자에게 그가 숙박하려 들어가는도다”8 삭캐오가 서서 주께 이르기를 “보소서, 제 소유의 절반을, 주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제가 누구에게서 무엇을 강탈하였으면, 4배를 갚겠나이다.”9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기를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는 그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라. 10 왜냐하면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자를 찾아 구원하려함이라.”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이 대목을 들어서 예수님을 믿기로 마음 먹으면 구원얻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고 교회 다니고 있으니까 그들 모두는 거듭난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삭개오의 경우에도 구원으로 말미암은 삶의 변화가 분명하게 나타나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는 분명 세무서장인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 재산의 절반을 내놓겠으며, 누구에게서 강요하여 뜯어먹은 것이 있으면 4배를 갚겠다고 말하는 사람을 찾아볼수 있겠습니까? 물론 그런 정도의 삶의 변화가 왔다면 저는 분명 그 사람의 구원을 인정하겠습니다. 제가 행위구원을 주장합니까? 행위 구원이 아니라, 구원 열매 곧 열매로 나타나는 구원을 말하고 있으며, 그것은 마태복음 7장 16-23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못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며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 법이 없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마 7:21)
따라서 삭개오의 경우 비록 그가 매우 짧은 시간에 구원얻은 믿음을 증거하였지만 그것이 예배당 다니기 시작하면 거듭난 것이라는 주장이나 분별을 뒷받침하지 아니하며 오히려 분명한 삶의 변화로 나타난 구원을 얻었음을 증거한다 하겠습니다.
(5) 바울의 경우
사도행전 9장
5 그가 이르기를, “ 당신은 누구이시나이까, 주여?” 주께서 대답하시기를,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 이니라. 그런데 가시막대기를 향해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역이라” 하시니 6 그가 떨면서 놀라 이르기를, “주여 제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니, 주께서 그를 향해 이르시기를, “ 너는 일어나 도성안으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마땅히 행해야 할지가 너에게 말하여지리라.”
사도행전 22장
6 내가 가서 다마스커스에 가까워졌는데, 정오경에,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타나나를 둘러비추니, 7 내가 바닥에 엎드러져 한 음성이 내게 말하는 것을 들었으니,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8 내가 대답하기를, ‘주여 뉘시니이까?’ 그분이 내게 이르기를,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이라’ 9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자들은 그 빛을 보면서도, 두려움에 싸여, 내게 말씀하시는 그 음성을듣지 못하였나이다. 10 내가 이르기를, ‘주여 제가 무엇을 행하리이까?” 주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일어나서 다마스커스로 가라, 거기서 네가 행하도록 명령되어진 모든 것들에 관한 것이 네게 말하여지리라.
사도행전 26장
12 그런 중에 내가 대제사장들로부터의 권한과 위임을 갖고 다마스커스로 가는데, 13 한 낮에, 왕이여, 내가 길에서 하늘로부터 태양의 밝음보다 더한 빛이 나와 및 나와 함께 가는 자들을 둘러 비추는 것을 보았나이다. 14 우리 모두가 땅에 엎드리고, 내가 나를 향하여 말하는 한 음성을 들으니 히브리 언어로 말하기를,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막대기를 향해 뒷발질 하기가 네게 고역이라.’ 15 내가 이르기를, ‘주여, 당신은 누구이시니이까?’ 그분이 이르시기를,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이니라. 16 그러나 일어나 네 발들로 서라. 왜냐하면 이것을 위하여 내가 네게 보이었나니, 내가 너를 네가 본것들과 그것들을 위해 내가 네게 보여질 것들의 시종과 증인으로 세웠고,
바울의 경우는 사도행전 9장 6절에 보듯이 주님을 만났을 때 마음에 큰 충격으로 다가왔으며 그는 심령에 떨었습니다. 한글 성경은 이 대목을 빼버렸습니다! 바울은 종교생활을 오래 하여 변화된 것이 아니라, 다마스커스 행 도로상에서 주님을 순간적으로 만나 순간적으로 변화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다메섹 사건은 큰 변화의 출발점이었습니다.
당신에게 있었던 “ 다메섹” 사건은 언제 있었습니까? 예배당 다니기 시작하면서 주님을 개인적으로 만나신 적이 있습니까?
(6) 코르넬리오의 경우
사도행전 10장
44 페트로가 여전히 이 말씀들을 말하고 있는 동안, 성령께서 그 말씀을 듣는 모든사람들에게 내려오시니,45 페트로와 함께온 자들 모두 곧 할례인중에 믿는 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의 선물이 쏟아졌음을 인하여 감탄하니라. 46 왜냐하면 저희가 방언들로 말하며 하나님을 존귀히하는 것을 그들이 들었음이라. 그때에 페트로가 대응하여, 47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은 이사람들이 물로 침례받지 말도록 누가 능히 금할 수 있겠느냐?” 하고 48 저희가 주의 이름으로 침례받도록 그가 명하니라. 그때에 저희가 그에게 며칠을 더 머물도록 청하니라.
이 사건에서도 코르넬리우스 일행은 말씀을 들었고, 그 듣는 도중에 성령께서 임하심을 경험하였습니다. 분명히 어느 시점이 있으며, 그것은 다른 어떤 행위나 변화와도 구분되는 것이었습니다. 한 가지 기억하실 것은 이 코르넬리우스 무리도 예수님 십자가 이전부터 주 하나님을 섬겼던 것으로 보이며 그런 까닭에 10장 초두에 하나님께 진심으로 기도하며, 성령받기 이전에도 천사와 교통한 것을 볼수 있습니다. 이것은 코르넬리우스가 성령받기 이전에도 구약의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됩니다.
이 경우에도 예배당 다니고 있으면 그냥 성령을 받은 것이라든가, 다니기 시작하는 것이 성령받는 것이라는 주장은 근거를 찾지 못합니다.
(7) 요한 웨슬레
요한 웨슬레는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태어나, 성경을 늘 읽으면서 옥스포드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성공회 부사제로 미국에 선교사로 나갔습니다. 그는 가는 도중에 모라비아 형제단을 배에서 만나, 거친 풍랑에도 기도와 찬송으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증거하는 모라비아 형제단에 깊은 감명을 받고 왜 자기에게는 그런 믿음이 없는가를 그들에게 문의하였습니다. 그때 그들 중의 한 사람(슈팡겐베르크)이 물었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가?” 웨슬레 답하기를 “ 나는 영국 국교회의 사제입니다” “ 나는 당신 직업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어렸을때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배웠고 지금은 선교사로 나갑니다” “ 지금 무엇하러 가느냐고 묻지 않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웨슬레는 죽어가는 소리로 말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알고 있습니다”
그뒤로 웨슬레의 버지니아 선교가 실패로 끝난 다음 영국에 돌아갔을 때 그는 피터 뵐러를 소개받았습니다. 피터 뵐러는 모라비아 형제단의 선교사였으며 그는 웨슬레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웨슬레는 그들의 집회에서 1738년 5월 24일 Aldersgate Street 에서 거듭났습니다. 그 사건은 오늘날 전세계에서 성공회, 감리교, 감독교회, 웨슬레안 교회들에서, 기념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예배당 다니기로 결심하면 구원얻는다는 해석이나 주장을 반박하는 사건이라 하겠습니다. 웨슬레는 그 사건 이전에 무수히 교회에 나갔었고, 사제직도 서품을 받았으며, 해외에 선교사로 나갔었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확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가 변화되기 시작한 것은1738년 5월24일 거듭난 이후였습니다.
Wesley returned to England depressed and beaten. It was at this point that he turned to the Moravians. Both he and Charles received counsel from the young Moravian missionary Peter Boehler, who was temporarily in England awaiting permission to depart for Georgia himself. John's famous "Aldersgate experience" of 24 May 1738, at a Moravian meeting in Aldersgate Street, London, in which he heard a reading of Martin Luther's preface to the Epistle to the Romans, and penned the now famous lines "I felt my heart strangely warmed",[10] revolutionised the character and method of his ministry
http://en.wikipedia.org/wiki/John_Wesley
(8) 파스칼의 경우
파스칼은 로마 카톨릭으로서의 생활을 해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누이가 먼저 복음을 받은 것은 아마도 얀센주의자로 불리우는 사람들에게서 였는데 코르넬리우스 얀센은 어거스틴, 칼빈에 의해 영향을 받은 예정론 주의자였지만, 제수이트, 군주제, 교황제도에 반대하였던 점에서, 그리고 복음을 전했던 점에서는 인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얀센주의자들은 카톨릭 안에서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교황 우르반 8세, 인노센트 10세, 알렉산더 7세에 의해 정죄되었으며 모든 신부나 수녀들은 그것을 정죄한다는 문서에 서명하는 것이 강요되었고 특히 파스칼의 누이가 있던 폴 로얄의 수녀들은 군대와 대주교 앞에서 서명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극적인 절충안이 제시되어 타협되기도 하였습니다만 나중에 프랑스왕 루이 14세는 무자비하게 탄압하였습니다. 얀센주의자들이 공화정을 지지하며 군주제도를 반대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http://www.answers.com/topic/jansenism)
파스칼은 이러한 때인 1654년 11월 23일밤 거듭났으며 그의 구원고백은 팡세의 서문에 잘 나와 있습니다.
“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콥의 하나님은 철학자나 학자의 하나님이 아니다. 확신, 확신, 감격, 환희, 평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즉 너의 하나님
너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리라. 하나님 이외의 일체 사물의 망각.
………..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은 그대를 전혀 모르오되, 저는 당신을 아나이다.
원컨대 나 영원히 당신으로부터 떨어지지 않기를 1654년 11월 23일 밤의 각서.”
파스칼의 경우 오랜 종교 생활이 그를 변화시켜 준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듣고 변화된 순간을 맞이하였고, 그때 성령께서 그안에 임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신은 이 순간을 경험하신 적이 있습니까?
이외에도, 마르틴 루터, 죠지 뮐러, 해리 아이언사이드, 고든 폴롱 등 수많은 사람들의 구원간증들이 있습니다만 지면관계상 생략합니다.
(9) 나의 거듭남
제가 거듭남을 경험한 당시의 모든 정황과 생각들을 소상히 쓰려면 많은 시간이 걸리겠습니다만 제가 이미 언급했던 바를 간략히 다시 씁니다. 저의 구원 간증은 참혹하고 비극적인 순간을 맞이하기 직전 일어난 것으로 제가 함부로 얘기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별로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매우 어려서 교회를 몰래 조용히 다녀 본적이 있다가, 고교시절부터 본격적으로 다녔습니다. 그 동기는 1967년에 있었던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적은 수에도 불구하고 승리하는 것이 저를 주목하게 하였으며, 그뒤로 레온 유리스의 영광에의 탈출이라는 책을 읽고 많은 감동을 가졌고 그리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섬기는 여호와에 관하여 알고 싶어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여호와의 증인이 여호와에 관하여 가장 잘 알것이라고 생각되어 거기에 나가기 시작하였는데 그들이 성경을 좀 억지로 푼다는 생각을 갖게되었고 그들에 의하면 안믿는 경우 죽으면 소멸된다는 말을 듣고 그렇다면 안믿고 소멸되어 없어지는 것도 좋은 것이라 생각하고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뒤로 성결교회라는 곳에서 세례문답을 거쳐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뒤로 저는 교회안에서 고등부 학생회의 임원이며, 여러 활동들로 교회 생활을 하였습니다. 고교 시절 교회 나가기를 한번도 걸른 적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때 저는 항상 하나님은 존재하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나의 것이 되지는 못하였습니다. 성경을 보아야지 하면서도 항상 뒤로 미루어지는 삶이 계속되다가 대학 3학년때 마침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대학 3학년 여름 방학 동안에 저는 매우 심각한 고민에 빠졌으며 그것은 이 세상 모두가 부패하였으며, 죄로 가득하였고 인생들은 이기적이어서 남을 생각할 겨를이 없으며 또한 그들은 어디로 가는지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과 나자신도 그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는 결론이었습니다. 저의 고민은 이 세상의 무엇이 없어서가 아니라, 세상에서 정의를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었으며, 저는 소위 자연스러운 것이 정의롭다는 자연적 정의를 추구하였습니다.
결국 저는 두 가지 중대한 의문에 봉착하였는데, 하나는 하나님은 이런 인류의 비극을 구경만하고 있는가? 그분의 해법은 무엇인가? 였으며 결국 저는 세상에서 해답을 찾지 못해 죽을 수 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것은 두번째 질문으로 나아가게 했는데 그것은 “ 만일 내가 죽는다면, 그 죽음 이후의 세계는 이보다 낫겠는가?” “ 만일 낫지 않다면 죽음을 연기해서라도 해답을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과연 죽음 이후의 세계가 있는가?”“ 없다면 천만 다행인데 죽음 이후의 세계가 있고 그 세계가 이보다 나쁘다면 어찌하겠는가? “ 등의 의문이었습니다.
모든 고민 끝에 저는 결국 1973년 9월 5일 수요일에 광화문 네거리에서 폭탄으로 자폭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한 신문사와 제 친한 친구에게 전해줄 유언의 멧세지는, 인류 세계는 썩었고 희망이 없으며 인생들은 속고 있다, 나를 따라 자폭하라, 는 멧세지를 쓰려고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미 그 이전에 폭탄을 제조해본 경험을 갖고 있었으며 저는 제가 만든 폭탄을 나무 밑에 묻어두고 폭파를 성공적으로 실험해본 경험이 있었습니다.(저보고 어떻게 만드는지 물어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점화장치를 직접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그일을 수행하는 것은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8월 하순 저는 을지로 4가 화공약품 상가들을 기웃거리다가, “ 하나님이 과연 아무 일도 안하시고 이 세상의 비극을 구경꾼으로 구경만 하고 있을까? 과연 그렇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 하는 의문이 계속 솟아났으므로 저는 마지막으로 어느 교회에 나가 최후의 상담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그곳은 제가 그동안 다녀본 100여개의 교회들 중의 하나였는데 그동안 저는 진리와 진실을 찾아서 무수히 많은 교회들, 카톨릭, 그리스 정교회, 루터파, 원불교, 불교, 장로교, 감리교등을 다녀보았습니다. 그 교회에 나간 것은 1973년 9월 2일이었으며 저는 그 교회에서 예배가 끝난후 담임목사와 상담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 수요일 곧 1973년 9월 5일에 광화문에서 자폭하려고 만반의 준비를 진행중이었습니다.
그날 그 교회에서 목사가 설교하는 중에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읽도록 요청하였습니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읽을 때 왜 내가 이 사실을 몰랐던가? 하고 탄복하였습니다.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 “내가 지금 사는 삶은 나를 사랑하사 내대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안에 사시는 것이라”이 말씀이 바울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적용되는 것이며 저에게도 당연히 적용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제가 3일후에 자폭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날은 제 생애 가장 기쁜 날이 되었습니다. 그날 밤 저는 극히 홀가분한 마음으로 기쁨 가운데서 지냈습니다. 저는 그 날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로 하나님은 수천번, 저에게 그 사건을 기억나게 하셨으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를 위해 피흘리시고 죽으심으로, 십자가 사실을 이루심으로 그 참혹한 죽음으로부터 저를 구원하셨음을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때에 저는 거듭났던 것입니다. 제가 이전에 세례도 받고 교회 생활을 했던 그 믿음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새생명이 제게 임하였던 것입니다. 지금도 제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그때 시점까지로 돌이켜 생각나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앞에 그날은 제가 변화되기 시작한 출발점이었습니다.
또 한편으로 저에게는 과연 하나님은 살아계시구나! 하는 것을 실감하게 해주는 날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자폭하려는 그 위기의 순간에 그분은 저에게 나타나셔서 올바른 교회로 나가서 그 필요한 복음의 말씀을 듣게 해주신 다음 그것을 깨닫게 해주심으로 저를 죽음의 위기에서 구하셨던 것입니다. 그 날이후로 주 예수 그리스도는 저의 영적 구원자일 뿐아니라, 육체적 구원자가 되셨으며 저의 나머지 삶은 그분의 은혜로 말미암아 덤으로 거저 살아가는 삶이 되었습니다. 제가 그분을 언제라도 잊을수 있겠습니까? 누가 저에게 하나님은 살아있지 않다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해오면 그것을 들어볼 가치가 있다고 제가 생각하겠습니까?
누가 저에게 예배당 다니기 시작하면 구원 얻은 것이라고 말한다 해도 저에게는 분명한 경험이 그것을 반박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왜냐하면 제가 그저 교회다니는 생활을 믿음으로 생각했던 그 믿음은 죽음으로 끝났기 때문입니다.
(10) 결신자와 작정한 자
오늘날 많은 설교가들, 목사들은 믿기로 작정한자, 결신자, 믿기로 결심한 사람들은 성령으로 거듭난 것이며, 그들은 구원받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이런 판단 기준은 매우 위험할 수 있습니다. 구원받지도 않은 사람들을 구원얻었다고 판단해주어서 그 다음엔 그런 사람들이 실제로는 구원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지옥으로 가버린다면 그렇게 판단해준 사람의 책임은 엄청나다 할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은 믿기로 작정하였다는 것을 공표하고 초신자가 과연 거듭났는가? 를 분별하여 신앙에 도움을 주려 하지도 않습니다. 어떤 교회들은 “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저는 그것을 믿습니다. 아멘” “이제 믿음으로 저는 구원얻었습니다. 믿으니까, 성령님께서 오셨습니다, 아멘 할렐루야!” 이와 같은 공식으로 반복하여 믿게 한다음 구원얻었다고 선포합니다. 이런 방식은 마치 성령을 인간의 결심에 따라 만들어내는 공식이 됩니다. 성령은 살아있는 인격체이며 우리 모두의 운명을 주관하시고 좌우하십니다. 그런 분이 인간이 결심하면 생겨나고, 기분이 나쁘면 사라지는 것이 되는, 그런 성령님이 아닙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물량주의로 기울어서 교회 성장을 사람들 수, 건물 높이로 판단하기 때문에 그런 구령방식을 쓰고 있습니다.
거듭남은 물세례 받았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물세례를 받았지만 그것은 죽음으로 끝나게 되어 있었습니다. 세례는 성경적으로 합당하지 않으며, 침례가 옳다는 것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침례는 진정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의 간증을 통해 믿음을 공표하고 확인한 다음 교회 모임에 영접되기 위하여 받는것입니다. 침례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 얻은 사람이 침례를 받는 것입니다.
(11) 부르심의 상태
그렇다면 오늘날 수많은 현대 교회인들은 어떤 영적 신분상태에 있을까요? 그들의 모두 혹은 거의 대부분은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고, 교회생활을 했으니까, 구원을 얻었을까요?
아니면 반대로 제가 제시한 수많은 사람들의 구원의 확신, 거듭남의경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 그러한 경험들이 없는 다수의 현대교회인들은 거의 모두가 지옥으로 향해가고 있을까요?
우선 우리는 우리 모두가 전체적인 센서스를 조사한 것도 아니며 우리가 직접 면담한 기독교인들은 전체의 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최종적이고 포괄적인 판단은 주 하나님만이 하실 것임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너 자신을 시험하고 성령이 우리안에 거하시는지를 시험해보라고 말씀하시며(고후 13:5) 전도인의 사명을 다하도록 말씀하시므로 (딤후 4:2) 상대가 구원얻었는지 못얻었는지를 분별할 줄 모른다면 정상적인 전도나 이미 구원얻은 성도에 대한 권면과 격려를 해줄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수 있는 한 올바른 분별을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할 것입니다.
우선 첫째로 수많은 기성교회들 안에 있는 신자들 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언제 어떻게 구원얻었는지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거나 제대로 표현 설명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들중에는 위에 예로 든 경우처럼 구체적으로 구원얻은 경험을 기억하는 경우들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할머니들 중에서 그런 믿음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둘째로 현대교회의 많은 사람들 중에는 로마서 8장 30절에서 말하는 부르심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자기를 드려 하나님앞에서 의롭다 하심(거듭남)을 얻은 것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한번 하나님을 인정하였고(긍정적 인식) 또 하나님을 찾는다고 끝없이 반복된 종교생활을 하고 있기에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의 대상으로 남아있습니다. 이런 사람들 중에는 중년이 넘어 인생의 무상함을 더 느끼고, 자신의 연약함과 하나님을 믿을 필요를 더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성경을 읽고 변화됨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직장생활을 마치고 은퇴 생활을 하면서 그때에야 전적 헌신함으로 구원을 경험합니다. 다만 그것이 구원인줄을 깨닫지 못할 수 있습니다.
어떤이들은 임종에 임박해서야 하나님께 진정으로 자신을 드려서 구원을 얻습니다. 이 경우 벌거벗은 구원이 되는 것은 다음 세상에 하나님 앞에 보일 의로운 삶이 전혀 없고 단지 영혼만을 구원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그래도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로마서 8장
30 또 그분이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셨고, 그분이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하셨고, 그분이 의롭다하신 그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하셨느니라.
즉 그들은 현재 상태에서는 부르심에 머물다가 나중에야 겨우 구원을 얻어 의롭다 하심을 얻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롭다 하심이 바로 이신칭의,의 거듭남을 의미한다는데 모두 동의하실 줄 믿습니다.
셋째로 현대교회인들 중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은 구원얻지 못한 상태에서 인생을 마칩니다! 거듭나지 않았으면서도 종교인, 기독교인들로 살아가며 이런 사람들은 설마 내가 지옥가겠느냐? 하면서 장로 목사, 집사 등의 벼슬들을 믿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마태 7장 21-23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선지자 노릇을 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구원얻지 못하였으며 죽을 때까지 구원을 받지 못하였으면서도 구원얻었다고 착각하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때에야 헛다리 잡은 것이 드러납니다.
마태 복음 7장
21. 나더러 “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할지니 22. 많은 사람들이 그날에 내게 이르되 “ 주여, 주여, 우리가 당신의 이름으로 전도하며 당신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당신의 이름으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때에 내가 저희들에게 선언하여 말하기를 ‘내가 너희를 도대체 알지 아니하노라! 무법을 일삼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따라서 오늘날 현대 교회인들은 속히 자신들의 구원문제를 명확히 함이 합당할 것입니다. 당신의 믿음은 확실합니까? 당신은 명확히 거듭나셨습니까?
(12) 구원감별사 - 구원의 분별은 가능한가?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 후서 13장
5 너희는 너희가 믿음에 있는지 스스로를 시험하고, 검증하라. 너희가 실격되어 있지 않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안에 계신다는 것을 너희 스스로가 알지 못하느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심을 깨닫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3 그리고, 함께-멍에 맨 신실한, 너에게도 청하노니, 기쁜소식에 클레멘토와 나의 다른 동역자들과 더불어 나와 함께 힘썼던, 그녀들을 너는 도우라. 그들의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바울은 어떻게 클레멘토와, 순투케와 유오디아 등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줄을 알았을까요? 그들의 믿음의 고백과 체험 간증, 믿음에서 나온 모든 행위들을 보고 그런 분별을 할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예수님의 분별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 8장
30 그분이 이것들을 말씀하시니 많은사람들이 그분을 믿었더라.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만일 내 말에 거하면, 너희가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32 너희가 진리를 알것이니,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내 말에 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요? 그들은 그분의 말씀에 거하는 믿음을 갖지 아니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유대인들이 답했습니다.
“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아무에게나 어느 때에도 종노릇 한 적이 없거늘, 어떻게 너는 말하기를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이에 예수님은 답하십니다.
37 나는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희 속에 내 말이 있을 곳이 없으므로 너희가 나를 죽이려하는도다.
예수님은 여기서 놀라운 폭탄 선언을 자기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아셨을까요? 예수 그리스도 앞에 인간들의 마음 속은 마치 유리창안의 사물들처럼 투명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자기를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마음 속을 훤히 알고 계셨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41절 … 그러므로 저희가 그분께 이르기를 “우리는 음행으로부터 나지 아니하였고, 한분 아버지-하나님을- 가졌느니라.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아버지는 한분이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했던 그들의 고백은 예수님을 만난지 얼마 안되어 나온 것이니까, 그것은 거짓이었다고 말할지 몰라도 그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섬기며 그분이 아버지이시라고 고백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들은 적어도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있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인정하시지 않습니다.
42.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 아버지가 하나님이었더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왜냐면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고 왔음이요, 나는 결코 스스로 오지 아니하였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라. 43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너희가 나의 말을 능히 들을 수 없기 때문이라. 44 너희는 마귀 아비에게서 나와 있으니, 너희 아비의 정욕들을 행하기를 원하도다.
예수님은 여기서 또다시 놀라운 선언을 하십니다. 너희는 마귀아범에게서 나와 있다고!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마귀 아범에게서 나온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의 마지막 행동을 보십시오.
59 그러므로 저희가 돌을 들어 그분께 던지려하니 예수께서 숨어 성전으로부터 나가시며, 저희 가운데를 지나 가로지르시사, 그리하여 지나가시니라.
그들은 과연 예수님을 죽이려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진단한 것은 옳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8장 30절에서 자기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앞으로 믿음 생활 잘 하시오, 교회생활(회당 생활) 열심히 하시오, 하지 않았음을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인간들의 마음 속을 투명한 유리상자 속을 들여다 보듯이 들여다 보십니다. 인간들의 종교생활이 진정한 믿음을 반영하지 못합니다.
오늘날 그러한 종교인들인 기독교인들이 무수히 많으면서도 그들 중에 진정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은 참으로 서글픈 일입니다.
어떤이들은 인간들이 어떻게 구원얻었는지 여부를 알수 있겠느냐? 하나님만이 알수 있는 것이 아니냐? 하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누구도 구원얻었는지 여부를 모른다면, 하나님앞 심판대 앞에 가서야 자기가 구원얻지 못하였으며 지옥으로 던져지게 된다는 것을 안다면 얼마나 큰 불행이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인생들에게 미리 자기 스스로를 점검하여 보고 참 믿음을 갖도록 길을 열어놓으시지 않으셨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마태 7장 16-23절에서 말씀하시는 바가 아니겠습니까?
마태 7장
19.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울 것이니라 20. 그러므로 그들의 열매들로 그들을 알아보리라. 21. 나더러 “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할지니
당신은 삶의 변화가 시작되었습니까? 그것은 당신 마음 속 깊은데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깨달음으로 시작됩니다.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사역을 마음 중심에서 변함없는 진리로 깨닫고 믿을 때 시작됩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당신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매달리사 피흘리고 죽으셨습니다. 그로 인하여 당신의 모든 죄값은 지불되었으며 당신은 모든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사함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변함없는 진리로 믿어지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구원을 얻으신 것입니다!
요한 일서 5 장
13 이것들을 내가 너희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영원한 생명을 가졌다는 것을 너희가 알도록 하기 위함이며, 너희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도록 하기 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들은 이미 영원한 생명을 가졌습니다. 삶의 변화가 오지 않는 이유들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자기 안에 성령이 계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주의할 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이 진정으로 마음 중심에서, 깊은데서 믿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긍정적 인식에 그치는 경우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아무리 믿는다 해도 성령께서 그 사람안에 계신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교회에 이런 사람들이 아주 많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13) 결론- 베드로의 거듭남의 시기
베드로는 성령님이 강림하셔서 본격적으로 역사하시게 된 오순절 이후의 신약교회 구성원들처럼, 성령님의 시대에 믿음의 생활을 시작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인간으로 오셔서 직접 가르치시던 시대에 주님을 좇기 시작하였으며 그때로서는 예수님을 따르고 그분을 주로 여기는 삶을 사는 한 그것이 구원이었습니다. 따라서 베드로가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모든 생업을 포기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좇았다면 그때 구원 얻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오늘날 현대교회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예수 믿겠다고 말하면서 교회 다니기 시작하면 구원얻은 것이요, 거듭난 것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여 주지 못합니다. 베드로는 그의 삶 전체를 드려서 주님을 좇았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는 사람들 중에 그처럼 생업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좇겠다고 나서는 신자들이 얼마나 될지는 의문입니다.
따라서 현대교회가 거듭남의 문제에 직면하였을 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좇았을 때 구원얻었다는 사실을 예로 들어, 현대 교회인들이 별도로 분명한 주님 영접의 경험없어도, 예배당 다니면 구원얻었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며, 구원을 과연 제대로 경험해본 사람이 하는 주장인지 의문해볼 필요가 있는 주장으로 분별됩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 믿는다는 말을 교회다닌다는 말과 동일시합니다. 그리하여 흔한 질문은 “교회 다니십니까?”이고,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라고 말하면 묻던 사람이 좀 의아해 하는 경험을 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교회에 다닌다는 것은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중심에서 생각하고 모시고 섬기기 보다는, 인간들을 섬기며, 인간들 앞에 체면을 차리며, 외식하는 것과, 목사 바알을 우상으로 섬기는 것이 그 구성요소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거의 모든 교회들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 무엇인지 살피기 보다는 그들의 “ 목사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살피어 교회들을 운영하고 활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친지나 친구 손에 이끌려 교회에 나가고 나간지 1년 지나면 세례(침례가 아님)를 받으며 또 1년 지났고 결혼하였으면 집사벼슬을 받으며, 그런 과정이 신앙을 쌓아가는 것으로 착각하게 하는 교회 구조를 목도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 대하여 예수님은 “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무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라”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마 7:23)
현대교회의 이런 관행은 성경에서 말하는 거듭남과 구원을 전하는 것도 아니며, 성경에서 말하는 침례를 시행함도 아니며, 성경에서 말하는 집사의 직분(딤전 3장 8-13절)도 아닌 것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집사직책은 성경적으로 후보자의 삶을 검증한 다음 부여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런 자격을 갖춘 사람이 없으면 없는 채로 비워두고 기도하는 교회에 하나님은 그런 자격을 갖춘 사람들을 많이 더해주실 것입니다.
따라서 현대교회는 구성원들이 진정으로 거듭났는지, 그들의 간증들을 통해 점검해보고, 그들이 진정으로 구원얻도록 구원의 복음을 전하며, 죄사함을 증거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는 날 그토록 수많은 사람들이 가라지요, 쭉정이요, 거짓 그리스도인들로 판정이 난다면, 그리하여 불못에 던져지는 수많은 불못교인들로 판정이 난다면, 그 교회의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큰 불행이겠습니까?
당신은 진정으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셨습니까?
이 생애 사는 동안 한번쯤 진지하게 과연 그러한가?(행 17:11) 하여 성경을 읽고 분별해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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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글은 제가 작년 8월 경부터 쓰기 시작했는데 이제야 완성했습니다. 제 간증부분은 자세히 쓰려면 20페이지가 넘기에 그냥 간단히 썼습니다. 거듭남은 예배당 다니기 시작하는 것처럼 가시적이고 헐값도 아니고, 그렇다고 인간이 극심한 노력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다만 진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그리스도의 피흘리심과 죽으심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귀한 간증글 잘 읽었습니다.
최근에 저희 모임에 온 신혼부부를 보면서 제가 많이 고민하던 부분이었는데 하토브님의 간증과 더불어 그분들에 대한 마음이 조금 더 진전되었습니다.
이 글을 읽으며 갑자기 한 분의 목사님이 생각이 나서 답글 형식으로 관련 기사를 올려보았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요점은 현대교회인들의 대부분이 구원얻은 것도 아니고, 극단적으로 그들 중에 구원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분명한 구원을 성취한 사람들이 많지 않으며, 나중에야 겨우 구원얻는 벌거벗은 구원을 얻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당수는 구원얻지도 못한 채 얻은 것으로 착각하고 심판대 앞에 서게 되는 사람들이 많으리라는 것입니다.
우와 오늘 드디어 하토브님 간증을 보았습니다 ^^
145 율법 자체가 배격하는 행위 구원, 행위 성화 <--여기에 하토브님 댓글보구왔습니다
제가 변화되기 시작한 것은 1972년 여름에 패혈증에 걸려 병원에 6주간 입원한 때부터였습니다. 그것은 제 인생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저는 44도까지 올라가서 피부가 빨갛게 변하는 정도의 고열에 3일간 시달리고 그 이후에도 39도 정도로 계속 고열에 시달린 후 6주후에 퇴원했을때는 제가 공부했던 모든 것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공부하던 학생에게는 크나큰 충격이었습니다. 그것이 저로 하나님 앞에 무릎꿇게 한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