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전문적인 수행에서의 ‘SATI상기’
기억과 SATI상기의 차이점은 전문적인 수행의 문맥에서 더욱 정확하고도 세밀한 구별을 요구한다.
‘전문적인 수행’이란 간명하게 말해서 ‘사마타/멈춤’과 ‘분석관찰’을 위한 수행 주제에 매진하는 것과 관련되었다는 뜻이다.
멈춤과 분석관찰에서 나타나는 SATI상기의 개념을 정확히 잡고 정확한 번역어를 선택하기 어려웠던 큰 이유는 정형구에서 같이 연결되어 등장하는 ‘바로 알아차리기’(sampajāna)와 혼동하며 구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알아차리기’는 앞에서 ‘자기에게서 일어나는 현상을 그때그때 놓치지 않고 곧바로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라고 개념을 확정지었다.
그렇다면 이 두 단어가 헷갈렸던 이유가 있었을까? 있었다.
첫째는 SATI상기와 바로 알아차리기가 붙어서 정형구로 표현되었기 때문이었고,
둘째는 알아차리기나 바로 알아차리기라는 앎이 상기와 항상 함께 붙어서 일어나기 때문이었다.
첫째로, “세상에 대해 욕심과 근심을 규제하며 열심히 ‘바로 알아차리면서 상기하는 자로’(sampajāno satimā) 거처합니다.”(디2-495)와 같은 정형구는
‘네 가지 상기의 출처들’ 전체에 걸쳐서 쓰였다. 나아가
‘상기하면서···바로 알아차리며’(sato···sampajāno.
각묵 스님은 ‘SATI마음챙기고 분명히 알아차리면서’로,
전재성 박사는 ‘SATI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른 알아차림을 갖추며’라고 번역했다.
한역은 ‘正念正知’라고 번역했다.)라는 표현은 가닥들의 여러 곳에서 수행을 권장하며 쓰였을 뿐만 아니라 부처님조차 입멸 직전까지 사용한 관찰법이었다.(디2-259)
둘째로, SATI상기와 알아차림 내지 바로 알아차리기가 정형구처럼 붙어서 나타나는 이유는 SATI상기가 지원되었을 때라야 알아차림 내지 바로 알아차리기라는 관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법수 제목에서 나타나듯이 ‘네 가지 SATI상기의 출처들’(四念處) 수행법은 상기가 수행의 핵심 원리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네 가지 SATI상기의 출처들 수행법의 관찰 방법은 알아차리기(paññā, 慧)이다.
‘바로 알아차리기’는 알아차리기의 한 가지일 뿐이며 ‘몸-관련’(kāya-gata) 중에서도 행위 관찰법으로 강조해서 쓰였을 뿐이었다.
물론 위에서 말한 것처럼 ‘바로 알아차리면서 SATI상기하는 자로 거처합니다.’가 네 가지 SATI상기의 출처들 ‘전체에’ 걸쳐 쓰였듯이 바로 알아차리기는 알아차림과 호환이 가능한 용어다.
기존 한역으로 지혜 수행이라는 말이고 이 관찰법으로 네 번째 명상(색계 사선)까지 달성할 수 있으므로 네 가지 상기의 출처들은 정혜쌍수의 수행법이다.
그런데 앞에서 밝혔듯이 SATI상기와 알아차리기(혹은 바로 알아차리기)는 같은 개념이 아니다.
“길게 쉴 때는 길게 쉰다고 알아차리고…”처럼 호흡 수행의 관찰법은 알아차리기이다. 하지만 이때 상기가 결여된 상태는 아니다.
‘네 가지 상기의 출처들’이라는 법수 제목이 말해주듯이 SATI상기의 대상 혹은 목적어는 출처들, 즉 몸-관련, 느낌, 마음, 법 등의 네 가지다.
‘네 가지 SATI상기의 출처들’이라는 법수 제목이 말해주듯이 SATI상기의 대상 혹은 목적어는 출처들, 즉 몸-관련, 느낌, 마음, 법 등의 네 가지다.(중요한 내용이어서 문장 반복함)
다시 말해 이 네 가지 대상들을 SATI상기하는 ‘출발점 내지 근거지’(出處)로 삼는 수행법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문적인 수행 문맥에서 SATI상기의 목적어는 보통 생략되어 있다. 수행 주제는 다양해서 일일이 표기하는 것은 번거롭거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목표물인 대상을 최종적으로 포착하는 것은 SATISATI상기가 아니라 알아차림이나 인지함과 같은 앎이기 때문이다.
SATI상기는 근원적으로 수행 주제로의 환기와 수행 주제를 마음에 현전시키는 작용까지를 주되게 담당한다. 정리해 보자면, 수행 문맥에서의 SATI상기는 ‘네 가지 상기의 출처들’에서처럼 자신의 특정 수행 주제를 놓치지 않고 사라지지 않도록 마음에 띄워서 현전시키는 기능을 말한다. 이런 기능은 현재의 순간에 깨어있음(jāgariyā)을 이루게 한다.(상1-262)
다시 말해 자신의 수행 주제를 놓치지 않고 잇따라 상기함으로써 그 수행 주제가 마음에 계속 현전하는 것이 현재의 순간에 깨어있는 삶의 진정한 의미다.
또한 불방일(appamāda)의 삶이기도 하다.(수행 주제에 대한 상기는 반드시 불방일로 이어진다. 그러나 불방일을 상기라고 단정하는 아비담마 철학은 편협하다.
SATI상기는 탐진치와 관련된 상기도 있기 때문이다.
한편 수행 주제에 대한 상기와 수행의 실천에 관련된 제반 활동이 불방일이다. 그러므로 불방일이 꼭 상기인 것도 아니어서 둘은 서로에게 필요조건도 충분조건도 필요충분조건도 아니다.
다만 부처님 말씀이나 수행 주제에 대한 상기는 불방일을 위한 핵심적인 요소일 뿐이다. 주석 387번 참고)이렇게 수행 주제를 상기한다는 문맥에 한해서 “상기는 모두 유익한 것”이라고 말한다.(상5-380)
수행 주제만을 상기한다면 마음에 오염이 유입될 리가 없어서 “상기라는 보호가 마음에 갖추어집니다.”(디3-463)라고 한 것이다. 또한 여인을 봤을 때 상기를 현전시키라는 이유이기도 하다.(디2-268)
그러므로 상기는 외부의 적을 막아내는 수문장이다.(앙4-500) 또한 “상기는 나에게 ‘보습’과 ‘몰이막대’”(상1-573)라는 비유에서 상기는 목표물을 향해 치닫는 작용임이 드러난다.
그러나 아비담마 철학처럼 객관적 실체론에 빠져서 상기를 궁극적인 실재의 하나로 책정하고 언제나 어느 경우나 유익한 요소라고 주장하는 것은 편협한 오류이다. 원한이 생긴 사람에 대해서는 “상기하지 말아야 하고”(앙3-359)라는 말씀에서도 상기가 항상 유익한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 준다.
아비담마 철학을 맹종하는 테라와다 불교는 이것에 대해 다루지 않으며 해명하지도 않고 인정하지도 않는다. 정법보다 자신들의 종파와 논서들을 지키는 일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상기는 알아차림 수행에만 쓰이는 작용이 아니고 멈춤 수행으로도 작용하는 중심 원리다.(대끝-417의 도표21. ‘상기의 짜임새’를 참고할 것)멈춤 수행 중에서도 고정됨(samādhi, 三昧)은 상기의 지배를 받는다고 했다.(앙5-410)순수 고정됨 수행법으로는 ‘열 가지 온통들’(지·수·화·풍, 청·황·적·백, 허공, 식별. 후대 아비담마 철학에서는 ‘식별’을 빼고 ‘광명’을 넣기도 했는데 참고할 만하다.)과 ‘네 가지 무량함들’(자애, 연민, 기뻐해줌, 담담함)
또는 ‘여섯 가지 잇따라 상기하기’(六隨念, 佛·法·僧·戒·捨·天)가 있는데, 이러한 주제를 상기하지 않고서는 수행을 시작할 수도 없고 지속할 수도 없기 때문에 상기의 지배를 받는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때 수행 주제를 파악하는 앎은 ‘알아차리다’가 아니라 ‘인지하다’(sañjānāti, saññā, 想)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보통 생멸변화를 관찰할 때는 ‘알아차리다’를 쓰고 고정된 대상을 파악할 때에는 ‘인지하다’를 쓴다. 다음의 그림으로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위의 그림은 어렸을 적에 한 번은 가지고 놀아 봤을 ‘깔때기 장난감’을 상기의 비유로 나타낸 것이다. 상기는 깔때기에 담긴 탁구공 같은 흰 공을 떠오르게 하는 입김과 같은 것이다. 흰 공은 수행 주제를 상징한다.
떠오른 흰 공의 흰색만을 인상으로 취득하여 집중한다면 순수 고정됨 수행이 된다. 이때 흰색의 인상을 파악하는 앎은 ‘인지한다’(sañjānāti)라고 표현하지 ‘알아차린다’(pajānāti)라고 표현하지는 않는다.
반면에 흰 공이 떠올랐다가 깔때기 속으로 가라앉는 생멸의 흐름을 단락 지으며 나누어 관찰한다면 분석관찰(vipassanā, 위빳사나) 수행이 된다.
이때 흰 공의 생멸을 관찰하는 앎은 ‘알아차린다’라고 표현하지 ‘인지한다’라고 표현하지는 않는다.
상기는 ‘다섯 가지 힘’(믿음·정진·상기·고정됨·알아차림) 중에 하나다.
깔때기에 부는 입김의 능력이 능숙하게 일정해져서 흰 공을 일정하게 띄울 수 있듯이, 수행 주제를 언제 어디서나 거듭거듭, 끊임없이 상기하다 보면 상기력이 증장되어 수행 주제가 마음에 일정하게 띄워지게 된다.
이것이 두 번째 명상의 경지다.
이것은 화두 수행에서 득력처에 해당하는데 화두 의심을 애써 잡지 않아도 저절로 화두 의심이 현전하게 되는 경지에 해당한다.(대끝-512. 지금까지 밝혀진 적이 없는주장이므로 신중히 점검해 보길 바란다.)
계속해서 수행 주제에 대한 상기가 이어지면 돌덩이처럼 흔들림 없는 네 번째 명상에 접어들게 되어 있다. 그리고 이때 수행 주제가 네 가지 상기의 출처들처럼 분석관찰에 해당한다면 깨닫지 않으려야 깨닫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것이 불교의 깨달음에 이르는 외통길의 핵심 중에 핵심이다.
상기가 바로 이 핵심 중에 핵심에서 핵심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다시 정리해보자면 어떤 대상이나 내용을 상기하자마자 대상과 내용에 따라 인지함이나 알아차림의 앎으로 동시·발생적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상기하고(나서) 바로 알아차리며’라고 번역해서는 안 되고 ‘상기하면서 바로 알아차리며’ 혹은 ‘상기할 때 바로 알아차리면서’라고 번역해야 한다.인지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放逸, pamāda. 방일은 단순히 일반적인 게으름을 말하는 용어가 아니다. 경에 입각해서 정의하자면, 여섯 범위인 색 · 성 · 향 · 미 · 촉 · 법에 빠져 지내면서 자신의 수행주제를 놓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상4-226, 상6-343) 그러므로 쓸데없는 잡일로 부지런히 활동하는 것도 방일한 삶일 수 있다. 물론 수행주제도 없이 게으르고 태만하게 거처하는 것도 당연히 방일한 것이다. 결국 방일은 허송세월로 이끌고 윤회로 이끈다.
첫댓글 4념처인 정념은 정온(삼매의 무더기)에 속합니다.
즉 알아차림 계열(혜온)에 속하지 않습니다.
기본적인 위치마저 흔들면 바르게 놓을 수 없습니다.
최근에 올린
4념처의 신수관 항목에서
부정관이나 백골관이 신수관에 속하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면서
혜온에 속한다고.........
혹자는 [사띠라고 쓰고 위빳사나라고 읽는다]라고 까지 말하기도 합디다.
@봄봄 지속적으로 지켜 봄-----------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사띠이고
이렇게 지속적으로 지켜 본것을 기억(저장)하는 것도 사띠이고
이렇게 저장된 것이 상기되는 것도 사띠입니다.
@봄봄 부정관은 반조의 지혜입니다.
즉 열가지 인지를 다룬 디34-십상경에 따르면 부정에 대한 지각을 첫번째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인지를 이용한 부정관 중 핵심은 삼법인에 속하는 무상,고,무아인데 이 모두가 '알아차림'을 이용하기 때문에 부정관은 지혜에 속하여
염오-이욕-해탈에 이르게 합니다.
그래서 부정관은 지혜입니다.
봄봄님 의도하지 않게 감정을 상하게 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사과드립니다.
함께 바르게 찾아가는 과정이지 누가 옳고 그르다는 것을 판명하자는 의도가 없으니 널리 혜량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존재가 끝났다 여기서 不淨觀이란
♦ kāyānupassanā paṭikūlamanasikārapabbaṃ (DN 22)
I-4. 몸의 32가지 부위에 대한 혐오.----------
에 대해서 말한 것입니다.
즉 4념처 가운데 신수관 중에서 위 내용을 말한 것입니다.
4념처는 정온(삼매의 무더기)에 속하는 것이 기본 자리입니다.
이것을 기초로 해서 앎-봄(지견이든지 위빳사나든지 사마타든지 아빈야든지 빠린냐든지~ -----------------
@봄봄 기우^^
혹자는 不淨觀에서 觀이라고 나오니 지혜 혹은 위빳사나가 아니가?
본문에서 알 수 있듯이 anu-봄: 쭉 지켜보다.--------라는 표현이지 싶습니다.
@봄봄 kāyānupassanā 는 몸을 잇따라 알아차림으로 passana-panna-anna로 연이어지는 지혜 계열의 '봄'을 의미합니다.
즉 몸을 봅봄이며 정견 즉 해탈의 가치체계를 가지고 봄봄하는 과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