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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코베, 오사카성, 청수사 여행기
2014.3.21일 09.50분 대한항공 부산발 오사카행 비행기에 탑승하여 11: 00분 간사이공항에 도착하여 3시간 30분정도 소요되는 자매클럽인 오카야마시에있는 오카야마기타라이온스클럽으로 가이드인솔로 우리일행 14명은 중형 관광버스를 타고 이동한다.
가이드는 황00(47세 여)인데 부산에 살고 96년 의상전공으로 일본대학을 졸업했는데 외국인의 취업난이 심했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이 많아 취업이 어려웠었는데 지금은 별로 차별이 없다고 한다. 80-90년 사이 연봉이 1/3정도 깍여 한국이나 일본이나 연봉의 차이는 별로 없다고한다.
라이온스행사는 칠구회와 무관함으로 생략하기로 하고 2014.3.22일 1995.1.17일 지진으로 엄청난 피해를 당했던 효고현(兵庫: 무기를 수납하던 창고에서 유래)인구 약150만(일본 6위)의 항구도시 코베로 간다.
코베는 1868년(明治1년) 265년에 걸친 강호막부는 멸망하고, 700년 동안 지속된 무가정치 종말을 가져온 미일화친조약(1854년)과 통상조약에 의해 1858.1.1일 개항된 미국적 정서가 물씬 풍기는 서구형의 아름다은 도시로 오사카항이 국내항을 주로 담당한다면 코베항은 국제항으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환태평양지진대에 속한 일본은 지진이 빈발하는 데 1995.1.17일 새벽 5시46분에 발생한 진도 7.2 판신, 염로 대진진(병고현남부지진)은 진앙이 도시근처였고 진원지가 비교적 지표와 가까웠으며 수직으로 내려 꺼지는 직하형 지진이었기 때문에 약 5,000명의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
당시 참상 중 일부를 복원하지 않고 코베대지진 기념공원으로 조성하여 교육, 관광용으로 전시하고 있다.
- 지진피해현장 : 메모리얼파크
오사카(大阪:비탈판)와 코베(神戶:지게호)를 잇는 한신고속도로는 지진피해당시 두동강 났었으나 시민, 사업가, 시의 협동으로 조기복구 완료하고 2002년 월드컵을 치르면서 말끔히 복원되어 아름답고 매력적인 관광도시로 지진은 흔적조차 없다.
일본에는 이런 복층 도로가 많다고 하는 데 부산광안대교와 흡사하고 부산 자갈치에서 보는 전경과 비슷하다.
일본에는 차이나 타운이 3개 있는데 여기 코베와 요코하마, 나가사키에 있다고 하며 코베차이나타운이 2번째로 크다고한다.
1858년 국제항으로 개항된 후 외국상선의 출입사무와 통역을 해줄 일본 전문가가 거의 없어 외국어 능력이 뛰어난 중국인들이 무역과 회계사무를 담당하기 위하여 많이 유입되었으나 당시 중,일 수호조약이 없어 거주지가 일정하게 제한되었고 당시 지정되었던 지역이 차이나 타운으로 동서 약 300미터 남북 약 100미터의 좁은 거리를 중심으로 거류지가 형성되었다.
-남경로(南京路:난낀마치) 차이나 타운 장안문 앞에서 우리일행
코베의 만두는 특이한 것이 일반적인 만두라는 개념을 벗어나 일본화 된 것으로 가장 유명한 만두가 흑돼지를 껍데기부터 통으로 층층히 수직으로 직 사각형으로 잘라 만두피 사이에 넎어놓은 돼지고기 만두가 유명한데 유명한 집에는 몇 시간씩 장사진을 치며 기다려야 맛볼 수 있다.
코베에서 유명한 음식은 빵인데 일본에서 처음으로 개항된 국제항으로서 외국인들이 집단거주하면서 빵에 대한 소비가 가장 많았던 도시이며, 일찍 개항한 항구도시 답게 일본 동동주인 사케가 유명한다.
섭관정치는 10세기 말에 이르러 그 절정을 이루었는데 권력의 원천은 사유지 즉 장원이었다. 장원 소유주인 영주는 수도에 살았고 관리인이 그 토지를 관리하였다. 관리인 장관(莊官)은 장원 감독, 전답배당, 연공수납, 징수, 치안, 등 그 지방의 호족 중에서 관리인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다른 권력자와 대항하기 위하여 무력사용은 당연한 것이었고, 호족의 수족으로 실제 무력을 행사하는 것은 명주(名主)라는 중소지주 였는데 이들이 호족과 주종관계가 형성되면서 무사집단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무라이는 무사를 가리키는 말인데 이 말은 『사부라우모노: 가까이에서 모시는 자』에서 유래했는데 헤이안(교토) 각 지방의 호족들은 선조로 부터 세습된 토지를 기반으로 그 지방의 유력자로 군림하였으나 중앙으로 올라가서는 귀족들의 신변을 보호하는 정도로 신분이 격하되었다.
1336년 성립된 무로마치바쿠후(室町幕府)는 수호대명(守護大名: 一國또는 수개국의 영주가 되어 강대화 한 것)의 연합정권 위에 수립된 것인데, 이들 영주가 쇼군(將軍)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커 가면서 오닌의란(應仁의 亂:1473년)이 일어났고, 15C 후반부터 전국(戰國)대명화 되어 군웅할거 패권쟁탈의 시대로 발전해 갔는데 그 기선을 잡은 것이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였다.
아래 연표에서 보듯이 1580.3월 오다노부나가는 본원사와 화의하고 동년 8월에 본원사를 불사르고 승려를 몰아내고 점령하였고 난공불락의 성 축조를 계획하였 1582년
6월 2일 교토의 본능사에서 부하인 아께찌 미스히데의 반란으로, 잡혀 치욕스럽게 죽느니 치욕을 면하겠다하여 스스로 기름을 끼얹어 분신자살한다. 용감하고 대담하며 전제적인 성격의 노부나가의 나이 49세였다.
노부나가가 죽은 4일 후 미씨히데를 격파하고 그의 유업을 이은 사람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로 1585.8월 란을 평정하고 천하통일의 대업을 완성하였다.
일본 불교는 옛부터 하나의 커다란 무력 정치세력으로서 세금등으로부터 자유로웠고 많은 장원과 사찰토지를 소유하였기 때문에 사회적 불만세력이나 낭인, 칼잡이 등이 출가하여 쇼군이나 대명의 명령을 듣지 않는 독자세력으로 형성되었는데 노부나가는 막강한 천태종의 엔라쿠사(延歷寺)와 잇코종의 정치적 군사적 중심지인 오사카 본원사(本願寺)를【오사카성은 본래 혼간지(本願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혼간지의 승병은 정말 강하고 용감하였고, 지형상 강과 하천으로 연결되어 외부와의 물자단절이 어려워 노부나가가 1570년부터 10년간 공격을 하였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을 정도로 전략상 유리한 조건을 갗추고 있었다.】 항복시키고 장원과 사찰을 사무라이와 부농에게 분배하고 불교사원들이 전통적으로 행사해오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그리스토교를 장려함으로서 불교를 약화시키고 지배권을 확립해 갔다. 전국 통일이 된 이후 이러한 폐단 때문에 불교는 국교에서 탈락하고 신사가 국교로서 인정되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히데요시는 1536.1.1일 해돋이와 함께 출생(자신의 출생을 신비화시키고 자신의 존귀함을 애써 과시하려는 흔적이다)했다는 데 원숭이와 비슷했다는 것은 사실이며, 사쓰미의 노예 출신으로 노부나가 휘하에서 처음에 마굿간 일은 하다가, 공을 세워 수비대장이 되었고 마침대 1585년 노부나가의 세째 아들을 폐하고 관백의 지위에 올랐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가 이룩하지 못한 천하통일의 대업을 완성하고 영지전봉(轉封) 즉, 공을 세운 다이묘(大名)에게 영지를 수여할 때 반드시 지금까지의 영지에서 완전히 다른 곳의 영지로 이동시켰다.
히데요시는 오사카에 들어온지 전국을 호령할 수 있는 웅장한 성을 만들 작정으로 1583년 9.1일 부터 대규모의 성축조공사를 시작하였다. 20여국의 다이묘에게 공사에 대한 명령이 하달되었고 적국에서 2-3만명이 동원되었고, 돌산에서 잘라낸 돌을 운반하기 위하여 길을 뚫고 바다위에 뗏목을 만들어 운반하기도 했다.
1585년 5층(내부는 9층)의 천수각이 완공되었고, 1586.2월 성을 방문한 히데요시는 눈앞에 항구까지 손에 잡힐 듯이 바라보이는 장면과 요도강의 강물을 끌어 내외 이중으로 된 해자(垓字)를 둘렀으며 본성과 외성을 합치면 주위가 13킬로미터에 달하는 규모로 실로 천하통일의 본거지로써 걸맞는 성으로 탄성을 연발하였다 한다.
현재의 성의 규모는 건축 당시 규모의 1/5규모라고 한다.
1592년1월 (文祿의 役:육군 16만명, 수군 900척) 수길은 국내통일의 여세를 몰아 2회(慶長의 役 :1597년 육군 14만)에 걸처 영토의 확장, 무역의 확대, 대명(大名)의 잉여병력의 축소 등 명분으로 고니시, 가등청정, 소서행장 등을 앞세워 정명가도라는 말도 안되는 구실을 내세워 침략하여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복견성(伏見城)에서 사망하고 유훈에 따라 전군이 철수했다.
전후 7개년에 걸친 조선출병은 막대한 노력과 경비를 투입하였을 뿐, 실패로 끝나고 이 실패로 풍신정권은 붕괴하여 갔다.
우리나라 역사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전쟁전 조선인구 약 650만(서울 20만)명 중 약 250만명이 조총, 기아, 유랑, 질병에 죽어가는 지옥도를 가져오게한 철천지 원수이지만 일본에서는 영웅화 되어있다.
"朝鮮 出兵에 依하여 器具一式이 傳하여 졌는데, 그 後 日本의 出版文化發展에 至大한 貢獻을 하였다. 일본사요론"
- 일본 역사화가 오오타텐요오가 그린 조선 전역개전도입니다
- 동래부사 순절도 (1592.5.15 음력 4월15일)
이슬처럼 떨어졌다 이슬처럼 사라지는게 인생이련가!
세상만사 모두가 일장춘몽이로세!(히데요시가 1598년 8.18일 62세의 나이로 죽으면서 남긴 임종시다)
히데요시는 죽을 당시 금지옥엽 아들 히데요리는 겨우 6세여서 5대로 (大老)등에게 죽는 순간까지 몇번이고 히데요리를 끝까지 보호하겠다는 서약을 받았다. 히데요시 사망 후 이에야쓰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세력을 확대해 갔다. 이에야쓰는 히데요시의 천하통일전쟁에도 참여하지 않았고, 조선출병에도 참여하지 않아 서일본의 다이묘들이 큰 피해를 입었으나 자신은 전혀 손실을 입지 않고 힘을 축척할 수 있었다.
히데요리를 추종하는 미쓰나리가 주축이되고 고니시, 히타치(영지는 동쪽에 있으나 서군에 가담) 등이 가담한된 서군과 천하재통일의 대망을 가진 이에야쓰가 주축이 되고 가토(영지는 큐슈 지방임) 등이 가담한 동군이 천하 재통일을 위하여 전투를 하게 되는데(동군 서군은 이에야쓰 측과 미쓰나리 측의 구별을 하기위한 명칭일 뿐 영국(嶺國)의 지리적 위치와는 일치하지 않았다.) 1600년 9월 14일 난공불락의 관문인 세키가하라에서 동군 10만 서군 8만명이 집결하여 천하가 걸려있는 대결이 시작 되었고 9월 15일 결국 상업, 즉 은(서군)경제와 농업 즉 쌀 경제(동군)의 전쟁은 쌀 즉, 농업을 숭상하는 동군의 승리로 끝났다.
- 모형 깃발 송평(松平)은 德川(도꾸가와)로 성을 바꾸기 전의 도꾸가와 이에야스의 姓(성)이다. 일본은 성 마음대로 바꾸어도 문제가 없다.(처갓집으로 양자가서 처가성을 쓰는 경우는 현재도 많다.) 現 아베신조(安倍晉三)의 祖父 조선의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키(安倍信行)는 "우리는 조선을 떠나지만 식민의식을 심어놓았음으로 서로 이간질 하면서 결국에는 다시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아베신조의 外祖父 기시 노부스케(岸信介)는 식민지 건설을 설계하고 1960 수상시절 집단자위권행사로 자위대의 전쟁참여를 주창하다 퇴진했던 사람이다. 아베의 친동생 기시 노부오(岸信夫)는 외무장관을 지냈던 사람으로 형제가 兄은 아베(安倍)姓을 동생은 기시(岸信) 姓을 쓰고 있다. 현 일본 수상 아베는 자신의 조부와 외조부의 못다이룬 꿈인 군국주의와 제국주의 부활을 실현하기 위하여 억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
이에야쓰의 동군이 승리하고 쇼군(將軍)의 지위에 올랐으나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가 진을 치고 있는 오사카성이 눈에 가시 같았는데 트집을 잡아 이에야쓰측의 20만군과 세끼가하라전투에서 패전해서 찬밥신세이던 몰락 다이묘병사 10만이 오사카성을 깃점으로 오사카 겨울전투에 돌입한다.
난 공불락의 오사카성은 끄떡도 하지 않자 이에야스는 강화조건으로 오사카성의 바깥해자를 메우는 조건으로 강화체결하였는데 이에야스측은 바깥해자 뿐만아니라 안쪽해자까지 메워버리고 군사해체할 것을 강요하자 선전포고로 간주되어 다시 1615년 오사카성의 여름전투가 개시되고 히데요리 측의 30만 대군이 분전하였으나 오사카성은 함락되고 히데요리는 자살한다.
대판성을 건축하는데 석재의 조달 루트로 크고 작은 약 50만개의 돌이 가공 운반되었다.
지도상의 岡山이 오카야마시로서 여기서 최고 큰 거석이 채굴되어 오사카성 정문에 안치되었다.
오카야마시에서 오사카까지는 관광버스로 약 3시간의 거리다.
樓門 내측 정면에 있는 문어(枡)모양의거석으로 풍신수길의 그림자를 지우기 위한 재축성(1624년)을하면서 도쿠가와 히데타다(도쿠가와이에야스의 아들)는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경쟁적으로 큰 돌을 바치겠끔 한다. 이런 거석들은 다이묘들의 영지에서 채굴가공되어 배로 실어와서 둥근 통나무위에 얹어 소나 사람이 끌어와 운반한 것으로 그림으로 설명되어 있다.
이돌은 오카야마(혼슈와 시코쿠섬이 만나는 지점 즉 오사카와 키타큐우슈우의 중간지점에 위치)의 번주 이케타 다타오가 이누시마(犬島)에서 가져온 화강암으로 면적59.43평방미터. 설명서에 의하면 약 108톤이라고 한다
【국화와 칼】은 일본의 정신세계를 가장 잘 분석한 보고서로 2차 세계대전 태평양전쟁 에서 미국에 패전한 후 미국무성에서 일본의 국민성을 알아야 통치를 하겠다는 필요에 의하여 루스베네딕토라는 하버드대학교 여자교수에게 외주주었던 보고서로서 루스베네딕토는 일본에 한번도 가 본 사실이 없는 상태에서 미국 거주 일본인들이나 기존의 책 등을 통해 보고서를 작성했음에도 일본의 근본을 가장 잘 나타낸 보고서로 일컬어지는 명저이다.
태평양 전쟁말기 오끼나와섬에 미군이 상륙하는데 중,고등학생들이 죽창을 들고 무모하게 돌진하는 행동이나, 돌아올 기름도 없이 일본 본토에서 진주만까지 폭탄을 싣고 비행기로 군함에 자폭하는 가미가제특공대의 행동이나, 군인이 전력상 상대도 되지 않을 정도로 약세임에도 불구하고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버티고 나중에는 군도로 활복자결하는 현상 등 결사 항전하니 미국으로서는 끝없는 무모한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나카사키,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하자 그때서야 천황 히로히토가 항복선언하고 천황이 협조하라고 호소하자 전국민이 미군진주를 환영하는 국기를 날리고 환호하는 이제까지와 전혀 딴판의 행동을 보임으로 해서 미국으로서는 일본을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에 대한 대안으로서 루스베네딕토에게 보고서를 의뢰했던 것이다.
루스베네딕토는 책 제목으로서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극과 극의 두얼굴의 얼굴이 나선형처럼 교묘하게 꼬여 정점을 향하다 약한 이웃이 있으면 찔러대는 서로 상반되는 일본 국민성을 책 제목에서 알수 있듯이 【국화와 칼】이라 했다.아름답고 선하고 향기로운 일본황실의 문양인 국화와 일본 사무라이 닛본도로 목을 내리치는 두 가지 전혀 상반되는 일본국민저변의 일본정신을 분석한 것이다.
책 표지글을 인용하면 【"국화와 칼"은 일본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고전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일본황실 문양인 국화와 사무라이 칼이 의미하는 바는 그토록 예의바르고 착하고 겸손하고 고개를 수그리고 있는 일본 사람들 속에 무서운 칼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고, 따라서 베네딕트는 "국화와 칼"이라는 제목을 통해 일본 사람들의 이중적인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는 평도 있으나, 베네딕트는 국화는 자신의 정신적 자유를 스스로 제약하는 작위적인 의지를 그리고, 칼은 자기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질 줄 아는 이상적인 인간을 상징한다고 보고있다.】
- 일본정신을 긍정적 좋은 쪽으로 평가하는 느낌이다.
- 일본 황실문양의 국화
- 사무라이 인형
- 게이샤
점심이다 1인분 1,800엔이다. 양이 적어서 모두들 배가고파 마트에 버스대고 초밥을 사와서 버스안에서 다시 식사했다.
『 막부 영주에게 있어서는, 농민이란 연공생산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으로 여기고 "백성들은 죽지 않을 많큼, 살 수 없을 많큼" 먹여 다스리려 하였다. 日本史要論』
그래서 일본사람들은 많이 먹지 않는 인자가 몸에 배여 있는 것이다.
- 우리나라는 젓가락을 앞으로 향하도록 간지런히 놓는데 반하여, 일본은 젓가락을 앞으로 향하도록 놓는 것은 결례가 되고 옆으로 수평으로 놓아야 된다. 위험한 뾰쪽한 것을 상대방 방향으로 향하도록 하는 것은 도전처럼 보여 안된다는 배려로 생각된다.
오사카성이 완성된 후 오사카는 천하의 부엌으로서 많은 상인들이 몰려들어 상업의 중심지가 되었고, 장사하는 사람은 오사카사람으로 안주인은 살림 잘 사는 교토사람으로 점원은 친절한 에도사람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오다노부나가는 울지않는 두견새는 죽여버려라(49세에 죽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울지않는 두견새는 울게하라(62세 죽음) 도쿠가와이에야스는 울지않는 두견새는 울 때까지 기다려라(75세 죽음)
그 사람의 성격에 따라서 수명도 달라지게 되는 것인가? 대망(大望)을 품고 굴욕을 참고 끝까지 인내하면서(소설 대망: 이에야스의 일대기를 읽은 적이 있음) 살아남은 이에야쓰가 가장 오래 산 것은 되새겨 볼 일이다.
오사카는 출퇴근 보트 승강장 이 여럿 있을 정도로 수로가 거미줄처럼 발달되어 있다. 부산의 온천천보다 작은 운하 양쪽에 건물이 층층이 들어서 있고, 폭이 작고 길이가 긴 관광 및 통근 배들이 버스처럼 정해진 정류장 마다 손님을 실어 나르고 있다.
- 오사카의 야경
다음날 오사카와 경계를 이루는 교토청수사로 출발한다. 오사카, 나라, 교토는 서로 붙어 있다.
710년 나라의 헤이죠(平城)으로 천도해서 784년 나가오카로 천도한지 10년되는 794년 헤이안으로 천도계획이 수립되고 헤이안(平安:교토)은 평안과 번영을 누리라는 뜻이며 당초 당나라의 장안을 모방하여 중앙에 주작대로를 두고 이를 중심으로 바둑판 모양의 시가지를 형성하고 궁궐의 규모는 동서 1.2킬로미터, 남북 1.5킬로미터로 궁을 북현무에 두고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으로 풍수에 맟추어 도시를 배치했다.
헤이안은 가마쿠라에 막부가 설치되어 무사정권을 세울 때 까지 약 400년 동안 권력의 중심지로 자리하는데 이 400년간의 시기를 헤이안 시대라 부른다. 카마쿠라 막부도 헤이안 내에 있었음으로 명치유신까지 약 1000년간을 일본의 수도로서 역할을 수행했다.
멀리 보이는 탑은 원거리촬영한 것으로 교토탑인데 호텔건물 옥상에 지은 것으로 본체 31미터포함 131미터로서 높지 않지만 교토가 저지대 평야지대로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잔잔히 흐름으로 탑에서 교토 전체를 잘 조망할 수 있다고 한다.
청수사로 가는 길에 게이샤를 만났는데 게이샤는 종합예술품이다. 가난한 집안의 여자애를 5살 정도 어릴 때 입문시켜 10년간 춤 악기 시 시조 등을 수련시켜 게이샤가 되며 게이샤 중에는 외국어도 3-4개 능통할 정도로 수련한다. 외국인 접대시 게이샤 있는 집에서 게이샤는 저녁을 같이하고 노래를 부르고 술을 따르는 데 정해진 값은 없다. 아파트 한 채가 왔다갔다하기도 한단다.
기온거리의 기생들은 오후 6시가 되면 출근하는데 대부분 택시를 타고 온단다. 사진에 있는 기모노를 입은 계이샤는 실제 계이샤가 아니고 시간 당 5000엔을 주면 게이샤복을 빌려 주는 데 외국 관광객들이 관광기념으로 주로 이용한다고 한다.
청수사 들어가는 정문앞에 있는 수태전이다. 380엔을 주고 들어가면 캄캄한 굴이 나오는 관을 잡고 들어가면 어머니의 자궁에서 수태되어 10달간 배속에서 움직이다가 탄생하는 과정을 인체의 굴로 나타내 수태부터 탄생까지의 과정을 체험하는 것을 나타내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굴은 막연하게 두렵기도 하였으나 광명을 보는 순간 다시 태어난 것처럼 특이한 경험을 했던 곳이다. 탄생의 신비로움을 경험하고 이세상에 온 뜻을 한번 생각해보게하는 뜻있는 경험이었다.
音羽山 淸水寺는 1,200여년 전 奈良(나라)시대의 말에 778년 관음보살의 묘지력과 힘으로 세간의 고통을 구제한다는 관음보살을 주불로 개창한 절이다.
당시 사회는 나무관세음보살을 외우면 千手 千眼 관세음보살이 고난에 빠진 중생을 구제해 준다는 사상이 만연할 때이다.
오른 쪽 옆에 신사의 상징인 도리이(鳥居)가 보인다. 신사는 원래 모리라고 불렸는데 이는 숲을 뜻한다.
신사란 원혼에 제를 지내는 전문적인 위령의 역활을 하는 데 825년 지진 853년 천년두로 민심이 흉흉하던차에 863년 독감으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자 귀족과 승려들이 참석하여 독경과 염불, 음악연주, 굿이 벌어지고 마지막엔 성대한 여흥까지 곁들여 지는 성대한 위령제를 올렸는데 전문적인 신사의 출현이다.
일본의 국교는 신사다. 전국에 약 8만 1천개의 신사가 있고, 분사까지 합치면 약 14만개의 신사가 있다. 최초의 신사는 가마쿠라막부시대(1192-1333)의 무사의 수호신사인 츠루오카하치만궁이다. 정초에 약 8천만명이 신사를 참배한다고 한다.
청수사에있는 신사의 이름은 지주신사(地主神社) 로 땅의 신을 모시는 신사인 모양이다. 神宮, 宮, 大社라는 호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신이 수십만개다. 수신, 산신, 풍신, 하늘, 강, 산, 땅. 바위, 숲, 나무, 돌,벼의 생장, 풍어의 신, 싸움의 신, 공부의 신, 입시의 신, 동물, 조상, 사람, 개, 말, 등 등도 생전 또는 사후에 가미(神)으로 숭배되고 제사받는 등이다.
장사번창, 복덕개운, 학업성취, 합격필승, 기예상달, 결혼, 부부화합, 자식점지, 교통안전, 가내행복, 액댐, 무병장수 등등 지극히 현실적인 현세기복을 비는 것이 목적이다.
도쿄의 야스구니신사는 천황을 위해 싸우다 전사한 자들과 2차대전 당시 전범을 합사하여 가미, 즉 신이되어 숭배받고 제사받고 있는 신사다. 일본 수상이나 지도자가 신사참배를 하는 데 왜 한국이나 중국이 일본을 질타하겠는가? 일본은 스스로 전쟁을 일으킨 전범들을 신으로 추앙 존경함으로 인하여 한국, 중국 등 동양 식민지하의 국민들을 분노케하는, 양심을 저버리는 후안 무치한 행동을 스스럼 없이 하더라도 죄책감을 전혀 가지지 않는 이중적이고 아주 잔악한 습성이 있는 민족이다.
전사한 장병과 도오조오 등 전쟁을 일으킨 전범들을 합사할 것이 아니라 분사하여 장병들에 대한 참배는 인정하겠다고 해도 일본은 끝까지 분사하지 않고 전사장병과 전범을 합사하고 아베 등 일본을 대표하는 자들이 전범들에 대하여 끊임없이 참배를 하고 한국 중국 등의 항의를 묵살하고 있는 것이다.
청수사는 권력자들이 불교의 집단 이기주의를 견제하기 위하여 8세기 이후 끊임없이 추진했던 신도와 불교가 서로 배우고 만난다는 신불습합(神佛習合) 즉, 경내에 신사와 불사를 동시에 안치한 기요미즈데라(청수사)로 산비탈에 가로 세로 나무로 지주를 세운 공중에 붕 떠있다. 나라시대에 사원은 평지에 있는데 헤이안 시대에는 자연 경관과 어울어 지도록 자연미를 강조했다.( 敎불교에서 禪불교로 넘어가는 과정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끊임 없이 피어오르는 자욱한 향연 속에서 줄지어 기도하고 있다.
참배자들은 무엇인가를 기원하면서 두 번 절하고 두 번 손뼉을 친 후 다시 한번 절하고 물러나온다.
신앞에 나아가기 전에 몸과 마음을 물로 씻어낸다라는 데미즈야(手水舍)가 있다. 먼저 오른손으로 대나무 국자를 잡고 물을 퍼서 왼손부터 씻은 다음 손을 바꿔 잡고 오른손을 씻은 후 다시 오른손으로 물푸개를 잡고 물을 떠서 왼손 바닥을 오므려 물을 받아 입에 대는 시늉을 하고 직접 마시지는 않는다. 이 정화의식을 '하라이'라고 부른다.
삼중탑(三重塔)은 平安시대초기 847년 창건되었으나 1,220년 소실되고, 현재의 탑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632년에 일본 최대급의 3중탑으로 재건하였고, 1987년 해체수리되었다.
본당의 무대(舞台)는 1633년에 재건되었고 날아 오르는 형상으로 교토시내가 한눈에 조망되는 실로 절경이다.
청수사는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지장보살을 협시불로 하는 죽어 극락세계를 꿈꾸는 절답게 경내에 수목장을 많이 한다. 우리나라는 계울철이면 온산이 뻐꿈 뻐꿈 산소들로 흉측스러운데 수목장이 활성화되어 자연에서 나서 지수화풍(地水火風) 자연으로 돌아가는 장례풍토로 개선되었으면 한다.
일본 초등학생들이 답사차 나왔다. 단정하게 교복을 입고 선생님의 설명에 필기하는 진지한 모습에서 한국과 일본의 교육풍토를 알겠다. 한국에서 초딩들이 견학오면 질서정연하게 모이지도 않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산만하여 관리하기가 거의 불가능 하리라. 일본국민성은 시키는 대로 질서있게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교육을 어렸을 때 부터 공공질서 즉 공공에 민폐가 되어서는 절대 안된다는 교육을 철저하게 시키고 있다. 우리나라는 마우나참사나 세월호 참사처럼 대충으로 때우고 메뉴얼화된 안전수칙도 지키지 않고 엉망인 것을 보면 어릴때 부터 기초질서를 잘 지키는 교육이 필요하다.
무인 집권 700년, 어느 농부의 아비가 위독하여 강나루에서 급하게 배를 타야되는 데 새치기로 배에 올라타자 무사가 목을 베어버렸다는 이야기도 있단다. 당시에는 무사가 법이고 집행자 였었다. 일본은 정부가 발표를 하면 무조건 믿고 따르고, 차선도 아무리 막혀도 자기차선을 벗어나지 않으려 하고, 갓길 주차도 없고, 사고를 당해도 직접 나서는 것이 아니라 현장을 잘 보존하면서 관계기관에 신고를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지하철에 사람이 떨어져도 직접 구하려고 하지 않고 신고하고 현장을 잘 보존하고 관계기관이나 전문가가 출두하면 그때에 협조하는 것을 원칙으로하는 데 우리나라의 경우 강도가 들면 시민이 직접 강도와 싸워 해결하면 용감한 시민으로 신문에 나기도 하는데 일본에서는 그런일은 거의 없다고 한다. 공공질서와 국가의 지시를 믿고 따르고 공공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에 대하여 본능적으로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들의 습성이다. 단, 국외에 대해서는 힘있는 국가에는 아부하고 힘없는 이웃 국가에는 국화와 칼이라는 이중 나선형 나사의 끝부위로 끝없이 찔러대며 이지매로 괴롭히는 것이다.
기온(祈園)제는 교토 3대 축제의 하나로 869년 역병퇴치를 기원하여 창 66개를 신여에 실어 신천원(神泉苑)으로 보낸 것이 축제의 기원이다. 지금도 일본 전통의 게이샤(藝者)를 볼수 있고 가부키공연을 하는 극장과 골통품 기념품을 파는 가게가 줄지어 서있다.
일본돈은 우리나라 돈보다 크기가 약간 작다.
1만엔의 인물은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1835-1901)는 1868년 명치유신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로 서구사상을 도입하여 일본의 힘과 독립을 증진시킨 일본 근대화시킨 사상,출판, 교육을 주창한 게이오 대학을 설립한 계몽가다.
( 탈아론을 주창한 사람으로 조선을 나라같지도 않은 나라- 정한론과 한일합방을 주장한 인물이다)
5 천엔권의 인물은 히구찌 이찌요(桶口一葉 1872-1896) 타케쿠라바 등의 작품을 쓴 명치시대의 근대소설의 개척자로 24세에 요절한 여류작가다.
1천엔권의 인물은 황열병의 치료법을 개발한 병리학, 세균학자인 노구치히데오(1876-1928)다.
500엔 동전에는 오동나무와 대나무, 타치바나라는 귤과의 나무그림, 100엔에는 사쿠라가 50엔에는 국화가 10엔에는 보됴인(平等院)과 뒷면 상록광엽수 그림 5엔에는 벼와 톱니바퀴 1엔에는 어린나무 그림이 새겨져 있다.
지폐 2천엔짜리가 있는데 잘 안쓰는 모양이고 인물은 없고 오키나와에 있는 수례문(守禮門)그림이 있답니다.
- 몇 년전에는 1천엔 지폐에 이등박문이 있더만 지금은 없어졌네요, 한국에서 10만원 권의 인물에 대해 여론조사한 적이 있는데 안중근 의사가 10만원권의 인물로 될까봐 이등박문을 없애버렸는가?
오사카 공항으로가는 길에 차창밖으로 석양이 진다.
사마천의 사기열전에 남월열전 조선열전 서남이열전은 있으나 왜에 대한 열전은 없는 것으로 보아 당시 일본은 태어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고분시대 중기부터 마구류가 발견된 것은 북 아세아의 기마민족의 풍습이 이입되었으리라고 고찰된다. 극론으로는 기마민족이 왜인을 정복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5세기 초부터 백제로부터의 기화인이 많이 이주도래해 왔다. 그 대표적인 것이 秦씨나 漢씨이다. 진씨는 127현민을 인솔하고 도래했다고 전해지며 양잠이나 견직물에 종사했다. 같은 시기에 백제로 부터 왕인과 아직기가 래조하여 논어와 천자문을 헌상한 것이 유교와 한자의 전래였다고 한다. 기화인이 조정에 출사하면서 기록문서를 취급하였을 것이라고 고찰된다. 또 6세기 초에 백제로부터 5경박사 중기에 의박사나 易, 曆박사도 초청되어 천황주변은 지식인인 귀화인에 의하여 점해졌으며, 대담한 추측이 허락된다면, 천황가 그자체도 귀화민족이었다고 할 수 있다."
- 일본사 要論(1981 倉田康夫 著:김종학 譯 교학연구사발행 한국일본학회편 일본문화총서)은 일본중경대학의 창전강부 등 교수들이 일본대학 일본사교재로서 공저한 책인데 1981년 역사학자 김종학님이 우리나라 대학 역사교과서와 일본의 대학 역사교과서를 상호 교환 번역한 책으로 일본사에서 한국사를 꺼꾸로 배우기에 정말 좋은 책이다. 상기 인용문은 p36중 일부를 번역 그래로 인용한 것이며 이 것 외에도 엄청 많은 배우지 않았던 한국의 일본전래 문물들이 즐비하게 있으나 지면관계상 생략함.
과거 역사를 통해 배우지 않는 민족은 미래 역시 암담하다. 임진왜란의 참상을 잊었기에 근세에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지 않았는가? 식민지가 왜 되었는가를 알려면 일본을 철저히 분석하고 대비해야만 하지 않을까? 아베의 망발이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김해공항에 도착하여 해산한다.
우리도 일본에게 무조건 단지(斷指) 삭발 혈서로 삿대질 할 것이아니라 일본이라는 국민성을 정확히 알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여야만 일본이 이성적으로 수긍하고 꼬리를 내릴 것이지 무조건 흥분하여 감정적으로 대응해 봐야 일시적인 메아리로 돌아오는 악순환의 반복적 연속만 되풀이 될 것이다.
지도자들도 일본의 실상을 정확히 알아 국민들의 지도자로서 올바른 방향으로 지도해 나갈일이지 인기몰이로 선동으로 자신의 이름을 일시적으로 정치에 이용할 일은 아니지 않는가?
찬란한 우리역사가 일본대학의 일본사 교과서에 엄청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음에도 한국역사책에는 언급조차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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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구경을 잘 하고 오신 것 같군요! 부럽습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즐거운 여행이었네요.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