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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 서호 엄길리 암각매향명 국보로 빛나다...공양한지 1000년이 되어간 매향, 미륵불 탄생될까
전남 영암군 서호면 엄길리 칠암산(七岩山) 바위에 새겨진 국보 제1309호로 지정된 '암각매향명(岩刻埋香銘)' 이 1344년 마을 앞바다에다 매향(埋香)한지 1000년을 앞두고 있다.
향촌(鄕村) 공동체(共同體)와 미륵불(彌勒佛) 신앙(神仰)을 기원하고자 공양(仰養)했던 향나무를 묻는 의식(義式)에 대한 이야기가 오늘날에도 전해지고 있다. 마을사람들이 뜻을 모아 마을 앞 바다에 향나무를 묻어 마을의 평안(平安)과 번영(繁榮) 그리고 건강(健强)을 기원했고, 사고 없는 '풍어(豊漁)' 를 기원했으며 또한 지신(地神)과 해신(海神)과 바위 신(岩神)이 노(怒)하지 않도록 바랐으며 또한 마을의 공동체 형성에 '불심(佛心)' 이 가득하길 바랐으며 또한 '미륵불이 새로 탄생(誕生)' 되기를 고대했던 심정에서 매향을 했다. 매향을 했다는 사실을 마을 뒷산에 있는 바위에다가 기록을 해놓아 훈날 이 금석문(金石文)에 대한 판독(判讀)과 해석(解釋)으로 정확한 뜻이 밝혀지고 하여 세상에 알려지면서 암각매향명이 크게 주목을 받게 됐다.
매향은 주로 해안(海岸)가에서 이뤄졌다. 향나무를 바다에 묻어둔 것은 바닷물에서 일단 부정 등을 씻어내기 위함과 향불에 쓸 좋은 향나무를 얻기 위한 정화(淨化)를 시키고 나서 1000년이 되면 다시 침향(沈香)했던 것을 꺼내여 부처님한테 향(香)불용으로 바치려는 '매향의식' 이 행하였다.
“우리 마을을 위해 단체행동을 해야 합니다.”
“향촌 공동체를 형성하지 못하면 우리는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뭉치고 또 뭉쳐야합니다.”
“우리 마을에 장애가 되는 일을 막아내기 위해 조직체를 구성합시다.”
“공동의 목적을 위해 여러 사람들의 단체를 구성해야합니다.”
“마을 전통을 잘 유지해나가는 일에 우리 모두가 나서도록 합시다.”
“목적을 달성해가기 위해서는 향촌을 위한 공동체 조직을 만들어갑시다.”
영암 서호 엄길리 칠암산 바위(쇠악바우)에 새겨진 암각매향명(岩刻埋香銘)에는 조성연대, 목적, 장소, 매향집단 및 발원자, 화주(化主) 및 각규(刻圭) 등이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새겨져있다.
조성연대로‘釋迦涅槃後(석가열반후) 二千三百四十九年(2349년) 甲申 八月 十三日(갑신 8월 13일) 一三四四 高麗 忠木王 元年(1344 고려 충목왕 원년)’라고 새겼다.
장소로‘古乙未\末北村◎乙浦(고을말북촌◎을포)’라고 새겼다.
매향목적으로‘香龍華初會供養(향용화초회공양)’라고 새겼다.
매향집단으로‘彌陀契內千萬人(미타계내천만인)’라고 새겼다.
매향 방향과 위치로‘천을미분(千乙未分)’라고 새겼다.
발원자로‘김대◎(金大◎).김금물(金今勿).신일소(申日召).김동화(金冬火).김양병(金洋並)’라고 새겼다.
화주 및 각규로‘급암(及岩), 진암(珍岩), ◎암(◎岩)’글씨를 새겨났다.
釋迦涅槃後(석가열반후) 二千三百四十九年(2349년) 甲申八月十三日(갑신 8월 13일) 一三四四 高麗 忠木王 元年(1344 고려 충목왕 원년)
조성연대는 석가열반후(釋迦涅槃後), 즉 석가모니 또는 부처가 수행에 의해 진리를 체득하여 미혹(迷惑)과 집착(執着)을 끊고 일체의 번뇌(煩惱)와 고뇌(苦惱)의 속박에서 해탈(解脫)힌 것으로 그때 비로소 적정(寂靜)한 최상의 안락(安樂)이 실현된 평안하고 평화로운 최고의 경지에 이른 열반(涅槃.BC 544년) 후(後)의 불기 2349년 갑신년(1344년 충목왕 1) 8월 13일 매향했다.
다시 말하면 석가가 열반한 후 2249년 갑신8월13일에 향나무를 이해의 날짜에 묻었다는 뜻이다.
열반(涅槃)은 불어서 끄는 것, 즉‘불어서 꺼진 상태’를 뜻한다. 마치 타고 있는 불을 바람이 불어와 꺼버리듯이 타오르는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번뇌와 고뇌가 소멸된 상태를 가리킨다. 그때 비로소 적정한 최상의 안락(安樂)이 실현된다. 영원한 평안(平安)과 평화(平和)라고 할 수 있다.
매향에 대해 기록해둔 서호 엄길리 암각매향명은 석가모니가 기원전 544년 열반(涅槃)한 후 2349년(고려 충목왕 1) 8월 13일에 마을 앞바다 포구 부근 갯벌에 매향했다는 기록이다.
참고적으로 석가모니의 입멸(入滅) 연대에 대해 여러 주장이 있음을 말해두고자 한다. BC 485년 2월 15일 열반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남방불교(南方佛敎)에서는 기원전 543년으로 보는가하면 기원전 486년, 386년 혹은 483년 등 다양한데 우리나라와 인도는 기원전 544년을 잡는다.
향용화초회공양(香龍華初供養)
향용화초공양은 향(香)을 피워 미륵불의 위한 첫 법회(용화초회)를 열고 공양(供養)했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56년7천만년 뒤에 도솔천으로부터 미륵보살이 새로운 부처님으로 내려오는데 관불회(灌佛會)의 용화초회(龍華初會), 즉 미륵불의 용화회상(龍華會相)의 첫 법회를 열어 부처님의 탄생 시에 용(龍)이 향수(香水)로 탄생불에게 목욕하도록 향나무를 공양했다는 뜻이다.
고을말북촌◎을포(古乙末北村◎乙浦)
매향 장소 및 시기로 고을말북촌◎을포(古乙末北村◎乙浦), 즉 오래전부터 새(갈매기, 오리, 백로 등)들이 찾아든 북쪽 마을 끝에 있는 ◎을포(◎乙浦)에 미륵불(彌勒佛)의 법회(法會)를 처음 열고 향나무를 공양(香龍華初會供養)했다.
다시 말하면 예(古)부터 새(乙)들이 많이 찾아들던 끝(末)에 있는 북쪽 마을(北村) ◎을포(◎乙浦)에서 천(千)거리의 바다에 부처님이 열반(涅槃)하시고 56억7천만년 뒤에 도솔천(兜率天)에서부터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새로운 부처님으로 내려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처음으로 미륵불(彌勒佛)의 법회(法會)를 열어 향나무를 바쳤다는 뜻이다.
고을말북촌은 지금의 엄길마을을 말한다. 마을 남쪽에 지석묘가 있는데 선시대에는 지석묘가 있는 곳에는 마을이 형성됐었다. 지석묘 쪽에서 봤을 때 암각메향명이 있는 암길마을이 북촌이었다. 고을(古乙) 예부터 새들이 많이 찾아들었다는 뜻이다. 말북촌(末北村)은 새들이 많이 있는 끝에는 북촌이 있고 북촌 쪽에는 ◎을포가 있었다하여 고을말북촌◎을포라 써났다. ◎을포는 지석묘가 있는 곳에서부터 엄길마을 앞으로 작은 냇가가 있다. 장천에 흐르는 내(川)와 지석묘쪽에서 흐르는 내(川)가 만나 엄길마을 앞으로 흐르는 물은 바다와 만나 합류했고 이 부분에 포구가 있었다. 마을에서는 이 포구를 배들래라고 했다. 배들래란 뜻은 배가 드나들던 곳이지만 아마 판명이 안 된 ◎을포의 앞자가 을포로 써놓을 것을 보면 '아' 자가 아닌가 한다. 예전에는 엄길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산 밑이는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많았고 이곳에는 학(鶴) 또는 백로(白鷺)이 많아 날아들었다고 한다. 또한 배들래에 각종 철새들이 많이 찾아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을포가 거위 아(鵝)자를 써 '아을포(鵝乙浦)' 가 아닌가한다. 아를포를 다시 '배들래' 라고 했다. 배가 들어온 곳이라는 뜻에서 순수 우리 말로 그렇게 불렀다.
참고적으로 고을미북촌◎을포(古乙未北村◎乙浦)를 고을말북촌◎을포(古乙末北村◎乙浦)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미(未)와 말(末)에 대해 다르게 금석문을 파악하고 있다. 아닐 미(未)와 끝 말(末)이 글자가 비슷해 바위에 새겨진 금석문을 미인지 말인지를 글자 해석에 대해 혼돈하고 있다. 아닐 미(未)가 아닌 끝 말(末)이 아닌가 판단된다. 미나 말은 방향과 위치를 뜻해 비슷한 의미로 쓰인다. 바위에 새견진 것은 미(未)보다 '말(末)' 에 더 가깝다. 직역을 하면 '예부터 새들이 끝의 북촌에 ◎을포' 가 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말의 갑골문은 '웃머리' 이다. 윗머리로 풀이하는데 '물건의 위쪽 끝부분' 이라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웃머리인 말(末)은 '어떤 곳에 자리잡고 선 물건의 위쪽 맨 끝부분' 을 표현한 것이다. 끝은 '시간, 공간, 사물' 따위에서 마지막 한계가 되는 곳을 말한다. 끝 말(末)의 금문이 '마지막, 차례의 마지막' 이라는 뜻이다.
참고적으로 을(乙)은 새 모양에서 비롯된 을자라는 주장은 을자의 자형으로 살펴 볼 때 타당성이 없다고 한다. 을자는 간지(干支)으로 로 흔히 쓰는 글자이다. 간지자는 실제로 우리 생활 가운데 방향이나 시간 등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 예를 들어 을마사변(乙未事變),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의 을미(乙未)나 을미(乙巳)가 바로 년도를 지칭한 것이다. 을자는 또 십간(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의 '두 번째' 글자이기 때문에 '순서나 차례' 등을 나타낼 때 둘 째의 뜻으로 쓰인다.
◎을포는 엄길리가 아닌 '몽해리 아천에 포구' 를 말하기도 한다. 이는 고을말북촌이라는 데서 추측을 해볼 수 있다. 아천포는 아금니 아(牙), 내 천(川), 개 포(浦)를 써 '아천포(牙川浦)' 라 하고 있다. 몽해리 아천에 시냇가가 있는데 천(川)이 작다하여 '아시냇가' 라 불렀다. 어금니 아(牙)는 갑곱문에서는 동물의 어금니가 맞물린 꼴을 그린 상형자다. 어금니가 서로 맞물리듯이 '맞다' 라는 뜻이다. 여러 정황을 보아 북촌(지금의 엄길마을)에 아을포가 있다는 것으로 해석을 해볼 수 있다. 그래서 암각매향명에서 판독이 안 된 ◎을포(◎乙浦)는 거위 아(鵝) 또는 마을 아(衙)가 아닌가 하는 측축도 해보기도 한다. 아시냇가는 '작은 시내' 라는 뜻이지만 관아가 있었다하여 아자를 따서 아시내라고 한 것으로 판단하기도 한다. 하지만 엄길마을 앞에도 작은 천이 있고 배들레라는 포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북촌은 현재의 엄길마을로 추정되며 ◎을포는 엄길마을 앞으로 배가 들어온 곳이라고 하여 부른 '배들래' 로 심증이 간다. 여기서 매향바위(쇠악바위)에 새겨진 암각매향명의 고을말북촌◎을포 중에 ◎을포의 앞자가 확인이 안 되고 있다. 마을 앞에 작은 천이 흐르는 것을 보아 이곳의 천도 아시냇가의 아자로 추정을 해보지만 그 아자가 마을 아(衙)자 인지 아니면 을포(乙浦)로 한 것으로 보아 '거위 아(鵝)' 자로 추정을 하고 있다. 포구가 있는 곳에 '거위의 새' 가 있다는 뜻으로 본 것이다.
몽해리 아천(牙川)은 내를 앞에 둔 언덕위에 작은 마을이다. 배가 드나들 때는 작은 포구의 '아시내개' 라 불렀다. 아천의 엣 이름은 배의 향국이라고 하여 선불(船弗)이라고 불렀다. 간척사업이 생긴고 나서 선불 마을이 아천 마을으로 바뀌었다. 서남해가 영산강을 거슬러 월출산을 바라보며 하루에 두 차예씩 이곳 서호강의 최상류까지 오르곤 했다. 서호 몽해리 아천을 한자 어금니 아(牙)자를 쓴 것에 대해 이해가 안 가는 부분도 있는 듯하다. 마을이 언덕 부위에 들어서 있으니 언덕 아((阿)자를 쓰지 않고 어금니 아(牙)자를 썼을까하는 의문점이 든다. 하지만 아천을 어금니 아(牙)를 쓰게 된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뭐가 맞물린 것이어서 그렇게 쓰이였는지를 파악해 보면 추론건데 시냇가가 이쪽의 들녘과 저쪽의 들녁이 서로 맞물려 있는 사이에 천을 하고 있어서 그렇게 썼지 않는가 본다. 아천은 '어금니가 맞물린 천(川)' , 즉 어금니가 맞물린 것 같은 천(川)의 형국을 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아천은 학파저수지가 자리하고 있다. 아천의 아자를 어금니 아(牙)자로 한 것은 저수지를 사이에 두고 이쪽 들녘과 저쪽 들녘이 있는 지형을 보면 이해가 가리라 본다.
서호 몽해리는 어떤 마을인가?
서호 몽해리에 관한 행정지명에 대해 살펴보면 몽해리는 영암군 곤이종면(崑二終面)의 지역으로서 바다가 깊고 넓은 들이 있으므로 큰 바다 바대(海大)마을이라 하였으며 곤이종면 사무소(행정 관할 사무소)가 이 마을에 위치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면사무소는 면내 중심부인 장천리 장동으로 옮기고 송호리, 아천리, 복대회와 곤이시면의 신소정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행정구로는 아천, 송호마을이 몽해리1구, 몽해를 2구, 새마을을 3구로, 복대회를 4구로 행정구역을 나눠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몽해는 김해 김극조(金克)씨 후손들이 번영할 수 있는 터를 풍수를 대동하고 이곳에 바닷가 아천포구 앞이 명지라는 권유를 받고 이거하여 엄길리 천안 전(全)씨 부인과 결혼하여 김완장군을 임신할 때 마을 앞 영암만 바닷물이 전씨 부인 치마폭으로 몰려드는 꿈을 꾸었다하여 이 마을을 '꿈의 바다' 라고 부르다가 자손들이 변창, 번영하면서 꿈 몽(夢)자, 바다 해(海)자를 택하여 '몽해(夢海)' 라 부르게 되었다. 이 마을은 서호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서호 몽해리 아천마을의 아시냇가?
아천마을은 고려 초 때에는 반남 박씨가 정착하여 융성해지자 마을앞 소나무 숲 바닷가 바위 위에 정각을 지어 놓고 향유했던 정각 터를 지금도 '강정' 들이라고 불리어지고 있으며 조선조 때에는 낭주 최씨가 살았다. 풍수설에 의하며 배의 형국이라 하여 선불(船弗)이라 불리워 오다가 1940년대 사업가 현준호씨가 서호강 아시냇개에 제방을 축조하므로써 학파농장의 간척지들이 생겨나고 마을 명은 '아시냇개의 명을 따라 아천(牙川)' 이라 불리게 됐다.
아시냇은 아천포, 탈천포로 몽해리, 쌍풍리, 성재리와 군서면 구림리, 모정리, 양장리에 걸쳐 있던 바다의 개이다. 아천은 마을 앞으로 옛날 배가 드나들던 포구였다. 아천의 아는 관아 아(牙)다. 이곳에 관아가 있어 그렇게 했다. 또한 아시냇가라는 이름도 아시내는 작다 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관아가 있어 마을 앞으로 흐르는 천을 관아 아(牙)자를 따서 아시냇가라 했다. 이시냇가가 있는 곳에 포구가 자연스럽게 생겼고 서호에서는 이 아천포(牙川浦)를 통해 배를 고기를 잡으로 나가거나 멀리 목포와 중국 등으로 상선을 통해 교류 및 왕래를 했다. 지금은 학파농장으로 인한 아천포는 찾아볼 수가 없다.
암각매향명에 새겨진 고을말북촌◎을포의 ◎을포는 북촌인 엄길마을 '배들래' 를 말한다.
서호 엄길리 칠암산 바위에 새겨진 매향에 관한 암각매향명에 매향을 한 장소를 '고을말북촌◎을포(古乙末北村◎乙浦)' 라고 적시해났는데 ◎을포는 엄길리 시냇가와 바다가 만나는 지점에 있는 배들래를 말한 것으로 보인다. 간척사업으로 인한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음
아을포(배들래)에서 배를 타고 매향했던 1344년, 미륵불이 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향나무를 공양하기 위해 바다에 묻어두었던 것을 엄길마을 뒷 산에 있는 쇠악바우(바위)에 기록해 났다. 이 바위를 기점으로 어느 방향과 위치와 장소에 매향했다는 사실을 바위에 새겨났다.
엄길 사람들이 이곳 아을포(지금의 배들래)에서 배를 타고 가서 바다에 매향했다는 설과 아천이 있는 몽해리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매향을 하고서 인근 마을인 엄길 칠암산 그 사실을 남겨두고자 매향에 관해 바위에 새겼다는 두 설(說)로 판단하고 있다. 가장 가까운 설은 배들래에서 배를 타고 가서 매향한 것으로 굳히고 있다.
칠암산에 여러 바위가 있다. 그 많은 바위 중에 쇠악바우(쐐기바위))에다 했을까하는 의문이 생긴다. 아마 칠암산 바위 중에서 그 바위가 가장 영험(靈驗)한 바위로 여겼지 않는가 보여 진다. 정자나무를 신으로 여겨 당산제(堂山祭)를 올렸듯이 그 바위도 신으로 여겨 기렸을 것으로 보인다. 나무, 바위, 태양, 물 등의 모든 만물에 신이 있다고 믿었던 '샤머니즘(shamanism)과 토테미즘(totemism)' 의 사상이 있었던 시대였기에 그런 바위를 선택했고 또한 새긴 글씨가 여러 자연적인 피해로 인하여 훼손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또는 부정(不淨)을 안타도록 가려진, 눈에 쉽게 띠지 않는 곳에 새기려고 해 여러 정황으로 봐서 이곳 칠암산 바위(쇠악바우)가 최적이라는 판단을 하여 이곳에 매향(埋香)에 관한 금석문을 남겼을 것으로 판단된다.
고을말북촌◎을포(古乙末北村◎乙浦), 북촌은 지석묘가 지역에서 '칠암산' 암각매향명이 새겨진 쇠악바우가 있는 곳을 말한다. 예부터 북촌마을 끝의 소나무에 새들이 날아 앉았고 또 거위의 새가 많이 날아든 곳의 포구(浦口)라는 뜻으로도 풀이 한다. 배들래의 옛 이름은 아을포다. 을(乙)자가 들어간 지명에는 '을숙도(乙島淑島)' , '을왕리(乙旺里)' 등을 찾아볼 수가 있다. 또한 경상남도 통영시에 딸린 섬인 비산도(飛山島)가 있다. 비산도는 비생이라 불리는 이 섬은 한 때는 거제군 둔덕면 '을포(乙浦)' 로 불렸다고 한다.
바위에 새겨진 다른 금석문을 볼 때 미(未)가 아닌‘말(末)’이 맞는다고 본다. 어떤 문헌에는 말이 아닌 미(未)로 적었는데 틀린 금석문 판독이다. 고을(古乙)은 예부터 또는 오래전부터 새(갈매기. 오리. 백로 등)들이 나무 꼭대기에 앉아 노닐 정도로 많이 찾아든 북쪽 마을(엄길리) 끝의 포구(乙浦)로 풀이된다. 또한 을(乙)은 새(鳥)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새보다는‘천간(天干)’을 의미한다. 을(乙)은 십간의 2번째 위치하는 천간이다. 만물이 싹을 터서 지표에 나온다는 뜻으로‘갑(甲)과 동기이성(同氣異性)’이다. 시기적으로‘양력 3월’에 해당된다. 새로 표현했지만 시기를 알리는 의미로도 글을 새긴 것으로 판단된다.
새 을(乙)은 '굽다' 는 뜻의 '굽은 포구' 라는 뜻이기도 하다.
새 을(乙)은 천간을 뜻하기도 하지만 '새을' 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제비과' 의 새와 거의 흡사해 통용된 명칭이며 보통 '굽다, 일어나다'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을(乙)은 음기(陰氣)가 강한 초봄에 싹이 굽혀지면서까지 싹터서 나오는 모양의 글자로 설명하거나 혹은 새의 튀어나온 가슴 모양의 글자로 설명하고 혹은 굽어 나오는 상황의 표시로 설명해 지천사자(指天事字)로 보기도 한다. 걸식(乞食), 구걸(求乞) 등을 한 예로 들 수 있다. 을(乙)자는 '새' 나 '굽다' 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을자의 사전적인 의미는 새이지만 구부러진 모습이 새와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일 뿐이다. 을(乙)자는 단순히 사물이 구부러진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특별한 의미를 전달하지는 않는다. 다만 단독으로 쓰일 때는 십간(十干)의 둘째인 천간(天干)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을포의 을은 포구가 '굽어지다' 라는 뜻으로 표현할 수 있다. 서호 엄길 배들래를 말하는 암각매향명에 금속문의 ◎을포는 '새들이 날아든 포구' 이기도 하고 포구가 '새의 가슴처럼 굽어져있는 형태' 를 취하고 있다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을포(乙浦)의 을포(乙浦)는 '새가 날아든 포구' 또는 '새처럼 굽어진 포구' 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감골문이나 금문 자형을 살펴 보면 '초목이 굽어서 나는 모양' 으로 해석하고 있다.
고을말북촌◎을포(古乙末北村◎乙浦), 즉 예부터 '새들이 날아들던 곳에 포구' 에 또는 '예로부터 생긴 굽어진 곳' 에 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예전의 아을포란 지명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그때 그때의 상황에 맞춰 지명 또한 달리하여 불렀다. 작은 내가 있다하여 '아시내포' 에서 거의가 날아든 곳이라고 해서 '아을포(鵝乙浦)'로 아을포는 다시 배가 드나든다하여 '배들래' 로 했다.
을(乙)자의 상형문자를 살펴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서호 엄길리 칠암산 바위에 새긴 암각매향명은 어느 마을사람이 아닌 여러 지역에 사는 분들로 한 서호 남촌 사람들과 북촌 사람들이 마음과 뜻을 모아 향촌 공동체를 이루고 공양하고자 향나무를 베어 이곳 아을포 앞다에다 매향한 것으로 추론해 본다.
서호 엄길리 '칠암산(七岩山)' 에 대해 알아본다.
칠암산은 마을 뒷산에 검은 바위가 있는데 이를 '옻바위' 라고 했다. 옻바위가 한자로 '칠암(漆岩)' 인데 칠(漆)자가 쓰기 어려워 일곱 '칠(七)' 자로 바뀌어 '칠암산(七岩山)' 이 되었다. 산에는 7개의 바위가 있어 그렇게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옻바위에서 연류된 것으로 보인다. 이 7개의 바위를 각각 '꺼멍돌(독), 뻘돌, 넓쩍돌, 삐죽돌, 까칠돌, 부싯돌, 선돌' 이라고 한다.
또한 옻바위인 칠암은 원래 '크다' 는 의미에서 바위가 거머 옻 칠(漆)자를 써서'거칠(巨漆)바우' 였다. 거칠바위는 바위가 거칠다고 해서 '꺼칠바우' 또는 '까칠바우' 라고 했다. 바위가 까맣다고 하여 '까막바우' 라고 했던 이 바위는 또한 두 바위 사이에 쐐기를 박아 놓은 것 같다하여 '쇠악바우(쐐기바위)' 라고도 불렀다. 이를 또한 매향 글씨가 새겨졌다 하여 '매향바위(埋香岩)' 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한 금석문이 새겨진 바위를 두드리면 쇠소리가 난데다가 바위가 철(鐵) 성분이 많다하여 '쇠악바우' 또는 '철바우' 라고 했다. 철 성분이 많은 바위가 있다하여 '철암산(鐵岩山)' 이라고 부기도 한다. 이름도 많고 사연도 많은 서호 엄길리 칠암산 바위이다.
서호 엄길리 마을 뒷산에는 큰 바위가 한 눈에 들어올 정도로 산의 터줏대감 노릇을 하며 산의 경치를 아름답게 하고 신비마져 들게 한다. 암각매향명이 새겨진 바위는 두 바위가 마주보며 또 하나의 바위가 중간 사이에서 얹어져 있다. 마치 하늘로 통하는 문처럼 뻥뚫러져있다. 통천문(通天門)인 셈이다.
옛 사람들은 이 바위를 매우 영험(靈驗)하다고 보고 신격(神格)시하며 소원을 빌었다. 지상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문, 통천문(매향바위)은 도솔천(兜率天)으로 이르는 길로 여기며 신성(神聖)시했다. 도솔천은 미륵보살(彌勒菩薩)이 머무는 '내원(內院)' 과 천인(賤人)들이 즐거움을 누리는 '외원(外院)' 으로 구성된 천상(天上)의 정토(淨土)를 가리키는 이상세계를 말한다.
도솔천 욕계(慾界) 6천 중 '네 번째 하늘' 이다. 외원에 수많은 천인들이 즐거움을 누리는 곳에서 미륵보살의 정토(淨土) 내원궁(內院宮)으로 이어지는 길목인 바위 문에서 공양을 하기 위해 향나무를 묻었다는 것을 알렸다.
미륵은 부처의 제자가 되어 교화(敎化)를 받고 마침내 도솔천에 태어나는 영광을 얻는다. 미륵은 4000세 인간의 나이로 56억6700만년을 보낸 뒤 지상으로 내려와 성불(成佛)한다. 그때 이 지상의 국토는 풍요롭고 청정하며 모든 복덕(福福)을 갖추고 있어 미륵불은 첫 모임에서 96억, 세 번째 모임에서는 92억의 사람을 제도하여 그들을 모두 성자(聖者)가 되게 하고 8만4000세를 살다가 열반(涅盤)에 둔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도솔천에 상생하기를 바라고 미륵불이 도솔천에서 내려와 용화회상(龍華會相)에서 설법(說法)하는 자리에 참여하게 되기를 바라는 미륵신앙이 크게 유행하여 서호 엄길리 칠암산 바위에다가 매향(埋香)에 대한 글을 새겼다.
극락세계(極樂世界)를 갈 수 있다는 믿음으로 매향했던 마을사람들은 끊임없이 정진하고 많은 공덕을 쌓고자 부처에게 향(香)을 공양하고자 이상적인 불국세계(佛國世界)를 꿈꾸며 극락왕생(極樂往生)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미륵불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바다에다 매향을 했다.
서호 엄길리 바위에다가 암각매향명을 새긴 것은 바위의 '신성시함과 영험함' , 도솔천으로 가는 내원과 외원의 '통천문' 그리고 가장 돋보여 보이는 '상징성' 그리고 풍우(風雨)으로 인한 금석문이 잘 훼손되지 않도록 '보호' , 부정이 타지 않는 '장소 및 자연물' 등의 이유로 이 바위에다 새긴 것으로 보인다. 칠암산 쇠악바우(쐐기바위)가 비문(碑文)을 보호해주는 정각(亭閣)인 셈이다. 또한 외원에서 내원의 도솔천으로 가는 문(門)으로 여겼다.
서호 엄길산 까막바위 또는 쇠악바위 얽힌 전설
서호 엄길리 칠암산 까막바위 또는 쇠악바우의 전설에 의하면 마을에 안 좋은 기운이 넘쳐 마을사람들이 시름시름 병을 앓다가 또는 바다에 나갔다가 사망하는 사고가 빈변하게 일어나자 마을사람들은 당황했고 걱정의 삶을 살아야했다. 마을사람들은 왜 이럴까하는 용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낧 어느 한 스님이 마을 앞을 지나가다가 마을사람들의 소곤소곤 대는 말을 듣고서
"어허! 이걸 어쩜담 이 마을에 우환이 왔구나!"
"바위가 노했어! 바다도 노했네!"
"불심이 못 미치니 향불을 피울 향나무를 공양해야 돼!"
하며 웅성웅성 기리며 모여 있는 마을사람들에게 말했다.
"이 보시오!"
하며 목탁을 두드렸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하며 목탁을 두드린 채 마을을 두루 살펴보며
"이 마을에 불심을 불어줄 일을 해야되겠습니다."
"부처님에게 치성을 드리지 못해 일어난 일이 옵니다."
"공양을 하셔야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하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마을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저! 스님의 말이 어떤 뜻일까?"
"공양이라니! 무슨 공양인가?"
"불심이 부족해 우환이 온다고!"
"치성을 드려야 한다고!"
"공양이라!"
"공양! 공양!"
"치성이라! 치성!"
"고인돌에 치성을 올렸는데!"
"이것 말고 또 다른데에 해야된단 말인가?"
"그러하지 못했다는 뜻인데!"
"어디에다 무엇을 하라는 건지!"
마을사람들은 스님의 말에 선뜻 또오르지가 않았다.
꼴똘이 생각한 마을사람들은
"부처님 공양에는 쌀과 과일 등도 있고 또 향불(향나무)도 있는데!"
"도대체 무엇을 해야 된단 말인가?"
고민을 하고 있는데 한 분이
"향나무를 묻는 일이 아닐까요?"
그 말을 듣고
"향나무를 묻다니요!"
의아하게 생각자.
"향나무는 부처님한테 공양을 하는 일이옵니다."
"스님이 말했지 않았습니까?"
"불심을 불어줄 일을 하라고!"
"이 마을에 불심이 약하다고 말입니다."
그러자.
"그래서 향나무를 받쳐야 한다는 말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부처님한테 향불을 피우는 향나무를 말한 것입니다."
"매향을 하는 것도 공양을 하는 일입니다."
그러자 마을사람들은
"맞다! 맞어! 그거야!"
"맞아요!"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향나무란 사실을 안 마을사람들은
"우리 날 잡아서 향나무를 구하러 갔시다."
하자 마을사람들은 북촌, 남촌, 동촌, 서촌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 동참하도록 했다.
바다에다 향나무를 묻으면 바다도 노하지 않고 하늘 신, 지신, 집신, 바위신 등도 악한 기운을 내지 않고 또 미륵불로 탄생할 것이라는 믿고 향나무를 베어 마을 앞 바다에 묻어두었다. 마을사람들은 마을 앞에 있는 고인돌(지석묘)이 노했지 않았는가 생각을 해왔는데 한 스님의 말을 듣고 보니 부처님께 바칠 향나무를 공양하지 않아서 그랬다고 믿고 실천했다.
매향을 한 마을사람들은 이 매향을 했다는 기록을 어디에다 하여 사후의 사람들한테도 알려줘야 될 것인지에 대해 고민했다. 마을 뒷산 바위를 유심히 쳐다보고 말했던 스님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그리고 산에 올라가 바위를 찾았다. 산에 있는 한 바위(까막바위)를 보자마자 바위 주변으로 흰 구름이 몰려들었다. 구름은 피어올랐고 바위는 광채를 띠었다. 마을사람들은 이 놀라운 광경을 보고 뒤 넘어질 뻔 했다. 신비스러운 광경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신비감을 보여준 바위를 살펴보니 바위는 문(門)을 하고 있었다. 일명 하늘로 가는 통천문(通天門)이었다. 지상이 천인들이 있는 외원(院)이라면 하늘은 미륵보살들이 머무는 도솔천의 내원궁(內宮)이 있는 길로 들어가는 문이 이 산에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마을사람들은
"찾았습니다."
"여기 이 바위가 하늘과 인간을 이어주는 불심의 바위입니다."
"매향에 대한 글을 이 바위에다 새깁시다."
"우리가 공양하기 위해 바다에 묻은 향나무를 알려주기 위해서!"
"이 문에 새겨야 우리의 뜻이 전달될 것으로 봅니다."
하며 바위에 새겼고 그런 뒤로는 마을에 평화가 왔고 번창.번영했다는 아득한 옛날 이야기가 전해진다.
서호 몽해리 아천포 앞 바다에 매향했지만 기록을 엄길리 칠암산 바위에다 한 것은 이런 전설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마타계내천만인(彌陀契內千萬人)
매향집단으로‘마타계내천만인(彌陀契內千萬人)’, 즉 수행 중에 모든 중생(衆生)을 제도하겠다는 큰마음을 품고 성불(成佛)하여 극락(極樂)에서 교화(敎化)하고 있고 이 부처(釋迦)를 염하면 죽은 뒤에도 극락에 갈 그 안(內)에는 천만인(千萬人)의 많은 사람들이다.
다시 말하면 석가모니가 수행 중에 모든 중생을 제도하겠고 큰마음을 품고서 성불(成佛)하여 극락(極樂)에서 교화(敎化)하고 있고 이 부처를 염하면 죽은 뒤에도 극락에 갈 그 안에는 천만의 많은 사람들이 매향을 하기 위해 뜻을 모았다는 뜻이다.
천을미분(千乙未分)
매향을 묻어둔 방향으로‘천을미분(千乙未分)’, 즉 암각매향명(岩刻埋香銘)이 새겨진 바위에서 천길(1000m) 떨어진 거리(곳)에 만물이 땅위로 나오기 시작하는 3월에 정남쪽의 30도 방위를 중심으로 한 15도 안의 방향에 오후 한시부터 두시 반에서 세시쯤에 매향했다.
다시 말하면 미륵불 법회를 처음 열고나서 천만의 마을 사람들의 뜻을 모아 향나무를 새들이 많이 찾아든 곳인 북쪽 마을(北村) 끝(末)에 있는 포구에서 천(千) 지척(咫尺)이나 되는 정남향 30도 15도 사이에 오후 한시부터 두시 반에서 세시쯤에 매향(埋香)했다는 뜻이다.
발원자(發源者)
부처나 보살이 중생을 제도하고 구제하고자 다짐하는 맹세(盟誓), 즉 부처나 보살의 소원(所願)이 이루어지도록 한 매향의 발원자(發願者)는‘김대◎(金大◎).김금물(金今勿).신일소(申日召).김동화(金冬火).김양병(金洋並)’이다.
화주(化主) 및 각규(刻圭)
불교 자비심(慈悲心)으로 조건 없이 절이나 승려에게 물건을 베풀어(施主) 준, 즉 민가에 다니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법연(法緣)을 맺게 하고 시주(施主)를 받아 절의 양식을 대는 승려로서 중생(衆生)을 교화(敎化)하는 화주(化主)와 의장(意匠)에 따라 철선문양(凸線文樣)의 규벽(奎璧) 주변에 뾰족한 것으로 새긴 각규(刻圭)로 부조(浮彫)시킨 진규(鎭圭)에 의해‘바위에 끼치고(及岩), 진귀한 바위(珍岩)는 커다란 바위(太岩)’이다.
*매향글씨가 새겨진 바위를 마을에서는‘쇠악바우’라고 부른다. 쇠악은‘쐐기’의 전남 지방의 사투리다. 바우도‘바위’의 사투리다. 암각매향명이 새겨진 칠암산에 있는 바위를 보면 하나는 아주 크고 하나는 아주 작은 바위인데 그 틈 사이에 바위 하나가 마치 쐐기를 박아놓은 듯이 놓여있다. 솨악바우 말고도 이 바위에 글씨가 새겨져있다 하여‘글씨바우’또는‘글바우’라고 한다.
천을미분(千乙未分)은 어떤 뜻인가?
천을미분의 천(千)은 길이를 나타내는 지척(咫尺), 즉 ◎을포(◎乙浦)에서 3.300尺(1000m, 1Km, 2.5里)의 거리에 매향이 묻어있다는‘두 지점 사이의 거리’를 말한다. 이 거리의 지점을 두고 다르게 판단하기도 한다. 일부는 포구서부터라 보고 있고 일부는 바위(쇠악바우)부터로 보기도 한다. 가장 유력한 것은 매향 글씨가 새겨진 바위(쇠악바우)에서부터의 거리라는 견해에 더 가깝다. 매향을 한곳이 글씨를 새겨둔 바위를 기점으로 삼았다는 뜻이다.
을(乙)은 십간의 2번째 위치하는 '천간(天干)' 이다. 만물이 싹을 터서 지표에 나온다는 뜻으로‘갑(甲)과 동기이성(同氣異性)’이다. 시기적으로‘양력 3월’에 해당된다.
미(未)는 민속 십이지(十二支)의 여덟째 양(羊)을 상징한다. 민속 이십사방위의 하나로서‘정남(正南)에서 서로 30도 방위를 중심으로 한 15도 안의 방향’이다. 민속 십이시(十二時)의 여덟째 시로‘오후 한 시부터 세 시까지’이다. 또는 민속 이십사시(二十四時) 시로‘오후 한 시 반부터 두 시 반까지’이다.
분(分)은‘길이의 단위 또는 지구의 각도 또는 위도나 경도’를 나타낸다. 정남에서 서로 30도 방위를 중심으로 한 15도 안의 방향을 가리킨다.
천을미분(千乙未分)을 발원자로 해석하거나 기술하고 있는데 천을미분은 발원자가 아니다. 천을미분은 매향한 장소의 위치와 방향과 시간을 말한다. 이점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바로 안다면 매향이 행했던 장소를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농토로 되어버려 향나무는 바닷물 속 갯벌에 묻혀(침향) 있는 것이 아니라 흙으로 덮여져있는 상황이다. 바위에 새긴 글대로 정확히 거리와 각도를 측정해서 측량(測量)을 한다면 매향(埋香)을 찾을 수도 있을 수 있는 가능성도 높다고 본다. 천을미분은 칠암산 암각매향명이 새겨진 바위를 기점으로 삼았다.
그런데 천을미분은 거리와 방향과 각도와 시간을 알리는 말인데 발원자로 풀이를 했으니 이점에 대해 더 깊이 고찰하여 바로 잡았으면 함이다.
매향을 하여 미륵이 되고자한 마을의 평안과 평화를 바란 마을사람들은
김대◎(金大◎) 양반은 마을사람들한테
“우리 마을을 위해 매향을 해야겠습니다.”
“마을을 굳건히 하기 위해서는 향나무를 바다에 묻읍시다.”
“그러하오니!”
“김금물(金今勿) 양반도 함께 갑시다. 어서 톱하고 낫 준비하세요.”
“신일소(申日召) 양반도 가야합니다.”
“김동화(金冬火) 양반도 가고 김양병(金洋並) 양반도 같이 갑시다요.”
“어떠세요. 함께 하겠습니까?”
“마을을 위한 좋은 일인데 마다할 수가 있겠습니까? 동의합니다.”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저도 찬성입니다.”
“자! 그럼 내일 만나 향나무부터 구하도록 합시다.”
매향의 발원자들은 침향을 위한 날이 세자 의식을 올리기 전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부정(不淨)을 타지 않도록 목욕(沐浴)을 하고 몸을 가다듬는 목욕재계(沐浴齎戒)하고 준비한 술과 몇 가지의 음식을 갖고 향나무를 구하려갔다.
발원자들은 향나무 앞에서 제물상을 마련해 기원을 했다.
“신주님!”
“부처님께 공양을 하기 위해 향나무가 필요해 기도합니다.”
“치성을 올려 비나이다.”
“우리의 뜻을 잘 헤아려주셨으면 합니다.”
“노여하지 마시고 공양에 신주님의 헌신을 바라옵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며 올렸던 술잔을 다시 새로 받치며 세배를 했다.
신주님(향나무)의 표정을 살펴보고서 나무를 베기 시작했다.
향나무를 베고 나서 다시 신주님에게 술잔과 함께 큰 절을 올렸다.
베었던 나무에 흙을 덮고서 술을 뿌린 후 나무를 짊어지고서 마을로 왔다.
마을로 돌아와 다시 격식을 차려 마을 앞을 앞에서 베어온 향나무에 대해 새끼줄과 헝겊을 묶어 두고 기원제를 올렸다.
공양에 바치려고 베어온 향나무 앞에 치성(致誠)을 드려 술과 음식을 바치고 또 다시 절을 올리며 기원했다.
“신주님!”
“이 연약한 중생들을 위해 아낌없이 바치신 것에 감사함을 드립니다.”
“변변치 않은 술과 음식이지만 어여삐 여기시고 흠향해주시길 빕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신주님께 비나이다!”
“마을의 향촌의 공동체를 위하고 미륵의 탄생을 바라고자 하는 일이 옵니다.”
“매향을 하고자 하오니 이 갸륵한 마음을 헤아려주시길 바랍니다.”
“두루 살펴주시길 바라나이다.”
치성을 올리고서 매향을 할 곳으로 향나무를 지고 갔다.
새끼줄과 천이 묶어진 향나무를 바다로 갔고 간 그들은 향나무를 배에 실고 나침반인 윤도(輪圖)를 통해 자리와 방위 등을 알아보고 그곳에 배를 정박해 다시 한 번 방향과 자리를 살펴봤다.
발원자들은 매향할 자리를 선택한 후 향나무를 바닷물에 빠치기 전에 기도문을 읊는 의식행사를 했다.
“신주님!”
“매향할 자리가 여기입니다.”
“억겁의 세월을 이곳에서 지내시길 바랍니다.”
“부디 침향 하여 우리 중생들의 뜻을 헤아리고 공양에 임했으면 합니다.”
하며 발원자는 바닷물에 들어가 향나무가 물 위로 뜨지 않게 갯벌 속으로 고정을 시켰다. 침향(沈香)하여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시 건져 향불로서의 공양(供養)에 쓰기 위해 뜨지 않게 떠내려가지 않도록 돌을 메달아 놓기도 했다.
그리고서 배에 올라와 묻어둔 향나무를 향해 또다시 기원을 했다.
“신주님!”
“오늘 마을 바다에 묻은 침향은 1000년 후에 다시 꺼내겠습니다.”
“수중에서도 만물을 두루 보살펴주시옵소서!”
“1000년 후에 다시 지상에 올라와 중생들을 어루만져 주시길 바라나이다.”
“천겁의 향나무를 부처님께 공양하겠습니다.”
“천만인의 뜻을 담아 매향 한 것이오니 침향해주시길 바라옵니다.”
“바다에서 천년을 지내면서 우리 마을을 지켜주셨으면 합니다.
“나라와 백성들을 살펴주시고 미륵불이 탄생되기를 바라옵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매향하며 기도를 하고서 다시 마을로 돌아갔다.
그리고서 다음날 날이 새자 매향에 대한 기록을 남겨두기 위해 엄길리의 칠암산에 있는 바위를 찾았다.
표시해 놓을 만한 바위에서 다시 치성을 올려 술과 음식을 바치고 신주님께 술과 절을 올렸다.
“신주님!”
“신주님이 주신 바다에 묻었던 향나무를 기록하고자 합니다.”
“이 바위에 자세한 내용들을 새겨 놓으려고 합니다.”
“어디에 언제 몇 시에 어느 지점에 매향했는지를 새겨놓으려고 합니다.”
“어떤 목적으로 누구랑 매향했다는 것을 표시하는 내용들입니다.”
“그러하오니 새긴 글들이 후세 사람들한테 전해지기를 바라옵니다.”
“이 금석문은 신주님의 혼입니다.”
“금석문이 오랜 세월이 지나도 변함없으면 합니다.”
“매향은 후세사람들을 위한 신앙입니다.”
“이 글을 보고 그 의미를 알게 해주고 싶습니다.”
“후세 사람들이 1000년 뒤에는 묻어둔 향나무를 꺼낼 것입니다.”
“새겨진 글을 보고 부처님께 바칠 것입니다.”
“이로 인해 마을사람들은 미륵의 꿈을 이루고자 할 것입이다.”
“보다 더 나은 삶을 영위하리라 봅니다.”
“또한 평안한 속에 발전을 기하리라 봅니다.”
“이 바위에 신주님의 마음을 새겨둡니다.”
신주님께 매향했던 기록을 어디에다 새길 것인가를 알리고서 다시 바위 신한테 기도를 했다.
“바위님!”
“오늘 우리는 마을 앞바다에 향나무를 묻어났습니다.”
“그런 내용들을 이 바위에 새겨놓고자 합니다.”
“그러하오니 바위님의 너그러운 아량을 바라옵니다.”
“우리의 뜻을 잘 헤아려주시길 바라옵니다.”
“새긴 글들이 오래도록 훼손이 되지 않게 지켜주시옵소서!”
“바위님의 우람함으로 우리의 걱정을 안심시켜주셨으면 합니다.”
“바위님의 넉넉함으로 우리의 뜻을 받아들어 주셨으면 바람입니다.”
“바위님은 금석문이 억겁의 오랜 세월을 바랄 것으로 봅니다.”
“영원한 영겁의 세월을 유지해주셨으면 합니다.”
치성을 올려 빌며 바위와 바위 사이의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가 석벽에다 매향을 한 발원자들은 자신들이 한 모든 기록을 이었던 그대로의 일을 자세히 이두문자로 새겼다. 이들은 전문 전각자(篆刻者)가 아니라 글씨가 질서정연하게 새겨지지 않고 거친 표면에 좀 못 쓴 글씨체로 크고 작고 비틀비틀하게 새겼다.
매향을 한 것은 향촌 공동체를 위한 또는 미륵(彌勒) 신앙(信仰)을 위해 공양(供養)에 쓸 향나무를 구하려 함께 나서는 일이었으며 향나무를 구해 기원제(祈願祭)를 올린 후 마을 앞 바다에 나가 향나무를 침향(沈香)이 되게 담가두는 일은 미륵신앙(彌勒信仰)이면서 나라와 마을과 주민의 평안(平安)과 발전(發展)을 비는 일이었다.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빌고 또 비는 마을사람들은 작업 목적과 일지가 677년(2021년 현재)이 지났어도 변함없이 신앙심을 발휘하며 옛 일을 알려주고 있다. 매향을 한 발원자들이 마을 뒷산에 있는 바위에 매향을 한 모든 것들에 대해 상세하고 사실적으로 바위 틈 속에 각규(刻圭)로 기록을 해나 영암 서호 엄길마을이 암각매향명으로 인한 민간신앙과 향촌 공동체 사회임을 말해준 역사와 문화가 서린 뜻 깊은 고장임을 알리면서 빛나고 있다.
영암 서호 엄길리 칠암산 바위에 새겨진 암각매향명은 새긴지 700년이 다 되어간다. 세월은 흘렀어도 그 글씨는 온전하게 남아있다. 일부 포구(◎乙浦)의 한 글자와 사람 이름 한 글자(金大0)와 각규의 ◎암(◎岩)이 판독이 불가능하지만 나머지는 크게 훼손되지 않고 오랜 세월이 무색하게 여겨질 정도로 온전하게 남아있다.
판독이 안 된 ◎을포(◎乙浦)는 몽해리의 아시냇가라는 천의 이름을 보아 아을포(涐乙浦)가 아닌가한다. 아시냇가의 아는‘작다’는 뜻이다. 작은 시냇가라는 뜻에서 마을 앞에 작은 냇물이 흐르므로‘아시냇가’또는’아시내’라 불렀다. 새들이 많이 모여든 아시냇가와 만나는 개포를 거위 아(涐), 새 을(乙), 개 포(浦)자를 써‘아을포(涐乙浦)’로 불렀을 것으로 보여 진다. 글씨의 형태기 많이 훼손돼 판독이 안 된 김대◎은 미륵불이 되고자 하는 걸로 봐서 김대생(金大生) 또는 김대성(金大成)으로 판단되며 ◎암(◎岩)은 급암(及岩), 진암(珍岩) 등의 글자들이 바위와 연관된 걸로 보아 매향 금석문의 신앙심이 바위에 미치고 보배스러운 바위는 크고 덕스러운 바위라는 뜻에서 태(太) 또는 대(大) 또는 덕(德)자로 추측됨으로 태암(太岩), 대암(大岩) 또는 덕암(德岩)이 아닌가한다.
암각매향명 바위가 있는 영암 서호 엄길마을에 대해 알아본다.
엄길마을의 이름은 입향조(入鄕祖)와 관련이 있다. 1500년(연산군 6) 강진군 태동에서 전승무(全丞武), 전승문(全丞文) 형제가 이거(移居)하여 살았던 마을이다. 이로 인한 후손들이 입향조를 존경한다는 뜻에서 엄할‘엄(嚴)’, 전승무.전승문 아호인 길촌(吉村).길림(吉林)의‘길(吉)’자를 따서‘엄길(嚴吉)’이라 불렀다. 1879년 조선 정조(正祖) 때 발행된 호구총수기록에는 엄할 엄(嚴)자로 표기되었으나 1912년 일제 시 발행한 한국지방행정구역 명칭일람에는 가림‘엄(奄)’으로 바꾸어져 지금까지 엄길(奄吉)이라고 쓰고 있다.
후손들이 번창하여 문무과(文武科)로 현조(顯祖)들이 배출하여 영암에는‘동문(東文) 서전(西全)’의 동쪽에는 문(文)씨, 서쪽에는 전(全)씨 라고 전하여지고 있다.
월출산 지맥이 은적산을 이루고 고재봉(高宰峯)과 관봉(冠峯)의 두 혈맥이 흘러서 서호강 양지바르고 살기 좋은 터를 닦아 마을 중심으로 흐르는 하천을 따라 동편 마을은 남향이 되고 서편 마을은 동향이 되며‘동엄길(東奄吉), 서엄길(西奄吉)’이라고 한다.
엄길마을은 마을 앞은 칠암산 바로 아래에는 바다였다. 그런 바다가 영산강과 서호강으로 변했고 다시 학파농장으로 인한 간척(干拓) 사업에 의해 바다와 강은 사라졌다.
엄길마을이 있는 곳의 풍수적으로 보면 서호 은적산이 월출산을 마주보는 형국으로 그 가운데는 바다 또는 서호강이 흘렀다. 엄길리는 군서 구림과의 마주치고 있다.
이런 곳이었던 엄길마을 앞 바다 갯벌에 향나무를 묻는 의식을 행사한 풍습이 있었고 그에 관련한 기록을 마을 뒷산인 칠암산 바위에 새겨놓았다. 엄길마을 앞에 있는 800년이 넘은 느티나무에서 매년 당산제를 올리고 있다. 원래는 칠암산 아래 선돌이 있어 그 앞에서 제를 올렸다.
바다 갯벌에 묻은 향나무에 대한 기록은 비(碑)나 바위(岩)에 새겨두었다. 서호 엄길에 있는 매향은 큰 바위에 새겨둔 글씨이다. 화주(化主)와 의장(意匠)에 따라 철선문양(凸線文樣)의 규벽(奎璧) 주변에 뾰족한 것으로 새긴 각규(刻圭)로 부조(浮彫)시킨 진규(鎭圭)에 의해 암각매향명(岩刻埋香銘)이 새겨진 큰 바위를 두고 미친다하여 미칠 급(及)자를 써‘급암(及岩)’으로 봤다. 또는 진귀하다고 여겨 보배 진(珍)자를 써‘진암(珍岩)’이라고 여겼다. 또한 커다란 바위여서 클 태(太)자를 써‘태암(太岩)’또는 덕 있는 바위라고 하여‘덕암(德岩)’이라고 칭했다. 금석문은 급암, 진암과 글자 한자가 판독이 안 돼 ◎암으로만 해석하고 있다.
매향비 또는 매향문은 해안 지역에서 보이는 미륵(彌勒) 신앙 유적이다. 매향비는 향나무를 묻고 그 사실을 기록한 일종의‘비문(碑文)’이다. 매향은 향나무를 모아 개펄에 묻는 의식으로 바닷물에 오래 담가둔 향나무가 침향(沈香)이 되면 스스로 떠오르는데 어지러운 세상을 구원할 미륵의 탄생을 바라는 민중의식(民衆儀式)이다.
1344년(충목왕 원년)에 세워진 매향기록으로 칠암산 7부 능선의 속칭 글자바위로 불리는 바위의 한쪽 작은 틈새에 새겨진 매향문은 2001년‘보물 제1309호’로 지정됐다.
매향바위에는 이런 전설도 있다. 바위에 금(金)을 묻어놓고 그 장소를 바위에 적어놓았다는 설이 있었다. 사실은 금이 아닌‘향나무’인데 금을 묻어둔 것으로 마을사람들은 보았다. 마을사람들은 바위에 새긴 글을 해독하지 못하는 사람이 보물을 캐면 역마살(役馬煞)살이 끼게 돼 화(禍)를 당하게 된다고 믿었다.
실제‘왕(王)바위’또는‘금(金)바위’라 불리는 바위가 산 밑에 있어 그 밑을 파려 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마침 천둥, 벼락이 내려 겁을 먹고 중단했다는 일화도 있다. 이런 이야기들은 다 매향바위와 관련되어 파생된 전설이 아닌가한다. 바위에 새긴 글을 금석문(金石文)이라고 한다. 이를 두고 매향을 한 것에 대한 글을 새긴 금석문인데 금석문의 금을 잘 못 알아듣고 입과 입으로 전하면서 금(金)을 묻어 둔 곳으로 둔갑되는 등의 와전(訛傳)되어 그런 말이 나왔지 않는가본다.
서호 엄길 지석묘군
서호 장천 지석묘군
한 예로 서호 장천 엄길마을 서쪽에는 지름이 거의 6m에 이르는 거대한 고인돌 2기를 중심으로 18기의 고인돌이 북서.남동 방향으로 2열을 이루며 넓게 분포하고 있다. 고인돌 아래에 금을 묻어놓은 것에 대한 기록을 칠암산 바위에 기록을 해놓았다는 전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칠암산 매향바위를 고인돌 아래 금덩어리를 찾을 수 있다고‘해금바위(金岩)’라고 했으며 고인돌에 대한 접근을 막기 위해‘금바위(禁岩)’이라고도 했다. 매향바위가 그 의미를 달리 금을 묻어둔 곳으로 마을사람들은 보기도 했다.
매향비 또는 매향문은 고려 말과 조선 초의 행한 매향양식과 지방의 민간신앙을 살피는 중요한 자료인 동시에 향촌(鄕村) 공동체(共同體) 조직의 실상을 반영하는 귀중한 암각매향명(岩刻埋香銘)으로서의 금석문(金石文)이다.
매향 의식은 왜 성행했을까?
14~15세기의 주로 이루어진 향촌 공동체의 신앙 활동, 즉 미륵의 구원과 용화(龍華)세계의 도래를 기원하면서 현실에서 국가와 백성의 안녕과 발전을 함께 기원하였다.
고려 후기 고위 정치권력을 독점한‘권문세족(權門勢族)’은 불법으로 많은 토지를 차지하고 경제적 이익도 독점하고 있었다. 이로 인하여 국가 재정은 부족해졌고 각종 수탈(收奪)로 농민들의 생활이 어려워지는 등 이로 인해 민심이 피폐했다. 권문세족들로 인한 불안을 느낀 농민들은 참다 못해 그 세력들을 향해 반기를 들었다. 또한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이 이어지면서 향촌(鄕村) 사회의 피해는 더욱 커져갔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들이 중심이 되어 향촌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한 일에 나서게 됐다. 신진사대부들의 다양한 노력이 이루지는 등으로 새로운 농법을 수용하여 생산력을 증대를 가져왔다.
산으로 이루어진 산지(山地)와 바다가 있는 연해지(沿海地) 등에서 새로운 경작지(耕作地)를 개발하면서 자연촌(自然村)이 성장하고 신생 촌락(村落)이 형성되었다. 이에 따라 점차 기존의 향촌 지배질서를 대신할 새로운 향촌 공동체가 필요해졌다.
이에 따라 점차 기존의 향촌 지배질서를 대신할 향촌 공동체(共同體)가 필요해졌다. 그래서 매향풍습을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14세기 무렵부터 향촌 사회에서는 불교 신앙 활동에서 벗어나 향촌 공동체의 면모가 두드러졌다. 불도(佛道)를 닦는데 장애가 될 만한 것을 들이지 않는 지역의‘결계(結계)’, 여러 사람이 공동의 목적으로 이루기 위하여 단체를 조직하는‘결사(結社)’, 전통시대의 여러 가지 공동목적 달성을 위한 조직체의‘향도(刑徒)’등이 조직되었고 이로 인해‘향촌 사회를 재편’하려고 했다.
공동체 재원을 마련하여 사찰, 불상, 불화 등을 조성하거나 회음의식(會飮儀式), 상장례(喪葬禮) 때의 상호부조 등을 통해 활동하였으며 특히 매향(埋香)이라는 집단적 신앙 활동을 통하여 공동체의 결속을 강화하였다.
매향은 본래 향(香)이나 약재(藥材)로 쓰기 위해
매향은 본래 귀한 향(香)이나 약재(藥材)로 쓰이는‘침향(沈香)’을 만들기 위하여‘향나무, 소나무, 참나무, 상수리나무’등을 오랫동안 갯벌에 묻어두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당시 매향은 단순히 침향을 얻기 위한 목적을 넘어 미륵불의‘용화회(龍華會)’에 공양할 침향을 마련하는‘신앙 활동’으로써 더 큰 의미가 있었다.
매향 활동은 고려 초기에 이미 행해지고 있었으나 고려 후기인 14세기부터 조선 초기인 15세기 중반까지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던 것으로 나타났다.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보편화되었으며 특히 남해안과 서해안에서 많이 이루어졌다. 해안 지역은 개간이 이루어지면서 유동 인구가 많았고 한편으로는 잦은 왜구의 침입으로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 당시 불안한 현실을 극복하고 주민들을 결속하는 역할을 담당한 것이‘매향 활동’이었다.
종교적으로는 미륵신앙에 기반을 두고 미륵의 구원과 용화세계의 도래를 기원하면서 현실적으로는‘개인과 지역사회의 평안’을 빌었으며 나아가‘국왕과 국가, 백성의 안녕과 발전’을 기원하였다.
매향 활동이 끝난 이후에는 매향의 시기와 장소, 관련 인물 등을 기록하여 매향비(埋香碑)를 세우거나 암각(岩刻)의 형태로 남겼다.
매향에 관한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이러한 매향비들이 발견되고 있다.
전남 영암 서호 엄길리 암각매향명(보물 1309호. 1344년)을 비롯해 경남 사천 흥사리 매향비(보물 614호.1387년), 전남 영광 법성 입암리 매향비(1371년. 1410년), 충남 당진 안국사지 매향암각(1030~1390년 추정), 충남 예산 효교리 매향비(1343~1403년 추정), 전남 신안 암태도 송곡리 매향비(1405년), 전남 해남 마산면 맹진리 암각매향비(1418년), 충남 서산 해미매향비(1427년), 전남 영암 미암 채지리 매향비(1430년), 전남 장흥 덕암리 암각매향비(1434년), 전남 신안 고란리 매향비(1457년), 충남 당진 경술년매향비(미상) 등이 있다.
전남 영암 서호 엄길리 암각매향명으로 확인 된 것은 언제였나?
2021년 20년 전에 마을 주민들은 인근 영암군 서호면 청용리.장천리 일대에서 지석묘 발굴조사를 하던 전문가들에게 엄길리 칠암산에 글씨가 새겨진 바위(쇠악바우.글씨바우)가 있다고 이 사실을 알렸다. 이 야야기를 듣고 발굴조사에 나선 전문가들은 바로 확인한 결과 바위에 석태가 많이 끼어 있을 뿐 비문이 잘 보전돼있다고 봤다. 확인한 결과 매향에 관한 사실을 기록해둔 것으로 판명된다고 했다. 바위에 새겨진 글씨들이 아직도 온전한 상태로 보이는 것은 자연 암벽의 좁은 통로 한쪽 벽에 새겨져서 바람도 피할 수 있고 하여 훼손되지 않고 오랫동안 보전되고 유지된 것 같다고 확신했다. 이 암각매향명이 전남도내에의 매향비 가운데 시기도 가장 앞선 것으로 파악됐다.
전문가들의 조사에 따른 엄길리 암각매향명은 보물 제1309호로 지정됐다. 매향비가 조성된 이유에 대해 자세히 들은 마을 사람들은 그동안 매향비가 마을을 지켜줬다고 입을 모았다.
서호 엄길 매향의 전설을 알고 있는 느티나무
서호 엄길리는 암각매향명 만큼 오랜 세월을 말해주는 마을 어귀에 선 수령 800년 쯤 되어 보이는 당산나무인 느티나무가 또한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마을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마을의 터줏대감인 느티나무는 마을에 살던 아낙네가 날마다 이 나무 알에서 아들의 과거 급제를 빌었다. 아들이 과거시험에 떨어지자 나무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이듬해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자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서호 엄길마을 앞 바다를 두고‘배들래’라고 한다. 배들래는‘배가 들어오는 곳(포구)’이라는 뜻이다. 지금은 바다였던 곳은 일제강점기 때 당시 최고 갑부였던 현준호(1889~1950)가 주도해 친일 대가로 조선총독부로부터 영산강 간척사업권을 따내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간척사업을 시작했다. 1949년 제방이 완공이 되자 아버지 현기봉의 호를 따서 학파농장(鶴破農場)으로 이름을 붙여 간척은 현준호가 한국전쟁 때 피살되자 아들 현영원이 다시 학파농장 간척을 추진하여 1961년 마무리해 농토(면적 892만m2)로 변해버렸고 배 또한 들어오지 않는 옛 이야기로 그 흔적만을 알려주고 있다.
서호 엄길마을 사람들은 엄길이라는 마을 이름이 있기 전에 이미 몇몇 사람들이 이 마을에 터를 잡고 있었다. 장천리 선사유적지를 보면 바다를 접한 서호는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음을 고인돌 등에서 엿볼 수 있다.
전남 영암 서호 엄길리는 지금의 엄길(1500년) 이전(1300년 전)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엄길이란 마을 이름이 생긴 1500년보다 156년 앞서 몇몇 사람들이 이곳에 들어와 마을의 평안과 발전을 위해 노력했고 평화로움 속에 번영하기를 빌었다.
이에 따라 점차 기존의 향촌 지배질서를 대신할 향촌 공동체(共同體)가 필요해졌다. 그래서 매향풍습을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매향 신앙정신이 깃든 엄길리는 지금도 마을사람들은 지금껏 이어지는 마을의 공동체 정신도 빛이 나고 있다.
영암 서호 엄길리 암각매향명에 대해 잘 못 된 해독을 한 것 같아 보인다.
암각매향명을 알리는 안내판에는 발원자로‘천을미분(千乙未分)’이라고 해났다. 金大◎(김대◎), 金今勿(김금물), 申日召(신일소), 金冬火(김동화), 金洋幷(김양병)으로 함께 되어있다. 어떤 글에는 천을미분을 천을(千乙), 미분(未分) 이렇게 따로 된 인물로 서술했다.
천을미분은 발원자의 이름이 아닌 매향이 있는‘방향(方向)’을 알려주는 뜻으로 새겼을 것으로 해석된다. 엄길 북쪽 마을 끝에 있는 포구에서 매향이 있는 곳과의 거리와 좌우(각도.위치)를 가리키고 있는 듯하다. 매향을 하자고 나선 발원자들이 이 방향의 장소에다 향나무를 바닷물에 가라 앉아 묻어났다는 기록으로 풀이된다.
천을미분은“매향을 암각매향명(岩刻埋香銘)이 새겨진 곳에서 보이는 북쪽 마을 끝에 있는 포구에서 천길(1000m) 떨어진 거리(곳) 정남향의 30도 방위를 중심으로 한 15도 안의 방향에 있습니다. 매향은 오후 한 시부터 두 시 반에서 세 시 쯤에 매향했습니다. 이는 만물이 지표에 나오기 시작하는 3월 시기입니다”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매향이 성행했던 시대인 고려 말‘충목왕(忠穆王)’은 어떤 왕인가?
고려 29대 충목왕(1337~1348)은 국왕 재위 1344년부터 1348년까지 4년 통치를 했다. 휘는‘흔(昕)’, 몽골 이름은‘파드마도르지’이다. 한국 한자로‘팔사마타아지(八四麻朶兒只)’이다. 언에서 내린 시호는 충목왕(忠穆王)이며 공민왕이 올린 시호는 현효대왕(顯孝大王)이다. 충혜왕이 덕녕공주(德寧公主) 사이에서 태어났다.
충목왕은 원나라에 볼모로 끌려가 있다가 8세에 원나라에 의하여 즉위하였으나 후사 없이 요절했다. 1344년부터 1348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그의 모후인 덕녕공주가 섭정을 하였다.
충목왕은 충혜왕(忠惠王.28대)의 장남으로 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망나니 군주였던 아버지 충혜왕은 폐위가 되어 어리지만 총명했던 그는 고려 29대 임금으로 즉위한다.
충목왕 왕흔(王昕)은 여렸으나 어머니가 쿠빌아이 칸의 고손녀였기에 고려에서 제일 강한 지지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고려 외부에서는 심왕이 고려 왕위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기에 왕흔은 안심할 수 없었고 아버지 충혜왕을 쫒아낸 몽골 황관 고영보(高龍普)의 품에 안겨 몽골로 넘어가 칸을 알현하게 되었는데 몽골 칸의 질문을 받고 왕흔은“아버지를 닮겠는가? 어비를 닮겠는가?”뼈 있는 질문에 영특했던 왕흔은 어미를 닮겠다고 답했다.
이 답변에 만족한 칸은 왕흔의 왕위계승을 윤허(允許)해 왕흔은 심와을을 제치고 고려왕이 될 수 이었다.
충선왕(27대)이 혼란에 빠트린 고려 정치와 충혜왕이 망쳐놓은 고려왕의 권위를 8살짜리 어린아이에 불과한 충목왕 왕흔이 수습해야하는 어이없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고려 29대왕 왕흔은 백서의 고혈을 빨아먹던 충혜왕의 보흥고(寶興庫), 덕녕고(德寧庫)와 같은 기관들을 폐지하였고 이 기관들이 초법적으로 수탈했던 토지와 노비들을 본래의 주인들에게 돌려주었다.
왕위에 오르자 곧 모든 신하들을 경계시키고 폐정(廢政)을 개혁하며 백성들을 위무(慰撫).구휼(救恤)하는 한편 선왕 때 아첨(阿諂)했던 폐신(嬖臣)들을 귀양 보냈다.
그리고 작은아비지 왕기(뒤의 공민왕)를 강릉부원대군(府院大君)으로 왕현(王現)을 익흥부원군(益興府院君)으로 봉하였다.
이제현의 상서에 따라 보흥고(寶興庫), 덕녕고(德寧庫), 내승(內乘), 응방(鷹坊)을 폐지하여 백성들의 원한을 풀어주었으며 서연(書筵)을 열었다. 그리고 선왕이 지은 신궁(神宮)을 헐어 숭문관(崇文館)을 짓게 하고 권신(權臣)들이 빼앗았던 녹과전(祿科田)을 원주인에게 돌려주었다.
편년강목(編年綱目)을 중수하게 하고 충렬왕, 충선왕, 축숙왕 세 왕의 실록을 편찬하게 한 충목왕은 1346년(충목왕 2)에는 폐정을 바로잡기 위해‘정치도감(政治圖鑑)’을 설치하고 계림군공(鷄林郡公) 왕후(王喣), 좌정승(左政丞) 김영돈(金永旽) 등 33명을 속관(屬官)으로 삼았다.
이민(李敏), 이원구(李元具) 등을 여러 도에 파견하여 민전(民田)을 측량하게 하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충목왕을 도와 정책을 추진하던 우정승(右政丞) 왕후(王厚)가 권문세족(權門勢族)의 반발로 파면되었을 정도로 무신정권(武臣政權)으로부터 내려온 뿌리 깊은 고려의 부패정국을 뒤엎긴 힘들었다. 왕의 힘으로 어려움을 겪다보니 충목왕은 몽골 칸의 신임을 받고 있던 상황을 활용해서 정치도감을 설치해 개혁에 나섰고 고려 각지에 파견되어 부패한 자들을 처단하는 등 고려를 개선시켰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몽골 칸의 제2비였던 기황후(奇皇后)의 일가였던 기삼만이 정치도감의 형벌을 받고 사망하는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정치도감으로 부정부패를 나라를 바로 세우려 했던 충목왕
정치도감은 충목왕 1347년 2월에 시행되었고 1349년 충정왕 때 폐지가 되었던 고려 말기에 설치된 폐정개혁기관(廢政改革機關)이다.
이때 기황후(奇皇后)의 친척인 기삼만(奇三萬)이 남의 토지를 빼앗고 불법을 자행한 것이 발각되어 옥에 갇혔는데 기삼만이 옥에서 죽게 되자 기심만의 처가 정동행성(征東行省) 이문소(理問所)에 이를 고발하였다. 이에 이문소는 정치도감의 정치관(整治官) 서호(徐浩) 등을 잡고 가두고 국문하였으며 원나라가 이를 용인하였다.
결국 정치도감은 원나라의 간섭을 받게 되어 토지 측량을 제대로 시행하지 못하였다. 1348년(충목왕 4)에는 진휼도감(賑恤圖鑑)을 두어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제하게 하였다.
안타깝게도 왕위에 오른 지 4년만이 12살의 나이에 충목왕이 병에 걸려 뜻하지 않게 사망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충목왕의 정치도감 또한 고려에 뿌리 깊은 부패와 부당함을 개선시키지 못하고 함께 막을 내렸다.
이때 왕흔의 나이 12세 비록 어린나이였지만 1348년 진제도감(眞諦圖鑑)을 설치하여 백성을 구제하는 등 많은 선정을 베푸는 노력을 하였지만 결국 재위 4년 만에 죽고 짧지만 기존 선왕대왕(先王大王)들 중 가장 빛나는 정치를 시도했던 왕으로 남았다.
기존 고려왕들은 여러 왕비와 자녀들이 많지만 고려 29대 왕 왕흔은 부인도 자녀도 없이 생을 마감한 왕이다.
서호 엄길리 앞바다에서 매향을 하고 마을 뒷산 바위에 암각매향명을 새긴 시기는 고려 충목왕 때이다. 거론했듯이 이시기에는 권문세족들의 토지를 빼앗는 등 불법을 자행하는 일이 잦았다. 매향은 미륵산앙의 의미도 담겨져 있지만 나라가 바르게 나아가기를 바라는 백성들이 핍박(逼迫)을 받거나 어려운 생활을 겪지 않도록 평안과 발전을 비는데도 목적을 두고 향나무를 바다에 묻어 침향하게 했다.
1344년 마을사람들은 매향을 통해 향촌 공동체를 형성해 미륵신앙과 함께 토지의 공평성을 주장했듯이 1961년 학파농장으로 인한 3할 소작료(小作料)의 불합리한 조건과 서호강 간척이 완공되면 20년 후에 주민들에게 양도(讓渡)하겠다는 1988년 양도약속을 이행하지 않자 소작농들이 소작료 거부운동을 벌이며 항의했던 그때나 지금이나 매향의 의미는 살아있는 것 같아 매향바위가 더 더욱 값져 보이고 매향바위가 고을을 지켜주는 듯하다.
매향은 향촌 공동체 신앙과 미륵의 구원과 용화세계의 도래를 기원
매향은 14~15세기에 주로 이루어진 향촌 공동체의 신앙 활동으로 미륵의 구원과 용화세계의 도래를 기원하면서 현실에서 국가와 백성의 안녕과 발전을 함께 기원했다는 사실을 지금에서도 그 의미를 새겨둘 필요가 있다고 본다.
고려 후기 고위 정치권력을 독점한 권문세족들이 불법적으로 많은 토지를 차지하고 경제적 이익도 독점하고 있었던 사실도 우리는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될 일이다.
권문세족으로 인한 국가 재정이 부족해졌던 각종 수탈(收奪)로 농민들의 생활이 불안하였던 향촌 사회의 피해가 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신진사대부들이 중심이 되어 향촌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한 향촌 공동체가 필요했고 특히 매향이라는 집단적 신앙 활동을 통하여‘공동체(共同體)의 결속(結束)’을 강화하였다.
고려 말은 혼돈(混沌)의 시대였다. 망해가던 나라와 권력은 탐욕(貪慾)과 부패(腐敗)로 찌들어질 대로 찌들어진 눈이 멀어있었다. 창궐(猖獗)하는 왜구의 잦은 침략(侵略)으로 귀족(貴族)들의 사치(奢侈)와 향락(享樂)의 곶 간을 채우기 위한 노역(奴役)으로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
왜구의 약탈(掠奪)과 탐관오리(貪官汚吏)의 학정(虐政)에 시달리던 백성들에게 삶이란 곧 지옥 같았다. 고려 말 백성들이 미륵의 도래를 애타게 기다렸던 것은 그들로 인한 원망에서 그랬다. 미륵은 고통 받는‘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이 세상에 출현하기로 예정돼 있는 부처다. 백성들은 미륵이 세상에 도래하면 고통의 모든 사슬이 끊기고 좋은 세상이 온다고 믿었다.
매향한 향나무는 미래의 꿈
고려 말 백성들이 강과 바다가 만나는 갯벌에다 향나무를 묻고 그 자리에 부근에 매향비를 세웠던 건‘미륵의 도래를 앞당기기 위한 것’이었다. 갯벌에 묻은 향나무가 1000년이 지난 뒤에 침향이 돼서 떠오르고 그 나무를 쪼개서 향불을 피워 올리면 미륵이 온다고 믿었던 우리네 조상들이었다. 발원자들이 매향했던 나무가 한날 나무가 아니라‘미래의 꿈’이었다는 사실이다.
서호 엄길리 앞 바다에 향나무는 묻어둔 지가 거의 700년이 다 되어간다. 곧 1000년이 될 텐데 침향 하여 세상으로 다시 나오면 아마 그 묵직한 매향이 감동으로 다가오고 당시 백성들의 피폐(疲斃)한 삶을 기꺼이 감내하면서도 먼 미래의 후손들을 위해‘희망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았다는 것을 그들은 당대의 구원을 포기한 셈이지만 매향해둔 것만으로도 꿈을 이뤘다고 보여 지고 그들의 꿈보다 지금 우리 세대들이 더 많이 이루어가면서 누리지 않을까한다.
나라 안팎으로 매우 혼란(混亂)스러운 시대에 엄길리 앞바다에 묻어둔 향나무는 그 혼란을 막고자 지금도 갯벌 속에서 지내고 있다. 300년 뒤면 매향 1000년이 된다. 그 때가 되면 세상은 지금보다 더 평안하고 발전하리라 본다.
매향은 바다에서 천년 절에서 천년을 지내며 향불을 피어오르게 한다. 전남 영암 서호 엄길리 앞바다에 묻어두었던 향나무는 지금 어디엔 가에 묻혀있으면서 미륵불이 내려오기를 공양하고 있다. 1000년이 되면 지상에서 부처 앞에서 자신을 태워 보살들이 원했던 미륵불(彌勒佛)로 탄생하리라 본다.
세상의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구원(救援)’의 길은 있다. 나의 구원이 아닌‘모두의 구원’을 당대가 아닌‘후대(後代)의 구원’을 바래본다. 그리고 끝내 깨뜨리지 않았던 옛사람들의 희망을 생각해본다. 그들이 묻어놓은 향나무는 아직 떠오르지 않았고 미륵의 도래(到來)도 아직 멀었다. 서호 엄길리 암각매향명에서 우리가 봐야할 것은 미륵의 존재가 아니라 끝내 잃지 않았던‘희망(希望)’이다.
매향에 관한 희망의 기념비 세우자
체념을 넘어서 그들이 후손들을 위해 향나무를 묻고 암각매향명을 세웠다면 우리는 미래 세대들을 위해 어떻게‘불씨’를 지킬 것이며 그렇게 지켜낸‘희망의 기념비(記念碑)’를 어떻게 세울 것인가를 고민해봐야 한다.
학파농장은 향나무를 묻은 곳이다. 1344년경 권문세족들의 토지를 뺏는 등의 탈취나 학파농장을 조성해 3할의 소작료를 받은 부당한 착취나 다를 바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매향은 의미심장하다.
고려 말 29대 충목왕이 좀 더 성숙한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면 아니 4년의 통치가 아닌 오랜 세월동안 왕좌에 올라 자리를 지켰다면 정치도감으로 부정부패로 피폐된 나라를 바로 잡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잘 잘 수 있게 했을 것이다. 향촌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매형 의식풍습을 더 권장하고 장려했으리라 본다. 매향에 대한 용화회 법회를 국가의 축제로 펼쳤을 것이다. 그런 행사를 실시함으로 인하여 매향하며 바랐던 미륵불의 탄생이나 안정적 발전을 불러들었을 것이다.
매향은 아직 찾지를 못하고 있다. 누가 언제 가져갔는지 아무도 모른다. 부침해 바닷물에 떠내려갔는지, 아니면 몰래 누가 건져가서 어떤 용도로 쓰고 말았는지, 아니면 아직도 갯벌 속에서 매향(埋香)하고 있는지를 알 수가 없다. 바위에는 장소와 위치 및 방향을 기록해났다. 그런 기록을 근거로 하여 매향했던 정확한 자리를 찾아 그 자리에 기념비(記念碑)를 세워 관광화해도 좋을 듯싶다.
향나무는 왜 바다에 묻었나?
매향은 바닷물의 갯벌에 묻어둔‘향나무’이다.
매향을 묻는 풍습은 여러 갈래로 해석되고 있다.
하나는‘목탁(木鐸)’을 만들기 위한 향나무를 바닷물에 담가둔 것이다. 나무가 갈라지지 않기 위해서다.
하나는 미륵불(彌勒佛)‘용화회(龍華會.미륵불의 법회를 상징하는 종교의례인 불교의식)’에 공양(供養)할‘침향(沈香)’을 마련하는 신앙(信仰) 활동으로 향나무를 묻었다.
하나는 향촌 공동체‘결계(結戒), 결사(結社), 향도(香徒)’등 향촌(鄕村) 사회를 재편하려고 매향(埋香)했다.
침향을 만들기 위하여‘향나무, 소나무, 참나무, 상수리나무’등을 오랫동안 갯벌에 묻어두었다.
영암 서호 엄길리 앞바다에 묻어두었던 향나무는 단순히 침향을 얻기 위한 목적을 넘어 미륵불의 용화회에 공양할 침향을 마련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매향은 신앙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전남 영암에는 국보급의 문화재도 많다. 암각매형명 같은 보물급도 있다.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고장이다. 그런 유서 깊은 고장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가치 있는 것에 대해 소홀한 면이 없지나 않다. 서호 엄길리에 있는 칠암산의 암각매향명 바위는 보물을 보호하는 일에 있어서 아쉬움을 갖게 한다.
암각매향명이 새겨진 곳은 거대한 바위이다. 그래서 다른 지역처럼 새겨진 바위에 정각(亭閣)을 세우기에는 무리이다. 세울 수가 없는 장소에다 암각매향명을 새겨났다. 하지만 바위에 정각은 세울 수는 없다고 해도 암각매향명 바위로 가는 입구에는 그 의미를 기리는‘기념비와 정각’을 세울 수 있다고 본다. 단순한 표지판과 안내만으로 그 가치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매향을 하고 바위에 새긴 발원자와 마을사람들한테 예의가 아니며 영암 문화재를 홀대한 일이다.
암각매향명은 전라남도에 가장 앞선 비문
우리나라에는 각 지역에 매향비가 있다. 보물로 지정된 곳은 몇 군데밖에 없다. 서호 엄길리에 있는 매향비가 우수하고 역사적인 학술 가치가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고려 말의 매향 의식과 지방의 민간 신앙을 살피는 중요한 자료인 동시에 향촌 공동체 조직의 실상을 반영하는 귀중한 금석문으로서의 가치가 있다. 특히 연대를 불기(佛紀) 쓴 점이나 미륵계(彌勒契)라는 신앙 결사가 보이는 점이 당시의 이두문과 지방 관직 명칭이 나타나는 등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서호 엄길리 암각매향명은 전라남도의 매향 자료 중 가장 앞선 시대의 것이라는 점도 높이 사고 있다.
또한 매향 의식에‘미타계(彌陀契)’라는 불교 결사와 함께 관원들이 연결된 인상이어서 불교가 순수 신앙 결사 내지 민중 신앙으로 전이되는 과정을 추적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런 가치성이 뛰어난 암각매향명에 대해 보물(寶物)은 보물로서의 더 의미 있고 소중하게 여길 수 있도록 후세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이 커야 될 것 같다.
매향은 한 종교 의식으로 취급하기 보다는 우리의 문화 풍습으로 우리의 삶을 위한 정신적 신앙으로 여겼으면 한다. 매향으로 정신을 맑게 해주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부정을 막아주는 영험(靈驗)이 있는 향불을 피워보면서 인간세상이 지금보다 내일이 더 희망차고 행복했으면 함이다.
전남 영암 서호 엄길리 앞들에 묻어있는 향나무는 반드시 그 자신을 태워 향(香)을 맡게 할 것으로 본다. 중생을 구제할 수 있는 미륵(彌勒)이 된다면 더할 나위없는 축복(祝福)이 될 것 같다.
서호 엄길리 암각매향명에 내 이름도 들어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국보 제1309호인 서호 엄길리 암각매향명
1309를 이렇게 풀어보고자 한다.
日映精神之 埋香集也(일영정신지 매향집야)
三道衆生之 埋香會也(삼도중생지 매향회야)
供養心情之 埋香生也(공양심정지 매향생야)
救援彌勒之 埋香氣也(구원미륵지 매향기야)
1-일영(日映)의 정신들이 매향(埋香)에 모아지니
3-삼도(三道)의 중생들이 매향(埋香)에 모이도다
0-공양(供養)의 마음들이 매향(埋香)에 생성하니
9-구원(救援)의 미륵불이 매향(埋香)에 기운차다
김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