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게 했다
그 청년에게서 화공약품 냄새가 났다. 모자 공장에서 염색 일을 하며, 정권사님 댁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토요 청년모임에 처음 나왔는데 사투리 때문이기도 했지만 원래 말이 좀 어눌해서 말귀를 쉽게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왠지 이질감이 느껴졌다.
주일예배를 마치고 교회 마당에선 성도들끼리 밝은 얼굴로 인사를 한다.안부를 묻기도 하며 반갑게 악수를 나눈다. 내가 집사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저 쪽에 그 청년이 보였다. 혼자였다.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고 싶었는지 몇 번을 두리번거렸다."저 청년과 인사 좀 해야겠구나. 그런데 무슨 얘기를 하지?"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다른 분과 인사하느라 얼마의 시간이 지났다. 청년이 보이지 않았다. 얘기를 나누지 못한 것이 찜찜하게 마음에 남았다.
"그 놈, 나쁜 자식이에요"
권사님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어제 밤, 라디오를 크게 틀어놓은 채 극약을 마시고 자살을 했단다. 공장의 열악한 작업환경이 힘들었을 것이다. 초라한 외모에 열등감이 있었을 것이다. 내세울 것 없는 학력이 부끄러웠을 것이다. 적은 월급에 생활이 쪼들렸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객지생활이 외로웠을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 찾아왔는지도 모른다. 외로움과 고통을 위로해줄 따뜻한 말을 기다렸을 것이다. 적어도 교회만큼은 그런 사람이 많은 줄 알았을 것이다. 내가 찾아가 손을 내밀었어야 했다. 내가 그 청년을 죽게 했다.
둘러보라.
극약을 사다놓고 마지막 실 가닥처럼 따뜻한 말 한 마디를 기다리는 또 다른 자살예비자가 있는지...
**왕과 신하의 약속
옛날, 어느 나라에 왕이 있었다. 그 왕은 바로 자기 아래에서 모든 일을 관장하는 '국무대신'을 불러놓고 한가지 제안을 하였다. 왕은 앞으로 신하들에게 칭찬만 할테니, 국무대신은 신하들을 엄하게 다스리라는 것이었다. 국무대신은 그렇게 하기로 했다. 약속대로 다음날부터 왕은 칭찬만을 하고, 국무대신은 신하들을 엄하게 다스렸다. 시간이 지난 후, 왕은 한가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자기를 대하는 신하들이 처음에는 잘 따르더니만, 점차 태도가 성의가 없는 것이었다. 오히려 국무대신이 하는 말은 처음에는 다들 뒤에서 욕도 하고 원망도 하더니, 점차 국무대신의 말이라면 모든 신하들이 어김이 없었던 것이었다. 왕은 다시 국무대신을 불렀다. 그리고는 서로의 역할을 다시 바꾸자고 했다. 신하는 왕의 제안에 수락했고, 그렇게 했다. 몇 달 후, 신하들은 당황했다. 칭찬만 하던 왕이 포악해 졌고, 그렇게도 엄했던 국무대신이 자기들에게 잘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점차 흐르면서 왕은 갈수록 엄해졌고, 국무대신은 더더욱 다른 신하들을 아끼고 칭찬했다. 어느 날, 신하들끼리 모여서 의논을 했다. 그것은 왕을 죽이자는 역모였다. 갑자기 변해버린 왕이, 미쳐서 혹시나 자신들을 죽이지 않을까 염려해서였다. 그리고 며칠 후 왕은 아무도 모르게 독살을 당했다. 왕을 독살한 신하들이 다시 모여 의논을 하였다. 그것은 새로운 왕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누가 왕이 되었을 것 같은가? 만장일치로 바로 '국무대신'이 왕이 되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처음에는 엄하였으나, 나중에는 사랑으로 대했다는 것이 다른 신하들에게는 원리원칙을 중요시하는 사랑 많은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지금 당신이 가르치고 있는 아이들에게 당신은 '왕'의 모습입니까? 아니면 '국무대신'의 모습입니까?
무엇이든 시작할 때는 힘들고 어렵다. 하지만 힘들고 어렵다고 포기하거나 단계를 무시하게 되면 그 사람은 절대로 자신의 일을 성취하거나, 책임감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한다. 시작에 최선을 다하라. 그리고 엄격하라. 그러면 시간이 지난 뒤 자신도 놀랄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약속을 지킨 목사님의 재치
어느 마을에 두 형제가 살고 있었다. 그들은 부자였는데 사람들이 보지 않는데서 온갖 나쁜 일을 일삼고 다니는 못된 사람들이었다. 교회에서도 겉으로 보기에는 나무랄 데 없는 독실한 신자 행세를 하고 다녔다. 어느 날, 목사님이 은퇴하시고 새로운 목사님이 부임하셨다. 그런데 그 목사님은 그 두 형제의 거짓된 마음을 꿰뚫어보았다. 게다가 말씀을 아주 훌륭하게 하셔서 교회가 부흥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새 예배당을 짓기 위해 헌금을 모금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형이 죽었다. 동생은 장례식 전날 목사님을 찾아와 새 건물을 짓는데 충분한 액수의 수표를 건네주면서 이렇게 요청하였다.
"목사님, 한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장례식 때 제 형이 훌륭한 성도였다고 이야기해주십시오."
목사님은 그러마 약속을 하고 수표를 받았다. 그런데 다음 날 장례식에서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그는 아주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아내를 속이고 가족들도 돌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하지만 잠시 후 목사님은 약속을 지켰다.
"하지만, 그 동생에 비하면 훌륭한 성도였습니다."
**주는 자
이상재 선생님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이상재 선생께서 늦도록 책을 읽는데 도둑이 들었습니다. 이 방, 저 방 다니며 한 보따리 싸 들고 드디어 선생님이 계신 방문을 열었습니다. 이때에 깜짝 놀란 도둑에게 선생님은 여유 있게 "안녕하십니까?"하고 인사를 했답니다. 그리고는 안절부절한 도둑에게 필요한 것 있으면 염려말고 가져가라고 하셨답니다. 도둑은 얼떨결에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나가다가 그만 순경에게 붙들렸습니다. 순경은 도둑을 끌고 다시 선생님 댁으로 와서 도둑을 잡았으니 물건을 받으시라고 했습니다. 이때 선생님은 "내가 가지고 가라고 주었는데 어찌 도둑이냐, 우리 집에 온 손님이오"라고 태연히 말씀하셨다는 일화입니다.
빼앗기는 것과 주는 것을 확실히 다릅니다. 언제나 주는 자는 멋이 있습니다. 안 주겠다고 움켜쥐는 자에게는 빼앗겠다고 안간힘을 쓰는 자가 곁에 있기에 항상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그는 샌프란시스코의 한인교회에서 태극기를 걸고 「올드랭 사인」을 부르는 교포들을 보면서 애국가를 만들 결심을 했다. 안익태는 부다페스트 음악학교에 재학 중이던 1935년 드디어 애국가를 완성했다. 훗날 애국가가 불리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는 이런 고백을 했다.
"애국가는 내 작곡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영감을 조국의 백성들에게 전했을 뿐입니다"
**무신론자의 교만
지나간 세기의 유명한 무신론자 중에 로버트 잉거솔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무신론 강의 도중 탁상에 시계를 꺼내 놓고
“내가 하나님께 5분간만 시간을 주겠다. 내가 5분 동안 하나님을 저주할 터인데 그 동안에 나를 죽이기를 바란다. 내가 만약 죽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없거나. 있어도 실패자에 불과하다”
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5분이 지난 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자 인간이 승리자요. 신은 실패자라고 외쳤습니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신앙인 데오도르 파커는 빙그레 웃으면서 이런 흥미 있는 말을 했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실패한 것일까.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인내를 5분간으로 단축시켜 보려고 한 잉거솔의 시도가 패배한 것이 아닐까."
옳습니다. 주께서는 참고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그를 믿는 그의 백성들이 또한 이 오래 참음의 옷을 입게 되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러나 어떤 분이 "언제까지 참아야 합니까."라고 물으실지 모릅니다.
재미있는 것은 "사랑은 영원까지 참고"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오래 참고"입니다. 언젠가는 오래 참음의 마지막 순간이 옵니다.
**누구를 두려워하는가의 차이
뱅겔이라는 신학자가 한 소리를 들어 보라
"하나님만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외의 모든 것을 두려워한다."
**다르게 느껴지는 하나님 사랑
어느 가난한 시골 교회의 주일학교에서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분반공부를 하고 있었다. 선생님이 한참 설명을 하고 있는데 한 아이가 손을 들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마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은 기억하고 어떤 사람은 잊어버리고 계신가봐요, 그러니까 우리와 같은 사람들은 옷도 누더기를 입고 작은 막살이 집에서 살게 되지요."
그때 또 다른 아이가 일어섰다. 그도 역시 가난하여 헌 누더기를 입고 있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모두 기억하고 사랑하신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우리에게 좋은 부모님을 주시고 행복한 가정을 주신 것이 아니겠어요."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온 인류가 구원받기를 원하고 계신다. 누구든지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면 죄를 용서해 주신다.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높고 깊고 넓은 사랑
한 영국인이 요크셔 해안에 아름다운 별장을 소유하고 있었다. 해안 한쪽에는 커다란 바위가 바다를 향해 불쑥 나와 있었다. 어느 날 이 영국인은 딸을 데리고 바위 꼭대기에 올라갔다. 그들이 꼭대기에 이르렀을 때 아버지는 딸에게 평생 잊지 못할 교훈을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애야, 위를 올려다보아라."
딸은 아버지의 말대로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번에는 아래를 내려다보아라."
아버지의 말대로 딸은 하늘이 비춰지는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이번엔 저 앞을 내다보아라."
딸은 아버지의 말대로 했다.
"내 딸 도로시야, 이처럼 높고 한없이 깊고 끝없이 넓고 아름다운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 말을 들은 딸은 아버지를 향하여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이처럼 높고 깊고 끝없이 광활하다면 우리는 그 한가운데서 살고있군요."하고 똑똑히 말했다.
아버지는 딸의 이 말을 평생 잊지 못했다고 한다.
**이제 연구는 끝났다
어떤 철학 교수가 다음 날 있을 강의를 준비하기 위해 책상으로 가 앉았다. 그는 지저분한 책상에서는 연구를 할 수 없는 성격이라서 책상 위에 흩어져 있는 서류 뭉치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우편함에 들어있던 팜플렛, 잡지, 광고전단 등과 기타 우편물들로서, `우편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모를 때는 아버지의 책상 위에 모두 갖다 놓을 것'이라고 정한 규칙에 따라 딸 아이가 그의 책상 위에다 가져다 놓은 것이었다. 그날도 역시 교수는 책상 위에 잇는 서류뭉치들을 치우다가 파리선교사협회에서 발행한 잡지를 집어 들었다. 그가 그 잡지를 쓰레기통에 넣으려는 순간 발행 저절로 펼쳐졌는데 `콩고 선교의 필요성'이라는 논설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그 교수는 그 논설을 단숨에 읽어 내려갔으며 그날 밤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이제 나의 연구는 끝났다!"
이 철학 교수가 바로 알베르트 슈바이처였다. 어떤 선교사의 보고서를 우연찮게 읽게 된 그 `기회'는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천부적인 학자인 슈바이처로 하여금 그가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대학에서 의학공부를 하게 만들었다. 의학공부를 마친 후 그는 남은 여생을 아프리카의 적도지방에서 보냈다. 그는 철학, 신학, 의학 그리고 음악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갖고 있었지만 그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적도아프리카에서 선교사로 일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눈에 우연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살아 게셔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인생 성공 방정식
어떤 천채 과학자에게 기자들이 인생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것은 l=g+j+n라고 대답했다. 기자들이 해설을 요구하자 그는 은 인생이고 g는 하나님 j는 일이며 n은 즐기는 것이며 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약속도 하시고 실천도 하시는 분
1988년도 미국대통령 선거를 위한 선거전에 앞서 각 정당의 전당대회를 통해서 대통령 후보를 지명하는 큰 정치행사가 있었다.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민주당 전당대회는 아트란타 죠지아에서 열려서 메사츄세스 주지자사인 듀카키스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으며, 공화당은 휴우스톤 텍사스에서 전당대회를 소집하여 죠지 부시 그 당시 부통령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었다. 미국에서의 대통령 후보 지명을 위한 전당대회는 전당 대회의 의미를 넘어서서 하루의 아름다운 정치의 잔치로 그 이름이 높다.
이 지명대회에서 공화당을 대표하는 대통령 후보로 지명을 받은 죠지 부시 대통령은 지명을 수락하는 연설에서 민주당, 저들은 약속만 하지만, 공화당, 우리는 약속을 실천한다고 말하여 만장의 박수를 얻어냈다. 박수뿐만 아니라 텔레비젼을 시청하던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명을 받는 공감대를 만드는데 성공했었다.
기독교 신앙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은 언제나 약속하시고 또 실천하는 분으로 알려져 있다.
약속만 하는 하나님이던지, 혹은 실천만 하시는 하나님이던지, 양자가운데 하나이신 하나님이 아니라 언제나 약속과 실천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신명기적 기록이 우리들에게 강조하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약속을 파기하지 않고 언제나 성실히 수행하시고 실천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약속을 파기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조명해 준다.
*나의 동업자
어떤 사람이 브라질에서 세번째로 큰 도시인 벨로 호리전테에 출판소가 있어서, 그는 적어도 매년 한 번씩 브라질을 여행하며 거기서 선교 사역을 하고 있는 여러 단체를 방문합니다.
한번은 서부 브라질을 떠나 벨로 호리전테로 가기 위해 비행기 출발 시간 수 분 전에 공항 매표 창구에 도착한 적이 있었습니다. 매표 직원에게 그의 목적지를 말해 주자 매표원은 비행기가 출발하기 전에 표를 끊을 충분한 시간이 없다고 완강하게 주장했습니다.
비록 그가 탈 비행기에 좌석이 남아 있었고 하나님이 인도하는 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그것을 타야 했지만 그는 매표 창구에서 돌아나와 거기서 좀 떨어진 곳에 앉았습니다. 그 일에 대하여 그가 기도할 시간을 갖기도 전에 포르투칼어로 방송이 나왔습니다.
“공항이 안개에 싸여 비행기가 이륙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즉시 그는 하나님께서 이사야 65장 24절에서 약속하신 말씀을 기억해 냈습니다.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가방을 집어들고 그는 서둘러 매표 창구로 돌아가서. 비행기를 탈 충분한 시간이 있으니 표를 끊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직원은 마지 못해 이 일을 했고 그가 표를 받자 마자 안개가 걷히고 비행기는 이륙 허가를 받았습니다.
이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가 어떤 일을 할 기회도 갖기 전에 개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공하기를 원하시는데 자신의 성공의 기준에 따라 그렇게 되기를 원하시며, 그는 우리가 자신과 협력하여서만 성공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창조
런던대학의 우주 물리학자인 보이드 박사는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별의 수는 약 10만개이며 최신 전자 망원경을 가지고 한 은하 안에서 볼 수 있는 별의 수는 2,000억개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최신 망원경을 가지고 볼 수 있는 그 전체 우주 속의 별들의 수는 2,000억 x 1,000억 개라는 천문학적 숫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지 못한 별의 수는 얼마나 더 많겠습니까? 또한 지금 반짝거리는 별빛은 10만 광년 전에 반짝였던 빛이 오늘 밤 우리 눈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저녁 별빛이 유난히 반짝이지?" 하는 말은 얼마나 큰 거짓말인지 모릅니다. 이런 것을 공부하는 우주 물리학자인 보이드 박사는 전공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 깊이 깨닫고 찬송가 40장을 자기 신앙의 간증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양수에 감싸여 있는데 그것은 바깥에서 충격이 와도 물이 출렁출렁하기 때문에 태아를 보호하고 또 아이가 계속 성장을 하면서 운동을 해야 하는데 물 속에 있어야 운동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그 후열 달이 되면 양수가 터져서 아이가 나와야 할 길을 깨끗하게 청소해 줍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어머니 뱃속에서 배꼽을 통해서 먹고 배꼽을 통해서 배설하고 배꼽을 통해서 숨을 쉬던 수중 동물이 어머니 배에서 나오는 순간에 수술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해서 입으로 먹고 코로 숨쉬고 밑으로 배설하는 동물로 순간적으로 바뀌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것은 아무도 설명할 수 없는 불가사의입니다. 저는 이 의문점을 제가 인도하는 성경공부 모임에 나오는 어느 유명한 산부인과 의사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그때 그분이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성경공부 모임에 나오죠."
시편기자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함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시138:13). (김인수 교수)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 나침반
**후회 없는 삶
윌리암 보덴 씨는 1904년, 시카고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큰 낙농장의 법적 상속인으로 이미 백만 장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그에게 세계 일주를 시켰습니다. 그는 아시아, 중동 그리고 유럽을 여행하는 동안 고통받는 사람들을 직접 눈으로 보고는 마음에 큰 짐을 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집으로 보내는 편지에다 “나는 일생을 전도사업과 그 일에 대한 준비에 바치겠습니다”라고 썼습니다.
그가 이러한 결심을 했을 때 그의 성경 뒷표지에“지체할 수 없음(No Reserve)"이라고 썼습니다.
예일대학을 졸업하면서 좋은 보수가 보장된 일자리를 거절하고 성경 뒷장에 이번에는“후퇴 없음(No Reter at)"이라고 썼습니다.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중국에 있는 회교도들을 전도하기 위해서 항해하던 중 선교준비를 하려고 우선 이집트에 들렀습니다. 이곳에서 그만 뇌막염이 발병하여 한 달도 못되어 사망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겠지요.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던 게야. 헛된 일을 했었군!”
그의 성경 뒷장에는 위에 썼던 두 가지의 결심 밑에“후회 없다(No Regret)"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우리 생애의 어떤 때든지 적용이 됩니다. 지금 나는 이 순간에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를 자신에게 물어 보십시오. 내 가슴에서 타오르는 열정은 무엇입니까. 남은 여생을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잊혀진 땅에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 것인가?
올해에 우리 자신을“지체함이 없이”,“후회함이 없이”그리스도께 순종하도록 결심합시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성공하든지 고난을 만나든지 간에 언제라도 하나님의 본향으로 부르실 때“후회는 없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완전한 굴복
어떤 젊은 아가씨가 전도자에게 완전한 헌신의 주제에 관하여 이야기했다.
“나는 도저히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드리지를 못해요”
그녀는 말했다.
“그가 나를 비참하게 될 선교지에다 보낼까 두렵거든요.”
그 전도자가 대답했다.
“어느 춥고 눈 오는 날 아침에 한 마리 작은 새가 반쯤 얼어 붙은 채 당신의 창을 쪼고있다고 생각해 보시오. 이 무력한 어린 새가 당신에게 붙들려 자기를 먹여 주도록 또 자신을 완전히 당신의 통제하에 맡겨버린다고 상상해 보시오. 이럴 때 당신은 어떻게 하렵니까? 말해 보시오. 당신 손 안에 움켜 쥐어 눌러버리겠습니까? 아니면 피난처와 따뜻함과 먹이와 보호를 베풀겠습니까?”
즉시 그 아가씨의 두 눈은 그 말의 뜻을 깨닫고 빛이 났다. 여러 해 후 그녀는 다시 그 전도자를 만났으며 그로 인해서 둘 사이에 있었던 대화를 기억나게 했다. 그녀의 표정은 다음과 같은 설명의 말을 할 때 후끈 달아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부르사 선교지에서 일하게 했어요. 내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합니다.”
그녀의 체험은 모리스의 이와 같은 말로 요약할 수도 있을 것이다.
“승리하신 구주여. 당신의 귀중한 뜻이 이제 나를 품고 에우나이다. 모든 불화는 잠들고 내 평화는 강물이오니 내 영혼, 갇힌 새가 자유케 되도다.”
완전한 굴복은 꽃이 뿌려진 길과 구름 없는 날들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구주의 임재하심과 그의 인도하시는 손길의 안정성을 확신한다. 두려움은 변하여 믿음이 되며 우리는 이처럼 노래할 수가 있다.
“자비로운 하나님의 뜻이여 여전히 나를 보다 더 가까이 두르고 있도다 내가 당신 안에 완전히 죽어질 때까지.”
** 하나님까지 잃어버리면
기독교 방송 드라마에 맹인 목사인 윤인수 목사의 간증 드라마가 방송된 적이 있습니다. 중병으로 앓아 누워 있는 어머니를 간병하기 위해 어린 소년 윤인수가 길거리에 나가 신문을 팔고 구두닦기를 시작했습니다.
친구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앞을 보지 못하는 윤인수로서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윤인수는 열심을 일을 해서 돈을 벌었습니다. 기뻐하며 그 돈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에게 돈을 내놓았습니다. 십일조를 내자는 어머니의 말에 인수는 버럭 화를 내었습니다.
"십일조는 무슨 놈의 십일조인가, 하나님이 우리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단 말인가, 나의 눈은 멀게 했고 엄마는 병들게 했고 공산당에게 쫓겨 피난민 신세가 되게 했고 재산도 다 빼앗기게 한 그런 하나님께 무슨 놈의 십일조를 내라느냐"며 항변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병든 어머니는 어린 아들의 손목을 꼬옥 쥔 다음 "인수야 고향 잃어버린 것도 한스럽고 집 잃어버린 것도 원통하고 건강 잃어버린 것도 서러운데 하나님까지 잃어버리고 믿음까지 잃어버리면 뭐가 남겠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이야기는 건강한 삶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멀리하고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지금 당장 하나님께로 돌아와 잃어버린 믿음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될 절박한 상황에 처한 모든 사람들에게 엄청난 교훈과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우리 모두는 치료받고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육신의 눈과 「영의 눈」
신앙에 갓 눈을 뜬 청년이 있었다. 그는 하나님을 두 눈으로 보고 싶었다. 어느 날 교회 목사를 찾아가 하나님을 보게 해달라고 졸랐다. 구름이 한 점 없이 맑은 날, 목사는 학교 운동장으로 청년을 불러내 눈부신 태양을 가리키면서 "저 태양을 자세히 보라"고 말했다. 잠시 태양을 바라보던 청년은 고개를 푹 숙이며 눈이 부셔서 도저히 못 보겠다고 했다. 그러자 목사는 청년의 어깨에 손을 얹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여보게, 저 태양도 눈부셔 제대로 못 보면서 태양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그 밝은 영광의 빛을 보려 하는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라
유대인들의 육아법 가운데는 이런 것이 있다. 어린 자녀가 차츰 자아의식을 형성해 가면 아이들과 신나게 놀던 아빠가 어느 날 갑자기 그 아들을 홱 던져버리고 냉정하게 돌아선다.
꼬마는 평생 처음 당하는 엄청난 쇼크에서 쉽게 헤어날 수가 없게 된다. 그들은 이런 경험을 통하여 인간에게는 까닭 없는 배신이 있다는 것과 인간은 이렇게 변화무쌍한 존재라는 것을 몸으로 체험하게 된다. 어린 아들로서는 실로 감당하기 어려운 이런 절망과 배신을 딛고 또 다시 아빠 품으로 돌아오면 그렇게 자기를 사랑하고 믿음직스러운 존재였던 아빠가 다시 한번 호되게 밀쳐내 버린다.
어린 아들에게 아빠는 사랑의 대상이요 다정한 친구요 자신의 삶은 몽딴 송두리채 책임지고 있는 존재로서 이 아이에게만은 하나님을 방불한 실존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까닭 없는 배신의 아픔은 어린이가 재대로 소화하기에 힘겨운 과제임이 분명하다. 이럴 때 아빠는 자기 아들에게 "아들아 사람을 믿지 말아야 한다. 심지어 이 아빠가지도 너를 배신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고 교훈한다. 그리고 인간이 영원히 믿을 수 있는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라고 가르친다.
성경은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46:3-5)
한눈에 매정해 보이는 유대인의 아비들은 이 진리를 아이들에게 바로 가르치기 위하여 애간장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참고 견디며 이런 방법으로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자기 나라 없이 온 세상을 부평초처럼 떠돌아다니면서도 2천 수백년 동안 자기들의 민족성을 굳게 지키고 오늘의 세계를 이끌어 가는 힘의 상당 부분은 이와 같은 육아법에서 기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떠한가?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나만 굳게 믿어라 나는 너를 위하여 모든 것을 준비해 놓았단다 너는 아무 걱정 말고 편하게 살아라"라는 식으로 아이들을 키우고 있지 않는지. 자녀들에게 유산을 물려주는 것, 시집가는 딸에게 엄청난 혼수를 장만해 주는 것 등이 바로 그 구체적인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뿐만이겠는가? 엄마는 아이들의 학교 성적까지 책임질 작정으로 맹렬한 치맛바람을 날리고 다니지 않는가?
이런 식의 육아법은 결국 자녀들로 하여금 남을 의지하는 졸장부로 만들고 또 지극히 무기력한 인간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렇게 성장한 사람들은 하늘같이 믿었던 인간으로부터 배신을 당하면 그 엄청난 충격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결과 적으로 파탄의 인생을 살게 됨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인간은 결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치고 오직 하나님 외에는 우리가 진정으로 믿을 수 있는 자가 없음을 가르쳐야 한다.
*하나님의 방법
윗치만 니라는 유명한 성도는 자기가 좋아하는 여인에게 결혼을 요청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고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거절을 당했습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더 이상 그 여인에게 요청하지 않고 그 문제를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런데도 그 여인의 생각이 계속 그의 마음 속을 지배했습니다. 그는 그 여인과의 결혼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께서 문을 열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문제를 하나님께 모두 맡겼습니다.
그로부터 10년 후 그는 우연히 다른 장소에서 그 여인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께서 마음을 주셔서 두 번째 요청을 했습니다. 이때에 이 여인이 허락을 해서 10년 전에 사랑했던 여인과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그가 하나님께 헌신되지 않은 사람일 경우에 인간적인 욕정을 이기지 못하고 10년간이나 계속해서 그 여인을 따라 다녔다고 합시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러나 그는 자신의 결혼 문제를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는 주의 뜻을 구하는 훈련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의 때가 찼을 때 하나님의 방법으로 결혼을 하게 되어 아름다운 결혼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그는 후에 간증을 남겼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경을 잘 살펴야 합니다.
*행동하는 믿음
1971년 파리에서 설립된 MSF는 정치, 종교, 국적을 초월한 일곱 명의 의사나 간호원들이 회원으로 가입해 있다. 80% 이상이 여성들인 이들은 사상 최악의 기근에 시달리는 아프리카의 이디오피아에서 의술을 베풀고 있다. 전쟁과 재난에 시달려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곳마다 구원의 인술을 베푸는 것이다. 그 중 한 프랑스인 여의사는 "우리들에겐 국경이 없고 다른 사람들이 가지 않는 곳만 골라서 간다"라고 했다. 그리고 영국인 간호원은 "배고픔 때문에 혼수 상태가 된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온다. 그들에게 포도당을 주면 조금씩 깨어난다. 마치 시든 꽃이 피어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어린아이의 믿음!!!
어느 한 작은 마을이 있었습니다. 그 작은 마을에 가뭄이 닥쳐왔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들 가뭄이 빨리 그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들 비가 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모두 산에 올라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오랜 기도를 끝내고 모두들 나오는데 정말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모두들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모두들 우산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나오더니 우산을 쫙 피고는 유유히 그 빗속을 걸어 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이만이 우산을 들고 왔던 것입니다. 그 아이의 작은 믿음이 하나님을 감동시킨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믿음으로 기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 로마 교황의 죄의 고백
기독교인들의 경계심을 풀게 하고 모든 종교를 하나로 묶어 중세기 교황의 권위를 되찾기 위한 또 하나의 기괴스러운 징조가 아닌지 경계해야 할 것이다.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지난 3월 12일 정기 미사를 통해 기독교 2000년 역사상 처음으로 인류에게 범한 교회(카톨릭)의 죄를 고백하였다.
첫째, 유대인 박해이다.
지난 2000년간 로마 교회는 반유대주의를 표방하였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는 이유로 초기 기독교는 유대인을 원수로 여겼으며, 이후부터 유대인은 멸시받는 민족이 되었다. 교회의 유대인 탄압이 본격화 된 것은 11세기 십자군 원정 때부터로 이후 유대인은 전염병을 옮기고, 영아유괴나 일삼는 천민으로 취급받게 되었으며, 유대인에 대한 박해는 세계1, 2차 대전을 치르면서 전 유럽으로 확대되어 2차 대전시 유대인에 대한 나치 독일의 학살 즉 홀로코스트라는 엄청난 비극을 낳기도 하였다.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과 다윗,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온 유대민족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임으로 받는 민족적 고통이었다.
둘째, 피로 점철된 십자가 원정이다.
1095년 교황 우르반 2세가 실지(失地)를 회복하라는 칙령을 내리면서 시작된 십자군 원정은 성지회복이라는 미명아래 이슬람과 유대민족을 살육하는 피의 전쟁을 일으켰다. 십자군 병사들은 점령지를 약탈해갔고, 상인들은 자신들의 사업기반을, 교황은 자신의 영향력 확대를 목적으로 하는 철저한 이기주의적 원정전쟁이었다. 영국의 교회사학자인 폴 존슨은 이 사건으로 기독교(카톨릭)와 이슬람이 공존할 기회를 영영 잃게 되었다고 한탄하였다.
셋째는 마녀사냥이라는 교회의 가혹한 형벌이다.
신앙과 진리를 수호한다는 미명아래 교황권이나 교회권에 도전하는 세력들을 마녀로 정죄하고, 화형식이라는 혹독한 고문으로 처형하였다. 12세기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 프레드릭 2세가 신앙자백의 수단으로 이러한 고문을 도입했고, 교황 이노센스 4세는 이를 승인함으로 15세기경 유행처럼 번진 마녀 화형식은 이후 일백 년 동안 온 유럽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넷째는 신대륙의 원주민 무차별 학살 방조이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신대륙 발견 이듬해인 1493년 당시 교황 알렉산더 6세는 기독교 선교와 이문화 척결이라는 명분으로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신대륙에 대한 주권을 인정하고, 원주민 정복활동을 옹호하였다. 이후로 아메리카 신대륙에서는 대대적인 원주민 학살극이 벌어졌다. 그 결과로 16세기 멕시코 원주민 수는 1500만 명에서 300만 명으로 줄었다.
그동안 세계사와 교회사를 통해 들어오던 역사적 사실들이었지만 막상 현존하는 교황이 스스로 밝혔다는 면에서 충격이 더욱 크다 하겠다. 진정한 기독교 정신에 반하는 가혹한 행위들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천하보다 귀한 생명들을 그것도 교회의 이름으로 학살을 자행한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전율케 한다. 이런 엄청난 과오를 가지고서도 십 수세기를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논하였던 로마 교황청과 그 교회 그리고 화려한 복장으로 치장한 저들의 뻔뻔스러움은 회칠한 무덤을 연상케 한다.
이제 새 천년을 맞는 벽두에 새삼스레 교황이 공개적으로 죄를 고백하고 나선 그 저의가 무엇인가? 일반적인 시각은 유대인과 이슬람권의 화해를 통해 카톨릭이 주장하는 종교일치주의의 주도권 강화를 노리고 있다는 것이다.동서 냉전이 종식되고 국경 없는 지구촌 시대를 맞아 경제만이 국가적 선으로 치부되는 과정에 교황청의 권위는 날로 약화되어 가는 현실을 타개해보자는 역설적인 방안으로 제시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어느 신학자는 교황의 죄의 고백으로 일반 그리스도인들이나 순수 신앙을 가진 카톨릭인들이 잘못된 안도감에 빠지지나 않을까 염려하고 있다. 그것은 중세기 교황청이 범한 역사적인 4가지의 죄의 고백만으로 카톨릭에 대한 지금까지의 부정적인 면들이 제거되었다는 경계심을 풀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알기로는 진정한 죄의 고백이 회개에 이르려면 과거의 죄뿐 아니라 현재의 잘못된 부분도 인정하고 고백하며 용서를 빌어야 한다. 그것은 또한 성명서나 미사를 통해 말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천주교회가 만들어 놓은 교황무오설을 비롯한 수많은 교리와 잘못된 제도 등 모든 것을 성경말씀에 의지하여 바르게 고치는 또 하나의 종교개혁적인 행동실천이 앞서야 한다. 카톨릭이 추구하는 종교일치주의 운동은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으며, 그 구원의 방법은 조금씩 다른 것을 인정하고, 화해와 일치로 합력하여 세계평화를 이룩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화합과 일치와 평화를 앞세워서 모든 종교를 끌어들여 저들의 영역을 확대해 가자는 것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신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아니하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로마 교황의 4가지 죄의 고백은 기독교인들의 경계심을 풀게 하고 모든 종교를 하나로 묶어 중세기 교황의 권위를 되찾기 위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또 하나의 기괴스러운 말세적 징조가 아닌지 경계해야 할 것이다.
**콜롬비아 바이블 칼리지 학장 - 로벗슨 맥퀼킨이 있습니다. 그의 아내는 무리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내 무리엘이 알차 하이머 병을 앓게 되었습니다. 맥퀼킨은 학장직을 사임했습니다. 아내 간호의 길에 나서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만류했습니다.
"후학들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학교는 당신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이때 맥퀼킨 학장은 두 마디 말을 남기고 그 학교를 떠나갑니다.
"지난 사십년 동안 내 아내는 내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였습니다. 지난 사십년 동안 내 아내는 나 하나만을 위해서 희생하며 살아왔습니다. 지금은 아내가 나를 필요로 합니다. 지금 이 시간부터는 내가 아내를 위해서 희생해야 할 필요가 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내 곁으로 돌아갑니다"
"학장직이야 교수 일이야 내가 아니고서도 얼마든지 다른 사람이 감당할 수 있습니다. 아니 나보다 더 잘 감당하는 젊은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무리엘의 남편은 내가 아니면 그 누구도 될 수가 없습니다. 무리엘이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미국 이민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민간지 20년 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국을 떠나기 전 800여명 모이는 교회를 다녔는데 교회 안에 문제가 생겨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신앙적으로 큰 상처를 받으며 그가 생각한 것은 완전한 교회를 다녀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됐고 뉴욕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는 교회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일 좋은 교회라는 모 교회에 등록을 했습니다. 그런데 일년쯤 지난 어느 날 더 좋은 교회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슬며시 찾아갔더니 지금 다니는 교회보다 설교도 좋고 성가대도 잘하고 성경공부도 다양했습니다. 그래서 더 좋은 교회로 옮겼습니다.
그런지 7개월쯤 지난 어느 날 더 좋은 교회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슬며시 찾아가 보았습니다. 다니는 교회보다 모든 게 좋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옮겼습니다. 1년 반 쯤된 어느 날 뉴져지에 더 좋은 교회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 보았습니다. 정말 좋았습니다. 그리고 안 옮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20면 동안 18교회를 옮겼습니다. 어느 날 정말로 좋은 교회가 있단,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교회인가 알아 봤더니 20년 전 재미 없다고 더 좋은 교회를 찾아 떠난 바로 그 교회였습니다.
내가 좋은 교인이 되면 교회는 절로 좋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못된 짓만 골라 하면 교회는 절로 못 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유는 내가 교회의 손가락이고 발가락이기 때문입니다.
**자동차 왕 헨리 포드가 1883년에 동네 사람들의 비웃음 가운데서도 끝까지 자동차 발명에 몰두하여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그의 아내의 헌신적인 믿음과 격려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 있는 그의 기념관에 가면 이런 글귀가 있다고 합니다.
"헨리 포드는 꿈꾸는 자이고, 그의 아내는 믿음의 사람이다."
이처럼 아내는 '바라는 배필'이 아니라 '돕는 배필'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의 부족한 점이 발견되면 비난하기보다는, 그것을 채워주는 것이 아내의 본분입니다.
**미국 초대 대통령 죠지 워싱턴의 어머니에게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아들을 어떻게 키웠기에 위대한 대통령이 될 수 있었습니까? "
"저는 아들에게 하나님께 절대 복종하는 법을 가르쳤습니다"라는 것이 어머니의 대답이었습니다.
순종을 배우고 가르쳐야 합니다.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카네기홀에서 연주회를 열고 있었습니다. 두 명의 목사님이 연주회 관람을 위해 객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날 객석은 초만원이었습니다. 1부 연주가 끝나고 쉬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A목사 교회는 언제쯤이나 오늘 이 연주회 관객처럼 차고 넘칠 수 있겠소"
A목사님의 대답은 "우리 교회에도 지휘자의 지휘에 전적으로 따르고 순종하는 100명만 있으면 객석이 차고 넘치게 될 수 있을 것이요"라는 것이었습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지휘자의 지휘를 따르지 않는다면 연주는 실패합니다. 그리고 음악팬들은 그런 연주 때문에 연주회장을 찾지 않을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나는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순종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세계적인 인물로 인류에게 큰 업적을 남긴 사람 중에서 부부 생활은 아주 불행하게 산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 세 명을 들라면 아마 톨스토이, 링컨, 소크라테스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러시아의 문호 레오 톨스토이의 부인은 임종할 때 머리맡에 딸들을 불러놓고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것은 내 탓이었었다."
톨스토이의 생애의 비극의 원인은 아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의 아내는 화려함을 원하는데 그는 그것을 경멸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사회적 명성이나 칭찬을 갈망하고 있었으나 그에게 있어서 그런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아내는 부를 동경하고 있었으나 그는 부를 죄악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저서의 인세도 받을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일로 아내는 화를 내고, 울기도 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몇 년 동안 집요하게 그에게 정신적으로 고통을 주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으면 발작을 일으켜서 그를 위협했습니다. 1910년 10월 어느 눈 내리는 밤, 83세의 톨스토이는 가정의 불화를 참고 견딜 수 없는 나머지 정처 없이 집을 나오고 말았습니다. 11일 후 그는 어느 역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그에게는 아내를 절대로 곁에 오지 못하게 해달라는 것만이 소원이었다고 합니다. 그녀의 입장에서도 불평을 말할 만한 이유는 충분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결혼 생활은 비극으로 끝이 났습니다.
링컨의 생애를 비극적으로 만든 것도 역시 결혼이었습니다. 링컨의 아내는 세상에 보기드문 잔소리 많은 여자로서 20년 이상의 결혼생활 동안 링컨을 곤경에 몰아넣었습니다. 그녀는 매일 남편에게 불평 불만과 비난을 퍼부어 댔었습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링컨에게 좋은 점이라곤 하나도 없었습니다.
"등도 굽은데다 걸음걸이도 보기 흉하다, 인디언 그대로다, 귀모양과 얼굴모습이 온통 마음이 안든다."는 것이었습니다. 링컨은 아내와는 모든 점에서 대조적이었습니다. 성장과정, 기질, 취미, 사고 방식 등 무엇 하나 공통된 것이 없었습니다. 링컨은 가능하면 그녀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변호사 시절 봄 3개월과 가을 3개월을 순회 재판에 나가면 결코 집에 오지 않았습니다. 언젠가는 링컨이 재빨리 불을 피우지 못하자 매리가 장작개비로 그의 얼굴을 때려 그는 다음날 상처난 코에 반창고를 붙인채 출근한 일도 있으며 매리는 남편의 얼굴에 커피를 뿌리고 빗자루로 때렸는가 하면 그를 집밖으로 내쫓기도 하고 책이나 감자를 집어던지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번은 아내가 소크라테스에게 잔소리를 퍼부은 뒤 그래도 성이 안 찼는지 물통에 담긴 물을 머리에 부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빙긋이 웃으며 "천둥이 친 다음에는 소나기가 오게 마련이지"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아니, 어떻게 대 철학자가 저런 부인과 사는가?"
주위에서 물을 때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사나운 말을 타고 연습을 하면 어떤 말도 다룰 수 있지. 아내를 다룰 수 있다면 어떤 사람인들 다루지 못하겠나?"
소크라테스는 학식 있는 대 철학자였습니다. 링컨은 최고의 권력을 가지고 통치한 미국인들에게 존경받는 훌륭한 대통령이었습니다. 톨스토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준 명작을 남김 대 문호입니다. 그들에게는 권력도, 학식도, 돈도, 명예도, 건강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의 가정 생활은 불행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행복한 부부생활을 누리지 못했을까요?
그 원인은 여러 가지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부부의 잘못된 관계 때문입니다.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데 중요한 요소는 원만한 인간관계입니다. 인간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면 아무리 권력이 있고, 물질이 많고 건강하고 잘생긴 용모를 가지고 출세하였다해도 행복한 가정 생활을 누리지 못합니다. 이것은 학문적으로 밝혀진 사실입니다.
미국의 사회 심리학자들은 다섯 항목의 만족도 지표와 기쁨과 비참함 사이를 일곱 단계로 구분한 기준표를 사용하여 행복의 본질을 측정해 냈습니다. 그런데 행복의 첫째 조건은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성공이나 젊음, 잘생긴 용모 등보다는 "원만한 인간 관계"가 꼽혔습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글에 아버지가 시집을 가는 딸에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딸아 만일 네가 남편을 왕처럼 존경한다면 그는 너를 여왕처럼 우대할 것이고, 만일 네가 너무 자존심을 내세워 그에게 봉사하기를 싫어하면, 그는 힘으로 너를 하녀같이 부릴 것이다. 만일 남편이 친구 집을 방문하러 갈 때는 목욕도 하게 하여 몸치장을 잘해서 보내도록 할 것이고, 남편의 친구가 놀러 올 때는 극진히 대접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남편으로부터 사랑을 받게 될 것이다. 언제나 가정에 마음을 쓰고 그의 소지품을 귀중히 여겨라. 남편은 기꺼이 네 머리 위에 관을 씌울 것이다"
**한 부부가 부부싸움을 하고는 몇 일 동안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남편이 아침 일찍 회사를 가야했기 때문에 부인에게 먼저 말을 걸기 싫어서 테이블 위에 메모를 남겼습니다.
'아침 6시에 깨워 줘.'
다음날 아침 남편이 침대에서 일어나자 시간이 10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화가 난 남편이 부인을 찾으러 일어나는데 테이블 위에 메모지가 놓여있었습니다.
'6시에요. 빨랑 일어나서 나가요!'
**19세기 말엽. 미국의 미시간 주, 데트로이드 시의 전등회사에 포드는 다녔습니다. 그는 날마다 10시간씩 일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뒷뜰에 있는 낡은 오두막집에 틀어박혔습니다. 새로운 엔진의 제작을 위해 밤이 깊도록 일에 몰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농부였던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쓸데없는 짓 때문에 시간을 낭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웃 사람들은 이 젊은 기사를 놀림감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그의 아내만은 그를 믿었습니다. 집안 일이 끝나면 반드시 그 오두막집에 나타나 남편을 도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내를 '나의 信者'라고 불렀습니다. 포드는 자동차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로부터 50년 후, 포드는 다시 태어난다면 무엇이 되고 싶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변했다고 합니다.
"내 아내와 같이 있을 수만 있다면 무엇으로 태어나건 전혀 개의치 않겠오."
**1945년 7월 16일 5시 30분에 뉴멕시코 사막에서 태양의 1000배가되는 섬광을 밝히면서 최초의 원자탄이 폭팔 되었습니다. 미국 의회에서 쇼펜하우러 박사가 이 무서운 무기에 대하여 설명했을 때 의원들은 두려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여 그것을 막을 무기는 없는가 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박사는 이 원자탄 무기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사랑이라는 무기뿐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 회퍼는 결혼을 앞둔 조카 딸에게 "결혼이란 서로 사랑하는 것 이상이란다. 결혼은 사랑보다 지고한 존엄성과 힘을 지닌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결혼은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 명령을 통해 세상 끝까지 인류를 존속시킬 뜻을 가지고 계시단 말이다. 너희들이 연애중일 때는 세상에서 단 두 사람만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결혼 생활에서는 네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세대를 연결하는 사슬의 고리가 되는 것이야.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연애 중일 때는 네 행복의 천국만을 보았지만, 결혼 생활에서는 이 세상과 인류를 위한 책임을 지는 것이야. 그러니 앞서 말한 답이 나온 셈이다. 네 사랑은 네 자신의 개인 소유지만, 결혼이란 개인적인 것. 이상이란 말 뜻을 이제 알았겠지. 그렇다면 마음에 새겨두기를 바란다. 결혼은 하나의 사회적 신분이고 임무라는 것을...."이라고 결혼 축하문을 보내었습니다.
결혼이란 단순히 남녀가 만나는 차원 그 이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