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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답 스크랩 송은 박익
凡常 추천 0 조회 151 14.09.16 20:2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8세(44세) 익 (翊1322-1398)


  문헌(文獻)공의 큰아드님이시다. 자(字)는 태시(太始)이며 고려 충숙왕(1322)19년 7월 27일 출생 하셨다. 처음 이름은 천익(天翼)이고 호는 송은(松隱)이다. 처음에는 송계(松溪)라는 호를 쓰기도 하였다. 공민왕 때 등제(登第)하여 벼슬이 예부시랑(禮部侍郞)[1]?세자이부(世子貳傅)[2] 중서령(中書令)[3]에 오르시었다. 남쪽에서 노략질을 해오는 왜구를 토벌하고 북쪽으로는 여진을 토벌하는 공을 세우셨다.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밀주(現 密陽) 송계(松溪)로 이거하여 문을 닫아걸고 세상에 나오지 않으셨다. 목은(牧隱) 이색(李穡)[4], 야은(冶隱) 길재(吉再)[5]와 뜻을 같이 하여 고려에 충절을 지켜 고려충신 8은(隱)[6]의 한사람으로 존경을 받았다. 조선 건국 후 태조 이성계가 다섯 번이나 벼슬을 주어 불렀으나 끝까지 나아가지 않으셨으며(五徵不就)[7] 조선 태조 7년 (1398) 1월 17일 영면(永眠) 하시었다.

 임종을 맞이하여 네 분 아드님을 불러 앉으시고 유계(遺戒) 하셨는데 “나는 고려의 신하로 남아 죽지만 너희들은 이미 조선의 백성으로 살고 있으니 신민(臣民)의 도리와 충성을 다하는 사람이 되거라” 하시고 “선천과 후천의 부자간의 갈 길이 다르니라”(吾歸王魂 汝在李家旣爲人臣忠則竭力 先天後天父子異時) 하셨다.

 춘정(春庭) 변계량(卞季良)[8]의 주청(奏請)으로 좌의정(左議政)[9]에 증직(贈職)되고 충숙(忠肅))의 시호를 받으셨다. 정종임금[10]이 제문을 내려 읊되,

 

 고운 절개와 곧은 마음은

 난리를 당해서도 둘이 아니다.

 밝은 윤리와 도리를 다하여

 인간의 기강을 세웠구나.

(貞節專心 臨亂不貳 明倫益道 立人之紀)


하였다.

 순조 계사년(1833) 밀양 덕남서원(德南書院)[11]에 우당(憂堂)?인당(忍堂) 두 아드님과 같이 배향(配享) 되었다. 2년 뒤 을미년(1835)에 경북 청도군 용강사(龍岡祠)[12]에 영정(影幀)을 봉안하였고 5년 뒤 기해년(1839)에 단성 신계서원(新溪書院)[13]에 아당(啞堂)?졸당(拙堂) 두 아드님과 같이 배향 하였다. 문집으로 송은집(松隱集)[14]이 간행되어 세상에 전해온다. 묘소는 밀양군 청도면 소고야(所古夜) 간좌(艮坐)이다. 사대석이 있다.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15]가 묘표(墓表)를 지었으며 참판(參判) 이휘령(李彙寧)[16]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있다. 배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성산배씨(城山裵氏)로 아버지는 이상(貳相)을 지낸 배현보(裵賢輔)이며 묘는 합부(合부附)되었다. 후배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창원 박씨(昌原朴氏)로 아버지는 보승낭장(保勝郎將)을 지낸 박충민(朴忠敏)이다. 또 후배는 정경부인  고흥 유씨(高興劉氏)로  아버지는 판결사( 判決事) 유인기(劉仁杞)이다. 후배(後配) 두분 할머니의 묘소는 어디인지 알 수 없다.

네 분의 아드님 융(融)?소(昭)?조(調)?총(聰)이 있으며 군수를 지낸 손혁(孫奕)과 조공현(曺功顯), 도순찰사를 지낸 손억(孫億)은 사위이다.


송은(松隱)공의 형제


☆8세(44세) 천경(天卿)


 초 휘는 상(翔. 자는 자시(子始). 호는 송와(松窩). 벼슬은 중정대부전객령(中靖大夫典客令)에 이르고 밀성군에 봉해지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8세(44세) 문경(文卿)


자는 성시(聖始). 호는 송제(松濟). 벼슬은 도순찰사(都巡察使)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이르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관련 주]


[1]▶예부시랑(禮部侍郞)

   고려 시대의 6부(六部) 가운데 외교와 교육을 관장하는 부서의 차관급  벼슬.


[2]▶세자이부(世子貳傅)

  고려 충열왕 때 설치한 세자를 가르칠 스승을 이름한다. 세자사(世子師)의 버금가    는 벼슬. 세자부의 다음 벼슬로 세자보가 있다.


[3]▶중서령(中書令)

  고려 때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종 일품 관직.


[4]▶목은 이색(牧隱 李穡1328 - 1396)

  고려 말의 성리학자. 시호는 문정(文靖). 본관은 한산(韓山). 정주학(程朱學)을 퍼    트려 조선 성리학의 주류로 발전 시켰으며 고려 말의 학문과 정치에 큰 발자취를    남기었다.


[5]▶야은 길재(冶隱 吉再1353-1419)

  자는 재부(再父). 호는 야은(冶隱). 시호는 충절(忠節). 본관은 선산(善山). 이색?    정몽주? 권근에게 학문을 익힘. 성리학자. 1386년 진사에 합격하여 성균관 학정(    (成均館 學正) 문하서주(門下書注)를 역임 함. 고려가 망하고 태종이 벼슬을 주어    불렀으나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고 하여 벼슬을 사양하였다. 세상은 그의 충절    을 높이 여겨 포은? 목은과  더불어 여말 3은(麗末 三隱)이라 칭하였다.


[6]▼여말 8은(松京志 參照)


  ①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1337 - 1392)

  ②동은 이재홍(桐隱 李載弘).

  ③만은 홍재(晩隱 洪載).

  ④목은 이색(牧隱 李穡1328 - 1396)

  ⑤휴은 이석주(休隱 李錫周).

  ⑥성은 김대윤(成隱 金大潤).

  ⑦야은 길재(冶隱 吉再1353-1419)

  ⑧송은 박태시(松隱 朴泰始1322 -1398)


[7]▶오징불취(五徵不就)


  조선 건국 후에 이성계(李成桂)가 송은 선생에게 공조판서를 주어 불렀으나 취임    하지 않았고 이어서 형조판서? 예조판서? 이조판서를 차례로 주어 불렀으나 응    하지 않았으며 그 뒤 좌의정으로 임명하였으나 역시 응하지 않았다. 고려에 충절    을 다하기 위함이다.


[8]▶변계량 (卞季良1369-1430 )

  조선 태종 때의 문신. 자는 거경(巨卿). 호는 춘정(春亭). 본관은 밀량. 고려말 이    색의 제자. 17세에 문과에 급제. 고려조에 전교주부(傳敎主簿), 진덕박사를 지냈고    조선에서는 중랑장(中郞將), 의학교수관(醫學敎授官). 태종조에 예조참의(禮曹參     議)를 역임하고 세종조에는 대제학(大提學)과 우군도총제부사(右軍都摠制府事)를    지냈으며 시문을 잘하여 문명이 높았다. 시조작품이 다소 전해온다.


[9]▶좌의정(左議政)

 조선시대 의정부(議政府)에 속한 종 일품의 관직. 삼정승(三政丞)에 해당한다. 오늘   날의 부총리(副總理) 격.


[10]▶정종(定宗)

  조선 제 2대 임금. 초명은 방과(芳果). 시호는 공정(恭靖). 태조 이성계의 둘째 아    들. 관제의 일부를 개혁하고 사병을 삼군부(三軍府)로  편입시키는 한편 지폐를     발행한 업적이 있다.


[11]▶덕남사(德南祠) 

  경남 밀양군 초동면 모선정 경내(境內)에 있다.(송은? 우당 ?인당을 모심)


[12]▶용강사(龍岡祠) 

  경북 청도군 이서면에 위치해있다.(송은공의 影幀을 모심)


[13]▶신계서당(新溪書堂) 

  경남 산청군 신안면 문대리 진태 마을에 위치해있다.(송은? 아당 ?졸당을 모심)


[14]송은 선생문집(松隱先生文集)


 지금 전해오는 송은 선생 문집 1책은 조선 후기 순조 때 만들어진 것이다.

병조판서 홍명주(洪命周)가 서문을 짓고 규장각 검교(奎章閣 檢校)와 전교(傳校)를 지낸 조두순(趙斗淳)이 유고(遺稿)의 서문을 썼다. 송은 선생이 남긴 글, 한시 16수와 잠송(箴誦) 2편 결루(缺漏)된 유서 몇 줄이 전부이다. 4권 1책으로 된 문집의 내용을 보면 1권에는 송은 선생이 창작하신 한시 16수와 송은 선생의 시에 차운(次韻)한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정제 박의중(貞齊 朴宜中), 야은 길재, 춘정 변계량, 이우당 이경(二憂堂 李瓊)의 시 17수를 비롯하여 문으로는 입지잠(立志箴)과 지신잠(持身箴) 각 1편, 유서(遺書) 등이 실려 있다. 2권에는 송은 선생에게 주는 목은 춘정 이지란(李之蘭) 포은 이이우당 경의 시문 6수와 김맹성(金孟誠)이 쓴 만장(輓章), 송은 선생의 영정(影幀)을 찬(讚)한, 야은과 춘정의 화상찬(畵像讚), 춘정이 쓴 뇌묘소문(뢰墓所文: 술을 땅에 따르면서 묘소에 고유하는 글), 시호를 청하는 청시서장(請諡書狀). 시호삼망(諡號三望 : 忠肅 忠僖 僖敏), 1399년 정종임금이 시호를 내린 강시(降諡)문과 사제문(賜祭文), 묘소고유문(告由文), 분황고유문(焚黃告由文)을 비롯하여 1400년에 작성한 황희(黃喜)가 쓴 묘표(墓表) 가 실려 있으며 3권은 부록으로 예조참판 유태좌(柳台佐)가 쓴 행장(行狀),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을 지낸 이화(李?)가 쓴 실적(實績), 이병원(李秉遠)이 작성한 유사(遺事), 청주 목사 이휘령(李彙寧)이 지은 묘갈중건문(헌종4년 1837년), 규장각 부제학(奎章閣 副提學) 이병관(李炳觀)과 안동 김영한(金寧漢)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과 덕남서원과 용강사에 관한 각종 기문(記文)으로 되어 있으며 4권은 속집(續集)으로 신계서원영건실기(新溪書院 營建實記) 및 상량문(上樑文) 영정봉안문(影幀奉安文) 등이 문집의 구본(舊本)서문(序文)과 함께 실려있다.

 1977년에 송은 선생 문집 국역본이 간행되었는데 성균관 대학 이우성(李佑成) 교수가 국역하고 시인인 노산 이은상(鷺山 李殷相)은 시문을 한글로 옮기고 서문을 썼다.

 당초에 송은 선생의 문적(文蹟)과 가승(家乘)은 병화를 겪으면서 말끔히 잃어 그 기록을 살펴볼 수 없어 후손들이 매우 안타까워하든 가운데 조선 후기 순조 조 연간에 기이하게도 잇달아 송은 선생의 유품들이 발견되었다. 당초에 정씨(丁氏)집안에서 편찬한 정씨성보(丁氏姓譜)와 밀주구지(密州舊誌)에 송은선생의 관직(官職)과 증시(贈諡) 등의 실적(實積)만 겨우 찾아 볼 수 있었는데 그 이후에 산청 단성의 후손 모씨가 발견한 송경지(松京志) 팔은록(八隱錄)의 찢어진 서적의 일부와 이어서 경상북도 자인(慈仁)에 사는 박씨 과붓집 편지 상자 속에 있던 불타고 남은 종이 뭉치에서 송은 선생의 유시(遺詩) 약간과 조정에서 사제(賜祭)한 글, 송은선생이 여러 현인들과 수창(酬唱)한 시문(詩文), 만장(輓狀), 비문(碑文)등이 발견되었고(박씨과부의 사위는 조씨趙氏로 한양사람이었고 당시 유자儒者였으므로 이 사실을 보고 박씨 문중에 고변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또 경상북도 청도군(淸道郡) 북지(北旨)에 사는 후손 박이홍(朴履洪)의 집, 불탄 잿더미 속에서 송은 선생의 진영(眞影)과 교지(敎旨), 시첩(詩帖), 비표(碑表) 등의 유품이 발견되어 이제까지 미궁에 쌓였던 송은 할아버지의 면모를 만 분의 일이라도 알 수 있게 된 것은 후손들에게는 여간 기쁜 일이 아니었다. 후손들이 1837년에 이를 모아 송은 선생 문집이 발간됨과 아울러 사림(士林)들의 발의에 따라 입향(入享)할 서원이 조성되고 영정을 봉안하게 되었다. 선생을 모신 곳은 다음과 같다.


◆경상남도 밀양군 초동면 모선정(慕先亭)(德南書院)

   조선 순조 34년(계사년1833) 사림들의 발의로 사액 되었고 영정은 순조 37년 을미년        (1836)에 함께 모셨다. 당초에는 덕남사(德南祠)였다. 순조 37년 을미년에 영정도 같이      봉안하였다.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 용강사(龍강사) : 송은 선생의 후손가운데 임진왜란에 공     을 세운 14인의 의사도 함께 모시고 송은선생의 영정을 모사하여 봉안하였다.


  ▶14의사

  임난에 창의한 밀양 청도의 의사들로 우당 박융(憂堂 朴融) 후손이다. 열네 분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삼우정 경신(三友亭 慶新)? 제우당 경전(悌友堂 慶傳) ?국헌 경윤(菊軒 慶胤)?상우제 경준(尙友齊 慶俊) ?경선(慶宣) ?용연(龍淵) 경인(慶因)?진사(進士) 근구(瑾球) ?행와(杏窩) 인(璘) ?용암(籠岩) 숙(淑) ?기포(杞圃) 우(瑀) ?운옹(雲翁) 찬(璨) ?지남(智男) ?철남(哲男)? 괴정(槐亭) 선(瑄)이다. 

 이들은 형제 종반(從班) 자질(子侄)로 청도 용강사(淸道 龍岡祠)에 봉향(奉享) 되어 있다.


◆경상남도 산청군 신안면 신계서당(新溪書院)


◆경상남도 거제군 동부면 송령각(松嶺閣)등이 있다.


 용강사와 모선정은 송은 선생을 비롯한, 큰아들 우당, 둘째아들 인당이 함께 모셔   져 있으며 신계서당과 송령각에는 송은선생을 비롯하여 셋째아들 아당과 졸당을    모시었다.


[15]▶황희(黃喜1363-1452)

   조선 세종 때의 명신. 호는 양촌(陽村). 시호는 익성(翼成) 본관은 장수(長水). 오     래 동안 영의정에 있으면서 선정을 베풀어 관후(寬厚) 인자(仁慈)하고 청백(淸      白)한 관원생활로 청백리(淸白吏)로서 관리들의 귀감이 되었다.


[16]▶이휘령(李彙寧)

  조선 헌종 때의 유학자. 청주목사(淸州牧師)를 지냈다.


[17]▶정경부인(貞敬夫人)

  정일 품이나 종일 품의 종친(宗親) 및 문무관(文武官)의 아내에게 주는 품계이다.


1837년에 송은집을 편찬하기 이전에 송은집이 있었던 듯하며 그 사실로는 삼족당 김대유[18]가 쓴 송은선생 유사 발문이 전해오는데 그 내용가운데 송경지의 팔은록 맹오편(盲?篇 현재 전하지 않음)을 인용하고 있다.


[18]▶삼족당 김대유(三足堂 金大有1479-1551)

   조선 중종 때의 문신. 호는 삼족당 재학(提學)을 지낸 준손(駿孫)의 아들 무오사화로 숙부인 김일손(金馹孫)이 사형을 당할 때에 아버지와 함께 호남에 유배되었다. 1519년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하여 호조좌랑 칠원현감(漆原縣監)을 역임하였다. 만년에 청도(淸道)의 산중에 들어가 살았다. 송은집 유사(遺事) 발문(跋文)을 썼다.

 

☆문헌 속에 기록된 송은 선생의 실적(實績) 관련 사항


▶화해사전( 華海師全).


 「고려 말 의사 원천석(元天錫)의 집에 2, 30 여명의 충의지사(忠義志士)가 해마다 모였다. 바위 위에 단(壇)을 만들고 변사(辯士)부터 혁사(革士)에 이르기까지 열사(烈士)를 제사지내었다. 참가자 가운데는 송계의 박태시(朴泰始 송은선생의 다른 이름)도 있었다.」


▶송경지(松京志). 팔은사적(八隱事蹟).


「4월 4일 포은이 순절하자 만장과 제전이 있었다. 여러 현인이 모두 왔고 이우당과 각자 뜻한 바를 말하였는데 세상에 전해오는 언지록(言志錄)이 바로 이것이다 그 후 도은(陶隱)은 도기 굽는 데에 돌아가고 목은(牧隱)은 목축하는 데에 돌아갔다. 정제(丁齊)는 농사에 돌아갔고 수은(樹隱) 김충한은 나무 심는 데에 돌아갔다. 송계 박태시(註 송은선생)는 송계의 고향으로 돌아갔고 운곡(耘谷)은 치악산에 돌아갔으며 이우당은 묘정 선산 밑에 돌아갔다.」현재 전하지는 않지만 송은맹오편(松隱盲?篇)이 있었다고 한다.


 ▶밀양읍지(密陽邑志).


박익(朴翊 딴 이름은 박천익)의 자는 태시이고 호는 송은이다. 시호는 충숙인데 밀성이 본관이다. 공민왕 때 과거에 올라 벼슬이 예부시랑 겸 중서령에 이르렀다.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서 신하노릇하지 않기를 맹서하였다. 그리하여 태조가 다섯 차례나 불러 좌의정까지 벼슬을 내렸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밀양 덕남서원 및 청도 용강사 단성 신계사에서 향사한다.

 

▶동경통지(東京通志).


「판관 박익이 겸권농방어사(兼勸農防禦使)[1]로서 자금어대(紫金禦帶)[2]를 받았다. 우왕 병인년 9월에 도임(到任)하여 정묘년 8월 18일에 정사를 이룩하고 상경하였다.」


[1]▷권농 방어사(勸農防禦使)

 고려 때 지방에 파견한 임시 관직. 의창(義倉)을 통해 지방의 난민을 구제하고 경작을 장려하였다. 고려 말에는 필요에 따라 안찰사(按察使)가 겸하기도 하였다.


[2]▷자금어대(紫金御帶)

 공무를 수행하는데 공이 있는 자에게 임금이 특별히 하사한 금색의 띠.

 

▶사실척록(事實?錄)

 

 「포은이 죽기로 작정하던 날, 天翊(註 송은공)을 불러서 울며 말하기를 “삶은 이세상에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이고 죽음은 저 세상에 돌아가는 것이다. 비록 천명(天命)이라 하나 나를 알아 줄 자는 이에 천익(天翊)과 색(穡이색)과 재(再길재)이다.”라고 말하였다.」


▶밀양 박씨 대종보 입향제현편(密城朴氏 大宗譜 入享諸賢篇)

字太始 號松隱 銀山府院君之長子 恭愍王祖登第 禮部侍郞至中書令 與圃隱冶隱酬唱

程朱定學 李太祖登極 五徵不就 定宗祖 贈左議政 諡忠肅 純祖癸巳享于密陽德南書院 己亥享丹城新溪書院〈密城朴氏 大宗譜 入享諸賢篇〉


자는 태시요 호는 송은이다. 은산부원군의 큰아들이다. 공민왕조에 급제하여 벼슬은 예부시랑과 중서령에 이르렀다. 포은 야은과 시를 주고받았으며 정자와 주자의 학설을 정하였다. 이성계가 등극하여 다섯 번이나 벼슬을 주어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정종조에 좌의정으로 증직되고 충숙의 시호를 받았다. 순조 계사년(1833)에 밀양 덕남서원에 향사되고 기해년(순조1839)에 단성 신계서원에 향사되었다.

 

밀양 청도면 고법리 송은 박익의 사우 보본제 전경

 

송은 박익의 묘소 이곳에서 벽화가 발견되었다.

 

송은선생 추향

 

 묘소에서 발견된 벽화중 알부

 

 

 

 ▷2000년 9월 경남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古法里) 산 3, 4번지 야산 소재 송은선생의 무덤에서 채색벽화가 발견되어 고려 시대의 인물상을 연구하는데 아주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었다. 송은선생이 사망한 시점은 1398년 조선 건국 6년 뒤이지만 주로 고려조에 활동했기 때문에 이 채색 벽화가 담은 내용은 고려 후기풍속을 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벽화 고분으로 분류하고 있다.

 무덤에서 발견된 채색화는 화강암으로 쌓아 올려 만든 석실 4개 벽면에 석회를 바른 뒤에 그 위에다가 벽화 내용을 먼저 소묘한 다음 석회가 마르기 전에 그림 주요 부분을 붉은 색 , 남색, 검은색으로 그린 이른바 프레스코 기법을 사용한 것이다.

 그림내용은 인물과 말, 도구 등 죽은 이의 생전생활풍속도를 표현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 중 서쪽 면에는 저고리와 치마를 입고 행차하는 여인 3명이 그려져 있고 동쪽 면에는 남성 1명과 여성 3명의 인물 행렬도가 남아있다. 따라서 이들 벽화는 고려후기 풍속 및 복식사(服食史)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로 평가된다. 이 벽화는 태풍 사오마이가 지나간 다음 봉분(封墳)이 내려앉은 것을 문중에서 보수하는 과정에 발견되었다. 그리고 ‘말 탄 고려인’의 벽화와 매화?대나무 등이 그려진 벽화 이외에도 범자(凡字)가 그려진 지석(誌石)등이 발견되었다. 동아대학교 박물관이 주축이 되어 고분을 발굴하고 밀양고법리벽화묘(密陽古法里壁畵墓)의 고적조사보고서를 출간하였다. 최근 문중에서 송은선생의 산소가 있는 고법리 보본재(報本齋) 근처에 고려고분 송은선생 유적 기념관을 건립하기위하여 도문화재청과 협의 중에 있다.(경남 도민일보및 밀양 고법리벽화묘,동아대학교 박물관,2002참조)

 

송은 박익의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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