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선에서 벗어난 길을 찾너라 헤매인다. 단북에서 단밀 방향 도중에 효제리 석불이 있을 것이라는 잘못된 판단 때문이었다. 촌로에게 길을 물었지만 좌우, 원근이 두리뭉실해 이해가 어렵지만 수긍하는 수 밖에 없어 어렵게 석불을 찾았다.
우리나라 민족성이 그러하지만 특히나 경상도 사람들의 거리개념은 상상을 초월한다. 10리도 20리도 조금만 가면 된다고 하고, 내려가는 길도 올라가야한다고 하며, 좌우 개념은 무의미한 나열에 불과하고 저기가 거기며, 거기가 저긴 것이다
계량화에 거부감을 보이는 것이 양반문화 탓도 있겠지만 정형화를 싫어하는 민족성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우리민족은 케이스화된 가방 보다는 수 많은 용도로 할용할 수 있는 보자가 문화에 익숙한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보자기 문화가 농경사회의 단편으로도 이해하면 좋을텐데, 어떤이들은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속담을 빗대어 개성를 말살하려는 의미로 민족성을 싸잡아 비난하지만 농경사회에서 힘이 센사람은 공동 노동에서 배제시킨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너무나 인간적인 속담 아닌가?
즉 모내기를 예로 들면 일을 잘하는 사람이 모심는 일행에 속한다면 그사람의 속도에 부응하기위해 다른 사람은 죽을 고생을 할 것이므로, 지혜로운 우리의 선조들은 그사람을 모줄잡이를 시켜버린다.
단북 효제리석불
답사 즐거움의 하나가 지명을 한문으로 추측해보는 것인데 효제리는 분명 효자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의성군 홈에는 " 효제동명(孝堤洞名)은 효제동 효자리(孝子里)의 첫 자 "효"자를 따고 2동인 대"제"자를 따 서 효제라 칭하게 되었음." 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즐거움을 배가 시킨다.
-효자리(孝子里) : 지금으로부터 400년전 박해성(林海成)이란 사람이 마을을 개척하였고 그 당시 활장 같 은 큰못이 있었다고 하며 북쪽 산기슭에 활모산이란 조그마한 마을이 있었으며 못이 없어지면 서 넓은 들판이 되니 넓은 들판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이후 약 260년전에 임씨(林氏) 가문에서 고산(古山)이란 사람이 몹시 가난하게 살면서도 어버이에게 효성이 지극하므로 크게 치하를 받 았다고 한다. 효자가 살던 마을이라 하여 마을이름이 효자리가 되었다고 한다. 혹은 고려말에 국천 효자인 신우(申祐)가 이 마을에 살았다고 주장하고 그 연유로 효자리가 되었다고 하는 전 설도 있음.
-대제(大堤)
:약 550년 전에 정치화라는 삶이 처음으로 마을을 이룩하였다고 하며 당시에 이 마 을에 큰 못이 있었으므로 천하대지라 하였는데 상산지(商山誌)에는 200년 전까지도 이 못이 확인되고 이 못이 아마 삼한시대 우리나라 3대 못 중의 하나인 대제지가 아 니겠느냐는 주민의 전설로 구전되어 내려오고 있으며 이 마을 명도 어느때인지 알 수 없는 한 도사가 지나가다 마을을 향하여 대제라고 말했다고 함으로 그 이후 마을 이름이 되었다고 함.
의성군 홈에는 현재의 석불자리에 신라 진흥왕 때 사찰이 있었다고 했지만 내눈엔 석불보다는 비보장승처럼 다가온다. 넓은 들판 한가운데서 허약한 지기와, 역병등 외부로부터의 유입되는 재앙에 홀로 외로히 맞서 우리님들을 지켜주는 마을맥이 장승, 미륵으로 보고 싶다.
동리를 수호하고, 가족을 보살펴 준 석불의 훼손을 주민들이 도저히 볼 수 없었던지 너무도 인간적으로 복원을 하였다. 나발은 시멘트, 육계는 멋진 가공된 돌, 백호는 수정같은 돌로 보였지만, 돌부처 복원의 압권은 움푹 패인 두 눈에 알맞은 크기의 돌을 집어 넣은 것이었다.
마치 들판의 허수아비처럼 가을을 지키고 서 있는 이끼 낀 석불이 가을 내내 가슴에 남을 듯하다.
2005.09.25
첫댓글 아? 모 잘 심는 사람을 줄잡이로요? ㅎㅎ뜻은 좀 다르지만요, 줄 넘기는 거 그거 보통 사람 할 수 없음.
장승 미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