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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었지만 <코카서스 백묵원> 관극기 올립니다)
창극의 진화인가 돌연변이인가?
- 《코카서스의 백묵원》
국립창극단과 재일교포3세 연극인 정의신, 그리고 브레히트의 《코카서스의 백묵원》(극본·연출 정의신, 국립창극단, 해오름극장, 3.21∼28)이 창극으로 만났다. 이전에도 《로미오와 줄리엣》, 《맥베스 부인》, 《메디아》 등의 서양고전과 아힘 프라이어와 안드레이 서반 등 세계적 연출가들과의 협업은 있었다. 하지만, 외국 연출에 작품마저 해외 ‘근대고전’을 골라 삼박자를 갖춘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서 국립창극단의 ‘도발’이라는 수사가 마냥 과장되게 들리지만은 않는다. 그만큼 화재를 모으기에 충분했다. 재일교포이긴 하지만 정의신의 연극적 뿌리는 일본이다. 하지만 정의신은 이제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유명해진 느낌이다. 《야끼니꾸 드레곤》 이후, 지난 몇 년간 그가 보여준 활동은 일본보다는 한국 연극계에서 훨씬 의미 있는 평가와 주목을 받고 있는 듯하다. 《푸른 배 이야기》, 《노래하는 샤일록》 등 국립극단과는 두어 차례 작업을 해온 그가 이번에는 국립창극단의 러브콜까지 받은 것이다. 그것도 독일극작가 브레히트의 《코카서스의 백묵원》을 창극으로 재구성해야 한다는 미션과 함께.
국립창극단의 이런 일련의 시도들과 반향은 필자에게 적잖은 당혹감을 주었다. 고백하자면 창극에 대한 나의 시계는 2007년에 멈춰져 있었다. 개인적 이유로 지난 7년 동안 한국을 떠나 일본에 체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창극단이 안숙선이라는 국악계의 걸출한 스타와 ‘국가브랜드공연’을 표방하며 나름대로 탈출구를 모색하고 있던 바로 그 시점이다. 더 부끄러운 고백을 하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창극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마 대부분의 ‘젊은’ 연극인들도 그러했을 것이다. 작년 말 한국에 돌아와 《다른 춘향》이라는 공연을 기억하게 된 것도 ‘창극단’이나 ‘춘향’보다는 안드레이 서반이라는 세계적 연출가의 이름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쉽사리 공연장으로 발걸음이 닿지는 않았다.
그런데 창극단의 이러한 ‘도발’은 필자뿐만 아니라 창극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20대 젊은 관객들한테까지 폭발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코카서스의 백묵원》이 국립창극단 역사상 전무후무한 연장공연까지 올렸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창극은 판소리처럼 정통을 고수하는 장르가 아니라 새롭게, 시대에 맞는 극과 음악이 접목하는 음악극이고 뮤지컬이므로 이 시대에 가장 독창적이고 정체성 있는 창극이 어떤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는 김성녀 예술감독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킬 것은 지켜야 한다’는 창극의 장르논쟁은 그래서 해묵은 시비걸기로 비춰지는 느낌마저 든다. 이런 가운데 이번 국립창극단의 《코카서스의 백묵원》은 창극단이라는 타이틀을 제하고 보면 브레히트식 서사극이라고 보아도, 아니면 김성녀 예술감독도 오랫동안 몸담아 왔던 마당놀이라고 보아도 어색하지 않을 작품이 되어 버렸다. 아니, 그냥 뮤지컬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 같다. 좋게 말하자면 창극이라는 강박 혹은 ‘멍에’를 과감하게 던져버리고 여러 장르의 우성인자만을 흡수하여 창극 진화의 정점을 찍었다는 느낌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진화 과정에서 뜻하지 않은 돌연변이를 만난 느낌도 든다. 왜일까?
당파성에서 휴머니즘적 모성으로
우선 정의신은 브레히트 원작에서 극중극 구조를 과감하게 덜어냈다. 2차 대전 후 코카서스 계곡 사용권을 둘러싼 두 집단농장 간의 재판이야기가 사라졌다. 대신 반란으로 살해된 총독의 아들을 구해서 키우는 하녀 그루셰와 재판관 아츠닥의 이야기가 단일 플롯으로 채택되었다. 그래서 ‘코카서스의 백묵원’이라는 제목을 그대로 사용한 이유가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제목이 원작을 강하게 환기시켜주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원작이 지니고 있던 당파성보다는 그루셰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모성이 도드라지는 모양새가 되었다. 브레히트의 원작은 무능한 지주보다는 땅을 개간하고 일군 소작농들이 진정한 주인이라는 메시지를 주장하고 있다.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보다는 그것을 생산력으로 바꿀 힘과 능력을 지닌 노동자계급이야말로 진정한 사회의 주인이라는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비유적으로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극중극 구조가 해체되고 비판적 거리두기가 무력화되면서 드러난 것은 모성이라는 휴머니즘적 감성이었다.
휴머니즘으로서의 모성을 강조하기 위해 정의신은 몇 가지 해석과 연출을 가미했다. 먼저 그루셰(조유아 분)의 캐릭터가 크게 달라졌다. 그녀는 더 이상 군인이자 연인인 시몬(최용석 분)과의 사랑을 수동적으로 기다리고 그리워하는 비련의 여주인공이 아니다.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를 거침없이 내뱉으며, 시몬과의 ‘밀당’에는 애당초 관심조차 없으며, 투박하고 억척스러운 여장부로 다시 태어났다. 전쟁에 나서기 전, 시몬이 몇 번이고 고백을 망설이고 머뭇거리자 대뜸 시몬의 입술에 입맞춤을 하고는 약혼을 선언해버리는 당돌한 여성이다. 배고파 우는 아이를 위해 우유 한 컵에 30만원이나 지불하고 사는가 하면 거리낌 없이 자기 젖을 물리기도 한다. 우유부단하고 소심하며 어린아이 같은 시몬에 비해 그루셰는 우람하고 억센 팔뚝을 자랑하며 전쟁 통에도 억척스럽게 아이를 키워냈던 우리네 어머니와도 많이 닮아 있다.
그루셰와 대조적으로 아이를 내팽개친 총독부인(김미진 분)은 비현실적으로 생각될 만큼 희화화되었다. 총독 부인은 마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황야의 마녀처럼, 남의 도움 없이는 거동이 불가능할 비대한 몸으로 뒤뚱뒤뚱 무대 위를 누비고 다닌다. 그리고 하인이 건네는 음식들을 끊임없이 먹어치운다. 쫓기는 와중에도 비대해진 몸에 더 이상 맞지 않는 드레스에 집착하는 모습은 희화화의 전형을 보여준다. 생명력과 모성이 거세된 총독 부인의 그로테스크한 몸뚱어리를 통해 탐욕이 물리적 부피와 중량감으로 다가온다.
캐릭터뿐만이 아니다. 그루셰의 역경과 고난을 극대화하기 위해 무대 위에는 잔혹한 장면들이 여과 없이 연출되었다. 반란군들이 총독의 머리에 두건을 씌우고 총살하는 장면이 붉은 조명과 거칠고 폭력적인 행동을 통해 자극적으로 그려졌다. 총독 아들을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농부 또한 그들에 의해 무대 위에서 살해된다. 반란군 두목(남해웅 분)은 스킨헤드처럼 머리를 밀고 문신까지 새겨 넣어 잔혹성에 혐오감까지 더했다. 리어카에 실려 등장하는 부상병들의 모습도 적나라하다. 찢어질 듯한 엔진소리와 화약연기 같은 매연을 뿜어대며 무대를 휘저으며 등장한 오토바이는 객석까지 위협하며 그들의 폭력성을 오감으로 느끼게 해주었다. 관객들에게는 아이의 몽타주를 들이밀며 겁박하기도 한다.
그루셰와 반란군들의 좇고 쫓기는 추격 장면은 구름다리 장면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추격을 피해 험난한 계곡 사이에 걸쳐져 있는 낡은 구름다리를 건너야 하는 절박한 상황. 이때 동아줄로 얼키설키 엮은 구름다리가 공중에서 내려오고, 환하던 조명은 구름다리를 중심으로 포커스가 모아진다. 낡은 철모와 배낭, 그리고 아이를 안은 그루셰가 구름다리를 건너며 절창을 하는 가운데 하늘에서는 하염없이 함박눈이 쏟아진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림같은’ 미장센이 펼쳐진다. 아이를 살리기 위한 그루셰의 ‘고난의 행군’은 그래서 더욱 눈물 겹게 성취된다. 이 장면을 위해 많은 공을 들인 탓인지 연출은 과하다고 느껴질 만큼 상당히 많은 시간을 이 장면에 할애했다.
반전과 감동, 그러나 결말은 돌연변이
파괴적인 반란군들의 추격과 전쟁으로 인한 공포감은 공연의 분위기를 일관되게 지배했다. 휴머니즘적 모성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연출의 의도가 반영된 결과다. 그런데 긴장감을 극적으로 고조시키기 위해 대비적 코드로 선택한 것이 바로 해학성이다. 총독 부인의 캐릭터를 희화화한 것은 물론, 그루셰의 오빠를 1과 2로 나누어 재담에 가까운 동어반복적 대사를 주고받게 한다. 그루셰의 법적 남편인 유숩(이광복 분)은 그루셰를 겁탈하려다 완강한 저항에 부딪히자 갑자기 관객들을 둘러보며 “남자 벗은 몸 첨 봐?!”하며 윽박지른다. 코믹릴리프처럼 긴장감 넘치는 장면들 사이에 배치된 희극적 장면들이다.
관객들과 직접 접촉하며 이를 주도하는 인물은 단연 아츠닥(서정금 분)이다. 극중극 구조가 사라지면서 아츠닥이 원작의 가수 역까지 맡으며 비중이 더욱 커졌다. 창극으로 말하자면 도창이다. 재판관 역을 연기하면서 동시에 해설자나 사회자처럼 관객들과 격 없이 농담을 주고받으며 공연을 이끌어가는 역할이다. 퇴장이 없는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배역과 해설자, 전지적 관찰자로서 종횡무진 무대 위를 누비고 다닌다. 때로는 관객처럼 무대 위를 지켜보기도 한다. 도창으로서 아츠닥의 존재는 《코카서스의 백묵원》이 서사극이나 마당놀이와 구별되는 창극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증거해주는 중요한 지표다. 여자배우가 해설자와 재판관 아츠닥 등 도창의 역할을 맡음으로써 관객들의 몰입을 차단하며 수월하게 여러 배역을 오갈 수 있게 했다. 그런데 아츠닥의 마지막 재판장면은 다른 장면에 비해 ‘사설’이 길어지면서 계몽적이고 교훈적으로 흘렀다. 아츠닥이 캐릭터로서의 존재감과 매력을 집중적으로 발산할 수 있는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지루하게 느껴진 이유다. 이처럼 반란군들이 조성하는 긴장감이나 잔혹성과는 대조적으로 해학적 장치들이 곳곳에 포진되어 있다. 이는 무대 공간의 활용에서도 잘 드러났다.
전방위적으로 압박해 들어오는 전쟁의 공포감과 해학성이 동시에 표출되는 무대를 위해 정의신은 일반의 기대와 상식을 비껴가는 공간연출을 시도했다. 1,500석이 넘는 해오름극장의 객석을 포기하고 무대 위에 600석 규모의 객석과 무대를 다시 세웠기 때문이다. 무대와 객석이 전도된 무대는 과거 해오름극장 공연에서도 가끔 봐 왔기 때문에 그리 새삼스러울 것 없을 것이다. 그러나 거대한 프로시니엄 무대 안에 개방형 가설무대가 모순적으로 공존하는 형태는 공포감과 해학성의 공존이라는 공연의 지향을 공간적으로 잘 구현해주었기 때문에 새삼스러웠다.
극장 입장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로비에서 해오름극장 안으로 입장한 관객들은 안내요원의 지시에 따라 객석을 가로질러 무대 위에 마련된 가설무대로 안내된다. 해오름극장의 무대와 객석은 거대한 커튼으로 차단되었고, 무대 위에 마련된 3면의 가설무대는 마당놀이 무대와 흡사하게 반원형의 개방적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정면 안쪽 무대에 좌우로 길게 걸쳐 높은 단을 설치하고 오른쪽에 오케스트라를 둔 것이 희랍의 원형극장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어쨌든 커튼으로 닫힌 무대 위에 원형에 가까운 개방적 무대를 가설함으로써 긴장감과 해방감이 동시에 공존하는 무대 공간을 만들었다. 연기공간은 무대 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관객출입구는 물론 객석의 통로까지 무대가 확장된다. 그렇다고 마당놀이에서 관객들과 재담을 주고받는 식의 단순하고 소극적인 활용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4군데의 관객출입구가 주로 배우들의 등퇴장로로 활용되었던 반면, 객석의 통로는 반란군들과 추격군들의 전용공간이었다. 간혹 괴성을 지르며 객석 뒷공간에서 불쑥 나타나 뛰어들 듯 무대에 등장하는 바람에 놀라기도 했다. 객석과 극장이 휴머니즘적 모성과 사랑에 기반한 우리의 일상적 세계를 반영하는 것이라면 그 세계를 둘러싸고 있는 더 거대한 세계는 바로 모성과 사랑을 위협하는 전쟁의 세계다. 그런데 아츠닥의 재판이 끝나고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릴 것 같았던 공연이 전쟁의 발발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동시대를 관통하는 정의신의 통찰력이 빛을 발하는 장면이다. 뒷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랄까. 그러나 반전이 선사하는 의외의 감동은 거기까지였다. 불필요한 에필로그로 인해 공연은 순식간에 평화를 기원하는 굿판처럼 변질되었다. 과유불급이다.
소복으로 갈아입은 배우들이 평화를 갈망하는 노래를 부르며 무대 바닥에 원을 그리고, 그 원을 중심으로 강강술래 하듯 손을 잡고 돌더니 원 안으로 모여든다. 그리고 “우리는 평화를 원하네.” 노래한다. 무대 뒤엔 개기월식의 달모양처럼 황금색의 커다란 동그라미가 투사된다. 공연 내내, 심지어 음악까지도 굳이 전통적인, 아니 ‘창극적인’ 요소를 고집하지 않았던 연출은 왜 마지막 장면에서 공연의 개념과 통일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반미학적 선택을 했을까. 진화 과정에서 퇴화된 꼬리뼈에 꼬리를 이식해 붙인 격이다. 이 장면 때문에 《코카서스의 백묵원》은 진화의 정점을 향해 순항하던 생명체가 느닷없이 출현한 한국적 한과 화해의 정서라는 돌발 형질을 만나 돌연변이로 전락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연극평론> 2015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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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스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감동
탄탄한 분석능력에 찬사를 보냅니다.
호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