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재집 제5권 / 서(序)
남평문씨족보서(南平文氏族譜序)
송치규(宋穉圭) 찬(撰)
[생졸년] 1759(영조 35)~ 1838(헌종 4) 수(壽) 79세
남평 문씨(南平文氏)는 그 비조(鼻祖)가 신라(新羅) 삼한(三韓) 벽상공신(壁上功臣)인 무성공(武成公)인데, 실적(實蹟)이 대단히 기이하고 뛰어난 사람이었다. 문씨가 세상에 전해진 것은 고려(高麗) 평장사(平章事) 경절공(敬節公 문익(文翼)부터 시작한다.
경절공의 6세손으로 봉작(封爵)을 받아서 본적을 달리한 사람은 강성백(江城伯, 문득준(文得俊)이다. 강성백의 4세손으로 문익점(文益漸)이 있는데 고려 말 명신이다. 목면(木綿)을 우리나라로 가져와서 억조(億兆) 백성들이 입고 덮게 된 것은 대체로 그의 공로이다.
우리 태종조(太宗朝)에 이르러서는 녹훈(錄勳)하고 증직(贈職)하여 강성군(江城君)에 봉하고 시호를 충선(忠宣)이라 하였으며, 또 그에게는 신하가 되지 않은 절개가 있기 때문에 정려(㫌閭)를 특별히 명하였다. 위대한 성인이 이룩하신 업적이 어찌 상상을 뛰어넘는 것에서 항상 나오지 않았는가.
강성으로부터 본적을 달리한 사람이 또 몇 집안인데 모두 강성군에서 나왔다. 본적을 달리하게 된 까닭은 근거할 만한 실질이 대부분 없으나, 남평에 본적을 둔 사람은 강성군과 7대 후손 약간 명뿐이다. 이에 여러 친족이 각각 그 계파를 정리하고 모두 합해 《남평보(南平譜)》로 만들고, 각 계파 중에 가문의 덕을 크게 드러낸 사람의 묘지(墓誌)와 행장(行狀) 및 칭송받는 시문(詩文) 등의 편을 뽑아 권두로 삼았다.
또 성씨의 관향(貫鄕)을 구별하기도 하였으니, 근본을 중시하고 친족을 거두어 모은 뜻이 참으로 훌륭하며, 신중함과 정밀함을 다한 것도 지극하다고 할 만하다. 오호라! 세상에서 문씨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단지 강성군이 있다는 것만 알고, 강성군의 사실(事實)을 거론하는 사람들은 문득 목면을 이야기한다.
목면의 이로움이 백성에까지 미친 것은 실로 영원토록 잊을 수 없으며, 나라에서 그를 표창하여 추증하고 후손들의 안부를 묻고 보살펴 주는 것도 이것 때문이니, 또 그렇게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단을 물리치고 정통을 숭상하는 학문이나 자신을 잊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절의는 특히 얼마나 우뚝하고 뛰어났던가.
또 그들의 선대(先代)에 강성군 같은 인물이 있었던 것은 당연하겠으나, 도리어 자세하게 알 수 없는 점이 있다면 어찌 심히 개탄할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족보가 다 완성되자 강성군의 후손인 종구(鍾九)가 예물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서(序)를 써 줄 것을 요청하였다.
나는 견문이 좁지만 이를 통해 그 시종과 본말의 대략을 이해하게 되었으니, 스스로 깊이 다행으로 여기고, 글솜씨가 없다는 말로 사양하지 않았다. 풍암(楓菴) 이래로 여러 글들은 그 충의(忠義)에 유래가 있다는 점에 더욱 감탄하게 된다. 애석하도다! 지금은 떨치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다.
이제 족보의 계통(系統)이 만들어졌으니, 각자 삼가 힘을 다해서 효성과 공경을 도탑게 행하여 조상을 욕되게 하지 말 것을 생각하면, 창대(昌大)함을 다시 기대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여기에 있다. 다만 한 가지 의심스러운 것이 있다. 족보에는 감천 문씨(甘泉文氏)가 본래 하나의 뿌리가 아니라고 분명히 밝혔는데 근거한 바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선조 우암(尤菴) 문정공(文正公)이 참판(參判), 장령(掌令)을 지낸 두 문공(文公)의 묘지명을 쓸 때에, 어찌하여 남평에 근원하였다고 서술하였는가? 이것은 비록 본가(本家)의 기록을 따른 것이지만, 두 문공은 기묘사화(己卯士禍) 때의 현인인데, 그 세계(世系)의 착오가 이와 같이 된 것인가? 매우 알 수 없다.
ⓒ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 노재준 박해당 권민균 (공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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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南平文氏族譜序 - 宋穉圭
南平文氏。其鼻祖新羅三韓壁上功臣武成公實蹟。甚有奇偉者。其傳世則自高麗平章事敬節公始。敬節六世而受封別籍者曰江城伯。江城伯四世而有諱益漸。爲麗末名臣。木綿東來。衣被億兆。蓋其功也。至我太宗朝。錄勳贈職封江城君而諡忠宣。復以其有罔僕之節。特命㫌閭。大聖人所作爲。豈不出尋常萬萬也。自江城而別籍者。又幾家。皆出於江城君。其所以別籍。多無可據之實。而貫南平者。只江城君同七代若干人而已。於是諸族各修其系。合爲南平譜。各派世德之表著者。取其誌狀及稱述詩文諸篇爲卷首。而並及於姓鄕區別。其重本收族意固甚善。而所以致其審愼詳密者。亦可謂至矣。嗚呼。世之譚文氏者。只知有江城君。擧江城事實者。輒以木綿爲言。木綿之利及生民。實永世不可忘者。而朝家之爲之褒贈。存恤後裔。亦以是也。則無怪其然。然其闢異崇正之學。忘身殉國之節。尤何等卓偉。而又其家世宜其有江城矣。乃反有所不能詳者。豈非甚可慨者耶。譜旣成。江城君後孫鍾九。以幣至。謁余爲序。余之固陋。因此而得其始終本末之大槩。則自幸者深。遂不以不文辭。而於楓菴以下諸文字。益歎其忠義之有自來矣。惜乎。今不振之久也。今旣譜系矣。各自飭勵。惇行孝悌。思所以無忝。則可以復期乎昌大者。其在是夫。抑有一事可疑者。譜中力辨甘泉之文。本非一根。而有所考據矣。然則我先祖尤菴文正公之銘參判掌令二文公墓。何以敍其源於南平也。此雖因本家所錄。而二文公是己卯賢。則其世系之錯誤。乃如是耶。殊不可知也。 <끝>
강재집 제5권 / 서(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