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촌선생집 제28권 / 신도비명(神道碑銘) 11수
영창대군 신도비명(永昌大君神道碑銘)
만력 무신년에 선조대왕의 병세가 크게 위독해지자 이때 적신(賊臣) 이첨(爾瞻)이 정인홍(鄭仁弘)을 사주해 투소(投疏)하여 비로소 화의 빌미가 싹텄으며, 얼마 후 선묘께서 승하하자 이첨은 마침내 유언비어로 남을 위협하고 내외의 이목을 유혹하여 옥사를 일으켰다.
계축년에 와서는 화가 크게 일어나 자전(慈殿)은 폐위시켜야 한다고 하고 영창대군은 역모를 꾸몄다고 지척하였다.
이 당시 영창은 겨우 8세였는데 강화(江華)로 귀양보내 혹독하게 죽이고 자전은 서궁(西宮)에 10년 동안이나 유폐시켜 천도가 없어지고 인륜이 끊어져 거의 나라가 존립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다가 천계(天啓) 3년 3월 12일에 상께서 하늘과 사람의 뜻에 따라 나라의 어려움을 안정시킨 뒤에 모후의 지위를 복구하고 영창의 관작을 추증함과 동시에 유사에게 명하여 새로 장사지내게 하였다. 그리고 행적을 모아 후세에 전하고 그 원통함을 씻어 주기 위해 신도에다 비석을 세우고 신 흠(欽)에게 그 글을 기록할 것을 명하였다.
신은 삼가 머리를 조아리며 왕대비 전하께서 내린 행록(行錄)을 받들어 읽고 말하기를 “아, 원통하다. 예로부터 제왕의 집안은 처지가 임금과 밀접하므로 간혹 그 동족을 보전하지 못한 일이 있긴 하였으나 8세의 어린 나이로 법망에 걸렸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아, 원통하다.” 하였다.
공의 휘는 의(㼁)로 선조대왕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소성정의(昭聖貞懿) 왕대비 김씨인데 만력 병오년(1606, 선조 39)에 공을 낳았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매우 기특하여 보통 아이들과 달랐다. 유모의 품안에 있을 때 매일 양전(兩殿)에게 인사를 올렸는데 어쩌다가 중궁에게만 인사를 올릴 경우는 하루 종일 얼굴을 펴지 않았다.
선조대왕이 미령하여 지팡이를 짚고 걸어가면 공이 곁에서 부축해드리곤 하였는데 선묘께서 승하하시자 슬프게 울부짖으며 발을 동동 굴렀으므로 이를 보는 자들이 슬퍼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조금 말귀를 알아들은 뒤에는 능히 효경(孝敬)의 예절을 다하여 말이 선왕에 미치면 얼굴에 슬픈 빛이 감돌았고 왕자가 목릉(穆陵)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간다는 말을 들으면 훌쩍훌쩍 눈물을 흘렸다.
궁중에서 해일(亥日)이 돌아오면 오색주머니를 허리에 차는데 공은 시비(侍婢)에게 주머니를 꿰매달라고 했다가 이윽고 갑자기 언짢아 하며 그만두게 하므로 그 까닭을 물으니, 말하기를 “들은 말에 의하면 선왕께서 지녔던 것을 가지고 규식을 삼는다고 하는데 선왕께서 이미 지니지 못하시는 마당에 내가 어찌 차마 그것을 찰 수 있는가.” 하였다.
하루는 공이 북쪽을 향하여 무릎을 꿇고 절하며 말하기를 “선왕께서 하늘에 계시니 나는 이 때문에 예를 차리는 것일 뿐이다.” 하였다. 궁인은 공의 효심이 지극한 줄 알고서 행하기 어려운 일을 가지고 권하기를 “만일 똥을 맛보면 자전께서 오래오래 사실 것입니다.” 하자, 공은 즉시 맛을 보았다. 천성이 또 총명하여 글을 읽으면 어김없이 암송하였고 서법에 대해서도 특별히 배우지 않고 잘 썼다.
계축년의 변고 때 궁중이 들끓자 공은 그 상황을 알고 깊이 가슴 아파하였으나 자전의 뜻을 상하지 않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겉으로 걱정하는 빛을 보이지 않고 그저 묵묵히 있을 뿐이었다. 항상 스스로 말하기를 “하늘이 정한 명이 있는 법이다.” 하였는데, 7월 초하루가 되자 시자에게 묻기를 “앞으로 며칠이 지나야 스무하룻날인가?” 하였다.
궁중에서는 공이 영특하다는 것만 알 뿐 그 뜻을 헤아리지 못했는데, 과연 그날에 화를 당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더욱 기이하게 여겼다. 계해년(1623, 인조1) 모월 모일에 모지(某地) 모향(某向)의 자리에 장사지냈다. 천도는 진정 올바로 되게 마련이고 이치는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는 법이 없다.
그리하여 밝은 해는 황도(黃道)에서 제 빛을 되찾고 지극한 통한은 구천(九泉)에서 깨끗이 씻기었으니, 아, 이로써 성상의 덕을 살펴보기에 충분하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공이 당한 화일 손가 / 非公之禍
나라 운수 액이거니 / 邦運之屯
원한 씻고 증직하여 / 冤晳恩貤
온 누리가 봄이로세 / 厚壤同春
신은 머리 조아리며 / 臣拜稽首
이 빗돌에 명하거니 / 銘此牲石
슬픔 영광 어울리어 / 哀榮之俱
보는 이들 슬퍼하리 / 觀者其戚
<끝>
송기채 (역) |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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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永昌大君神道碑銘
萬曆戊申。宣祖大王疾大漸。惟時賊臣爾瞻嗾鄭仁弘投疏。始俑禍端。未幾宣廟晏駕。爾瞻遂煽飛箝動內外聽。起獄及癸丑。禍大熾。指慈殿爲可廢。永昌大君爲逆謀。時永昌纔八歲矣。遷之江華逼殺之。幽慈殿于西宮者十年。天紀蠹蝕。民彝滅絶。迨不能立國。乃於天啓三年三月十二日。上因天人之會。克靖內難。復母后位。貤永昌爵。命有司改窆。且惟所以最跡垂後。雪其誣枉者。樹諸神道。命臣欽紀之。臣謹稽首奉讀王大妃殿下所降行錄曰。嗚呼冤哉。自古帝王家。地逼讒生。間有不能全其宗姓者。而未聞以八歲稚齒而扞文罔者也。嗚呼冤哉。公諱㼁。宣祖大王之子。母曰昭聖貞懿王大妃金氏。萬曆丙午生公。鍾質甚異。與凡兒殊。在姆懷。恒日朝兩殿。或只朝中宮則色不豫者竟日。逮宣祖大王違豫。扶杖而行。公在側周旋。宣廟奇愛之。宣廟賓天。哀號以踊。觀者莫不悲之。稍解語。能盡孝敬之節。語及先王。纍然變容。聞王子以祭穆陵往者。公慨然以慕。簌簌泣下。宮中以亥日佩綵囊。公令婢侍縫之。俄忽不樂罷之。問其故。曰聞以先王所御者爲式。先王已不能御。吾曷忍佩也。一日公北面跪拜曰。先王在天。吾是以作禮耳。宮人知公克孝。以其難槪之曰。若嘗糞。慈殿聖壽無疆。公卽嘗之。性又聰明。讀書輒成誦。於書法不學而能。癸丑之變。宮中鼎沸。公察識之。深自隱痛。而懼傷慈殿之意。不色憂。只默然而已。恒自言曰。九天有命。屆七月朔。問侍者曰。遣幾日有二十一日乎。宮中見公靈慧。莫測其意。果於是日遘禍。人尤異之。癸亥某月某日。葬于某地某向之原。天固有定。理無不復。白日重明於黃道。至痛普滌於九泉。噫。斯可以觀聖德矣。銘曰。
非公之禍。邦運之屯。冤晳恩貤。厚壤同春。臣拜稽首。銘此牲石。哀榮之俱。觀者其戚。<끝>
象村稿卷之二十七 / 神道碑銘 一十一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