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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집 제12권 / 묘지명(墓誌銘)
고려국 광정대부(匡靖大夫) 첨의평리 예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상호군(僉議評理藝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上護軍)으로 치사한 윤공(尹公)의 묘지명
공의 휘는 선좌(宣佐)요, 자는 순수(淳叟)이다. 영평군(鈴平郡) 사람이니, 삼한공신(三韓功臣) 신달(莘達)의 후예이다. 신달의 현손인 태사 문하시중(太師門下侍中) 관(瓘)은 융적(戎狄)을 평정하고 국토를 개척하여 왕묘에 배향되었고, 관의 손자인 태사 문하시중 인첨(麟瞻)은 난리를 평정하고 나라를 바로잡아 사직에 공을 세웠다.
인첨이 판예빈성사(判禮賓省事) 종해(宗海)를 낳고, 종해가 내고 부사(內庫副使) 세방(世芳)을 낳고, 세방이 증(贈)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 응식(應植)을 낳았다. 응식이 증 첨의 평리(僉議評理) 균(均)을 낳았는데, 균이 증 찬성사(贊成事) 송세견(宋世堅)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니, 이분들이 공에게 부모가 된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영특하였다. 7세에 벌써 글을 잘 지었으며, 무자년(1288, 충렬왕 14)에 제일인(第一人)으로 뽑혀 급제하였다. 김해(金海)의 장서기(掌書記)를 거쳐 조정에 들어와 비서랑(秘書郞)에 보임된 뒤에 문한서(文翰署)에서 입직하였으며 누차 당후관(堂後官)으로 전직하였다.
정미년(1307)에 충선왕(忠宣王)이 정사를 이어받고 백관을 도태(淘汰)할 적에 좌정언(左正言)에 임명되었으며, 다시 우사보(右思補)로 전직하여 언부 산랑(讞部散郞)을 겸하였다. 그리고 회양도(淮陽道)를 안렴하러 나갔다가 누차 옮겨 내서 사인(內書舍人)과 선부 의랑(選部議郞)이 되었다.
임자년(1312, 충선왕 4)에 전라도를 안찰할 적에는 고삐를 잡고 부월(斧鉞)을 쥐었던 옛사람의 풍도가 있었다. 그 일이 위에 알려지면서 바로 도진령(都津令)으로 승진하였다. 계축년(1313)에 왕이 충숙왕(忠肅王)에게 양위하였다.
충숙왕이 평소에 공의 이름을 들었으므로 성균 좨주(成均祭酒)를 제수하고 부인(符印)을 관장하면서 좌우에 있도록 명하였으며, 이와 함께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진강하라고 명하였다. 감찰 집의(監察執義)로 전직하였다가 중도에 무슨 일 때문에 파직되었는데, 신유년(1321, 충숙왕 8)에 복직하여 예전과 같이 되었다.
이해에 심왕(瀋王)이 영종황제(英宗皇帝)에게 총애를 받으면서 충숙왕을 무함하여 죄를 뒤집어씌우고는 왕위를 뺏으려고 하였다. 이에 부귀를 얻으려고 안달하는 자들이 모두 그쪽에 빌붙었는데, 그 패거리 10여 인이 홀연히 연경에서 내려와 말하기를 “심왕이 이미 나라를 인수하였는데, 국인들은 어찌하여 왕의 비행을 적어서 조정에 보내지 않는가.”라고 하고는, 수십 장의 종이를 이어 붙여 왕의 죄상(罪狀)이라는 것을 그 위에 써서 민천사(旻天寺) 문에 게시해 놓은 다음에, 백관을 불러 서명하게 하자 사람들이 다투어 그곳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공만은 홀로 말하기를 “나는 우리 임금님의 비행이라는 것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그리고 신하의 신분으로 자기 임금을 고자질한다는 것은 개나 돼지도 하지 않는 일이다.”라고 하고는 침을 뱉고 가니, 이로 말미암아 대간(臺諫)과 문한(文翰)의 신하들이 서명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 뒤에 사태가 안정되고 나서 중서(中書)가 서명한 그 서장(書狀)을 왕에게 보고하니, 왕이 서명하지 않은 자들을 꼽아 보고 나서 탄식하며 말하기를 “윤모(尹某)가 헌사(憲司)에 있지 않았더라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이때 왕이 연경에 5년이나 억류되어 있는 동안 재정이 고갈되었는데, 심왕의 무리가 그런 사실을 알고는 부고(府庫)를 봉하여 물자의 수송을 방해하였다. 이에 공이 찰관(察官) 조관(趙琯)에게 격문을 보내어 주관하는 자를 독책하게 한 결과 물자 수송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을축년(1325)에 왕이 귀국하여 판전교(判典校)를 제수하니 품계는 통헌(通憲)이었다. 얼마 뒤에 민부 전서(民部典書)의 신분으로 한양 윤(漢陽尹)이 되어 나갔는데, 조금 지나서 왕이 공주와 함께 용산(龍山)에 가서 좌우에게 말하기를 “윤 윤(尹尹)이 청렴하고 검소하기 때문에 목민관(牧民官)으로 삼은 것이다. 그대들은 부디 그를 흔들어서 혼탁하게 만들지 말라.”라고 하였다.
신미년(1331, 충혜왕 1)에 나이를 이유로 벼슬을 그만두었다. 을해년(1335, 충숙왕 복위 4)에 왕이 친히 수령(守令)을 주의(注擬)할 적에 계림 윤(鷄林尹) 차례에 와서 붓을 놓고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말하기를 “조정에 신하들이 가득하지만 윤 윤 같은 사람은 없다.”라고 하고는, 즉시 공을 주의하였다.
공이 왕에게 신임을 받은 것이 이와 같았다. 공이 재차 대부(大府)의 윤(尹)이 된 뒤에 더욱 청렴하고 근실하게 행하면서, 백성에게 해가 되는 것들은 반드시 제거하려고 힘쓰고 백성에게 이로운 것들은 빠짐없이 거행하였다. 병자년(1336)에 공에게 첨의 평리(僉議評理)를 가하고 이어서 치사하게 하였다.
계미년(1343, 충혜왕 복위 4) 9월 모(某) 갑자에 미질(微疾)에 걸리자, 자녀들을 앞에 불러 앉히고 말하기를 “지금 사람들이 형제간에 대부분 잘 지내지 못하는 이유는 재물을 다투기 때문이다.”라고 하고는, 아들 찬(粲)에게 명하여 문계(文契)를 작성해서 골고루 가산을 분배하게 하였다.
그리고 경계하기를 “다투지 말고 화목하게 지내도록 너희 자손들을 가르쳐라.”라고 하고는, 말이 끝나자 의관을 바르게 하고 단정히 앉아서 서거하였다. 그달 모 갑자에 북쪽 언덕에 장례를 행하였다. 향년 79세였다.
부인 윤씨(尹氏)는 국학 대사성(國學大司成) 해(諧)의 따님인데, 자녀 셋을 낳았다. 장남 체(棣)는 공보다 먼저 죽었고, 다음 찬(粲)은 급제하여 지금 전의시 승(典儀寺丞)이고, 딸은 대호군(大護軍) 유양준(庾良俊)에게 출가하였다. 계실(繼室) 승평군부인(昇平郡夫人) 박씨(朴氏)는 2남을 낳았다. 음(廕)은 급제하여 지금 통례문 지후(通禮門祗候)이고 막내는 삭발하고 불문(佛門)에 들어갔다. 두 번째 계실인 임씨(林氏)는 자녀가 없다.
공은 평생토록 가산을 경영하지 않았다. 그리고 천성적으로 술을 마시지 않았다. 공이 희학(戱謔)하거나 가무하는 모습을 사람들이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공은 또 교유를 삼가고 약속을 중하게 여겼다. 홀로 거할 적에도 항상 손님을 마주한 것처럼 하였으며, 오직 경사(經史)를 가지고 혼자 즐기곤 하였는데, 질의하는 자가 있으면 그때마다 경에 의거해서 대답하곤 하였다.
그리고 노장(老莊)의 글이나 형명(刑名)의 학술에 이르기까지 깊이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학자들이 많이 귀의하였다. 또 사한(詞翰)이 맑고 통창하였으므로 정언(正言) 이상의 벼슬에 있을 때에는 항상 관직(館職)을 겸대하였는데, 당시의 표전(表箋) 가운데에는 공의 손에서 나온 것이 많았다.
공을 장례 지내고 7년이 지난 때에, 나와 같은 해의 과거에 함께 급제한 우대언(右代言) 윤택(尹澤)이 그가 지은 공의 행장을 가지고 나를 찾아와서 묘지명을 부탁하며 말하기를 “아, 공이 나에게는 고모부이지만 은혜로는 아버지와 같다. 그런데 공이 돌아가셨을 때 내가 마침 남쪽 지방에 있었기 때문에 장례에 참석하지도 못하였고, 장례 기일이 또 촉박해서 명(銘)을 청할 겨를도 없었다.
사람의 묘지명을 지을 때에는 우리 공과 같아야만 부끄럽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도 없이 오늘에 이르게 하였으니 그저 한스러울 따름이다. 그대가 남의 묘지명을 많이 지었겠지만, 우리 공과 같은 분이 또 일찍이 있었던가?”라고 하였다. 이에 내가 뭐라고 사양할 말이 없어서 그저 알았다고 하고는 명을 지었다. 명은 다음과 같다.
사람들은 가난을 걱정하지만 / 人以貧憂
공은 부유함을 수치로 여겼고 / 公以富羞
혹자는 임금에게 아첨했건만 / 或謟于君
공은 곧음으로 알려졌다네 / 公以直聞
누군가가 벼슬을 주관하면서 / 孰尸厥爵
공의 벼슬을 덕보다 못하게 하였다만 / 爵劣于德
공의 덕이 연치와 함께 높기만 하니 / 德與齒尊
공의 존귀함을 또 말해 무엇 하랴 / 公貴何言
재능과 명망이 워낙 뛰어나서 / 才名出衆
중용되리라 기대를 받았는데 / 蘄其見用
중용되는 기회를 얻지 못했어도 / 見用之蘄
공은 또한 서운해하지 않았다네 / 公亦不慍
지금 누가 의기양양 기염을 토해도 / 赫赫者誰
얼음 녹듯 자취도 없이 사라지겠지만 / 泯滅如澌
공은 죽어도 여전히 살아 있으리니 / 公死猶生
못 믿겠거든 여기 새긴 명을 보라 / 視此刻銘
[註解]
[주01] 고삐를 …… 풍도 : 후한(後漢) 범방(范滂)이 기주 자사(冀州刺史)로 나갈 적에, “수레에 올라 고삐를 잡고서는 천하를 정화시킬
뜻을 개연히 품었다.〔登車攬轡 慨然有澄淸天下之志〕”는 남비(攬轡)의 고사와, 한 무제(漢武帝) 때에 수의어사(繡衣御史) 폭승
지(暴勝之)가 황제가 내린 부월을 쥐고서 군국(郡國)의 도적 떼를 일망타진했던 지부(持斧)의 고사가 있다.
왕명을 받들고 지방에 나가서 난리를 평정하고 민심을 안정시킬 때 이 고사를 인용하곤 한다. 《後漢書 卷97 黨錮列傳 范滂》《漢
書 卷66 王訢傳》
[주02] 심왕(瀋王) : 충선왕(忠宣王)의 조카인 심양왕(瀋陽王) 왕고(王暠)를 말하는데, 충선왕의 장자인 충숙왕(忠肅王)과 고려 국왕의
자리를 놓고 치열한 쟁탈전을 벌였다.
[주03] 부귀를 …… 자들 : 《논어》 양화(陽貨)에 “비루한 자들과 함께 임금을 섬길 수 있겠는가. 부귀를 얻기 전에는 얻으려고 안달하고,
얻고 나서는 잃을까 걱정하니, 참으로 잃을까 걱정한다면 못 하는 짓이 없게 될 것이다.〔子曰 鄙夫可以事君也與 其未得之也 患得
之 旣得之 患失之 苟患失之 無所不至矣〕”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주04] 누군가가 …… 하랴 : 《맹자》 공손추 하(公孫丑下)에 “이 세상에 누구나 존귀하게 여기는 대상이 세 가지 있으니, 벼슬과 연치와
덕이 그것이다.〔天下有達尊三 爵一齒一德一〕”라는 말이 나온다.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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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高麗國匡靖大夫,僉議評理,藝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上護軍致仕尹公墓誌銘。
公諱宣佐。字淳叟。鈴平郡人。三韓功臣莘達之後。莘達玄孫太師門下侍中瓘。平戎拓地。配享王廟。瓘之孫太師門下侍中麟瞻 。靖難匡國。功在社稷。麟瞻生判禮賓省事宗海。宗海生內庫副使世芳。世芳生贈判司宰寺事應植。應植生贈僉議評理均。均取贈贊成事宋世堅之女。於公爲考妣。公生而穎異。七歲能屬文。歲戊子。擢第一人及第。由金海掌書記。入補秘書郞。直文翰署 。累轉堂後官。丁未。忠宣王嗣政。沙汰百寮。拜左正言。再轉右思補兼讞部散郞。出按淮陽道。累遷內書舍人,選部議郞。壬子。按全羅道。有古按轡持斧風。事聞。就陞都津令。癸丑。王遜位于忠肅王。忠肅素聞其名。授成均祭酒。命掌符印在左右 。仍令進講資理通鑑。轉監察執義。中以事罷。辛酉。復職如初。是年。瀋王得幸于英宗。誣王以罪。欲攘其位。患得之徒皆附焉。其黨十餘人忽自都下來。言瀋王已得國。國人盍狀王之非以達于朝。乃連數十紙書其狀云云。鋪于旻天寺門。招百官而署之。人爭趍之。公獨曰。吾不知吾君之非。臣而訴君。狗彘不爲。唾之而去。由是臺諫,文翰得不署名。事定。中書以其狀歸之。王數其不署者而嘆曰。非尹某在憲司則其它未可知也。時王被留五年。財用匱乏。瀋王之黨知其然。封府庫以沮輸運。公檄察官趙琯督責主者。輸運乃行。乙丑。王歸國。除判典校。階通憲。俄以民部典書出尹漢陽。旣而王及公主如龍山。謂左右曰。尹尹淸儉。故使牧民。汝曹愼毋擾溷。辛未。引年致事。乙亥。王親注守令。至雞林尹。輟筆以思曰。朝臣盈庭。無如尹尹。卽注之。其見信於王類此。公再尹大府。益廉益勤。凡民之所病必務去。而可以利民者擧行無遺。丙子。加僉議評理。仍令致仕。癸未九月某甲子。得微疾。呼子女而前曰。今人之兄弟多不相能者。由有爭也。命子粲書文契。均分家業。且戒之曰。和而無爭。以訓汝子孫。言畢。正其衣冠。端坐而逝。以其月某甲子。葬于北原。享年七十有九。夫人尹氏。國學大司成諧之女。生子三人。長棣。先公歿。次粲。及第。今爲典儀寺丞。女適大護軍庾良俊。繼昇平郡夫人朴氏。生二男。廕及第。今爲通禮門祗候。季剃髮學佛。再繼林氏。無子。公平生不理家產。性不飮酒。人未甞見其戱謔歌舞。愼交遊重然諾。獨居常若對賓。唯以經史自娛。有質疑者。輒據經以對。至于老莊之書。刑名之學。靡不研窮。故學者多歸之。詞翰淸便。正言以上。常兼館職。一時表牋。多出其手。旣葬之七年。右代言尹澤與余同年及第。以所撰公行狀來乞墓銘曰。嗚呼。公雖姑夫。恩猶父也。適公歿。吾在南方而未及葬。葬期又迫而未暇銘。銘人之墓。如吾公乃可無愧。而猶無銘而至于今。可恨也已。子銘人多矣。亦甞有如吾公者耶。余無辭以辭。唯唯而銘之。銘曰。
人以貧憂。公以富羞。或謟于君。公以直聞。孰尸厥爵。爵劣于德。德與齒尊。公貴何言。才名出衆。𥷋其見用。見用之𥷋。公亦不慍。赫赫者誰。泯滅如凘。公死猶生。視此刻銘。<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