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포동 목회와 실수’
봉천동 남서울 제일교회와 전농동 성덕교회에서 교육전도사, 성수동 신양교회에서 전임전도사를 거친 나는 목사고시를 치르고 안수를 받게 되었다. 이제 목사가 되면 새로운 임지를 구해야 한다.
나는 좀 더 부 교역자 생활을 하며 목회를 배우기 위해 큰 교회에 이력서를 내고 어느 정도 가능성을 보이는 두 교회 중 한 교회를 정하려 기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안산에서 개척교회를 하던 동기 최경일 목사의 딸이 지병으로 위독하게 되어 동기들 몇 명이 영동 세브란스 병원으로 위문을 가게 되었다.
장신대 신대원에서 공부할 때 열 명 정도 모여 기도 탑에서 기도하던 그룹이 있었는데 최경일목사도 그중에 한 명이어서 가능한 몇 명이 개포동에서 목회하던 박신기목사 교회로 모여 함께 가기로 약속했다.
그 때 함께 한 이들이 다섯 명인가로 기억된다. 그런데 차로 이동하던 중 박신기목사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 이번 주 자기가 시무하는 한울교회에 와서 저녁예배 설교를 누군가 해달라는 것이었다.
자기는 청운교회 설교를 가기로 약속했고 최경일목사가 대신 설교를 하기로 했는데 딸 때문에 최 목사가 금식기도를 하다 몸이 너무 안 좋아 못 오게 됐다면서 대신 설교를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런데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그래서 담임목사님이신 문윤순 목사님과 상의해보고 허락하면 가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문 목사님 허락을 얻어 한울교회 강단에 섰다.
남자 집사님이 사회를 보셨는데 주일 저녁이어서 열 명도 안 되는 성도가 모였다. 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박전도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성도들이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면서 나더러 한울교회에 와서 교회를 맡아달란다.
자기는 청운교회로 가기로 결정했다면서, 당시 청운교회를 개척하신 이준만 목사님은 부흥사셨는데 미국에 집회를 다니시다가 당분간 미국에 가 있을 테니 교회를 맡아 달라 해서 박신기 목사님이 목사 안수를 받자마자 청운교회를 임시로 맡아 들어가셨다.
이제 막 목사 안수를 받고 청운교회를 맡은 박 목사도 대단한 분이다. 교회를 맡아 주면 들어와서 미국에 보내주겠다는 조건이었는데 약속이 잘 지켜지지 않았지만 결국은 박 목사도 다른 길을 통해 미국으로 들어갔다.
당시 한울교회는 고인이 되신 지금의 강북제일교회를 담임하시던 고 윤덕수 목사님 아래 박신기 목사가 전도사로 일하다가 5천만 원의 개척자금을 교회에서 빌려주는 형식으로 강남에 사는 성도들 중 원하는 이들이 함께 박 목사를 도와 개척교회를 하는 형식이어서 일부 교인들이 함께 개척을 한지 1년 정도 된 상태였다.
개척교회란 쉽지 않아서 힘들어하다가 미국행을 결심하고 나에게 교회를 맡아 달라하니 너무도 황당한 말이었다. 나는 동기 목사를 대신해서 빈자리를 때우러 간 건데 무슨 개척교회를 맡으라는 말인가.
개척교회를 하려면 기도도하고 준비도 해야 하는데 당장 결정해야한다니 나로썬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개척교회는 절대 못한다. 개척교회는 내 체질이 아니다. 지금 다른 큰 교회 두 곳에 서류를 넣고 어느 곳을 갈까 기도중이다.
거기서 더 훈련을 받은 후 기존교회로 가려하니 두말하지 말라 거절했다. 사실 나는 아버님이 어렵게 목회 하시는 모습을 지켜봤고 서울에 와서 이관영 목사님을 도와 남서울 제일교회를 섬기며 상처를 너무 많이 받았기에 개척교회라면 진저리를 쳤다.
그런데 박 전도사의 청은 너무도 간절했다. 내가 안가면 한울교회는 파산할 수밖에 없다. 개척교회도 교회인데 교회 파산해도 좋겠냐. 그리고 자기가 보기에는 이 목사가 한울교회 적임자다. 이 목사처럼 부드러운 성품의 목회자가 와야 이 교회가 산다. 그러니 딱 자르지 말고 기도해봐라.
계속해서 나를 설득하는 말에 갈등이 생겼다. 그래서 엎드려 기도했다.‘하나님, 나는 가난한 지역에 들어가 어려운 이들과 함께 아픔을 나누며 살기를 원했는데 무슨 강남의 개척교횝니까?
나는 마음도 약하고 추진력도 부족해서 도저히 개척교회는 못합니다. 내가 개척교회 섬기며 얼마나 마음 고생했는지 하나님은 아시잖아요. 난 못해요. 다른 이를 그리 보내세요.’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내게 말씀하셨다. ‘그래 너 편하려고 큰 교회 부교역자로 가려느냐? 그 교회는 네가 필요해서 보내려는 것이니 딴소리 말고 그리 가라.’결국 나는 아버님께 자문을 구했다.
‘나는 큰 교회로 가려는데 동기가 자꾸 그리로 나를 오랍니다. 어떻게 할 지 기도 좀 해주세요.’아버님은 즉시 말씀하셨다.‘그리 가는 것이 하나님 뜻이니 그리 가라.’
결국 나는 목사 안수를 받자마자 한울교회 담임목사로 갔다. 한 달 사례비 34만원. 사택도 자비로 얻어야 하고 그 이상은 교회 재정으로 감당이 안 된단다. 그래서 700만원 보증금에 15만원 월세를 얻어 13평 아파트로 부모님과 막내 동생 명숙이 까지 7식구가 들어갔다.
교회 차도 없어 우리가 중고차를 사서 운영하고 아버님이 운전을 해주시고, 나중에는 11평으로 이사 가니 아버님이 도저히 불편해서 견디실 수가 없어 광주 기도원으로 가셨다. 그리고는 쭉 안성 요양원에 머물다 돌아가셨다.
아들 목회 때문에 고생만 하시다 가셔서 생각하면 늘 마음이 짠하다. 당시 차들은 수동이어서 중고차를 사니 얼마나 고장이 잘나는지 수리비에 기름 값에 아내가 교사로 받는 월급을 가불해서 쓰고 월급날은 한숨을 쉬는 날이었다.
85년에 부임해서 92년 12월 지금의 한울교회 유치원을 분양받아 교회 뒤편에 작은 방을 내고 이사할 때까지 7년간 6번이나 이사했으니 그 고통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지만 그런 생활은 별로 힘들지 않았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마8:20) 이 말씀이 그때 큰 위로와 힘이 되었다.
‘바보 목사의 실수’
처음 한울교회 부임 후 노회나 시찰회에 갔을 때 은퇴를 앞두고 계신 목사님들을 보니 하늘처럼 높아보였다. 나는 언제 저렇게 되나. 그런 연륜이 될 때까지 아무 사고 없이 은퇴하시는 분들이 존경스럽고 부럽게만 느껴졌다.
나도 저렇게 무사히 사명을 다하고 은퇴 할 수 있을까? 누가 운전을 잘하는 사람인가? 기교를 잘 부리고 아무 사고 없이 끼어들기나 속도를 자유자재로 내는 사람일까? 아니다.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해서 안전띠를 푸는 사람이 최고의 베스트 드라이버다. 목회란 너무도 변화무쌍해서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알 수가 없다. 수많은 설교들과 심방, 다양한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일이어서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수많은 잘나가던 목회자들이 하루아침에 문제가 생겨 교회를 떠나거나 갑자기 쓰러지는 것을 보면서 늘 기도 제목은 ‘은혜 중에 사역을 잘 마치고 은퇴할 수 있게 해주세요.’였다.
그런데 어느새 내가 그분들 중 한 사람이 되어 내가 하늘 같이 모시던 어른들과 함께 은퇴목사 회에 모이게 되고 또 한분 한 분 떠나보내게 되었다. 한걸음 한 걸음 하루하루가 쌓여 벌써 여기에 와 있는 것이다. 나는 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라 생각하며 감사한다. 나 같은 바보가 무사히 은퇴 했다는 게 기적이다.
어느 수요일 개포동의 30평 쯤 되는 작은 교회당에서 강단 쪽에 칸막이를 하고 목양실을 만들어 예배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젊은 청년이 들어와 기도를 한다. 10분, 20분,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한 사람도 구경 안 오는 예배실에 혼자 나와 기도하는 청년이 궁금했다.
기도를 마쳤을 때 다가가 인사를 했더니 자기 아버님이 방배 경찰처 수사과장이라면서 장로님이고 어머님은 권사님이시란다. 자기 누이동생은 피아니스트고 형님은 안수 집사로 종로에서 간판업을 크게 한단다.
그런데 이 개포동으로 이사를 오게 되어 온 식구들이 함께 신앙생활 할 만한 좋은 교회를 찾고 있는데 아버님이 알아보시더니 한울교회가 좋겠다. 젊은 목사님이 설교도 잘하고 목회도 신실하게 잘 하는 분이라면서 이번 주에 등록을 하기로 했단다.
동생도 이 교회서 피아노 반주를 해주기로 했고 형님은 등록기념으로 교회 간판을 최고급으로 해드리기로 했단다. 당시 우리 교회는 돈 아끼느라 내가 간판에 쓸 목재를 사다 양각으로 파서 만들어 걸어 놓은 상태였다.
그래서 어떤 교회인가 알아보러 와서 기도한 것이란다. 형님이 목사님을 종로로 모시고 오라. 간판을 어떻게 만들까를 상의하잔다. 세상에 이런 일이, 나는 그 말에 와이셔츠 차림으로 즉시 중고 봉고차를 몰고 따라 나섰다.
그리고는 파고다 공원 앞 무슨 빌딩인지 모를 곳으로 가서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대고 그가 가르쳐주는 호실로 찾아갔다. 차는 자기가 주차해 놓겠다 해서 맡겨놓고, 3층인가 4층인가 가르쳐준 사무실을 찾으니 그런 이름으로 된 사무실은 아무 곳도 없다.
앗차! 해서 뛰어 내려가 보니 차는 이미 사라지고 그의 그림자도 찾을 수가 없었다. 와이셔츠 차림에 토큰도 한 개 안 갖고 나왔는데 어쩌나, 할 수 없이 근처 종묘 파출소에 가서 신고하고 경찰이 주는 토큰 두 개를 받아 버스를 타고 오며 하염없이 울었다.
하나님은 나 같은 바보를 왜 목사를 시켜서 이런 꼴을 당하게 하시나. 이제 당장 내일부터 새벽기도는 어떻게 운행하며 이번 주 성도들은 어떻게 태워오나. 좀 더 신중히 생각했으면 사기에 안 넘어 갈 텐데 그냥 장로 가정이 교회 등록한다는 말만 믿고 새 간판을 기증한다는 말에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 내가 너무도 한심스러웠다.
성도들과 교회에 뭐라고 얘기해야하나, 그런데 그렇게 난감한 나, 그렇게 바보인 나를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김화남 장로님(당시 경찰청 차장)을 통해 보험회사에 연락해 보험금을 지급받고 성도들의 헌금으로 새 차를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차를 사기 당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것이다. 생각하면 나무도 한심한 바보가 목회를 30년이나 할 수 있었음이 하나님의 은혜요 기적이다. 이런 바보 목사인 나를 지지해주고 밀어준 한울교회 성도들께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