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전에 北에 있는 고향 가서 방짜유기 전통 다져놓는게 소원 "그래서 쉬 늙지도 못해"
))) 방짜유기박물관은
문경의 공기에 반해 필생의 작업장 조성 "방짜 유기 진가 잘못 아는게 안타까워" 유기행상이었던 어머니 따라 어릴때부터 유기공장에 들락거렸어…그러다 보니 차츰 방짜 유기 매력에 빠져들었지
방짜유기를 테마로 한 특이한 박물관. 우리나라 유기의 역사가 청동기 시대까지 거슬러오른다는 점에서 최근 들어 이를 테마로 한 박물관이 생겨난 것은 너무 늦은 감이 있다. 대구시가 유기장 이봉주의 방짜유기 275종 1천480점을 무상기증 받음에 따라 국비와 시비를 들여 2000년 박물관 건립기본계획을 수립, 2006년 건축공사를 준공했으며, 지난해 5월에 개관했다. 상설 전시장인 유기문화실에는 우리의 역사와 함께 그 맥을 이어온 유기의 역사와 종류 등을 망라해서 보여준다. 기증실에서는 이봉주의 유기작품들이 전시됐다.
방짜유기는 구리와 주석을 합금한 향동(響銅)의 놋쇠를 두드려 만든 유기. 평안북도 정주군 마산면 납청 마을에서 예부터 발달했는데, 여기서 만들어진 유기를 납청 양대유기(良大鍮器)라 한다. 이곳의 유기장들이 6·25 전쟁 때 월남, 안양을 비롯한 몇 군데서 명맥을 이어왔다. 이봉주는 광복 후 월남, 서울의 납청 출신이 연 공장에서 기예를 배웠다. 그러니까, 이봉주의 작품이 전시된 방짜유기 박물관은 납청의 방짜유기 기예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셈이다.
"신세대들은 잘 몰라. 방짜유기가 뭔지. 혹 안성유기란 말은 들어봤어도, 납청유기란 말은 더더구나 못 들어봤을 거야."
방짜유기장 이봉주(83)의 푸념이다. 그만큼 방짜유기 만드는 게 외로운 일임을 강조하는 것이겠다. 그는 방짜유기의 본고장인 납청 출신으로, 방짜유기 기능보유자다. 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 대구 팔공산 자락의 방짜유기박물관에는 그의 '작품'들이 고스란히 전시돼 있다. 청동빛이 번들거리는 대야와 양푼, 각종 그릇과 징과 꽹과리같은 악기들…. 그가 유기를 제공하고, 대구시가 부지와 건물을 지어 만든 특이한 박물관이다. 문경시 가은읍 갈전리에는 그의 작업장이 있다. 영강을 굽어보는 산기슭 언덕 위에 지어진 작업장 규모는 아주 크다. 방짜유기 공장으로는 국내 최대다. 그러니까 이북 출신인 그가 어쩌다 문경 쪽에 자리를 잡게 됐고, 대구에 유기박물관까지 지어질 정도로 우리 지역과 '긴밀하게' 엮어져 버린 것이다.
"방짜유기박물관이 생기면서 대구 지역민들의 유기에 대한 관심이 새로워지는 듯하다. 옛날에는 실용적인 면에서 유기를 선호했다. 지금은 그보다는 웰빙이라는 측면에서 방짜유기에 대한 관심도가 커지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방짜유기와 웰빙? 그 관계가 잘 이해가 가지 않지만, 독의 예방에 탁월한 효과를 나타내며 식품의 신선도 유지에는 방짜유기가 적격이라는 설이 예부터 전해오는데다, 최근에는 그 점에 관한 학계의 실험이 발표될 정도로 관심이 커지고 있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대구방짜유기박물관에는 개관 후 많은 이들이 찾아오는데, 대부분 유기가 갖는 그런 신비한 '생명성'에 큰 관심을 갖는다.
문경의 공기에 반해 필생의 작업장 조성
그가 문경에 자리를 잡은 것은 유기의 특성을 고려한 때문이다.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에다 번듯한 공방을 차리는 게 평생의 꿈이지만, 이루어지지 못했다. "고향을 갈 수 없다면 산 좋고 물좋은 산골에다 필생의 공방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지." 우선 한가하게 작업에 몰두할 수 있는 호젓한 곳이어서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공기가 좋은 게 이곳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다. 유기는 공기에 민감하다. 공기가 나쁘면 색이 쉬 변질된다. 요즘처럼 공해가 문제가 되는 때에는 유기 관리가 큰 문제다. 문경의 환경은 그런 점에서 아주 좋은 곳이다. "이곳에 전시된 유기들이 2년 이상 지나도 변색이 안된다"며 문경 산골의 공기가 한반도에서 최적이라고 강조한다. "더구나 고향 납청같은 느낌을 주는 산골 분위기여서 더욱 정이 간다"고 그는 말한다. 안동과 대구는 옛날부터 유기문화가 아주 발달한 곳이며, 김천 등지가 광복후 유기생산이 유명했던 터라 더욱 이 지역이 끌렸다.
그가 살던 집은 평북 정주 납청에서 30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납청은 조선조는 물론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이후까지 우리나라 방짜유기문화의 본고장으로서 유명했다. 전국의 방짜유기장들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대개 납청에 귀결될 정도다. 납청 출신들이 각지로 흩어져 공방을 연 것이다.
이봉주의 어머니는 유기행상이었다. 납청의 유기공장에서 유기를 공급받아 인근을 떠돌면서 팔아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는 어머니를 따라 납청의 유기공장을 자주 들락거렸다. 그러다보니 차츰 방짜유기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광복 후 서울로 온 그가 납청 출신이 운영하는 서울 후암동의 방짜유기공장에 들어간 것은 그런 연유때문이었다.
"방짜 관심 덜하지만 명맥은 계속 이어질 것"
사환부터 시작, 밑바닥부터 철저하게 배워나갔다. 18개월만에 원대장(방짜유기 제작을 총괄지휘하는 지위)이 될 정도로 재주와 눈썰미가 탁월했다. 힘이 좋은 데다 열의가 대단했다. "남들은 10년이 걸려도 따기 힘든 게 원대장 자리니, 타고난 쟁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했다"고 그는 스스로 대견해한다. 하루 임금이 쌀 두 가마였다. 당시로서는 대단한 대우를 받은 셈이다.
29세 되던 1957년 독립하여 서울 구로동에 공장을 열었다. 공장 이름이 '평북 양대공장'이었다. 북한에서는 방짜를 양대라 한다. 한 때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연탄사용이 늘면서 유기사용이 줄어듦에 따라 폐업하는 유기공장이 속출했다. 그래도 공장문을 닫지 않은 채 방짜유기의 명맥을 유지하려 안간힘을 다했다.
유기는 한민족 그릇문화의 중요한 뿌리다. 한국인들은 예부터 순동(純銅)을 쓰지 않고, 주석과 합금된 상태의 놋쇠를 선호했다. 여름에는 백자를 주로 쓰고, 겨울에는 유기를 사용했으나 수저만은 사철 썼다. 그것이 현대로 들어오면서 일제강점하의 공출이라는 수난을 거쳐, 생활용기의 간편화와 다양화로 사라져가고 있다. 그런 빈 자리를 징과 꽹과리를 만들면서 메워오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징과 꽹과리 같은, 한국 악기의 중심을 이루는 것들이 방짜로 만들어져 온 것임을 새삼 깨닫는다. 아하, 우리 소리의 그 쟁쟁함과 우람함이 풀무질과 우김질, 담금질의 연마를 통해 터져나온 것이구나라는 감회. "징과 꽹과리의 성패는 음질을 잘 새기고 깨우치는 데에 있다"는 그는 징의 경우 악기 부위의 두터움과 얇음의 상태를 잘 다스리면서 음감을 깨우쳐나가는 게 관건이라고 강조한다. 손맛도 좋아야 하지만, 놋쇠가 내는 그 풋울음을 가늠하는 귀맛도 뛰어나야 좋은 악기를 내놓게 된다는 것.
방짜의 명맥은 이봉주같은 이들이 있어서 끈기있게 이어져내려온 셈이다. 비록 방짜 유기가 사양길이지만, 우리 삶 속에 스며있는 놋쇠의 맛을 잃지 않는 한, 질펀한 농악의 가락이 쇠하지 않는 한 방짜의 기예 역시 오래 갈 것임을 그는 믿는다.
"방짜 유기 진가 잘못 아는게 안타까워"
그가 가장 안타깝게 여기는 건 많은 사람들이 방짜와 주물유기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유기는 방짜와 주물, 그리고 반방짜로 나눠진다. 이봉주의 방짜는 구리 78%와 주석(상납) 22%를 합금하여 용해하여 만들어진다. 용해된 놋쇠를 불에 달구어 수없이 메질(망치질)을 거듭한다. 그렇게 만들어지기 때문에 다른 유기에 비해 광택이 뛰어나며, 특히 메자국(망치자국)이 은은하게 남아 있어서 수공 제품의 맛과 매력을 절로 풍긴다. 합금의 배율이 조금이라도 틀리면 차질이 생긴다. 그러나 학자들 중에는 이 비율을 잘못 알고 발표를 하는 예가 많음을 그는 안타까워한다.
주물유기를 방짜유기라 속여 팔아먹는 상혼에도 분노한다. "주물유기는 매끈하고 규격이 좋아 일반인들이 먼저 눈길을 보내기 십상이나, 가격은 방짜유기의 4분의 1에도 못 미친다. 그걸 방짜로 팔아먹으니 문제"라는 것.
80이 넘은 나이라 뒤로 물러나 쉴 만도 한데 그는 꾸준히 화덕 가에 앉아 스무 명이 넘는 공방 일꾼들을 독려하고 지휘하면서 망치질을 하는 원대장으로서의 역할을 쉬지 않는다. 아들 형근이 그의 대를 이으려 열심히 망치질을 하는 게 여간 대견스럽지 않다. 노구에도 집게를 쥐고 망치질을 하는 팔뚝이 강건하다. 필자가 그 팔의 근육을 경이롭게 바라보자 "죽기 전에 고향에 가서 납청 방짜유기 전통을 다져놓고 싶어서 쉬 못 늙는다"며 멋쩍은 듯 망치질을 계속한다.
*이봉주는
◇1926년 평북 정주 출생
◇1948년 양대(방짜)공장 입사
◇1957년 서울 구로동에 방짜유기공장 설립
◇1978년 유기공장 안양으로 이전
◇1979년 경기도 민예품 경진대회 입선
◇1981년 제6회 전승공예전 입상 및 82년 제7회전 문화공보부장관상 수상
◇1981년 미국 질디안(세계최대 방짜 타악기 회사) 기술교류차 왕래
◇198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 지정받음
◇전통공예기능보존협회 이사, 이사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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