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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Socrates와 제자들
소크라테스의 제자들 가운데 가장 이름난 사람 일곱을 들면, 안티스테네스, 아리스티포스, 에우클리데
스, 파이돈, 플라톤, 아이스키네스, 크세노폰 등입이다.
안티스테네스는 견유 학파라고 알려진 키니코스 학파를 세웠고, 아리스티포스는 키레네 학파를, 에우클리데스는 메가라 학파를, 파이돈은 엘리스 학파를 세웠습니다. 이들은 보통 '소(小) 소크라테스'라 칭하기도 합니다.
1. 크세노폰
그리스의 군인이며 역사가로서, 또한 문장가로서 높이 평가받으며, 철학사가 Diogenes에 따르면 매우 뛰어난 미남이었다고 한다. 그는 일찍이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되었는데 그 경위는 이러하다. 좁은 골목길에서 소크라테스와 크세노폰은 처음 만났는데, 소크라테스가 지팡이로 길을 막았다.
그리고는 음식이 어디 파는지를 물었고 크세노폰은 대답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다시 사람은 어디에서 선하고 현명하게 되는지 물었다. 어린 크세노폰은 답을 하지 못했고, 소크라테스는 어린 크세노폰에게 따라와서 배우라고 한다. 이런 인연으로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된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소크라테스를 알고 지냈고, 생의 중대사를 그와 의논 할 만큼 그를 믿었다. 그는 후에 스파르타의 편을 들었기에 아테네에서 추방당하였으나, 그의 공을 인정한 스파르타인들에 의하여 생의 마지막을 저술과 독서로 보내었다. 주요저서로는 『그리스 역사』,『아나바시스』,『소크라테스의 회상』(Memorabilia)등이 있으며, 단연 그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저작은 『회상』(memorabilia)이다. 사실 이밖에도 『이코노미스트』,『소크라테스의 변명』,『심포지움』등의 철학적 저술이 있는데,
『이코노미스트』는 소크라테스와의 대화식으로 가정학에 대한 크세노폰의 이론이 나오며, 『소크라테스의 변명』과 『심포지움』은 플라톤의 것과 이름이 같으며, 플라톤의 것에 대한 모작이라는 설이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회상』인데, 이는 소크라테스에 대한 중요한 역사적 지로이기 때문이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죽음 이후 그의 고발 내용을 접하고 이 글을 씀으로서 소크라테스가 고발내용의 그런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논하고자 했다. 이런 동기에 쓰여진 『회상』은 소크라테스의 처형의 부당함을 알리는 동시에 그의 행적과 언행을 우리에게 전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ED%82%A4%EB%8B%88%EC%BD%94%EC%8A2. 퀴니코스(Cynics/Kynikos) 학파 안티스테네스
이 학파의 가장 유명한 대표자들을 들자면, ①안티스테네스와 ②디오게네스, ③크라테스, ④메트로클레스, ⑤히라르키아 등이다.
견유 학파 사람들은 자유란 영혼의 지고선이며, 자급 자족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진짜 견유 학파 사람이라면 자신의 육체적, 감정적 욕구에 노예가 되지 않아야했다.
정신적 가치야말로 이 세상에서 중요하고 유일한 가치라고 생각한 견유 학파는 전통적 가치에 부정적일 수 밖에 없었다.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극한까지 몰고 간 일종의 극단주의자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들에게 현실은 최소한의 수준으로 축소되고, 현상은 참을 수 없는 대상으로 치부된다.
견유 학파는 일종의 생활 양식에 더 가까운 듯이 보인다. 물질적 욕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기에, 견유 학파의 철학자들은 정치, 물리학 등 윤리학을 제외한 모든 철학적 사변에 몰두할 수 있었다.
사람인 아버지와 트라키아 사람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테네 사람 안티스테네스는 퀴니코스 학파의 창시자이다. 그는 순수한 아테네인이 아니라, 트라키아사람인 어머니를 두었기에 순수 아테네인이 아닌사람을 위한 “퀴노사르게스”라는 곳에서 가르쳤다. 그곳은 헤라클레스에게 바쳐진 곳이며, 그리고 퀴니코스주의자들은 헤라클레스를 수호자로 생각했다 한다. 그리고 안티스테네스의 작품중 하나는 그 이름을 헤라클레스의 이름에서 가져왔다
한다
그는 먼저 소피스트의 고르기아스의 제자로 있다가 후에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되었다. 그의가르침은 매우 독특하게 소피스트적이며 소크라테스적인 요소를 혼합하여 가진다. 즉 그는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의 것을 연결시킨다. 그 자신의 주된 관심은 변증술과 윤리학에 본질적으로 머물렀다
윤리학에 있어서 그는 “덕”을 강조한다. 덕이란 세속적인 것에대해 초연해하는 것으로 금욕적 성향을 가졌다. 즉 덕은 욕망의 부재였다. 윤리적 지식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과학적 공부나 기술에 대한 경멸로 바뀌었고, 소크라테스가 더 많은 지혜를 위해 세속적 명예와 부에 대해 가진 초연이 안티스테네스에게는 초연 그 차제가 목적이 되었다. 그리고 소피스트적 인식이론을 받아들여서 단지 개별자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며,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비판한다. 그리하여 이리 말한다.
오!
플라톤! 내가 보는 것은 한 마리의 말(horse)일뿐 마성(horseness)이 아니네”
헤겔은 안티스테네스를 적어도 퀴니코스학파의 일원중에는 고귀하고 교양을 가진 이라고 한다.
퀴니코스 학파, 아테네 사람 안티스테네스(Antisthenes)를 창시자로 하는 이 학파는 퀴노사르게스(Kynosarges)라는 이름의 체육관(Gymansium)에서 가르쳤다는 사실로부터 그리고 개와 같은 생활, 즉 비재래적 생활양식으로부터 기인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일부분 극단으로 몰고 간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는 보다 많은 지혜를 위해 세속적 부와 명예에 초연하였다면, 이들은 초연 혹은 자족성 그 자체를 목표로 하였다. 이들은 덕이 무엇인가를 탐구한 소크라테스의 정신을 등한시하고 실제적 덕을 수양하는데 집중하였으며, 이들은
덕을 자족이라 한다. 즉 덕은 욕심을 억제하는 실천적 능력이며 무욕(無慾)이다. 욕심, 욕망을 제한할수록 번뇌가 사라진다고 주장하고, 덕은 덕 자체로 최고의 선이라 한다. 또한 그들은 인식에 있어서 소피스트적 감각주의를 받아들인다. 뮈니코스의 이론은 시노페사람 디오게네스(Diogenes)에게서 확연해지며, 디오게네스의 제자로는 모니모스(monimos), 오네스크리토스(Onesikritos), 필리스코스(Philiskos) 그리고 테베사람 크라테스(Krates)가 있다. 헤겔의 그의 철학사에서 이들 학파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며, 하나의 재계나 학문을 성립시키지 못했다고 하며, 스토아학파로 이어지면서 비로소 체계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3. 시노페 사람 디오게네스(Diogenes)
헤겔의 비평을 참조한다면, 퀴니코스 학파는 스토아 학파에 이르기 전까지는 아직 체계를 갖추지 못했을 것이며, 필자 역시 그리 믿는다. 그러나 그들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스토아학파의 사상적 원류를 추정해 볼 수 있을게다. 안티스테네스에 이어 살펴볼만한 퀴니코스 학파의 일원은 시노페사람 디오게네스 이다. 그는 안티스테네스가 자신의 이론에 근거하여 살지 못했다고 생각하고는 철저한 금욕주의를 제창했다. 그는 안티스테네스를 왕의 “개”라고 비난하지만 스스로도 “개”로 불리었다. 하지만 그 이유는 서로 상이했다. 안티스테네스가 왕의 주변을 맴도는 이었다면, 디오게네스는 길거리를 떠돌아다녔기에 얻어진 별명이기 때문이다. 그는 아테네의 거리, 시장을 보금자리로 하고 술통에서 잠을 잤다고 전해진다. 그에 대한 여러 일화가 있다.
그가 아테네에서 지낼 때 아리스티포스(Aristippos)가 권력에 기대에 철학 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그리고 더러운 발로 플라톤의 거실에 들어가 플라톤의 거만함을 짓밟는다고 했다 한다. 그는 안티스테네스의 물질적 초연함에 만족치 못하고 더 적극적인 금욕을 주장했다. 그의 제자로는 모니모스, 오미시크리토스, 필리스코스, 그리고 테베사람 크라테스가 있으며 크라테스는 많은 재산을 도시에 내어놓고 퀴니코스식의 거지생활―헤겔의
말을 참고한다면, 막대기 하나에 속옷도 없이 너덜너덜한 겉옷만을 입고 동냥보따리에는 물컵과 생필품을 넣어다니는 생활을 했다.
4. 키레네 학파, 아리스트포스
키니코스 학파와 키레네 학파는 극과 극을 이룹니다. 견유학파가 '자유'를 쾌락의 노예가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최소한의 생활에 만족하는 상태로 본 반면, 키레네 학파에서는 어떠한 것에도 치우치지 않은 채 인생의 쾌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로 보았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들 가운데 최초의 이데올로기적 균열은 아리스티포스에 의해 비롯됩니다. 인지 가능한 세계에 대한 앎에 확고히 뿌리를 내린 아리스티포스의 쾌락주의, 개인주의가 갈등을 일으킨 것입니다.
'개인의 자유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아리스티포스는 평정심을 갖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평정심만 잃지 않으면, 부와 권력과 성욕의 유혹이 아무리 강해도 그에 완전히 빠질 위험은 없다는 것이다.
아리스티포스의 중심 사상은 '덧없는 이 순간'을 어떻게 하면 충실히 사느냐는 데 모아집니다.
"쾌락이 부드러운 미풍과 같고, 고통이 휘몰아치는 강풍과 같은 것이라면 매일매일의 삶은 고요한 바다에 비유할 수 있다." 아리스키포스가 이 비유를 통해 말하는 것은, 일상의 항해에서 쾌락의 미풍을 받아 고통을 헤쳐나가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5. 메가라 학파, 에우클리데스
에우클리데스는 소크라테스의 제자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았습니다. 대략 435년에서 365년 사이에 생존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철학을 공부했는데, 처음에는 주로 파르메니데스의 저작을 연구하다가 후에 소크라테스를 만난 뒤부터는, 소크라테스와 파르메니데스의 학설을 조화시키는 일에 일생 동안 매달렸습니다. 에우클리데스를 추종했던 사람들을 가리켜 메가라 학파, 또는 문답법에 의해 토론을 이끌어가는 그들의 토론 방식에서 따와 변증론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에우클리데스는, 모든 사물은 '존재'라고 불리는 내재적 성질을 지니며, 동시에 '비존재'라는 외부적 현상의 종합이라는 사실을 파르메니데스로부터 배웠습니다. 인간이 어떤 목표를 지향할 때는 반드시 그 욕망의 대상이 단순한 '현상'이 아닌 진정한 '실재'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지식을 성취하고 덕을 이루는 것이라고 했다. 에우클리데스는 스승의 이론과 파르메니데스의 이론을 조화시켜, 신을 '존재', 또는 영원하고 나뉠 수 없는 '일자'와 동일시하고, 그 외 나머지는 '존재하지 않기'때문에 전혀 중요치 않다고 결론을 내렸다.
에우클레이데스(eukleides)
메가라 사람 에우클레이데스는 그의 조국 메가라(Megara)가 아테네와 대립중인 상황에서 오직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되어 가르침을 받기 위해 목숨을 걸고 아테네로 여장을 하고 잠입하였다.
그는 일찍이 소크라테스의 초창기 제자가 되었으며, 소크라테스 죽음 이후 플라톤을 비롯한 다른 제자들과 메가라로 피신하였다.
그는 엘레아학파의 하나(일자 εν)에 대한 학설에 익숙했으며, 동시에 소크라테스의 제자로서 소크라테스의 윤리적 원리에도 익숙했다. 그리하여 그는 이 두 사상을 연결하였고 그리하여 선은 하나(일자 εν)이며, 그것은 많은 이름으로 칭해지지만 또한 시 혹은 이성이라 한다. 그리고 선에 대립되는 것의 존재원리를 부정하였다. 즉 선에 대립되는 것은 비존재자라 했다. 에우클레이데스는 비록 소크라테스의 영향력 아래 있지만, 엘레아학파의 전통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분명 그는 단지 엘레아학파만은 아니다. 엘레아학파는 그저 존재의 변증법이라면, 그는 선(bonum)을 중시한 변증법자이기 때문이다.
메가라 학파는 다른 소크라테스 학파인 퀴레나 학파나 퀴니코스 학파가 실천적인 면에 치중한데 반해 이론적인 면에 치중하였다. 그들은 메가라사람 에우클레이데스를 그 시작으로 하는데, 그는 엘레아학파의 일자에 대한 이론과 소크라테스의 윤리적 원리를 기초로 하였다. 이를 기초로 한 이들 학파는 “선을 하나(일자)”라 한다. 이들은 선이 여러 형태를 취하지만 그 본질은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들은 그러한 기초가운데 변증법을 발전시킨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사상은 엘레아학파나 소피스트에 견줄만하다. 하지만 엘레아학파는 존재(esse)에 관한 변증법을 발전시켰다면 메가라학파는 선(bonum)에 관한 변증법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소피스트는 가치를 유동시킨데 반해 메가라학파는 다시 보편성이란 형식으로 고정시켰다.
이런 이들의 주된 과업은 변증법을 형성하고 발전시키는 것이었고, 또한 이들은 매우 뛰어난 고양을 가진 이로써 논쟁 시에는 격정에 휘말리어 험담을 듣기까지 했다.
6. 아이스키네스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아이스키네스 역시 몇 편의 대화편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순수하 소크라테스적 특징을 가지는 이들 대화편은 7편으로서 Miltiades, Kalllias, Axiochos, Aspasia, Alkibiades, Telauges, Rhinon 등이다. 아이스키네스의 이 대화편들은 특히나 소크라테스적 윤리(에토스 ηθο&)의 표현으로 높이 평가된다. 그는 자신의 대화편인 Kallias에서 프로디코스(Prodikos)와 아낙사고라스(Anaxagoras)를 비판하며, 반대한다. 그에 따르면 그는 프로디코스와 아낙사고라스를 소피스트로 통칭한다,
아낙사고라스는 소크라테스 주의자에게나 소피스트에게나 같은 기초이다.
e. 밀레토스 사람 에우블리데스(eublides) 밀레토스 사람인 에우블리데스는 에우클리데스의 제자로서 직접적 후계자이다. 이는 언어를 먹고 개념을 호흡한다고 할 정도로 논쟁가로써 이름이 높았다. 그를 유명케 한 것은 함정추리로써 다음과 같은 것이다. “네가 거짓말쟁이로서 또한 거짓을 말하고 있다한다면 너는 거짓을 말하며 동시에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엘렉트라는 그녀의 오라비 오레스테스를 알고 있다. 하지만 엘렉트라는 가면으로 가리워진 오라비를 알지 못한다. 그런고로 엘렉트라는 아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또한 많은 희극을 적었으며, 그리스 최대의 웅변가이며 정치가인 아테네사람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는 그에게 배웠다고 한다.
f. 이아소스 사람 디오도로스 크로노스(Diodoros kronos) BC. 300년경 활동한 메가라 학파의 최대 변증론자이다. 그는 이아소스(Iasos)출신이며 아폴로니오스 크로노스(Apollonios Kronos)의 제자이다. 그는 스틸폰(Stilpon)과 함께 메가라 학파의 학설을 극단화하였다. 그는 엘레아학파의 제논이 주장한 운동부정론을 검토하고 운동과 소멸은 물론이고 가능성의 개념마저 부정했다. 그는 가능성을 현실성과 동일시하였다. 즉 단지 현실성만이 가능하다한다. 가능성은 불가능한 것이 될 수 없다. 그런데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중에 하나가 실제로 실현되면 다른 하나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만약 그것이 전에 가증했었다면, 그 불가능한 것은 가능한 것으로부터 나왔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전에 가능하지 않았으며 단지 실제적인 것만이 가능하다.
g. 메가라 사람 스틸폰(Stilpon)
가장 유명한 논쟁가인 메가라 출신의 스틸폰은 당시에도 무척이나 유명한 모양이다. 디오게네스에 따르면 그의 논변은 예리하여 타의 추종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그리스 전체가 그로 인해 메가라학파로 물들 지경이라 했다. 그는 일원론을 주장하고 이원론을 주장하는 이데아론의 플라톤을
비판하였다. 그는 BC320년경 아테네에서 가르쳤으나 그후 사라졌다. 그는 주로 윤리학에 치중하였으며, 자기 충족성의 논점을 초연(apatheia)의 이론 속에서 다듬었다. 그의 제자로는 스토아 학파의 사람인 제논이 있다.
h. 엘리스-에레트릭 학파
엘리스 사람 파이돈에 의하여 기초가 형성된 학파이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파이돈이 스승의 죽음 이후 자신의 조국에 형성한 철학적 학파로서 메가라
학파와는 친근한 성격을 가진다. 그후 시틸폰의 제자, 파이돈의 제자인 에레트리아사람 메네데모스와 아스크레피아데스는 자신의 조국인 에레트리아에
엘리스학파를 전하였다. 파이돈은 변증술을 사용함에 있어 메가라학파와 유사했고, 에레트라아의 메네데모스는 윤리학에 관심을 가지고, 덕과 앎의 일치를 주장했다.
i. 엘리스 사람 파이돈(Phaidon
엘리스 학파의 창시자인 파이돈은 플라톤의 대화편으로서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밤을 엮은 『파이돈』에 등장하는 인물로서 소크라테스의 대화를 그의 친구와 함께
에게크라데스에게 전해주는 이 이다. 그의 저서들을 가리켜 겔리우스(Gellius)는 우아한 권고라 한다. 파이돈의 삶에 대하여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지식은 매우 한정적이고 빈약하다. 티몬(Timon)은 그를 수다쟁이로서 에우클레이데스와 함께 놓여지며, 본질적으로는 변증술가(Dialiktiker)로서 나타냈다.
에레트리아 출신인 메네데모스와 그의 친구 아스크레피아데스는 메가라학파의 스티론과 파이돈의 제자 안키퓌로스(anchipylos)와 모스코스(moscos)를 따랐다고 하며 혹자는 우선 플라톤학파의 일원이었다 하지만, 플라톤 자체 연대기적으로 볼 때 불가능 할 것으로 본다. 그들은 자신들의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 에레트릭 학파를 형성하였다, 우리는 단지 메네데모스에 대하여 약간의 것으로 그의 철학적 관점에 접근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그는 강하게 에레트릭적 변증법안에 머물렀으며, 윤리학에 관심을 가지고, 실제로 윤리학에 대한 실제적 명제를 내세웠다. 그는 메가라 학파의 사람들과 같이 그도 역시 모든 덕은 하나로서 가치가 있다 했고, 단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어질 뿐이라 했다. 왜냐하면 이성적 관점에 따라서 말이다.
j. 아테네 사람 안티스테네스(Antistenes)
아테네 사람인 아버지와 트라키아 사람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테네 사람 안티스테네스는 퀴니코스 학파의 창시자이다. 그는 순수한 아테네인이 아니라, 트라키아사람인 어머니를 두었기에 순수 아테네인이 아닌사람을 위한 “퀴노사르게스”라는 곳에서 가르쳤다. 그곳은 헤라클레스에게 바쳐진 곳이며, 그리고 퀴니코스주의자들은 헤라클레스를 수호자로 생각했다 한다. 그리고 안티스테네스의 작품중 하나는 그 이름을 헤라클레스의 이름에서 가져왔다
한다.그는 먼저 소피스트의 고르기아스의 제자로 있다가 후에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되었다. 그의가르침은 매우 독특하게 소피스트적이며 소크라테스적인 요소를 혼합하여 가진다. 즉 그는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의 것을 연결시킨다. 그 자신의 주된 관심은 변증술과 윤리학에 본질적으로 머물렀다.
윤리학에 있어서 그는 “덕”을 강조한다. 덕이란 세속적인 것에대해 초연해하는 것으로 금욕적 성향을 가졌다. 즉 덕은 욕망의 부재였다. 윤리적 지식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과학적 공부나 기술에 대한 경멸로 바뀌었고, 소크라테스가 더 많은 지혜를 위해 세속적 명예와 부에 대해 가진 초연이 안티스테네스에게는 초연 그 차제가 목적이 되었다. 그리고 소피스트적 인식이론을 받아들여서 단지 개별자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며,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비판한다. 그리하여 이리 말한다.
k.퀴레네 출신인 아리스팁포스
아리스팁포스는 퀴레네에서 프로타고라스의 가르침을 접하고, 후에 소크라테스와 관계를 가진 듯 하다. 프로타고라스의 가르침은 그가 확실한 지식은 감각뿐 이라 한 것에서 드러난다. 그는 주관적 감각이 실제 행위의 근거라 믿었다. 그리고 실제 행위가 주관적 감각에 기인한다면 당연히 행위의 목적은 좋은 감각 즉 즐거운 감각이라 생각했다. 그의 윤리적 목적은 쾌락이다. 시실 소크라테스는 덕이 행복의 길이라 했지만, 쾌락이 인생의 목표라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소크라테스의 한 부분을 극단적으로 이끌어냄으로서 소크라테스의 남은 부분은 무시했다. 그는 에피쿠로스학파의 것과도 구별된다. 에피쿠로스가 추구하는 쾌락이 정신적이라면, 아리스팁포스는 육체적 쾌락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소크라테스학파중 맨 먼저 수업료를 받았으며, 이렇게 거둔 돈을 소크라테스에게 건네었고, 소크라테스는 거부했다 한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중심 원리는 감각이며 이것은 진과 선의 기준이다. 이러한 감각에 대한 이론은 후에 테오도로스와 헤게지아스 및 안니케리스에게 이어지며 학문적으로
발전된다.
l. 테오도로스 아테오스(Theodoros atheos)
그가 유명한 것은 그가 신들의 존재를 부정하여 아테네에서 추방당하였기 때문 일게다. 그러나 이는 헤겔의 말처럼 그리 철학적으로 주목할만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의 또 다른 특징은 ‘기쁨과 슬픔을 궁극 목적으로 규정하여 전자는 오성으로 그리고 후자는 오성의 결핍으로 여긴 것’에 있다. 그에게 단지 느껴지는 대로의 감각이나 순간적 직접성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즉 감각적인 것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개별적 감각 작용은 일반적으로 고찰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지적 능력과 정의로서 향락되어질 소재일 뿐이다. 즉 지적 능력과 정의로서 어디서 만족을 추구해야 할 것인지를 알게 된다는 말이다.
m. 헤게시아스(Hegesias)
헤게시아스는 즐거운 개별적 행위에 관심을 가지지 말라 한다. 그는 삶을 고통스러운 것이라 확신한다. 그는 쾌락과 불쾌는 뚜렷한 기준이 없으며 만족을 기본으로 한다는 것은 공허한 것이라 하고 만족이라 아무런 의미 내용이 없는 것이라 한다. 그리하여 그는 완전한 행복을 거부한 것이다. 그는 삶의 목표를 고통과 슬픔의 부재에 강조점을 두었다. 즉 모든 욕망을 포기한 무관심의 상태에 몰입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그의 이러한 성향은 당시 왕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에게 강의를 금지 당하게 되는데 그 까닭은 그의 강의를 들은 이들은 삶에 대해 무관심해지고 무력해져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라 한다.
4. 안니케리스(Anniceris)
안니케리스는 적극적인 쾌락을 삶의 목표로 삼음으로서, 퀴레네 학파의 적극적인 면을 강조했다. 그러나 안니케리스와 그의 추종자에 이르면서 일상 생활에서 우정이나 고마움, 그리고 효도나 애국심...등은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쾌락을 누리는 것으로 여겼다. 여기에서 안니케리스는 테오도로스와 우정에 대해서 달리 본다. 안니케리스는 우정의 가치를 인정하지만, 테오도로스는 현자는 스스로 자족하기에 친구가 필요 없으며, 고로 우정도 필요 없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