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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빛 통영바다
- 한려해상국립공원 탐방기 -
강 문 석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대로 통영은 한반도의 최남단에 붙어 있다. 그런데도 통영은 10월 초 사흘간의 황금연휴를 맞아 외지에서 찾아든 탐방객들로 북적댔다. 외국인 관광객들만 가뭄에 콩 나듯 해서 이곳이 항공편으로 접근하기엔 한계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흰 구름 떠있는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쪽빛 바다는 그림 같은 속살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여행 둘째 날 아침 일찍 우리 일행이 한려해상국립공원을 조망하는 케이블카 승강장을 찾았을 땐, 강풍으로 운행을 멈춘 상태였다. 새벽부터 갑자기 기상변화가 생겼다고 했지만 그 사실을 모르고 통영의 첫 번째 관광명소로 몰려든 차량들은 승강장 전방 5백 미터까지 늘어선 채 서로 뒤엉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이곳 케이블카는 1996년 시설결정 후에도 수익성 논란과 환경단체의 반발에 휘말려 급기야는 2002년 주민투표까지 거치면서 착공했다. 내가 3년 동안 통영을 찾았던 것은 은퇴한 직장에서 검사업무를 요청해온 때문이었다. 방문할 때마다 한려수도의 비경을 감상하기 위해 일을 끝내고는 서둘러 461미터 미륵산을 올랐다. 그 무렵 케이블카 건설현장에서 와이어가 끊어져 작업원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발생했고 공사가 중지된 현장은 철 구조물이 부식된 채로 흉물스럽게 방치되어 있었다. 당시 들리는 바로는 사업이 아예 취소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벌써 7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케이블카는 2008년 4월 준공과 동시에 개통되어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이 케이블카는 국내에서 최장인 1975미터로 2010년 부산과 거제를 잇는 거가대교까지 개통되면서 30퍼센트나 탑승객이 늘어났다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2010년 기준 13만 통영 시민들에게서 거둔 세금이 1,100억인데 케이블카로는 그보다 100억을 더 벌어들였다니 효자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셈이다. 오늘 강풍으로 인한 손실은 과연 얼마나 될까. 사업자로선 큰 수익을 놓쳐 속이 탈 것이고 탐방객들로선 미륵산 정상에서 조망하는 한려수도의 비경을 놓쳐 안타까울 것 같다. 비록 경로우대이긴 하지만 그동안 나도 일곱 차례나 이곳 케이블카로 오르내렸으니 사업운영에 전혀 무심하진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리프트는 스위스의 가라반타사가 만든 최신형 모델로 외관도 미려하고 승차감도 좋았다.
중국의 황산이나 일본의 다테야마에 설치된 구식 케이블카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쾌적하고 흔들림도 적었다. 차창이 넓고 깨끗해서 바다 풍광을 조망하면서 카메라에 담기에도 더없이 좋았다. 케이블카 상부역사 건물엔 승하차장과 스낵바 전망대 산책용 데크가 마련되어 있다. 이곳에선 무엇보다 사방으로 탁 트인 전망이 압권이다. 바위산이라 거목들이 자라지 못한 것이겠지만 아름다운 해상국립공원을 조망하기엔 그저 그만이다. 한려해상국립공원으론 1968년 지정되어 우리나라의 해상국립공원 시대를 열었다. 벌써 반백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명칭은 ‘한산도’와 ‘여수’에서 한 글자씩 따서 ‘한려수도’로 붙였지만 실제론 통영 거제 남해 여수 사천 하동까지 4개시와 2개 군을 아우른다.
해상공원은 우리나라 8경중의 하나로 거울 같이 잔잔한 바다물결과 다도해 비진도 한산도 거제해금강과 고요한 포구, 한가로이 떠있는 범선 등 경관이 아름다운 해상관광자원은 물론 이충무공의 유적까지 많아 역사의 산 현장으로도 이름난 곳이다. 또한 기후가 온화해서 동백을 비롯한 유자 비자나무와 풍란 등 난대성식물이 자생한다. 미륵산 정상엔 ‘향수’의 작가 정지용 시인이 남긴 글이 있다. 광복 후 청마 유치환의 안내로 통영을 찾았던 시인이 미륵산에 올라 ‘통영포구와 한산도 일대의 아름다운 풍경을 내 문필로는 표현할 능력이 없다’는 기행문을 썼기 때문에 비를 세운 것이란다. 케이블카는 단념했지만 미륵산을 포기할 수 없어 산자락의 용화사 절을 찾았다.
사찰과는 반대편으로 난 산길을 따라 등산객들이 줄지어 미륵산을 오르고 있었다. 초행인지라 길에 서툰 우리 일행도 그 무리를 뒤따르는 걸 돌려세웠다. 실제론 내가 바다보다 더 파란 가을하늘에 홀려 산을 오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럴 수 있는 형편이 못되었다. 불당에선 거구인 초로의 승려가 예닐곱 명의 신도들과 함께 기립한 채로 불상을 향해 기도를 바치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육성만 해도 우렁찬데 확성기까지 보태니 경내가 온통 쩌렁쩌렁 울렸다. 울창한 숲속에 자리한 용화사 하늘엔 새하얀 뭉게구름이 산 정상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절을 빠져나와 통영대교를 건너 활어시장으로 향했다. 불과 오륙십 미터 길이의 짧고 좁은 골목길에다 좌판을 놓고 만든 시장이었다.
간판을 시장 출입구 정중앙에 아치형으로 크게 붙인 때문인지 몰려든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고 펄떡펄떡 뛰는 활어만큼이나 중년의 통영 아줌마들도 활기가 넘쳤다. 예리한 식칼을 들고 날쎄게 횟감을 장만하는 여인네 앞에 길게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려야만 하니 여행지에서의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이렇게 많은 손님들을 죄다 받는 횟집들은 덩달아 즐거운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횟집에서도 자리가 날 때까지 기다려야하는 건 불문가지다. 채소와 반찬도 한 접시에 2천원을 받는다며 옆에서 아내가 추가주문에 제동을 건다. 횟집 여종업원에게 식대 60,500원 중에서 500원을 깎자고 했다가 돌아온 답은 ‘그런 말 하지마라’였다. 동서는 그 퉁명스런 대답이 불쾌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두 번째 말은 더 엉뚱했다. ‘나, 이 집 사장 아닙니다’ 알고 보니 그녀는 중국에서 온 조선족 동포였다.
청마문학관은 금년부터 관람료를 받는 때문인지 비교적 한산한 편이었다. 관에서 지원해주는 예산만으론 운영이 어려워지자 대책을 세운 것 같았다. 아내는 우리 부부가 경로혜택으로 관람료를 면제 받은 걸 크게 반기는 것 같았다. 문학단체에 속해 몇 번 찾았지만 오늘처럼 조용한 방문은 처음이라 자유롭고 꼼꼼하게 둘러볼 수 있어서 좋았다. 방명록에다 청마를 그리는 몇 자의 글을 적다가 뜬금없이 금강공원에 세워진 이영도 시인의 시비가 떠올랐다. 청마 생가는 돌계단을 제법 높게 돌아서 올라야 한다. 생가는 처음 꾸몄을 때보다 쇠락한 빛이 역력했지만 청결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문학관을 나설 무렵 초등생 자녀들을 동반한 부부와 또 다른 청춘남녀가 표를 끊어 들어서고 있어 보기에 좋았다.
통영의 공원들이 다 그러하지만 특히 '이순신공원'은 바다와 접한 풍광이 빼어나 한낮 공원을 찾은 이들로 시장바닥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공원 정문은 완전히 걸어 잠그고 그 철문에 바싹 붙여 각각 얼음과자와 핫도그를 파는 트럭들이 막고 서있었다. 아마도 차를 몰고 공원으로 들어와 남망산공원처럼 주차하면서 많은 문제를 일으켜 아예 폐쇄한 것 같았다. 주차장 면적이 턱없이 부족해서 차량이 들고나는데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높은 콘크리트 구조물 위에 이충무공 동상을 세운 것과 쉼터로 정자를 만든 것 외엔 산책로 위주로 공원을 꾸며서 자연친화적 느낌을 주었다. 다만 공원 진입도로를 제대로 정비하지 않아서 대형관광버스들이 통행을 제대로 못해 짜증을 내고 있었다.
통영은 비교적 오래된 소도시이기 때문에 구도심의 도로는 대부분 편도 1차선으로 협소했다. 그런 좁은 도로 양쪽에 누구의 차량들인지 몰라도 빈틈없이 무단주차를 해놓은 바람에 탐방객 차량들이 진입했다가 그 속에 갇혀 애를 먹었다. 통영시청 로고를 붙인 차량이 이동하면서 면피성 단속을 하고 있었다. 차량번호를 호출하면서 딴 곳으로 옮기라고 방송을 해대지만 운전자가 없는 차량이 무슨 재주로 움직일 수 있겠는가. 오히려 단속차량마저도 정체를 가중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었다. 남쪽을 바라본다고 붙여진 남망산조각공원. 공원을 세 바퀴나 돌면서 조각품을 찾았지만 10점이 채 안 된다. 이곳은 공원을 조성하면서 주차장을 별도로 마련할 여건이 못 되었던지 아예 주차장시설이 없었다.
공원엔 차량들이 그대로 진입하여 무질서한 주차와 경사진 협소한 길은 들고나는 차량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주차난만 피하면 숲속으로 난 명품산책로와 아름드리 송림이 버티고 서서 해변공원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우리가 묵고 있는 리조트가 바다를 사이에 두고 가까운데 가끔씩 요트와 고기잡이배가 오가는 풍경도 공원에서만 맛볼 수 있는 낭만이 아닐 수 없다. 공원 입구에서 가까운 경사진 언덕에는 일본군 위안부를 위한 조형물이 들어섰고 소복차림의 중년 여성들이 10여명 모여 있었다. 조형물 외곽을 타원형으로 설치한 밧줄에 꽂은 깃발들이 만국기처럼 펄럭였다. 셀카봉으로 열심히 추억을 만들고 있는 젊은이들을 지나 내 방식을 고수하면서 삼각대를 이용한 촬영에 매달렸다.
박경리기념관은 시가지와 10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었지만 탐방객은 의외로 많았다. 개관 때와 눈에 띄게 달라진 건 출입구에 바싹 붙여 미니도서관처럼 꾸민 독서실이었다. 서가에는 작가의 책뿐 아니라 세계적인 작가들이 쓴 명작들도 여러 권 비치했다. 방문자가 편안하게 읽을 수 있도록 탁자와 의자까지 마련해 놓았고 여행길인데도 독서삼매경에 빠진 두 청년이 보였다. 일행이 기념관 뒤편 야트막한 언덕배기로 작가의 묘소를 찾는 동안 나는 박경리의 초기작품인 ‘김 약국의 딸들’을 펼쳤다. 기념관 앞마당에 세운 안내판의 한 면에는 작가가 살아온 삶의 소회를 말년에 밝힌 글이 박혀 있었다. 글은 소설가가 시로 쓴 것으로 유고집 <옛날의 그 집>에 들어 있다. 전문을 옮겨본다.
빗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 어느 날 일시에 죽어 나자빠진 그 집 / 십오 년을 살았다 / 빈 창고같이 휭덩그레한 큰 집에 /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꾹새가 울었고 /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 이른 봄 /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 다행히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 고양이들과 함께 / 정붙이고 살았다 /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 이 세상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 무섭기도 했지만 /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 나를 지탱해주었고 /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 나를 지켜주는 것은 /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 그랬지 그랬었지 / 대문 밖에서는 / 늘 /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 모진 세월 가고 / 아아 편안하다 /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 참 홀가분하다
숙소로 귀환하는 도중에 들른 달아공원. 마침 공원 앞은 도로공사 중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주차장 시설이 없는 것을 걱정하면서 도착했는데 공사용 바리케이드까지 설치해서 차량들이 무질서하게 뒤엉켜 경적을 울려댔다. 바다 속으로 가라앉듯 하루를 마감하고 사라지는 해넘이를 보기 위해 이곳에 몰린 탐방객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일몰까지는 두 시간 넘게 남았는데도 공원을 찾은 이들은 햇볕에 반짝이는 은빛 바다를 배경으로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느라 왁자지껄했다. 일몰을 감상하기에 좋은 자리를 잡느라 경쟁을 벌였을 타원형 전망대를 돌다가 반가운 후배를 만나 서울에서 왔다는 그의 일행까지 카메라에 담았다. 일행의 성화에 못 이겨 일몰 전에 우리는 공원을 떠나와야 했다.
동피랑벽화마을은 경사진 언덕을 올라야만 한다. 힘들 텐데도 이곳 탐방객 중에는 노인들이 더러 보였다. ‘동피랑’은 벼랑의 동쪽 끝을 일컫는 말이니 동피랑마을은 강구 안을 내려다보는 높은 언덕에 위치한 마을이다. 아파트 주거가 보편화 된 세상이다 보니 시에선 이곳의 오래된 집들을 헐고 공원으로 조성할 계획을 세웠던 것. 그런데 한 시민단체가 나서서 전국 규모의 벽화공모전을 열면서 ‘동피랑 살리기’에 팔을 걷어붙여 하루아침에 관광명소로 탄생하게 되었단다. 티브이에서 본 대로 대형 독수리 날개를 펼친 벽화에 몰려든 사람들이 길게 줄지어 늘어선 모습들에서 여행이 주는 생동감을 느꼈다. 여기서도 셀카 촬영이 대세를 이루었다. 이제 렌즈교환식 카메라는 찾아보기 힘든 세상이 되고 말았다.
벽화마을을 돌다보니 전국 방방곡곡에 이렇게 반짝 아이디어로 들어선 특화골목이나 거리가 과연 얼마나 롱런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고 몰려드는 관광객들에게서 이곳 주민들이 누리는 혜택이 있기나 한지도 짚어볼 일이다. 투숙한 리조트 뒤편 야트막한 야산에는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는 듯한 디자인으로 대규모 국제음악당이 들어섰다. 이번 여행에 나선 일행은 4남매 부부가 주축이었다. 특별한 동행인은 생후 5개월 된 준택이며 그의 부모도 함께 했다. 준택은 시종일관 방긋방긋 웃음을 보이며 여행에 지친 일행에게 위로를 주었고 그만큼 그도 사랑을 받았다. 숙소 14층에서 바라본 통영 앞 바다가 그림처럼 아름답다. 다만 잘나지 못한 얼굴들을 선보이게 되어 부끄럽기도 하다.
첫댓글 바다낚시를 즐기기 위해 4년 동안 이나 살았던 충무. 무척 그립고 아름답습니다. 가족이 다 모이셨네요. 南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