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泗 城의 異變
의자왕 十九년 초봄, 궁중에는 괴상한 풍문이 돌았다.
“세상이 망하자니까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나네?”
궁녀들은 서로 모이기만 하면 수군거렸다. 그들의 눈은 헤아릴 수 없는 두려움에 가득해 있었다.
“아 글쎄 어젠 대낮에 여우들이 궁중으로 몰려들어 오는데 흰 여우를 앞장세우고 열을 짓고 들어오는 꼴이 꼭 적군이 쳐들어오는 것 같더라니까.”
“어디 그 뿐이니? 다른 여우들을 거느리고 쳐들어 온 흰 여우가 쓱 한 번 둘러보더니 상좌평 어른의 책상에 떡 올라앉지 뭐야?”
상좌평이란 좌평의 우두머리로 곧 수상격이다.
“그런데 그게 무슨 징조일까?”
“큰 소리로 말할 수 없지만 나라가 다 망해가는 징존지도 몰라요.”
“그건 또 왜?”
“여우같은 적군이 궁중에 쳐들어와서 그 우두머리가 상좌평이 된다면 나라꼴이 다 됐지 뭐.”
그 해 四월, 이번에는 태자궁에서 기괴한 일이 벌어졌다. 태자궁 앞뜰에서 큰 암탉 한마리가 조그만 참새와 교미를 한 것이다.
“이건 또 무슨 징조일까?”
거듭되는 이변에 민심은 흉흉했다.
“큰 새가 작은 새와 교미를 했으니 장차 큰 나라가 작은 나라와 합친다는 뜻이 아닐까?”
“그렇다면 큰 나라는 어느 나라고 작은 나라는 어느 나라인가?”
“큰 나라는 말할 것도 없이 당나랄 거구. 작은 나라는 우리 백제가 아니면 고구려겠지.”
“그러니까 당나라가 고구려나 백제와 합친다는 뜻이요? 그렇게 되면 오죽이나 좋겠어.”
“그 힘을 빌어서 저 원수 같은 신라를 쳐부술 수 있을 텐데.”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런 게 아니요. 당나라는 원래 우리를 미워해 왔으니까 신라와 합쳐서 우리를 치겠다는 징조겠지.”
해석은 구구했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한결같이 검은 구름이 드리웠다. 이변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그 해 五월, 왕성 서남쪽 사비강에 큰 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길이가 세 길이나 되었다. 사람들은 그 큰 고기가 곧 백제의 임금을 뜻하는 것이라고 수군거렸다.
그 해 九월, 가을이 깊어지자 궁중의 느티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려 소리를 내는데 그 소리는 마치 백제의 최후를 슬퍼하는 곡성같이 들렸다.
그러한 속에서 해가 바뀌었다. 그러나 이변은 역시 계속되었다. 추위가 채 가시기 전 二월 왕성안의 우물들이 모두 핏빛으로 변하고 사비강에 흐르는 물들도 모두 핏빛과 같았다.
“장마철도 아닌데 어째서 강물이랑 우물물이 핏빛으로 물들었을까?”
“이제 난리가 나서 그렇게 피를 흘리게 된다는 징조겠지.”
이젠 어떠한 징조든지 불길한 것으로 말했다.
그 해 四월에는 두꺼비들이 수만 마리나 나무위로 올라갔고, 五월에는 풍우가 사납게 일어나서 천왕사(天王寺) 와 도양사(道讓寺) 두 절의 탑이 진동하고 검은 구름이 용과 같이 일어나서 동서로 갈라져 서로 싸웠다.
六월에는 개모양을 한 들사슴 한 마리가 서쪽 사비강 언덕에 와서 궁성을 향해 짖다가 간곳없이 사라졌고 그를 따라 왕성안의 많은 개들이 길거리로 뛰쳐나와 울부짖다가 흩어졌다.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모두 다 흔히 있음직한 현상일는지 모르지만 한 번 어수선해진 민심에는 그것들이 모두 깊은 뜻을 지닌 것처럼 두려울 뿐이었다. 백성들의 마음이 어수선해지니 조정의 대신들과 왕의 마음 역시 편할 리가 없었다.
어느 날 밤이었다. 한 궁인이 달려 들어오며 왕에게 아뢰었다.
“대왕! 귀신이 나타났습니다.”
궁인은 새파랗게 질려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귀신이라니, 그런 것이 있을 수 있나?”
왕은 일부러 태연한 척하며 궁인의 말을 물리쳤다.
“아니옵니다. 제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저뿐 아니라 다른 궁인들도 다 같이 봤어요. 갑자기 궁궐 담 위에 머리에는 뿔이 달리고 입이 귀까지 째진 것이 나타나더니 백제가 망한다. 소리치고는 땅속으로 들어갔사옵니다.”
왕은 이 소리를 듣자 한 가지 결심을 했다. 이 세상엔 귀신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밝혀 들뜬 민심을 가라앉히자는 생각이었다.
“네 말이 사실이라면 그 귀신이 들어갔다는 곳을 파보도록 해라. 그 곳에서 귀신이란 것이 나오면 네 말이 옳을 것이고 아무것도 나오지 않으면 네가 잠깐 허망한 꿈을 꾼데 지나지 않을 게다.”
이렇게 말한 왕은 즉시 사람을 시켜 귀신이 들어갔다는 자리를 파보게 했다. 깊이 석자쯤 파내려갔을 때였다. 땅 속에서 거북 한 마리가 나왔다. 그리고 그 거북의 등에는 이런 글이 써 있었다.
<백제는 둥근 달과 같고 신라는 초승달과 같다.>
왕은 그 글의 뜻을 얼핏 새기기 어려워 무당을 불러 물었다. 그 무당은 고지식한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달이 둥글다는 것은 곧 보름달을 말하는 것이옵니다. 보름달은 곧 이지러지고 초승달은 점점 둥글게 되는 것이 움직일 수 없는 이치옵니다."
그러니 결국 백제는 망하고 신라는 흥한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그 말을 듣다 왕은 크게 노하여 그 무당을 죽여 버렸다. 민심을 가라앉히겠다고 한 일인데 오히려 소란하게 만들어 놓은 셈이 되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민심을 가라앉혀보려고 뇌심을 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아첨 잘하는 한 신하가 나타나더니 왕의 비위를 맞춘다.
“대왕, 조금도 심려하실 것은 없을 줄로 아옵니다. 그 글발은 불길한 것이 아니오라 오히려 크게 길한 것인 줄로 아옵니다.”
“크게 길한 말이라니?”
“둥근 달은 왕성한 것을 나타내는 것이오며 초승달은 쇠미한 것을 나타내는 것이오니, 곧 백제의 국운은 날로 왕성해지고 신라의 국운은 날로 쇠미해진다는 징조인 줄로 아옵니다.”
그 해석을 듣고 왕은 크게 기뻐했다. 그리고는 그 뜻을 즉시 많은 백성에게 알리도록 명했다.
興首와 階白
그러나 아무리 해석을 좋게 한다고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바로 잡을 수는 없었다.
그동안 고구려를 공격하면서 백제 침공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당고종은 의자왕 二十년 三월, 좌위대장군 소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總管)으로 삼고 신라의 김인물을 부대총관으로 삼고 군사 十三만으로 백제를 정벌하도록 명했다. 그리고 또 신라왕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우夷道行軍總管)으로 삼아 당군과 합세하도록 명했다.
이리하여 五월 二十六일, 신라왕 김춘추는 김유신 등 장병을 거느리고 서러벌을 출발하여 六월 十八일에 남천정(南川停=利川)에 이르렀다. 그리고 소정방은 수많은 전선(戰船)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덕물도(德物島=德積島)까지 왔다. 이런 정보에 접하자 백제의 의자왕은 그제야 크게 당황했다. 그래서 여러 신하를 모아 놓고 방어책을 물으니 좌평 의직(義直)이 먼저 한 계책을 진언한다.
“당병은 멀리 바다를 건너오는 것이므로 물에 익숙지 않은 군졸들은 반드시 뱃멀미로 괴로워할 것입니다. 그런 즉 그들이 처음 육지에 내려 미쳐 기운을 돌리지 못했을 때 급히 공격한다면 섬멸할 것은 조금도 어렵지 않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신라는 대국의 원조만 믿고 허세를 부리는 터인즉 만일 당군이 불리한 것을 알면 반드시 두려워하여 감히 공격하지 못할 것이니 무엇보다도 먼저 당군을 공격하는 것이 급선무인 줄 압니다.”
의직은 일찍이 신라의 김유신과 여러 번 싸운 일이 있는 역전의 노장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의견도 들을 만한 의견이었으나 거기 대해서 달솔사영(達率常永)이 반대하고 나섰다. 달솔은 좌평 벼슬보다 하위의 관직이었지만 그는 좌평인 의직의 의견을 근본부터 반대한 것이다.
“그 계책은 가당치 않은 것으로 아옵니다. 당병은 먼 길을 온 까닭에 지루한 나머지 속히 싸우고자 할 것이오니 그 예봉을 당하기 어려울 줄로 아옵니다. 그와 반대로 신라군은 전에 여러 번 우리에게 패한 쓰라림을 알고 있으므로 우리 군사를 대하면 두려워서 제대로 싸우려 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하온즉 당병에 대해서는 쳐들어오는 길을 막으면서 신라군을 먼저 격파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당군도 자연히 기세가 꺾이어 물러갈 줄로 압니다.”
정 반대되는 두 가지 의견이었다. 그리고 여러 신하들도 이 두 가지 의견으로 갈리어 서로 굽힐 줄을 몰랐다.
“아! 이럴 때 흥수가 여기 있었더라면.”
하며 왕은 탄식했다. 흥수(興首)는 좌평 벼슬을 하던 중신으로 식견이 넓고 포용력이 있어서 이렇게 국사를 논할 때 의견이 분분해지면 그 의견들을 잘 종합하고 거기에 자기의 독창적인 의견을 첨부해서 적절한 대책을 세우는 수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흥수는 그 얼마 전에 왕의 방종한 거동을 간하다가 멀리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長興)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흥수의 의견이 아쉬운 왕은 즉시 사람을 그에게 보내어
“사태가 심히 위급하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흥수는 이런 의견을 진술해 보냈다.
<당병은 그 수가 많고 기강이 엄할 뿐만 아니오라 신라와 합세해서 대거 침공해 오므로 넓은 들에서 대진하고 싸운다면 그 수로나 진법으로나 우리의 군세로는 당적하기 어려울 듯 합니다. 그러하오나 백강(白江)과 침현(沈峴)같은 요지에서 지키고 있다가 섬멸하면 적을 무찌르기도 어렵지 않을 줄로 아옵니다. 즉 그곳에서는 한 장부가 창을 휘두르면 만 사람도 당하기 어려울 것이오니 마땅히 용사를 뽑아 당병은 백강에서 막고 신라군은 침현에서 막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대왕께서는 성문을 굳게 닫고 형세를 살피시다가 적군의 군량이 다하고 군사들이 피로한 기색이 보이거든 수하 장졸을 거느리고 진격하도록 하십시오.>
지난날 성충의 의견과 비슷하면서도 더 구체적인 대책이었다. 그러나 여러 대신들은 흥수의 탁견을 이해할 만한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한 번 귀양 간 흥수의 의견이 채택되어 그가 다시 요직에 앉게 될 것을 몹시 시기했다.
그래서 말을 아름답게 꾸며 그의 의견을 반박했다.
“흥수는 오래도록 귀양살이를 하는 중이므로 대왕을 원망하고 있을 것이니 어찌 대왕을 위해서 이로운 말을 하겠습니까? 흥수의 말과 같이 당병을 백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인한다면 적은 거스르는 물에 배를 부리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또 신라군을 침현에서 막을 것이 아니라. 그 곳을 넘도록 버려둔다면 길이 좁아서 군마가 한꺼번에 지날 수 없을 터인즉 이때를 타서 맹렬히 공격한다면 울안에 들어 있는 닭을 잡는 격이요 그물에 걸린 고기를 주워내는 격이 아니옵니까?”
왕은 이번엔 그 말에 귀가 솔깃했다. 이와 같이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하고 헛되이 시일을 보내고 있는데 벌써 당병은 백강으로 들어오고 신라군은 침현을 넘었다는 보고가 이르렀다. 이제는 더 공론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왕은 즉시 달솔 계백(階白)에게 적군을 막도록 명했다. 왕의 명을 받은 계백은 결사대 五천명을 뽑아가지고 떠나게 되었는데 그는 떠나기에 앞서 자기 처와 어린 자녀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좌우 사람들이 크게 놀라 그 까닭을 물으니 그는 비창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이제 당나라와 신라의 대군을 맞아 싸우게 되니 국가의 존망을 나로서도 예측할 수 없군요. 그런즉 장차 내가 싸움에 패했을 때 처자가 적들에게 욕을 당하거나 죽음을 당하느니보다는 차라리 내 손에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한 거요.”
오늘의 윤리관으로 따진다면 비판의 여지가 있는 행동이었지만 그 당시로는 일종의 미거(美擧)였다.
“계백 장군의 각오가 저렇듯 장하신데 우리들인들 어찌 부모처자에 대한 정에 마음이 끌릴 까보냐!”
五천 용사들은 이렇게 외치고 용약 전서로 진격했다. 계백이 거느리는 백제군은 황산(黃山)벌에 이르자 진을 치고 전투태세를 갖추었는데, 이때 계백은 전 장졸을 향해 이런 말을 격려했다.
“옛날 월(越)나라의 구천(句踐)은 군사 五천으로 오(吳)의 七十만 대군을 격파한 일이 있다. 그런즉 우리 모든 장병들은 각각 분발하여 승리를 거둠으로써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도록 하라!”
계백의 격려에 용기백배 된 장졸들은 적군과 대전하게 되자 일기당천의 기세로 진격했다. 그리고 처음에는 네 번 싸워 네 번 모두 승리를 거두었다. 실로 눈부신 승리였다.
바로 이 싸움에 저 유명한 신라의 청년 장수 반굴(盤屈)이 전사했으며 관창(官昌) 또한 사로 잡혔다가 죽음을 당한 것이다. 그러나 워낙 병력의 차이가 나는데다가 지리적 조건이 이롭지 못했던 백제군은 나중에 가서는 결국 신라군의 반격을 받아 장군 계백은 전사하고 상영(常永) 등 二十여 장수는 포로가 되는 대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한편 백제의 다른 부대는 지벌포에서 소정방이 거느리는 당군을 맞아 항전했으나 역시 대패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나당 양군은 합세하여 백제 서울을 향해 진격해 들어왔다.
落花三千
적군이 왕성으로 접근해 오자 백제 측에서는 최후의 결전을 시도했다. 즉 남은 군사를 총동원해서 적군을 맞아 싸워 보았다.
그러나 적은 승승장구해 온 강병이며 이편은 만신창이의 약졸들이다. 필사적인 분전에도 불구하고 사상자 만여 명을 내고 완패했다. 만사가다 틀리고 말았다. 백제왕 의자는 가슴을 치고 탄식했다.
“어리석었느니라! 내가 어리석었느니라! 일찍이 성충과 흥수가 간하던 말을 들었던들 오늘의 이 꼴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을.”
그러나 뒤늦은 뉘우침이었다. 七월 十三일, 왕은 태자 효(孝)를 비롯해서 여러 왕자와 왕족들을 불러놓고 마지막 의견을 물었다.
“적군의 공세가 하도 사나우니 이 이상 이곳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런즉 웅진성(熊津城)에 가서 재기할 기회를 기다릴까 하는데 너희들 생각이 어떠냐?”
그런즉 만사에 고분고분한 태자 효는
“부왕이 그렇게 뜻을 정하셨다면 그 뜻을 좇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고 여러 아우를 불러 모았다. 그랬더니 둘째 왕자 태(泰)가 눈을 부라리고 음성을 높이며 외쳤다.
“아무리 부왕의 말이라도 나는 그대로 좇을 수는 없소!”
왕자와 왕족들은 모두 태왕자에게 눈길을 모았다.
“왕성을 버린다는 것은 곧 나라를 버린다는 뜻이요. 재기를 음모하겠다고는 하시지만 한번 버린 물건을 찾는다는 건 끝까지 지니고 버티는 것보다 몇 갑절 더 어려운 일로 아오. 하물며 우리 군사는 모두 적에게 섬멸되고 남은 병력이라고는 지금 왕성을 지키는 자들뿐인데 웅진성이로 피신한다고 무엇을 믿고 재기 한단 말이요?“
이렇게 되니 의견은 둘로 갈라졌다. 왕과 태자는 어디까지나 웅진성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했다.
“네가 끝내 사비성을 지키겠다면 지켜보아라. 나와 태자는 웅진으로 가서 전국의 의병을 모을 것이니 후에 합세해서 적을 물리치도록 하자.”
마침내 왕은 이런 결론을 내리고 그날 밤으로 태자와 함께 사비성을 탈출했다. 그러나 왕자 태는 성을 빠져나가는 부왕과 형에게 거의 증오에 가까운 눈초리를 보내며 투덜거렸다.
“임금이란 백성들과 고난을 같이 해야 그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법인데 백성을 버리고 떠나는 사람들은 이미 임금의 자리를 내놓은 것으로 아시오.”
왕과 태자가 떠나자 사비성 모든 궁인과 백성들은 땅을 치고 통곡했다.
“왕과 태자까지 성을 버렸으니 누구를 믿고 산단 말이냐?”
“이젠 꼼짝없이 적군에게 잡혀 죽거나 욕을 당할 수밖에 없게 되었구나.”
그 중에서도 동요가 가장 심했던 것은 왕의 총애를 받던 궁녀들이었다. 나라를 잃게 된 슬픔, 하늘같이 믿어 오던 왕을 잃은 절망감, 적군이 쳐들어 왔을 때 당해야 할 능욕에 대한 두려움, 이런 것으로 마음 약한 궁녀들은 울부짖다가
“죽자! 적에게 잡혀서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우리 스스로 깨끗이 목숨을 끊자!”
한 궁녀가 부르짖고 나서니까
“죽자! 깨끗이 죽자!”
모든 궁녀는 그 뒤를 따랐다. 죽더라도 깨끗이 죽고 싶은 궁녀들은 부소산 서쪽 백마강으로 내민 큰 바위로 몰려갔다. 지난날 왕을 모시고 노래와 춤으로 흥겹게 놀던 바위였다.
앞장 서 가던 궁녀가 바위 끝으로 가 두 손을 모아 궁성을 향해 읍하더니 치마를 뒤집어쓰고 백마강 푸른 물을 향해 떨어졌다. 그러자 다른 궁녀들도 뒤를 이어 떨어졌다.
전하는 말에는 이 바위에서 강물로 떨어져 죽은 궁녀가 三천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과연 그토록 많은 궁녀가 있었는지는 의문이지만, 어쨌든 수많은 궁녀가 앞을 다투어 벼랑에서 떨어지는 광경은 비참하다기보다 차라리 꽃같이 찬란한 정경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후세 사람들은 그 바위를 낙화암(落花岩)이라고 불렀다.
泗批城의 民族魂
왕과 태자가 웅진(熊津)으로 피신하자 태(泰)왕자는 스스로 왕을 칭하고 남은 병력을 동원해서 끝끝내 성을 고수하려고 했다.
그러나 나당 양군의 공세는 날로 치열해져서 언제 성중으로 쳐들어올지 알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이때 성중에는 태자의 아들 문사(文思)와 왕자 융(隆), 연(演) 등이 남아 있었다. 형세가 시시각각으로 위태로워져 감을 느끼자 문사는 융왕자에게 은밀히 속삭였다.
“숙부, 이대로 있다가는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융왕자도 불안해서 어찌할 줄 모르던 참이었다.
“글쎄 말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부왕과 형님을 따라 웅진으로 피신하는 편이 좋을 뻔했구나.”
“그건 지난 일이니 이제 뉘우쳐도 소용없어요. 앞일을 강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글쎄, 장차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느냐?”
“부끄러운 말이지만 적에게 항복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요?”
“적에게 항복하다니? 차마 그럴 수도 없지 않으냐?”
“아닙니다. 지금 항복한다면 목숨이라도 건질 수 있지만 끝내 버티다가 적군이 쳐들어 와보세요. 왕과 태자가 없는 성에서 굳이 항전을 했다고 적장의 노여움을 더 살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끝내 버티다가 요행히 적을 물리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숙부(泰)가 마음대로 왕이 되었으니 나라 안은 다시 두 동강이 나서 싸움이 시작될 게 아닙니까?”
문사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융왕자에게는 느껴졌다. 그래서 융왕자는 문사와 대좌평 전복(千福) 및 몇몇 시신을 거느리고 성문을 열고 나가니까 싸움에 지친 백성들이 그 뒤를 따랐다.
융왕자가 항복하자, 신라 태자 법민(法敏)은 그를 말 앞에 꿇어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었다.
“지난날 너의 아비는 내 누이동생을 참살했을 뿐만 아니라 옥중에 묻어 놓아 二十년 동안이나 내 마음을 아프게 했으니 너도 그만한 응보를 받아야 할 줄 알아라.”
일찍이 법민의 누이는 김품석(金品釋)에게 시집을 갔는데 품석이 대야성의 도독으로 있을 때 백제 장군 윤충(允充)의 침공을 받았다. 이때 검일(黔日)이란 자의 내통으로 성이 위태롭게 되자 품석은 윤충의 권하는 말을 믿고 항복하려 하다가 백제군의 기습을 받아 처자를 죽이고 전사한 일이 있다. 이 일이 누이를 사랑하던 법민에게는 뼈저리게 원통했던 것이다.
융은 이미 항복한 몸이었다. 법민한테 어떠한 욕을 당해도 항거할 도리가 없었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피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융왕자가 항복한 후에도 태는 남은 군사를 모아 더 버티어 보려고 했다. 그러나 남은 병력이란 보잘 것 없는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당의 소정방은 전군에 호령하여 최후의 공격을 가하니 당군은 노도처럼 성벽을 넘어 마침내 성위에 당기(唐旗)를 꽂기에 이르렀다.
“이제는 마지막이로구나!”
태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했다. 그리고는 결국 성문을 열고 나와 적군 앞에 구명을 청하게 되었다. 일시 웅진으로 피신해서 재기를 도모하던 왕과 태자는 일이 뜻대로 되지도 않고 그렇듯 강경히 사비성을 지키던 태 왕자까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 해 七월 十八일, 마침내 적군 앞에 항복하고 말았다. 이로써 백제는 온조가 건국한 후 三十一왕 六七八년 만에(西紀 六六0년) 멸망한 것이다.
백제왕이 항복했다는 보고를 받자 신라왕 김춘추는 곧 금돌성(今突城)으로부터 사비성에 와서 제감 천복(弟監天福)을 당나라로 파견해서 전첩을 보고 하는 한편, 八월 二일에는 크게 잔치를 베풀고 모든 장병을 위로하게 하였다.
이때 김춘추는 소정방 및 여러 장수들과 더불어 당상(堂上)에 앉고 의자왕과 그 아들 융을 당하(堂下)에 앉힌 다음 갖은 모욕을 다 가했으며 취흥이 도도해지자 당상으로부터 손을 내밀어 당하에 앉은 의자왕에게 술을 따르도록 했다고 한다. 원래 아무리 적의 왕이라도 일단 항복하면 예대(禮對)하는 것이 상례인데 이렇게 욕을 보이는 것을 보고 백제의 여러 신하들은 눈물을 흘리고 이를 갈았다.
김춘추는 원래 견문이 넓고 대인관계에 능한 인물인데 의자왕을 이렇듯 냉대했다는 것은 얼핏 수긍이 가지 않는 일이지만 굳이 이유를 붙인다면 품석의 아내 즉, 자기의 사랑하는 딸을 죽인 데 대한 사감이라고나 할까? 그렇지 않으면 아직도 왕성한 백제 국민들의 저항 의식을 위압으로 꺾어 보려는 술책이었을까? 지금 와서는 거려낼 길이 없다.
그 후 소정방은 의자왕과 태자 효, 왕자 태, 융, 연 및 문무 고관 八十八명과 백성 一만二천八백七명을 포로로 삼아 당나라로 보냈고 그 후 의자왕은 당에서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의자왕이 항복한 후에도 백제의 왕실과 장수들과 백성들 중에는 도처에서 항전을 계속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의자왕에게는 풍(豊)이라는 왕자가 있었다. 그는 일찍이 볼모가 되어 일본으로 가 있었는데 백제가 멸망하자 종실 복신(福信), 중 도침(道琛) 등은 광복의 뜻을 품고 그를 왕으로 삼고자 사람을 보내어 귀국을 종용했다.
풍왕자는 비분강개해서 일본 왕의 허락을 받고 급히 바다를 건너 고국으로 돌아왔다. 복신 등은 주류성(周留城)에서 풍왕자를 맞아 왕으로 세우고 전국 각처에서 의병을 모집했다. 그러자 서북부가 이에 호응하여 군세가 제법 강성해졌으므로 당나라 장수 유인원(劉仁願)이 지키고 있던 사비성을 포위했다.
갑자기 포위당한 사비성은 함락이 경각에 달한 듯 보였으나 당나라 장수 유인궤(劉仁軌)의 원군이 도착해서 전세는 역전하고 일단 광복군은 임존성(任存城)으로 퇴진했다.
이때 도침은 스스로 영군장군(領軍將軍)이라 칭하고 복신은 상금장군(霜芩將軍)이라 칭하고 의병을 더욱 모아들이니 그 세력이 날로 강성해졌다. 이렇게 되니 의기충천한 광복군 측에서는 당장 유인궤에게 사자를 보내어 호언장담했다.
“듣건대 당은 신라와 약속하기를 백제의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일체 살육한 연후 나라를 신라에 귀속시키겠다고 하니 그렇게 죽음을 당하느니보다 어찌 싸워서 죽는 편이 떳떳치 않으랴, 이에 우리는 더욱 단결해서 최후의 일인까지 싸울 따름이다.”
이 말을 들은 유인궤는 여러 가지 좋은 말로 항복할 것을 달래었으나 광복군측은 코웃음으로 대할 뿐이었다. 이렇게 위세를 떨치던 광복군도 차차 내분을 일으켜 붕괴하기 시작했다. 즉 복신과 도침은 전부터 서로 맞서서 세력 다툼을 하고 있었는데 복신이 마침내 도침을 죽이고 임금으로 세운 풍을 누를 기세를 보인 것이다.
이렇게 되자 민심은 날로 이탈해 가고 광복군의 군세는 차츰 쇠약해 갔다. 이 틈을 타서 유인원, 유인궤 등이 일대 반격을 가하니 광복군은 웅진 동쪽에서 대패하고 다시 진현성(眞峴城)에 웅거하게 되었다.
이제 백제 광복군의 섬멸로 마지막 고비라 생각한 유인원은 당고종에게 구원병을 더 청하니 고종은 다시 원군 七천명을 보내어 나당의 병력은 한층 더 강해졌다.
이와 반대로 광복군 측에서는 다시 내분이 벌어졌다. 이번에는 복신과 풍이 서로 다투게 된 것이다.
“아무래도 그 자를 없애야 나라를 도로 찾을 수 있겠어.”
이렇게 생각한 복신은 병이라 칭하고 굴방 속에 누워 풍이 위문하러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풍이 굴방 속에 들어오기만 하면 잡아 죽이려는 심사였다. 그러나 복신의 이러한 계교는 사전에 풍에게 탄로되었다.
“저런 괘심한 놈이 있나? 그렇다면 제가 먼저 죽어야지.”
풍은 즉시 단단히 무장을 한 심복을 거느리고 복신을 찾아가서 오히려 그를 죽여 버렸다. 복신을 죽이고 난 풍은 나당 양군과 마지막 결판을 낼 생각으로 고구려와 일본에 구원병을 청했다. 그러나 일본의 구원병도 백강(白江) 어귀에서 나당 연합군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풍은 몸을 빼어 도망치고 얼마동안은 그 종적을 알 수 없게 되었는데 후에 고구려에서 풍왕자와 같은 귀인을 만났다는 소문이 떠돌게 되었다.
이로써 백제 유민의 가장 강력한 광복운동도 좌절된 셈이지만 그 후에도 산발적인 항전은 계속되어 백제 사람의 강인한 민족혼을 과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