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가루가 비록 귀하지만 눈에 들어가면 병이 된다 / 종광 스님
낙보에게 몽둥이 빼앗겨도
말없이 방장 간 덕산 스님
진면에는 차별이 전혀 없어
살불살조의 임제 가풍에서
스승 흉내는 설자리 없어
주인공 돼야 비로소 깨달음
師聞, 第二代德山이 垂示云, 道得也三十棒이요 道不得也三十棒이니라
師令樂普去問호되 道得이어늘 爲什麽하야 也三十棒고 待伊打汝하야
接住棒送一送하야 看他作麽生하라 普到彼하야 如敎而問한대
德山이 便打어늘 普接住送一送하니 德山이 便歸方丈이라 普回擧似師한대
師云, 我從來로 疑著這漢이로다 雖然如是나 汝還見德山麽아 普擬議하니 師便打하다
해석) 임제 스님은 제2대 덕산 스님이 대중들에게 법문을 하면서
“말을 해도 30방이요 말을 못해도 30방이다.”라고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자 임제 스님은 시자로 있던 낙보 스님을 보내면서 말했다.
“대답을 했는데 어찌하여 몽둥이 30방입니까?하고 물어보고
그래도 그가 만약 너를 때리면 그 몽둥이를 잡아 던져버려라.
그리고 어찌 하는가를 살펴보고 오도록 하라.”
낙보 스님은 그 곳에 도착하자마자 시킨 대로 물었다.
덕산 스님이 곧 주장자로 후려쳤다. 낙보 스님은 이를 잡아 던져버렸다.
그러자 덕산 스님이 곧 방장실로 돌아가 버렸다.
낙보 스님이 돌아와 임제 스님께 그대로 보고했다.
임제 스님이 말했다. “나는 이전부터 덕산 스님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의심하고 있었다.
그래 자네는 덕산을 보기는 보았는가?” 낙보 스님이 머뭇거렸다.
그러자 임제 스님이 곧 후려쳤다.
강의) 여기서 등장하는 덕산(德山) 스님은 덕산선감(德山宣鑑)입니다.
‘금강경’에 정통해서 주금강(周金剛)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중들에게 ‘금강경’ 강설을 하던 덕산 스님은 강남에서 선종이 유행한다는 말을 듣고
마설(魔說)이라며 강남으로 내려갑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용담(龍潭) 스님을 만나 큰 깨우침을 얻고
이내 뛰어난 선사로서 선풍을 날리게 됩니다.
가르침에 주로 몽둥이를 사용했는데 임제 스님의 ‘할’과 당대에 쌍벽을 이뤄
‘덕산 방(奉) 임제 할(喝)’이라고 부릅니다.
어느 날 그런 덕산 스님을 시험하기 위해 임제 스님이 시자인 낙보 스님을 덕산 스님에게 보냅니다.
질문을 하고 만약에 몽둥이질을 하면 몽둥이를 잡아서 던져버리라는 과격한 주문도 함께 합니다.
낙보 스님은 스승의 말을 충실히 따릅니다.
임제 스님의 말씀대로 묻고 이내 몽둥이를 잡아서 던져버립니다.
그러자 덕산 스님은 말없이 방장으로 돌아갑니다.
이에 대해 임제 스님은 덕산 스님이 보통 사람이 아니었음을 진즉 간파했었다며 극찬을 합니다.
그리고 임제 스님은 바로 내심(內心)을 드러냅니다.
“덕산 스님이 말없이 방장으로 돌아간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며
낙보 스님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덕산 스님의 진면목을 보기는 봤느냐는 일침입니다.
당황한 낙보 스님이 그저 머뭇거리기만 합니다. 당연히 몽둥이가 날아들었겠지요.
이것을 보면 임제 스님이 덕산 스님에게 낙보 스님을 보낸 이유가 조금은 짐작이 됩니다.
덕산 스님을 시험해본다는 핑계로 낙보 스님의 안목을 틔워주려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낙보 스님은 그 의미를 전혀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저 스승의 명령만을 충실히 따랐을 뿐입니다.
그러니 덕산 스님의 무설법문을 알아들을 수 없었을 겁니다.
덕산 스님의 가르침은 몽둥이에 있지 않습니다. 몽둥이는 그저 방편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몽둥이를 휘두르는 덕산 스님이나
그냥 조용히 방장으로 돌아가는 덕산 스님의 진면에는 어떤 차별도 없습니다.
그런데 낙보 스님은 덕산 스님은 보지 못하고 몽둥이만 보고 돌아온 것입니다.
王常侍一日에 訪師하야 同師於僧堂前看할새 乃問這一堂僧이 還看經麽아
師云, 不看經이니라 侍云, 還學禪麽아 師云, 不學禪이니라
侍云, 經又不看하며 禪又不學하고 畢竟作箇什麽오
師云, 總敎伊成佛作祖去니라 侍云, 金屑雖貴나 落眼成翳하니
又作麽生고 師云, 將爲儞是箇俗漢이로다
해석) 왕상시가 어느 날 임제 스님을 방문했다.
임제 스님과 함께 승당 앞의 스님들을 보면서 물었다.
“여기 이 스님들은 경전을 보십니까?” 임제 스님이 대답했다. “경전을 보지 않았습니다.
” 왕상시가 다시 물었다. “그러면 선을 배우십니까?”
임제 스님이 말했다. “선도 배우지 않습니다.”
왕상시가 또 물었다. “경전도 보지 않고 선도 배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을 하십니까?”
임제 스님이 대답했다. “모두에게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되는 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왕상시가 말했다. “금가루가 비록 귀하지만 눈에 들어가면 병이 된다고 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임제 스님이 말했다. “나는 그대를 한갓 속인으로 여겼구려.”
강의) 왕상시는 임제 스님이 주석하던 지역의 주지사로 스님의 후원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안목이 대단합니다. 칭찬에 인색한 임제 스님에게서 칭찬을 듣고 있습니다.
스님들이 무엇을 공부하고 있느냐는 왕상시의 말에 임제 스님은 경전도 읽지 않고 선도 배우지 않고
바로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되는 법을 배우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에 대한 왕상시의 다음 질문이 걸작입니다.
“금가루가 비록 귀하지만 눈에 들어가면 병이 된다.”
핵심을 정확히 찔렀습니다. 금가루가 귀하지만 눈에 들어가면 병이 되듯이
부처와 조사가 되겠다는 집착 또한 병이 될 것입니다.
부처와 조사가 비록 금가루와 같이 귀중하지만
인위적인 마음을 내는 순간 진리에서 멀어진다는 의미입니다.
또 만약 내 마음 밖에 따로 되어야 할 부처와 조사가 존재한다는 생각이라면 더욱 잘못된 것이겠지요.
임제 스님은 누누이 말씀하셨습니다. 부처와 조사를 찾아 밖으로 치닫지 말라고 말입니다.
그런 임제 스님이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되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니 가당키나 한 말이겠습니까.
눈 밝은 왕상시가 이를 바로 알아차린 것입니다. 이에 임제 스님도 조금은 놀란 것 같습니다.
핵심을 꿰뚫은 안목에 칭찬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師問杏山, 如何是露地白牛오 山云, 吘吘한대
師云, 啞那아 山云, 長老는 作麽生고 師云, 這畜生아하리라
해석) 임제 스님이 행산 스님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노지백우(露地白牛)인가?”
행산 스님이 “음매음매”했다. 임제 스님이 말했다. “너는 벙어리냐?”
행산 스님이 물었다. “장로께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임제 스님이 말했다. “이 축생아!”
강의) 노지백우(露地白牛)에서 노지(露地)는 지붕이나 울타리를 하지 않은 땅을 말합니다.
백우는 흰소입니다. 지붕이나 울타리를 치지 않은 땅에 놓아둔 소라면
주인의 신임을 얻은 무척 현명한 소일 것입니다.
밖에 놓아두어도 남의 밭에 들어가 농작물을 뜯어먹거나 하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백우(白牛)는 또 석가모니 부처님과 결부지어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이름은 ‘고타마 싯다르타’입니다.
여기서 고타마는 ‘훌륭한 소’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노지백우는 모든 번뇌와 경계를 여의고 해탈한 석가모니 부처님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임제 스님의 질문 “어떤 것이 노지백우냐”는
“무엇이 부처인가” 또는 “무엇이 불법의 대의인가”에 대한 물음입니다.
임제 스님의 질문에 행산 스님이 소의 흉내를 냅니다.
그러나 소의 흉내만 가지고 행산 스님이 질문의 뜻을 명확히 이해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임제 스님도 아마 그랬던 것 같습니다. 임제 스님이 바로 점검에 들어갑니다.
“너는 벙어리냐”고 물은 것입니다. 그런데 행산 스님이 덜컥 함정에 걸려듭니다.
“그러면 스님은 어떻게 하십니까?”하고 질문을 던지고 말았습니다.
앞서 스스로 했던 대답에 대해 자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해탈의 경지에서 노닐고 있는 백우가 아니라
들판에서 풀이나 뜯고 있는 그저 그런 소였던 것입니다.
“에라! 축생 같은 놈”이라고 꾸짖는 임제 스님의 말씀에 안타까움이 묻어있습니다.
師問樂普云, 從上來로 一人은 行棒하고 一人은 行喝하니 阿那箇親고
普云, 總不親이니다 師云, 親處作麽生고 普便喝하니 師乃打하다
해석) 임제 스님이 낙보 스님에게 말했다.
“예로부터 한 사람은 몽둥이를 휘두르고 한 사람은 고함을 질렀는데
누가 진리에 부합된다고 생각하는가?” 낙보 스님이 대답했다.
“모두 진리에 부합되지 못합니다.” 임제 스님이 물었다.
“그러면 어떤 것이 진리에 부합되는가?” 낙보 스님이 “할”하고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임제 스님이 바로 후려쳤다.
강의) 덕산 방(奉)과 임제 할(喝) 중에 누가 더 진리에 부합되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낙보 스님이 말합니다. “둘 다 잘못됐습니다.” 무언가 알고 하는 말 같습니다.
임제 스님이 재차 묻습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진리에 부합되는가.”
시자인 낙보 스님은 그 질문에 ‘할’하고 고함을 지릅니다.
아마 이 대목에서 임제 스님은 기가 막혔을 겁니다.
당돌하게도 덕산 방도 임제 할도 모두 잘못됐다고 대답했을 때 기대를 했을 겁니다.
주인공으로 우뚝 서는 낙보 스님의 모습을 말입니다.
그런데 낙보 스님은 기껏해야 스승의 흉내나 내고 맙니다.
깨달음에 방해가 되면 부처도 죽이고 조사도 죽여야 하는 것이 임제선의 가풍입니다.
낙보 스님을 후려치는 임제 스님의 손이 제법 매서웠을 겁니다.
선은 스스로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임제선은 임제 스님의 선이고
덕산 스님의 선은 덕산 스님의 선입니다.
그러니 낙보 스님의 선은 낙보 스님의 선이어야 합니다.
임제 스님의 가르침은 ‘수처작주입처개진(隨處作主立處皆眞)’입니다.
있는 곳마다 주인이 되면 그 자리가 바로 진리의 자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낙보 스님은 주인이 되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진리에서 한참을 벗어나 버린 것입니다.
2013. 07. 04
출처 : 법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