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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민, 권이선. (2021). 『무성서원원지』(1884) 上. 전북연구원 전북학연구센터
칠현사적(七賢事蹟)
눌암(訥庵) 송 선생
휘는 세림(世琳), 자는 헌중(獻仲)이며 본관은 여산이다. 성화(成化) 15년 1479년(기해) 12월 14일생이다. 어머니 김씨가 임신하였는데 태몽으로 포의(褒衣 ; 몸통과 소매통이 넓은 옷)에 금색 띠를 두른 신인(神人)이 말하길 “삼일 뒤에 마땅히 귀한 아들을 낳을 것인데 만년관(萬年館)이라 부르라”라고 하였다. 기일이 되어 과연 공이 태어났고 어려서부터 총명했는데, ‘만년관’이라는 세 글자는 이름의 유형이 아니었으므로 민간에서는 다만 ‘만년(萬年)’이라 불렸다.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뛰어나 스승이 번거롭게 가르쳐 줄 필요가 없어 학문이 날로 진보했고 약관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해 빛나는 명성이 크게 퍼졌다.
처음 공의 아버지(宋演孫)는 한산군수를 지냈는데 경술(經術)이 훌륭하여 중종의 어릴 적 스승[甘盤]①이자 나라를 안정시킨 공②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원종공신(原從功臣)③을 하사 받았다. 1502년(임술)에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1503년(계해)에 이조좌랑으로 옮겼다. 곧 얼마 되지 않아 부모님이 연이어 세상을 떠나자 6년 동안 피눈물 흘려 이 때문에 고질병이 생겨서 호를 눌암(訥庵)이라 하였다.
일곱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숙배하지 않았다. 백록동규(白鹿洞規)의 발문을 써서 자제(子弟) 간을 교수(敎授)하였다. 할머니 정씨④의 명으로 나가 능성현령(綾城縣令)이 되었다. 재각에 누운 듯 관직에 임하여 위엄이 있으면서 사납지 않았고, 관대하면서도 느슨하지 않았다. 백성 중에 형제간에 거짓으로 문서를 만들고서는 1경의 밭을 다투는 자가 있었다. 공이 “이 문서는 위조 되었다. 형제는 한 몸에서 나뉜 사이인지라 한 자의 삼베도 꿰매어 옷을 만들어 함께 입을 수 있는데 한 치 땅을 두고 다투겠는가?”라고 말씀하였다. 두 사람이 서로 감응하여 그 문서를 불사르고 빌며 소송을 멈추고 물러나니 의(義)로 사람을 움직인 것이다. 상소[封事]를 올려 이단을 물리치고 백성에게 끼치는 폐해[民瘼]를 아뢰니 고기와 비단을 내려서 임금을 감동시킨 충심을 장려하였다. 1519년(기묘) 정월에 별세하니 향년 41세였다
① 감반(甘盤) : 중국 은대(殷代) 임금인 무정(武丁) 때의 현신(賢臣)이다. 고종이 즉위하기 전 감반(甘盤)에게 글을 배웠다. 뒷날 즉위하고는 그를 등용해서 정승으로 삼았다는 고사로부터 사제(師弟) 관계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② 1506년의 중종반정을 뜻한다.
③ 원종공신(原從功臣) : 국가나 왕실의 안정에 공훈이 있는 정공신(正功臣) 외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 준 칭호로 중종반정 이후 송연손과 송세림이 정국원종공신에 책봉된 것을 의미한다.
④ 송세림의 할머니는 정숙관(鄭淑琯)의 딸이다.
訥庵宋先生 諱世琳 字獻仲 驪山人 成化十五年己亥十二月十四日生 母夫人金氏方娠 夢有神人褒 衣金帶以告曰 三日當生貴子 名之萬年館 及期果 生公 岐嶷胎成 三字不類 俗只稱萬年 公少聰穎 不煩師資 學問日進 弱冠中司馬 華聞大播 初公父韓山 以經術爲中廟初九時甘盤 及靖國賜公父子原從功臣 壬戌擢壯元科 癸亥轉吏曹佐郎 卽未幾 怙恃相繼捐背 泣血六年 仍成綿痼 號訥庵 七命不拜 跋白鹿洞規 敎授子弟間 因王母鄭氏命出爲綾城縣令 莅官如臥齋閣 威不苛寬不弛 民有兄弟 詐述文書 爭一頃田 公曰是書僞也 兄弟一體而分 尺布可縫而競寸土乎 二人相感 乞焚其書 罷訟而退 義動人也 上封事 斥異端訴民瘼 賜肉帛以獎忠感主也 己卯正月卒年四十一
청액소(請額疏)
삼가 생각건대 서원의 설립은 덕이 있는 사람을 존경하고 이전의 좋은 행실을 밝히며 사문(斯文)의 성대한 일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만약 조정에 훌륭
히 계승하고 깊이 (사액을) 호소하는 청원을 하지 않는다면 선현을 표창할 수 없고 특히 높이고 보답하는 뜻에 결함이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현인이 있다면 반드시 사우(祠宇)가 있고 사우가 있으면 반드시 편액이 있는 것은 그 유래가 오래 된 일입니다. 신들이 삼가 살피옵건대 전하께서 등극하신 이래로 현인(賢人)을 좋아 하시고 선행을 즐겨 하시며 선비를 아끼시고 도를 중히 여겨 현인을 모신 사우의 설립을 원하는 대로 해주셨고, 사액(賜額)의 은전을 요청하면 즉시 윤허해 주셨습니다. 무릇 지난날 미처 겨를이 없던 사안을 모두 차례로 거행하였습니다. 유독 본도(本道) 태인현에 선현을 모신 사우가 창건된 지 이미 백 여 년이 지났으나 아직지 못한 일이라 여겨 신들이 부끄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신들이 청하여 전하께 대략적으로 그 개요[梗槩 ; 대강의 줄거리]를 아뢰니 오직 어질고 밝으신 전하께서 들어주시고 살펴주옵소서.
신들이 삼가 신라조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을 살펴보니 사문의 종장(宗匠)으로 혼란한 때를 만나 태산군수로 부임해 왔으니 곧 지금의 태인현입니다. 당시 문헌이 비록 징험하기에 부족하였지만 (문창후께서 끼치신) 유풍과 여운이 백세 동안 묻힐 수 없었는지라 고을 사람들이 뜻을 모아 집 한 채를 지어 제사를 올리는 장소로 삼았습니다.
그 뒤 일찍이 현감을 지낸 본조(本朝)의 선정신(先正臣) 신잠이 그 사우에 합향(合享)되었고 이 고장의 어진 선정신 정언 정극인(丁克仁), 좌랑 송세림(宋世琳), 진사 정언충(鄭彦忠), 목사 김약묵(金若默), 진사 김관(金灌)을 배향하여 왔습니다. 무릇 최치원의 문장이나 학업은 아주 빛나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켜 이미 문묘 배향의 반열에 올랐으니 신들이 어찌 감히 구차스럽게 그 사이에 말을 덧붙일 수 있겠습니까?
신잠은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일찍이 유교 경전에 밝아 천거 받았고 중년에는 부절(符節)을 받아 이 읍을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한결같이 학교를 일으키고 인재를 기르는 것을 임무로 삼아 방·촌·리·사[坊村里社]에 널리 국당(局堂)을 세우고 강습소[講肄之所]를 만들기 위해 자신의 녹봉을 덜어내 비용의 바탕이 갖춰져 문풍(文風)이 크게 변하고 현사(賢士)가 배출되었습니다. 그 효능으로 인재 양성의 효과가 난 것이 촉(蜀) 지역을 교화한 문옹(文翁)①보다 못하지 않아 이 고장 사람들이 추모하여 마침내 최치원과 함께 제향되었습니다.
정극인(丁克仁)은 세종(世宗) 때 인물로 처음 성균관 생원으로 태학(太學)에 들어갔을 때 요사스러운 승려가 멋대로 불법을 행해 당대를 미혹시키자 정극인이 여러 생원들을 이끌고 대궐을 지키며 소장(疏狀)으로 항거하고 크게 물리쳐 성상께서 깊이 칭찬하고 감탄하셨습니다. 문종(文宗) 때 은둔한 선생을 등용하고자 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예종(睿宗) 때에 정언(正言)을 제수 받았으나 나이가 70이 돼서 치사(致仕)하며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배우기를 원하는 선비들이 멀고 가까운 곳에서 모여들자 정성을 다해 가르쳐 늙어서도 게을리 하지 않고, 향음주례(鄕飮酒禮)를 설행하여 여씨향약(呂氏鄕約)의 규범을 한결같이 따르니 온 고을이 교화됐습니다. 성종(成宗) 대왕이 듣고는 교서를 내려 권장하고 본도(本道)로 하여금 때때로 은혜로이 보살피게 하였습니다.
송세림(宋世琳)은 중종(中宗)의 스승인 송연손(宋演孫)의 아들입니다. 타고난 자질이 매우 뛰어나 학업이 어린 나이에 이루어져 나이가 겨우 20살에 갑과(甲科)에 이름을 올렸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조정에서 일곱 번 불렀으나 출사하지 않았으며 어버이를 섬김에 지극하고 정성과 예가 모두 극진하였습니다. 불당을 훼철하고 학사(學舍)를 세워 주자의 백록동규(白鹿洞規) 발문을 써서 걸어 학식(學式)으로 삼아 나이 어린 학도들을 깨우쳐 주어 학도들의 재주에 따라 성취가 독실하니 당시 재주와 덕망 있는 선비들이 대부분 송세림의 문하에서 나왔습니다.
정언충(鄭彦忠)은 기질이 온후해 말은 어눌했으나 행동이 민첩하였습니다.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뒤 과거 공부를 하지 않고 의리에 침잠해 더욱 역학에 정밀하였습니다. 고명(高明)하여 한 곳에 마음을 두어 상수(象數)를 오묘하게 꿰뚫어 전하지 않는 비법을 천년 뒤에 깊이 터득하였으니 세상으로부터 동방의 소옹[康節]으로 칭송 받을 것입니다. 선정신 송인수(宋麟壽)는 호남의 관찰사로 제일 먼저 방문하여 도를 강설하셨고 이항(李恒) 및 김인후(金麟厚)②와 서로 친하게 교유하여 학문을 갈고 닦으니 (이들이 선생을) 스승으로 삼을만한 벗으로 대우하였습니다. 조정에서 특별히 후릉 참봉(厚陵參奉)③을 제수했으나 죽을 때까지 벼슬하지 않았습니다.
김약묵(金若黙)은 학문을 닦고 힘써 행하며 예전의 현인들을 존경하여 믿었습니다. 어려서 외숙 송세림(宋世琳)을 따라 가르침을 받았고 자라서는 김인후(金麟厚)·정언충(鄭彦忠) 등과 서로 학문을 토론하고 닦아 드러내 밝힌 것이 많았습니다. 부모의 상을 당해서는 3년 동안 피 눈물을 흘렸고, 과거에 급제해 대성(臺省)④을 지내다 노년에 양주목에 보임되어 학교를 일으키고 농업을 권장하며 교화를 우선하였습니다. 공무에서 물러난 여가에는 매번 방을 쓸고 몸을 바로 하여 앉아 성리학의 여러 책을 읽다가 한밤중이 되어서야 비로소 마쳤습니다. 평생 곧은 뜻과 절조로 청렴하고 검소하였으며 공손하고 부지런하셔서 금과 옥처럼 세상에 근본이 되어 군자들이 선생을 칭송하였습니다.
김관(金灌)은 타고난 자질이 도에 가깝고 천부적으로 효성을 타고나 어려서부터 의리에 힘을 써 깊이 터득한 바가 있었습니다. 광해군[昏朝] 때에 일찍이 과거를 보러 서울에 갔을 때, 원흉(元兇) 이이첨(李爾瞻)⑤이 선생의 명성을 듣고 매우 간절히 초청하거나 몸소 선생이 세 들어 사는 집까지 왔으나 끝내 피하며 만나지 않고 책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서 다시는 과거에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좌우에 도서를 쌓아두고 깊은 뜻을 찾았습니다. 매달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 향숙(鄕塾)으로 생도들이 모였고, (이들을) 이끌고 도와주며 권장하여 정진하게 하여 죽을 때까지 게으르지 않아 엄연(儼然)히 사림들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굳은 품행과 깊고 두터운 덕의를 여기에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생각건대 이 다섯 신하는 비록 그 뜻과 효험은 당시에 볼 수는 없었으나 혹은 현명한 재주를 가지고도 포부를 다 펼치지 못했고, 혹자는 먼 지방에 있어 임금께 미처 알려지지 않아 풍성(風聲)⑥만은 오히려 백세에 세울 수 있다면 옛 사람들이 말하는 ‘이름난 시골 선비가 죽으면 사(社)에 제사 지낼 만하다’는 한유(韓愈)의 글이 바로 이에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는 것은 현인을 위해서고 사액하여 기리는 것은 그 일이 중해서이니 많은 선비들이 덕을 사모하여 이미 제사를 지내는 곳이 있다면 국가에서 현인을 높이 존숭하고 풍속을 교화하는 데 끝내 사액을 내려주는 은전이 빠질 수 있겠습니까? 우리나라 여러 현인들을 비교하여 말해보자면 이미 성묘(聖廟)에 배향 했다면
무릇 여러 곳에 세워진 사당이 모두 사액의 은전을 입고 있으니 대개 배향의 의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여러 신하의 덕행과 학업을 되돌아보건대 이미 옛 사람들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고 후세의 학자들[來學]에게 모범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하물며 최치원은 이미 종사(從祀)의 반열에 있는데 오직 이 사우만이 어찌하여 홀로 사액을 받지 못했습니까? 옛날 선왕조에 도내 유생들이 일찍이 이 일을 성상[天陛 ; 임금의 거처]께 진달하였는데 마침 그 당시 조정에 많은 일이 있어서 미처 시행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사문에 큰 흠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에 신들이 번거롭고 외람된 죄를 피하지 않고 합동으로 봉장(封章)해 천리 길을 와서 다시 이렇게 구중궁궐에 계신 전하께 호소합니다.
삼가 원컨대 전하께서 많은 선비들이 우러러 바라는 실정을 살펴 생각하셔서 누대의 조정에서 오래도록 하지 못했던 은전을 거행해 특별히 유사에게 명하여 빨리 사액을 내리셔서 원우를 빛나게 하시고 제사를 영원히 지내게 해주신다면 더없이 다행이겠습니다.
저희들이 간절히 바라며 지극히 황공한 마음 이기지 못하고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소두(疏頭) 생원(生員) 유지춘(柳之春)
제소(製疏; 청액상소문을 지은 사람) 진사(進士) 송명연(宋明淵)
사소(寫疏; 청액상소문을 쓴 사람) 생원(生員) 김정삼(金鼎三) 등
① 문옹(文翁) : 문옹은 한대(漢代) 경제(景帝) 말에 촉군(蜀郡) 태수로 재직하면서 성도(成都)에 관학을 설치하여 그 고을의 자제들을 불러 배우게 하고 요역을 면제해 주었다. 성적이 우수한 자는 고을 관리로 임명하였는데, 무제(武帝) 때 전국의 고을에서 관학을 설치하게 된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② 김인후(1510-1560) : 울산(蔚山) 김씨이고, 자는 후지(厚之)이다. 그는 장성에서 태어나 순창 등에서 지내다 장성으로 돌아갔다. 1531년(중종 26)의 사마시, 1540년의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1545년(인종 1)에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이유로 고향에 돌아가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 뒤 여러 관직을 제수 받았으나 수락하지 않았다. 김인후는 필암서원을 비롯한 여러 서원·사우와 문묘에 배향되었다.
③ 황해북도 개풍군 영정리에 있는 조선 2대 왕 정종(1357-1419)과 정안왕후(1355-1412)의 쌍릉이다. 북한 보존급문화재 제551호이다. 참봉은 종9품으로 조선시대 각 능을 맡아보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④ 대성(臺省) : 조선시대 대관과 간관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⑤ 이이첨(1560-1623) : 광주(廣州) 이씨이고, 자는 득여(得輿)이다. 1582년(선조 15)의 사마시, 이듬해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고, 1608년의 문과 중시에서 장원을 차지하였다. 전적(典籍) 등을 지낸 후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이조정랑, 예조판서, 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선조의 후사문제로 대북과 소북이 대립하자 대북의 영수로 정인홍과 함께 광해군의 옹립을 주장하였다. 광해군의 즉위 이후 임해군과 유영경을 사사하는 등 소북파를 숙청하였다. 1612년(광해군 4)에 김직재의 옥사를 일으켰다. 1613년에 영창대군을 살해하고, 1617년에 인목대비의 폐모론을 발의하는 등 정권을 농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623년에 인조반정으로 도망가다가 관군에게 잡혀 참형되었다.
⑥ 풍성(風聲) : 윗사람의 공덕 또는 교육을 통해 아랫사람 내지 풍속을 감화시키거나 교화시키는 것이다.
請額疏
伏以書院之設 所以尊有德景前行 興起斯文之盛擧 而若非請于朝廷顯承澳號 則無以褒揚先賢而殊欠崇報之意 故有賢則必有祠 有祠則必有額者 其來尙矣 臣等伏覩 殿下臨御以來 好賢而樂善 愛士而重道 賢祠之建 無願不從 恩額之典 有請卽允 凡前日之所未遑者 莫不次第擧行 而獨本道泰仁縣 有先賢祠宇 創建已逾百有餘年 而尙未蒙寵錫之號 則此實盛世之闕典 而臣等之所羞也 臣等請爲殿下 略陳其梗槩 惟聖明試 埀省覽焉 臣等謹按羅朝文昌侯崔致遠 以斯文宗匠 遭時昏亂 出守泰山郡 卽今泰仁縣也 當時文獻 雖不足徵 而遺風餘韻 百世不泯 鄕人合謀 共搆一堂 以爲報祀之地 而其後又以曾爲邑宰者 本朝先正臣申潛 合享於其祠 以鄕賢先正臣正言丁克仁·佐郎宋世琳·進士鄭彦忠·牧使金若默·進士金灌
配以享之 夫致遠之文章學業赫然 照人耳目 旣躋從祀之列 則臣等何必贅說於其間哉 申潛以己卯 名賢 早薦明經 中年受符 是邑其爲政 一以興學校 育人才爲務 坊村里社 廣設局堂 以爲講肄之所 捐出己俸 以備餼廩之資 文風丕變 賢士輩出 其效作成之效 不下文翁之化蜀 邑人追慕 遂與致遠而共享焉 至若丁克仁 乃世宗朝人也 初以上庠入太學時 有妖僧恣行佛法 誑惑一世 克仁率諸生 守闕抗章 闢之廓如 自上深加獎歎焉 文宗朝擧逸民不就 睿宗朝拜正言 以年滿七十 致仕還鄕 願學之士 遠近坌集 諄諄敎誨 老而不倦 設鄕飮酒禮 一倣呂氏之規 一鄕化之 成宗大王聞之 下敎獎諭 令本道時致惠養焉 宋世琳乃中廟師傅演孫之子也 天分甚高 學業夙成 年纔弱冠 策名甲科 無意仕宦 七徵不起 事親至孝 誠禮備盡 毁撤佛宇 創立學舍 跋白鹿洞規 揭爲學式 訓迪蒙士 隨其才而篤成焉 當時俊髦之士 多出於其門 鄭彦忠氣質 渾厚 訥言敏行 自中司馬 廢絶擧業 沈潛義理 尤精易學 翫心高明 妙透象數 深得不傳之秘 於千載之下 世以東方之康節稱之 先正臣宋麟壽 按節湖南首訪講道 李恒·金麟厚相從講劘 待以師友 朝廷
特除厚陵參奉 終身不仕 金若黙篤學力行 尊信前賢 幼從內舅宋世琳受業 長與金麟厚·鄭彦忠等 互相切磋 多所闡發 執親之喪 血泣三年 逮登科第 歷職臺省 晩補楊州牧 興學勸農 敎化是先 公退之暇 每掃室靜坐 讀性理諸書 夜分乃罷 平生志操 以淸儉恭勤 爲本世以金玉 君子稱之 金灌資稟近道 誠孝出天 自少用力於義理上 深有所得 在昏朝時 嘗赴擧入洛 亢兇爾瞻聞其名 邀請甚勤 至於躬造其僦舍 而終避不見 卷書歸家 不復就擧 左右圖書 探賾蘊奧 每月朔望 聚會生徒於鄕塾 誘掖獎進 終身不怠 儼然爲士林之表 則其操履之堅確 德義之深厚 此可見矣 惟玆五臣者 或抱賢才而未盡展布 或 在遐遠而未及上聞 志效雖未可見於一時 風聲 猶可樹立於百世 則古人所謂鄕先生沒而可祭於社者 其不在斯歟 嗚呼 立祠而享之者 爲其賢也 賜額而旌之者 重其事也 多士慕德 旣成俎豆之所
則其在國家尊崇風勵之道 其可終闕宣額之典乎 試以東方諸賢言之 旣爲餟食於聖廟 則凡諸立祠之所 皆蒙賜額之恩 盖所以重其從祀之義也 顧念諸臣之德行學業 旣足以無愧於古人 爲範於來學 況致遠旣在從祀之列 則惟玆祠宇 豈可獨無頒號之擧乎 昔在先王朝 道內章甫 曾以此事陳達天陛 而適綠其時朝家多事 未克施行 豈不爲斯文之大欠事乎 玆以臣等不避煩猥之誅 合辭封章 裹足千里 復此籲呼於九重之下 伏願殿下 軫多士顒望之情 擧累朝久曠之典 特命有司 亟宣華扁 以賁院宇以永祀 則千萬幸甚 臣等不勝祈懇屛營之至 謹昧死以聞
疏頭 生員 柳之春 製疏 進士 宋明淵 寫疏 生員 金鼎三 등
무성서원원지』 하 (1884) 박정민, 전희진, 권이선. (2021). 전북연구원 전북학연구센터
오현행적(五賢行蹟)
눌암(訥庵) 송 선생(宋先生) 행적보유(行蹟補遺)
선생께서 타고난 천성이 매우 뛰어나고 성품이 어질며 효성스럽고, 재주가 명민하여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았다. 무릇 언행(言行)이 보통 아이들과 다르고 특히 시사(詩詞)에 뛰어나서 사물을 보는 대로 읊으면 모두 성율(聲律)에 맞으니, 사람들이 신동이라고 불렀다. 돌아가신 아버지 여원군(礪原君 ; 송연손)이 일찍이 왕자의 사부가 되어 중종(中宗)께서 잠저(潛邸)①에 계실 때 시독관(侍讀官)이었는데 어머니가 연로하시자 친가로 돌아가기 위해 시독관을 급히 그만두었다.
중종께서는 선생의 행실이 준엄함을 알고 오로지 선생을 시독으로 명하였으며 중종 때 정국(靖國)의 공으로 특별히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을 내렸으니 대개 일전에 선생의 시독에 대한 공을 기억하신 것이다. 갑자사화(甲子士禍) 이후에 『어면순(禦眠楯)』② 2책을 저술하였다. 호음(湖陰) 정 선생(정사룡)③이 발문에 “비록 유희(遊戱)에서 나왔지만 타일러 깨우쳐주는 뜻이 실로 그 안에 담겨 있다. 가령 선생께서 사국(史局)에서 간악한 자는 꾸짖고 알려지지 않은 자를 드러내게 하며 사간원에서는 천거를 하거나 일을 논하게 하
셨으니 어찌 여기에 업적을 다 기록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중종께서 선생이 고질병으로 일 년 내내 벼슬을 하지 못하시자 내약(內藥 ; 궁중에서 쓰이는 약)을 하사하고 의원을 보내니 (공이) ‘학교를 진흥시키고 이단을 물리치는’ 것에 관해 상소[封事]를 올렸다. 중종이 가상하게 여겨 특별히 옷의 겉감과 안집[表裏] 한 벌[襲]을 내렸다.
선생의 훌륭한 명망은 사림(士林) 가운데에서도 우뚝 솟았다. 눌제 박 선생(박상)④이 늘 선생의 문인들에게 말하길 “선생은 참으로 심학(心學)을 하셨다.”고 하셨으며 면앙(俛仰) 송 선생(송순) 또한 함께 교유[從遊]하며 예절을 묻고 도를 논하며 일찍이 탄식하시길 “안자(顔子)와 민자건(閔子騫)의 덕행(德行)과 자유(子游)와 자하(子夏)의 문장,⑤ 도연명[陶潛]의 정절⑥을 오직 선생께서 겸하셨다”고 하였다. 정조조[正廟朝] 이재 황 선생(황윤석)⑦이 찬양하여 말하기를, “선생께서 본디 가숙(家塾)에서 부지런히 가르치셨다.”고 하였으며, 후학들이 사표(師表)를 올려 또한 말하길, “문장과 덕행이 뛰어나 기록할 만하다.”고 하였다.
① 잠저(潛邸) :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이나, 그 기간 동안을 이르는 말이다.
② 어면순(禦眠楯) : 송세림이 편찬한 한문 소담집이다. 책의 제목과 같이 ‘잠을 막아 주는 방패’라는 뜻으로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③ 정사룡(1491-1570) : 동래(東萊) 정씨이고, 호가 호음(湖陰)이다. 1507년(중종 2) 진사시, 1509년의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부제학, 예조판서, 공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와서 문명을 떨쳤고, 이후 『조천록(朝天錄)』을 썼다. 칠언율시에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④ 박상(1474-1530) : 충주(忠州) 박씨이고, 호가 눌재(訥齋)이다. 1496년(연산군 2) 진사시, 1501년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병조좌랑, 전라도도사, 임피현령 등을 역임하였다. 1515년(중종 10)에 순창군수 김정과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단경왕후 신씨의 복위를 주장한 상소를 올렸다. 청백리로 인정받았으며 문장에서도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저서로 『눌재집(訥齋集)』이 있고, 광주(光州)의 월봉서원(月峰書院)에 제향되었다.
⑤ 공자가 덕행으로 손꼽은 제자가 안자(顔子)와 민자건(閔子騫)이고, 문학으로 자유(子游)와 자하(子夏)이다.(『논어』, 「선진편」 2장)
⑥ 도연명은 송대 이후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 ‘충신의 전범’으로 인식되었다. 특히, 주희가 도연명의 인격을 유교적 인격을 가진 인물로 규범화하였고, 성리학을 국시로 한 조선의 사대부들은 그의 정절을 기린 것이다. 관련 내용은 다음의 연구를 참고할 수 있다.(노우정, 「주희의 도연명의 시가 수용과 인격 비평 -주희에 의한 도연명의 충신으로서의 전범화-」, 『온지논총』 35, 2013)
⑦ 황윤석(1729-1791) : 평해(平海) 황씨이고, 호가 이재(頤齋)이다. 1759년(영조 35)의 진사시에 급제하였다. 정릉참봉, 목천현감, 전의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실학에 감명 받아 이학(理學), 역사, 언어 등 다방면으로 연구하였고, 호남의 3대 실학자로 평가받는다. 저서로 『이재유고(頤齋遺稿)』 등이 있다.
先生資稟絶異 性仁孝 才明敏 幼聰穎 聞一知十 凡所言行異於群兒 尤工於詩詞 見物隨詠 咸中聲律 人謂之神童 考礪原君嘗爲王子師傅 侍讀中宗于潛邸 以母老春秋歸寧 侍讀頻廢 中宗知先生之行峻 必命先生侍讀矣 中宗靖國特賜原
從功臣二等 蓋記先生之前日侍讀功也 自甲子士禍著禦眠楯二冊 湖陰鄭先生跋曰 雖出於遊戱 而勸戒之意 實寓乎其中 使先生誅姦發潛於史局 剡章論事於諫院 則奚事於是錄哉 中宗以先生之久病不仕春秋 賜內藥 爲醫之 上封事興學校 闢異端 中宗嘉之 特賜表裏一襲 先生之令望 卓冠士林 訥齋朴先生 常語先生之門人曰 先生眞心學也 俛仰宋先生 亦從遊問禮論道 嘗歎曰 顔閔之德行 游夏之文學 陶潛之靖節 惟先生兼之矣 正廟朝頤齋黃先生贊之曰 先生素以家塾勤誨 爲後進師 表又曰 文章德行 卓卓可紀矣
중수기(重修記)
송지호(宋持灝) 기문
무성(武城)이라는 서원의 명칭은 읍호(邑號)에서 유래하였다. 옛날에 최 문창(文昌) 선생이 이 읍의 태수로 부임하여 교화는 현가(絃歌)를 숭상하고 다스림은 자유(子游)의 사례를 따르니 민간의 풍속이 크게 변하였다. 읍호는 아마도 이 때문에 붙여진 듯하다.①
선생(최치원)을 제사 지내는 곳이 ‘무성’으로 사액 받은 이후에 영천(靈川) 신 선생(申先生)이 뒤를 이러 배향되니, 문화가 부흥했다. 또 이 고장에 계시던 오현인 불우헌(不憂軒) 정 선생(丁先生)·눌암(訥庵) 송 선생(宋先生)·묵재(默齋) 정 선생(鄭先生)·성재(誠齋) 김 선생(金先生)·명천(鳴川) 김 선생(金先生) 같은 분들이 모두 호남의 명망 있는 현인으로 도덕과 신의가 있다는 이유로 이 서원에 함께 배향이 되셨다.
서원이 창설된 지 몇 백 년이 지나 무너질 때마다 즉시 항상 보수하지 못하다 보니 현우(賢宇)·강당(講堂)의 기와가 파열되어 물이 새고 고사(庫舍)의 담장과 흙이 젖어서 무너져버렸다. 원유(院儒)들이 새롭게 고칠 것을 모의하였으나 역사(役事)의 규모가 크고 재정이 바닥나 경영하고 계획할 수가 없었다.
지금 우리 태수가 두 선생의 가르침을 다스림으로 삼으니 예교(禮敎)가 크게 진작되고 유가의 교화가 성대하게 흥하였다. 부임하시는 첫날에는 먼저 이 서원을 찾아와 공경히 배알하였다. 성재(誠齋) 김 선생(金先生)의 외손인 원유(院儒) 김정훈(金廷勳)이 서원을 수호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여, 서원의 수리에 관한 일을 아뢰니 (태수가) 개연(慨然)이 말씀하시길 “이는 참으로 내 역할이다.”라고 하시고는 마침내 경비를 마련하여 장인을 불러와 일을 감독하니 한 달이 못 돼서 공사가 끝났다. 서원의 모양이 이에 다시 새로워지니, 현인의 혼령이 편히 모셔지고 학도들이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태인의 유생들이 모두 그 공로를 기리며 그 공을 태수에게로 돌리니 태수는 누구인가? 한산(韓山) 이승경(李承敬) 현감이다. 그 일을 기록하기 위해 문장을 지어줄 것을 나에게[持灝] 부탁하니, 나는 눌암(訥庵) 송 선생의 10세손이다. 의리상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마침내 삼가 기(記)를 쓴다.
1854년(철종 5) 10월 상한(上旬) 송지호(宋持灝) 삼가 쓰다.
① 읍호는 …(중략)… 듯하다 : 최치원의 정사는 공자의 제자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의 태수가 되어 예악(禮樂)을 가르쳐 고을 사람들이 모두 현악(絃樂)에 맞추어 노래를 부를 정도로 훌륭한 교화가 이루어졌던
고사와 유사하므로 읍호가 무성으로 정해졌다는 것이다.
院以武城名 因邑號也 昔崔文昌先生宰是邑 化尙絃歌 治倣子游 民俗丕變 邑之號 蓋以是先生 俎豆之所 以武城宣額後 靈川申先生繼之文化 復興 且鄕之五賢有不憂軒丁先生·訥庵宋先生·默齋鄭先生·誠齋金先生·鳴川金先生 俱以湖南之望 道德相孚 倂食此院院之創 閱幾百載 隨圮隨修 不恒有焉 賢宇·講堂瓦裂而漏 庫舍墙垣土滲而圮 院儒謀所以新之 而役鉅財窮 顧無以經畫 今我太守以二先生之治爲治 禮敎丕振 儒化蔚興 下車之初 先訪是院 祗拜訖 院儒金廷勳 以誠齋金
生外裔 誠護尤切 以其事白太守 慨然曰 是誠在我 遂鳩聚集事 招匠董役 未一月工告訖 院貌於是乎 復新 而賢靈妥侑 學徒藏修 泰之儒咸頌 其功歸之 太守 太守爲誰 韓山李侯承敬也 爲記其事 以文屬持灝 乃訥庵宋先生十世裔也 義爲所不敢辭者 遂爲之記 甲寅陽月上幹宋持灝謹記
송종수(宋鍾壽) 기문
대체로 주(州)에 서원이 있고, 나라에는 학관(學館)이 있어서 예의문장(禮儀文章)이 그를 통해 갖춰졌다. 제사를 지내 선사(先師)를 높이고, 학문을 갈고 닦아 후학들이 본받게 하였다. 옛날 문창(文昌) 최 선생, 영천(靈川) 신 선생 및 향현(鄕賢) 불우헌(不憂軒) 정 선생, 눌암(訥庵) 송 선생, 묵재(默齋) 정 선생, 성재(誠齋) 김 선생, 명천(鳴川) 김 선생이 도덕과 신의로 자유(子游)의 다스림을 본받았다. 그러므로 선생의 위패가 모셔진 곳이 필시 ‘무성(武城)’이라 사액 받을 만 하였으니 읍 또한 이를 이름 삼아 유풍(遺風)이 아직도 전해졌다.
윤자현(尹玆賢) 현감이 자주 옛 선생의 가르침을 다스림 삼아 문교(文敎)를 숭상하고 학궁을 수리하였고 흥기하기를 기다리는 선비들이 흠모하며 정성스레 보호하였다. 이 때문에 이 서원이 비록 오래됐어도 늘 제 때에 새로워졌으니 대개 하늘이 사문(斯文)을 돕는다는 말을 믿을 수 있겠다. 『주역(周易)』에 이르길 “태괘(兌卦) 상에서 강습[講]하여 붕우 간에 서로 도움을 준다.”라고 하였으며, “비괘(否卦)는 태괘(泰卦)를 받으니”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그런 이치다.①
화재가 난 뒤에 서유구 관찰사가 중창한 것과 지붕의 기와를 갈아 덮을 무렵에 이승경(李承敬)② 현감이 다시 새롭게 한 것 등 무너질 때마다 보수한 일에 대해서는 선공(先公)③께서 서술하여 이미 갖춰졌으니 중복해서 말할 필요가 없어 생략한다. 서유구 관찰사의 아들 상정(相鼎)이 1870년(고종 7)에 관찰사가 되어 호남을 순시(巡視)할 때 동향(桐鄕)④의 옛 자취를 먼저 찾았다. 이 서원에 현가(絃歌)의 여운이 아직도 남아 있고, 학문을 흥기시킨 일은 비석이 증언해줄 수 있기에 마침내 비각(碑閣)을 세웠다. 또 녹[稟俸]을 덜어 온갖 노력을 하여 수리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게 만들어 눌재공(訥齋公)의 방계 10대손 김정신(金廷信), 명천공(鳴川公)의 7대손 김성흠(金惺欽)·정신(廷信)·성흠(惺欽)에게 맡기니, 정성을 다해 관리하였다. 또한 성재공(誠齋公)의 10대손 김필흠(金必欽)이 본 서원의 재임(齋任)이 되어 별청(別廳)에 이바지하는 등, 노력을 쌓았다.
그 이후로 올해에 이르러 마침 비바람이 크게 쳐서 지붕의 기와는 이미 물이 새고 파열됐으며 현우 문은 이미 좀먹어 두루 부서졌다. 담장과 홍문(弘門)이 무너질 때에 이르러 현감 이민태(李敏泰)가 무성서원의 원장이 되었다. 이민태 현감이 개연(慨然)히 선현의 다스림에 뜻을 두고 만나서 이야기 하고 편지로 타일러 사림들이 감동하게 만들고, 계획을 수립하여 재상 서상정 관찰사가 내려 준 경비를 출연하여 한 귀퉁이라도 충당하게 하였다. 또 불우헌(不憂軒) 공의 14대손 문현(文鉉)은 조상을 위하는 정성스런 마음이 보통 유생들이 현인을 사모하는 마음보다 간절하여 있는 힘을 다해 재물을 거두어 모아 장인에게 일을 맡기고 역사를 감독하였다. 서원의 모양이 아주 새로워져 다시 보이니, 아아, 아름답고도 성대하도다!
학문하는 원기는 하늘에서 나와 사람에게 부여되는 것으로, 현인을 현인으로 대하는 도는 곳곳에서 봉행되고 있다. 한갓 고을 현감들만이 존경하고 사모할 뿐만 아니라 또한 관찰사도 찬양하는 바가 있었으며, 비단 유생들이 존경하여 본보기로 삼을 뿐만 아니라 먼 후손들도 똑같이 길이 사모하였던 것이 이와 같았다. 재주 없는 내가 또한 서원에 배향된 분의 본손(本孫)으로써 여기에 감복되지 않을 수가 없어서 삼가 선대의 유업(遺業)이 잊혀지지 않고 후인들이 본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졸렬함을 잊고 거칠게 엮어 전말을 이와 같이 갖출 뿐이다.
1875년(고종 12) 10월 일 눌암(訥庵) 12대손 송종수(宋鍾壽) 삼가 쓰다.
① “하늘과 땅의 기운이 서로 통하지 않고 막힌 것을 비라고 한다.[天地不交 否]”라고 하였으니 비괘(否卦)는 난세를 의미하고, “하늘과 땅의 기운이 서로 통하는 것을 태라고 한다.[天地交泰]”고 하였으니 태괘(泰卦)는 태평을 상징한다. 본래 <주역>의 순서는 이와 반대로 태괘 다음에 비괘를 받으므로 태평 다음에 난세가 오는 것이 맞다. 그러나 원지에서는 난세 다음에 태평이 오는 것으로 쓰였으니 막히고 난 다음에 다시 형통하게 된다는 이치다. 즉, 무성서원에 발생한 화재 등 서원의 쇠함을 비괘에 비유하고, 이후 관찰사 서유구와 현감 이승경이 서원을 중수한 것을 태괘에 비유한 것이다.
② 원문에 李侯(이후)라고 되어 있는데 1828년부터 이민태가 현감으로 재임한 1875년 사이에 이씨 성을 가진 현감은 이승경이 유일하다. 바로 위의 중수기에서도 이승경이 서원의 공역에 일조했음을 기린바 있다.
③ 선공(先公) : 눌암의 10세손으로, 중수기를 작성한 송지호(宋持灝)를 가리킨다.
④ 동향(桐鄕) : 중국 안휘성(安徽省) 동성현(桐城縣)에 있는 지명인데, 수령으로 어진 정사를 베풀었던 연고가 있는 고을을 뜻한다. 한(漢)나라 때 주읍(朱邑)이 동향(桐鄕)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풀고, 죽어서도 유언으로 동향에 장사를 지냈는데, 그를 존경하던 고을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서 세시(歲時)로 제사를 지냈다는 고사가 있다.(『한서(漢書)』 권89 「순리전(循吏傳) 주읍(朱邑)」) 관찰사 서상정이 자신의 아버지 서유구가 다스리던 고을을 찾은 것을 가리킨다.
夫州之有書院 國之有學館 而禮儀文章之所由具也 俎豆以薦先師 講磨以倣後學 昔文昌崔先生 靈川申先生曁鄕賢不憂軒丁先生·訥菴宋先生 默齋鄭先生·誠齋金先生·鳴川金先生 道德相孚 治倣子游 故先生妥靈之所 必以武城宣額 而邑亦因
以爲號 遺風尙傳 尹玆賢侯往往多以昔先生之治爲治 尙文敎修學宮 凡士之待興者 向慕而誠護 是故斯院雖舊與時維新 蓋天道之扶斯文也信矣 而易曰兌講滋益 否則受泰 此其理也 粤若回祿後 徐侯之重創翻瓦時 李侯之復新 及其隨圮隨修者 先公之述已備 不必架疊而勦訖矣 徐侯之胤相鼎 庚午年旬宣湖省 桐鄕古績先訪 玆院絃歌之餘韻猶 被興學之片石堪語 乃建碑閣 又捐稟俸以苞拮据 爲資修補之方 而屬於訥齋公旁十代孫金廷信 鳴川公七代孫金惺欽·廷信·惺欽 誠力勤幹 且誠齋公十代孫金必欽爲本齋 扶別廳 積累其功由來 迄于今年 風雨大戒 屋瓦則旣滲而且裂 賢宇門則旣 蠹而旋破 至於垣墻之頽圮 弘門之顚越時 則李侯敏泰以院長 慨然有志於先賢之治 而面戒書諭 爲士林之興感經畫(劃) 方略捐出 徐相公資給條 俾當一隅 而不憂軒公十四代孫文鉉 其爲先之誠尤切於
凡儒 慕賢之心 極力鳩財 屬匠董役 院貌一新而改觀焉 猗歟盛哉 文學之元氣 出乎天賦乎人 而賢賢斯道 在在是奉 非徒地守之尊慕 而亦有方伯之修飭 不但章甫之矜式 而均是雲仍之永慕者 有如是夫不佞 亦以院本孫 不能無感服於此 而竊爲前緖之不朽 後覽之有效 忘拙構荒 以備顚末如右云爾
乙亥陽月日 訥庵十二代孫宋鍾壽謹記
송정순(宋程淳) 기문
옛날에 어떤 읍이 무성(武城)이라고 불리었는데 곧 자유가 다스린 지역이다. 지금 어떤 서원이 있으며 ‘무성’이라는 사액을 받았으므로 그 자취 때문에 무성이라고 불리운다.
1696년(숙종 22)에 특별히 사액을 입었으니 얼마나 맑고 정제[淸肅]되었으며 얼마나 우러러 존경하는가? 문창(文昌) 최 선생과 영천(靈川) 신 선생은 도덕으로 서로 믿으셨고, 불우헌(不憂軒) 정 선생, 눌암 송 선생, 묵재 정 선생, 성재 김 선생, 명천 김 선생이 덕과 신실함을 계승하니 일곱 현인이 무성서원에 배향되었다. 창건된 몇 백 여 년이고 중수를 몇 번쯤 하여 무너진 곳마다 보수해서 오래된 것을 새롭게 하였다.
아아 슬프도다. 1876년(고종 13)에 큰 흉년이 든 뒤로 음력 초하룻날과 보름에 분향(焚香), 봄·가을의 향사(享祀)를 삼가 받들어 행하고 수리하려는 뜻이 있었으나 겨를이 없었다. 현우(賢宇)는 기와가 무너져서 물이 새고 자리는 해져 닳고 젖었으며 강수청(講修廳)은 동재와 서재의 사방에 하나의 벽도 없어서 비 바람을 피하기 어려웠으니 어찌 책을 읽고 학문에 힘쓰겠는가? 담과 고사(庫舍), 신문(神門)은 만에 하나라도 온전한 것이 없어 쳐 새롭게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에 내가 민첩하지 못하나 장차 어떠하겠는가. 향원(鄕員)과 도의 유생들에게 두루 알리고 사림이 사무를 맡는 중에 이미 공론[公爛]이 하나로 귀의되어 진신(縉紳)을 임명하고, 또한, 힘을 내서 두 마음을 품지 않게 하였다. 일을 해낼 방법을 주선하고, 재물을 한데 모아 기워 새롭게 하니 새로워진 현우의 자리는 칡 대신에 대나무로 하고 동재와 서재는 예전 것을 계승하고 옛 건물[肯堂]①을 그대로 계승하여 침식된 곳의 기와는 기와로 흙은 흙으로 일일이 보수하며 매우 간절히 일을 마쳤다. 서원의 모습을 우러러보니 다시 새로워졌구나. 내가 재주는 부족하지만 원임이자 본손(本孫)이므로 마음으로 절로 감복해서 대략 전말을 들어 졸렬한 분수를 편히 지키며기(記)를 쓸 따름이다.
1879년(고종 16) 윤 3월 일 눌암 송 선생 11대손 정순(程淳) 삼가 쓰다.
① 긍당(肯堂) : 조상의 유업을 계승한다는 뜻으로, 긍구긍당(肯構肯堂)의 준말이다. “만약 아버지가 집을 지으려 작정하여 이미 그 규모를 정했는데도 그 아들이 기꺼이 당기(堂基)를 마련하지 않는데 하물며 기꺼이 집을 지으랴.”라고 한 구절에서 나온 말이다.(『서경』 「대고(大誥)」) 자손이 선대의 유업을 잘 계승하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는 고가(古家)를 후학들이 중수(重修)한 것을 가리킨다.
古有邑而曰武城 卽子游之治也 今有院而額武城因其迹之號也 肅廟丙子特蒙宣額 何等淸肅 何等尊崇 文昌崔先生 靈川申先生 道德相孚 不憂軒丁先生·訥庵宋先生·默齋鄭先生·誠齋金先生·鳴川金先生 踵乎德孚 七賢配享之院也 創建幾百載 重修幾許次 隨圮隨葺 維舊維新 鳴呼噫噫 丙子大無之後 朔望之焚香 春秋之享祀 謹愼奉行修葺之方 有志未遑 賢宇則瓦碎而滲漏 席弊而漫漶 講修廳則東齋西齋四無一壁 難庇風雨 何以藏修 垣墻與庫舍神門 萬無一全 不獲不改新 乃已以余之不敏 將何如哉 遍諭鄕員 輪告道儒 士林任事中 旣有公爛之歸一 縉紳任命下 亦有貽力之不貳 方略周旋 鳩聚錢財 可以葺而葺之可以新 而新之賢宇之席則以葛代竹 東西之齋則仍舊肯堂 至於滲漏處 瓦則瓦 土則土 一一修補 懇懇訖功 瞻仰院貌惟爲復新 余之不佞以院本孫 心自感服 略揭顚末 安拙爲記云爾 己卯閏三月日 訥庵宋先生十一代孫程淳謹記
☛ 무성서원(武城書院) 사적 제166호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에 있는 서원. 사적 제166호. 고려시대에 태산사를 창건해 최치원의 덕행과 학문을 추모했다. 고려말에 일단 없어졌다가, 조선초인 1483년(성종 14) 정극인이 세운 향학당이 있던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1549년(명종 4) 신잠의 사당을 짓고 배향했으며, 정극인·송세림·정언충·김약묵·김관을 추가 배향했다. 1696년(숙종 22) 최치원과 신잠의 사당을 합치고, '무성'이라는 사액을 받아 서원으로 개편했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그대로 남아 있던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무성서원은 2019년 7월 6일,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16~17세기에 건립된 다른 8개 서원과 함께 오늘날까지 한국에서 교육과 사회적 관습 형태로 지속되어온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이며 성리학 개념이 여건에 맞게 바뀌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의 14번째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날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9개 서원은 소수서원(1543년 건립), 남계서원(1552년 건립), 옥산서원(1573년 건립), 도산서원(1574년 건립), 필암서원(1590년 건립), 도동서원(1605년 건립), 병산서원(1613년 건립), 무성서원(1615년 건립), 돈암서원(1634년 건립)이다. 【다음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