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왕 여불위 - 스포츠서울 연재소설(21회~30회)

[evok]

商王 여불위 21회

기화(奇貨) 가거(可居) - 21

“아버님, 뛰어난 장사꾼은 손해나 위험요인을 최대한 줄일 줄 아는 기술자라고 들었습니다. 장사꾼인 제가 세상을 속일 수는 있어도 세상이 저를 속이게 둘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양책의 집사를 함양으로 파견한 것이다. 그러고도 장사꾼에게 어울리지 않는 식객을 여럿 두었지 않은가. 손해를 줄이려는, 속지 않으려는 대책이다.

“처음도 장사요, 끝도 장사다. 숨을 쉬어도 장사요, 오줌을 누어도 장사다. 실수도 장사여야 하고, 도둑질을 당해도 장사여야 한다. 심지어 죽는 것도 장사다. 그러니 그렇게 초지일관한다면 너는 반드시 성공할 게다. 하지만 네가 장사꾼이라는 사실을 잊는 순간 즉시 앙화(殃禍)가 덮칠 것이다.”

“예, 아버님.”

“결심이 서거든 다시 오너라. 아비로서 할 일이 있다.”

“무슨…?”

“그때 가서 말해주마.”

가능성은 열어주었지만 아버지의 인가는 보류인 셈이다.

여불위는 함양에서 소식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어 따로 식객들을 소집했다. 양책의 여불위 저택에는 대략 20명이 넘는 식객이 살고 있었는데, 대부분은 물류 정보를 입수하거나 분석하는 사람들이었고, 때로는 한단이나 함양, 낙양 같은 곳에 나가 상업이나 전쟁 관련 정보를 수집해 오는 세작들이었다. 고대 전쟁은 약탈이 합법적이기 때문에 엄청난 전리품이 상품으로 나온다. 이 전리품은 갑자기 시장에 넘쳐나기 때문에 값이 싸고, 고가 전리품인 경우 여불위 같은 큰손만이 사들일 수 있었다. 더러 왕실 수장고라도 털렸다는 정보가 들어오면 여불위는 큰돈을 준비해 전장으로 달려가야만 했다. 이 밖에도 옥을 가공하는 세공사, 여불위가 사들인 처녀들을 교육시키는 선비, 의원 등이 있었다.

“지금부터 한 달 여유를 주겠소. 천하 패권이 누구에게 돌아갈지 각자 주장해 주시오.”

패권 운운하는 것 자체가 혁명적인 발상이다. 독자들이야 역사를 거슬러 보는 것이니 당연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역사의 현장에 들어서면 장차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하기가 어렵다. 고려 국왕을 찾아온 새카만 얼굴의 변방 무인 이성계가 장차 고려 왕조를 뒤엎을 줄 공민왕이 어찌 알았겠는가. 조선 국왕 선조는 임진왜란이 일어나리란 걸 까마득히 몰랐다. 김구는 광복 후 나라가 분단될 줄 미리 알지 못했고, 이승만도 육이오전쟁이 터지고서야 전쟁이 났다는 걸 알았다.

지금 이 순간, 남북이 통일될 시점을 잡아보라고 과제를 내면 사람마다 다른 답을 낼 것이다. 전문가가 아무리 머리를 싸매도 무당, 점쟁이 수준을 넘지 못한다. 미래 예측이란 이렇게 힘든 것이다. 진나라 인질 영이인이 그 복잡한 한단성에서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눈에 띄었건만, 유독 여불위만이 기화(奇貨)로 본 것처럼 앞날을 보는 능력은 아무나 갖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여불위가 영이인을 보고 한눈에 기화란 직감을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그가 예사 장사꾼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거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여불위는 전국 7웅이 한 나라로 통합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중국사의 대부분은 분열과 통합의 역사다. 하지만 언제가 분열할 때인지, 언제가 통합될 때인지 알기는 어렵다. 춘추시대 수십 개의 나라였던 중원이 전국시대에 이르러 7개국으로 줄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볼 수도 있다. 한번도 통합 제국이 세워져본 적이 없기 때문에 보통 사람의 머리로는 그런 개념을 상상하기도 어렵다.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가 통합 제국이었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주나라 때만 해도 중원에는 주나라 왕의 명령을 듣지 않고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나라가 수없이 많았다. 그러던 것이 이제야 7개국으로 정리된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여불위는 통합 국가를 논하고 있는 것이다.

商王 여불위 22회

기화(奇貨) 가거(可居) - 22

한달 뒤 식객들이 각자 주장을 적은 목간을 들고 모여들었다.

“대인, 세상 일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지금 진나라가 강하다 하나 나머지 6국을 단숨에 칠 만큼 강하지는 못합니다. 더구나 전국(戰國) 4대 군자라는 조나라의 평원군 조승, 제나라의 맹상군 전문, 위나라의 신릉군 무기, 초나라의 춘신군 황헐이 굳게 버티고 있습니다. 또 아무리 허약한 나라라고 해도 영걸이 나면 금세 강국으로 변합니다. 동해의 소국 오나라가 초나라를 짓밟을 줄 누가 알았으며, 월나라가 그 오나라를 치고 패권을 차지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 시국에서는 통일까지 바라볼 수 없습니다.”

이사라는 식객으로 초나라 출신이었다. 그는 여불위가 향하는 도시의 정정을 미리 분석하여 뜻밖의 환난을 당하지 않도록 대비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원래 함양에 들어가는 것도 그의 몫이긴 했으나 여불위는 훗날의 계책을 세우기 위해 그를 잡아두었다.

“통일은 불가능하단 말인가?”

여불위는 기왕 영이인을 진나라 왕으로 만들 것 같으면 최강의 왕으로 만들고 싶었다.

“누가 진왕이 되느냐에 따라 다르지요.”

“예를 들자면?”

“불가능한 비유지만 여 대인 같은 상인이 왕이 되면 전국의 패자가 될 수 있지요.”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건 불가능한 비유가 아니다. 이사가 모르고 있을 뿐이다.

‘내가 진왕 뒤에 앉아 있으면 불가능할 것도 없다. 전쟁이라고 해서 장사하고 다를 게 없다. 장사하듯이 전쟁하면 된다.’

이사 다음에는 추적이 나섰다. 오행설을 제창한 추연의 조카로 그는 귀곡자의 점성술과 복서(卜筮)를 배워 여불위를 위한 길흉을 점쳐주는 식객이다. 그의 숙부 추연은 이때 제나라 제선왕한테서 쫓겨나 연소왕의 초현대에서 국사를 돌보고 있는 중이었다.

여불위는 이사 같은 식객들이 길을 닦아놓아도 선뜻 출발하는 게 아니고, 추적이 점을 쳐 좋은 괘가 나와야만 움직였다. 그런 만큼 추적은 무슨 일이든 점괘를 뽑아 바치는 게 그의 일이었다.

“대인, 이괘를 얻었습니다. 위턱과 아래턱이 씹는 괘입니다. 무얼 씹으시기에 이렇게 강한 괘가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대인께서 말씀하신 시기는 복괘였으니 뒤집어지는 일이 시작되고, 그걸 대인께서 잘 저작(詛嚼)한다는 뜻입니다.”

‘암, 뒤집힐 일이고 말고. 내 팔자도 뒤집히고 영이인의 팔자도 뒤집히고 너희들의 팔자도 뒤집힐 일이다. 이괘 또한 길조로다. 내가 잘 씹어야만 성사된다는 말이렷다.’

나머지 식객들도 저마다 장황한 논설을 늘어놓았다. 제자(諸子) 백가(百家)가 쟁명(爭鳴)하는 시절인 만큼 여불위의 식객 중에는 유가(儒家), 법가(法家), 음양가(陰陽家), 도가(道家)의 대표적인 선비들이 들어와 있었고, 의약의 대가들도 들어와 있었다.

식객들의 논설을 더 듣고난 여불위는 의중을 내비쳤다.

“내 재산은 대략 20만금쯤 된다. 이 정도면 우리 모두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 지금도 장사가 잘 되니 얼마든지 여유 있게 살 수 있겠지. 하지만 우리 한나라는 언제 망할지 모르고, 저 성난 진나라는 툭하면 조나라와 위나라로 쳐들어간다. 대략 수십년 안에 중원은 누군가의 손에 의해 한 나라로 통합될 것이다. 아니, 통합돼야만 한다. 나라가 망한 뒤에는 내가 쌓은 부도 저절로 무너진다. 그래서 나는 지금부터 큰 장사를 시작하려고 한다.”

식객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주인이 왕이나 대통령이 되면 식객(요즘도 쓰는 말로 가신)도 그 아랫자리를 꿰어차는 법이다. 국회의원 되는 것쯤은 여반장이요, 도리어 그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다.

商王 여불위 23회

기화(奇貨) 가거(可居) - 23

“옥이나 팔고 계집이나 파는 장사꾼이 아니라 온 천하를 사들이는 장사꾼이 되고 싶다. 그 천하에 왕도 있고 상경도 있고 대부도 있을 테니, 난 그 위에 서고 싶다. 장사꾼만이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듣기는 좋은 말인데, 대체 무슨 속셈으로 하는 얘긴지 식객들은 멀뚱하게 여불위를 바라보았다.

식객들은 여불위로부터 침식을 제공받는 것은 물론이요, 일정한 보수와 수레와 복식 등 정해진 대우를 받고 있었다. 여불위가 이들을 두고 돈을 쓰는 것은 큰 장사꾼이 되기 위한 포석이었다. 조나라의 평원군, 제나라의 맹상군, 위나라의 신릉군, 초나라의 춘신군 같은 유명한 왕자 공자들은 식객을 1000명에서 2000명까지 두고 그 안에서 장수를 선발하고 군대를 기르고 정치인을 배출하고, 행정가를 뽑아 썼다. 그래서 각각 그 나라의 정권을 좌지우지하고 군권까지 지배했다.

여불위가 이들처럼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장사꾼으로서 기화에 관한 상품 정보나 구매자들의 기호를 조사하는 것쯤은 할 수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가업을 물려받으면서 재력으로는 왕 못지않게 성공하고 싶다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그 꿈을 꿀 때만 해도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지만 한단에서 진나라 인질을 보고 온 뒤로는 그렇지 않았다. 수묵화처럼 흐릿하긴 하나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한 인물을 키워 왕으로 받들고, 그 왕을 중심으로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고 싶다.’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여불위는 이 꿈을 입 밖으로 발설하지 않았다. 식객들이지만 꼭 심복인 것만은 아니었다.

‘이젠 식객 중에서도 심복을 가려야겠구나.’

과연 사정을 모르는 식객들은 여불위가 이제 보석 장사와 여자 장사에 싫증이 난 모양이라면서 엉뚱한 의견을 냈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장사입니다. 별을 따다 팔든 달을 따다 팔든 사고팔면 장사지요.”

표적이 약간 어긋나기는 했으나 여불위는 잠자코 들었다.

“정예 군대를 양성해서 전쟁을 대신하고 우리가 전리품을 차지하면 어떨까요? 장사보다 이익이 클 텐데요?”

옛날 오나라에서 재상을 지낸 오원 밑에 있으면서 초나라를 침략할 때 종군했었다는 호달이라는 식객이었다.

“좋은 생각이군. 할 수만 있다면.”

하긴 전쟁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큰 상행위다. 더구나 이 시대의 전쟁은 전리품 획득이 가장 중요한 전쟁 목적이다. 전리품이란 토지, 성채, 사람, 적의 재산 등 패전국의 우수마발까지 다 포함된다. 여불위가 어렸을 때, 망해가던 주나라가 종주국의 체면을 살려보겠다고 억지 전쟁을 일으켰는데, 전비가 없어 채권을 발행한 적이 있다. 전쟁이 끝나면 전리품을 팔아 이자까지 쳐서 갚아주겠다는 계산이었는데, 그만 전쟁에 이기질 못했다. 결국 채권을 산 백성들의 폭동으로 주나라는 그 바람에 숫제 주저앉고 말았다.

‘나쁘지 않은 아이디어다. 겨우 이윤이나 따먹는 장사에 나도 지쳤다. 그래서 이제는 큰 장사를 해보겠다고 진나라 인질에게 투자하겠다는 말 아니냐?’

조나라 평원군 같은 이는 식객 2000여명을 두고 전쟁이 날 때마다 장수나 군사를 뽑아 자신만의 부대를 편성한다. 평원군이 직접 총사령관이 되어 출전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전쟁에서 승리하면 평원군의 식객들은 전리품을 대대적으로 수거하여 평원군에게 바친다. 전쟁이 뜸하면 살림살이가 궁해지므로 이런저런 트집을 잡아 소국을 들이치고, 트집거리가 떨어지면 조정 안에서 역적을 만들어 저희끼리 후려먹을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농사꾼도 장사꾼도 아닌 평원군이 그 많은 식객을 거느릴 수 있는 비결이 여기에 있다.

商王 여불위 24회

기화(奇貨) 가거(可居) - 24

전리품, 이건 원가도 별로 들이지 않고 거저 줍는 장사다. 고대 전투에서는 가족이나 한 집단이 대오를 이루어 전투를 벌이고, 곧 전리품을 챙겨 갖는 것이 전통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죽음을 무릅쓰고 서로 싸울 수 있었다. 현대전에서는 군사 목표물이 아니면 파괴하지도 않고, 군인이 아니면 표적도 안되지만, 고대 전투에서는 그런 것이 제한되지 않았다. 일단 적의 영토를 점령하면 그 안에 있는 모든 인마(人馬)와 물화(物貨)가 점령군 소유가 된다. 점령지에서는 어느 집이든 마음대로 쳐들어가 물건을 들어내기만 하면 내것이 되고, 눈에 띄는 말이나 여자는 먼저 올라타거나 머리채를 휘어잡기만 해도 주인이 될 수 있었다.

고대에는 전쟁에서 큰 공이라도 세우면 그 땅과 인구를 하사받는데, 1만호라든가 5만호를 봉한다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 1만호며 5만호를 죽이든 살리든 멋대로 하고, 필요하면 마음대로 뜯어먹고 살라는 면허가 봉건제도이다. 그 지역에서만은 입법 사법 행정을 틀어쥔 제왕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장수들은 기를 쓰고 앞장서 달렸던 것이다.

‘세계 정복자’ 칭기즈칸은 타타르 부족을 약탈하고 나서 전쟁의 참맛을 알았다고 하는데, 타타르 부족은 금나라와 교역을 하면서 비단, 장신구, 고급 가구 등 선진 문물을 수입하여 칭기즈칸의 몽골족들이 보지도 듣지도 못한 기화(奇貨)를 많이 갖고 있었다. 이때 그 신기한 물건들을 모조리 빼앗고, 타타르의 미인들을 독차지한 칭기즈칸은 전쟁의 묘미를 느꼈으며, 곧 전 세계를 약탈하기 위해 동분서주했고, 그러다 보니 결과적으로 전 세계를 정복했다는 것이다. 이런 전쟁 문화는 먼 얘기만이 아니라 2차대전과 육이오사변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전쟁에서 이긴다는 것은 장사를 해서 얻는 이익과는 비교가 안되는 거대한 상행위가 되는 것이다. 천금짜리 옥을 구하려면 기껏 흥정을 통해 값을 약간 깎는 수밖에 없고, 그나마 돈이 없으면 사질 못한다. 하지만, 전리품 차원에서 보자면 그냥 뺏어버리면 되는 게 전쟁이다. 그것도 혼자서는 안되니 대규모 집단을 이루어 쳐들어가는 것이다.

여불위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계책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군대도 길러야지만 그보다 덩치 크고 머리 좋은 장수를 키우는 게 유리합니다. 손자나 손빈 같은 장수를 다섯만 보유해도 큰돈을 벌 수 있습니다.”

이사가 호달의 말에 덧붙인 말이다. 여불위가 긍정하는 눈빛을 보이자 이사는 한번 더 입을 열었다.

“앞으로는 전쟁이 자주 일어날 테니 우리도 군대를 양성하여 적극적으로 참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군대를 가지고 있으면 재산을 지킬 수도 있지만 적의 재산을 빼앗을 수도 있잖습니까? 지금 대인께서 다른 나라를 드나드실 때 호위를 하는 무사가 열 명쯤밖에 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는 전쟁터를 피해 다녀 화를 면했지만, 앞으로 늘 그러리라고는 장담하지 못합니다. 하여, 궁수와 검사, 기마대를 합쳐 500명까지 늘려 유사시에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 평소에는 숙식만 제공하다가 전쟁이 나면 각자 알아서 전리품을 챙겨 가지라고 하면 그만입니다. 실제로 평원군이나 맹상군이나 춘신군, 신릉군도 평시에는 군사들에게 숙식만 제공한다고 합니다.”

물론 그네들이야 재상이나 경 같은 고위 벼슬아치이니 백성들을 찾아다니며 적당히 뜯어먹으면 되니까 숙식 제공만으로도 군사들을 마음껏 부릴 수 있다. 하지만 여불위는 권력자가 아니다. 그렇다고 전쟁이 해마다 열려 늘 참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아직은 때가 이르다. 하지만 장수급 몇 명은 휘하에 둘 만한 재력은 된다.

“이사, 자네가 말이야. 경험 많은 장수들 중에서 일 없이 노는 분이 있으면 몇 명 초빙해보게나. 국적 불문하고 돈을 넉넉히 드리고 모시게. 당장은 우리 상단(商團)을 호위하는 일을 해야겠지만, 자네 말대로 멀리 내다보자구.”

商王 여불위 25회

함양궁-1

여불위는 진나라 인질 이인에게 본격적으로 투자할 것에 대비해 장수급 인재 몇 명이 필요하다고 계산했다. 이런 인재를 뽑는 일은 이사에게 맡겼다.

이사는 사실 여불위의 제자는 아니다. 그저 식객이다. 그는 원래 초나라 출신인데 한나라로 유학을 왔다. 그래서 순자(荀子) 문하에 들어갔다.

식객 이사를 알자면 먼저 순자를 알아야 한다. 순자라는 존칭으로 불린 건 후대의 일이고 이름은 순황(荀況)이었는데, 그는 공자나 맹자의 유가학파와는 다른 생각을 하는 인물이었다. 유가는 기본적으로 왕실 귀족의 지배 이론을 대변하는 데 비해 순자는 상인과 공인, 농부들의 이익을 옹호했다. 즉 유가는 인간을 군자와 소인으로 계급을 나누어 마치 지배계급은 모두 군자이고 피지배층, 즉 하급 관리 내지 백성들은 대부분 소인인 것처럼 호도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이데올로기를 제공하는 데 한몫했다. 이것이 유교가 중국과 조선, 일본을 정신적으로 지배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하지만 순자는 유가사상에 반발했다. 그는 성선설을 주장한 맹자와는 달리 성악설을 주장하는 등 유가학파와는 분명히 선을 그었다. 순자는 인간은 본성이 악하므로 열심히 학문을 배우고 마음을 닦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기를 마치 쇠를 숫돌에 갈 듯, 나무를 먹줄로 그은 직선에 맞추어 깎듯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인간이란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동물쯤으로 이해했다. 이익이 있는 쪽으로 몰려가고, 이익이 없으면 떨어져 나간다는 것이다. 모든 정치, 사회 문제는 고도의 이해(利害) 관계일 뿐이며 인간 행동이란 이해를 따지는 계산에 의한 결과일 뿐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순자는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그리고 그 추종세력들 간의 대립을 진실이냐 거짓이냐, 정의냐 불의냐, 진보냐 보수냐, 역사의 발전이냐 후퇴냐 따위로 해석하지 않는다. 그저 이익을 두고 움직이는 세력 간의 다툼이라고 보는 게 순자의 생각이다.

순자의 이러한 생각은 전국(戰國) 시대로서는 파격적인 주장으로 유가나 왕실의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 일거수일투족에 점이나 치고, 왕은 하늘(天)의 대리인인 천자(天子)라는 등 미신이 난무하던 중에도 순자는 유성(流星), 일식(日蝕), 월식(月蝕), 홍수, 가뭄 같은 것을 자연 현상일 뿐이라고 말했다. 일식만 일어나도 죄수들을 방면하고, 가뭄이 길어지면 기우제를 지내고, 심지어 왕이 탄핵되던 그 시대에 말이다.

순자의 학설을 처음 풍문으로 들은 여불위는 즉각 그를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다. 여불위보다 한 살 많은 순자는 마침 그의 고국인 조나라 한단에 머물 때 여불위의 방문을 받았는데, 그는 여불위가 장사꾼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쾌히 맞아주었다.

“순황 선생께서 장사꾼의 방문을 허락해주시다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사실 여불위는 제자(諸子)백가(百家)의 시대인 전국 시대를 살아가는 대상인으로서 유명한 학자들을 많이 찾아다녔다. 공부를 해서 벼슬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 큰 장사꾼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러 학자들을 찾아다니며 담론을 하던 중 맹자의 제자를 찾아갔을 때는 망신만 당하고 쫓겨났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맨아래에 있는 장사꾼은 소인 무리이니 군자의 학을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순자는 도리어 그를 반갑게 맞아주는 것이었다.

“저는 장사꾼입니다. 장사꾼에게 이익이 되는 말씀을 해주십시오.”

여불위는 제자백가를 찾아다니며 이렇게 서두를 꺼내곤 했다. 그러면 그중의 반은 손사래를 치며 달아나기 일쑤였다. 순자같이 만면에 웃음을 띠며 맞아주는 일은 별로 없었다.

“듣던 중 좋은 청이구려. 대개 왕의 덕목이나 벼슬아치의 도리 따위를 말해달라는 허섭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많은데, 당신은 참으로 진실하오. 이익이 되는 말을 해달라, 바로 그 말이 진심이오. 왕이 빨리 죽기를 소원하는 게 누굽니까? 적국의 왕입니까? 아니지요, 바로 그 왕의 자식인 태자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죽어야 제게 왕위가 떨어지니까요. 그래서 수많은 자식들이 아비를 죽이고 왕위를 차지했던 겁니다.”

商王 여불위 26회

함양궁 - 2



“군신 관계도 마찬가지지요. 장사꾼과 고객 간에 서로 팔고 사는 상거래를 하는 것하고 하나도 다름없지요. 군신유의(君臣有義), 그거 공자가 지껄인 거짓말입니다. 신하로서 왕을 죽인 자가 춘추시대만 수십명이 넘어요. 이게 의(義)입니까? 아니면 의가 없어서입니까? 아닙니다. 왕을 죽이면 이익이 되니까 죽이는 겁니다.”

“와, 놀라운 말씀이십니다. 군신관계도 그저 상거래 관계일 뿐이라는 말은 태어나서 처음 들어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충신(忠臣)이 있다 칩시다. 그거, 엄밀히 말해서 충성을 파는 행위입니다. 충성을 팔아서 자리 하나 얻고 제 일신의 이익을 도모하자는 거지요.”

흥겨운 노래도 많으련만 하필 재미없는 용비어천가를 오늘날에도 지겹도록 부르는 사람이 흔하다. 그런 데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말이다.

여불위는 이 대목에서 땀을 흘렸다.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춘추전국시대를 단 한 마디로 요약하는 듯한 순자의 말은 여불위의 가슴에 쏙쏙 들어왔다.

“그래서 왕은 아무리 충신이라고 해도 덮어놓고 믿어서는 안되는 거지요. 왕은 오직 법(法)과 술(術)과 세(勢)로 말할 뿐이지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미처 알아듣지 못하겠습니다.”

“신하나 백성들이 누구나 다 지켜야 할 도리를 법이라고 합니다. 왕은 이 법을 꼭 쥐고 있을 때만이 한 나라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왕이 스스로 법을 무시하고 건너뛰고 거꾸로 적용하면 권위를 잃게 됩니다. 법을 지키지 못하는 왕은 한줌 고깃덩어리에 불과하지요. 화살 한 방이면 죽고 칼 한 번 그으면 베어지는 살코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술은 뭐지요?”

“왕이 신하를 통제하는 기술인 셈이지요. 하지만 술은 가슴속 깊이 감춰두고 누구에게도 보여서는 안되지요. 자식에게도, 부인에게도. 그게 노출되는 순간 아첨하는 무리가 줄을 서게 되므로 누가 내 편인지 알 수가 없어요. 술이 없는 왕은 역시 머지않아 자리를 잃게 됩니다.”

“세는 뭔가요?”

“왕의 힘을 직접 행사하는 것으로 상벌(賞罰)을 말하지요. 상을 줄 일에 반드시 상을 주고 벌을 줄 일에 반드시 벌을 줄 때 왕은 세(勢)를 확실히 잡지요. 그러나 상을 줘야 할 때 주지 않고 벌을 줘야 할 때 주지 않고, 또 거꾸로 상을 줄 필요가 없는 사람에게 과분한 상을 주고 벌을 받을 만한 죄를 범하지 않은 사람에게 무거운 벌을 줄 때 왕은 세를 잃게 됩니다.”

“순황 선생님, 저 여불위도 그렇게 하고자 합니다. 재산으로만 목표로 삼자면 저도 일국의 왕 부럽지 않게 벌고 싶은데 그간 경제를 운영하는 것은 주먹구구였습니다. 이제 법을 시행하고 술을 가질 것이며 세를 이루겠습니다.”

여불위는 진심으로 감동했다. 그가 법가의 주장에 감동함으로써 장차 전국(戰國)이 종료될 수 있는 큰 밑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빨리 알아듣다니, 차라리 함께 공부하십시다.”

“저는 늘 열국을 떠돌아다니는 장사꾼입니다. 선생님, 학문이란 실용적으로 쓰이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 수를 내지요. 선생님 제자 중에 한 명을 천거해주시면 제가 경비를 대 드리고 대신 그 제자로부터 선생님의 학문을 틈틈이 배우겠습니다.”

“그래요?”

이때 여불위가 순자로부터 천거받은 인물이 바로 초나라 출신 문하생 이사(李斯)였다. 그가 사라는 이름을 가진 것은 워낙 분석을 잘하기 때문이었는데 그는 순자 문하에서 한나라 공자 출신인 한비와 어깨를 겨루는 수재였다. 이렇게 해서 여불위는 이사를 얻고 이때부터 순자의 학문인 법가(法家)를 귀동냥하기 시작했다.

商王 여불위 27회

함양궁 - 3

사실 순자의 사상은 그가 처음 주창한 것은 아니다. 그 이전에 이미 진나라에서 재상을 지낸 상앙, 초나라 재상을 지낸 오기(吳起)가 법에 의한 통치를 주장하고 실천했다. 다만 그들은 순자처럼 법(法), 술(術), 세(勢)라는 구체적인 개념을 잡지 못하여 형벌을 혹독히 하는 것으로 통치술을 펼치다가 나라를 부강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들 자신의 목숨을 지키는 데는 실패했다. 두 사람을 이어 이제 순자가 법에 의한 통치술을 완성시킨 셈인데, 이 때문에 세상에서는 이들 세 사람을 법가(法家)라고 불렀다. 나아가 이사의 동창생 한비, 그리고 장차 여불위의 손으로 왕이 되며 중원을 최초로 통일하는 진시황제와 후한의 승상으로서 위나라를 연 조조에게 이어졌고, 마침내 모택동에게까지 그 사상의 일부가 전해졌다.

여불위는 순자를 만나기 이전부터 유가나 도가보다는 법가에 충실했다. 당시에는 그밖에도 묵가(墨家), 음양가(陰陽家), 명가(名家), 종횡가(縱橫家), 농가(農家), 병가(兵家), 소설가(小說家), 잡가(雜家)가 맹렬한 유세를 하며 돌아다닐 만큼 학설이 분분하던 시절이었다. 이런 와중에서 여불위는 장사꾼은 장사꾼이되 법가 사상으로 무장하여 현실 이익을 극대화하는 인물로 성장해왔던 것이다. 이것이 그가 다른 장사꾼과 다른 점이요, 일개 장사꾼으로 머물지 않고 나라도 사고 팔고, 왕도 사고 판다는 개념을 만들어낸 상왕이 될 수 있던 배경이다.

이처럼 전국시대를 꿰뚫는 사상인 법가를 훤히 이해하고 있던 여불위는 자신의 두뇌나 다름없는 식객들과 종횡으로 시사를 논하고 대책을 숙의해 놓았다.

일반 식객을 더 늘리는 건 집사가 돌아오면 맡기기로 했다. 특히 전문기술 쪽으로 더 늘려야 하는데, 여불위는 아무리 사소해 보이는 기술자라도 남보다 다른 기술이면 그 사람을 즉시 식객으로 받아들였다. 이를테면 고용하는 것이다. 그가 최근에 공을 들이는 기술자로는 연나라와 초나라에서 막 시작되고 있는 철검 주조 기술자였다. 무기 개발 기술자들인 만큼 여간해서는 그런 첨단 기술자를 구하기가 어려워 아직도 성사를 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여불위는 청동검을 더 예리하게 만들 수 있는 기술자를 구하다가 마침내 옛날 오나라 땅에서 몇을 구해다 데리고 있으면서 철검 못지않은 청동검을 생산할 수 있도록 했다. 시절이 어수선한 만큼 질 좋은 청동검은 생산하기가 무섭게 비싼 값에 팔 수 있었다.

여불위는 여불위대로 모든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던 중 함양에 갔던 세작들이 돌아온 것은 4개월 뒤였다.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여 대인, 안국군은 아직 장자를 누구로 삼을지 정하지 않았고, 화양부인도 마음을 정하지 않았답니다. 왜냐하면 안국군의 자식 20여 명이 저마다 생모가 있는데, 누구든 제 자식이 왕세손으로 정해지기만 하면 화양부인을 물리치고 영화를 한손에 잡을 텐데 누구 좋으라고 제 자식을 내주겠습니까?”

“올커니. 그것도 옳은 말이라. 세자 안국군의 지위는?”

“왕자가 더 있지만 안국군을 물리치고 야욕을 드러낼만한 상황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왕세손 싸움이 치열합니다.”

“급하구나. 그렇다면 화양부인은 어떤 사람이더냐? 안국군의 사랑은 받고 있더냐?”

“화양부인을 직접 뵙지는 못했지만 안국군은 요즘 다른 빈이나 첩은 만나지 않고 주로 화양부인만 만난답니다.”

“그래? 화양부인은 어떤 여자더냐?”

“초나라 미인인데, 화양부인에게는 언니와 오빠가 각각 한 명 있답니다. 모두 함양에 살고 있고, 형제애가 남달라 궁에서 자주 모인답니다.”

“흠, 그렇다면….”

마음은 정해진 것이다.

商王 여불위 28회

함양궁-4

여불위는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다시 찾아갔다. 아버지는 여불위가 결심하고 난 뒤 해줄 말이 따로 있다고 했다.

“아버님, 원석이 보석이라는 걸 확인했습니다. 적어도 인질 영이인을 진나라 세자의 적자로 세울 수 있는 길은 보입니다.”

“물론 그 다음 계책까지 지금 세울 수는 없겠지. 진나라 왕은 몇 살이나 먹었다더냐?”

“왕이 된 지 45년째로 올해 나이 예순넷이라 합니다. 아버님보다 네 살이나 많습니다.”

“그 늙은이, 아직 안 죽은 게 고맙군. 그러면 왕이 죽기 전에 일을 서두르는 게 좋겠구나. 안국군이 지금은 세자라서 한가하지만 막상 왕이 되면 좌우 세력이 복잡하게 분포되고, 그러다보면 세자 세우는 일이 매우 까다롭게 변할 것이다. 다만 지금 나서면 세자가 아니라 세자의 적자를 세우는 일이니 훨씬 수월하리라.”

“그럼 허가하시는 것이옵니까, 아버님?”

“그렇다. 다만 조건이 한 가지 있다. 아들아, 우리가 상나라 유민이라는 걸 잊지 않고 있겠지?”

“그렇습니다. 어찌 잊을 리가 있겠습니까?”

“상나라 시조 설은 동이족이다. 상나라의 마지막 왕 주(紂)가 희창(姬昌)의 반란으로 끝내 자결하자 우리 상나라 백성은 각지로 흩어져 유민이 되었고, 그뒤 우리는 상인(商人)으로 불리는 가운데 열국을 떠돌며 장사를 하게 되었다. 이곳 한나라는 그 옛날 상나라의 수도 은허가 있던 땅으로 우리 집안은 대대로 이 자리를 지켜왔다. 다만 상나라가 망할 때 무을(武乙) 왕의 차남 기자(箕子)께서 친히 망국의 유민을 이끌고 한터(만슈리아)로 건너가 상나라를 부활시켰으니 그 나라가 바로 조선이요, 지금도 우리 조선은 불멸의 왕국으로 건재하고 있다. 조선에는 네 조상들의 혼이 살아 있으니 그곳에서 너를 도울 사람을 구했으면 한다.”

“아버님, 그러고 싶습니다. 어떻게 해야 조선에서 인재를 구합니까?”

“네 뜻이 그러하다면 내가 알아보마. 이곳 양책에도 조선에서 살다 건너온 우리 상나라 유민이 몇 있다. 그러니 그 일은 이 아비에게 맡기되 네가 도모하는 일이 장차 상나라를 부흥시킨다는 명분으로 조상들께 빌어야만 신명의 조우를 얻어 대업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아버님, 기자는 다른 땅에 가서 상나라를 계승했지만 소자는 바로 상나라의 땅에서 그 혼을 부활시키고자 합니다.”

오랜만에 아버지로부터 조국 상나라 얘기를 듣고 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여불위는 아버지로부터 뜻밖의 가르침을 받고 각오를 더욱 다졌다. 장사를 넘어 이제는 명분까지 얻은 것이다. 그것도 조상들에게 바칠 수 있는 명분을.

여불위는 곧 예물이 될 만한 물건을 직접 꾸리기 시작했다.

‘영이인은 과연 화양부인이나 안국군, 소양왕에게 어떤 이득을 줄 수 있을까?’

화양부인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그에게도 이익이 되는 아이디어를 만들어내야 했다. 또한 열쇠를 쥔 안국군에게도 이익이 되는 길을 찾아보아야 했다. 나아가 가장 중요한 인물인 진나라 소양왕에게도 이익이 된다는 걸 깨우쳐주어야만 일이 성사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화양부인의 주변 인물, 안국군을 따르는 무리며 하찮은 궁인, 문지기들에게조차 영이인이 자신들에게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란 희망을 심어주어야만 한다. 아니라면 뇌물이라도 써야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여불위는 술(術)을 썼다. 오직 화양부인만 만나러 가는 길이라면 의심을 받을 수 있지만 그는 함양에 장사를 떠나는 것으로 꾸몄다. 일이 중요한 만큼 동행하는 인물로 식객 이사와 호달을 지명했다. 이사에게는 함양에 들어가 세작 활동을 하라고 지시하고, 호달에게는 시위무사들을 지휘하도록 했다.

商王 여불위 29회

함양궁 - 5



진나라 인질 영이인이 알려준 대로 좋은 청동검 수백여 자루, 연나라와 초나라에서 사들인 철검 십여 자루, 조나라에서 사들인 대궁 20여 점과 갖가지 모피, 비단과 가죽에 청동으로 만든 갑옷 30여 벌, 조나라산 명마 50필 등 갖가지 명품을 수레마다 가득 싣고, 여불위는 마침내 함양으로 장사를 떠났다.

양책에서 함양으로 들어가자면 낙양을 들르지 않아도 길이 있지만, 여불위는 일부러 길을 돌렸다. 낙양이 비록 쇠퇴한 왕도(王都)이긴 하나 거기에는 여불위가 찾는 인물과 상품이 있었다. 여불위가 찾는 건 왕실에서만 쓰는 고급스러운 그릇이나 거마, 의복, 악기, 노리개, 술 등이었다. 진나라는 원래 주나라의 제후국이었고, 지금은 비록 왕을 자칭하기는 하나 실제로 주나라 같은 진짜 왕은 아니고 멋대로 붙인 호칭일 뿐이다. 그러다 보니 말만 왕이요, 말만 폐하지 종주국 주나라 왕실 같은 법도가 없고, 그런 고급스러운 문화를 알지도 못했다.

또 낙양에는 여불위가 사고 싶은 인물이 있었다. 즉 왕을 모시던 내시와 왕후를 모시던 궁녀를 자신의 식객으로 뽑아야 했다. 그래서 함양 일이 잘 풀리기만 하면 이들 두 사람을 조나라 서울 한단으로 보내 영이인에게 왕실의 법도를 미리 가르쳐둘 참이었다. 물론 당장은 안국군과 화양부인을 설득하기 위해 여불위 자신이 궁중 법도를 배워야 했다.

낙양에서 구한 궁녀와 내시로부터 공부를 해가며, 두어 달 걸려 함양성에 이른 여불위는 그가 지점 삼아 미리 구해놓은 저택에 여장을 풀었다. 그때부터 이사는 따로 세작 두엇을 데리고 함양성을 쏘다니며 정보를 수집하고, 여불위는 함양의 집사와 함께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가져온 물건을 팔기 위해 누굴 만나야 하는지, 어떻게 팔아야 할지 여불위는 함양의 집사와 일꾼들과 길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가 함양에 간 진짜 이유를 들키지 않으려는 수였다.

이튿날, 드디어 함양성을 쏘다니던 이사가 꾀를 내었다.

“대인, 태자 안국군을 바로 만나기는 어렵겠습니다. 또 화양부인도 직접 찾아뵙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럼 누굴 만나란 말인가?”

“화양부인의 친정 언니 목양이 함양성에 살고 있답니다. 남동생으로 양천군이라고 한 명 있지만 마침 제나라로 떠나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니, 일단 목양 부인부터 만나 손을 쓰시는 게 좋겠습니다.”

여불위는 그러기로 하고 이사를 시켜 목양부인의 하인이며 시녀들에게 두루두루 뇌물을 치게 했다. 그런 다음에야 함 하나를 목양부인 앞으로 보냈다. 과연 이 함이 약발을 받을지, 여불위는 초조하게 그 반응을 기다렸다.

이사가 목양부인 집 하인들에게 이 함을 갖다주자 하인들은 뇌물 먹은 값을 하느라고 쪼르르 내원으로 들어가 함을 바쳤다.

“저, 한나라 거상 여불위란 자가 함 하나를 가져왔습니다.”

“장사꾼이 무슨 속셈으로 함을 바친단 말이냐?”

이해관계가 서지 않으면 이렇게 현명한 법이다. 그러나 그것이 오래 가지 못하는 게 문제다.

“부인, 실은 한단에 볼모로 가 있는 왕손 이인이 어머니께 바치는 물건이랍니다.”

“뭐? 이인? 가만, 이인이 누구더라? 아, 그 에미가 죽어 인질이나 보내버리자고 하던 그 아이로구나. 그 아이가 왜 내게 선물을 보내지? 난 한번도 그 아일 보살펴준 적이 없는데?”

목양부인은 함양궁에 같이 살 때도 그리 가깝게 지내지 않던 이인이 무슨 일로 함을 보냈을까 고개를 가로저으면서도 본능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래서 법가가 일어난 것이다.

목양부인은 함을 열어보고는 깜짝 놀랐다.

商王 여불위 30회

함양궁 - 6



“이, 이게 웬 보석이란 말이냐?”

함에는 샛노란 황금 수십근과 빛깔이 고운 보옥 수십점이 가득 차 있었다. 물건 하나하나에 이인이 직접 썼다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이모님께 바치는 물목 : 제나라 임치 산 황금 30근, 조나라 왕이 하사한 국보 1점, 평원군이 선물한 보옥 1점, 양책의 거상 여불위가 주나라에서 사온 것으로 왕후가 썼다는 진주 목걸이 1점, 초나라산 화장품 20여점.

목양부인은 입을 떡 벌렸다.

“이인 그 아이가 머나먼 타국에서 고생이 극심할 텐데, 어찌 나까지 생각한단 말이냐? 제 에미가 없다고 동생 화양이를 제 어미로 알고, 날 이모로 여기는구나. 어서 여불위란 사람을 불러오너라.”

이인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가물가물하건만 뇌물에 눈이 먼 목양부인은 금세 태도가 바뀌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의관을 정제한 채 대기하고 있던 여불위가 당장 달려갔다.

“부인, 양책 상인 여불위, 인사올립니다.”

“고맙소. 이렇게 좋은 예물을 보내준 왕손 이인도 고맙지만 그 먼길을 오신 당신도 얼마나 수고하셨소? 그래, 그간 왕손 이인은 몸 성히 계시던가요? 고국을 그리워하지나 않습디까?”

장사꾼이 무슨 속셈으로 보자더냐는 의심은 그새 싹 가셨다.

이제 여불위가 이 여자의 가슴을 휘저어놓을 차례다. 여기서 성공하면 화양부인을 만날 수 있는 것이고 실패하면 이 자리에서 모든 걸 포기해야 한다.

“부인, 저는 사실 장사꾼이 아닙니다. 실제로는 조나라 총대궁에서 왕손 이인을 모시고 있는 사람인데 조나라 군사들의 이목을 피하고 이곳 백성들의 의심을 덜기 위해 장사꾼으로 위장했을 뿐입니다. 왕손께선 늘 저와 함께 계시면서 공부도 하고 시국을 토론하기도 하면서 모든 일을 상의하십니다. 진나라와 조나라 간에 전쟁이라도 나면 우린 함께 슬기를 모아 살 궁리를 하기도 하지요. 지금 왕손께서는 저를 비롯한 식객 수백명을 거느리면서 조나라 백성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계십니다. 그런데 왕손께서는 자나깨나 어머니이신 화양부인을 그리워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항상 말씀하시기를, ‘나는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어서 화양부인을 친어머니로 알고 살았다. 어서 고국에 돌아가 어머니께 효성을 바쳐야 하는데 아직도 조나라에 붙들려 있으니 이 불효를 어떻게 용서받을까?’ 하시며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불쌍하기 짝이 없습니다.”

새빨간 거짓말이지만, 이 거짓말은 목양부인의 가슴을 뒤흔들어놓았다.

목양부인은 측은한 듯이 머리를 끄덕였다. 듣고보니 슬픔이 확 몰아치는 듯했다.

“그래, 왕손은 편안히 지내시는가요?”

“뭐, 편해봤자 볼모로 계시는 몸이니 그게 어디 편한 것이겠습니까? 더구나 요즘엔 진나라가 조나라를 자주 공격하여, 그럴 때마다 조왕은 왕손 이인을 죽이겠다고 군사를 보내오곤 합니다. 그러나 왕손의 덕과 지혜에 감복한 평원군과 조나라 신하와 백성들이 지성으로 간언을 올려 근근이 목숨을 부지하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고국에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야 오죽하겠습니까? 늘 한숨이지요.”

“조나라 신하와 백성들은 왜 그렇게 우리 왕손을 지키려 한다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조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왕손의 깊은 효성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왕손께선 아버지이신 세자 안국군과 화양부인의 생신날은 물론이고, 그 밖에도 정월 초하룻날과 매월 삭망(朔望;초하루와 보름) 때면 반드시 목욕재계한 뒤 향을 사르고 부모님이 계신 남서쪽을 향해 절하며 부모님의 만수무강을 축원합니다.”

목양부인은 여불위가 바친 보석을 만지작거리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