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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포늪의 일출, 화왕산의 억새, 관룡산의 용선대로 기억된 무박이일
1. 일자 : 2012. 11. 10(토)
2. 장소 : 화왕산(757m), 관룡산(750m)
3. 행로 및 시간
[우포늪 : 06:00-08:00]
[자하곡 위 주차장(09:00) -> 1/2/3 산행로 갈림(09:10) -> 1/2 산행로 갈람(09:18) -> (화왕산성) -> 자하정(09:25) -> (암릉 / 장군바위) -> 안부 삼거리(10:10) -> 배바위(10:10) -> (억새밭) -> 서문(10:17) -> 화왕산(10:26) -> 천문대 갈림(10:40) -> 동문(10:47) -> (중식 -11:02) -> 허준세트장(11:12) -> 이정표(11:27) -> 관룡산(11:51) -> 용선대(12:30) -> 관룡사(12:47-58) -> 옥천매표소(13:30)]
4. 동행 : 홀로, 아름다운산하
< 화왕산 산행을 준비하며 >
언제부턴가 산행의 목표가 되어 버린 100대 명산 완주 산행이 드디어 2곳의 산을 다녀오면 달성된다. 남은 것은 두 곳, 천성산과 화왕산이다. 두 곳 다 경남에 위치해 있다. 경남의 산은 그간 상대적으로 기회가 많지 않았다. 가뜩이나 안내산악회에서 제안하는 횟수가 적은데다, 거리도 멀어 선뜩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무언가 결단이 필요하다는 마음이 들 무렵, ‘아름다운산하’에서 금주 금요일 무박으로 우포늪과 화왕산을 간다기에 예약을 했다. 회사 일이라는 변수가 있지만 일단 저지른다. 하고픈 일이 있으면, 그것이 위법하거나 부도덕하지 않다면, 일단 저지르는 것이 이제나저제나 하고 마음조리는 것보다 나음을 경험이 말해 주고 있다.
때 지난 등산 잡지에 나와 있는 창녕군의 지도를 들여다 본다. 군청을 기준으로 서쪽에 우포늪이 남동쪽에 부곡온천이 위치해 있고, 화왕산은 동쪽 편에 있다. 화왕산 남동쪽으로 관룡산도 보인다. 정방형에 가까운 지형의 서편으로 낙동강이 구불거리고 군의 중앙 남북으로 구마고속도로가 길게 이어진다. 내 기억 속의 창녕은 입사 초 그룹사 견학 시 하룻밤을 묵었던 부곡온천과 국제적 관심지역인 람사르 보존습지, 우포늪을 품고 있는 경관 좋은 조용한 지방 도시이다.
창녕읍에서 바라보면 기암 절벽에 바위들로 병풍이 쳐진 산이 시야에 들어 오는데 이곳이 바로 화왕산이다. 화산 분화구를 중심으로 형성된 평원에는 둘레만 십 리에 이른다는 억새군락이 장관을 이루고, 그 일대를 산성이 둘러 싸고 있다. 환장고개라 불리는 가파른 오르막길을 넘어서면 바위 낭떠러지 위로 10리 억새밭이 웅자를 드러내고 있는데, 봉우리 사이 옴팍한 분지가 온통 억새꽃 하얀 솜이불을 두르고 있다. 장관이 아닐 수 없다.
오늘 산행에서 꼭 찾아야 할 포인트는 화왕산성, 배바위이다. 화왕산성은 가야시대 축조된 성으로 둘레 2.6km, 면적 5.6만평의 군사적 요충지로 1시간이 소요되는 둘레 길은 억새와 함께 걷는 재미를 느끼기에 그만인 곳이라 한다. 화왕산 최고의 명소로 산성 남쪽에 돌출한 거대한 바위덩어리, 배바위에는 천지개벽 때 배를 묶었다는 전설이 서러 있다. 산악회에서 제시한 코스에 두 곳 모두가 포함되어 있으니 행운이다.
화왕산이 산림청 선정 100대 명산에 선정된 사유는 ‘억새밭과 진달래 군락 등 경관이 아름다우며 화왕산성, 목마산성 등이 있고 군립공원인 점 등을 고려하여 선정. 해마다 정월대보름이 되면 정상 일대의 억새평전에서 달맞이 행사가 열림. 정상에 화산활동으로 생긴 분화구 못(용지)이 3개 있음. 석불좌상, 대웅전 등의 보물이 있는 관룡사도 유명’이다.
오늘 일정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우포늪의 일출을 감상한 후 자하곡에서 산행을 시작하여 배바위, 화왕산성을 일주한 후 도성암을 거쳐 자하곡으로 원점회귀하는 코스다. 순수 산행시간은 4시간, 억새의 향연에 취한다 해도 5시간이면 족할 것 같다.
< 희망사항 >
화왕산의 본디 이름은 불뫼, 암봉을 인 정수리 일대가 불꽃처럼 솟아올랐으며, 서쪽으로 트인 낙동강 벌판을 거느린 산이다. 관룡산과 더불어 ㅁ자에서 밑받침을 떼어낸 형국이다. 서편으로 비옥한 낙동강 들판을 내다보는 놓임새로나, 철옹성같이 꽉 짜였으면서도 정수리 일대에 태고의 정밀감이 감도는 앉음새로나, 용지, 화왕산성, 진흥왕척경비 등으로 지리, 역사에 그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어, 명산의 기준으로 높이만을 치세 울 수 없는 본보기인 셈이다.
창녕은 물이 넉넉한 도시라 한다. 우포늪과 낙동강의 수기(수氣)를 누르기 위한 데에서 그 이름이 명명되었다 한다. 오늘 일정은 늪과 산을 아우른다. 우포늪에서 맞는 새벽은 색다른
추억이 될 것이다. 장엄한 습지에서 맞는 일출을 보며 크고 멋진 카메라를 멘 고수들 사이에서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오는 내 작고 초라한 똑딱이가 부끄러울 듯하다. 혹 모를 일이다, 그 부끄러움이 새 카메라로 장만의 계기가 될지도. ^^.
계절은 기울어진 지축을 따라온다. 벌써 상강과 입동을 지났다. 남녘의 산하, 나뭇가지마다 색색의 잎사귀들은 한 밤 냉기에 수액이 바짝 말라 이젠 중력이 버거워, 힘든 짐 벗어 놓고 대지로의 귀환을 준비할 것이다.
억새와 단풍은 가을의 전령이자 계절의 진객이다. 하나는 화려한 색감으로 하나는 무채색의 서정으로 나름의 개성대로 계절을 알린다. 단풍은 내장산에서 이미 관심 밖으로 밀어냈으니, 믿을 건 억새뿐이다. 가을 화왕은 억새의 산이다. 산 산모퉁이 돌아들면 모습을 드러내는
하얀 억새밭, 흰 수술이 한 뼘이나 키를 키워 외피를 밀어 올리고 하늘을 향해 머리를 내민 모습이 산
나그네의 시선을 자극할 것이다. 누런 잎줄기 군무 따라 서걱서걱 청아한 공명, 게으른 산객은 갈 길을 잊고 가을교향곡 속으로 빠져든다. 여인의
가리마 같은 억새 길 속에서 늦가을의 정취에 푹 빠져 보고 싶다.
산악회 홈페이지에 혼자 보기에 멋진 사진이 시선을 자극한다. 특히 우포늪의
멋진 일출 사진은 눈을 확 다시 뜨게 만든다. 밤의 달콤한 잠을 포기하고 나서는 길인 만큼 사진처럼
멋진 일출을 경험할 수 있었으면 더할 나위 없겠다.
< 창녕 가는 길 새벽 풍경 >
밤 11시 40분, 아직도 인파로 붐비는 사당역에 섰다. 평소와는 방향이 반대다. 지금 이 시간이면 술 한잔 걸치고 건너편 안양 방향에서 고개를 좌측으로 길게 빼고 버스를 기다려야 정상인데, 지하철 1번 출구를 지나 예술의 전당 방향으로 걷고 있다. 거리도 마음도 낯설다. 작은 변화에도 마음은 부담이 된다. 문뜩 ‘스트레스’란 말이 떠 오른다. 스트레스는 변화한 환경에 적응할 때 인체가 갖는 부담의 증후를 말한다. 내 몸은 변화가 달갑든 괴롭든 이전의 상태를 유지하려고 애쓴다. 스트레스 호르몬은 위기상태에 몰린 몸이 최대한의 전투력을 갖도록 혈당, 혈압, 심장박동을 상승시킨다 했다. 변화는 달갑지 않은 존재다.
12시가 다 되어 새롭게 인연을 맺은 ‘아름다운산하’동지들과 함께 길을 나선다. 사위가 어둡다. 버스 안은 반은 비었다. 대장은 인상도 나이도 젊은 호남형이다. 내게 관룡산을 가겠느냐고 묻는다. 전화 통화상으론 어려다 하더니 마음이 바뀌었나 보다. 작은 배려가 고맙다. 대강의 일정을 이야기 하곤 편히 쉬라 한다. 잠자는 시간에 가뜩이나 민감한 내가 낯선 환경에서 잠이 쉬이 올 리가 없다. 뒤척인다, 버스 창에 습기가 찬다. 안팎의 온도 차가 크다는 증거다
시원스레 달리던 버스는 성주 휴게소에서 멈춘다. 새벽 3시 지방 소도시의 휴게소는 모든 것이 작다. 휴게소의 크기도, 음식적의 메뉴도 심지어 화장실의 변기 수도 적다. 늘 인파로 붐비는 곳이 한적하니 낯설게 느껴진다. 하늘은 비라도 떨어질 만큼 흐리다. 싸늘한 분위기가 싫어 버스에 오른다. 비로서 잠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여기까지는 산행 전 준비 과정을 기록한 것이고 실제 산행은 이와는 달랐다.)
< 우포늪의 새벽 >
4시 30분 버스가 우포에 멈추자 한기가 스며든다. 셔츠를 바지 안으로 집어 넣고 양말을 종아리까지 올리고 모자까지 덮어쓴다. 그래도 스멀스멀 찾아 드는 한기, 겨울이 오고 있나 보다. 선잠에 취해 비몽사몽 간에도 오래도록 고정된 앉은 자세로 인해 허리의 통증이 감지된다. 평소 장거리 버스 체질이라 생각했는데 아닌가 보다.
6시 대장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내려서 우포의 새벽을 맞자고 한다. 늪을 끼고 20여분 걷다 개울을 건너 물가에 도착하자 깜짝 놀랐다. 족히 100명에 가까운 카메라맨들이 물가의 움직임을 응시하고 있다. 하나같이 고가의 큼직한 카메라를 설치해 놓고 있다. 놀랍다 아! 새벽에... 잠이 확 깬다. 무언가에 미치면 이렇게 되는구나, 미친 산꾼에 미친 사진쟁이들이 벌이는 의식에 나도 일원이 된다. 미명 속에서 어부가 물살을 헤치며 나타난다. 돈을 받고 늪에서 갖가지 장면들을 연출하고 있다. 어슴푸레 나마 멋진 장면이 늪에서 펼쳐지지만 빛이 부족해 카메라는 응답을 거부한다. 좋은 카메라도 별반 다르지 않나 보다. 여기저기서 불만의 소리가 들러온다. 잔뜩 구름 낀 그믐의 늪은 온통 회색빛이다. 어부와 늪보다 난 사진쟁이들의 행동을 관찰하는 것이 더 재미나다.
7시 20분경 먼저 자리를 뜬다. 우포늪의 아침을 홀로 맞고 싶어서이다. 날이 밝아옴에 따라 늪 주변의 다양한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오리떼, 수면을 차고 오르는 물고기, 물가의 나무, 외딴 민가, 늪은 이들과 어울려 고요한 아침을 열고 있었다. 기대한 만큼 감동적이진 않지만 새벽을 희생한 대가로는 충분했다.
< 우포늪의 아침 1 >
< 자하골에서 화왕산 >
우포에서 창녕 읍내를 지나 자하곡에 도착했다. 버스 아저씨의 배려로 맨 위 주차장까지 올랐다. 덕분에 10여분 일찍 출발하는 효과가 나타났다. 키 큰 소나무 숲을 지나 1/2 등산로 갈림에 섰다. 우측으로 길을 잡는다.
나 말고도 관룡산에 간다는 사내가 내 뒤를 따른다. 속도가 빨라 이내 날 추월한다. 배낭 없는 빈 몸이라 그런지 몸이 가벼워 보인다. 길은 계단을 지나 가팔라진다. 전망대 역할을 하는 자하정을 지나며 풍경이 시원해 지더니 길이 암릉으로 변한다. 굽어보는 창원 읍내는 박무로 시야 확보가 쉽지 않다. 대신 좌측 산 방향의 풍경은 화려하다.
< 자하곡 초입의 소나무 숲 >
등산로는 바위가 많은 관악산 응봉능선을 연상시키지만 험한 정도는 이곳이 한 수 위다. 좌우측 주능선 밑으로 거대한 암괴가 험악스럽게 나가온다. 700미터 대의 낮은 산에서 수직의 전율을 느낀다. 암릉 사이로 난 길은 오르는 재미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어느새 길 동무가 되어 버린 인사성 밝은 두 경상도 청년이 전용 사진사가 되어 준다. 씩씩하고 순박한 젊음들을 보는 것은 산에서도 큰 즐거움이다.
< 화왕산의 암릉 길 >
9시 50분 무렵 장군바위로 추정되는 커다란 바위군을 지난다. 멀리 화왕산 정수리가 억새를 이고 내게 손짓하고 있다. 밧줄을 잡고 계단을 타고 어렵사리 능선 삼거리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이른 행보다. 고도는 이미 700미터 중반대로 접어든다. 고도에 대한 부담이 사라지자 마음도 편해진다. 건너편 억새 숲이 한층 가깝게 보인다. 산불 감시탑 우측으로 험하게 솟은 바위지대가 배바위 일 것이다. 이정 표식이 없다. 단지 정상으로 길게 이어지는 억새 길만이 눈에 들어온다.
< 능선 삼거리 바위에서 / 배바위 주변 경관 >
가을의 전령이자 계절의 진객인 억새, 흰 수술과 누런 줄기가 바람과 함께 연출하는 군무는 혼자 보기 아까운 황홀한 풍경이다. 갈 길을 잊고 가을교향곡 속으로 빠져든다. 억새밭 사이로 난 길을 걸으며 영화의 한 장면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다. 화왕의 억새는 기대 이상의 감동을 내게 선물해 주었다.
< 화왕산 억새 숲과 정상부의 전경 >
화왕의 정수리에 섰다. 맑아진 날씨 덕에 이제 창녕 읍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창녕은 산과 물에 둘러싸인 길지임에 틀림없다. 화왕산 정상에서 돌아보는 억새 숲은 빛에 반사되어 넘실거린다. 바람과 빛 억새가 만들어 내는 앙상블에 취해 한참을 정상 어름에서 서성인다.
< 정상에서 돌아 본 억새 밭 / 화왕산 정상에서 >
< 화왕산에서 관룡산 >
화왕산에서 관룡산으로 향하는 길의 거리와 상황을 잘 모르니 마음이 급해진다. 정상 능선을 따라 길을 이어간다. 이곳에서도 억새의 향연은 계속되었다. 천문관측소 삼거리에 선다. 내려보는 경치에 화왕산성이 뱀처럼 구불구불 이어지고 정비 공사가 한창인 고산습지, 용지도 보인다. 그 옆이 창녕조씨득성지 일 것이다.
< 동문 가는 길에 / 돌아 본 화왕산 정상 >
새롭게 축조된 성곽 위에 섰다. 갖가지 형상의 돌 들이 연출하는 조형미가 시선을 자극한다. 이 날 것의 냄새가 짙은 돌들은 세월의 나이를 먹어가며 색이 변하고 운치를 더해 갈 것이다. 역사는 그렇게 흐르나 보다.
< 화왕선성과 주변 모습 >
동문에 섰다. 옥천매표소사까지 5.2km, 드라마 허준 촬영장까지는 0.7km, 남은 시간과 거리를 어림잡아 본다. 집결 시간이 2시이니 시간은 충분하다. 오히려 너무 일찍 도착하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든다. 동문 성곽 위에서 식사를 한다. 늦가을 바람이 매섭다. 모자를 덮어 쓰고 먹는 도시락은 그래도 맛났다.
11시 무렵 동문을 끝으로 화왕산과 작별하고 관룡산으로 향한다. 길은 도로 길로 바뀐다. 차도 드나들 수 있을 정도의 넓다. 드라마 촬영과 산성 공사를 위해 도로가 만들어진 듯 하다. 허준 드라마 촬영장에 도착했다. 특이한 모양의 집 한 체가 촬영장 전체를 압도한다. 나머지 구조물은 인공의 냄새가 강해 접근할 마음도 없다. 방송에서 보는 감동과 실제 촬영장의 이미지는 천지 차이였다.
< 허준 촬영장 세트 >
이어지는 길은 별 특징이 없다. 봄이라면 길가에 핀 진달래로 인해 감흥이 일겠지만 지금은 별 느낌이 없다. 삼거리에 닿았다. 커다란 안내판이 내 위치를 말해준다. 관룡산까지 800미터 남짓의 거리다. 걱정대로 시간이 많이 남는다. 이제부터 우보 산행이다.
3등산로로 접어든다. 완만한 오름이 계속된다. 날씨는 이제 햇살을 걱정할 정도로 화창하다. 좌측 영취산 방향으로 암릉이 이어진다. 천천히 걸어도 12시가 훨씬 못 미쳐 관룡산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은 작은 정상석이 있는 헬기장이다. 이른 점심을 먹는 산객들로 주위는 번잡하다. 시간 여유가 있으나 일단 하산 길에 접어든다.
< 관룡산 정상에서 / 관룡산 주변 풍경 >
< 관룡산에서 옥천매표소 >
화왕-관룡산 등산은 흔히 관룡산에서 화왕산 방향으로 오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오늘은 코스를 꺼꾸로 가는 격이다. 내가 굳이 관룡산을 오르려 했던 것은 용선대, 암릉 위에 자리잡은 석탑이 있는 전망 때문이다.
조심스레 용선대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잘못 내려 가면 곧바로 관룡사로 내려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산 길은 10여분 조망 없는 비탈을 내려간 후 풍경이 트인다. 좌측으로 단풍이 제대로 든 암봉이 병풍처럼 풍광을 자랑한다. 시야가 트이는 곳곳에서 걸음을 멈춘다. 어차피 일찍 하산 한다 하더라도 기다림 말고는 할 일이 없다. 아무리 우보 산행을 해도 30여분 만에 용선대에 당도했다. 그냥 바위에 석탑이 서 있는 줄 알았는데 나무로 데크를 만들어서 불상 일대를 쉼터로 만들어 놓았다. 덕분에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 주변에서 풍경을 즐기며 쉼을 취하는 이들이 많이 목격된다.
주위에 나무로 인한 막힘이 없는 풍광에 부처가 앉아 계시다. 저 커다란 불상을 위한 돌을 어디서 가져 왔는데 신기할 따름이다. 산을 내려와 보니 먼저 내려온 일행이 용선대 부처는 한 가지 소원은 들어 주신다 하는데 무슨 소원을 빌었냐 하고 묻는다. 만약 가능하다면 아들 놈을 위한 바램을 기원하겠다. 공부를 더 잘하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제 삶을 스스로 개척할 지혜를 착실히 쌓아가기를 바래본다.
< 용선대 전경 >
용선대를 지나 산 허리길을 15분 정도 돌아 드니 관룡사 경내로 접어든다. 소나무 숲 뒤로 관룡산 일대의 암릉이 한 눈에 들어온다. 멋진 광경이다. 키 큰 소나무가 만들어 내는 풍광은 늘 근사하다.
일주문을 지나 부도탑을 구경하고는 길을 나선다. 옥천 매표소까지 약 1.7km, 30분에 걸쳐 천천히 걸어 내려오니 길었던 산행이 마무리 되었다. 당초 계획대로 화왕산만 둘러 보고 내려왔다면 심심한 산행이 될 뻔 했다.
< 관룡사 뒤 소나무 숲 / 부도밭 부근에서 >
< 에필로그 >
오후 1시 30분 옥천 매표소에 도착하면서 길었던 우포늪, 화왕산, 관룡산 무박이일의 여정이 끝났다. 우포늪의 새벽은 감동 수준은 아니었지만 즐거운 새로운 경험이었다. 화왕산 배바위능선은 짜릿한 암릉 길의 즐거움을 누리기에 충분했고, 화왕산성 주변의 억새밭은 감동 그 자체였다. 누렇게 넘실대는 억새의 향연은 이런 암산 정상부에 믿기지 않는 보물을 흩뿌려 놓았다. 덤으로 얻은 관룡산은 용선대 바위 난간에 오랜 세월 풍상을 이기고 서 계시는 부처님의 인자한 미소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의미 있는 99번째 백대명산 탐방을 마치고 다시 길에 오르면서도 머릿속은 마지막 손님을 맞을 준비에 언제나처럼 분주하다. 마음은 또 풍선이 된다. 벌써 천성산의 이곳 저곳이 마음 속에 그려진다. 그러다가 문뜩 목표를 달성하면 왠지 공허함이 밀려들 것 같다는 생각이 인다. 채워짐보다는 채워가는 여정이 더 아름다운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