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노의 아메마리아
어린 구노는 음악 신동이라 불렸습니다.
빠리 외방 선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다녔는데 같은 학급에는
구노가 따라잡을 수 없을 소위 ’음악 천재’ 친구가 있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할 때 당연히 그 친구가 음악을 하리라고 생각했던 구노는
신학교에 들어간 친구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헤어졌습니다.
그 후 친구 소식은 사제가 된 그 친구가 빠리 외방 선교회에 들어갔다고...
구노는 그 친구를 만나보고 싶었는데 중국으로 발령받아 갔다는 소식만 접하였습니다.
신앙심이 깊었던 구노는 그 친구를 위해 틈틈이 기도를 했습니다.
오랜 사목 후에 휴가라도 오면 옛 추억을 나누며 차를 함께 마실 수 있을 것이라고.
어쩌면 자신이 그 친구가 있는 중국에 가서 동양 문물도 구경하며
그 친구가 사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습니다.
가끔씩 학교 게시판에는 붉은 글씨로 ".... 순교" 라는 메모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볼 때마다 평화 속에서 주님을 믿는 순박한 사람들은 전율을 금치 못했습니다.
구노도 물론 순교자들을 생각하면 슬프고 가슴 아파했고 그 친구를 생각하면
불안한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선교의 자유가 주어진 중국이기에 내심 안도했습니다.
어느날 이었습니다. 게시판에 그 친구의 이름이 나왔습니다. 빨간 글씨는 아니어서 안심을 했지만
내용을 읽어본 구노는 경악스러웠습니다.
그 친구가 "조선 대목구 주교"로 임명되어 죽음의 땅 "조선"으로 발령 받았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구노는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한번 들어가면 살아 나오기 힘들다는, 아니 거의 불가능하다는,
차라리 순교하기 위해서 조선으로 들어간다는 말까지 횡횡했던
바로 그 "죽음만이 기다리는" 조선으로 들어간답니다.
구노는 날마다 주님과 성모님께 그 친구가 제발 무사히 돌아와
단 한번만이라도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어느 주일날이었습니다.
가족들과 학교 정원에서 산책을 하던 구노는 요란하게 울리는 종소리를 들었습니다.
마음이 불안해졌습니다.
삼종 시간도 아닌데 이렇게 요란하게 종이 울린다는 것은 불길한 징조였습니다.
의례 그랬듯이 순교자가 또 나온 것이 아닐까.... 불안한 마음에 달음질 쳐서 뛰어간 구노는
실신지경이 되었습니다.
게시판에는 이렇게 쓰여있었습니다. "엥베르 주교 조선에서 순교"
눈물이 앞을 가려 서 있을 수 조차 없던 구노는 정신없이 뒷동산으로 뛰어갔습니다.
언제나 변함없이 자비로운 눈길로 우리를 내려다 보시는 성모상앞에서
구노는 목놓아 울며 성모송을 바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Ave Maria는 성모송입니다. 그렇게 친구이자 조선의 주교이자 순교자이며
후일 영광스러운 성인의 관을 쓰신 성 엥베르 주교를 기리며
만들어진 노래가 "구노의 아베마리아"입니다.
위의 이야기보다는 아래 내용이 더 타당한 것으로 여겨 집니다.
1)
구노가 파리 외방선교회 성가대장(지휘자)을 맡고 있던 시기는 1840년대 초기이고 이미 앙베르 주교는 1837년에 한국에 입국하여 1839년에 순교했습니다. 그리고 아베마리아 작곡 시기는 1859년입니다. 이로보아 아베 마리아가 직접적으로 앙베르 주교의 순교와 관계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여기에 앙베르 주교가 아니라 같이 학교를 다녔던 조선 천주교회의 5대 교구장으로 순교한 다블뤼 사제를 추모한 곡이라는 해설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조선에서 생겨난 수많은 순교들에 가슴이 아픈 구노가 작곡한 것이 틀림없는 성가가 [무궁무진세
無窮無盡世]라는 성가입니다. 성가 무궁무진세를 외방선교회 성가대장 시절 작곡했으니 1842년에서 49년 정도로 추정됩니다
2)
친구 사제들이 오지인 중국으로 발령을 받은 일에 이어
박해가 극심한 조선 땅으로 자원했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은 구노가
성모님과 함께 바친 절절한 기도인 것이지요.
그 ‘친구’가 바로 조선교구의 5대 교구장이신
순교자 다블뤼(Daveluy, 1818∼1866) 주교님이십니다.
구노의 출생이 1818년이니 이도 가능한 추측이지요.
파리외방전교회 성가대 악장 시절,
순교를 각오한 친구들의 선교 활동을 기리며 이 곡을 작곡한 구노는,
앵베르, 모방, 샤스탕 3명의 파리 외방선교회 신부들이 순교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무궁무진세에'라는 순교자 찬가를 지어 조선의 순교자들께 헌정했다니
한국 순교자의 열혈 팬입니다.
(아래 글은 학문적으로 정확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보여져 감사한 마음으로 인용합니다.)
조선을 향하는 선교사의 마음 (조광 이냐시오/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파리 외방 전교회’는 박해시대 우리 나라에서 복음을 선포하던 선교회였다. 파리에 있던 이 선교회의 신학교에서는 조선과 베트남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 파견될 선교사를 양성하고 있었다. 파리 외방 전교회 신학교는 이 선교사들이 그리던 마음의 고향이었다.
19세기 후반에 간행된 이 신학교의 성가집에는 달레(Dallet, 1829-1878년)가 작사했다고 전해지는 ‘선교사 출발 송가’가 있다. 이 노랫말을 지은 달레는 「조선천주교회사」를 저술하게 된 사람이다. 이 노랫말에는 새로운 선교지를 향해 죽음을 각오하고 떠나는 선교사들의 마음과 그들을 위한 기도가 잘 표현되어 있다. 이 밖에도 파리 외방 전교회 신학교 성가집에는 조선교회와 관련된 노래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면, 그 성가집 44번의 노래 제목은 ‘조선을 향하여’로 되어있다. 이 노랫말을 우리말로 바꾸어보면 다음과 같다.
“오, 조선이여! 오, 나의 기쁨이여! 오, 나의 새로운 조국이여,/ 나는 너를 보고야 말며/ 너를 위해 내 삶을 바치리라./ 큰 배가 흔들거리며 항구에서 나를 기다리도다./ 안녕, 프랑스여, 나는 너를 떠나노니,/ 순풍이여 네 나래를 펴라./ 나는 거기에서 더욱 아름다운 해변을 찾게 되리라./ 그렇다. 나는 죽어도 살아도 조선인이다.”
이 노랫말에는 조선사람이 되고자 했던 선교사들의 각오가 서려있다. 그리고 그 성가집의 52번은 ‘한 조선 선교사의 귀향’이고, 53번은 ‘머나먼 조선’이란 제목의 노래이다. 그리고 60번은 1866년 병인박해 때에 순교한 아홉 명의 프랑스 선교사를 추모하는 ‘조선의 아홉 순교자’이다. 61번 성가는 그 박해에서 순교한 볼리외(Beaulieu, 1840-1866년) 신부를 특별히 기리는 노래였다. 그리고 브르트니에르(Bretenières, 1838-1866년)나 도리(Dorie, 1839-1866년) 신부의 순교를 찬양하는 노래도 별도로 작곡하여 수록하고 있다. 이 노래들 가운데 후에 성인이 된 볼리외 신부의 순교를 찬양하는 노래의 가사는 이렇게 쓰여있다.
“바다에는 깊이가 있고, 바람에는 보드라운 미풍이 있듯이,/ 하늘엔 숭고한 불꽃이, 땅에는 순교자가 있다네./ 피의 강에서 붉게 피어나는 꽃이여, 조선의 순교자여,/ 첫번째 반열에 오르소서.”
프랑스 작곡가 구노와 조선교회
노랫말이 아무리 좋더라도 좋은 곡이 없으면 음악이 아니다. 선교사들이 지은 가사에 좋은 곡을 붙여준 사람으로는 ‘프랑스 근대음악의 중흥자’로 불리는 샤를 프랑스와 구노(Gounod, C. F., 1818-1893년)가 있다. 구노의 “아베 마리아(Ave Maria)”는 오늘날에도 널리 애창되고 있다. 이 곡에서처럼 구노는 신선하고 밝고 세련된 선율로 많은 성가곡을 지었다. 구노는 달레가 작사한 ‘선교사 출발 송가’를 1843년경에 작곡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구노는 파리 음악원 출신으로 앞날이 촉망되던 청년 음악도였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1666년 이래 회화와 건축 등의 분야에서 젊은 예술가들을 대상으로 경연대회를 개최하여 최고 입상자에게 ‘로마 대상’을 수여하고 3년간 로마에 파견하여 고전·고대의 문화를 연구할 수 있게 하였다. 로마 대상의 음악 부분은 1800년부터 시작되었는데, 1839년에 구노는 이 상을 수상하였다. 이 상을 받은 프랑스 작곡가 중에는 베를리오즈·비제·드뷔시 등 프랑스 근대 음악사를 장식한 쟁쟁한 작곡가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는 1843년 파리 외방 전교회 신학교 성당의 악장(樂長)이 되어, 파리 외방 전교회와 인연을 맺었다. 구노는 신학교 성당에서 봉사하는 것을 계기로 사제의 길을 걷고자 했고, 1847년에 성 슐피스 신학교에 파리 외방 전교회의 외부학생으로 등록하여 신학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선교사의 꿈을 접고 1848년 전교회를 떠났으며, 1850년에는 성 슐피스 신학교마저 자퇴했다. 그뒤 그는 음악에 전념하면서 스승의 딸과 결혼해서 살았다. 그러나 아마도 그의 마음 어디엔가 선교사의 꿈이 남아있었기에 그처럼 아름다운 종교음악을 작곡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작곡가 구노는 조선교구의 제5대 교구장이며 순교 성인인 다블뤼(Daveluy, 1818-1866년)와 같은 시대에 파리 외방 전교회의 신학교에서 살고 있었다. 그들은 틀림없이 서로 아는 사이였으리라. 그러므로 구노는 자신이 머물렀던 신학교에서 배출된 선교사들이 1866년 조선에서 무참히 살해되었다는 소식에 더욱 격앙되었으리라. 이 격앙된 마음을 승화시켜 그는 1869년 조선의 순교자들을 찬양하는 노래를 작곡했다. 구노가 곡을 붙인 우리 성가곡 ‘무궁무진세에’(「가톨릭 성가」, 284번)는 자신이 친애했을 선교사 다블뤼를 비롯하여, 신학교 시절의 동료와 후배들의 순교를 기리는 송가였다. 그 순교자들은 구노가 한때 그렸던 선교와 순교의 꿈을 실현시켜 준 이들이기도 했다. 그리고 구노는 「조선천주교회사」를 쓴 달레와 서로 교감하면서, 달레의 시를 성가로 만들기도 했다.
맺음말
구노가 신학교를 마치고 선교사가 되었다면, 조선 선교사로 파견되어 우리 교회사의 일부를 장식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구노는 이제 아름다운 곡들을 남긴 음악의 거장이 되어 우리와 만나고 있다. 그는 조선 선교지를 밟지는 않았지만, 그의 음악은 조선을 노래했고, 순교자를 노래하며 그 믿음을 밝혀주었다. 구노는 노래를 통해 조선 선교사의 순교에서 받은 자신의 감동을 전이시켜 주었다.
선교사들의 순교는 후배들의 모범이 되어 노래로 읊어졌다. 그들이 남긴 감동은 아름다운 음악을 내었고, 그 음악은 오늘의 우리 가슴까지도 벅차게 한다. 구노 음악의 선율과 조선 파견 선교사들이 불렀던 노랫말을 통해서도 우리는 그 가슴의 떨림을 되살릴 수 있다.
그 지구 반대편, 인종도 모르고 언어도 통하지 않는 나라에 와서
불쌍한 백성들을 위해 하느님의 씨앗을 뿌린 우리의 성인은 지금도 명동 대성전 지하에 잠들어 계십니다
첫댓글 감동 입니다....
아베마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