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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다 메이어(Golda Meir:1898~1978)
골다 메이어는 서인 메이어는 히브리어로 ‘빛을 비추다’ 또는 ‘조명’이라는 뜻이다. 그녀의 본래 성은 러시아식 이름인 마보비치(Mabovitch)였으나, 이스라엘 건국 후 다비드 벤구리온 총리의 권유에 따라 이 히브리어 성으로 개명했다.
이스라엘 건국의 어머니로, 철의 여인으로 불린다. 1969~1974년까지 이스라엘 최초이자 현재까지 유일한 여성 총리를 지냈으며 이스라엘의 건국 기반을 다졌다. 그녀의 이념과 사상의 핵심은 강경한 국가 생존과 안보관의 유대인 민족주의다. 또한 평등한 사회 건설을 이상으로 삼았다.
어린시절:
1898년 5월 3일 러시아 제국령 키예프에서 유대인 가정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모셰 이츠하크 마보비치는 목수 신분이었다. 골다가 태어난 곳은 당시 러시아 제국령이었던 우크라이나 키예프)로 극심한 반유대주의 박해와 폭력을 시달리고 있었다.
그녀는 ‘나의 삶’이라는 자서전에서 어린시절 유대인을 향한 폭력를 따돌리기 위해 자신의 아버지가 두려움에 떨리는 손으로 출입문에 못 질을 하는 모습을 기억하며, 평생 유대인 정체성을 흔들림없이 유지하고 강화하였다.
미국 이주:
1903년 반유대주의를 피하고 생계와 생존을 위해 아버지가 먼저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후 1906년 골다와 어머니와 골다등 남은 가족들도 미국 밀워키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미국이주는 탁월한 영어 습득과 외교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학창 시절:
1906년부터 1912년까지 초등학교 시절부터 학업 성적과 지도력이 뛰어났다. 1912년에는 노스 디비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곤궁한 생활로 어머니는 딸이 학교를 그만두고 결혼해서 어려운 형편을 도와주기를 바랐지만 단호히 거부하였다.
이듬해인 1913년 집에서 나와, 콜로라도주 덴버에 결혼해 살고 있던 친언니 셰이나 코른골드의 집으로 갔다. 그곳에서 노스 고등학교에 다녔다. 언니의 집에서 열리는 유대인 지식인 토론 모임에 자주 참석하면서, 시오니즘, 문학, 여성 참정권, 노동조합 운동 등 다양한 주제를 접하면서 더욱 민족적·정치사회적 가치관을 형성해 나갔다.
1914년 언니와 의견 차이로 다툰 뒤 언니집을 나와, 다시 밀워키 부모 집으로 돌아와 고등학교에 복학하고 1915년 졸업했다. 재학 중에는 노동 시오니즘 청년단체인 ‘영 포알레 시온(Young Poale Zion)’ 회원으로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공개 집회에서 연설을 하며, 사회주의 시오니즘 사상을 받아들였다. 당시는 남존여비가 만연한 때로, 유대인 남성 지도자들로부터 여성비하적 대접을 받기도 했지만 카리스마적 역량과 자질로 압도하며 자기 입지를 굳혀갔다.
1916년, 밀워키 주립 사범학교에 입학해 1917년 무렵까지 공부했다. 이후 밀워키 이디시어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며 노동 시오니즘 사상에 더욱 심취했다. 1917년 7월 9일, 아버지가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면서 당시 21세 미만이었던 골다도 시민권을 자동으로 받으며 미국 시민이 되었다.
결혼:
1917년 12월 24일에는 팔레스타인에 정착할 것을 결혼 조건으로 모리스 메이어슨과 결혼했다. 원래는 결혼 직후 곧바로 팔레스타인으로 떠날 계획이었지만, 미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면서 대서양 여객선 운항이 전면 중단되어 계획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골다는 대신 ‘포알레 시온 활동’에 더욱 힘을 쏟았고, 단체의 기금 마련을 위해 미국 전역을 돌며 모금 활동을 벌였다.
팔레스타인으로 이주, 키부츠 농장생활:
1921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골다는 남편 모리스 메이어슨, 언니 셰이나와 조카, 그리고 어린 시절 친구 레지나와 함께 영국령인 팔레스타인 위임 통치령으로 이주했다. 골다의 부모도 1926년 팔레스타인으로 건너와 이즈르엘 계곡에 있는 메르하비아 키부츠에 정착했다. 골다는 아몬드를 수확하고 나무를 심는 것은 물론 양계장을 관리하고 공동식당 부엌을 맡는 등 키부츠 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강인하고 성실함과 뛰어난 지도력을 인정받은 그녀는 키부츠 대표로 선출되어 노동조합 총연맹인 히스타드루트에 파견되기도 했다.
그러나 남편 모리스가 워낙 고된 생활을 힘들어했기에, 1924년 부부는 키부츠를 떠나 잠시 텔아비브에서 생활한 뒤 예루살렘에 정착했다. 그해 아들 메나헴이 태어났고, 1926년에는 딸 사라를 얻었다. 골다는 1925년 잠시 메르하비아 키부츠로 돌아가 생활하기도 했다.
정치활동:
1.
1928년에는 노동 여성평의회(Moetzet HaPoalot) 서기로 선출되며 정치활동을 하였다. 능수능란한 영어로 1932년부터 1934년까지는 단체의 대표로 미국에 파견되어, 유대인 자립 후원 홍보와 연대를 위해 활동했다.
2.
1934년 미국에서 돌아온 뒤에는 히스타드루트 집행위원회에 합류했고, 이후 정치국장직에 오르며 유대인 조직의 핵심 지도자로 자리 잡았다.
3.
1938년 7월에는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제안으로 열린, 프랑스 *에비앙 회의에 팔레스타인 유대인을 대표하는 참관인 자격으로 참석했다. 에비앙에서 개최된 이 회의는 나치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폭력과 박해를 피하려는 유대인 난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32개국 대표가 모였다. 그러나 대부분 참여 국가들은 유대인의 처지에 공감을 표하면서도 난민 수용은 절대 거부했다. 도미니카 공화국만이 유일하게 최대 10만 명을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했다. 회의가 끝난 뒤 골다는 기자들에게 "내가 죽기 전에 꼭 보고 싶은 것은 단 하나뿐이다. 우리 민족이 더 이상 누구의 동정도 필요하지 않은 세상이 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는 동안 골다는 영국령 팔레스타인에서 시온주의자 운동의 중심 조직이었던 유대인 기구(Jewish Agency)에서 여러 핵심 직책을 맡으며 활동했다. 영국 당국이 1946년 6월 '아가타 작전(1946년 6월 29일 영국 위임 통치령 팔레스타인에서 영국군과 경찰이 유대인 무장 조직과 자치 기관 소탕을 위해 벌인 대규모 군사*경찰 작전)'을 통해 유대인 지도자인 모세 샤레트를 비롯한 유대인 지도부를 대거 체포하여 지도자 자리가 공석이 되었기에 이 자리에 골다가 앉게 된 것이다.
이때 골다는 유대인 기구 정치국장 직무대행을 맡으며 그녀의 정치 인생이 결정적으로 바뀐다. 그녀는 단숨에 팔레스타인 유대인 사회를 대표해 최고 책임자로 수직 상승했다. 이후 모세 샤레트가 UN의 팔레스타인 분할안을 논의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나면서, 골다는 1948년 이스라엘 건국 때까지 사실상 정치국을 이끌었다.
4.
*유대건국 활동:
골다는 어린시절부터 계속 그리고 이스라엘 건국 이전부터 초강경 시오니즘을 주장했다. 영국은 1937년 필 위원회 분할안을 제시하였다. 이것은 ‘두 국가 해법’ 절충안이었다. 내용은 유대인 국가는 갈릴래아 호수 주변부터 지중해 연안의 비옥한 평야 지역(약 20%)을 할당하고, 아랍은 요르단강 서안의 산악 지대 및 남부 네겝 사막등 나머지 영토를 갖는 것이었다.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을 포함하는 지역은 영국이 영구 통제한다는 것이었다. 핵심 거주지와 비옥한 농토를 빼앗기는 제안에 아랍측은 분할안을 전면 거북했다.
유다인측에서 지도자 다비드 벤구리온, 하임 바이츠만 등은 수용하자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골다 메이어는 “영국 놈들이 우리의 땅을 훔쳐 가고 있다” 라고 반발하면서 이스라엘 땅을 모조리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골다는 아랍인들에 대해서 평화롭게 지낼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아랍인들이 가만 있지 않을 게 뻔하니 이스라엘의 생존을 위해 무력으로 이들을 제압해야 한다는 판단이 확고하였다. 골다는 입장은 강경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후에 주 소련 대사, 노동부 장관으로 임명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스라엘 독립선언서 서명 25명, 여성 2명 중 하나로 서명:
1) 골다는 1948년 이스라엘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25중 하나였으며, 단 두명의 여성중의 하나가 되었다.
2) 미국 방문 5,000만불 자금 확보(1948년)
1948년 독립을 계획하여 앞둔 이스라엘은 5개국 아랍 연합군의 침공 위기 앞에서 군대를 무장시킬 자금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당시 유다국 총리였던 골다 메이어는 미국으로 방문하여, 1948년 시카고에서 열린 미국 유다인 연합대회등에서 유대인 사업가와 사회를 상대로 감동적인 모금 운동을 벌여 5,000만 달러라는 거금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5천만 달러는 목표액의 2배였다. 이 자금은 이스라엘이 초기 독립 전쟁에서 승리하고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훗날 이스라엘의 초대 총리가 된 다비드 벤구리온은 이 모금 성과를 두고 그녀를 가리켜 "국가 건설을 가능하게 만든 자금을 가져온 위대한 유대인 여성"이라며 극찬했다.
3) 1948년에 소련 주재 이스라엘 대사로 부임했다.
4) 1949년부터 1956년까지 노동부 장관으로 활동했다.
5) 1956년부터 1966년까지 외무부 장관을 지내며, 이스라엘 정계 동향을 좌우하면서 신생국 중심의 외교 강화에 힘썼다. 골다가 외무장관에 발탁된 이유는 1955년 10월, 다비드 벤구리온 당시 총리는 모셰 샤레트 대신 골다 메이어를 후임으로 임명했다. 당시 벤구리온과 샤레트는 외교 노선을 둘러싸고 갈등과 관계가 악화되어 있었다.
외무부 장관 재임:1956-1966
1) 수에즈 운하 사건
1956년 외무부 장관 취임 직후 맞닥뜨린 가장 큰 사건은 ‘수에즈 사건’이었다. 1956년 이스라엘은 영국·프랑스와 함께 이집트를 공격해 수에즈 운하의 서방 통제권을 장악했다. 이집트 ‘가말 압델 나세르 대통령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티란 해협에서 이스라엘 선박의 자유로운 항행을 확보하려 했다.
골다는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프랑스 정부와 군부 인사들을 상대로 외교 협상을 조율했으며, 유엔에서 수에즈 문제가 논의될 때는 이스라엘 대표단을 직접 이끌었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된 뒤 미국과 소련, 유엔이 공동으로, 이스라엘 철군을 압박하여 이스라엘·영국·프랑스는 결국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2) 아프리카의 신생 독립국들과 외교 관계 구축:
국제사회에서 우호적인 국가를 늘리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동시에 이스라엘의 국가 건설 경험을 새롭게 독립한 아프리카 국가들에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다고 믿어 추진하였다.
(* 그녀는 자서전에서 "우리도 그들처럼 외세의 지배에서 벗어났고, 황무지를 개간하고 농업 생산성을 높이며 관개 시설을 만들고, 가축을 기르고, 함께 살아가는 법과 스스로를 지키는 법을 배워야 했다. 이스라엘은 크고 부유한 강대국들이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해 온 나라였기에 아프리카 국가들에게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었다."고 하였다.)
3) 미국산 최신 무기 수입:
미국으로부터 최신 무기를 도입하는 데에도 큰 노력을 기울여 1962년 백악관으로부터 비공개로 MIM-23 호크 지대공 미사일을 판매 결정을 받아내기도 했다. 반면 소련과의 관계는 그녀의 재임 기간 내내 냉랭한 상태였다.
4) 유색 유대인 차별
1958년 폴란드에서 이스라엘로 유대인 이주가 많이 늘어나자, 중증 질환자와 장애인의 이민을 제한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또한 유색 유대인과 특히 아랍계 유대인을 차별하였는데, 이유는 그들이 타민족 문화에 깊이 동화되어 유대인으로 정체성이 허약한 이유였다.
5) 장관직 이임
1960년대 초 자기 몸에 림프종이 있다는 걸 발견했지만, 1965년에 병이 심하게 악화될 때까지 비밀로 했다. 1965년 말, 67세였던 골다는 림프종 진단을 받으며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자 1966년 1월 외무장관직에서 물러났다. 그 후 마파이당 사무총장으로 활동을 이어갔다.
총리 재임(1969~1974):
1) 취임
1969년 레비 에슈콜(당시 총리)이 갑자기 사망하자 1969년에 연합당은 메이어를 당 대표로 선출하여, 이스라엘 최초 여성으로 제4대 총리가 되어 이후 5년간 총리를 역임했다. 현재까지 최초의 유일한 여성 총리로 그녀는 강경한 안보 정책을 펼쳤다.
2) 통합정부 유지
골다는 1967년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 이후 구성된 국민통합 정부를 그대로 유지했다.
3)’PFLP 지도부, 추적 사살 명령:
1972년 뮌헨 올림픽 당시 아랍 출신 ‘검은 9월단’이 선수촌에 잠입, 이스라엘 선수 11명을 살해했다. 국제사회에 범죄 규탄을 호소했지만, 국제사회의 대응이 미온적이라고 판단하자, ‘모사드(이스라엘 비밀경찰)’에 비밀리에 지령을 내려, 검은 9월단과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PFLP) 지도부를 추적해 사살하라는 비밀 작전을 승인하여 이행되었다.
4) 중동 제 4차 전쟁
1973년 제4차 중동전쟁 때(이스라엘 욤 키푸르 일에 발생)는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상대로 유대 최고 명절인 ‘욤 키푸르’(대 속죄일) 에 기습하였다. 군 지휘부조차 공격이 임박했음을 뒤늦게 파약했다. 예비군을 소집하여 방어선을 구축할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하는 긴급한 상황에서, 이스라엘 군 지휘관이 ‘선제 공격’의 효율성과 핵 사용까지 주장하였으나, 골다 총리는 불허하였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당시 미국의 닉슨 대통령과 키신저 국무장관은 이스라엘이 선제공격을 하지 말 것을 강력히 말했다. 따라서 사전공격을 할 경우 국제사회와 비난과 외면 특히 미국의 외면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 통찰은 적중했다. 미국으로부터 신속한 군사적 지원과 외교적 보호를 얻어내기 위해선 선제공격이 아닌 ‘방어 전쟁’이 필요했고 이 판단은 주효했다.
전쟁 초기 이스라엘 군부 일부는 전황이 불리해지자 핵 사용까지 거론했다. 그러나 골다 총리는 이러한 재앙을 막고, 개전을 지연시켜 외교적인 돌파구와 힘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방어 공격과 예비군 동원 지연, 미국의 군수물자 재보급 지연으로, 이스라엘은 전쟁 초반 막대한 인명과 물자 피해를 보았다. 이후 전세를 역전시키며 아랍 국가들과 평화 협상(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이끌어냈다. 이때 입은 엄청난 피해는 국민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의회에서는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청문회까지 벌였다.
5) 국제 외교 관계
1969년부터 1970년대 초까지 평화 정착 방안을 알리기 위해 세계 각국 정상들과 활발히 회담했다. 미국 리처드 닉슨 대통령, 루마니아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교황 바오로 6세를 차례로 만났고, 1973년에는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를 이스라엘로 초청하기도 했다.
1970년 8월에는 미국이 제안한 평화안을 수용했다. 이 제안은 소모전을 끝내고, 포괄적인 평화협정을 전제로 이스라엘이 '안전하고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국경'까지 철수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에 반발한 우파 정당 가할(Gahal)은 연정을 탈퇴했지만, 골다는 남은 정당들과 연립정부를 계속 유지했다. 1973년 2월 28일 워싱턴을 방문한 골다는 헨리 키신저 보좌관과 만나 이집트가 시나이반도 전체의 주권을 회복하는 대신, 이스라엘은 군사적으로 중요한 일부 지역에 계속 주둔하는 내용의 합의안에 동의했다.
1973년 오스트리아와도 외교 갈등을 겪었다. 당시 약 20만 명의 소련 유대인이 오스트리아를 거쳐 이스라엘로 이주하고 있었는데,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이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국경에서 이들 가운데 일부를 인질로 잡았다. 이에 오스트리아 총리 브루노 크라이스키는 쇠나우에 있던 유대인 수용시설을 폐쇄하자, 골다 총리가 직접 빈을 찾아가 크라이스키도 유대계임을 강조하며 결정을 철회해달라고 요청했다. 분노한 골다는 이스라엘로 돌아갔고, 오스트리아는 몇 달 뒤 새로운 중간 수용시설을 설치했다.
말년* 사망:
1973년 12월 열린 총선에서는 간신히 승리하여 총리직은 유지했지만, 결국 1974년 4월 새 내각이 들어선지 한 달 만에 정국의 안정을 위해서 총리직을 사임했다. 1973년 욤 키프르 전쟁(제 4차 중동전쟁) 초기 대응 실패와 거센 비판으로 불명예 퇴진하였다. 그러나 후에 방어전쟁으로 국제적 공감과 미국의 지원을 위한 것으로 이해되어 재평가되었다.
1974년 은퇴 후 텔아비브에 있는 자신의 소박한 아파트로 돌아가 은거하면서 회고록을 쓰거나 요양했다. 평생을 유대인 국가적 민족적 생존과 안보를 위해 헌신한 그녀는 재물 축적을 하지 않았다. 평생 검소한 생활하였으며, 1978년 림프암(백혈병)으로 사망할 당시 개인 재산이 거의 없었다.
1977년 가을에 예루살렘의 이스라엘 국회의사당에서 VIP 자격으로 안와르 사다트(당시 이집트 대통령)의 연설에 참관하여 악수하고 대화를 나눈 것이 그녀의 마지막 정치활동이었다.
1978년 12월 8일에 예루살렘에서 지병인 림프종이 악화되어 80세로 숨졌다.
12월 12일에 사망지인 예루살렘 근처의 헤르츨 산에 매장되었다.
평가:
-유대혈통 순혈주의자
현재 우익이 지배하는 이스라엘과 달리 건국 초기 정치인으로 사회주의에 기반한 좌익 지도자였다. 유대인 종족들을 차별대우하여 중동계와 아프리카계 유대인을 무척 싫어했다. 백인 유대인이 아닌 유색 유대인들은 동족으로 생각하지 않고 아랍인과 동급으로 멸시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인으로 정체성을 상실하여 아랍화 되어 있고 무지하여 개조가 필요한 *세파르딤(*히브리어로 스페인을 지칭. 스페인과 포르투갈 등 이베리아반도에 정착한 유대인과 그 후손을 말함) 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세파르딤 유대인들은 골다 메이어가 사망할 때 지옥에 간 계집이라고 대놓고 노래를 부르며 기뻐했을 정도였다.
-양성兩性에 대한 입장:
“여성 해방 운동가들은 모두 브래지어를 태우고 남자를 증오하는 정신병자들입니다. 임신이 불행이고 아이를 낳는 것이 재앙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정신 나간 여자들을 어떻게 용인할 수 있겠습니까?”(1972년, ‘오리아나 팔라치’(유명한 이탈리아인 종군기자 작가)와의 인터뷰에서의 발언). 이 발언은 골다가 시오니즘 운동 시절, 남성 우월 지도자들에게 여자란 이유로 차별당하고 업신여겨진 경험에 대해서 불평을 하자, 팔라치가 여성해방운동에서 아주 좋아할 얘기가 아니겠느냐고 논평했을 때 한 대답이다.
당시 골다 메이어가 여성 총리라는 것 때문에 당시 미국 페미니즘 진영에서는 골다 메이어를 페미니즘의 선구자 롤모델로 높게 평가했다. 그러나 정작 메이어는 페미니즘에 대하여 매우 복잡한 태도를 취했다. 메이어는 분명 양성 평등을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여성의 사회 진출을 옹호하였고, 시오니즘 진영에 만연했던 남성 우월주의자들과 계속 맞섰다.
골다는 여성 해방 운동에 대해서는 무척 혐오스럽게 여겨 비난했다. 이스라엘 국내의 페미니즘 활동을 법률로 탄압해 싹을 잘랐으며, 여군 인권 문제에 대해서도 남자 군인도 목숨 걸고 인권에 매달리지 않는다며 차디차게 대했다. 페미니스트들을 강경하게 탄압하는 이스라엘 정부의 공안 정책 수립에 오래전부터 깊이 관여한 메이어 입장에서 가정으로부터 여성의 독립과 낙태의 자유를 주장하는 페미니즘은 민족의 근간을 흔드는, 없애야 마땅한 불온 분자들의 해악 사상 정도였을지도 모른다.
-어록:
“팔레스타인 같은 경우를 다시 찾아볼 수 있을까요? 언제 팔레스타인인들이 독립 국가를 만든 적이 있습니까? 1차 대전 이전에 팔레스타인은 남시리아의 일부였고, 요르단의 일부였습니다. 우리가 팔레스타인을 파괴하고 팔레스타인인들을 내쫓았다고 하지만 팔레스타인인과 팔레스타인 국가라는 것 자체는 없었습니다.”
(사실 이 말은 벤 구리온이 한 말을 골다 메이어가 인용한 것)
골다는 1969년 6월, 제3차 중동전쟁 승리 2주년을 맞아 가진 인터뷰에서 '"팔레스타인인이라는 민족은 존재한 적이 없다."라는 발언을 했다.” 정확히는 "독립된 팔레스타인 국가나 팔레스타인 민족이 존재했던 적은 없었다. 우리가 그들의 나라를 빼앗은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는데, 아무리 이스라엘 총리들이 극단적인 발언들을 쏟아내기는 했지만, 팔레스타인 민족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 경우는 보기 드물었다. 오늘날까지도 그녀의 발언들 중 가장 논란이 큰 발언들 중 하나로 손꼽힌다.
”오늘 밤 태어날 수많은 아랍 아기들을 생각하면 잠을 잘 수가 없다.“
(아랍 사람들 특히 팔레스타인 사람들 입장에서, 매일 태어날 수많은 이스라엘 아기들을 생각하면 어떤 심정일까?)
”아랍 국가들은 싸우고 질 수 있습니다. 돌아가서 다시 싸우면 되니까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오직 한 번 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랍과의 전쟁에서 비밀 무기가 있다고 항상 얘기했습니다. 바로 대안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집트인들은 이집트로, 시리아인들은 시리아로 도망갈 수 있지만, 우리가 도망갈 수 있는 곳은 바다뿐이었고, 그러느니 차라리 싸우는 편이 낫죠.“
자서전:
”My life“
입력:최 마리 에스텔 수녀/20260719/Am10:22
출처:위키백과/인터넷/AI

첫댓글 최근 이스라엘 건국의 어머니 골다 기사를 우연히 읽었습니다.이렇게 위대하다니.... 신명기 7,7절의 땅 주인 본문과 관련, 이스라엘 건국 초기 주요인물을 연속 보고 있습니다. 구약성경과 멀리 있지만 문자로 역사로 떨어질 수 없는 인물들이고 역사라서. 이 곳에 올립니다.저는 많은 공부가 되었지만 벗님들께도 작은 도움이라도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