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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교의 재평가
긴 세월동안 밀교는 불교 속의 고아였다. 또한 불교사 속에서도 늘 이단시되어 왔다. 한 때 대승불교와 불타의 근본 교설사이의 사상적인 면이 문제된 때도 있었다. 그러나 불교학의 진보는 이러한 양자 사이에 가로놓인 표면적인 위화감을 제거하고 양자 사이의 사상적인 격절(隔絶)을 점차로 연속화시켜 갔다.
그러나 원시불교에서 대승불교에로의 가교(架橋)가 나아가서 밀교에까지 미치는데는 그 이상의 긴 세월이 필요할 것이다. 아직도 일본에서는 밀교란 불교의 타락한 형태이며 힌두교와 혼합화한 불교라는 평가가 완전히 불식되지 않았다. 밀교를 이물질로서 불교속에서 철저히 소외시키려는 경향은 19세기의 유럽인들의 학문적인 기호에 의한 점이 크다. 영국,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초기 불교연구의 주류는 팔리어 불전을 중심으로 한 원시불교 연구에 중점이 두어졌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종교에서 찾을 수 없는 합리성을 원시불교 속에서 구하고, 더불어 그 윤리성을 높이 평가했다. 이러한 경향속에서 19세기부터 20세기에 결쳐 유럽의 인도학 및 불교학의 연구자가 밀교를 복잡하고도 음외(淫猥), 비합리적이며 불가해(不可解)한 불교의 사생아라 하여 점차로 백안시하고 멸시하게 된 것도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해외의 밀교연구는 금세기에 들어서 두 번에 걸친 전환기를 겪어 왔다. 그 하나는 1930년대를 경계로하여 일어난 인도 밀교에 대한 평가의 전환이며, 다른 하나는 제2차 세계대전 후 특히 활기를 띤 인도학, 불교학과 같은 인접제과학(隣接諸科學)의 연구성과를 도입한 것이다.
1920년경부터 인도에서는 밀교관계의 산스크리트 교정본이 연이어 출판된 결과, 밀교의 원전연구가 갑자기 활발해졌다. 그리하여 그때까지의 단편적인 지식을 가지고 행하는 밀교비난이 학계에서는 거의 문제시되지 않게 되었다. 또 그와 함께 유렵에서의 불교연구가 겨우 원시불교지상주의를 탈각하여 대승불교가 가지는 종교적, 의례적, 신화적인 성격을 불교의 중요한 요소로서 인식하기 시작한 것도 이 때의 일이었다. 유럽에서의 대승불교에 대한 재인식은 밀교의 재평가로 쉽게 이어져 갔다. 이 시대를 경계로하여 밀교에 대한 편견은 거의 소멸되고 종전 자기가 내린 밀교에 대한 가혹한 평가를 후에 스스로의 손으로 정정하지 않을 수 없는 학자도 나타나게 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후 인도학이나 불교학은 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종래 불교의 연구는 주로 불교교리의 사상적인 해명에 중점이 두어졌었다. 그러나 불교의 사상과 역사를 종교사, 문화사, 사회경제사 등의 관점에서도 연구를 진행하려는 새로운 기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불교의 성립과 전개과정의 탐구를 위하여 그 사회적인 배경이나 경제적인 기반에 눈이 돌려졌다. 그와 동시에 저속하기는 하지만 완강하고, 비합리적이기는 하지만 뿌리깊고, 흙냄새가 물씬 풍기지만 폭넓은 민중의 문화에 대한 고려도 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불교학의 연구방법이 변화됨에 따라 종전에는 불교 속의 이단자로서 입에 올리지도 못했던 밀교가 현재는 그 복합적, 상징적, 토속적인 성격에 의하여 오히려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또 금세기 초에 행해진 인더스문명의 고고학적인 발굴이 계기가 되어 종래의 아리야 문화와는 다른 인도 원주민의 문화와 생활양식의 일단이 해명됨에 따라 비아리야문화가 남긴 발자취를 인도사에서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현재 인도문화는 아리야와 비아리야 문화의 총합에 의하여 구성되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베다에서 우파니샤드, 육파철학, 불교, 자이나교 속에서 주로 아리야문화의 전개의 자취만을 더듬던 지난날 인도학의 공식루트는 이미 하이웨이로써의 의의를 절반은 잃어버렸다. 이와 같이 종래의 인도사의 암흑면으로서, 연구가 무시되기 쉽던 아타르바, 배다, 브라흐마나, 서사시, 푸라나와 같은 인도민중의 문화유산이 겨우 시대적인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물론 우파니샤드의 사상, 원시불교의 교리, 대승불교의 철학적인 문헌속에서 비아리야문화의 흔적을 찾아내는 것은 그렇게 곤란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밀교는 그것들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아리야문화를 세로(縱)로 하고, 비아리야문화를 가로(橫)으로 하는 좌표축이 밀교에 있어서 명료하게 정착하고 있음이 비로서 일반에게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상과 같은 인도학과 불교학의 발전은 당연히 밀교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켜, 마침내는 밀교에 대한 재평가의 문제에 펼연적으로 이어져갔다. 그와함께 사람들의 관심이 라마교에서 밀교로 옮겨진 경우도 많다.
19세기초 티벳의 불교가 세계에 소개된 이래 전에 네팔등 티벳 주변지역을 찾던 연구가, 탐험가들 사이에서는 현지에서의 라마교와의 접촉이 동기가 되어 밀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또 2차 세계대전후의 국제정세의 변화로 밀교는 티벳불교를 통하여, 보다 쉽게 세계각지로 보급되었던 것이다. 즉 1960년 중국(중공)의 티벳 점령에 의하여 티벳에서의 전통적인 교학을 보존하고 이어 지키는 라마승들이 국외로 탈출, 세계각지의 불교나 동양학연구소로 분산했다. 그 결과, 라마교 교학의 기반인 밀교가 자연히 관심을 끌게되고, 그것에 관한 연구도 각지에서 라마승의 조언아래 급속히 진보했다.
이와 같은 사회정세의 변화가 또 밀교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낳게 하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전에는 원시불교 내지 대승불교와 밀교의 비연속성이 그 윤리, 철학, 종교의례, 외모와 같은 점을 중심으로 문제시되었다. 그러나 현재에는 원시불교나 대승불교 속에서 적극적으로 밀교의 원초형태를 찾아내어 그들 사이를 연속화시키려는 노력도 계속되어 꽤많은 성과를 올리고 있다.
밀교가 가지는 복합적인 성격은 헛되이 연구자의 눈에 잡다하고 불가해하다는 느낌을 가지게 하고, 힌두교화란 불교라는 등의 비난을 하게 하는 원인이 되어왔다. 그러나 그 복합적인 성격은 원시불교, 대승불교 뿐만이 아니라, 인도의 제종교 철학과 의례와 세계관의 집약적인 표현형식이며, 그 근저에 불교의 기본적인 성격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조금씩이나마 실증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오히려 대승불교 발전의 필연적인 귀결로서 밀교의 존재가 불교사 속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나아가서 밀교의 복합성에서 생성된 개성존중의 사상은 새로운 세계의 사상적인 지표로서 새롭게 재인식되고 있다.
밀교가 설하는 현실긍정의 사상은 흔히 음외, 쾌락주의라는 오명을 들어왔다. 그러나 부정을 거친 현실긍정, 즉 대락사상(大樂思想)이 가지는 적극성을 재평가하고, 그것을 인류의 생활원리로서 살려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이어서 밀교의 주술적인 성격은 인도의 종교전반에 공통된 성격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그 상징적인 성격은 고도의 사상내용을 간명히 한 표현법으로서, 이것은 민중의 구제, 교단의 확대에도 불가분의 요소가 되고 있다.
밀교가 가지는 철학, 윤리, 의례, 종교형태는 통(通)인도적인 종교와 문화의 기반이며 금후의 인도학이나 불교학의 연구는 이 점을 무시하고 진행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또한 밀교의 비윤리성, 비사회적인 성격은 신비주의적인 종교의 극치로서, 그 순도높은 종교적인 의의가 재확인되었다.
그 외에 밀교경전, 의궤에서 찾아볼 수 있는 백과사전적인 기술이 문화사적인 의미에서 인문과학 뿐만이 아니라, 자연과학의 귀중한 자료문헌이 된다는 점에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이상은 주로 제 2차 세계대전 후 해외에서 출판된 학술서를 중심으로 하여, 밀교의 특성으로서 평가되고 있는 점을 요약했다. 밀교에 대한 눈이 이 2, 30 년 사이에 깨끗이 바뀌어졌음을 통감한다. 일본에서도 특히 제 2차 세계대전 후부터는 밀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뛰어난 연구성과도 몇 가지 발표되었다. 밀교의 역사도 이제 다시 써야 할 시점에 와 있다고 생각된다.
☞위의 글은 “밀교역사密敎歷史 [松長有慶지음 / 허일범역]’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사찰내에서의 밀교의 흔적을 찾아서
밀교는 다양한 표현방식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모습과 색깔을 통해서 부처님의 활동을 전하고 소리를 통해서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며, 상징을 통해서 부처님의 뜻을 전하는 방법을 활용하였다.
부처님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몸과 입과 뜻으로 전하는 삼업의 활동이며, 우리들은 그것을 삼밀의 가르침이라고 한다.
그 중에서 상징을 통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건물의 장엄이나 오륜탑과 부도의 건립, 불상의 조성 만다라의 도화, 법구 등으로 표현되며, 그것들은 표현의 목적에 따라서 더욱더 세분화된다.
건물에는 단청과 조각을 통해서 경전의 가르침을 모습과 색깔로 표현한다.
단청에는 연화나 금강저와 같은 상징물을 그리고 거기에 진언을 써넣는 방식을 택하기도 하고, 우주를 상징하는 다섯가지 색깔을 조화롭게 채색하여 표현하기도 한다.
그리고 상징 문양을 조각하여 건물의 공포를 장엄하는 경우도 있다.
오륜합과 부도의 건립을 통해서 표현할 때는 사각, 원구, 삼각, 방원, 보주의 모습으로 석재를 가공하여 탑과 부도를 만든다. 이때 각각의 도형은 땅과 물과 불과 바람과 허공을 의미하며 그것은 우주의 구성요소를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이다.
만다라의 도화를 통해서 나타낼때에는 경전의 가르침을 우주적 관점에서 색과 형상을 가지고 표현하고 법구는 부처님이나 보살님이 손에 들거나 몸에 지닌 모습을 통해서 각각의 의지를 나타낸다.
1교령륜신의 출현,
1). 명왕과 천신,
일반적으로 명왕과 천신은 분명히 성격을 달리하고 있지만 조선시대 밀교에서 이 두 존격의 관계는 별다른 구분이 없었던 것 같다.
인도나 티벹에서는 부처님을 대신하여 중생교화의 역할을 담당하는 존격을 ‘명왕’이라고 했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호하는 존격을 ‘천신’으로 규정했다.
따라서 밀교경전이 성립되면서 다양한 존격이 등장하는 만다라에서도 ‘명왕’은 교령륜신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천신’은 만다라세계를 수호하는 존격으로 등장하였다.
이와 같이 분명한 성격적 차이를 보이고 있는 명왕과 천신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동질적 성격을 가진 존격으로 만들어졌다.
그 존격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방편으로써 나타나기도 하고, 도량과 불법을 수호하는 존격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건립된 전통사원에 안치되어 있는 사천왕과 금강역사, 그리고 신중탱화중의 예적금강은 명왕에 해당되며, 그 외의 범천, 제석천, 색건나천, 나리연천 등은 천신에 속한다.
그런데 이들 존격들은 나름대로의 역할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같이 도량과 불법수호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사천왕과 금강역사는 원래 불법수호를 위한 교령륜신의 역할이 주어져 있지만 사원에서 이들 존격은 도량수호와 더불어 불법수호를 담당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즉 교화하기 어려운 중생들을 불도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담당하고 있는것이다.
이것은 티벹이나 일본 밀교에서는 찾아보기 힘든예이다.
나아가서 조선시대 신중탱화는 ‘교령륜신’과 ‘천신’이 어우러져 있는 형태로 되어있다.
다시말해서 교령륜신으로서의 예적금강과 천신으로서의 범천이나 제석천이 하나의 집단을 형성하고 있다.
이것 또한 조선시대 존격신앙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인도에서 성립된 경전상에 등장하는 명왕과 천신이외에 우리나라의 토착신인 산신도 도량에 모셔져 있다. 이와 같이 산신이 사찰에 모셔져 있는 것은 사원건립을 위한 토지를 수지한데 대한 감사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밀교경전에서는 수행도량을 확보하기 위해서 얻은 토지에도 신령이 깃들어 있기 때문에 마음대로 남의 토지를 범하지 않고 그곳의 토착신을 위무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수행도량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믿었다.
아마도 조선밀교에서 산신의 수용은 밀교적 관점에서 보면 토착신에 대한 배려이자 그, 존격에 대하여 역할분담을 부여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조선시대 밀교는 명왕이나 천신, 그리고 토착신을 아우르는 공존공생의 신앙체계를 확립하였다고 생각된다.
만약 이와 같은 상호공존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았다면 명왕이나 천신 같은 외래의 존격들은 우리민족의 정서속에 자연스럽게 수용되지 못했을런지도 모른다.
이런점으로 미루어 볼 떄 조선시대 신중들에 대한 신앙은 엄격한 구분을 지어 생각할 수도 있지만 대략 세부적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명왕과 천신과 산신이다.
2). 교령륜신
우리나라 밀교에서 교령륜신의 역할이 부여된 존격으로는 사천왕과 금강역사, 그리고 예적금강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티벹이나 일본에 비하여 교령륜신에 대한 신앙이 미약했던 우리나라의 밀교는 불과 보살에 대한 신앙이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현존의 전통사원에서는 분노형을 한 명왕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신라시대 사천왕사의 건립이나 고려시대 사천왕도량의 개설, 오대명왕이 인각된 금강령의 제작, 그리고 조선시대에 건립된 사천왕문의 사천왕상이나 금강문의 금강역사상 신중탱화의 예적금강 등은 단편적으로나마 명왕신앙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동북아시아 밀교에서 명왕신앙의 대표적인 예로 오대명왕 중에서 부동명왕과 항삼세명왕을 들고 있다.
이들 두 존격은 대일여래의 분노형으로 교령륜신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있다.
우리나라의 밀교에서는 이들 존격에 대한 흔적이 고려시대에 제작된 법구류에서 발견될 뿐 그외의 유물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나 티벹이나 일본에서는 여타의 명왕들과 더불어 밀교신앙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원래 이들 존격이 등장하게 된 것은 힌두교의 제천들을 불도로 이끌기 위한 것이었다. 초회의 금강정명에 의하면 항삼세명왕에게 힌두교의 대자재천을 조복시키기 위한 역할을 부여하고 있다. 즉 석존이 성도했을 때 금강살타는 매우 분노한 모습을 나타내어 세간의 천신들을 항복시켰지만 삼계의 주인 대자재천과 그의 비인 오하후신은 자신들의 위세를 믿고 여래의 가르침을 받들지 않았다고 한다. 거기서 금강살타는 매우 사나운 분노의 모습을 나타내어 대자재천과 오마후신을 절명시켜버렸지만 금강살타의 발에 밟힌 공덕에 의해서 대자재천은 발사마찬나세계에 발사미사라이구사여래로 다시 태어나 성불했다고 한다. 성불한 대자재천은 사바세계에 다시 돌아와서 금강살타의 가르침을 받들게 되었고, 그 때 대자재천부부를 항복시킨 금강살타를 항삼세명왕이라고 일컬었다고 한다.
여기서 주목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교령륜신의 교화대상이 힌두교의 신이라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다고 여겨졌던 대자재천을 조복시키는 위력이 항삼세명왕에게 부여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밀교경전에는 금강살타와 같은 불교 내부의 존격이 특정한 힌두교의 신들을 조복시키기 위해서 분노형으로 나타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힌두교가 존재하지 않은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이들 나라에는 힌두교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힌두교의 신들을 조복시킨다는 테마가 등한시되고, 힌두교신과 비교된 번뇌나 악의 퇴치라는 종교적으로 승화된 해석이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명왕신앙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즉 인도에서와 같이 명왕의 위신력으로 토착종교의 신들을 조복시키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토착신과의 역할분담을 통해서 토착신앙과 조화를 이루면서 중생들을 불도로 이끄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위의 글은 “한국밀교의 상징세계 [허일범 지음-해인행]”에서 발췌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