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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당詩 원문보기 글쓴이: 개밥바라기
박진임의 현대시조 시인 읽기 -문순자 시인론
파도와 외등과 ‘흘러가는 생’
-문순자,『왼손도 손이다』(고요아침, 2016)
박진임
1. 제주 여성의 특수성과 그 문학적 재현
시집을 선물로 받아 시를 읽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수록된 시가 읽는 이를 놀라게 하여 눈을 크게 뜨게 만들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 미국의 대표적인 시인 월트 휘트먼(Walt Whitman)이 자신의 시집 『풀잎』(Leaves of Grass)을 당대 지성을 대표하던 사상가,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에게 보내었을 때 에머슨은 그렇게 눈을 크게 뜨면서 놀라와 했다고 한다. “이 햇빛이 설마 환상은 아닌가 확인해보려고 눈을 비볐다”고 말하며 극찬해마지 않았다. 동시에 “위대한 시인으로서의 당신의 출발을 축하한다”고 덧붙였다. 문순자 시인의 ‘우리시대 현대시조 50인선’ 『왼손도 손이다』 초고를 일독하고 난 후 에머슨의 심정을 상상해 볼 수 있었다. 문순자 시인의 시편들은 놀라울 만치 풍성한 소재와 주제로 채워져 있고 그 시세계는 독특하며 시어들은 정확하고도 아름답다.
‘여성 시인들은 무엇을 꿈꾸고 어떻게 사랑하는가? 제주처럼 아름다운 곳에서는 어떤 시심이 자라나는가? 제주의 여성들은 저 검은 돌 틈에서, 저 거친 바람 속에서 무슨 전설을 먹고 하루를 사는가?’ 이런 질문들이 요즘 필자를 사로잡고 있는 것이었다. 문순자 시인의 시편들을 읽기 전부터 필자가 지녔던 그런 호기심들 때문에 그의 시편들을 펼쳐들 때에 이미 가슴은 조금 설레고 있었다. 그의 시편들을 읽는 과정은 그 잔잔한 설렘의 물결이 제주 밤바다의 파도처럼 거칠게 변하는 것과도 같았다. 문순자 시인은 가슴을 저미는 슬픔을 읊다가(「어떤 비문」), 부당한 역사 앞에 거칠게 항거하다가(「파랑주의보」 연작) 따가운 햇살 아래 염전을 일구는 힘든 삶의 장면을 펼쳐보이다가(「돌염전」) 굼벗냉국 한 사발을 두고 서로 용서하고 아끼는 내외의 정을 읊다가(「굼벗냉국—친정바다 5」), 지상의 마지막 파종을 하는 이의 서글픔과 희망이 뒤섞인 한숨을 그려낸다(「파종」). 시인의 언어가 주술사처럼 불러들이는 바람 앞에 독자는 파랑주의보가 내리기라도 한 듯 마음 문을 단속해가며 그의 시편들을 읽어야 할 것이다. 시편들에 내재되었던 서정의 물결이 집 채 만 한 파도가 되어 몰려오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문순자 시인은 여성이면서 시인이면서 여성시인이면서 제주 여성 시인이다. 문순자 시인의 시편들은 이 다양한 호명의 방식에 당당히 응답하고 있다. 여성이란 무엇인가? 제주 사람의 삶은 어떤 것인가? 제주의 여성은 또 어떤 특수성으로 특징지어지는가? 문순자 시인은 ”여자로 날 것이면 차라리 쉐로 나주“(「허벅장단- 친정바다 4」)하는 탄식 같고 민요 같은 가락으로 제주 여성의 삶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유산으로 물려받은 소금밭을 보살피는 ‘엄쟁이’ 여성으로서 억척스러울 정도로 강한 삶의 긍정을 보여준다. 생명을 품고 가꾸고 애틋해 하는 사랑의 여성성을 재현하기도 한다. 서러운 역사의 시간대에서도 꿋꿋이 살아남아 삶의 아름다움을 다시 다듬고 돌본다. 그러다 문득 돌아서 아이러니와 패러디를 동원하여 삶의 아픔들을 웃음으로 털며 마무리하는 모습도 보여준다(「왼손도 손이다」).
문순자 시인은 제주 섬의 역사를 시적언어로 재현하고 전설을 보존하며 제주의 쓰라린 4.3의 기억을 시편 곳곳에 스며 넣어 기입한다. 인류학이나 역사학의 서술이 스쳐가며 놓쳐버린 기억의 섬세한 장면들을 서정시의 형태로 부활시킨다. 그리하여 그 틈새를 메운다. 더러 그런 ‘증언으로서의 시 쓰기’ 작업은 외부자의 시선이 거칠게 구축한 이론적 틀을 거스르고 그 틀에 흠집을 내기도 한다. 그런 저항과 수정의 작업은 문학이 사회과학보다 삶의 진실에 더 가까이 밀착해있음을 증명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조한혜정 교수의 『한국의 여성과 남성』에는 제주 사회가 모계사회이며 한반도의 가부장제의 한계를 넘어서 있는, 특이한 인류학적 연구 가치를 지닌 공간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사실 그러하다. 제주의 여성들은 가정이라는 사적 공간(domestic sphere)에 한정되어 머무르지 않고 공적인 영역에서 일을 하는 여성들이다. 제주가 삼다도라 하여 돌 많고 바람 많고 여자 많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면 그것은 여성의 수가 절대적으로 남성의 수를 능가하여 그런 것이 아니다. 여성들이 바깥에서 일을 하여 눈에 많이 띄기 때문일 뿐이다. ‘보는 자’로서의 외부자, 특히 외부자 남성들의 눈에 띄는 여성의 수가 많은 것이었을 따름이다.
문순자 시인의 시편들에 등장하는 어머니로서의 제주 여성의 모습은 생명을 존중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거친 삶을 달게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노래하면서 바닷바람 속에 부대끼면서 그 삶을 아름답게 가꾸어간다. 그들은 소금밭의 유산을 고이 받들며 지상에 남아있는 끝 날까지 ”지상의 마지막 파종“을 하는 생명력 넘치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문순자 시인의 시적 영토는 여성, 제주, 시인이라는 세 낱말의 경계선 안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 제주 여성이라는 특수성의 영역은 확장되어 생명을 생명으로 존중하는 건강한 삶의 미학에 가 닿는다. 문순자 시인의 시적화자들은 생명 있는 모든 것들에게 찬양의 합창을 하는 삶의 지지자들이다. 자신의 삶은 물론 타자들의 삶에도 버팀목이 되어주는 존재들이다. 그가 밤바다의 ”집어등“이 되어 물고기를 불러들이는 시간이면 ”밤바다 허락도 없이 별자리를 놓는다.“ (「사수포구1」) 하늘과 바다와 땅이 함께 어울려 노래하는 시간을 문순자 시인은 아름답게 상상한다. 그 하늘과 땅과 바다 사이에 시인이 있다. 그는 역사를 노래하고, 어린 시절 잃은 동생을 그리워하고, 4.3에 떠나보낸 피붙이들을 기억하고, 참깨를 파종한다. 때론 밀감밭을 뒤엎으며 전개되는 자본주의 독재의 시간을 증언하기도 한다. 소금밭의 엄쟁이 일과 농사와 ‘물질’로 자식을 기르고 뭍으로 보내어 공부시킨다. 그 수많은 아름다운 사역을 한꺼번에 이루어내면서 그 체험을 낱낱이 언어로 재현하는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생명의 찬양자이다. 문순자 시인의 시편들을 보자.
2. 왕벚나무와 외등과 비린내
제주 시인에게는 4.3 사건은 평생 동안 시로 재현하면서 한풀이를 시도해야만 할 대상이다. 숙명이며 업보인 것이다. 어느 가을날 십여 년 만에 처음으로 제주에 왔을 때였다. 억새에 감싸인 제주가 너무 아름다워서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그렇게 처참한 살육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이 새삼 의아스럽다”고 언급했던 적이 있다. 트라우마(trauma)를 문학으로 재현하기 위해서는 포도가 삭아 술이 익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간의 경과가 개입해야 한다. 역사가나 언론인이 사건을 기록하는 것은 시간의 경과가 가져다주는 여과장치가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문학적 재현은 인내의 세월을 필요로 한다. 1980년의 광주 사태 발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출간되었던 임철우 소설가의 「아버지의 땅」은 광주의 피의 역사를 증언하고 기록한 중요한 텍스트이다. 그러나 2015년의 한 강 소설가의 『소년이 온다』는 더욱 진한 감동으로 독자에게 다가온다. 그 감동은 시간의 풍화작용의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세월이 흘러 격정이 가라앉은 다음 비로소 정제된 문학적 형상화가 가능해진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현기영 소설가의 『순이 삼촌』이 1983년에 등장하면서 4.3 사건은 거의 삼십 여년 만에 처음으로 문학적 재현의 영토 안에 자리 잡았다고 볼 수 있다. 다시 그로부터 삼십 여년이 지나 시인들은 이제 보다 차분한 목소리로 4.3의 기억을 형상화하고 있다. ‘피’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아직도 덜 아문 상처와 아물어 흉터로 변한 기억을 조금씩 되새기고 있다. 집단 망각의 직물에 구멍을 내는 것이 기억을 서술하는 행위이다. 영화 〈지슬〉이 생생히 재현하여 관객의 꿈자리를 뒤숭숭하게 만드는 것이 그 끔찍한 4.3의 기억이다. 혼자 극장의 어둠 속에서 스크린과 충분히 거리를 둔 상태에서도 그 살육의 장면은 소름을 돋게 하여 눈을 가렸다. 그토록 끔찍했던 기억도 이제는 세월에 삭아 술잔에 따른 맑은 포도주 같고 청주 같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순자 시인의 시편에서 필자는 여전히 ‘피의 냄새’를 읽는다. 시인은 능란하게 그 ‘피의 역사’를 ‘비린내’로 치환시키고 있다. 바다와 옥돔 비늘의 이미지를 끌어들여 마치도 왕벚나무 아래 바다 비린내와 생선 비린내가 진동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든다. 그의 시적장치는 기막히게 정교하다. 제목이 ‘4.3 그 다음날’이 아니었다면 독자는 “외등”과 “난바다”와 “옥돔 비늘”이 4.3과 관련된 등불이요 바다이며 생선 비늘임을 알 길이 없었을 것이다. 서너 가지 단순하고도 선명한 이미지만 제시한 채 그 뒤에 4.3의 원한을 하소연하는 수천, 수만의 목소리를 숨겨두고 있다. 이 시편은 한국 현대시사에 기록되어야 할, 또 한 명의 탁월한 이미지스트(imagist) 시인의 등장 장면이라고 단언한다. 에즈라 파운드가 「메트로 역에서(At a Metro Station)」를 쓰면서 이미지즘(imagism)의 선구자가 되었던 것을 상기해볼 수 있다. “젖은 검은 나뭇가지 위의 꽃잎들”을 제시하며 “군중 속의 영혼들”을 읊었다. “군중 속 얼굴들의 영혼: 젖어 있는 검은 나뭇가지 위의 꽃잎들 (The apparition of these faces in the crowd; Petals on a wet, black bough)” 이란 단 두 줄의 시이다. 서사나 설명을 이미지로 바꾸어버리는 것, 시어들과 그들이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들이 직접 독자의 가슴에 부딪쳐 호소하게 하는 것... 그렇듯 문순자 시인은 효과적인 이미지의 힘을 구사하고 있다.
밤새
난바다가
지켜낸 외등 하나
왕벚나무 그늘 아래 비린내로 나앉아
낱낱이
옥돔 비늘을
훑어내고 있었다.
--「4.3 그 다음날」 전문
가장 핵심적인 이미지는 “외등 하나”이다. 그 외등은 중첩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등은 빛을 발하여 어둠을 밝히는 것이 그 본연의 역할이다. 그래서 등은 어둠에 묻혀 있는 진실을 밝힐 증인의 의미를 지닌다. 하필이면 외등이다. 누구와 더불어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홀로 외로이 지켜내어야 할 진실을 대변한다. 바닷가 왕벚나무 아래의 외등의 이미지는 미국 소설가 스콧 피츠제랄드(Scott Fitzgerald)의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에 등장하는 ‘눈’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등장인물들이 각각의 사연과 교차하는 욕망을 지닌 채 통과해 다니는 ‘재의 계곡’이 소설의 초입에 등장한다. 그 계곡 입구에는 간판이 하나 서있다. 안과 선전용 간판이기에 그 간판에는 안경을 쓴 사람의 눈이 그려져 있다. 그 눈은 ‘재의 계곡’을 통과하는 모든 사람들의 모든 이야기, 그들의 비밀까지 모두 지켜보고 있다. 사람의 눈이 그러하듯 외등 또한 모든 진실을 알고 있다. 더구나 안경이나 눈과는 달리 스스로 빛을 내기도 한다.
그것도 어렵게 지켜진 외등이다. “밤새 난바다가 지켜낸” 외등이다. “난바다”는 형언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던 4.3이라는 사건을 의미한다. 살아남아 “밤새” 거친 파도로 출렁거렸을 그 “난바다”의 기억을 안은 채 외등은 왕벚나무 아래 앉아있다. “비린내”를 거느리고 있다. 그 왕벚나무 아래의 외등에서는 “비린내”가 난다. 종장에 “옥돔 비늘을 훑어내고 있다”는 시상이 등장하므로 그 비린내는 자연스럽게 옥돔의 비린내로 연결된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생선 비린내이지만 심층적으로 그 비린내는 단연코 ‘피 비린내‘일 것이다. 4.3의 피 비린내가 그 왕벚나무 아래 외등에 속속들이 스며있을 것이다. 오승철 시인의 「송당 쇠똥구리」에서도 그러하다. “뻘기꽃 낭자한 터에 누가 나를 격발하라!”고 오승철 시인은 절규했다. 거기 “낭자한” 것이 필경 피일 테지만 시인은 “뻘기꽃”의 이미지로 피를 가린다. 문순자 시인의 “비린내”는 오승철 시인의 “뻘기꽃”의 등가물일 것이다.
“외등”이 할 수 있는 일은 ’빛을 비추는‘것일 뿐이다. 그래서 옥돔을 비춘다. 그 비추는 손길은 섬세하여 마치도 옥돔 비늘을 훑어내듯 하다. ’말 할 수 없는 것,‘ 전달할 수 없는 역사의 숨겨져 온 진실은 그렇게 외등의 빛으로, 옥돔의 비늘로 은밀히 드러날 수밖에 없었으리라. 이제는 말할 수 있는 시대가 왔지만, 어쩌면 절규보다 웅변보다 더 간절하고 더 애절한 4.3의 서사는 저렇듯 “외등”과 “왕벚나무”와 “비린내”와 “옥돔비늘”의 이미지에 실려 드러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제주에서는 4월 3일만 되면 비바람이 몰려온다고 한다. 흐드러지게 피었던 벚꽃이 그 비바람에 한꺼번에 쓸려 나가곤 한단다. 마치도 그 날 스러져간 원혼들이 비로 바람으로 습격하듯 고향을 찾는 것처럼... 바다도 함께 얼려 울부짖을 것이다. 제주 섬 전체의 제삿날 밤, 집집마다 하나, 혹은 둘, 혹은 셋, 심지어 네 분의 위패를 모셔야 한다. 혹은 아버지의, 혹은 큰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의... 바다는 난바다로 변하여 밤새 머리를 쥐어뜯으며 으르릉 거릴 것이다. 시인은 “그 다음날”을 그려낸다. 난바다 뒤에 오는 외등의 불빛이 비추는 “옥돔 비늘”을 그림으로써 역사를 이미지로 바꾸고 분노 뒤에 오는 슬픔을 그린다. 오세영 시인은 미국 기행시 한 편에서 “괴로움 지나면 슬픔 오듯이 알버쿼크(Alberqueque) 지나면 산타페(Santa Fe) 있다”고 노래한 바 있다. 문순자 시인은 명징한 서너 개 이미지의 진주알을 손바닥에 굴리며 크나큰 고통, 그 뒤를 따르는 슬픔을 그려낸다. ’알버쿼크‘ 지나면 ’산타페‘ 오듯 분노 뒤에는 슬픔이 온다. 어쩌면 슬픔 뒤에는 동정이, 동정 뒤에는 용서가, 그리고 용서 뒤에는 화해가 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빌어본다.
“외등”과 “비린내”가 단시조의 형태를 통하여 강렬한 이미지의 도장을 찍둣 4.3을 그렸다면 「파랑주의보」 연작은 개별화된 4.3의 기억들이 모여 서정의 화폭들을 채워나간 시편들이다. 많은 이의 가슴 가슴에 멍울 맺히듯 들이박혔던, 한 어린 사연들은 시인의 언어가 무당굿 하듯 불러내면 모습을 드러낸다. 그 무고한 주검의 주인공들은 시인의 목소리에 자신들의 한을 얹는다. 눌리었던 기억들이 하나씩 고개 들고 일어나 더러 항변하고 더러 울먹이고 있다.
누가 이곳에다 불씨 묻어 놓았을까
겨울비 트럭에 싣던 다랑쉬 오름 중턱
한줄기 연기를 따라
휘적휘적 오르는 바람
아니야, 저건 필시 산사람 행적일 거야
한밤중 영문 모른 채 동굴로 숨어들었던
다랑쉬 4․3의 잔해, 저들의 혼백일 거야
겨울날 분화구가 돌화로로 보이는 것은
수천 평 송당 억새가 항명하듯 젖는 것은
이 땅에 고백을 못한
진눈깨비 저 하안 죄
--「파랑주의보 6」 전문
다랑쉬 오름은 4.3의 억울한 죽음을 대표하는 공간이다. 죄도 없이 영문도 알지도 못하고 스러져 간 이들의 원혼이 겨울비, 한줄기 연기, 젖는 억새, 진눈깨비의 을씨년스러운 풍경화로 드러난다. 다랑쉬 오름 중턱에 이는 바람도 그 연기와 비와 어울려 “휘적휘적 오르는 바람”이다. 그 바람은 어쩌면 고통스러운 역사의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는 시적 화자 자신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분화구는 돌화로로 보이고 그 돌화로에서는 숨겨진 불씨로 인해 한줄기 연기가 오른다. 송당의 억새가 겨울비에 젖는 것도 항명의 몸짓이 된다. 다랑쉬 오름에 속속들이 스민 한스러운 역사 앞에서는 그 어느 생명체도 4.3의 기억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마침내 진눈깨비조차 “하얀 죄”로 읽는다. “고백을 못”했기에 죄를 씻지 못하고 있다. 디랑쉬 오름에 이르러서는 겨울비도 바람도 억새도 진눈깨비도 모두 얼려 역사를 향해 울부짖고 있는 것이다. 이제라도 “고백”하라고! 다랑쉬 오름 분화구에 “불씨”처럼 오래도록 묻혀 꺼지지 않는 4.3의 혼백들이 겨울비 내릴 때 피워 올리는 “연기”처럼 역사의 흔적은 오늘도 운무가 되어 오름에 어려 있다. 겨울비 내리고 진눈깨비 치는 날, 견딜 수 없는 혼백의 조용한 아우성을 시인은 듣는다. 그리고 그 원혼을 달래는 시의 굿판을 벌여놓았다.
「파랑주의보 12」는 「파랑주의보 6」보다 더 구체적인 4.3의 증언에 해당하는 시편이다. 시인은 4.3이후의 제주의 4월을 스케치처럼 단시조 3장에 그려낸다. 그러나 그 함의는 단순하지 않다. 4월이면 겨울동안 얼어붙었던 들녘엔 생명들이 움트고 돋아난다. 땅 속에 묻혀있던 의문들이 고개를 들고 일어나 침묵의 지표면에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다시 4월이 돌아온 것이다. 생물들이 땅을 뚫고 나오는 것처럼 눌러 두었던 의문의 사건도 다시 생각난다. 약동하는 4월의 들녘을 두고 시인은 “의문부호 투성이”라고 노래한다. 중장에서 그 의문의 사건은 구체화된다. 지서의 호출을 받고 집을 나갔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는 4.3 사건의 가장 전형적인 희생자의 모습일 것이다. “목도장”은 그렇게 한 번 불려나갔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된 4.3 희생자의 흔적이다. 그의 존재의 상징이다. 강요당한 자백이나 진술의 상징일 수도 있겠다. 그런 희생자가 한둘이 아니다. 여기저기 돋아나는 풀처럼, 농작물처럼 스러져간 혼백들이 4월의 제주 들녘에 다시 출몰한다. 흘리고 간 “목도장”처럼 시적화자는 곳곳에서 희생의 증거들을 읽는다. 영국 시인 엘리어트(T. E. Eliot) 가 「황무지(the Wasteland)」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했다. 겨울동안 땅 속에 포근히 묻혀있던 기억과 욕망이 섞여서 함께 고개 들고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했다. 엘리어트의 기억과 욕망은 개인의 기억이요 욕망이다. 우리 제주 시인의 4월에 고개 들어 땅을 뚫고 나오는 기억과 욕망은 더욱 고통스러운 집단의 기억이요 역사의 복권을 향한 간절한 욕망이다. 제주의 4월은 한반도의 4.19의 4월과도 또 다르다. 메리 칼도(Mary Kaldo)가 지적했듯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양민의 죽음이 전쟁터에서의 군인의 죽음을 훨씬 상회한다. 집단 살인의 80%는 양민학살의 형태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냉전 이데올로기’의 무고한 희생자들이 흘린 뜨거운 ‘피’의 역사가 전개된 곳이 바로 아시아 아프리카 대륙의 신생국가들이다. 우리의 제주. 우리에게 4.3은 ‘냉전시대의 뜨거운 피’의 한국 판본 서사인 것이다. 그러므로 문순자 시인의 예사롭지 않은 이 단시조는 뜨겁고 아픈 수 겹의 서사를 쟁이고 동여 묶은 응축의 시편이다. 수십 년의 세월을 두고 거친 바닷바람에 쓸리고 파도에 실어 보내고 그러고도 차마 다 못 다스려 터져 나오는 기억의 폭발하는 절규이다. 초장에서는 제주 들녘의 묘사를 보여준다. ‘의문부호’라는 은유를 복선으로 끌어들여 종장의 “왜”와 “모르겠다”를 준비시킨다. 중장에서는 “의문부호”로 제시된 수레바퀴(vehicle)의 수렛살(tenor)을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종장에서 다시 시치미 떼며 마무리를 짓는다. 4월의 “의문부호”를 거듭 환기시키며 독자에게 그 의문의 해답을 주문하고 있다.
4월 제주들녘엔 의문부호 투성이다
지서에 가신다던 아버지 여태 안 오고
왜 여기 목도장 하나
흘렸는지 모르겠다
--「파랑주의보 12」 전문
3 ‘집어등’과 ‘별’
앞서 외등에서 제시된 ‘빛’의 이미지는 다른 시편들에서는 ‘집어등’과 ‘별’의 이미지로 변주되어 나타난다. 바닷가의 외등이나 등대불이 어둠을 밝히는 구실을 한다면 집어등은 고기떼를 유혹하여 몰려들게 만든다. 바다에 집어등이 있다면 하늘에는 별이 있다. 집어등 빛을 보고 고기떼가 몰려들 듯이 시인은 흔들리는 고깃배에 매달린 집어등처럼 어둠 속에 묻혀 가는 제주의 옛 정취를 밝힌다. 잊혀져가는 제주의 내력을 찾아 헤매며 섬세한 시적 언어로 한 편의 작은 역사서를 짓는다. 「사수포구1」 은 서정의 물감으로 그린 한 폭의 풍경화처럼 숨어 있는 듯 한 작은 항구, 제주의 사수포구를 그려낸 시편이다.
파도가 내었을까, 제주시 해안도로
하늘길, 바닷길로
강씨, 문씨 날아와서
털머위 꽃대궁 같은 포구하나 열었다
아버지도 4․3 땅 피를 물려 받으셨나
셋째형 그 이름을 홧술잔에 띄워놓고
당신의 콩팥으로는
걸러낼 수 없던 일엽(一葉)
그래, 이 그리움을 무엇으로 거를까
신장 투석하듯
숨골 따라 거슬러 온 파도
신제주 관통한 내력 몰래물은 알고 있다
이제 가난한 몸, 집어등이 되고 싶다
볏짚에 묻힌 재로 갈피갈피 닦아내면
밤바다 허락도 없이
별자리를 놓는다
--「사수포구 1」전문
작년 제주공항에 내려 처음으로 찾은 곳이 사수포구였던 것 같다. 그저 아늑하고 호젓했던 한 작은 포구, 그래서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아있던 그 포구의 기억이 문순자 시인의 시편으로 인하여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모하는 것을 경험한다. 제주 사람들의 가슴 속에 하나씩 간직되어 있는 아픔과 그리움들이 포구의 형상으로 드러난 것이 ‘사수포구’임을 알게 된다. 시적 화자의 아버지는 4.3으로 인하여 형제를 잃은 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아버지는 그 기억을 걸러내지 못해 홧술로 세월을 보내고 그 홧술은 다시 신장의 병으로 연결되게 된다. 아버지의 그리움은 결국 아버지의 삶을 앗아가고 그 부재의 아버지는 시적화자의 그리움의 대상으로 변모한다. “숨골따라 거슬러 온 파도”가 되어 “신제주 관통한 내력”을 시인은 사수포구에서 읽는 것이다. 사수포구의 원래 이름인 ‘몰래물’이 상징하는 바 또한 그 포구가 안고 있는 숨겨진 아픈 역사와 연결되어 있다. 결국 사수포구는 제주인 모두의 아픔과 한을 간직한 공간으로서 작은 안식처의 구실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털머위 꽃대궁”같다는 표현이 ‘사수포구’가 환기시키는 ‘위로’와 ‘안식’의 서정을 반영한다. ‘신제주’가 제주의 원래모습을 손상시키며 개발된 공간일진대 사수포구는 그 모든 역사를 안고 침묵하는 곳이다. ‘사수포구’가 제공하는 위로의 이미지는 마침내 ‘집어등’의 이미지로 종결된다. 빛을 비추어 물고기들을 몰려들게 할, 그것은 무엇일까? “이제 가난한 몸”이라고 했으니 모진 역사의 파도에 쓸리며 살아남아 이제는 노쇠해진 모든 존재를 지칭하는 것일 테다. 시적화자가 그 가난한 몸일 수도 있고 ‘아버지’일수도 있고 혹은 신제주의 역사를 안고 있으면서도 평화로운 듯 보이는 사수포구 그 자체일 수도 있다. ‘집어등’이 제시하는 빛의 이미지는 “별자리”의 이미지로 연결되며 확장된다. ‘집어등’ 환히 밝혀진 어느 포구의 밤, 부르지도 않았는데 하나씩 둘씩 얼굴을 내밀고 나타나 마침내 밤하늘을 수놓은 병풍처럼 바꾸어줄 별들을 그려볼 수 있다. 부르지 않아도 나타나는 별들을 두고 시인은 “밤바다 허락도 없이 별자리를 놓는다”고 노래했다. 포구가 상징하는 것들과 그런 포구의 사연과 기원에 화답하는 천상의 존재를 확인한다. 하늘과 땅과 바다가 하나로 연결된 조화로운 우주 속에서라면 인간살이의 아픈 기억들은 멀찍이 물러서 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사수포구에 이르면 모두 평화의 꿈을 꾸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지친 몸들도 모두 하나씩 ‘집어등’으로 변하여 어느 물고기 떼를 모여들게 할지 생각해 볼 일이다. 그 포구의 여름밤이라면 삼베 홑이불 들고 나와 ‘한뎃잠’을 청해보고 싶어질 것이다. 신경숙 소설가의 『외딴방』에 새들의 한뎃잠이 묘사되어 있다. 나무 가지 높은 곳에 모여 밤하늘의 별을 우러르며 잠든 새의 무리... 그런 ‘한뎃잠’을 청하자면 자유로운 꿈을 꿀 수 있을 것이다. 박재두 시인의 「별이 있어서」에서처럼 “별 사이를 누비며 날으는 꿈”을 꾸고 싶어질 것이다.
그러나 「사수포구 2」에 이르면 시인은 「사수포구 1」에서 제시한 그런 낭만적 여름밤의 꿈을 산산 조각내어 흩어버린다. “일제 강점기에 절반, 국제공항으로 또 절반, 김밥 옆구리 터지듯 신성, 제성, 동성마을로 흩어진 저 밥알들“을 보자. 그 구절에 이르면 역사의 전환기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흩어져 나간 원주민들의 애환을 발견한다. 일본 제국주의 강점기에 이루어진 개발 과정과 60년대 근대화 과정에서 국제공항을 설립하는 과정에서 땅을 빼앗긴 사람들의 애환을 시인은 ”김밥 옆구리“와 ”밥알“이라는 표현으로 적확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래서 「사수포구 2」에서는 서정을 걷어내고 남은 생존의 처절함이 조촐한 포구를 매개로하여 그려져 있다. 국제공항도 도두봉도 ”가만가만“ 잠들게 한 조용하고 아늑한 그곳이 개발과 확장의 논리 앞에 금새 무력하게 변모되고 말 것을 시인은 이미 예감하고 있는 듯하다. ”시한부 갈치배“에서의 ”시한부“라는 한정의 형용사가 이를 보여준다. 거기에는 마지막 위안처인 작은 포구의 운명을 예감하는 시인의 안타까움이 스며있다. 그 서글픔과 안타까움은 종장에 이르러 ”별도봉“과 ”자살바위“와 ”쑥부쟁이“가 제시하는 절망의 이미지로 연장되어 나타난다. 산봉우리에 올라 ”바다“로 부서져 내린 몸들은 자신의 땅에서 소외된 존재들을 지칭한다. 그 아픈 기억을 안은 채 피어나는 쑥부쟁이는 개발의 논리 앞에 부서져 나간 공간으로서의 제주와 그 제주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상징할 것이다. 어쩌면 그들의 삶에 헌사를 바치는 시인 자신의 모습이기도 할 것이다.
신들이 잠시 떠난 조막만한 어촌이 있다.
제주국제공항, 도두봉 가만가만 재워놓고
시한부 갈칫배 몇 척
가쁜 숨 몰아쉬는.
마을도 쪼개다보면
탑들만 남는 걸까.
일제 강점기에 절반, 국제공항으로 또 절반, 김밥 옆구리 터지듯
신성, 제성, 동성마을로 흩어진 저 밥알들,
보상금 일원 오십 전
그마저 노리는 집게발.
파도에 떠밀린 마을, 별도봉에 닿는다.
자살바위 앞에 서면 ‘다시 한 번 생각하라’
한목숨 부서진 바다
쑥부쟁이 피운다.
--「사수포구 2」 전문
「사수포구」 시편에서 보듯이 상실을 향하는 시인의 동정어린 시선은 다른 시편에서도 변주된 서정으로 나타난다. 바깥으로 밀려난 것, 사라져 가는 것, 잃어가는 것들에게 보내는 동정의 눈길은 모든 생명에 대한 따뜻한 정으로 연장된다. 그리고 그런 생명에의 존중은 인간의 삶 전체를 유목의 생, 즉 떠돌다 잠시 머물렀다 가는 것으로 보는 시인의 자세를 보여준다. 도둑고양이를 ‘흘러가는 생’이라고 호명하는 「유목」을 보자.
사골국물 우리는 해장국집 한 뼘 뒤란
누가 씨받았는지 제 한 몸 다 휘도록
기우뚱, 참나리꽃이
화끈하게 피었다
어디서 흘러왔나, 점박이 도둑고양이
화분에 납작 엎드려 내 눈치를 살핀다
가끔은, 아주 가끔은 모른 척 눈감아준다
내 몸을 떠돌다가 엉덩이에 잠시 머문
유목의 흔적 같은 몽고반점 사라진 지금
점박이, 저들도 분명
흘러가는 생(生)이겠다
-- 「유목」 전문.
생명 가진 모든 것은 “흘러”온 것, “흘러가는 생”이며 “떠돌다가”“잠시 머문”것이다. “내 몸”의 ‘몽고반점’을 “유목의 흔적”으로 읽는 시인이므로 “점박이 도둑고양이”도 유목민으로서의 인간의 존재에서 그다지 멀지 않다고 노래한다. ‘몽고반점’도 ‘점박이’도 유목의 흔적일진대 “참나리꽃”에 스며든 “도둑고양이”를 “모른 척 눈감아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몽고반점으로 또는 점박이의 모습으로 나타난 그 자국들은 모두가 전생의 유랑을 증거하는 흔적들이다. 윤회의 궤도를 따라 어느 별에서 만났다 헤어져 다시 만나고 그러다가 다시 어느 꽃 핀 날에 홀연히 떠나가는 목숨들이다. 그 흐름과 그 물결의 출렁임을 느낀다면 ‘너’와 ‘나’ 사이의 경계를 지워버려야 마땅할 것이다. 모두를 아우르며 함께 흘러가야 할 일이다. ‘참나리꽃’도 ‘점박이 고양이’도 ‘몽고반점’의 유랑의 후예도 모두 함께 봄볕에 나른하게 졸아도 좋을 한 생일 따름이다.
4. 소금밭의 유산
‘어머니’라는 이름은 종교적 상징에 준하는 것일 테다. 입술로 ‘어머니’를 부를 때 누구에게나 그 시간은 제를 올리는 제사장의 시간으로 변모한다. 생명의 기원이면서 존재의 이유이면서 절망속의 빛이면서 그리움의 환유인 것이 ‘어머니’라는 이름이다. 여성시인들이 재현하는 모녀관계는 그러므로 여러 겹의 해석을 요구한다. 그 동일성과 갈등과 화해의 서사도 다양하거니와 딸의 생애는 어머니의 삶의 변주된 반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문순자 시인의 시편에 등장하는 어머니의 생애는 구체적이고 생생한 물질적 상상력 속에 재현되어 있다. 구엄 포구소금밭의 천일염의 물질성이 그 어머니의 노역의 생애와 흘린 땀과 한숨과 실현되지 못한 갈망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고난 속에서도, 아니 어쩌면 고난 때문에 더욱 진하게 짠 맛 풍기며 거칠어진 육질을 지닌 하얀 결정체로서의 천일염이 어머니의 삶의 등가물이다. 문순자 시인의 기억 속에 어머니는 무엇보다도 삼단 같은 검고 긴 머리채를 지닌 젊은 아낙으로 각인되어 있다.
더도
덜도 아닌
아홉 살 눈부처다
삼단 같은 머리칼
알미늄솥 바꾸던 날
덤으로
덤으로 받은
어머니 브로치다
--「꿀풀」 전문
천지에 널린 무성하고 싱싱한 꿀풀을 보노라면 그 꿀풀의 싱싱한 생명력은 우선 아홉 살난 아이의 이미지로 변모한다. 경험 이전의 순수, 그 순수의 화신이 되어 주변의 모든 경이로움에 눈을 크게 뜬 고운 살결의 아이이다. 그것도 시적 화자의 눈동자에 투사된 이미지로서의 아이이다. ‘거울’에 반영된 이미지는 거울의 물질성으로 인해 굴절되거나 과장되거나 미화되기 마련이다. 강물에 비친 나르시스의 모습이 나르시스를 유혹한 것은 어쩌면 그 강물의 물결이 거기 반영된 모습의 흠결을 적절히 가려주어서 일지도 모른다. 시적 화자의 눈동자에 축소되어 더욱 영롱하게 박힌 어린 아이의 고운 모습은 어머니의 저고리를 장식하던 작고 예쁜 ‘브로우치’의 이미지로 연결된다. 그러나 시인은 그 사랑스러운 이미지 뒤에 한국 여성의 슬픈 서사가 담긴 화폭을 병풍처럼 드리우고 있다. 아름다움이 아름다움이기만 하다면 시가 절실해지겠는가? 아름다움을 읊으며 아름다움 이상을 말하지 않는다면 시 또한 미학의 공화국에 동원된 프로파간다(propaganda)에 불과한 것 아닐까? 그렇다면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이라고만 이르는 시인은 미의 독재자의 왕국 성문을 지키는 나팔수에 머물고 말 것 아닌가? 문순자 시인이 꿀풀 이미지 뒤에 배치한 한국 60년대 근대화 시절의 서글픈 풍경화는 시의 아름다움을 간절하게 만드는 핵심적인 요소이다. ‘어머니의 머리채’라는 이미지는 문순자 시인의 예술적 자질을 핀으로 집어내듯 보여주는 핵심적 요소이다. 달비 장수에게 머리채를 팔아 알루미늄 솥 한 채를 얻는다. 거기에 덤으로 브로우치도 하나 얻는다. 그 예쁜 브로우치는 사라지고 없을 테지만 그 기억은 꿀풀의 모습으로 제주 섬 곳곳에 피어난다. 1960년대는 관(官)주도의 1,2,3차 경제개발 계획이 전개되던 시기이다. ‘백만 불 수출과 일인당 천불 국민 소득’ 이라는 구체적인 숫자를 목표로 제시하며 전 국민이 근대화 프로젝트에 동원되던 시기이다. 땀 흘리면서 농사를 돕는 대통령의 모습이 극장의 ‘대한 늬우스’에 늘 소개되던 시절이다. 60년대 ‘달비장수’는 동네마다 다니며 여성들의 머리카락을 사고 신식 냄비를 값으로 치렀다. 그렇게 사들인 머리카락은 가발로 가공되어 수출되곤 했다. 전병순 소설가의 단편 「달비 장수」는 그런 사회 현상을 그려낸 소설이다. ‘여성의 몸’이 한국 근대화의 한 중요한 요소인 것은 봉제 공장과 전자 제품공장에서 일한 여공의 일화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신경숙 소설가가 『외딴 방』에서 노동하는 여성을 그렸다면 여성의 몸 일부가 재화와 교환되던 근대화의 숨은 그림은 이처럼 전병순 소설가와 문순자 시인의 텍스트로 완성되고 있는 것이다. ‘삼단 같은 머리칼’이 ‘알미늄 솥’과 맞바꿈 되는 그 장면이 슬픈 것은 그 머리칼과 알미늄 솥의 상징성 때문이다. ‘검은 머리칼’은 여성성과 여성적 아름다움의 등가물이다. 그리스의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는 『그리이스인 조르바(Zorba, the Greek)』에서 긴 머리칼을 늘어뜨렸던 젊은 여성의 죽음을 탄식한다. 아름다움의 소멸에 대한 그의 탄식은 그녀의 긴 머리카락 때문에 더욱 강조된다.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은, 여성성의 상실, 매혹의 소멸이기 때문이다. 미당 서정주 시인의 「귀촉도」에서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 부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드릴 걸” 구절이 애절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이다. ‘국민교육헌장’에 나타나듯,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여 아름다운 것들을 실용으로 치환시키던 시절, 그 근대화의 과정은 물질적 풍요를 위한 도약과정이면서 고유한 아름다움의 상실 과정이기도 했다. 그 시절에 젊음을 보낸 여성으로서의 어머니의 이미지가, 그 어머니의 자태를 잠시 환히 꾸며 주었을 브로우치의 이미지가 세월이 흐른 후 꿀풀로 다시 피어나 있다. 이처럼 문순자 시인은 한 편 아기자기한 소품에 불과할 수도 있는 그리움의 서정시를 풍부하고 함축적인 서정시로 격상시킨다. 자연이 환기시키는 개인적 서정과 아름다움을 아우르면서 동시에 역사의 숨겨진 슬픈 일화를 넌지시 제시하는 복합적인 시편이 「꿀풀」이다. 단시조 세 줄이 이리도 많은 이야기를 슬프고도 아름답게 전개할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지 않은가?
그렇게 젊음도 아름다움도 세월에 내어주고 어머니의 삶은 “밭머리”와 “숨비소리”의 한생애로 변화해 갔을 것이다. 제주의 구엄과 신엄은 소금밭을 가꾸는 ‘엄쟁이’들의 마을이었다. 엄쟁이 어머니는 큰 딸에게 그 소금밭을 유산으로 물려준다고 한다. 어머니가 전 생애를 바쳐 가꾼 소금밭을 물려주는 일은 그 어머니의 생애에 스민 사연과 꿈과 한숨과 눈물, 그리고 보람까지 몽땅 물려주는 일일 것이다.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한과 슬픔을 그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풀어내는 시편으로 「새조개」를 읽는다.
날아온 섬 비양도엔
바다 속에도 새가 있다
70년대 새마을 풍 빚잔치에 넘어간
납작한 슬레이트지붕 살짝 흘린 조개가 산다
하늘 아래 한 지붕, 모래펄 속 새조개
어머니 한생애도 밭머리 파도로 앉아
또 하루 해감을 하듯 숨비소리 흘렸느니
섬도 간절하면 다홍빛 새가 되는 건지
내 안을 검색하는 해안초소 서치라이트
천 년 전 예고도 없이
날아든 비양도처럼
--「새조개」 전문
제주도의 서편에 ‘비양도’라는 작은 섬이 있다. 제주도에서도 배를 타고 가야 닿는 섬이다. 시인은 “천 년 전 예고도 없이 날아든”섬이라고 노래한다. 한자의 어원을 찾아보면 날 비(飛)자가 씌었으니 날아든 섬에 틀림없다. 섬 속의 섬, 외딴 섬이 그리움의 대명사인 것은 “해안초소 서치라이트”와 “다홍빛 새‘의 이미지를 통해 알 수 있다. 비양도는 홀로 바다에 떨어져 앉아 외로운 섬이다. 그 섬의 외로움과 간절함은 ”해안초소 서치라이트“를 ”다홍빛 새“로 변화시킨다. 서치라이트는 시적 화자의 내면에 숨은 그리움과 간절함을 비추어 드러낸다. 서치라이트의 불빛을 다홍빛 새의 비상으로 보는 것은 새처럼 날개 치며 날아올라 자유로이 떠나가고픈 시인의 마음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비양도는 시인 자신의 모습임을 알 수 있다. 시인의 모습이면서 동시에 어머니의 한 생애의 모습이기도 하다. ”어머니 한생애도 밭머리 파도로 앉아 또 하루 해감을 하듯 숨비소리 흘렸느니“하고 노래한다. 비양도의 이미지는 비양도에 사는 새조개의 이미지와 연결되고 새조개의 형상은 또 새의 모습으로 연장된다. 하늘로 날아오르지 못하고 태어난 곳에서 주어진 삶을 업보처럼 살아가는 제주 여인의 생애를 새와 새조개의 대비 속에 그린 것이다. ”밭머리“는 어머니의 하루 치 밭일의 노동을 상징하는 시어이고 ”숨비소리“는 바다에서의 ’물질‘을 대변한다. 그 노역의 하루하루는 반복적으로 지속된다. ”숨비소리“가 ”또 하루 해감“을 하는 새조개의 모습에 대비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꿀풀」 에서와 마찬가지로 문순자 시인은 서정을 서정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숨비소리“와 ”밭머리“가 대변하는 어머니의 고된 노동의 배후에 사회적 맥락을 암시적으로 드러낸다. ”70년대 새마을 풍 빚잔치에 넘어간“이란 시귀가 그것이다. 꿀풀의 ’달비‘가 상징하는 근대화 프로젝트는 70년대의 새마을 운동으로 정점에 이르게 된다. 그 새마을 운동의 그늘에는 ’빚잔치‘의 상징성이 보여주듯 근대화의 희생자들이 놓여있다. ’진보‘와 ’성장‘이라는 국가의 공적 담론 뒤에 숨겨진 그 ’그늘‘의 사연들이 ”밭머리“에 나앉아 ”새조개“처럼 하루치 노동의 피로를 ”해감“하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징후로 드러나고 있다.
「여자」는 어머니의 전 생애를 ‘기울어진 유모차’의 이미지 속에 압축한 시편이다.
지구에 오래 살면 저렇듯 둥글어질까
온종일 해바라기 23.5도 그만큼
어머니,
이끈 유모차
그도 슬몃 기운다.
첫 남잔 징용으로 일본 간지 칠십년
두 번짼 4․3 홧술로 세상 뜬지 사십년
체념도 용서도 아닌
하늘이라 또 섬긴다
당신은 엄쟁이다
소금밭 일구던 여자
절에 가지 않아도 온몸으로 절을 한다
서너 평 돌염전에도
눈부시다 천일염
--「여자」 전문
이 시편에서는 어머니의 굴곡 많은 생애가 한국 현대사의 질곡에 깊이 닿아있음을 알 수 있다. “첫 남잔 징용으로 일본 간지 칠십년, 두 번짼 4․3 홧술로 세상 뜬지 사십년“에서 보듯, 일본 제국주의 강점기의 산물인 ‘징용’이 어머니의 삶을 한 번 뒤틀리게 했다. 그리고 다시 냉전시대 이데올로기 전쟁의 부산물인 4.3사건이 두 번째 트라우마를 안겨주었다. 그런 역사의 격랑에 휩쓸리면서도 자신의 운명을 수용하고 ”섬기‘고 “온몸으로 절을”하며 삶을 지속해 가는 강인한 어머니의 모습은 숭고하기까지 해 보인다. 그 삶의 과정을 거쳐 온 어머니의 삶을 쉽게 ’체념‘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순응‘이라고도 단정할 수 없다. 체념도 아니고 순응도 아니고 복수나 저항은 더욱 아닌 그 삶을 정의해 줄 단어는 무엇일 수 있을까? 어쩌면 삶의 복합성과 생존의 엄숙함은 삶을 추동하는 힘의 본질을 쉽게 정의할 수 없다는 것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닐까? “체념도 용서도 아닌 하늘이라 또 섬긴다”는 시귀가 울림이 큰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햇빛 속에 바람 속에 부대끼며 바닷물의 수분 다 날려 보내고 그 바닥의 ’짜디 짠‘ 속성들만 응고되어 이루어진 소금 같은 삶, 그것이 바로 ’엄쟁이‘어머니의 한 생애일 것이다. “눈부신 천일염”은 그 어머니의 삶의 존엄성에 바치는 딸의 헌사일 것이다. 유산으로 물려받은 염전에 기록된 한 제주 여인의 삶을 기리는 찬양의 노래일 것이다. “기울며”“절하며” 운명을 받들고 세월의 흐름을 함께 한 생명에의 예찬일 것이다. 그 숭고한 삶의 전통을 계승하리라는, 시인의 다짐의 노래일 것이다.
5. 균형과 긍정의 인생 시학
제주는 아름답고도 거친 곳이다. 바닷물이 맑고 현무암 검은 바위는 그 바다와 산뜻한 대조를 이루지만 거기 부는 바닷바람은 거침이 없다. 해안의 소나무를 휘게 만든다. 그 바닷바람을 맞고 견디는 백년초가 강하고도 아름답듯이, 그 땅에 나는 마늘이 마늘 본연의 매운 맛을 단단히 지녔듯이 삶은 어디에서 시작하든지 찬양해야 할 것이다. 모든 생명은 축복받아야 할 따름이다. 문순자 시인이 최근 들어 쓴 것으로 보이는 시편들에서는 시인이 나이 들어가는 몸의 변화에 주목하며 삶의 지혜를 몸에서 찾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몸’이라는 주제로 또 한 편의 문순자 시인론을 써야 할지도 모르겠다. 「왼손도 손이다」는 그 중 한 예에 불과하다.
의사는 다짜고짜 내 구력을 물어온다
운동?
운동이라면 노동이 고작인데
병명도 분수가 있지
‘테니스 앤 골프 앨보’라니
그렇다면 도대체 내가 뭘 쳤다는 걸까
오른손잡이,
이 손으로 네 등 떠민 적 없었다
무심결 왼쪽 손으로 찻잔을 든 이 아침
세상에, 세상에나
업은 애기 삼년 찾듯
여태껏 안 떠나고 여기 남아 있었구나
반세기 흘리고 나서
심봤다!
너 왼손아
-- 「왼손도 손이다」 전문
오른 손만 주로 써 오던 시인이 왼손을 발견하는 장면에서 “업은 애기 삼년 찾듯”이라고 노래하고 있다. 그 발견은 “심봤다!”로 상징되듯 무한한 기쁨과 가능성의 원천이 된다.“반세기 흘리고 나서”에서 보듯 존재이면서도 부재로 파악된 것, ‘오른 손’의 그늘에서 묵묵히 침묵해 오던 것이 이제 시적 화자의 눈에 들어온다. 어쩌면 ‘왼손’의 존재는 문순자 시인 자신의 고유한 목소리의 발견을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다.
서양의 십이 음계는 그 효용을 다하여 이제 그 십이음계로는 더 이상 새로운 음악을 지을 수가 없다고 한다. 서양의 십이 음계와는 전혀 다른 음의 구조를 지닌 동양의 음계가 그 틈새의 소리들을 발견하고 새 음악의 창조에 쓰일 차례라고 한다. 윤이상 작곡의 음악들이 서양 악기로 하여금 동양의 음악 혼을 노래하게 주문하듯 말이다. 세계 문학의 장에서는 한국 문학은 음악의 십이 음계에 눌리어온 동양의 음과 같은 ‘왼손’일 것이다. 제주는 한반도의 왼손, 여성은 남성의 왼손, 현대 시조는 자유시의 왼손 구실을 해 왔다고 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문순자 시인은 ‘왼손’이 펼쳐 보이는 시세계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시인일 것이다. 왼손으로 그려낸 인간과 자연과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한국 제주 여성 시조 시인으로서의 문순자 시인이 펼쳐 보이는 왼손의 예술 세계를 주목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