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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의 비밀]독일인과 커피 | ||||||||||
이곳은 상업이 발달해 생활이 여유로웠고, 문화생활도 활발했다. 라이프치히 최초의 카페는 궁정 초콜렛 제조자였던 요한 레만이 1694년에 문을 연 ‘아라비아의 커피나무’였다. 라이프치히의 초기 카페들은 도박과 천박한 행동으로 인해 평판이 좋지 않았는데 당국의 엄격한 감시로 부정적인 시각이 사라지면서 점차 시대를 앞서가는 멋쟁이들과 문화예술계 인사들로 북적거렸다. 커피에 매료된 시인들은 카페에 자신의 시(詩)를 받치기도 했는데, 괴테는 대학에 다니던 젊은 시절 드나들던‘헨델의 카페’를 위한 노래를 지었다. 18세기 독일의 시에 관한 교본에는 시적 상상력의 포에틱스로서 커피와 카페의 창조적인 분위기에 젖어볼 것을 권장했다. 당시 라이프치히에 머물던 음악가들 역시 카페를 자주 이용했는데, 슈만과 바그너, ‘커피칸타타’를 작곡한 바흐를 빼놓을 수 없다. '커피칸타타'의 내용은 ‘오! 커피맛은 얼마나 달콤한가! 천 번의 키스보다 사랑스럽고 백포도주보다 훨씬 달콤하도다! 나는 커피를 마셔야만 한다…’등으로 커피를 숭배했다. 그 당시 커피는 남자들에게는 고뇌를 잊게하고 갖가지 질병을 치료하는 비약처럼 여겨졌지만 여성들에게는 불임의 원인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수도 베를린에서는 카페가 1711년에 시작됐다. 보수적인 프로이센 궁정은 술과 커피를 파는 '카페'라는 가게가 열리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프리드리히1세는 베를린 최초의 카페영업권을 프랑스에서 이주해온 '올리비아'라는 흑인남자에게 줬다. 올리비아는 ‘카페 르와이얄’으로 영업을 시작했고 주로 높은 직위의 군인과 관리들이 많이 찾았다. 베를린의 카페에는 프리드리히 대왕도 미녀들과 함께 나타나 커피를 즐기긴 했으나 게르만족의 상징인 맥주를 보호하고 커피 수입으로 국부가 해외로 유출되는 것을 막고자 ‘커피금지령’을 선포했다. 커피에 매긴 과도한 세금 때문에 밀수 등 불법이 성행하자 ‘커피볶는일’을 국가산업으로 정하고 퇴역군인들이나 전쟁 부상병들을 감시인으로 동원했다. 감시인들은 도시 뿐만 아니라 시골 구석구석까지 커피볶는 기구 수색에 나섰다. 결과 커피매출은 점차 감소하고 커피값도 절반으로 떨어졌으며 세입도 줄어들자 제도는 폐지됐다. 18세기 독일에선 커피가 불법은 아니었지만 커피를 마시는 행위는 비애국적이라는 의견이 우세했다. 독일 당국은 커피에 간접세·통상세·벌금형 등 법을 철저하게 적용하고, 커피를 대신할 국내산 대용품 보급에 힘섰다.
대용품으로 완두콩·볶은보리·말린인삼·치커리 등이 등장하고, 커피와 가장 비슷한 맛을 내는 치커리를 독일의 고유산업으로 발전시켰다. 하지만 이러한 대용품도 커피의 수요를 감소시키는데는 역부족이었고, 갖가지 논란 속에서도 18세기 중엽을 넘기며 커피음용은 널리 확산돼 갔다.
김영중(영남대사회교육원 커피바리스타과정 강사) [매일신문] 2008년 10월 1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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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가져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