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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6ㆍ25 전몰군경유자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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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ㆍ25 전쟁자료관 스크랩 돌아보는 6.25 전쟁과 피로 맺은 우방 한미양국....
여의주 추천 0 조회 61 11.04.28 10:44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돌아보는 6.25 전쟁과 피로 맺은 우방 한미양국....

 

 

 

1. 희생과 자유
 

“우리나라는 자신들이 알지도 못하는 나라, 만난 적도 없는 사람들을 지키라는 요청에 응한 우리의 아들과 딸들을 기린다.”(Our nation honors her sons and daughters who answered their country's call to defend a country they never knew and a people they never met.)

이 문구는 미국 워싱턴의 한국전 기념공원의 `한국전 참전기념비'에 새겨진 추모의 글이다.

1995년 7월27일 한국의 김영삼 대통령과 빌 클린턴 미 대통령,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침략에 반대하는 유엔 결의를 지지한 21개국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한국전 참전기념비가 제막됐다.

한국전쟁 발발 45년 만에 이루어진 이 제막식은 한국전쟁의 의미를 되새기고 참전용사들의 고귀한 넋을 기리면서 나아가 21세기 새로운 한·미동맹관계의 발전을 다짐하는 계기가 됐다.

한국전쟁에서 미국은 사망 3만6940명·부상 9만2134명·실종 3737명·포로 4439명 등 총 13만7250명이라는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그것은 “자유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freedem is not free)라는 기념비의 글귀처럼 자유를 지키기 위해 바친 거룩한 희생이다.

이처럼 엄청난 희생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은 오랫동안 미국인의 기억에서 잊혀져 있었다. 그들 스스로 이 전쟁을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이라고 했다.
89년 당시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은 “한국전쟁은 너무과소 평가되고 이해되지 못했다”고 말한 바 있다. 미국 국민의 한국전쟁에 대한 망각이 이 제막식 행사로 비로소 되돌아온 것이다.

완전군장에 우의를 입은 19명의 미군 병사가 산개한 전투대형으로 행군하는 모습은 자유·평화를 위해 싸운 참전용사들의 전의와 기백을 느끼게 한다. 비록 오랜 세월 미국인들에게서 잊혀진 전쟁이었지만 한국전 참전에 대한 미국인들의 당위성과 불가피성, 그리고 그 희생의 결과로 얻어진 오늘 그 자체를 잊은 것은 아니었다.

한국전쟁을 겪은 세대들에게는 너무나 눈에 익은 우의를 입은 미군 병사들이 전쟁터를 긴장 속에 행군하는 모습의 이 기념비는 오늘 우리에게 오랫동안 잊어온 사실을 새삼 상기하게 한다.
이 기념비를 건립하는 데 든 총비용 1억8000만 달러 중 80%가 10달러에서 50달러의 소액기부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만 보더라도 한국전 참전을 소중하게 기억하는 미국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제막식 행사에서 빌 클린턴 대통령이 표현한 대로 한·미 양국이 `공동목표의 미래를 공유'했던 시절의 소중한 기억이다. 그리고 세계대전의 처참한 상흔이 채 아물기도 전에 다시금 16개국의 젊은이들이 `알지도 못하고 만난 적도 없는 사람들'의 나라에 와서 싸운 것도 그들이 다함께 공동목표의 미래를 공유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이다.

전쟁이 끝난 후 자유를 위한 전쟁과 희생은 서서히 잊히고 냉혹한 실리추구의 현실 속에서 한·미 간에는 크고 작은 갈등이 있어 왔다. 외교적·군사적으로는 변함없는 최대 우방이면서도 두 나라 국민들의 마음속에는 사소한 문제로 상처받는 상황도 있었다.
그러나 기념비의 주제처럼 자유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이 시점에서 자유를 위해 함께 싸운 혈맹으로서 한·미관계를 다시 한번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2. 절체절명의 위기, 한강 방어선
 

1950년 6월25일! 이날은 민족사상 최대의 시련이 시작된 날이고, 대한민국 정부가 탄생한 지 2년 만에 국가존망의 기로에 선 날이다.

바로 이날 새벽 4시, 북한군은 치밀한 침공 계획에 따라 전차 1개 여단 및 1개 연대, 보병 10개 사단의 우세한 전투력으로 38도선 전역에서 일제히 기습남침을 감행해 물밀듯이 내려왔다.

당시 우리 국군은 절대적으로 열세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용감히 맞서 싸웠으나 남침 3일 만에 서울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6월28일 오전 2시 북한군 선두가 미아리에 진입하면서 서울 북방 창동 방어선이 붕괴하기 시작했고, 2시30분쯤 우리 군은 한강교를 폭파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때부터 한강선 방어작전이 전개됐다.

6월29일 당시 미 극동군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한강방어선을 시찰했는데, 이 시찰을 통해 맥아더 장군은 사태의 심각성을 분명히 인식함과 동시에 한국방어의 결의를 확고히 다지게 됐다.

맥아더 장군이 한강을 시찰하기 위해 전용기 `바탄호'를 타고 수원비행장에 내린 6월29일, 당시는 미 공군이 한반도 상공에서 제공권을 아직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때였다. 김포·여의도 비행장을 점령한 북한 공군기가 자주 수원비행장을 습격했을 뿐만 아니라 날씨마저 몹시 사나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아더 장군은 비행장에 내리는 위험을 주저하지 않았다.
실제로 북한 야크(Yak) 전투기의 공습을 받아 불과 100여m 거리에서 두 발의 폭탄이 터지는 등 마중 나온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위험한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수행원을 대동하고 고지에 올라선 맥아더 장군은 한강 너머로 바라다 보이는 서울 남산과 그 주변 일대를 한참 동안 망원경으로 보고나서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산병호 쪽으로 걸어갔다. 그곳 개인호 안에 한 병사가 꼿꼿한 자세로 서 있었다.

이때 맥아더 장군이 던진 질문에 대한 병사의 자신감과 사명감에 넘친 답변은 맥아더 장군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고, 그로 하여금 미국 지원군을 한국전장에 투입할 결심을 하게했다는 일화가 있다.


■맥아더 장군과 한국군 병사의 대화

맥아더 장군:자네는 언제까지 그 호(壕) 속에 있을 것인가?
한국군 병사:예! 각하께서도 군인이시고 저 또한 군인입니다. 군인이란 명령을 따를 뿐입니다. 저의 직속상관으로부터 철수하라는 명령이 있을 때까지 여기 있을 것입니다.
맥아더 장군:그 명령이 없을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한국군 병사:예! 죽는 순간까지 여기를 지킬 것입니다

맥아더 장군:오! 장하다! 자네말고 딴 병사들도 다 같은 생각인가?
한국군 병사:예! 그렇습니다. 각하!
맥아더 장군:참으로 훌륭하구나! 여기 와서 자네 같은 군인을 만날 줄은 몰랐네. 지금 소원이 무엇인가?
한국군 병사:예! 우리는 지금 맨주먹으로 싸우고 있습니다. 놈들의 전차와 대포를 까부술 수 있게 무기와 탄약을 주십시오.

맥아더 장군:음! 그리고 또 없나?
한국군 병사:예! 없습니다.
맥아더 장군:알았네,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군.
이때 맥아더 장군은 병사의 손을 꼭 쥐고 나서 통역을 맡은 김종갑 대령에게 이렇게 말했다.
“대령! 이 씩씩하고 훌륭한 병사에게 전해 주시오, 내가 도쿄(東京)로 돌아가는 즉시 미국 지원군을 보낼 것이라고. 그리고 그때까지 용기를 잃지 말고 훌륭히 싸우라고.”

- 정일권 장군 회고록에서-



3. 지연전의 실패, 대전 함락
 

“전차로써 철수로를 확보하라!” 사단장 딘(Dean).
이것은 미 제24사단장 딘 장군이 마지막으로 타전한 명령이다. 최후의 일각까지 진두지휘의 모범을 보여준 지휘관의 마지막 명령.

대전의 군사적 중요성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었다. 금강·소백산맥 축선을 얼마만큼 유지할 수 있는가의 관건이 되는 요충 중의 요충이었다. 그런만큼 대전 확보의 시한을 7월20일까지로 해 이 시한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지탱해야만 했다. 이는 포항에 상륙한 미 제1기병사단이 증원될 때까지의 날짜를 고려한 시한이었다.

딘 소장은 일본으로부터 급거 파견된 1개 사단으로 북한군 최정예 3개 사단의 집중적인 공격을 막아내야 하는 입장이었다. 이처럼 어려운 상황 속에 치열한 접전이 지속되면서 미군은 수적 열세를 감당하기 어려웠고, 특히 북한군이 삼면 포위의 총공세로 나옴에 따라 시가전이 벌어지게 됐다. 심지어 딘 사단장 자신이 3.5인치 로켓포를 직접 메고 적 전차를 향해 사격하는 등 사력을 다해 싸웠다. 신속히 철수하라는 상부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딘 소장과 부하들은 대전을 사수하기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한 것이다.

그러나 포항에서 달려오고 있는 미 제1기병사단의 구원만을 기다리기에는 상황이 너무 촉박했고, 결국 딘 소장은 시가전에 종지부를 찍고 최종부대인 제34연대의 철수를 명령했다. 때를 놓치면 영동으로의 철수로마저 차단당할 매우 급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전차로써 철수로를 확보하라!” 이것이 그의 마지막 명령이었다.

대전이 함락되고 미 제24사단이 붕괴됨에 따라 사단장 딘 소장도 철수하지 못하고 실종됐다. 그 후 딘 소장은 8월25일 실종 36일 만에 전북 진안에서 적에게 붙잡혀 3년여의 포로생활 끝에 1953년 9월4일 쌍방 포로교환시 다시 돌아왔다.

딘 소장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12월부터 종전시까지 미 제44사단장으로 프랑스·독일·오스트리아에서 전투를 지휘했다. 약 1년간 전투 중 제44사단에서 포로가 된 사람이 42명에 불과해 딘 소장은 이것을 가장 큰 자랑으로 여겼다. 특히 그는 군인으로서 포로가 되는 것은 가장 불명예스러운 일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러한 신념을 가진 장군이 한국전쟁에서 적의 포로가 됐다는 사실은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잘 말해준다.

그는 또 자신이 북한군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몰랐기 때문에 스미스대대를 아무런 준비없이 출동시켜 죽미령 패퇴의 불명예를 자초했노라고 두고두고 자책했다. 부하의 잘못을 책하기 전에 자신의 잘못을 먼저 반성할 줄 아는 지휘관이었던 것이다.

딘 소장은 사실 한국과는 인연이 많은 군인이다. 미 군정기 후반의 군정장관으로서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기초를 닦는 데 공헌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군사원조를 갈망하는 국군 수뇌부의 고충을 누구보다 이해해준 장성이었다.


4. 워커장군 작전명 1호“Stand or Die!

 

1950년 7월13일 미 제8군사령부가 일본 요코하마에서 대구로 이동 설치됐다. 또한 이날은 이승만 대통령이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에게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사령관에게 이양한다는 서신을 보낸 날이다. 바로 그날 월턴 워커 사령관에게 작전지휘권과 유엔기가 전달됐다.

7월13일 현재 증원된 병력은 미 제24·25사단 일부(선발)인 약 1만8000명이며 파병이 예정된 미 제1기병사단이 오기까지 아직도 1주일을 기다려야 했다. 전황이 매우 불리했다. 이 고비를 넘기기 위해 유엔군은 소백산맥까지 철수하는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즉 ①유엔군 및 한국군은 주력을 대전과 소백산맥을 축으로 축차 철수해 새 방어선을 구축한다 ②미 제24사단이 계속 대전을 방어한다 ③한국군은 차령산맥에서 소백산맥으로 이전해 제2군단을 전개시킨다 ④미 제25사단(일부)으로 소백산맥의 종심을 강화한다는 내용이었다.

워커 장군은 이런 작전계획을 골자로 한 유엔지상군사령관으로의 첫 작전명령(제1호)을 발령했다. 작전명령은 ‘Stand or Die!’. 불퇴전의 결의를 장병들에게 전달한 것이다.

‘저지하느냐 죽느냐!’ 이는 당시 상황의 절박함을 그대로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의 운명을 함축하는 결사의 구호였다.

워커 장군은 제2차 세계대전시 조지 패튼의 제3군 예하 20군단장으로 ‘워커 불도그’(Walker Bulldog)라는 별명을 가진 용감하고 적극적인 전술가였다. 그는 유럽에서도 공격작전의 권위자로 명성이 높았고 한국전쟁에서도 이러한 위용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워커 장군은 1950년 7월13일 미 제8군사령관으로 부임, 낙동강 방어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인천상륙작전의 발판을 마련했으며 평양탈환과 한만(韓滿) 국경선 진출을 지휘한 탁월한 전략가였다.

그러나 워커 장군은 50년 12월23일 교통사고로 순직하고 말았다. 그의 아들 샘 워커 대위의 은성무공훈장 수여식에 참석하기 위해 이동하던 중 트럭과 충돌, 현장에서 사망했다. 그때가 향년 61세였다.

미 육군은 워커 장군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당시 최신형 전차인 M-41 경전차에 ‘워커 불도그’라는 명칭을 부여했다. 그가 싸운 한국에서는 서울 광진구 광장동에 위치한 언덕에 미군의 휴양시설과 국립호텔을 건축, ‘워커힐’로 명명해 오늘날까지 그의 업적을 잊지 않고 있다.




5. 마지막 방어선  낙동강
 

“나는 여기 낙동강선에 역사적인 이미지를 남기고자 합니다. 즉 공산군을 막아낸 방어전의 전선으로서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결집력으로서 공산 침략군을 섬멸해 나가는 반공의 출발선으로서 역사에 장식하려는 것입니다.” -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정일권 회고록 중에서〉

1950년 7월27일 맥아더 장군이 사전 예고 없이 대구로 날아와 전황(戰況) 브리핑을 받고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구상을 처음 밝히면서 내린 결론이다.

당시 전황은 7월20일을 고비로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었다. 경부국도를 떠받치던 대전을 잃었고 국군이 맡고 있던 내륙전선도 어렵게 됐다.

워커 장군은 진작 예상했던 대로 “전 전선을 낙동강으로 수습해 결전 방어로 돌입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제 낙동강 전선은 문자 그대로 대한민국의 운명이 달린 ‘최후의 보루’이자 더는 물러설 곳 없는 ‘마지막 생명선’이었다.

아군은 국군 5개 사단, 미 제8군 3개 사단 등 총 8개 사단에 불과했다. 240여㎞의 정면이었기 때문에 1개 사단에 30㎞씩 할당된 셈인데 이는 통상 사단 정면 15㎞의 두 배에 이르는 방어 정면이다.

그러나 북한군도 보급로가 신장돼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고 특히 아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병력과 장비의 손실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었다. 한편 국군 및 유엔군은 증원과 대대적인 반격작전을 전개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게 됐으며 전형적인 야전지휘관 워커 장군은 “방어 아니면 죽음!”의 결심을 더욱 굳게 다지고 있었다.

그러나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과의 접전은 치열한 격전의 연속이었다. 50년 8월부터 9월15일까지 45일간의 낙동강 전선은 그야말로 무쇠가 이글거리는 용광로 바로 그것이었다. 다부동·영천 등 지명만 들어도 가슴을 쓸어내릴 정도의 격전장! 말 그대로 대한민국의 명운이 갈릴 수도 있는 순간 순간의 연속이었다.

북한군은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 피란민을 앞세워 공격을 감행하는 등 악랄한 행위를 자행했으나 국군 및 유엔군은 죽음을 불사하는 투철한 정신력으로 낙동강 방어선을 수호한 것이다.

특히 50년 8월23일 아군이 다부동 전투에서 북한군을 물리친 후 미 육군참모총장 콜린스(Collins)대장이 미 제8군사령부에서 전반적인 상황을 브리핑 받고 나서,맨 먼저 다부동 전선을 보고 싶어했다. 이것은 이례적인 제안이었다. 미국 고위급 인사들의 전선 시찰은 미군 전선을 먼저 보고 나서 한국군 부대를 찾는 것이 순서인데, 콜린스 장군은 “다부동을 지켜낸 한국군 장병들에게 우선 경의를 표하고 싶다”며 다부동 전선으로 달려간 것이다.

미 육군참모총장이 위험을 무릅쓰고 다부동 전선을 찾고자 한 것은 우리 국군 장병들에게 전쟁수행을 다짐하는 미군 수뇌부의 굳은 의지를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아울러 최전방 장병들에게 자신감과 안도감을 안겨주려는 결연한 자세였다.

이날 콜린스 장군의 전선 시찰은 인천상륙작전을 20여 일 앞둔 시점에서 미 제8군과 한국군이 그때까지 낙동강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인지의 여부를 현장에서 직접 확인하기 위한 의도도 있었으며, 결과는 ‘이상 없음’이었다.


6. 인천상륙- 신념의 승리 
 

“워싱턴이 이 작전을 5000분의 1의 도박으로 간주하고 있는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 그러나 본인의 결의는 확고합니다. 기필코 결행해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5000분의 불가보다 1의 가능성을 어디까지나 믿고 있습니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1950년 8월23일·도쿄)



1950년 9월15일. 이날은 일명 ‘크로마이트 작전’(Operation Chromite)이라고 이름 붙여진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날이다. 낙동강 전선에서 최후의 방어전이 진행 중이던 그 무렵 6·25전쟁의 국면을 바꿔 버린 일대 전환점이 마련된 것이다.

사실 인천항의 입지조건 때문에 미 합동참모본부가 인천상륙을 완강히 반대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물론 워싱턴도 상륙작전 그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았다. 상륙작전은 필요하지만 ‘인천만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이들의 반대 이유인 인천의 지형적 장애요소가 오히려 북한군으로 하여금 인천에 대한 방비를 허술하게 할 수 있는 요인이 될 것이므로 이러한 허점을 역이용할 경우 기습효과를 달성할 수 있다는 소신을 거듭 강조했다.

D데이를 6일 앞둔 9월9일 미 합동참모본부는 마침내 ‘귀하의 계획을 검토한 결과 승인키로 해 대통령의 재가를 받기로 했다’는 최종결정을 맥아더 장군에게 전했다. 맥아더 장군의 신념이 관철된 것이다.

인천상륙작전! 그것은 수세에 몰린 전황을 공세로 역전시키는 계획이자 시기의 선택 및 방법의 모든 면에 걸쳐 놀라운 진면목을 발휘한 작전이었다. 숱한 악조건을 오히려 기습달성의 수단으로 이용한 이 작전의 성공으로 아군은 적의 병참선과 퇴로를 차단, 적을 격퇴했으며 순식간에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아울러 이 작전은 아군의 인적·물적·시간적 손실을 극소화하는 효과도 가져왔다.

“작전완료. 적군의 저항은 극히 경미함. 포로 45명. 전사 한 명도 없음.”

오전 6시27분 선발 제1파의 상륙함정 8척에 ‘Let’s Go!’가 발령되고 나서 8시에 상륙성공의 제1보가 날아든 것이다. 월미도를 단숨에 점령한 선발부대의 보고였다. 탁월한 전략가인 맥아더 장군의 작전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의 승전보가 전해지자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민 모두를 대신해 감사했으며, 처칠은 “시간을 벌어 반격하는 전략의 진수를 보여주었다”고 찬양해 마지않았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곧 서울 수복을 앞당겼다. 9월28일. 총성은 북쪽으로 멀어지고 중앙청에 태극기가 펄럭이기 시작했다. 국군 해병대 제6중대 박정모 소대의 수훈이었다. 서울의 해맑은 가을 하늘에 교회 종소리와 함께 만세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울시민들에게는 실로 89일 만에 바라보는 태극기였다.

다음날. 서울 환도식장에서 맥아더 장군은 연단에 올라 그 역사적인 순간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비로운 하나님의 가호로 인류 최대의 희망과 열정의 상징인 우리 유엔군은 여기 대한민국의 오랜 수도 서울을 수복했습니다. 이제 서울은 잔학한 공산주의의 압제에서 벗어나 시민들은 대한민국의 자유와 존엄성을 누리게 됐으며, 다시는 잃지 않으리라는 굳은 신념 밑에서 생활할 수 있게 됐습니다.”-정일권 장군 회고록 중에서-




7. 한.미군 선의의 입성경쟁
 

1950년 10월19일, 백선엽 장군이 지휘하는 국군 제1사단이 유엔군 중에서 최초로 평양에 입성했다. 6·25전쟁이 발발한 이래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던 국군은 유엔군과의 인천상륙작전이 대성공을 거둠에 따라 전 전선에 걸쳐 반격작전을 전개했고, 10월1일 국군 제3사단이 38선을 돌파함으로써 북진의 길을 열어 놓았으며, 마침내 국군 제1사단이 평양을 수복한 것이다.

사실 국군 제1사단은 처음부터 평양 탈환의 선봉으로 지정되지는 않았다.

최초 작전명령에는 미 제1기병사단이 주공을 맡아 경의국도를 따라 돌진하고 미 제24사단은 우익부대로 구화리∼시변리∼신계∼수안을 거쳐 평양을 공격하게 돼 있었다.

그리고 영국 제27여단은 군단예비로 기병사단을 뒤따르고 국군 제1사단은 개성∼연안∼해주를 거쳐 안악 방면으로 공격, 후방의 적을 소탕하는 것이었다.

백장군은 아무리 미군이 작전지휘권을 행사하고 있다 하더라도 북한군의 수도를 공격하는 데 국군이 참여하지 못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작전이라는 생각이 들어 제1군단장 프랭크 밀번 소장에게 강력히 요청했다. 그러자 밀번 군단장은 1사단의 차량이 몇 대인지 물었는데, 그것은 곧 1사단의 기동력을 묻는 질문이었다. 사실 당시 1사단은 60~70대의 차량뿐이었으나 미군 사단은 수백 대의 차량을 보유하고 있었다.

기동력·화력이 우세한 미군을 앞세워 신속히 진군, 평양을 점령하려는 밀번 군단장을 상대로 백장군은 끈질기게 설득했다.

“차랑은 많지 않지만 주야로 행군할 투지가 있다”는 백장군의 강력한 의지에 밀번 군단장은 결국 국군 제1사단을 평양 탈환의 선봉에 서게 했다.

드디어 진군이 개시됐는데 백장군은 선두전차에 탑승, 진두지휘했다.

그러자 수석고문관 헤이즈레트 중령이 반대하고 나섰다. “사단장이 선두에 나서면 적 저격수의 표적이 되고 만약 저격되면 누가 사단을 지휘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백장군은 고향을 탈환하겠다는 의지뿐만 아니라 국군과 미군의 제 병과가 협조하는 데 언어의 장벽, 훈련도의 차이, 사고방식의 차이 등으로 지휘통솔이 어렵기 때문에 사단장이 직접 선두에 서서 제반 문제를 해결해 나가고자 했던 것이다.

50년 10월19일 오전 11시, 마침내 국군 제1사단은 미 제1기병사단과의 합류지점인 대동교 입구 선교리 로터리에 도달했고, 그로부터 약 40분 후 미 제1기병사단의 선두가 도착했다.

38선 고랑포에서 평양까지 약 170㎞인 것을 감안하면 국군 제1사단은 하루 평균 25㎞를 진격한 셈이다. 이 속도는 쾌속 진격으로 유명한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 기갑부대의 스탈린그라드 침공시보다 오히려 더 빠른 것이었다. 1사단 장병들은 걷고 타기를 번갈아 가며 불철주야 진군, 태평양 전쟁에서 마닐라와 도쿄에 1착으로 진주한 전통에 빛나는 미 제1기병사단과의 경쟁에서 이긴 것이다.

8. 중공군 포위망 과감히 돌파
 

“미 제1해병사단 : 전사 718명, 후송 후 사망 98명, 실종 192명, 부상 3504명의 전투 손실과 비전투 손실 3659명(대부분 동상)”
“중공군 : 전사 2500여 명, 부상 1만2500여 명.”

1950년 11월27일부터 12월11일까지 장진호에 배치된 미 제1해병사단이 중공군 7개 사단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게 된 극한 상황에서 ‘죽음의 계곡’으로 명명된 ‘유담리-덕동령-하갈우리-고토리’ 통로를 따라 2중, 3중으로 형성된 중공군의 포위망을 돌파한 소위 ‘장진호 전투’에서 발생한 쌍방 피해 결과다.

장진호는 개마고원에 있는 해발 1000m가 넘는 산악지역으로 당시 낮에는 영하 20도 밤에는 영하 32도까지 떨어지는 살인적인 추위가 계속됐다. 병기는 얼어 붙고 특히 방한피복이 절대 부족해 쌍방 군대 절반 이상이 심한 동상에 걸렸다.

이러한 최악의 조건 속에서도 미 제1해병사단은 단순한 철수가 아닌 ‘새로운 방향으로의 공격’(an attack in another direction)이라는 스미스 사단장의 강철같은 의지 아래 과감한 돌파작전을 전개, 함흥으로 철수하는 데 성공했다.

이 전투로 중공군의 함흥지역 진출이 2주일이나 지연됨으로써 동북지방으로 진격하던 국군과 유엔군 부대들이 흥남으로 집결할 수 있는 시간을 얻게 됐으며 곧이어 개시된 흥남 철수작전도 가능케 됐다. 특히 중공군 제9병단은 이때의 피해로 3차공세에 참여하지 못해, 3차공세는 후속병력 부족으로 전과를 확대하지 못하고 수원 일대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반면 한국군과 유엔군은 반격의 기틀을 마련, 이후의 전장에서 다시 주도권을 갖게 됐다.

장진호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 남은 참전용사들은 몸서리치도록 처절했던 당시 상황을 꿈에도 잊지 못한다. 그래서 이들은 83년 4월 6000여 회원으로 구성된 생존자협회를 결성, 그 명칭을 장진호 전투에서 아주 적게 살아 남았다는 뜻을 담고자 ‘Chosin Few’라고 붙였다.

‘Chosin Few’는 미국을 중심으로 전 세계에 52개 지부를 두고 전쟁포로 문제와 동상 후유증 치료 등에 관해 자문을 받고 있다. 또 박물관을 건립하기 위해 모금운동을 벌이고 한국 재방문 사업도 추진하고 있다.

일부 회원들은 그날의 생생한 기억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책을 펴냈다. 수기는 소총수로 참전한 마틴 러스의 ‘포위망 탈출’(Breakout), 장교였던 조지프 오언의 ‘지옥보다 더한 추위’(Colder than Hell), 소설은 장교 출신 제임스 브래디의 ‘가을의 해병’(The Marines of Autumn) 등이 있다. 이 책들을 소개한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보면 “밤새 통곡하며 읽었다”는 ‘Chosin Few’ 회원과 가족들의 독후감이 많이 올라 있다.

50여년 전 우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살을 에는 눈보라 속에 쓰러져간 용사들과 처절했던 당시 기억을 간직한 채 대한민국의 발전을 지켜보고 있는 ‘Chosin Few’ 회원들의 고귀한 희생을 떠올리며 그 분들에 대한 감사, 그리고 자유의 소중함을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9. 1953년 7월 27일 휴전조인


“나의 군경력을 통해 이처럼 수치스럽고 하기 싫은 서명을 해본 적은 없었다.”

클라크 장군이 유엔군 최고사령관으로 정전협정에 서명하고 나서 개탄하며 한 말이다.

1953년 7월27일! 이날은 3년 여 간 끌어온 6·25전쟁을 멈추게 한 정전협정이 체결된 날이다.

그러나 이 협정은 전쟁에서 벗어나 완전한 평화를 이룬 협정이 아닌 또다른 대립과 갈등, 그리고 새로운 전쟁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불완전 협정’이었기 때문에 클라크 장군이 수치스럽게 생각한 것이다.

클라크 장군은 정전 30년인 83년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방송에서도 다음과 같이 술회한 바 있다.

“유엔군은 거의 다 승리해가는 입장이면서도 조기정전을 바라는 미 국민과 유엔 일부 국가들의 요구에 밀린 워싱턴 당국이 증원군 파견과 만주폭격을 주저했기 때문에 승부없는 모양의 정전으로 끝나고 말았다.”

당시 한국 정부와 국내 여론은 ‘정전 결사반대’ 분위기였다.

51년 6월23일 유엔 주재 소련대사 말리크(Malik)가 ‘평화의 대가(代價)’라는 연설을 통해 정전회담을 제의하자 이틀 후 미국과 중국이 이 제안에 동의하면서 2년 여의 정전협상이 진행됐고, 결국 53년 7월27일 국제법적으로 전쟁을 완전히 종결하지 못한 채 불안정한 정전협정으로 마무리한 것이다.

정전협정은 말 그대로 전투행위의 종식을 가져다 주었지만 분단과 대립이라는 전쟁 이전상태로의 회귀에 다름 아니었다.

북한 공산군의 무력남침으로 조성된 풍전등화의 위기 앞에서 우리 국군의 처절한 방어, 그리고 세계 자유진영의 결속과 참여로 침략군을 물리치고 38선을 대체한 새로운 군사분계선(MDL)을 긋게 된 사실상의 원상회귀였고, 한반도의 분단과 공산세력의 위협은 지속되게 된 것이다.

정전협정이 안고 있는 이와 같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6·25전쟁은 겨레의 자주독립과 민족사적 정통성을 지켜낸 위대한 국난극복의 대역사(大役事)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 전쟁을 통해 고조된 전국민적 안보의식은 오늘날 총력안보태세 구축 및 한·미동맹에 기초한 연합방위태세 완비를 위한 물적·정신적 기반을 이루었던 것이다.


10. 밴플리트 장군과 외아들
 

“저는 모든 부모님이 저와 같은 심정이라고 믿습니다. 우리의 아들들은 나라에 대한 의무와 봉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벗을 위해 자신의 삶을 내놓은 사람보다 더 위대한 사랑은 없습니다.” 폴 F 브레임 저, ‘위대한 장군 밴플리트’ 중에서

1952년 4월4일 8군사령관 밴플리트(James A Van Fleet) 장군의 아들 지미 중위가 B-29 폭격기를 조종, 북쪽으로 출격했다가 실종됐다. 그해 부활절 밴플리트 장군은 한국전쟁에서 아들이 실종된 모든 부모에게 위와 같은 위로전문을 발송했다.

한국전쟁 3년 1개월 2일 동안에 미군은 전사 및 실종·부상 등 총 13만7250명의 사상자를 냈다. 참전 미군 중에는 미군 장성들의 아들 142명이 포함됐는데, 이중 35명(25%)이 전사 또는 부상했다.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아들 존(John Eisenhower), 워커 8군사령관의 아들 샘(Sam Walker), 클라크 유엔군총사령관의 아들 빈 대위도 최전선에서 싸웠다. 해리스 미 해병 제1항공사단장은 장진호 철수작전을 항공지원하고 있었는데, 그의 아들 해리스 소령은 미 해병 제1사단 7연대 3대대를 지휘, 아버지의 항공지원 하에 장진호를 돌파하다가 하갈우리에서 전사했다.

밴플리트 장군은 ‘전쟁의 세기’라 일컬어지는 20세기를 야전군인으로 살다 간 전쟁영웅이다. 그는 한국전쟁 기간 중 2년을 8군사령관으로 전선에서 싸웠고, 바로 그 전선에서 사랑하는 외아들 지미를 바쳤다.

그는 아들을 잃고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부대지휘에 만전을 기했고, 참모들이 전투기 100여 대를 투입해 사체수색활동을 벌이자고 건의해도 작전에서의 승리만을 생각해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처럼 그는 확고한 사명감과 불퇴전의 결의를 보여 주었으며, 특히 대부대는 물론 소부대의 여하한 전투에 있어서도 완전한 승리를 거두는 것을 모토로 정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 보병 중대장으로 참여한 바 있고, 육군 대령으로 예편한 브레임(Paul F Braim)교수가 2000년에 발간한 밴플리트 장군의 전기 제목 역시 ‘필승의 신념’(The Will to Win)이었다.

밴플리트 장군의 전공과 업적을 각별히 기억하는 것은 북한군의 기습남침시 준비 안된 전쟁으로 고군분투해야 했던 우리 군을 훈련과 전력보강을 통해 오늘날의 정예군으로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그는 8군사령관으로 취임한 직후부터 소수병력으로 적과 어려운 전투를 계속하면서도 한국군 사단을 9주간씩 교대로 재훈련시킬 만큼 한국군의 전력향상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특히 한국군을 20개 사단으로 증편하려는 계획은 당시 미국 내에서도 많은 반대가 있었지만 장군은 52년 말 당선된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간곡히 건의해 이를 관철했다. 아이젠하워와 밴플리트 장군은 웨스트포인트 동기생이었다.

이렇게 해서 한국군이 20개 사단으로 증편되자 한국군의 중추 역할을 담당할 기간장교단을 양성하기 위해 웨스트포인트를 모델 삼아 4년제 육군사관학교를 설립하는 데 결정적 공헌을 했으며, 전역 후에는 모금활동을 전개해 육사에 도서관을 지어 기증할 정도로 한국군 발전에 끝없는 관심을 보였다.


11. 한반도 평화지탱하는 초석
 

“한반도의 안정은 한·미 양국의 확고한 동맹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북한을 포함해 모든 아시아 국가는 미국과 한국의 동맹관계가 확고함을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미국은 동맹의 의무를 지속적으로 수행할 것이고, 이를 영광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주한미군과 한·미동맹은 굳건할 것이며 한반도의 평화를 지탱하는 초석이 될 것입니다.”

-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의 도라산 연설 중.(2002. 2. 20)

미국의 대(對) 한반도 안보전략은 강력한 한·미동맹체제 유지와 주한미군이라는 전진배치 전력을 근간으로 한·미 연합억제전략을 계속 유지함으로써 북한의 군사적 모험을 억제하고 나아가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지역균형자 역할을 계속 수행한다는 것이다.

1998년 미 국방대학원이 발간한 ‘전략평가서’에서도 미국은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이 평가서에서 미국은 경제적 번영 보장과 자유민주주의 가치 보호라는 국가이익(national interest)과 연계해 세계를 4개 그룹으로 분류하고 있다.

즉 ①미국과 이해를 같이하는 핵심국가들(core partners) ②핵심 그룹으로의 진입 가능성이 있는 대부분의 국가들(transition states) ③미국의 이익을 해칠 수 있는 이념 또는 수단을 가진 국가단체들(rogue states·nonstates) ④내전·전쟁 등으로 인해 인도주의적 지원이 요구되는 국가들(failing states) 그룹으로 나누고 있다.

2001년에 발간된 ‘FY 2002 미 국방 연례보고서’에서 미국은 한국을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일본·오스트레일리아 등과 함께 중요한 핵심국가로 분류하고 있다. 이는 미국이 시장경제와 민주주의 가치, 그리고 세계평화에 대한 책임을 공유하고 이를 유지·확대시키는 데 함께 나아갈 중요한 동맹국가로 한국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미동맹과 주한미군은 한반도에서 평화를 지키고(peacekeeping) 평화를 만들며(peacemaking), 나아가 통일을 앞당기는 역할까지 수행하게 된 것이다.

한·미안보동맹의 핵심고리로서의 주한미군은 우리 국군과 함께 한·미연합전력을 형성, 한반도에서 전쟁재발을 방지하고 동북아 지역에 있어 전략적 안정자·균형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또 한·미 양국은 확고한 연합방위체제를 유지하고 긴밀한 대북정책 공조체제를 확립함으로써 공고한 동맹관계 유지는 물론 남북관계 발전을 지속적으로 뒷받침하고 있으며 한반도 정세변화에 공동대처해 나가고 있다.

지난 5월14일 노무현(盧武鉉)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은 정상회담에서 한·미동맹 50주년을 축하하고, 한반도 및 동북아의 지속적인 평화·번영을 위한 포괄적이고 역동적인 동맹관계를 구축해 나가는 데 공동노력키로 다짐했다.

통일 이후 불특정 위협, 주변 강대국들 간의 역학관계, 대륙과 해양세력의 이해관계가 교차하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 등을 감안해 볼 때 한·미안보동맹의 중요성은 앞으로 주한미군의 재배치 문제 등 양국 간의 군사현안이 어떠한 형태로 매듭을 짓든 더욱 강조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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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1.04.28 12:38

    첫댓글 귀한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아

  • 작성자 11.04.28 15:26

    보면 볼수록 그 처절한 포화의 현장속에 우리 아버님의 절규가 들리는 듯 하여 애절한 심정을 누를 길이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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