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의는 확정성화(중생)에 선행하는가?
잠잠한가 했더니, {페북}과 {Daum} 카페 {개혁주의 마을}에 ‘조나단 에드워즈 저격수’가 떴다. 조나단 에드워즈를 저격하면서, “교단에 이단 제소” 운운하며 예장 합동 이윤석, 유창형 교수님을 저격하고 있다. 암담한 것은 ‘의義의 주입으로서 중생’, ‘죽은 영혼이 의롭고 거룩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의롭고 거룩한 자녀로 태어나는 중생, 우리 내부에서 일어나는 존재의 변화로서 중생의 도리道理’와 ‘우리 외부에서 일어나는 신분의 변화로서 칭의의 도리道理’를 모르는, 개혁주의 목사를 자처하면서도 개혁주의 기본 교리조차 모르는 이 교만한 저격수에게 동조해 힘을 실어주는 목사들이 있다는 점이다. 다음은 이 저격수가 지난 4월 27일에 {페북} 자신의 담벼락에 쓴 글이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성향적 구원론(dispositional salavation)은 타력 종교인 기독교를 자력 종교(자연 종교)로 만들어 버린다. ‘사랑하는 믿음’은 불가능한 언어조합이라는 것도 모르면,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아울러, 중생한 신자 속에 여전히 가감이 없는 죄성이 내재하는데, 거룩성이 형성된다는 주장도 역시 언어도단이다.
법적인 신분조차 승인되지 않는 상태인 칭의 전에는, 중생한 신자의 성품. 성향. 기질의 어떠한 변화가 있든지 간에, 거룩성이라고 명명할 수 없다.
박사라고 교만하면서도 기본적인 교리조차 모른다. 그 이유는 한 가지, 에드워즈의 책은 죽어라 읽어대면서, 성경은 읽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믿음”??? “불가능한 언어조합”??????? 바울 사도께서 갈라디아서 5장 6절에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말씀하셨건만, 조나단 에드워즈 저격수는 예장 합동을 욕 먹이는 꼴뚜기파 목사들처럼 성경 지식과 신학 지식이 짧기에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은 “불가능한 언어조합”이라며 바울 사도께 대적하고 있다.
“언어도단”??????? 요한 사도께서는 “거룩한 믿음”(유 1:20)의 씨인 하나님의 씨를 주입받아 위로부터 태어난 중생자, 존재의 변화를 겪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를 두고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 3:9) 하시면서도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8~9)라고 하셨음에도, Wolf이철처럼 성경과 신학 지식이 짧은 나머지 사도 요한께 “언어도단”이라며 대적하는 짓, 이단이나 할 짓거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 지식과 신학 지식이 짧은 자기 주제를 모른 채 이단몰이 돈키호테 칼을 들고 좌충우돌, 하는 짓이 예장 합동 꼴뚜기파 목사들과 똑같다.
중생이란 ‘외면(외부)의 일로서 신분의 변화’가 아닌 ‘죄인(죽은 영혼)의 내면(내부)에서 일어나는 일로서 의롭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의롭고 거룩한 자녀로 태어나는 존재의 변화’를 뜻한다. 그리고 ‘칭의’는 존재의 변화로 하나님 자녀로 태어나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며 회심(믿음+회개: 변개變改)한 그를 하나님의 법정에서 죄인이 아닌 의인으로, 사탄 나라에 있다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하나님 나라의 백성 일원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음ㅡ조직신학 용어로는 ‘양자 삼으심’ㅡ을 선포하는 ‘법정 용어’다. 즉, ‘칭의’는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로서 신분의 변화’를 뜻하는 용어다. 예수님과 바울 사도 시대에 로마인이 아들을 낳았을 때 존재의 면에서는 그 아들이 태어나자마자 그 아들은 자기 아들이지만, 그 아들이 성인이 된 뒤에야 여러 증인 앞에서 자기 아들로 선포함으로써 그 아들이 자신의 유산을 법으로 상속받는 신분을 얻고 로마제국 일원으로서 신분을 얻었음을 뜻하는 의식을 치렀던 것과 같다. 즉, 로마제국이라는 외부 세계에서 ‘신분의 변화’를 갖게 되는 로마제국의 의식을 치른 뒤 그 아들 내부 세계에서 ‘존재의 변화’를 갖게 되는 것이 아니다. 바꿔 말하면, 존재의 변화(중생)가 신분의 변화(칭의)를 앞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이 회심에 선행하고, 확정성화로서 중생이 칭의에 선행하는 것이다.
덧말: 요한일서 3장 9절과 1장 8절~9절은 칭의 이후 우리 상태, 점진성화의 길을 걷는 우리 상태이기도 하다.
첫댓글 저에 관한 글이군요
발췌 잘 하셨네요.
감사합니다.
하하
일단 '확정성화=중생'이라는 사계 님의 생각부터 고치셔야 할 듯합니다.
존 머레이, 안토니 후크마 목사님과 존 머레이 목사님 직제자 존 프레임 목사님 텍스트를 적어 설명해 드렸지만, 중생은 죽은 죄인 내면을 변화케 하는 일로서 곧 확정성화의 씨이자 점진성화의 씨인 하나님의 씨(믿음의 씨)를 죽은 죄인에게 심어(주입해) 살리시는 하나님만의 단독 사역입니다. 그리고 칭의는 중생자 외면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의義(거룩성)의 주입으로서 확정성화’를 조나단 에드워즈 저격수처럼 칭의 뒤에 둬 버리면, 어떤 신학으로 귀결하게 됩니까?
@四季 朴埰同 그릇된 의견을 그릇된 의견으로 바로잡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저는 아직 어디서도 사계 님과 같은 의견을 본 적이 없습니다. 사계 님도 그것을 입증한 적이 없고요. 그런데도 그릇된 의견 하나 바로잡자고, 아직 의심스러운 본인의 의견을 계속 내세우시면 되겠습니까?
염 목사님 의견이 중생을 과소평가하는 위험에 빠지게 된다면, 사계 님의 의견은 반대로 중생을 과대평가하는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밑에 올리신 머레이 목사님의 글을 '중생 때 완전한 거룩함에 이른다'고 오독하신 것 벌써 잊으셨습니까?
@닉네임 “밑에 올리신 머레이 목사님의 글을 '중생 때 완전한 거룩함에 이른다'고 오독하신 것 벌써 잊으셨습니까?” 하셨는데, 오독한 제 텍스트 적어 주십시오.
@四季 朴埰同 https://cafe.daum.net/reformedcafe/jY3M/3
@닉네임 제가 오독한 텍스트를 적어 달라 부탁했는데, 닉네임 님 해석만 있고, 제가 오독한 텍스트는 없네요.
《바울은 그리스도를 우리의 거룩함이라고 부른다. 바울은 우리 곧 본성이 불의한 우리가 그분 성령聖靈으로 거룩하게 거듭나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됐다고 말하고 있다.》 존 칼빈 <고린도전서 1장 30절 주석>에서.
닉네임 님, 칼빈 선생님께서는 “거룩하게 거듭”남을 조나단 에드워즈 저격수처럼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된 뒤로 두고 계십니까? 즉, 칭의 뒤로 두고 계십니까? 닉네임 님은 “거룩하게 거듭나서”라는 칼빈 선생님 말씀에서 ‘확정(결정)성화’를 독해 못 하십니까?
@닉네임 《(3) 중생과 성화의 관계: 어떤 의미에서 볼 때 이 두 가지는 동일하다. 앞으로 보겠지만, 성화는 단회(definitive)적이다. 단회(확정) 성화는 한순간에 일어난다. 어떤 특정한 한순간에 우리가 죄에 대해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킴을 받게 된다는 뜻이다. 물론, 죄 없는 완전한 상태로 살 수 있게 됐다는 뜻은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죄의 영역과는 철저한 결별을 해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됐다는 뜻이다. 이 같은 의미로 성화를 이해할 경우 중생과 성화는 동일하다.》 ‘안토니 후크마 {개혁주의 구원론} 류호준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1)’ 177쪽~178쪽.
닉네임 님, “저는 아직 어디서도 사계 님과 같은 의견을 본 적이 없습니다.” 하셨습니다. “이 같은 의미로 성화를 이해할 경우 중생과 성화는 동일하다.”는 안토니 후크마 목사님 글에서 “동일”은 ‘=’가 아닌 ‘≠’로 적어야 합니까?
@닉네임 《바울이 특히 강조하고 있는 바는 사람이 복음의 유효한 소명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에 죄와 죄의 세력과 단번으로 결정적 단절이 생긴다는 것이다.》 ‘존 머레이 {성경과 기독교 윤리} 김남식 역 (서울: 도서출판 엠마오, 1990)’에서.
닉네임 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0장 유효한 부르심]은 ‘중생’장임을 잘 아실 것입니다, 위 글에서 존 머레이 목사님께서는 “죄와 죄의 세력과 단번으로 결정적 단절”로서 확정(결정)성화를 조나단 에드워즈 저격수처럼 칭의 뒤에 두십니까?
@닉네임 《결정성화는 우리를 죄의 영역에서 하나님 거룩하심의 영역으로, 사탄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기시는 사건으로, 유효한 부르심 및 중생과 동시에 일어나는 단회 사건이다.(히 9:13, 10:10, 13:12) 이 시점에서 우리 각자는 하나님의 백성에 합류한다. …(중략)… 결정성화(물론, 중생과 중복하는)는 우리에게 마음과 의지와 애정에 대한 기본적인 새로운 전환을 제공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욕구를 가진다.》 ‘존 프레임 {조직신학}에서.
닉네임 님, “결정성화는 …(중략)… 유효한 부르심 및 중생과 동시에 일어나는 단회 사건이다.”는 존 프레임 목사님 설명에서 “동시”를 ‘=’가 아닌 ‘≠’로 표시해 조나단 에드워즈 저격수처럼 확정(결정)성화를 칭의 뒤로 둬야 합니까?
@四季 朴埰同 머레이 목사님의 "완전하고"를 "확정성화"로 읽으신 것이 오독입니다. 또 죄인이며 의인이라는 말을 오해한 글도 쓰셨습니다. 굳이 이렇게 딱 집어서 말씀드려야 합니까? 그리고 사계 님도 여전히 본인의 그릇된 해석만 계속 주장하실 뿐, 제 의문에 대한 답은 하나도 주지 않고 계십니다. 위 글은 이미 제가 제 두 비평글에서 다 다룬 것이라 굳이 또 답을 할 까닭이 없습니다. 제 글을 이해하셔야 논의의 진전이 있을 터인데, 언제까지 같은 말만 반복하실 것입니까?
@닉네임 저는 “중생에서 주입된 의”를 ‘확정성화의 씨’로 생각합니다. 또한 ‘확정성화의 씨’로서 “중생에서 주입된 의”가 완전한 까닭은, 비록 이생의 점진성화 길에서 넘어지는 불완전함을 드러내는 중생자이긴 하지만, ‘저생의 영화榮化’를 담보한 의(씨)이기 때문에 ‘완전한 의’라고 생각합니다. 제 이 생각이 그릇됐습니까?
또한 ‘중생이 낳은 존재의 면’에서나 ‘칭의가 낳은 신분의 면’에서나 완전한 의인,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순종으로 획득하신 완전한 의’로 거룩하게 태어나 존재의 면에서 의인이 된 중생자는 완전성화나 영화를 향해 가는 점진성화 길에 넘어지기도 하기에 죄인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죄인을 위해 높이 되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우편 보좌에서 여전히 중보사역을 감당하고 계십니다.
아래는 닉네임 님이 제가 오독했다고 주장하신 제 텍스트입니다.
《※) 중생에서 주입된 의는 “완전하고” “이생에서 완전하지 않다.”는 존 머레이 목사님 말씀을 논리모순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완전하고”는 ‘확정성화’(요일 3:9)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생에서 완전하지 않다.”는 ‘점진성화’(요일 2:1)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게 오독입니까?
@四季 朴埰同 '저생의 영화를 담보한 의(씨)라서 완전한 의'라는 말은 위험한 말로 보입니다. 마치 '중생에서 주입된 의'가 저생의 영화를 담보해 준다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사계 님도 잘 아시다시피, 구원을 담보해 주는 의는 그리스도의 의뿐입니다. '중생에서 주입된 의'가 영화를 담보해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 신학자는 칭의 전에 거룩함(이 신학자는 선함이나 아름다움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이 있을지라도, 그것이 거룩하다고 받아들여지는 것은 칭의 이후라고 말합니다. 인용합니다.
"선함이나 사랑스러움은 본질의 순서상 칭의에 앞서지 않는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 일을 해 나가시는 순서와 방법에서 선함이나 사랑스러움이 칭의에 앞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사람 안에 실제로, 그리고 영적으로 선한 것, 본질의 순서에서 칭의에 앞서는 것이 있다. 바로 믿음이다. 그러나 의롭다 하심을 받고 나기까지는 아무것도 선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믿음조차도 본질의 순서상 신자 안에 있는 어떤 선함이나 사랑스러움과 마찬가지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나서야 받아들여진다."
@닉네임 “중생에서 주입된 의”는 무엇입니까? 제가 위 댓글에 쓴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순종으로 획득하신 완전한 의’》 아닙니까!
@四季 朴埰同 그리고 "중생이 낳은 존재의 면"에서는 절대로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오독이라 말씀드린 것입니다. 여기서 사계 님이 자꾸 혼동하시는 거 같은데, 중생은 주관적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머레이 목사님은 "중생에서 주입된 의義는 결코 이생에서 완전하지 않다"고 못 박아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도대체 뭐가 완전하다는 말입니까? 완전한 의인이 죄를 지을 수 있습니까? 사계 님이 말씀하시는 완전은 무엇입니까? 영화에 이르러야 완전해진다면, 어떻게 벌써 완전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어느 신학자가 중생이 완전하다고 표현했습니까? 이제 그만 혼동하실 때도 되었습니다.
@닉네임 “주입된 의義는 그것이 비록 완전하고”라는 존 머레이 목사님 말씀은 제해 버리십니까!
@四季 朴埰同 제한 적 없습니다. 그 글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는 제 첫 번째 비평글에 썼습니다. 머레이 목사님 글에는 모순이 없다는 걸 충분히 밝혔습니다. 사계 님이 이해를 못하고 계실 뿐입니다. 그래서 논의의 진전이 없는 것이구요.
소득없는 논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