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1년) 의료계 신자들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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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의약업에 종사했던 신자들을 정리해 보면 [표1]과 같다.
[표1]에서 알 수 있듯이, 18세기 후반 의약업에 종사한 신자는 14명이 찾아진다. 이 중 본인이 직접 약국을 운영한 사람은 10명(손경윤, 손경욱, 손인원, 손경무, 현계흠, 정인혁, 최필공, 최필제, 옥천희, 윤지헌))이며, 의원 집안 출신이 3명(최창현, 김종교, 허속)이다. 그리고 이중배는 양반의 서자로 의술을 익힌 자였다. 14명 중 윤지헌은 양반이었고, 이중배는 양반의 서자였으며, 옥천희는 신분을 알 수 없다. 그리고 나머지 11명은 모두 의원 집안 출신이라는 점에서 중인 계층이라고 생각된다.
약국을 경영하던 10명 중 7명은 혈연과 지인 관계로 얽혀 있었다. 즉 손경욱과 손경윤은 형제이며, 손경무는 이들의 사촌이다. 그리고 현계흠은 손경무의 장인이었다. 따라서 손경욱, 손경윤, 손경무, 현계흠은 같은 집안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최필공과 최필제는 사촌 형제이며, 정인혁은 최필공의 5촌 고모의 아들이다. 그러므로 이 3명도 혈연관계에 있었다. 아울러 손경윤이 1790년에 최필공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것으로 보아, 최필공과 손경윤은 일찍부터 알던 사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당시 서울에서 약국을 운영하던 7명은 혈연과 지인 관계를 통해 친교를 맺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의업이 가업으로 전해지고, 같은 직업을 지닌 사람들 사이에 교류가 있었으며, 그러한 관계가 전교로 이어졌다는 것을 말해준다.
[표1]의 14명 중에 최창현은 조선 천주교회의 총회장이었다. 당시 부친인 최용운이 약국을 운영하였고, 최창현은 아버지의 약국 일을 도왔다고 한다. 최창현은 1784년 이벽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했으며, 1786년에는 평신도 신부로 활동했다. 그리고 1791년 이후에는 교회를 이끄는 지도자로 활동하며 주문모 신부의 영입을 주도했다. 그 결과 1795년에 입국한 주문모 신부는 그를 총회장에 임명하여 한국 교회의 일을 총괄하도록 했다.)
최필공은 1790년에 입교했고, 1791년에 체포되었다. 당시 함께 체포된 동료들은 대부분 배교하고 석방되었지만, 최필공만은 신앙을 고수했다. 그러자 정조는 어떻게 해서든지 최필공을 배교시키고자 했고, 결국 성공했다. 그런 다음 최필공을 평안도 심약(審藥)으로 임명하고 결혼까지 시켜주었다. 당시 정조가 최필공의 배교에 공을 들인 것은, 그만큼 최필공의 신앙이 강하고, 교회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최필공과 같은 인물을 배교시키면, 신자들에게 본보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결과였다.)
손경윤은 1790년에 최필공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그는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이후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큰 집을 매입한 후 바깥채는 술집으로 꾸미고, 안채는 교우들의 모임 장소로 삼아, 신자들이 안전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리고 틈틈이 교리서를 베껴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현계흠은 명도회의 회원이자, 그 하부 조직인 육회(六會)의 책임자였다. 명도회는 주문모 신부가 조직한 평신도 단체로, 당시 한국 교회는 명도회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명도회는 하부 조직으로 여섯 곳의 모임[六會]이 있었는데, 그 모임은 황사영 집, 김여행 집, 홍필주 집, 홍익만 집, 이름을 알 수 없는 집, 그리고 현계흠 집에서 이루어졌다.29) 따라서 현계흠은 18세기 말 한국 교회의 핵심 인사 중의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다.
손인원도 명도회의 회원이었다. 황사영에 따르면 손인원은 자신이 이끄는 육회 모임의 구성원이었다.30) 그리고 평안도 선천 출신인 옥천희는 교회의 밀사로 활약했다. 따라서 손인원과 옥천희도 당시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18세기 말 의약업에 종사하던 신자들은 총회장, 회장, 명도회 하부 조직 책임자, 명도회 회원, 교회 밀사 등으로 교회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교리를 연구한 후 신자들에게 가르쳤고 신자들의 첨례 모임을 주관했으며,) 외교인들을 교회로 이끄는 활동을 하거나, 북경 교회와의 연락을 맡음으로써 교회의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최필제는 최필공의 사촌 동생이며, 1790년 최필공과 함께 입교하였다. 그는 약국을 운영했는데, 그가 파는 약은 값이 싸고 약재가 좋아 모두가 믿었다고 한다.) 당시 약국에서는 약재의 품질을 속이는 사기가 성행하여 좋은 약재를 속지 않고 사는 일이 중요했다. 그리하여 정약용도 ‘소합원(蘇合元)과 같은 약재는 재료가 희귀하여 약국에서 만들어 주는 것은 대개 가짜이므로 집에서 직접 만드는 것이 가장 좋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필제는 싼 값에 좋은 약을 팔았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신망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최필제는 신자들에게만 약을 판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그의 행동은 외교인들에게 좋은 표양으로 남아 선교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싼 값에 좋은 약을 파는 것은 최필제에 국한된 행동은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중배의 치료 활동을 통해서도 당시 의원 신자들의 모습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중배는 여주 출신으로 1797년 김건순을 통해 입교하였다. 그리고 1800년 부활대축일 모임 이후에 체포되었다. 그는 여주 감옥에 6개월 넘게 수감되어 있었는데, 그때 병자들을 치료한 기록이 황사영의 〈백서〉에 남아 있다.
[자료1] 마르티노는 본래 의술을 조금 알고 있었으나 그다지 깊지는 못했는데, 옥에 갇힌 후에 혹 와서 병에 대해 묻는 사람이 있으면, 먼저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 그런 다음에 침을 놓고 약을 쓰니, 낫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로부터 그의 명성이 크게 퍼져서 멀고 가까운 곳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옥문 앞이 저자와 같았습니다…
김건순은 일찍이 말하기를, 남들이 혹 마르티노에게 병 고치는 능력을 물으면 자신의 이름이 남의 입에 너무 오르내릴까 하여 열에 여덟 아홉은 고친다고 대답하지만, 실상은 열이면 열, 백이면 백, 효험을 보지 못하는 이가 한 사람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옥리가 의술의 비방서를 보자고 하였으나, 대답하기를 내게는 비방서가 없습니다. 다만 천주를 공경할 뿐이니, 당신도 의술을 배우고자 하거든 마땅히 주님을 믿으라고 하였습니다.)
[자료1]에 의하면, 이중배는 직업적인 의원이라기보다는 개인적으로 의술을 공부하여 병자가 치료를 부탁하면 시료(施療)했던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효험을 보지 못한 이가 없다는 말에서, 이중배는 의술이 매우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치료해 준 사람도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중배의 의료 활동에서 주목되는 점이 있다. 치료하기 전에 천주의 도움을 먼저 구한 것(先求主佑)과 천주를 공경하는 것이 의술의 비방(我無方書 只是恭敬天主)이라고 말한 것이다. 즉 이중배는 신앙을 토대로 의술을 펼쳤고, 의술을 매개로 천주교를 전파하고자 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의학 지식을 활용하여, 육신의 병을 고칠 뿐만 아니라 외교인의 영혼도 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실제로 이중배는 옥중에서도 늘 책을 베끼고 경문을 외웠고, 도리를 강론하며 남들에게 천주교를 믿으라고 권하였다. 그 결과 옥졸 한 사람이 마음을 움직여 천주교를 믿고 따르게 되었다고 한다.
기록상 18세기 말 의약업에 종사하는 신자들은 대부분 약국을 운영하였고, 치료하는 경우는 이중배의 기록이 유일하다. 이것으로 보아 당시 약국을 운영한 신자들은 주로 약을 파는 약종상일 가능성이 컸다. 물론 의원이 약국을 개설하는 경우도 있었고,37) 약종상들도 약간의 의학 지식을 가지고 진료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당시 약국을 운영하던 신자들이 의원이었는지 약종상이었는지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의원이든 약종상이든 환자를 진료하던 신자들은 이중배와 같은 마음과 자세로 병자들을 돌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자 의약인들의 표양은 이 시기에 훌륭한 선교 방법의 하나로 기능했다고 생각한다.
이상에서 살폈듯이, 18세기 말 의약업에 종사하던 신자들은 당시 교회를 이끈 지도급 신자였고, 신앙을 바탕으로 의료 활동을 펼친 의료 선교사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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