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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12:13-25
찬송가 325장 ‘예수가 함께 계시니’
12장은 11장 소발의 첫 번째 발언에 대한 욥의 대답입니다. 엘리바스와 빌닷의 발언 때에도 대답을 했었지만 이번에는 가장 길게 대답하여 12장에서 14장에 걸쳐 욥은 대답합니다. 소발을 마지막으로 3명의 첫 번째 발언이 모두 끝났기 때문에, 친구 3명의 속내를 처음 들은 상태이기도 합니다. 욥은 3명에게 모두 대답하면서 서로 격양되었으며, 특히 마지막 소발의 발언은 더욱 강경한 발언이었기에 욥도 할 말이 더 많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 전체를 상대로 그들의 의견을 공박하고 하나님께 직접적인 논쟁을 요구합니다. 이 점에서 욥의 그간 행보와는 변화된 새로운 분기점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친구들에 대한 불평 뿐 아니라 13장 이후에는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지혜를 초월한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13-16)
욥은 직전 대답인 9장에서는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12장에서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13-15) 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 있고 계략과 명철도 그에게 속하였나니 그가 헐으신즉 다시 세울 수 없고 사람을 가두신즉 놓아주지 못하느니라 그가 물을 막으신즉 곧 마르고 물을 보내신즉 곧 땅을 뒤집나니
욥은, 지혜는 하나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어떠한 기준에도 제한받지 않으시며 스스로 원하시는 것을 행하실 수 있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이 지혜는 단순히 계획하는 지혜뿐 아니라, 그 계획을 실행하게 하는 힘을 포함하는 지혜입니다. 이론적인 지식을 가리키지 않으며 행동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지혜라고 언급하고 있지만 뒤에 구체적으로 든 사례를 보면 사실 능력에 가깝습니다. 당시 히브리 사상에서 지혜의 의미는, 지적인 부분 뿐 아니라 이를 '실행'하는 것까지 포함하는 것을 말했습니다.
지난 주 목요일, 양화진목요강좌에서 푸른아시아의 오기출 이사님께서 ‘푸른 숲과 더불어 사는 실천’이라는 주제로 강연해주셨습니다. 강연을 들으면서 이사님이 참 지혜롭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식을 얻으려면 공부를 해야하고, 지혜를 얻으려면 관찰을 해야 한다” 라고 말한 매릴린 보스 사번트의 말을 벗삼아, 이사님은 기후위기 해결을 위해 관찰을 하셨습니다. 이미 기후위기와 관련해서는 그분만큼 활동하신 분이 없고 전문가가 없는데도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며 관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국제적으로 이슈가 된 몽골의 사막화를 막기 위해 모인 일본팀과 푸른아시아팀 중에, 인력과 물질지원과 과학적 지식까지 월등하게 우월한 일본팀은 결국 포기하고 몽골을 떠났지만, 이사님은 자신 포함 단 두명이 그 지역 몽골사람들과 살면서 관찰하여 얻은 지혜로, 완전 사막이었던 지역이 5-6년 만에 사방이 푸르른 농장이 되었습니다. 과학적 지식과 이를 뒷받침할 물질 지원까지 든든했던 팀은, 자신들이 다 안다고 생각하고 그 땅과 그 지역주민들을 관찰하지 않고 자신들의 방법으로, 자신들이 이미 다른 곳에서 성공했던 방법으로 진행했지만, 그 지식이 그 지역에서는 통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오기출 이사님은 포기하지 않고 2년간 그곳 주민들과 같이 살면서 그들을 관찰하고 그 지역을 관찰하여, 결국 녹지로 만들 수 있는 해법을 찾습니다. 그리고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결국 그것들을 이뤄냅니다. 이는 그동안의 상식과 틀을 깨고, 새롭게 변화한 환경에 대해 관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관찰 뿐 아니라 이사님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애정을 가지고 '실행'하셨습니다. 그래서 척박한 곳에서 그들과 같이 살았고, 시간이 지나고 여러 번의 실패에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 지역에서 소출되는 농작물로 그 지역사람들은 생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기후위기 전에는 그 땅에서 나는 풀로 가축을 키우며 목축을 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사막화 된 이후에 회복된 땅이 지금은 풀이 아닌, 농작물이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풀도 못 자라던 땅에서 농작물을 낸다는 것이 정말 놀라운 변화이지만, 그 변화 이면에는 사랑의 마음으로 관찰하고 자신의 기존 지식을 버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은 지혜, 그리고 이를 실행한 지혜이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이처럼 지혜는 실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험과 그로 인한 깨달음에 의해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경험은 항상 유한합니다. 아무리 뛰어난 자라고 해도 욥의 말처럼, 오늘 물이 넘치던 곳이 내일 말라 버릴 지 알 수 없습니다. 인간의 경험이 유한한 만큼 인간의 지혜도 유한합니다. 이런 유한한 경험 안에서 자신이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이미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래서 오기출 이사님도 강연에서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익숙함을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익숙함을 버리기만 하고 가만히 있으면 안 되고, 작은 나무 한 그루라도 심는 자에게서 이런 기적이 시작된다고 강연하셨습니다. 이는 비단 기후위기에만 관련된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유한함을 인정하지만, 또한 유한한 채로 한 걸음이라도 가는 것이 지혜가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욥의 상태는, 그동안 누렸던 모든 것을 가져가셨으니, 익숙함은 억지로라도 버려졌지만, 아직까지는 한 그루의 나무를 심을 수 있는 상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인간 지혜의 부질없음과 무용함은 깨달았지만, 아직은 그 좌절감 앞에 멈춰있습니다.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초월적 지혜의 실례(17-21)
(17-20) 모사를 벌거벗겨 끌어 가시며 재판장을 어리석은 자가 되게 하시며 왕들이 맨 것을 풀어 그들의 허리를 동이시며 제사장들을 벌거벗겨 끌어 가시고 권력이 있는 자를 넘어뜨리시며 충성된 사람들의 말을 물리치시며 늙은 자들의 판단을 빼앗으시며
17절 이후를 보면, 마치 하나님의 지혜가 인간 지혜의 교만함을 꺾는 것이 목적인 마냥, 인간의 지혜를 꺾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줍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경외감도 있지만, 자신이 억눌리는 것에 대한 욥의 토로도 섞여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이 아무리 지혜있어도, 사례로 들었던 모사와 재판장처럼 하나님께서 뒤집으시면 여지없이 뒤집히는 인간이며, 지금 자신이 그렇게 된 예로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인간의 모든 노력을 좌절시키는, 부정적인 모습으로 나나 있습니다.
정신의학자이자 호스피스 운동의 창시자인 퀴블러로스는 사별가족의 애도과정을 충격, 분노, 타협, 절망, 수용의 5단계로 보았습니다. 일명 애도의 단계로 유명한 이론입니다. 요즘에는 사별가족 뿐 아니라 큰 상실이 있을 때, 심리적인 단계로 보기도 합니다. 욥도 심리적으로 보면 애도의 과정 중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중 아직은 수용의 단계로 가지 못한 절망 혹은 타협의 단계인 것 같습니다. 애도의 과정이 단계마다 명확하게 분절되어 있다던가,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겪는 과정은 아닙니다. 다만 인간은 상실을 받아들이는데 시간과 과정이 필요하며, 이 과정을 겪는 중에는 결론이나 해답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안된다는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욥도 큰 상실 후에 무엇이든 쏟아내며, 지나가야 할 시간들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쏟아내어야, 그것이 진실이든, 현실이든, 자기자신이든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옳다고 여기는 말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수 있는 확신을 가지지만, 정작 옳다고 여기는 그 말이, 자신의 감정에 치우친 것이기도 한, 연약한 존재입니다. 이럴 때 하는 말은 진실여부와 옳고 그름보다는, 오히려 말을 하는 사람의 마음을 볼 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욥의 친구들은 이런 지혜가 없었습니다.
옳은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옳은 말만, 말 그대로 말만 하는 사람을 지혜롭다 여기지 않습니다. 지혜는 그렇게 현실을 재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는 현실을 살아내는 것이고, 한 순간의 점 같은 것이 아니라 삶으로 죽 이어지는 선 같은 것입니다. 즉, 한 순간으로 재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모사라고 하는 자가, 재판장이라고 하는 자가 어리석게 될 수도 있으며, 반면에 오히려 어리석다 여긴 자가 지혜롭게 여겨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다시 목요강좌 이야기를 하면 오기출 이사님이 기후 관련 사역을 시작하신 90년 대에는 이 일을 하는 이사님을 향해 모두 어리석다 했습니다. 심지어 같이 일을 시작했던 사람들도 이 일에는 비전이 없다며 떠나갔습니다. 그러나 이사님은 이 일의 필요를 아셨고, 긴 시간 이 사역에 매진하셨습니다. 시행착오도 있었고 좌절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그만두고 싶으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인생의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의 사역이 그분에게 큰 지혜가 되었습니다. 삶으로 이어온 지혜입니다. 삶을 통하여, 좌절을 통하여, 지혜를 얻으신 것입니다.
지혜는 한 시점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인생사처럼 엎치락뒤치락 하지만, 내가 그동안 쌓아온 경험치와 지식이 연약한 것임을 인정한다면, 겸손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겸손은 곧 지혜로 드러나게 됩니다. 지혜의 근본은, 많은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겸손에 있음을 알게 해 줍니다. 맞는 말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지혜라는 것입니다.
이를 욥도 알고 있었습니다. 아직 감정적으로 수용하긴 힘들지만, 그래서 분노와 좌절과 우울이 묻어있지만,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아래에 모든 것이 미숙하고 미약할 뿐이라는 것을 욥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절대주권은 인간의 지혜를 어그러뜨리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두움을 밝히는 데도 일을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근거한 오묘한 섭리들(22-25)
(22) 어두운 가운데에서 은밀한 것을 드러내시며 죽음의 그늘을 광명한 데로 나오게 하시며
지금 이 고백은 욥의 상황과 상태를 보면 이질적인 고백입니다. 본인은 지금 어두움 가운데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그늘 중에 있습니다. 이런 욥에게 나오기 힘든 고백입니다. 이전의 인간 지혜에 대한 언급은 부정적이고 절망이 가득한 말이었는데, 22절에서는 어두움에서 드러남을 언급하고, 죽음에서 빛을 언급합니다. 마치 긴 어두움 가운데에서 꿈틀하는 느낌입니다. “그래, 나는 어두움 가운데 있지만, 분명 빛이 있을거야. 그리고 하나님은 빛을 주기도 하시는 분이야.” 라는 욥의 약간의 희망이나 소망을 보았다면 과장된 생각이겠습니까? 그러나 보통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깊은 수렁에 한 없이 파고 들다가도 한 번씩, 그래도 소망의 빛이 찰나에 반짝 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반짝! 하지만 이 짧은 소망은, 아직 끝나지 않은 욥의 좌절과 분노에 금방 자취를 감춰버립니다. 마치 깜깜한 방에서 전기 스파크가 한 번 튀기듯이.
그러나 이는 욥의 좌절과 어두움에도 불구하고, 욥이 아직 하나님과 빛에 대한 소망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혹시 끝없는 어두운 터널을 걷는 것 같은 분이 있습니까? 혹은 내 주변에 그런 분이 있습니까? 너무나 절망적이어 보이는 그 순간에도, 스파크는 튈 수 있습니다. 물론 아직 거쳐야 하는 절망과 분노의 시간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하지만 또한 올라갈 길도 있음을, 우리는 그 어떤 절망 가운데에서도 잊으면 안 됩니다. 우리의 인생은 선입니다. 계속됩니다. 지혜도 선입니다. 계속됩니다. 그리고 절망은 언젠간 끝이 납니다.
(23-25) 민족들을 커지게도 하시고 다시 멸하기도 하시며 민족들을 널리 퍼지게도 하시고 다시 끌려가게도 하시며 만민의 우두머리들의 총명을 빼앗으시고 그들을 길 없는 거친 들에서 방황하게 하시며 빛 없이 캄캄한 데를 더듬게 하시며 취한 사람 같이 비틀거리게 하시느니라
욥은 한 사람의 인생 뿐 아니라 더 크게는 공동체, 사회, 나라도 마찬가지임을 이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일명 지혜롭다 하는 사람의 지혜 뿐 아니라 민족과 우두머리들을 멸하기도 하시고, 총명을 빼앗기도 하십니다. 22절에서 광명한 데로 나오게 하신 것과는 대조적으로, 25절에서는 빛 없이 캄캄한 데를 더듬게 하십니다. 그리고 취한 사람 같이 비틀거리게 하십니다. 취한 사람 같다는 것은 행동도 비틀거리지만, 마치 술에 취한 것처럼 정신이 없습니다. 알코올이 사고를 흐리게 하는 것처럼, 정신이 없어서 비틀거립니다. 이들이 만민의 우두머리라는 자입니다. 우두머리가 되기까지는 분명 많은 사람들보다 더 뛰어남이 있기 때문이었겠지만, 그들은 취한 사람처럼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이며, 인간 공동체의 한계입니다.
이렇듯 욥은 소발이 주장한 하나님의 지혜에 대응해 그 이상을 말하면서, 하나님의 지혜가 어떻게 인간 사회 속에서 부정적으로 행사되는지를 암울하게 제시합니다. 자신을 비롯한 인간에 대한 무기력함과 무가치함이 욥의 부정적 논조에 배어 있습니다.
다시 한번 앞서 언급한 애도의 과정을 보자면, 욥은 이 시기를 지나야 합니다. 쏟아져나오는 부정적 언사와 분노와 무기력함을 쏟아내야 합니다. 이 순간만을 누가 본다면 욥을 단순히 하나님께 반항하는 악한 인사로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인생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그렇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다행인 것은, 이 욥의 상태가 ‘회피’보다는 낫다는 것입니다. 회피하면 절대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적당히 하나님께 경배하고, 적당히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피하면, 결코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은, 이 큰 상실로 인해 저 밑바닥에 있는 진짜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밑바닥에 있는 진짜 나와 이제는 만나러 가십시다. 하나님께서는 분노하는 욥도 결코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온갖 좌절감과 어두움과 부정적인 생각이 저희를 헤집어 놓을 때, 하나님은 판단만 하시고 저 멀리 계신 것 같을 때, 저 자신 마저도 스스로를 부정하고 싶을 때, 정작 하나님께서는 부정하고 있는 저와 함께 하고 계신 것을 오늘 말씀으로 들었습니다. 때로 내가 느끼지 못해도 이미 듣고 계시는 하나님을 향해 그것이 분노든, 슬픔이든, 좌절이든 모두 쏟아놓을 수 있는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 그런 저희의 진짜 모습이,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기다리고 계신 모습인 줄 믿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내가 생각하는 지혜는 무엇인가요? 주변에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떠 올리며 지혜에 대해 묵상해 봅시다.
2.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분야가 있는지, 왜 그 부분에서 내 유한함을 깨닫지 못했는지 돌아봅시다.
3. 애도의 과정 중에 있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그를 어떻게 대하는 것이 좋을 지 생각해 봅시다.
4. 나 스스로에게서 부정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 그 부분을 하나님께 맡기는 시간을 가져 봅시다.
(작성자: 윤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