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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강해(61)
누가 큰 자인가?
(2022.07.14 목)
누가복음 9:46-48 (마 18:1-5, 막9:33-37)
<두 번째 수난 예고>
변화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은 산 아래서 기다리던 제자들이
고치지 못했던 귀신들린 아이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행하지 못한 제자들을 향해....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에게 참으리요”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주님의 답답하고 조급한 마음이 느껴집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하시려....
두 번째 수난 예고를 하셨습니다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
첫 번째 수난예고와 비교하여 짧은 문장이지만,
그 의미는 정확합니다. 자신의 죽음을 정확하게 예고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제자들의 반응은
첫 번째 예고 때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여전히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았고(“이 말씀을 알지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아마도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정치적인 메시아’에 대한 고정관념이 너무나 확고하여,.....
그 기대와 어긋나는 모든 말에는
귀를 닫아 두었던 것입니다.
선입관이나 고정관념을 포기한다는 것은
이렇게 어려운 일입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왔다고 하더라도......
내 생각을 내려놓고 주님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 고집을 내려놓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지 않고......
듣더라도 알아듣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변론 – 누가 크냐>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 일이 있고 난 후에도
제자들의 관심이 전혀 변하지 않았음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제자들 중에 변론(논쟁)이 일어났습니다.
46절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논쟁의 주제는 “누가 크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변론이 언제 일어났는지가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내려오신 직후, 그러니까
예수님이 두 번째 수난예고를 하신 직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마가복음 9장에서는 이 일이 언제 있었는지
더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막9:33-34>
33절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34절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예, 변화산에서 가버나움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제자들 사이에서 “누가 크냐”는 변론이 있었던 것입니다.
‘정치적인 메시아’에 대한 그들의 고정관념이
얼마나 확고한지 잘 보여줍니다.
장차 주님께서 로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시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상을 다스리게 될 때
“누가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누가 더 크냐?”..... 이 해묵은 논쟁은 .....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 역사와 교회사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되어 왔습니다.
개인은 물론이고..., 나라와 나라 사이에...,
기업과 기업 간에...., 학교와 학교 사이에.....
심지어는 교회와 교회 사이에서도 ‘누가 더 크냐?’는
언제까지나 지칠 줄 모르고 등장하는
화두요 초미의 관심사입니다.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도 누가 연봉이 더 높으냐,
누가 빨리 진급을 하느냐하는 경쟁이 존재합니다.
21대 국회의원 회기가 새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반쪽 개원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당만 참석). 그 이유는 상임위 위원장
배분 문제가 합의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 개별 국회의원들 사이의 최대 관심사는
누가 힘 있는 상임위에 들어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인기 있는 ‘국토교통위원회’는 여야를 막론하고
지원자가 너무 많아....
각 당의 지도부가 누구를 넣고 빼야 할지를
가지고 고민이라고 합니다.
지역구의 현안을 해결하는데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비교의식’과 ‘경쟁의식’은 거의 본능에
가깝기에 역사가 존재하는 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건전한 ‘비교의식’과 ‘경쟁의식’은 개인과
단체의 성장에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비교의식’과 ‘경쟁의식’이 성장의
에너지(동기부여)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경쟁의식에 과도하게 매몰되면 반드시
부작용이 나타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늘 우월감에 사로잡히게 한다든가,
아니면 반대로 패배의식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한 사람의 인격을 파탄으로 끌고 갈 수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자신이 우위에 있다는 것이 확인되면,
그것을 불필요하게 드러내고 싶어 하고,
그 우위를 확인하려 든다는 점입니다.
천박한 ‘갑질 문화’도 거기서 출발한다고 봅니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얼마 전에
서울 강북구의 한 아파트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은
온 국민을 분노케 하였습니다. 아파트 경비원이
주차관리를 하느라 이중 주차되었던 입주민의 차를 밀었는데,
그 순간 그 차주에 의해 폭행을 당하고,
이후 지속적으로 괴롭힘을 당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입니다. 그 입주민이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자신이 경비원에 비해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은 것입니다.
그는 경찰의 조사를 받게 되었지만 끝내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성도님들은 어떻습니까? “누가 크냐”는
변론으로부터 자유로우십니까?
식당에서 서빙 하는 종업원이나 상점의 아르바이트생....
그리고 외국인 노동자들 모두 차별 없이 존중해야 할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시고, 인격적으로 대하십니까?
우리 성도들은 사람을 대할 때, 어떤 색안경도 끼지 말고,
그를 존중하고 인격적인 자세로 대해야 할 것입니다.
<변함없는 제자들의 관심>
예수님의 두 차례의 수난 예고에도 제자들은
이러한 세속의 관심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이 때 뿐 아니라, 이후에도 제자들의 이러한
“누가 크냐”하는 관심은 계속되었습니다.
마20장에는 ‘어머니의 치맛바람’까지 등장합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야고보와 요한’이 직접 구함 – 막10:35-45).
<마20:20-28>
20절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21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22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23절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24절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25절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절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절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와 예수님께 청탁을 합니다.
주님께서 다스리는 나라가 완성되면
자신의 아들들에게 특별한 자리를 배려해 달라는
부탁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다”고 대답하자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고 대답하십니다.
이 말은 정답입니다. 예수님은 곧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실 것이기에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실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의 충성을 보시고 장차
하나님께서 주실 것입니다.
문제는 이 어머니의 청탁이 공동체에
갈등을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다른 제자들이 듣고 이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겼다”는 사실입니다.
제자들 사이에 ‘자리 싸움’으로 인한 갈등이
표출된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다 불러 모으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삶의 자세,
곧 ‘제자도’를 가르치십니다<26절b-27절>
26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절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그리고 예수님의 오신 목적을 분명히 강조하셨습니다.
28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과정에서 또 한 번의 수난 예고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가야할 ‘십자가의 길’을
내다보시면서 하루하루를 긴장 속에서 보내시는데,
제자들은 자나 깨나 “누가 크냐”는 변론만을
주고받을 뿐이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을 보시면서 주님께서
얼마나 답답하셨을까요?
<어린 아이를 세우신 예수님>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확인해 보겠습니다<47-48절>
47절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48절 그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
예수님은 알아듣기 쉽게 한 어린 아이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셔서 실물교육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내 이름으로”입니다.
사실 그 시대의 가장 약자인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영접’이란 말은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약한 자를 존귀함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물든 당시의
사람들에게 낯선 개념입니다.
오직 “주님의 이름으로”만 가능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상식적이지 않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서만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행동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아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영접하는 거룩한 행위인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원리
하나를 배웁니다.
큰 자가 되는 비결은 ‘내세움’으로서가 아니라
‘받아들임’으로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받아들임’으로서가 아니라 ‘내세움’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라고 가르칩니다.
자신이 가진 힘을 드러냄으로서 큰 자가 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이 추구하는 방식을
거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자기를) 내세울 때가 아니라.....
(작은 자를 겸손하게) 받아들일 때에
큰 사람이 된다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수 년 전에 우리 지방의 목사님들과 더불어
국내 성지순례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전라북도 김제에 있는 ‘금산교회’를
방문하였습니다. 이 교회가 유명한 것은 한국에서
유일하게 'ㄱ'자로 된 예배당을 보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출입하는 문이 달랐고, 예배당 안에서도
혹시 서로를 쳐다보지 못하게 커튼이 쳐져 있었습니다.
강대상은 남자들 쪽으로 향하여 있었고
여자 분들은 목사님의 옆모습만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에는 우리 한국의 초대교회의
가슴 뭉클한 신앙의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1895년 미국의 젊은 선교사 르위스 B. 테이트(Lewis B. Tate)가
말을 타고 이곳 금산리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하룻밤을 머물기로 한 선교사는
조덕삼이라고 사람의 집에서 기거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는 그 일대의 가장 큰 지주요,
금광으로 큰 부자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유교를 믿는 보수적인 집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조덕삼에게 테이트 선교사가 예수를
전하자 놀랍게도 조덕삼이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의 사랑채에서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현재 보존되어 있는 김제교회는 1908년
조덕삼이 사재를 털어 지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집의 하인 중에 마구간을 관리하던
청년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이자익입니다.
경남 남해 출신이지만 3살에 아버지를, 6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호구지책으로 걸어서 전라도 김제에 도착하여
조덕삼의 집에서 마부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주인을 따라 예수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이후 금산교회는 교인이 늘자 장로 한 명을
피택하게 됩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조덕삼과 이자익이 경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직 반상(班常)을 따지던
구한말, 주인과 머슴이 경쟁투표를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투표 결과 마부 이자익이 장로로 당선된 것입니다.
교인들 모두 놀라고 당황했습니다.
전혀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성도님들 같았으면 어떻게 행동하셨겠습니까?
그러나 조덕삼은 모든 것을 수용하고 곧바로 교인 앞에
나아가 "이것도 하나님 뜻입니다. 나는 이자익 장로를 모시고
하나님 섬기는 일에 열심히 봉사하겠습니다"고 말했습니다.
그 때 당시는 목회자가 없어 장로가 설교를
맡아했는데, 실제로 이자익이 설교를 하고,....
지주 조덕삼은 마루에 꿇어앉아 설교를 듣곤 했답니다.
집에 와서는 반대로 조덕삼은 주인 자리에서....,
이자익은 마부 일을 하였습니다.
그 뒤 조덕삼도 장로가 되고, 이자익 장로를...
평양신학교에 유학을 보내고 온갖 뒷바라지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김제교회 담임목사로 세웠습니다.
이자익 목사는 장로교에서 총회장을 3번이나
지냈다고 합니다.
이렇게 훌륭한 조덕삼 장로 집안에서 손자인
조세형, 조순형(전 국회의원)이 태어났습니다.
자기 집안의 하인을 영접하였기에(존귀히 받아들였기에)
조덕삼 장로는 진정한 큰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가 된 것입니다. ‘내세움’으로서가
아니라 ‘받아들임’으로서 큰 자로 인정받은 것입니다.
<맺는 말씀>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마땅히
갖추어야 할 제자도’ 하나를 배웠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원리 하나를 배웠습니다.
큰 자가 되는 비결은 ‘내세움’으로서가 아니라
‘받아들임’으로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고정관념과 내가 고수하고 있는
가치를 예수님의 말씀 앞에 무너뜨리시기 바랍니다.
내 생각과 달라도, 예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앞으로도 계속 성도들 간에 서로
"누가 크냐"며 경쟁하기 보다는....
"나 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서로 섬기며 협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라기는 우리 금산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세상에서 큰 자'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큰 자'로 인정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