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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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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제26대 고종, 대한제국 탄생, |
> 대한제국 탄생 을미사변 후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있던 고종은 일본 군대와 친일 세력의 어수선한 틈을 이용해 은밀히 러시아와 내통하고 1896년 2월 러시아 영사관으로 몸을 옮긴다. 고종은 여기에서 친러정권을 수립하여 친일내각의 요인들을 역적으로 규정지으며 단죄하였고 갑오경장 때 실시된 단발령을 철폐하는 한편 의병 해산을 권고하는 조칙을 내렸다. 그 러나 친러내각이 집권하면서 열강에 많은 이권이 넘어가는 등 나라의 위신이 추락하고 권익을 잃어 국권의 침해가 극심해진다. 이에 독립협회를 비롯한 국민들은 국왕의 환궁과 자주선양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이같은 여론에 밀려 고종은 1897년 2월 아관으로 떠난지 1년 만에 환궁하여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에 올라 연호를 '광무'라 하였다.
고종의 위기와 을사조약, 1898년 7월 안경수가 현역, 퇴역 군인들을 매수하여 황제 양위를 계획하다가 실패하였고 또 9월에는 유배되어 있던 김홍륙이 차에 독을 타는 사건이 발생하는 등 고종을 위협하는 일이 연달아 일어났다. 또한 그무렵 독립협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만민공동회가 만 들어져 맹렬하게 자유민권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종은 보부상과 군대의 힘을 빌려 이들을 진압하였다. 1904년 러시아와 일본간에 전쟁이 일어나 일본군의 군사적 압력이 격해지는 가운데 장호익 등이 다시 황제 폐립 음모사건을 일으켰고 러. 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고종에게 군사적 압력을 가하여 제1차 한. 일 협약을 강요했으며 1905년에는 일본과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고 말았다.
고종 퇴위와 헤이그 밀사 사건, 고종은 일본이 설치한 통감부에 의해 외교권이 박탈당하자 대한제국 문제를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할 계획을 세웠다. 특사로 내정 된 사람은 전 의정부참찬 이상설과 전 평리원감사 이준이었다. 이들을 특사로 파견한 고종은 다른 한편으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 게 친서를 보내 이들 특사 활동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영국과 일본의 방해로 고종의 밀사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이 사건 으로 이완용, 송병준 등 친일세력과 일본의 강요에 의해 고종은 이 해 7월 20일 퇴위하게 된다.
조선의 마지막 왕 고종, 고종에 이어 순종이 즉위하긴 하지만 실질적으로 보면 고종이 조선의 마지막 왕이나 다름없다. 그것은 이미 그가 집권하던 시기에 일본에 의한 강제적인 보호조약이 이루어졌고 또한 그가 일본의 강권에 의해 퇴위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경술국치를 보았고 다시 9년을 더 살며 일본의 식민통치를 목격했기 때문이다. 어느나라든 망국의 상 황에서는 많은 사건들이 벌어지게 마련이다. 조선의 멸망 과정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사건들이 발생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불과 1백년도 되지 않았다. 따라서 당시의 상황이 아주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그 사건들은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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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쏠쏠한 재미 좋은글 사랑합시다.
전주향교/鶴田/옮김/한문희총대장 감사합니다.
본래의 마음,자유인 한문희총대장, 백두대간의 전설 자유인 백두대간종주대한문희총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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