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칙 법안 혜초(法眼慧超)-법안스님의 ‘혜초’
“‘혜초가 부처다’ 따위의 가짜 놀음을 하지는 말라”
그렇다고 다른 부처와 다른 혜초가 있다 한다면,
눈이 잘못 봤다고 눈을 파버리는 사람과 같다.
법안선사는 곧바로 시퍼런 칼을 휘둘러 버렸다.
생각을 굴리는 사이 그 칼에 목숨을 잃을 것이다…
법안 문익(法眼文益, 885~958) 선사
‘설봉 의존(雪峰義存)-현사 사비(玄沙師備)-나한 계침(羅漢桂琛)’의 맥을 이었으며,
중국 5가(家) 7종(宗)의 하나인 법안종(法眼宗)의 종조(宗祖)가 된다.
7세에 전위(全偉)선사에게 귀의하여 삭발하고,
월주(越州) 개원사(開元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당시 율종(律宗)의 거장인 희각화상(希覺和尙) 문하에서 율장을 익히고
유학의 책(儒書)도 함께 공부하였다.
그러다가 불법의 심오함을 맛보게 되자
곧바로 장경 혜릉(長慶慧稜)선사를 찾아가 지도를 받았다.
그 후 도반들과 여행을 떠나게 되었는데,
장마로 강을 건널 수 없게 되어 가까이 있는 지장원(地藏院)에 들리게 되었다.
그곳에 주석하고 계시던 계침(桂琛)선사께 인사를 드리니, 선사가 물었다.
“상좌(上座)는 어디로 가시는가?”
“여기저기 행각(行脚)하고 있습니다.”
“행각하는 뜻이 무엇인가?”
“모르겠습니다.”
“모른다고 함이 가장 친절(親切)하구나.”
이에 문익스님이 크게 깨닫고는
수년간 머물며 낱낱이 점검받고는 계침선사의 인가를 받았다.
선사는 참선수행과 교학연구가 둘이 아니라는 선교불이(禪敎不二)를 주장하였다.
74세 되던 해에 목욕재계하고 대중에게 알린 다음 결가부좌로 입적했다.
➲ 본칙 원문
擧 僧問法眼 慧超咨和尙 如何是佛 法眼云 汝是慧超
➲ 본칙
이런 얘기가 있다. 어떤 스님이 법안선사께 여쭈었다.
“혜초가 큰스님께 여쭙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법안선사께서 말씀하셨다.
“자네가 혜초로군.”
➲ 강설
진리 그 자체는 어느 누구도 타인에게 전할 수가 없다.
스스로 깨닫는 방법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령 진리에 대한 얘길 많이 접했다고 하더라도,
직접 깨닫지 못한 경우라면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헤매는 격이다.
그러므로 간접적인 습득으로 완전히 이해하고,
뛰어난 논리를 구사하여 다른 사람들을 꼼짝 못하게 할 수 있는
솜씨를 발휘하는 사람이라도 훌륭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
진리 그 자체는 너무나 크고 넓으며 밝기 때문에,
옛사람이 이르기를 하늘이 덮지 못하고, 땅이 싣지 못하며, 허공이 품을 수 없고,
해와 달이 비출 수 없다고 한 것이다.
그러니 부처의 경지마저도 인정하지 않는 경지에서 홀로 존귀하다고 한다면
비로소 그런대로 봐 줄만은 하리라.
위에서 말한 것과는 달리, 작은 터럭 끝에서 전 우주를 꿰뚫듯
하나의 기연으로 완벽하게 깨달아 깨달음의 지혜가 천지에 가득하며,
모든 장벽이 다 허물어져서 일체에 자유자재하게 되면,
그런 사람은 무엇을 어떻게 하더라도 모두 진리에 딱 들어맞을 것이다.
혜초라는 스님은 선문답에서 가장 빈번하게 오가는 질문을 던졌다.
“저는 혜초라고 합니다. 무엇을 부처라고 합니까?”
이 친구 다 아는 듯 말해두고는 모른다고 실토하는구먼.
그러나 씹지도 않고 통째로 삼키려 하는구나.
법안스님은 상대가 가진 답을 가리켜 보이는 솜씨를 지닌 분이다.
언제나 상대방이 빛을 돌이키게 하는 솜씨를 발휘하신다.
미리 말해 두는데, ‘혜초가 곧 부처다’ 따위의 멍청한 소리를 해선 안 된다.
누구나 머리로 헤아리는 ‘부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가짜다.
‘혜초’라는 법명을 받은 후로 누가 혜초라고 하면 답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혜초도 가짜다. 부처가 없다는 말도 아니고 혜초가 없다는 말도 아니지만,
그러나 “혜초가 부처다” 따위의 가짜 놀음을 하지는 말라.
그렇다고 그 밖에 다른 부처와 다른 혜초가 있다고 한다면,
이 사람은 눈이 잘못 봤다고 눈을 파버리는 사람과 같다.
천하의 영리하다는 이들이 모두 이렇게 구렁텅이에 스스로 들어가 버린다.
법안선사는 숨 돌릴 틈도 두지 않고 바로 시퍼런 칼을 휘둘러 버렸다.
생각을 굴리는 사이 그 칼에 목숨을 잃을 것이다.
만약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눈을 깜박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법안스님의 손에서 칼을 뺏어 휘두를 수 있을 것이다.
그 칼이 본디 법안선사의 칼인가, 혜초의 칼인가?
당신의 진짜 빛은 어느 것인가!
➲ 송 원문
江國春風吹不起 鷓鴣啼在深花裏 三級浪高魚化龍 癡人猶戽夜塘水
➲ 송
강남엔 봄바람 불되 일지 않고,
자고새는 꽃 속에 숨어 우는구나.
➲ 강설
법안선사는 솜씨가 뛰어나다.
봄바람 은근하게 불지만 둔한 놈은 그게 봄바람인지를 모른다.
그래서 봄바람이 불지 않는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바람이야말로 천하에 봄이 가득한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거세게 부는 바람이 봄답게 하는 것이 아니다.
보라! 온 천지에 꽃이 가득하질 않는가!
게다가 봄이라는 것을 다시 알려주는 자고새까지 울고 있다.
그러나 꽃 깊이 몸을 숨겨 버렸구나. 아니면 눈 어둔 놈이라 보질 못하는가?
곧바로 달을 봐야지 손가락에 낀 보석반지에 넋을 잃지 말 것!
아하! 법안선사의 자비가 천지를 풍요롭게 하는구나.
➲ 송
삼단 폭포를 오른 물고기는 용이 되었건만,
어리석은 사람은 여전히 야당의 물만 푸는구나.
삼급랑고어화룡(三級浪高魚化龍) : 중국의 고사에서 인용한 것.
강과 바다의 물고기들이 황하(黃河)를 거슬러 용문산(龍門山)에 모였다가,
그 중 출중한 물고기가 세단계로 된(三級) 폭포를 차례로 타고 올라가 용이 된다는 전설.
흔히 중국에서는 이것을 과거시험에 급제하여 중앙정계에 진출하는 출세에 견주어 말함.
선가(禪家)에서는 깨닫기 전의 어려움을 견주어 인용하기도 함.
➲ 강설
물고기가 비록 삼단 폭포를 뛰어 올라 이윽고 용이 된다지만,
그 모습을 절대로 아무에게나 보여주진 않는다.
물고기가 용이 되는 솜씨만큼이나 뛰어난 안목을 가졌다면 알까?
대개 이미 용이 되어 승천해 버린 줄도 모르고,
그저 고기 잡겠다고 만들어둔 방죽(夜塘)의 물만 부질없이 퍼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비늘이라도 건지면 용의 비늘이라고 할 것인가?
머릿속에 든 것 바로 버릴 것.
용을 낚아챌 정도의 솜씨가 있어야
비로소 법안선사의 사람 살리는 칼끝이 어디를 겨누고 있는지를 볼 것이다.
[불교신문3676호/2021년7월27일자]
송강스님 서울 개화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