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국제문학》 수필 등단
•2020년 《대구문학》 시 등단
•대구수필가협회, 대구수필사랑, 다락헌시인학교 회원
“그래 나의 그림 그것을 위해 나는 목숨을 걸었고 이성까지도 반쯤 파묻었다.”
새벽 1시 30분경 테오는 형의 주머니에서 꺼낸 쪽지를 읽고 있었다. 고흐가 보내는 마지막 편지인 셈이다. 현실의 경박함이 진실에 부닥쳐 오던 새벽, 영혼마저 무너져 내린 고흐는 가혹한 현실에 KO 되고 말았다.
고흐는 파리에 2년 정도를 머물며 230여 점의 그림을 그리는 열정을 보였다. 그런데 왜 갑자기 고흐가 미술 시장이 활발한 파리를 갑자기 떠나고자 했을까.“인간으로서도 참을 수 없는 환쟁이 녀석들을 안 만나기 위해서 남프랑스 어딘가에 틀어박히고 싶다.”
소외된 하층민들의 생활을 터치하던 고흐는 소통되지 않는 관료주의적 예술인들에게 질려버리고 만다. 남프랑스 아를이라는 구멍 속으로 궁지에 몰린 쥐처럼 숨어들었다. 눅눅한 고독 속으로 스며드는 아를의 태양에 매료된 고흐는 테오에게 편지를 썼다.
“예전에는 이런 행운을 누려 본 적이 없다. 천상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한 푸른색과 노란색의 조합은 얼마나 부드럽고 매혹적인지.”
아를은 고흐에게 황금의 색채를 선물로 주었지만 또 하나의 거부할 수 없는 악마의 선물도 기다리고 있었다. 푸른 희망인 듯, 멍든 절망인 듯, 압셍트란 이름의 독한 술이 파란 얼굴로 그를 마주하는 시간이 많았다. 압생트의 산지인 아를에는 결국 고흐에게 절망의 본얼굴을 드러낸 병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를의 강렬한 태양과도 같은 열정으로 노란 컬러에 목숨을 걸었다. 세상을 노랗게밖에 볼 수 없는 고흐는 풍경도, 카페도, 집도, 자신의 영혼까지도 노랗게 칠했다. 알코올 중독과 황시증에 시달리던 그를 나무라는 의사에게 말했다.
“노란 높은음에 도달하기 위해서라오, 올여름 그것에 도달하기 위해 나로서는 스스로를 좀 속일 필요가 있었다오.”
찬란한 노란색을 얻기 위해 여름 내내 취해 있었다는 것이다. 그 와중에도 정신적 지주였던 고갱과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다는 설렘에 젖어 있었다.
그가 매일 해바라기한 고갱처럼 정열적인 태양빛 컬러의 노란 해바라기를 그렸다. 꽃의 선택을 잘한 것인가. 만약 고갱을 기다리며 양귀비꽃을 그렸다면 우리는 지금 노란 양귀비꽃을 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압생트를 마시며 고갱을 반길 해바라기를 지극히 정상적인 노란 컬러로 그려냈다. 하지만 고갱은 술에 취한 고흐가 해바라기를 제대로 그려내지 못하는 그림을 그려 고흐의 그림을 꼬집었다. 노란 높은음에 도달하고 싶었던 고흐를 검푸른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출셋길로 떠나버린 고갱.
“예술에 대한 사랑은 진정한 사랑을 잃게 한다. 그림하고의 악연이 지겨워진다.”
정신분열이 더 심해졌다. 그림을 잊고 창녀인 라셀과 압셍트를 찾던 어느 날 라셀에게 잘린 귀를 쥐여 주는 고흐, 혼절하고 마는 그녀. 스스로 입원을 택한 고흐는 테오에게 편지를 쓰며 창문을 통한 그림에 몰두했다.
힘든 그를 달랠 수 있는 별이 빛나는 밤은 아름다웠다. 병실 창문으로 쓸쓸히 바라보던 밤하늘은 죽음으로 걸어가는 길에서 그렸지만, 어두운 밤하늘과 구름과 별은 두꺼운 붓질의 신비함으로 인해 지금까지 생생히 살아 움직이고 있다.
붓꽃이 신비스러운 빛깔로 피어오르고 있던 어느 보랏빛 어린 밤, 또 하나의 강한 펀치가 그에게 날아왔다. 그렇게도 그를 아끼고 후원하던 동생 테오의 경제적 고갈은 고흐에게 극복할 수 없는 아픈 현실로 다가왔다.
자신의 책임이라는 자책감에 만신창이가 된 몸과 영혼으로 테오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테오에게 편지를 쓰던 고흐는 발작을 일으켜 예견이나 한 듯 까마귀가 날던, 노란 높은음 닮은 황금빛 밀밭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하늘에 별이 유난히 어지러운 빛을 발하던 날, 참담한 현실 앞에 완전히 KO 되고 말았다.
생전에 그림을 단 한 점밖에 팔지 못했던 그는 그렇게 척박한 현실에서 밀려나와 온전히 자유로운 영혼으로 풀려났다. 별을 그리기 위해 몽롱하게 올려다보던 밤하늘로 떠나갔다.
그의 시신은 놀랍게도 한 달 전에 그린 ‘철로 옆을 지나는 마차’인 그림의 길을 지나 언덕 위 묘지로 갔다고 한다. 그의 무덤에서 내려다보면 바로 그 그림 광경이 펼쳐진다고 하니 그는 그림과 라셀과 광기와 고독과 예감과 동거하고 살다 간 셈인가.
살아생전에 늘 별들에게 가까이 갈 수 없음을 안타까워했다. 죽음이 우리를 별까지 데려다주는 수단이라고 말하던 고흐. 묘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슬픔과 불멸의 상징인 사이프러스를 자주 그렸던 이유가 별로 가고 싶어서였단 말인가. 천국으로 가는 사다리처럼 치솟은 사이프러스를 타고 올라가 별에 닿고 싶었던 고흐를 죽음이 고요히 인도해 주었다.
예술 세계인 조각과 음악에 있어서 자신의 그림이 조각이 아니라 음악을 닮아간다고 기뻐했던 고흐, 별을 보면 항상 꿈을 꾼다던 고흐, 그는 별들이 빙글빙글 무도회를 즐기는 몽롱한 그의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경박함이 진실에 부닥치며 무너져 KO 되던 그 새벽, 형의 주머니에서 꺼낸 쪽지를 읽고 있던 테오도 오래지 않은 날에 형이 별과 함께 찬연히 빛나는 밤하늘로 갔다.
“그래, 나의 그림, 그것을 위해 나는 나의 목숨을 걸었고 이성까지도 반쯤 파묻었다. 다시 말하지만, 너는 네게 그저 평범한 화상이 아니었고 항상 소중한 존재였다.”
고흐의 마지막 편지에는 독한 압생트의 향이 묻어 있는 것 같다. 아무리 살아도 언제나 낯설고 어색한 세상, 지독히도 비현실적인 내가 살아가기엔 지독히도 현실적인 이 세상에도 압생트 향이 흘러넘치는 것 같다. 세상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고흐의 예술에 대한 표현처럼 나도 나의 문학이 음악을 닮아가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내가 음악가라면 내 영혼과 똑같았을 슈베르트와 얼마나 많은 가을을 교감했던가.
아, 쇼팽, 발라드 1번, 영화, 더 피아니스트, 독일 장교 앞에서 마지막일지도 모를 피아노를 치던 폴란드 피아니스트의 언 손. 바흐
의 칸타타, 말러와 알비노니의 아다지오, 파가니니 카프리치오소, 비발디, 성모님의 그 아픈 스타바트 마테르, 헨델 하프시코드 모음곡, 카치니와 구노의 아베 마리아, 화성법에 대한 교수의 핀잔에 즐거움 외에 다른 법칙이 없다던 자유로운 영혼의 드뷔시 곡인 베르가마스크, 여인들의 로망, 잘생긴 리스트의 헝가리안 랩소디 2번, 멘델스존의 무언가, 우리 아들의 친부일지도 모르는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 2악장,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라고 묻던 젊은 안소니 홉킨스, 영화를 안개 속으로 몰고 가던 브람스 교향곡 3번 3악장, 들을 때마다 울고 마는 모차르트의 시칠리아노, 아, 유머러스한 하이든 삼촌이 들려주는 교향곡 슬픔과 고별 그리고 밀턴의 실낙원을 엿볼 수 있는, 나의 기도음악인 천지창조. 생상스의 집시풍,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 극적인 미니멀로 나의 불면을 돕고, 영화 어바웃 타임을 다시 보게 만드는 현대 음악가 아르보 페르트, 플루트를 사랑하게 한 도플러의 헝가리 전원환상곡, 시대를 앞서간 현대적 감각의 사티, 피카소, 마티스, 화가들이 드나드는 몽마르트, 그 순교자의 언덕 세탁선에서 놀랍게도 뉴에이지, 현대풍의 그노시엔느를 치던 고독한 남자. 아, 라흐마니노프, 여기는 어디며 어디로 가야 하나요, 고뇌 속에서 주님을 부르짖다 결국 광명으로 나아가던 그의 피아노 협주곡 느린 악장에 흐느끼던 밤.
이 음악가들은 얼마나 삶에 대한 은총으로 나의 에고를 넓혀주었던가. 별처럼이나 많은 음악가들을 별 세듯 다 셀 수 없는 이 밤에 베토벤, 역시나 베토벤인 베토벤, 그 위대한 거장을 붙들고 죽음을 논한다.. 오늘처럼 현실의 경박함이 진실에 부닥쳐 올 때는 성호경을 긋는다. 그리고 고독한 골방에 처박혀 고전 음악을 들으며 고전 서적을 탐독할 때 비로소 난 내 속에서 진짜의 나와 만난다.
매일 장송곡이 울려 퍼지는 이 세상에서 나는 매일 죽음을 생각했고, 매일 죽음과 연결된 단조의 클래식에 빠져들어 그 느린 악장에 위로받으며 경이로운 삶을 연장했다.
매일 오는 죽음을 끌어안지 않고서는 삶도 희미하다. 죽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는 죽음이 와도 꼿꼿하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인식의 불꽃이 튀는 순간 우리 삶의 형태는 또렷해진다. 인식 없는 삶은 길모퉁이 그저 놓인 바윗덩어리에 불과하다.
고흐처럼, 오늘따라 더 낯선 이 현실에 또다시 KO되어버린 내 기분 탓일까, 연거푸 듣던 베토벤 교향곡 영웅과 7번, 두 장송곡 악장에 목이 멘 내 기분 때문일까.
초저녁까지만 해도 심하게 불어대던 바람이 잠시 멈추어주는 이 새벽, 나는 내 자신에게 진지하게 물어본다.
나는 무엇을 위해 목숨을 걸었으며, 무엇을 반쯤 파묻고 살고 있으며, 진실로 진실을 사랑할 수 있는 진실한 자세는 되어 있는지.
고흐가 현실에 부딪혀 KO 되던 그 새벽처럼 내가 빈자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이 새벽, 고흐=나.
고흐와 나, 단둘이 잠을 잊은 채 삶과 죽음을 이야기하며 음악을 듣고 있다. 그는 별이 빛나는 하늘에서, 나는 고독한 대지 위에서.
잦아들었던 바람이 다시 분다. 창틈으로 새어드는 바람이 차다. 하늘가에 너무 오래 나와 앉은 고흐도 볼이 차겠다. 유령의 긴 옷자락에 나뭇잎 쓸려 가는 소리가 스산한 이 새벽 마지막 곡으로 고흐에 대한 부고 음악을 튼다. 고인이 된 고흐에게 맥클린이 전하는 고귀한 추도문인 ‘빈센트’가 낭랑하게 울린다. 이렇게 을씨년스러운 밤엔 고흐에게 이만한 따스한 옷은 없겠다.
고흐에게 위로의 노래를 불러주는 돈 맥클린의 목소리가 나를 그리고 고흐를 따사롭게 감싼다. 순수한 영혼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고흐의 깊고 푸른 눈빛이 별빛에 반사되어 고독한 나의 창을 비춘다.
살아생전 내가 그의 곁에 있었다면 고흐에게 꼭 해주고 싶었던 말을 나 대신 맥클린이 조곤조곤 들려주고 있다. 잠시 악기도 멈추고 진지한 표정으로 고흐에게 또박또박 이야기해 준다.
“하지만 당신에게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겠죠. 빈센트, 이 세상은 당신같이 아름다운 이가 있을 곳이 못 돼요.”
말 없는 별처럼 빤짝, 눈웃음 짓던 고흐도, 고흐가 그린 밤하늘의 별도 졸린 눈을 감더니 몽롱한 꿈속에 들었다. 고흐의 평화로운 안식과 천천히 오는 새벽 여명처럼 내 삶의 형태도 깜깜한 밤하늘의 별처럼 또렷해지기를 주님께 기도드리며 죽음 같은 잠을 청한다.
별이 총총 빛나는 밤 팔레트에 파란색과 회색을 칠하고 한여름날의 밖을 내다봅니다. 내가 있었다면 이런 말을 해줄 수 있었을 텐데, 이 세상은 결코 당신처럼 아름다운 사람을 위해 지어진 곳이 아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