五. 虛空이 곧 法身 - 1
봄이 되면 일체 산천초목이 파릇파릇
생동감으로 가득합니다.
살아있는 온 생명은 잘도 성장하고 발전하는데,
우리는 얼마나 잘 성장하고 발전하고 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장과 발전에는 여러 방법이 있고 길이 있습니다.
특히 불자로써 부처님의 가르침에 입각해,
바람직하게 성장하고 발전하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세상은 하루가 멀다 하고 빠르게 달라지고 있습니다.
좋은 방향으로 발전하든지, 아니면 나쁘게 변질되든지 간에
어떤 입장과 모양으로 계속 변하고 달라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변한다는 것은 진리이기에 붙잡을 수가 없습니다.
마치 해가 뜨면 일분일초도 그냥 있지 않듯,
모든 것은 변합니다.
그 방향이 어디를 향하는지는 다음의 문제입니다.
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가르침 역시 지난 3000천년의 역사를
지나면서 끊임없이 변해왔습니다.
어찌 보면 발전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 옛날 선사스님들이 중국의 선불교를 완전히
개조하여 발전시켰듯, 옛 경전 구절에만 매몰될 것이 아니라
이를 완전히 소화하여 오늘날의 불교로 거듭나도록
경주하여야 합니다.
이는 어떤 커다란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이치가 그렇듯, 매우 자연스럽게 진행될 것 입니다.
---------------------------------------
五. 虛空이 곧 法身 - 2
八萬四千法門(팔만사천법문)은
對八萬四千煩惱(대팔만사천번뇌)니
팔만사천법문은
팔만사천번뇌를 치료하는 것이다.
이 말씀은 경전과 어록을 공부할 때,
인간의 이러저러한 마음의 병을 고치기 위한 것으로 알면
宗旨(종지)를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8만4천의 법문은 인간이 앓고 있는
번뇌의 병ㆍ마음의 병이 8만4천 가지라는 것이며,
이 병을 치료하기 위한 처방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조상을 위하는 마음이 크잖아요.
곳곳에서 薦度齋(천도재)를 지내며,
곳곳의 법당이 영가축원위패로 가득 장엄되어 있어요.
일부 기독교도들로부터 법당이 법을 펴는 곳이 아니라,
귀신만 가득한 곳이라는 비판의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요.
薦度齋나 위패를 모시는 행위를 좋게 이해하면
선조를 위하는 마음이 후손의 큰 도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선조가 세상과의 인연을 다한 지
수십 년이 지났는데 새삼 천도한다고
동쪽으로 갈 사람을 서쪽으로 가게 할 수가 있겠어요?
자기 갈 길은 자기가 닦아 알아서 가는 겁니다.
그렇다면 천도재 등을 왜 하느냐?
8만4천 법문은 8만4천 번뇌의 병을 치유하기
위한 것이라는 원칙에 비추어 생각하면 조상을
위하고자 하는 그 마음을 달래는 것이 천도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천도가 되고 안 되고는
각자 본인이 알아서 할 일이고,
후손이 조상을 위하는 그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천도재라는 겁니다.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을 둔 부모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식이 고3이라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데,
부모로써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대신 공부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대신 시험 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 마음만 갑갑할 뿐이지요.
부모가 대신 공부하고, 대신 시험을 칠 수만 있다면
대부분 그렇게 할 겁니다.
무엇하나 할 수 없기에 답답하고 갑갑해서
죽을 지경인 것이지요.
그래서 답답하고 갑갑한 그 마음을 다스리려고
법당에 가서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겁니다.
관세음보살을 부른다고 공부 못하던 아이가
갑자기 공부 잘하는 것도 아니고,
공부를 하지 않은 학생이
좋은 학교에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것은 이치에도 맞지 않습니다.
부모가 절에 가서 기도하는 것 역시,
8만4천 법문은 8만4천 번뇌의 병을 치유하기 위한 것이라는
원칙에 비추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부모의 아픈 마음, 답답한 마음,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 마음을 대치하는 것입니다.
불교의 모든 가르침은 전부 이것입니다.
어떠한 가르침이든 마음의 병과 아픔,
그리고 답답함을 다스리기 위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