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어디니?
-나 배 놀이터야
-거기가 어딘데?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하교 후 집에 오지 않아 전화하면 아이는 젖소, 다람쥐, 과일 등 놀이터 이름을 댔다. 놀이터를 눈여겨보지 않았던 나는 거기가 몇 동 근처냐고 되묻곤 했다. 그러다 차츰 놀이터 이름에 익숙해졌다. 우리 집 뒤쪽으로는 바람 놀이터가 있었다. 아이는 수시로 자기 방 창밖으로 놀이터를 내려다보고 친구가 보이면 신이 나서 한달음에 내려갔다. 때론 아이 친구들이 우리 집을 향해 “oo아”라며 아이 이름을 부르기도 했다. 놀이터의 아이들 노는 소리가 누군가에게는 소음이기도 하지만 아이는 친구 목소리가 들리면 눈빛을 반짝였다. 놀다가 목이 마르면 우리집으로 우르르 몰려오기도 핬다. 놀이터 가까운 2층은 친구를 사귀기는데 유리했다. 그 덕에 더 많이 놀 수 있었다. 2학년이 되면서 놀이터에 나오는 친구들이 줄었고 3학년이 되자 친구보다는 동생들이 더 많아졌다. 그렇게 아쉽게도 놀이터에서 서서히 은퇴했다.
얼마 전 올림픽 공원에 갔다가 그곳 놀이터에서 신나게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았다. 활기차게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생명을 보니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시선이 아이 주변의 젊은 부모들에게로 옮겨갔다. 대부분은 웃음을 띠며 아이를 지켜보았지만 더러는 별 감정없이 서 있기도 했다. 그 순간 그들이 부러웠다. 아이가 활짝 웃는 그 순간을 생생히 지켜보는 기쁨을 누리는 그들이 부러웠다. 요즘 내가 어딘지 모르게 기운이 가라앉는 건 더 이상 아이의 노는 모습을 볼 수 없어서가 아닐까. 아이가 노는 동안 그걸 지켜보는 내가 더 행복했는지도 모르겠다. 실컷 놀았던 나의 어린 시절이 좋았고, 그걸 아이도 누려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외동인 아이는 나와도 잘 놀았는데 인형 놀이, 역할 놀이, 보드 게임을 했다. 놀이가 항상 즐겁기만 한건 아니었다 보드게임에서 지면 속상해 울기도 했다. 그렇다고 티가나게 져주면 자존심이 상해하니 적절한 선을 맞추느라 조마조마 했다. 그렇게 아이와 소통하며 웃기도 울기도했던 아이의 놀이는 나에게도 밥이었다.
요즘은 아이의 노는 모습을 보기 힘들다. 중학생이 되어 공부만 하기 때문은 아니다. 자신만의 놀이 세계, 즉 어른인 엄마와는 공유하지 않는 또래 문화 속으로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여행을 가서도 나와 눈이 마주치기보다는 핸드폰을 더 많이 본다. 수많은 사진을 찍고 인스타에 업로드를 하고 디엠을 주고 받는데 열중한다. 아이가 여행을 즐기는 방식이다. 집에서는 무슨 통화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깔깔대다가 때론 심각해져서 방문을 잠그고 나오지 않는다. 주말에는 친구들과 약속을 잡아 외출 하는데 뭘 했냐고 물어보면 그냥 놀았다고 답할 뿐 자세히 알려주지 않는다.
양육의 최종목적이 독립이라지만 더는 아이의 노는 모습을 볼 수 없는 요즘 덜 행복한거 같다. 소꿉놀이에 몰입하고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감탄하는 아이를 목격하며 내가 아이에게 행복을 선물한다고 여겼던거 같다. 만족스럽게 놀고 집에 들어온 아이의 표정을 보며 아이가 잘 자라고 있다고 스스로가 괜찮은 부모라고 안심했다. 아이도 나도 단순한 기쁨을 누리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청소년이 된 아이는귀가 시간을 늦춰 달라고 요구하고, 나는 어디서 누굴 만나 무얼 하고 노는지 걱정이 되어 허락할 수가 없다. 쉼이 필요한 아이가 침대에 누워 폰 보는 것 외에 뚜렷한 방법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보고 있으면 한숨이 나온다. 놀다 보니 벌어진 학습 격차에 지레 기가 죽은 건 아닌지도 마음도 쓰인다. 청소년의 놀이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가? 아이의 놀이를 마냥 응원할 수 없는 복잡한 시절을 지나고 있다.
첫댓글 미소샘이 말씀하시는, 아이가 노는 걸 흐뭇하게 지켜보기만 하는 그 때를 제가 지금 살고 있어요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저에게도 미소샘이 말하는 이런 때가 오겠구나 싶어 울컥하며 눈물이 핑 돌았어요 아이들의 놀이가 이렇게 변해가는구나 생생하게 느껴지는 글이었습니다~
명희쌤 그때가 진짜 좋을 때라는... 이런 진부한 말씀 밖에는 드릴 말이 없네요 ㅎㅎㅎㅎㅎ 저도 나이를 먹나봐요.
그때마다 나는 조금 덜 행복하다.
아이의 놀이를 마냥 응원할 수 없는 복잡한 시절을 지나고 있다.
훌쩍 커버린 아이와 엄마의 관계와 거리감에 대해 느껴지는 문장이에요.
그때마다 나는 조금 덜 행복하다
이 문장은 바로 위 문단과 연결되고,
양육의 최종목적이 독립임에도 부터 새로운 문단이 되면 좋지 않을까 깨알 의견을 남겨봅니다~
혜화샘 의견 반영하여 퇴고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내일 봬요
같은 시기를 지나고 있어서 그런지 100%공감가는 글입니다~~
아~~그때가 좋았지!! ㅋㅋ